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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德厚の野望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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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1 회 작성일 24-01-09 04: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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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향은 소주 교외에서 태어났다. 거인 시험을 보려는 아버지와 향반鄕班의 딸인 모친의 슬하에서 자랐다. 불행은 열 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 찾아왔다. 남편의 과거 응시 비용을 대기 위해 무리하여 일감을 맡다가 과로사 한 것이다. 시험도 내팽개치고 방황하던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하여 기루에 들락날락하더니 퇴기 출신의 후처를 맞이하였다.


처첩 간의 고전적 갈등이 그러하듯, 후처는 도도한 서향을 싫어했다. 서향은 창녀 출신인 후처를 내심 경멸했다. 이 둘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처음부터 서향에게 불리했다. 퇴기라고는 하나 30대도 안 된 여자의 속살에 푹 빠진 아버지는 서향을 냉대하더니 내다버린 자식 취급하였다. 자신의 씨가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서향은 어린 나이였지만 모친의 똑 부러진 기질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사서와 산학을 배운 학식을 적극 살려 후처의 전횡을 날카롭게 규탄하거나 풍자했다. 깊은 앙심을 품는 후처는 탕진한 가산을 핑계로 서향의 부친이 이지가 한창 흐리멍덩해진 점을 타 꼬드겼다. 초경을 치르고 난 서향의 몸에 여자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자 악심을 품은 후처는  기생오라비를 시켜 서향을 납치, 기루에 팔아버리도록 한 것이었다.


겁탈 일보 직전에 부용의 변덕으로 무산으로 돌아갔지만.


강남이라고는 하나 새벽의 싸늘한 한기에 서향은 깨어났다. 서향이 눈을 뜬 것은 한 편의 지옥도였다. 좁은 바닥은 끈적끈적한 피로 도배되어 있다. 그리고 비린내와 악취로 머리가 어질했다.


“우욱!”


서향은 허리를 굽혀 토악질을 했다. 급격히 줄어든 위장에서는 신물만 나왔다. 입을 닦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무언가 쥐고 있음을 알았다. 패찰이었다. 그제야 전날의 참상이 꿈이 아님을 깨닫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야 하나...”


잔뜩 갈라진 논바닥과 같은 어조를 흘리던 서향은 패찰을 만지작거렸다. 괴물을 찾아가는 것이 두려웠지만 전날에 남자의 흉물에 비하면 밀리그램 단위로 낫다. 그리고 여기에 남아있다는 살인 관련으로 관아에 끌려갈 것이다. 돌아갈 집도 사라졌겠다. 하오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풍문으로는 주루나 도박장 같은 영업장에 있다고 하는 걸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 우선 씻어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얼마 안남은 기력을 쥐어짜며 서향은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이른 아침이지만 소주 같은 번화가에는 영업하러 나오는 이들도 있으므로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야했다. 하늘이 보호했는지 서향은 거리를 벗어나 근방의 수로에 당도할 때까지 눈에 띄지 않았다.


첨벙!


수로에 하체를 던지고 금세 목까지 담근 서향은 다시 한 번 떨었다. 밤새 식은 찬 물이 전신을 두들긴 것이다. 덜덜 떨며 피와 오물을 최대한 씻어낸 서향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잘끈 깨물고는 밖으로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진 채 맨발로 걷는 서향의 모습은 물귀신이 현세한 것 같아 이른 아침에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찌르는 듯 한 시선들을 무시하고 서향은 두리번거렸다. 새로 지은 티가 역력한 객잔에 점소이가 쓰레기를 버리고 비질을 하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여드름이 가시지 않는 점소이는 흠뻑 젖은 소녀를 대하자 눈을 대굴 굴렸다. 미친년이 아닌가 싶었다.


“저어, 하오문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시나요?”
“하오문이요?


점소이는 소녀의 질문을 그대로 반문했다. 서향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다른 곳을 찾아야하나, 싶었지만 그녀는 탈진 일보 직전이라 기운이 없었다. 뜬 구름처럼 듣던 하오문의 실체는 아는 바도 없었다. 결국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정교하게 상감한 패찰을 보여주었다.


“관계자한테 보여주면 포상이 있을지도 몰라요.”


포상, 이라는 말에 점소이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흠뻑 젖은 것은 미친년이라서가 아니라 뭔가 사연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잠시만 기다립셔~!”


점소이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객잔 주인으로 보애는 임산부처럼 배가 부어오른 메기수염의 중년인을 데리고 나왔다. 서향은 점소이에게 했던 이야기에 약간 살을 붙였다. 중년인은 수염을 꼬더니 안에 들어가 음식과 화로를 내놓도록 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서향은 언 몸을 녹이고 빈속을 천천히 채웠다. 옷을 입은 채로 말리는 동안 졸음과 피로가 겹쳐 앉은 채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 애야?”


퍼뜩 깨어난 서향은 맞은편에 턱을 괴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인을 대하고는 무춤했다. 팔목이 훤히 드러나는 단삼에 팔꿈치 위까지 오는 수갑을 찬 요염한 인상의 미녀였다. 그런 미녀의 곁에서 아까의 메기 인상의 주인이 송구한 낯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올챙이가 포복하는 듯한 인상이었지만, 서향은 보고 웃을 여유가 없었다. 여인은 서향의 요모조모를 살펴보다가 눈을 좁히며 흐응~ 하는 비음을 흘렸다.


“날 왜 찾았지?”
“네?”
“이거.”


여인은 아까 전 까지 서향이 지니고 있던 패찰을 살짝 흔들었다. 서향은 침착하게 눈을 깔고는 들은 바대로 읊었다.


“은공께서 궁녀가 되고 싶다면 하오문으로 찾아가라 해서....”
“하나 정정할 것. 하오문이 아니라 천하문이란다. 개명한지 얼마 안 됐지만 신세를 확실히 질 요량이면 바로 해두렴.”


염미홍은 패찰 끝 고리를 손가락을 끼운 채 까닥 돌렸다.


“이 거 줄 때 다른 말은 없었던?”
“네에...”
“......하여간 누구처럼 같이 종잡을 없어가는 모양이네.”


여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지만, 간밤에 모종의 사태로 대기명령을 받은 처지에 임자가 나타나 후다닥 달려오던 차였다. 바쁘게 뛰어온 자신과 달리 얌전히 있는 서향의 태도에 조금은 떠볼까 하는 마음에 잠자코 있는 서향을 향해 고혹적으로 웃었다.


“소녀는 서향이라 합니다.”


무언으로 대하기는 그래서 먼저 자기소개를 한다.


“아, 난 염미홍이란다. 과분하게도 천하문의 문주를 맡고 있지.”


문주? 라는 말에 서향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잘해도 자신 보다 몇 살 위로 보이진 않는다. 호기심과 경이로 뒤섞인 시선을 즐기던 염미홍의 귓전에 말의 투레질과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는 자리에 일어났다. 잠시 후 백의에 무표정한 소녀가 등장하자 염미홍은 손을 들었다.


“소 군사. 여기야. 꽤 빨리 왔네?”
“문주님 행차를 시중들지 못한 것만으로 불찰입니다. 토포악발吐哺握發 하시려는 마음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먹던 것을 토하고, 머리를 감다 말고 쥐고 나가는 것으로 현인을 맞이한다는 주공의 고사를 일컫는 말이다. 소월하는 덕후의 부탁을 받자마자 충실한 개처럼 이행하는 염미홍이 얼마간 못마땅했다. 방금 말은 일문의 주인이 홀몸으로 휑하니 나가는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어려운 문자는 쓰지 마. 비꼬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얘 어때?”


염미홍이 서향을 가리키며 우회하자 소월하는 서향을 위아래 훑어보았다. 염미홍의 시선이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이쪽은 물목의 가치를 따지려는 듯이 냉정한 눈이다. 그것이 불쾌해져 서향은 지지 않고 쏘아보았다. 어라? 하는 기색이 소월하의 미간에 스치더니 픽 웃었다.


“강단은 있을 것 같네요. 아기씨의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아요.”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라고 짓궂게 덧붙인 소월하는 염미홍에게 돌아갈 것을 간했다. 염미홍은 서향을 재촉해서 마차를 타고 심가장으로 돌아갔다. 창문을 통해 심가장을 본 서향은 눈을 크게 떴다.


“저게 왕궁인가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소월하로부터 쿡,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서향은 귓바퀴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염미홍이 중재하듯 나섰다.


“어우~우리 소 군사는 너무 심술궂어. 나도 여기 처음 볼 때는 왕궁으로 알았는데?”
“왕부는 이곳의 열 배는 넘는다고 들었어요. 여기 정도는 금방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헤에~그런가.”


염미홍이 실감 안 난 듯이 대꾸했다. 서향도 내심으론 염미홍의 심정에 동조했다. 정문을 통과한 마차가 수화문 앞에 이르러 멈추자 셋은 나란히 내렸다. 염미홍은 늙은이처럼 허리를 툭툭 치고는 서향의 어깨에 손을 척하니 올렸다.


“잘 해보렴. 네겐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
“네...”


무례하게 올린 손도 격의 없이 보내는 미소에 서향은 조용히 고마움을 표했다. 염미홍이 손을 흔들며 수화문 안으로 사라지자, 소월하는 그녀를 데리고 왼편으로 담장을 빙 돌아갔다.


“어디로 가는 거죠?”
“네 동료들이 있는 곳, 그보다 예의범절부터 배워야겠구나.”
“예기禮記 정도는 외우고 있습니다.”
“네가 빈객賓客의 신분이더냐? 가노家奴라면 가풍家風을 준수해야지.”


몸종이라니? 서향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덩달아 대 여섯 걸음정도 나서던 소월하의 걸음도 멈췄다. 돌아보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짜증이 배어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좋고 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그렇듯 소월하도 아래 사람에게는 권위적 성향이 강했다. 평소 그 부분에 오는 마찰은 염미홍이 무마해주고 있지만, 그녀가 빠진 지금으로는 둘 사이는 벌써부터 삐꺽 이고 있었다.


“궁녀宮女 선출로 알고 있는데요.”
“총희寵姬가 되겠다는 거구나.”
“...그럴 의향은 없습니다.”


총애라는 말에 간밤의 흉물을 떠올린 서향의 얼굴이 살짝 혐오로 일그러졌다.


“하면?”
“은공을 뵙고자 할 뿐입니다.”


소월하의 발 끝 아래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한다. 잠깐 침묵 후에 소월하로부터 냉랭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은공을 만나는 자체가 네게는 큰 복福 이자 화禍이니라. 어느 쪽이든 감당하기 힘들 터. 어설프게 나대지는 말아다오.”


가시 박힌 어조를 접하자 서향은 반발심과 함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월하에게 경계를 사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은공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촉발되었지만 후처와 암중에서 다투면서 터득한 연기력을 동원하여 공손한 태도로 포장하였다. 소월하는 서향을 객당客堂 입구로 안내하고는 떨치듯이 등을 돌렸다.


객당이라 해도 그 자체로 3대 가족이 머무를 만큼 컸다. 서향은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당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약간 윗줄 연배의 소녀들이 50명 정도 모여 있었다. 마침 금발에 이국적인 용모의 여인이 대에 올라가 무언가 연설하고 있는 터라 서향의 등장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서향은 무리의 끄트머리에 다가가 금발여인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분들은 왕부의 궁녀 모집에 특별히 선출되었습니다. 원래 관행에는 없는 일이나 왕야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특별히 실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부의 일원으로서 부끄럼 없도록 처신하고, 후배 궁녀들을 이끌어주기 위한 선임으로서 기본적인 교육 과정을 이수할 예정입니다.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적응을 거쳐서 좋은 성적을 낸 학생은 수석으로 임명할 것입니다.”


금발여인의 연설은 그것으로 끝나고 생활 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들어갔다. 우선 조별로 배정받은 방에 합숙으로 머물러서 잠과 식사를 해결하고, 나머지는 교육을 받는 다는 것이었다. 금발 여인 밑에 있던 중년여자들이 호명을 하여 조별 단위로 묶은 뒤 각자 한 무리씩 인솔해서 후실로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금발여인과 서향 단 둘만 남았다.


금발여인은 대에서 내려오다가 서향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벽안을 대하자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가까이 대하자 이향異鄕의 미모에 압도되는 감이 있지만.


“너는?”


자기 소개를 하자 금발여인을 아하, 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명단에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너가 그 얘구나!”


금발여인이 살짝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을 세휘라고 알린 그녀는 서향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속내를 파해 처질 것 같아 서향은 너덜해진 소매를 들며 고개를 숙였다.


“은공을 아시는 지요?”
“은공? 어휴, 말을 마렴.”


손 사례를 치는 모습에서 친근함을 읽을 수 있었다. 서향은 은공에 대한 정체를 두고 아는 사람마다 이렇게 평가가 다양하게 달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잘 됐다. 안 그래도 너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셔.”


그렇게 말한 세휘는 서향의 등 뒤로 돌아가 떠밀듯이 어깨에 손을 댄다.


“우선은 수욕을 하고 옷부터 갈아입자. 은공보다 더한 귀인이니 잘 단장해야 되거든.”


부드럽지만 거절하기 힘든 음성. 서향은 얼떨떨에 눌려 인형처럼 세휘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아담한 별실로 안내 되어 연상의 하녀들로부터 꽃잎을 띄운 물로 정성껏 목욕을 했다. 그리고 서향의 기억은 물론 후처가 서향의 기를 죽이기 위해 자랑하던 비단 옷보다 더 좋은 궁장을 하였다. 머리를 틀지 않은 채 장식을 놓은 서향은 혹시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귀인이 자신의 몸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불안 반, 체념 반으로 나선 서향이 당도한 곳은 침실이 아니라 어느 후실이었다. 사방이 밀폐된 채 주인석에는 발이 내려져 있었다. 서향은 직감적으로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귀인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네가 그 아이군.”


나른한 듯 하지만 강인한 억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발을 통한 음영으로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남성적인 절제미를 갖춘 윤곽은, 젊은 사자가 높은 언덕에서 지상을 느긋이 내다보는 것처럼 위엄을 갖추고 있는 듯 했다.


“고의 자녀가 신세를 졌다는데.”
“은공의 존명대성도 모르는 소녀이옵니다.”


고孤를 칭한다. 제후왕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지칭이다. 서향은 발 건너의 사람이 터무니없는 거물임을 알고 전율했다.


“그 아이는 부용이라고 한다.”
“부용.....님입니까.”


태연을 가장하며 말하지만 등에는 벌써 식은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행한 것을 대신 하겠다고?”
“그....”


방금 전까지 수욕하고 물까지 마셨음에도 입안이 바싹 말랐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서향의 뇌리에 섬전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 때.....


실신하고 눈을 떴을 때 이른 아침의 골목 풍경이 플레시백 되 듯 떠오른 것이다.


-시체가 없어....?


피바다만 있었을 뿐,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는 공황 상태이고 시체를 볼 용기가 없었던 탓에 애써 외면했지만 육감은 밤 사이 있던 시체가 사라졌음을 속삭였다.


“....무슨 소리인지 천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질식과 같은 긴장이 대기를 야금야금 갉아먹어간다. 포화 상태가 한계에 이를 무렵 남자가 가는 한숨을 쉬었다.


“부용에게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될 것 같구나. 어울려주렴.”
“명命 이시라면....”
“명命 이라.....그렇다고 해두마.”


서향 자신도 모르는 심층의식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묘한 어조였다. 그러나 제후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물러가라. 당분간 필요한 것은 세휘가 알려줄 것이다.”
 
제후의 축객령에 서향은 자리에 일어나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세휘가 미닫이를 닫자 방은 어둠에 잠겼다. 일수유의 시간이 흐르자 잔뜩 지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간만에 하려니 못해먹겠군!”


창문에 드리어진 차양이 일제히 걷어지고 등에 불이 켜지면서 방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주인석에서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한 남자와 사방의 구석에 있던 여인들이었다. 덕후와 우희선, 금보옥, 형욱 이다.
 
우희선을 제외하고 형욱과 금보옥은 멀뚱한 시선으로 덕후를 바라보았다. 잔뜩 폼을 잡은 덕후를 처음 보는 탓이다. 금보옥이 차마 본인에게 묻지 못하고 우희선에게 슬쩍 묻는다.


“언니, 상공이 경사에서는 늘 저러셨나요?”
“왜 아니겠니.”


우희선이 고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반했던 덕후는 바로 저렇게 왕자王者다운 폼을 잡은 상태였다. 덕후가 두 팔을 들며 호들갑을 떤다.


“왜? 내게 다시 반한거야?”
“아뇨, 평소에 그런 모습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아내들 체신이 좀 살 것 같아서 말이에요.”


우쭐거리자 금보옥은 평소 습관처럼 사정없이 격침시킨다. 덕후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도리질했다.


“에이~ 답답해서 싫구만.”


다 큰 남자가 애처럼 보채는 시늉을 하니 정말 추하기 그지없다. 싸늘한 시선들을 대하자 덕후는 슬그머니 정좌하고 헛기침을 했다. 금보옥이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연기를 했어야했나요?”


질문을 받자 덕후는 콧등을 살짝 매만졌다. 전 날 부용의 돌출 행동으로 덕후는 이 순간까지 잠도 못자고 수습하느라 진력을 다했다. 내부로는 아내와 여인들에게는 부용의 내력을 알렸다. 본질이 아니라 팩트지만 급한 대로 의혹을 보류 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무공고수의 난입이 있었다는 풍문을 흘릴 준비를 갖췄다. 본인은 첫 닭이 울기 직전에 돌아온 부용으로부터 전말을 듣고는 현장으로 달려가 시신을 처분했다. 이런 식으로 심가장으로 돌아온 뒤로는 나무늘보 흉내 내던 덕후가 질풍처럼 수를 둬가자 여인들도 군말 없이 이행해주었다. 모처럼 가장家長 다운 모습을 보여준 셈이지만, 장본인으로서는 여차하면 의존할 계기를 준 것 같아 못마땅할 따름이다.


“유일한 현장 목격자니까. 이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목을 탁 치는 시늉을 한다. 금보옥이 중재하듯 묻는다.


“적당히 감시시키면 되지 않아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되오. 제 이의 제 삼의 사태가 벌어 질 테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안에서만 가둬 키운 것 같소. 직접 보니 부용의 혹시 모를 실수를 감싸줄 요량은 되는 것 같고.....그래도 공주니 전속 인을 하나 정도는 둬야하지 않겠소?”
“상공께서는....”


우희선이 말을 하다 만다. 덕후가 눈짓으로 뭐냐는 듯이 바라보자 물끄러미 응시하다 밝힌다.


“정말로 그 아이를 아끼십니까?”
“아끼느냐고.....아암, 물론이지.”
“우리들 자식에게 그렇게 대한다면 서운할 것 같네요.”


뼈있는 지적에 금보옥 뿐만 아니라 형욱조차 움찔한다. 덕후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양녀로 거둬들인다 하시기에, 책임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헌데 상공은 그것으로 됐다는 듯이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요.”
“난....”
“알아요,  천녀가 추측하기에 전날의 사태 같은 일도 감안해서겠지요. 네.”


무표정 아래 위태함을 본능으로 감지한 우희선은 매듭을 짓듯이 흰 손으로 덕후의 입술에 가져간다. 그리고 봉인을 새기듯이 입술의 틈새 위를 섬세한 손끝으로 훑어간다. 잠시 그렇게 있던 덕후는 긴 잠에서 깨어나듯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은 언제 오지?”
“곧 올 겁니다.”


형욱이 말을 받았다. 간밤에 그 난리를 치고 온 부용에게 덕후는 한바탕 경을 치고는 벌칙으로 꽃단장을 시켰다. 형벌치고는 참 이례적이었으나, 그때 여인들을 전원 참석시키라 했으니 사태에 대한 해명도 곁들 셈이었다. 그때,


-똑똑


미닫이 문이 스르륵 열리며 세휘와 소월하가 나란히 들어왔다. 그녀들은 평소와 달리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답을 하듯이 한 소녀가 들어선다. 금실로 봉황이 새겨진 연분홍빛 비단을 걸치고, 발에는 진주가 달린 구슬 신을 신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 아래 상아빛 얼굴, 깜찍하게 솟은 콧마루와 연지를 물들인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탐하고자하는 춘색에 물들게 한다. 특히 홍채가 붉은 기를 띄고 있어 바라보면 흡사 최면에 걸 듯, 폭팔적인 염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자기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앙증맞은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어지간해서는 동요하는 일이 없는 형욱까지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부용을 볼 정도였다. 좌중이 넋을 잃자 뒤편에서 염미홍이 그 맘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띤다.


“나도 깜짝 놀랐다고? 조금 화장을 보탰을 뿐인데 이런 절세의 미녀가 되었을 줄이야.”
“이제 벗으면 안 돼?”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들에 부담을 느낀 듯이 도리질을 친다. 그 모습마저 풋풋한 교태를 품고 있었다.
 
“무슨 소리니. 다들 넋을 잃고 너를 보잖니. 모처럼 이니까...아니 처음인가? 좀 더 즐겨보렴.”
“으으.....갑갑하단 말이에요.”


부용이 진저리를 친다. 울상을 짓는 모습도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금보옥이 무심코 입에 담는다.


“.....진흙 속의 진주가 이럴 때 쓰는 말이었구나.”


그 말에 모든 이들이 동조하듯이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잘만하면 품에 꽉 껴안고 주물럭거릴 것 같아서, 부용은 자신이 애완동물이 된 것 같아 불안했다. 그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 저마다 움찔움찔 손을 뻗게 만드는 원인인 것을 모르는 듯 하다.


유일하게 덕후만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다음에도 이러면 하루 종일 단장하라고 할 것이다. 또 다시 사고 치면 그때부턴 기간을 곱절로 친다.”
“....잘못했어요.”


부용은 순순히 사과했다. 하루 종일 쏘다녀도 부족할 나이(?)에 한 자루의 검처럼 붙박이로 있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다. 덕후는 박수를 크게 쳐 여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내가 관상을 좀 봐서 아는데, 부용은 천요天妖의 상을 지니고 있소.”
“천요라 하심은?”
“하의 말희나 은의 달기와 같은 부류란 말이오. 눈동자가 붉은 것도 그 때문인 듯 하오.”


관상학에 대해 아는 소월하나 우희선은 부용을 꼼꼼히 살폈으나 덕후가 말한 천요의 상인지 뭔지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생구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똑한 자들이 그렇듯, 적당히 합리적인 이유를 대자 그런가보다 하고 반쯤 의혹을 품은 채 잠정적으로 판단을 내릴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것이라서 곁에 두고 살펴보았는데, 일단 선천진기부터가 특이한 것 같소.”
 
마기의 출처를 그렇게 포장하니 세휘도 기만가 만가 속는다. 그녀가 가진 그 어떤 정보와 지식에도 이레귤러에 대한 대안은 없었다. 다만, 덕후와 모종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 가닥 의심만은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서 밝힐 성질은 아니므로 침묵을 지켰다.


“다들 심법이 있다면 진기를 끌어올리고 대항하도록 하시오.”


덕후가 엄히 이르자 여인들은 순순히 따랐다. 부용에게 신호를 보내자 부용은 심법을 풀었다. 눈동자의 홍채가 선명한 황혼빛을 띠어가며 머리카락도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와 함께 억눌렸던 염기가 폭발적으로 방 안에 요동쳤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가 순식간에 왜곡되어 정념을 자아낸다. 같은 여자임에도 저릿한 성감이 느껴졌다. 없거나 적은 여자들은 자꾸만 들뜨고 야릇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법을 운용했지만, 교합 경험이 많이 있는 우희선, 금보옥, 염미홍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자극받는 감정이 전희前戱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암암리에 놀랐다.


덕후가 손을 들자 염기가 가라앉으면서 머리카락이 검은 색으로 돌아왔다. 이어 정도는 틀려도 한숨이 제각기 터저나왔다. 당장 동성인 여자들이 이런데, 직접적 감각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남자들의 경우에는 당장 바지춤을 끄르지 못해 안달일 것이다. 덕후가 말한 천요의 상이 무엇인지 체감한 셈이었다.


“이런 요기도 골치인데 내력으로도 발산되는 것 같소. 어제의 난리도 그것 때문이지. 그 건달들은 부용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과잉방어로 죽은 것 같고.”


검시를 해본다면 과잉방어는 커녕 장난감 처럼 가지고 놀다가 살해당한 것을 볼 수 있지만, 덕후가 손수 소각처리 했으니 증거인멸이다. 우희선이 입을 열었다.


“천녀가 상공의 깊은 뜻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좀 전에 부용을 두고 무관심한 것이 아니냐고 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덕후는 구구절절 해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고개만 끄떡였다.


“오늘 일을 알았으니, 다들 부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함구해주었으면 하오.”


시선을 한 명 씩 마주하고 신신당부하자 저마다 결의를 밝혔다. 곧 저녁 시간이 오고 식사 시간이 되자 다들 물러나려고 했지만, 덕후는 부용을 따로 남도록 했다.


다들 자리를 비우고 둘만 남았다. 부용은 엄마들 여럿에게 둘러 싸여있을 때보다 더 긴장했다. 장식품과 노리개가 불편하여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였다.


“좋았니?”
“어?”
“한바탕 뒤집어놓으니 속이 좀 풀리니?”


덕후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것이 부용에게 사무치는 두려움으로 와 닿았다.


“....화났어?”
“아니, 왜 화를 내. 마라는 인간이 아니잖아?”


체념한 듯 혹은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기대를 버리는 것 같았기에 부용의 어깨가 더욱 위축되었다. 덕후는 미간을 누르고 있어 표정이 부용에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죽일 때 기분이 어땠어?”
“헤헤, 그 뭐냐, 아, 정당방위거든요....”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요.”


부용/마라는 기가 죽은 투로 그러나 분명히 시인했다.


“....가능하다면 또 하고 싶어요.”


당장 사이코패스 검사를 받을 만한 발언이지만, 애당초 인간의 피와 죽음을 먹고 잉태한 마검령이다. 인간의 몸으로 이식(?) 되기는 했지만 본성이 어딜 가랴. 덕후라는 반칙 치트 키를 만났으니, 광기나 마성에 침식당하지 않고 제어가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성으로도 살육을 합리화시키고 나면 답이 없다.


“네가 그 입장을 계속 고수한다면, 언젠가는 온 세상과 싸워야할지도 몰라.”


하라지 뭐, 하는 듯한 여상한 태도다. 덕후는 방법을 바꿨다.


“가령 우리 마라에게 소중한 이가 있다 치자. 그렇군. 부용과 어머니들이 살아있다고 쳐. 그녀들까지 모두 해하고 싶니?”
“....그건 싫은 걸.”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좌우로 휙휙 흔들었다.


“그래. 하지만 그녀들은 너를 두려워하고 부정할 거야. 네가 아무리 안 그런다 맹세하고 다짐시켜고, 그 범주에는 분명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피포식자들이 포식자들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것과 같단다.”
“그건 더 싫어....”


울먹이는 마라를 향해 덕후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러면 지배자가 되어야 해. 유희를 대의로 포장하고, 살인에는 명분을, 광기를 용맹으로, 너에 대한 공포를 존경으로 승화시키렴. 그 것을 체득한다면 너는 세상 전체를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이 정점에서 군림할 수 있을 거야.”


축 늘어진 마라의 얼굴이 차츰 기쁨으로 이지러졌다. 천사의 미소였으나 내면은 악마의 영혼이 환희로 떨고 있었다.


“응, 아빠. 아빠 말대로 할게. 근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우선 서향이란 아이부터 네 편으로 하렴. 머리 끝 부터 발끝까지 오직 너만을 위한 사람으로.”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마라를 덕후는 부드럽게 등을 다독이다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마라는 이때까지 품었던 고민이 단번에 해결되자 폴짝 뛰며 좋아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참, 아빠는 죽여본 적 있어? 느낌이 어땠어?”


덕후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태어나서 험한 일 한 번도 안 했을 것 같은 하얀 손이다. 전생과는 확연히 다르다. 전생의 땀으로 얼룩진 손에 대한 기억이 덕후의 마음에 파문을 던졌다. 그것을 숨기며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잘 모르겠구나. 아빠는 태어나서 사람을 한 번도 “직접” 죽여본 적이 없거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살육의 천성을 타고난 마라와 달리, 덕후는 권모술수의 화신으로서 길을 택했으니까.


 


 


 


보너스입니다. 덕후가 부용(마라)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은 상위 존재인데다가, 해봐야 반쪽짜리 나르시시즘 밖에 되지 않기 때문.(....)


권 단위(.....는 물건너갔나...;)로 파트로 구분했는데, 좀 더 포괄해서 부를 설정했습니다.


1부 - 御三家 ; 소소한 일상 및 기반 다지기. 지금 쓰는 파트4가 끝나면 마무리입니다.


2부 - 天下布武 ; 십패 평정기. 대륙구 군웅들이 쟁쟁하게 나올 예정. 주인공과 히로인들을 여러 모로 굴릴 계획. 뭐, 그래봐야 주인공은 1부처럼 후견+흑막+a(지골로)지만.


3부 - 兇王の軌跡 ; 혼노지 반전 이후. 1,2부와 달리 당말오대나 정난지변처럼 국가 단위로 교전이 벌일 예정. 밸런스를 위해 전 세계(?)를 적으로 한 주인공의 본령발휘. 웅변(괴벨스 식이지만)과 야망(히틀러 식이지만) 그리고 기상(스탈린 식이지만)과 인기(무솔리니 식이지만)를 만끽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저도 누군가 의식주만 해결해준다면 이걸 일일연재로 쓰고 싶지 말입니다. 띄엄 띄엄하는 거라 매 회 feel 잡는데 자꾸만 텀이 걸리고. 낚고 싶어서 낚는 게 아닙니다.(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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