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 O의 이야기 - 3장 1편 <원제:Story of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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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느마리와 쇠고리
참된 애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고
당신은 그것을 느껴야만 한다.
안느마리와 쇠고리
O는 스스로 내세울 구실을 만들기 위해, 쟈크리느는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운 여자라고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칠 때 이용하는 작은 방의 문을 닫을 때에 쟈크리느가 보이는 조심스러운 동작은 정말이지 0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활짝 열려 있어도 들어갈 결심이 서지 않았던 문을 억지로라도 비틀어 열어야 되겠다는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O가 결심을 굳힐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전혀 짐작 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작용한 덕분으로, 이런 초보적 책략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쟈크리느 한 테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O는 맨 처음 반 재미로 덤벼들었다. 예를 들어 쟈크리느가 머리 손질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쟈크리느가 촬영할 때 입었던 옷을 벗고 목을 옥죄는 스웨터를 입고 자기 눈빛과 똑같은 터키색 목걸이를 착용할 때, O는 쟈크리느의 가슴에 아름답게 매달려 있는 작은 두 유방을 검은 스웨터 위로 어루만질 수 있었고, 그 피부보다도 투명한 속눈썹을 볼에 느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쟈크리느가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게 되면 스테판 경에게 그날 밤 안으로 있었던 모든 일을 소상히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쁨을 맞보곤 했던 것이다.
O가 쟈크리느를 껴안으면 품속에서 묵직한 느낌을 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살짝 열고 위를 바라본 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럴 때 O는 항상 쟈크리느를 문틀이나 테이블에 밀어붙이고 양 어깨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쟈크리느는 눈을 감은 채 신음을 목구멍 속으로 삼켜 버리고 바닥에 그냥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쟈크리느는 O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얼음같이 차가운 냉정함을 되찾고 서먹서먹한 웃음을 떠올리면서,
“입에 루즈가 묻었잖아.”
하고 입술을 닦곤 했다.
쟈크리느의 볼이 천천히 빨개질 때마다. O는 사루비아 내음이 나는 그녀의 땀 냄새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ㅡ 크고 작은 것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복창하듯 ㅡ 서먹서먹한 이런 면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쟈크리느가 몸을 잔뜩 도사리거나 O를 경계한 것은 아니었다.
쟈크리느가 키스를 허용할 때 ㅡ 쟈크리느는 O에게 키스나 포옹만 묵인했지 몸을 완전히 내 맡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ㅡ 는 아주 시원스럽게 행동했었다. 그래서 10초 내지 5분간은 그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밖의·경우에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고 재빨리 발을 놀려 공격을 피하고, 정복자와 피정복자인 자기를 동화시키고, 또 자기 입술을 빼앗는 게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말과 행동과 시선에 잔뜩 경계 있는 마음을 불어넣어 무슨 일미 있더라도 발을 잘못 내딛지 않겠다는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잠잠한 수면 같은 쟈크리느의 눈동자 속에 동요의 빛이 어른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이따금 그녀의 세모난 얼굴에 떠오르는 고양이의 미소 비슷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어딘가 어설프면서도 무상한 감이 들었고 불안해 보였다. O는 두 가지 요인 ㅡ 쟈크리느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불러들이고 있는 ㅡ 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는 다른 사람한테서 선물을 받을 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쟈크리느 스스로 돋구어낸 욕망의 증거다-다만 그 욕망도 쟈크리느를 위해서 도움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즐겁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럼 O는 왜 쟈크리느 에게 유용한 존재일까? 만약 유용하다면 쟈크리느는 특별한 케이스로 O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대상으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즉, 쟈크리느 에게 퍼부어지는 O의 상찬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고, 여성의 욕망에는 위험도 없고 성가신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O는 만약 자신이 쟈크리느에게 진주 브로치나,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불어는 물론이고 영어, 독어 등 세계 언어로 인쇄돼 있는 헬메스의 스카프를 선물하는 대신에, 늘 쟈크리느가 모자라 쩔쩔매는 듯한 천 프랑이나 2천 프랑을 제공한다고 하면, 그녀는 O의 아파트에 와서 점심을 먹거나 놀다 갈 시간이 언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O의 애무에서 몸을 내빼지도 않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O가 어떤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O가 그런 이야기를 스테판 경에게 하자, 그는 다짜고짜 O가 너무 뜸을 들이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르네가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르네가 O를 찾으러 스튜디오에 예닐곱 번 들렀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쟈크리느가 있으면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드래느 근처에 있는 영국식 바로 향했던 것이다. 그럴 때 르네는 로와시 저택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이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던 여자들을 바라보는 듯한, 즉 흥미진진하고 자신감과 오만함이 흘러 넘치는 시선으로 쟈크리느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르네의 그 오만함은 매끄럽게 빛나면서 아주 단단한 쟈크리느의 갑옷에 이빨 자국조차 남기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쟈크리느는 르네의 오만함은 물론이고 자신감과 흥미로운 시선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O는 해괴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한테 와 닿는 르네의 시선은 당연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쟈크리느에게 쏠리는 그의 시선을 모욕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란 것이다.
자신은 쟈크리느를 보호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확실히 구분 짓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직 쟈크리느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그 일 ㅡ 쟈크리느를 소유하는 일 ㅡ 을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르네의 도움 때문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듯싶었다.
르네는 바에서 쟈크리느에게 적절한 양 이상의 위스키를 권하곤 했다. 그때마다 쟈크리느의 광대뼈는 장미색으로 빛났고 눈은 술기운이 돌아 초점을 잃은 채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바를 나와 O와 함께 스테판 경의 아파트로 향하기 전에 쟈크리느를 차로 데려다 준 적이 세 차례나 있었다.
쟈크리느는 파시 거리의 음울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건물이 새로 지어져 처음 입주할 때부터 백 러시아계 사람들이 들어와 지금까지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현관은 먹갈나무 색 비슷한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계단의 난간은 여기저기 부서지고 떨어져 나간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고 마모된 녹색 카페트는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르네가 입구까지 바래 다 주려고 할 때마다-그는 아직 문조차 열어보지 못했다. 쟈크리느는 매번, ‘괜찮아요, 정말 고마웠어요.’ 하고 차에서 뛰어내려, 뭔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갑자기 그녀를 덮쳐 태우기라도 하듯 등 뒤에서 문을 ‘쾅’하고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르네에 대해서 초연한 듯한 태도를 내보이면서, 적어도 르네한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쟈크리느는 정말로 초연했던 것일까?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는 척 가장하려 했던 점에서는 그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쟈크리느가 딱 한 번 O를 자기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게 했을 때, 그리고 쟈크리느를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가 보았을 때, 왜 쟈크리느가 그토록 격렬하게 르네의 침입을 거절했었던 가를 O는 알 것만 같았다.
만약 O와 같은 여성 이외의 누군가가 이렇게 구중중한 아파트에서 매일 곱게 몸치장을 한 모델이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한다면, 쟈크리느의 위신은, 또 호화스러운 패션잡지의 페이지를 눈부시게 장식하고 있는 그녀의 신화는 어떻게 될까?
침대는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또 쟈크리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크림으로 얼굴을 맛사지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졸다가 그냥 잠이 들어서 그랬는지 하얀 시트가 기름범벅이 되어 회색을 띠고 있었다.
전에는 세면실 입구에 커텐이 달려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레일과 쇠고리가 천장에 남아있으나 지금은 몇 가닥 줄만 늘어져 있을 뿐이다. 실내의 모든 것들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고 탈색돼있었다. 장미색과 회색 끝이 디자인되어 있던 카페트도, 벽지도 마모되고 누렇게 변색돼 아주 보기 싫었다.
방 안을 깨끗이 하려면 벽지를 벗겨내고 카페트를 걷어낸 뒤 바닥을 닦아야 될 것만 같았다. 어쨌든 덕지덕지 붙어있는 세면대의 때를 벗겨내고 더러운 걸레를 내다버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두는 게 필요할 듯싶었다.
아주 정결하고 향쑥과 들국화 냄새가 나고 티끌 하나 나뒹굴지 않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쟈크리느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듯했다. 그 대신 쟈크리느가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그녀의 몸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쟈크리느의 가족이었다.
O가 쟈크리느의 아파트를 다녀와서 구질구질한 여러 이야기를 빼거나 보탬 없이 솔직하게 르네에게 들려주자, 그가 쟈크리느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다 주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그 구중중한 소굴에서 쟈크리느를 빼내기 위함이었지만 당사자인 쟈크리느가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것은 자기와 같이 생활하고 있는 가족들 때문 이었다.
쟈크리느가 O의 아파트로 옮겨 오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쟈크리느의 가정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부족이나 집단이라고 평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할머니와 이모, 어머니, 게다가 가정부까지, 일흔 살에서 쉰 살까지의 네 여자가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검은 옷을 입고 새벽 4시에 담배 연기와 성모상이 발하는 희미한 빨간 빛 속에서 큰소리로 외치고 훌쩍거리며 우는 것이다.
커피잔을 달그락달그락 진동 시키면서 쟈크리느가,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반평생 동안을 애써야 할 듯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말들을 마구 늘어놓았다. 그런 가족을 부양해야 되고, 말을 들어야 되고, 또 집에 있는 동안 내내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들이 쟈크리느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쟈크리느는 어머니가 차를 마시기 전에 각설탕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메마르고 먼지투성이인 자기 방으로 도망치곤 했다.
그러는 쟈크리느의 모습을 할머니와 어머니, 이모 세 사람이 살롱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머니의 방에서 암사슴 같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쟈크리느는 황급히 자기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는다. 그러면 가족들은 쟈크리느의 등 뒤에다 대고,
“슈라, 슈라, 귀여운 내 새끼.”
하고 소리치곤 했다.
쟈크리느 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일을 위해서 만든,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리기 위한 이릉으로 슈라 라는 원래의 이름과 함께 구중중한 소굴을 잊어버리고 프랑스의 태양 아래에서 결혼할 남자를 물색해 확고부동한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쟈크리느의 결혼 상대는 북극의 차가운 얼음 속에서 실종된 부친 ㅡ 쟈크리느의 아버지는 발트 해의 선원 이었다. ㅡ 처럼 신비스러운 탐험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려서는 안 되었다. 쟈크리느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곤 했다. 머리카락과 광대뼈, 회갈색의 피부, 그리고 영원을 바라보는 듯한 눈 등, 그런 것들은 모두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쟈크리느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감사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살다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듯 눈 속으로 돌아간 남자를 자신의 아버지로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아버지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인지, 어느 날 길지 않은 관계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검은 머리카락에 갈색피부를 가진 나탈리라는 여동생을 낳은 것이다. 쟈크리느는 그것을 원한 비슷한 감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15살인 나탈리는 여름방학 때가 아니면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애의 아버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파리안느 마리와 쇠고리 근교에 위치한 여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탈리의 학비와 용돈, 그리고 어머니 앞으로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만족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쟈크리느도 생활비를 보태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가족들의 생활은 아주 나태하고 틀에 박힌 진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쟈크리느가 마네킹, 아니면 미국식으로 표현해서 모델로 벌어들인 수입은 필요한 화장품이나 속옷, 신발, 고급 양품점에서 만든 옷 ㅡ 물론 특별 가격으로 사게 되지만 그래도 비싼 것은 마찬가지였다. ㅡ 들을 사는 데 드는 돈을 제외하곤 가족들의 생활비로 사용돼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확실한 것은 쟈크리느가 남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 사실 그런 기회가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쟈크리느는 몇몇 애인과 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남자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하지만 그들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혼자서도 욕망과 애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 이었다.
그 중 한 사람 ㅡ 두 번째 사귄 남자였다. ㅡ 은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는 부자로 쟈크리느가 지금 왼손에 끼고 있는 진주 반지를 선물로 준 남자였다. 하지만 쟈크리느는 그의 동거 요구를 거부했고 그 역시 쟈크리느와의 결혼을 바라지 않았기 매문에 어려운 결심이나 후회 없이, 또 임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 하고 그를 등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쟈크리느는 한 때 자신이 임신한 것은 아닌가 하고 며칠 동안 공포에 떨면서 지내야만 했었다.
‘싫어, 돈 많은 남자의 정부가 된다는 것은 체면도 체면이려니와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좋은 기회를 걷어차는 골이고, 또 그런 행동은 어머니가 나탈리의 생부와 벌인 짓거리 그대로를 답습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 쟈크리느는 그렇게 생각하고 돈 많은 남자의 유혹을 물리쳤던 것이다. 하지만 O와 함께라면 사정이 다르다. 편하게 마음 먹으면 뜻이 통하는 직장 동료와의 생활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한편 O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즉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와 생활을 같이 하고 그 생활을 도와주는 정부의 역할과 근본적으로 도덕적 신종을 손상 시키지 않기 위한 역할이 그것이었다.
르네의 존재는 형식적인 이유를 위험스럽게 할 정도로 공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쟈크리느가 O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런 르네의 존재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아니면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쟈크리느 어머니와의 교섭은 O 혼자서 담당했다. 자기 딸을 소중히 생각하고 도와주려는 O의 우정에 감사하는 쟈크리느의 어머니를 마주 대하고 있을 때만큼, 자신이 한 범죄조직에서 협상 차 파견된 배반자이고 스파이라는 기분을 통렬히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속 한쪽에서는 자신의 사명과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틀림없이 쟈크리느는 내 아파트에 올 거야. 하지만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쟈크리느를 자기한테 데리고 오라는 스테판 경의 명령은 절대로 지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쟈크리느가 O의 아파트에서 같이 생활하기 위해 발을 들여놓자마자, O는 자신도 의아스러울 정도로 반드시 쟈크리느를 소유하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에 휩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쟈크리느는 O의 아파트에서 르네의 뜻대로 그가 가뭄에 콩 나듯 사용했던 ㅡ 르네는 언제나 O의 커다란 침대를 이용했다. ㅡ 방을 사용하게 됐다.
‘쟈크리느의 아름다움이 충분히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이므로 자신이 그것을 위해 쓸데없이 보살펴 주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하지만 만에 하나 쟈크리느가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해도‥‥‥ 꼭 불행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O는 그렇게 마음속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자마자, 쟈크리느가 자신처럼 알몸이 된 채 몸을 지켜줄 무엇 하나 지니고 있지 않은 모습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한이 없을 텐데‥‥‥하는 상상을 하고 문득 놀랐다.
쟈크리느가 O의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그 주에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모든 허락을 받아낼 수가 있었고, 르네는 갑자기 열을 내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어느 날 르네가 O와 쟈크리느를 점심에 초대하고 극장에 데리고 갔다. 그 영화는 르네가 고른 탐정물로 약품 밀수와 부녀자 밀매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O와 쟈크리느 사이에 앉아 두 여자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있었으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O는 강간 장면이 나을 때마다 르네가 쟈크리느의 표정을 살피면서 감정을 체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쟈크리느의 얼굴에는 희미한 혐오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극장을 나온 르네가 두 사람을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었다. 덮개를 벗기고 창유리를 내린 차 안에 시원한 바람이 몰려들어와 쟈크리느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쟈크리느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어린애처럼 머리를 뒤로 하고 손을 갖다댔다.
쟈크리느는 자기가 O의 아파트에 있는 것과 O가 르네의 정부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당연히 르네에게 친숙한 느낌을 갖는 듯했다. 쟈크리느는 르네가 무슨 서류인가를 찾는다는 구실로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것을 태연히 인정하고 있었는데 서류를 찾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O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O 자신이 얼마 전에 이 아파트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 커다란 네델란드식 책상의 서랍을 깨끗이 정리해서 비워 놓았기 때문이다.
르네는 왜 그런 것을 갖고 있었을까? 어디에서 난 것일까? 중후하면서도 우아하고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의 재질, 그것은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 방 안에서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그리고 그 망은 북쪽으로 난 창을 통해 가운데 뜰이 내려다 보였고 칙칙한 느낌을 주는 벽과 정성스럽게 닦여 몹시 추워 보이는 바닥은 강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방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O는 쟈크리느가 그 방을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쟈크리느는 첫날 욕실과 주방, 루즈와 화운데이션, 향수, 그리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승낙했듯 앞쪽의 두 방을 공유하고 자신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도 어렵지 않게 용인할 것이라고. 하지만 O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쟈크리느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 ㅡ 예를 들어 자기 손에 끼워져 있는 장미색 진주 같은 것 ㅡ 에는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지만 자기 물건이 아닌 것에는 아주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곳이 궁전이라고 해도, 이 궁전은 당신 거야, 하고 그것을 공정증서로 증명해 주지 않는 한 쟈크리느는 여기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이 회색 방이 쾌적하든 쾌적하지 못하든 쟈크리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쟈크리느가 O의 침대에서 자기위해 들어오는 것은 그 방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O 쪽에서도 쟈크리느의 그런 행위를 고맙게 여기는 동시에 쟈크리느를 속인 일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쟈크리느는 쾌락을 좋아하듯 자기를 위험 속으로 내몰 염려가 없는 여자의 품에 안겨 여러 가지 즐거움을 만끽했다.
쟈크리느가 짐을 푼 지 5일째 되던 날 ㅡ O는 그 짐을 풀고 정리하는 걸 도와주었다. ㅡ 르네가 10시경에 쟈크리느와 자신을 바래다 주고 돌아갔다. 벌써 세 번째 있는 일이었다.
쟈크리느가 욕실에 들어갔다가 나와 아직 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알몸으로 O의 방 앞에 천진난만하게 나타나 입을 열었다.
“이제 르네는 다시 안 오겠지?”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O의 커다란 침대로 파고 들어왔다. 쟈크리느는 눈을 감은 채 0의 키스와 뜨거운 손길을 받았다. 맨 처음 손길로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다가, 그 다음에는 목소리를 좀더 높이고, 또 그 다음에는 더욱 거친 숨소리를 내다가 마지막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쟈크리느는 장미색 램프에서 흘러나온 불빛을 몸 전체에 받으면서 잠들었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두 무릎을 활짝 벌리고 상반신은 약간 모로 세우고 두 팔을 벌린 자세로. O는 쟈크리느의 두 유방 사이에 땀이 배어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시간 후 다시 O가 어둠 속에서 쟈크리느를 껴안았을 때 그녀가 O의 손을 그대로 놔둔 채 입을 열었다.
“날 너무 피곤하게는 하지 마,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