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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O의 이야기 - 2장 전편 <원제:Story of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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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3 회 작성일 24-01-09 02: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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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테판 경



사랑이란
애걸해서도 안되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자신 속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끄는 것이다;


 


 


스테판 경



O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세느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 루이섬의 오래된 건물의 다락방이었다. 방마다 창문이 달려 있고 널찍하기는 했지만 천장이 무척 낮았고 건물의 정면에 위치한 두 방은 각각 비스듬히 경사져 있는 지붕을 이고 있는 발코니를 갖추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O의 방이었다. 다른 방은 응접실과 서재, 게다가 필요에 따라서 침실로도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그 방의 난로 양쪽 벽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책이 가득 채워져 있는 책꽂이로 돼 있었다. 두 창문을 마주 보고 기다란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고 난로 앞에는 오래됨직한 커다란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짙은 녹색 천으로 장식돼 있고 가운데 뜰과 접해 있으면서 손님을 접대하기에는 너무 비좁을 듯한 곳이 그들이 식사하는 방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당을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방은 르네의 방으로 그가 옷을 갈아입을 때 사용하곤 했다.


O는 노랗게 철해진 욕실을 그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랗게 꾸며진 주방도 좁디 좁았다. 매일 사람이 와서 청소 등의 일을 해주고 갔다.


가운데 플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든 방에는 빨간 타일이 깔려 있었는데, 그것은 옛날 파리의 호텔들이 3층 이상의 계단과 무도장 바닥을 흔히 장식했던 고풍스러운 육각형의 타일이었다.


그것들을 접한 O는 다시 가슴을 찌르는 쇼크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로와시 저택의 복도에 깔려 있는 타일과 같은 색이었기 때문이다. O의 조그마한 방에는 장미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기하학적 무늬의 목면 커텐이 있었고 철판 뒤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난로가, 그리고 커버가 가지런히 정돈돼 있는 침대가 있었다.


“당신에게 주려고 나이트 가운을 사 갖고 왔어.”
 
르네가 말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걸 거야.”


정말로 손질이 깔끔하게 돼 있어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름이 있는 하얀 나이트 가운이었다. 유리를 들여다보듯 투명한 나이트 가운이 O가 사용하는 침대 끝에 펼쳐져 있었다. 이 나이트가운은 탄력성 있는 허리 부분을 가느다란 벨트로 옥죄게 돼 있었다. 그리고 가운의 천이 매우 얇기 때문에 유방이 불거지는 부분이 짧은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실내의 모든 것 ㅡ 커텐과 그것과 같은 천으로 장식돼 있는 침대 베갯머리 쪽의 나무와 기하학적 목면이 걸쳐져 있는 작은 안락의자를 제외하고는 ㅡ 은 하얀색이었다. 주위의 벽면과 사주식(四柱式) 마호가니 침대의 가장자리 장식, 그리고 바닥에 깔려 있는 가죽.
 
O는 하얀 나이트 가운을 업고 난로 앞 바닥에 앉아서 르네가 하 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은 앞으로 자신이 자유의 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야 돼.”


또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바로 나와 헤어질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만약 당신이 아직 나를 사량하는 마음이 변함없다면 당신은 자유를 완전히 포기해야 돼.”


O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이 그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은 그 이유야 어떻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자신이 그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인데도 그것을 언급한 것은 그의 순진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O는 마음속에서 ‘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더 큰 희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모르는 천하고 있는 건 아닐까? O는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뜨겁게 달아 오른 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그의 쪽을 쳐다보려 하 지 않고 시선의 충돌을 억지로 피하고 있었다.


르네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찬기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을 때는 두 무릎을 벌리도록 하 고, 두 손을 잡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O는 두 무릎을 마주 대고 그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O는 가운을 들어올리고 무릎을 꿇고서 그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O는 두 무릎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로 하얀 모피의 감촉을 살에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아직 다리를 충분히 벌리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벌리고’ 와 ‘두 다리를 벌리고’ 라는 표현이 애인 입에서 나오면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또 얼떨떨하게 만드는 강압적 느낌이 담겨지기 때문에, O는 흡사 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조건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애인이 요구하고 있는 사항은 간단한 것이었다. 즉 O는 언제든지 그의 손이 거침없이 그곳에 닿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O가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기분을 제대로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자신을 관찰할 수 있어야 했고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쉽게 이용하기 위해서만 의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것이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의미한다고 했다. 첫째는 그녀가 로와시 저택에 도착한 그날 밤에 교육받은 대로 절대로 두 무릎을 맞대서는 안 되고 입술은 반쯤 열린 채로 있어야 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런 것쯤 아무려면 어떻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ㅡ 사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 긴장된 노력에 의해서 비밀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나와 당신과의, 또 모든 비밀스러운 관계가 아닌 다른 진실된 입장을 늘 반성하게 되는 거지.


의상에 대해서는 당신을 저택으로 데리고 가던 택시 안에서 내가 강요했던 스트립쇼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편리한 의복을 고르고 필요에 맞춰서 고안하는 것은 당신에게 일임하겠어. 내일 옷장 안에 있는 옷들과 장롱 안에 보관돼 있는 속옷들을 정리해서 거들과 팬티 같은 것을 모두 내게 건네주도록 해. 마찬 가지로 몸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끈을 끊어야 하는 브래지어와 유방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컴버네이션, 앞이 벌려지지 않는 블라우스나 드레스, 또 너무 뻣뻣해서 간단히 말아 올릴 수 없는 스커트 같은 것도 정리해야 돼. 당신은 특별한 브래지어를, 특별한 셔츠를, 특별한 가운을 몸에 걸쳐야 돼.”


“그럼 양장점에 갈 때도 블라우스나 스웨터 밑에 유방을 그대로 드러내고 가란 말이에요?”
 
“물론이지, 당신은 유방을 어떤 것으로도 가려서는 안돼. 만약 누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마음이 내키면 설명을 해주면 되고, 그럴 기분이 아니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좋아. 그것은 당신하고만 관계 있는 일이니까. 그런 걸 갖추는 데 필요한 돈은 당신 책상의 작은 서랍에 넣어 뒀으니까 마음대로 써도 좋아.”


그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O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다.


르네는 난로에 장작을 집어넣고 베갯머리에 있는 우유 빛이 감도는 장미색 램프를 밝혔다. 그리고 그는 0에게, 드러누워서 자기를 기다리라고 하면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잘 것이라고 했다.


그가 되돌아왔을 때 O가 손을 뻗어 램프를 꼈다. 그것은 왼손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에 자신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것은 반짝 빛나는 자신의 쇠 반지였다. O는 어깨를 밑으로 하고 모로 드러누웠다. 그러자 애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르면서 몸을 밀착시켜 왔다. 이튿날 O가 녹색 커텐이 드리워져 있는 식당에서 실내복 차림 그대로 혼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르네는 아침 일찍 출근했고 저녁 때 밖에서 식사하려고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전화는 침실의 머리맡에 있는 램프 밑에 있었다.
 
O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수화기를 접어들었다.


그는 파출부가 다녀갔는지 알고 싶어 했다.
 
“네, 지금 막 돌아갔어요. 점심식사 준비를 해주고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 거예요.”
 
“옷 정리는 끝났어?”
 
하고 르네가 물었다.
 
“지금부터 할 생각이에요.”
 
“옷을 입고 있나?”
 
“아직 이에요. 잠옷 위에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어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운과 잠옷을 벗어.”
 
O는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너무 서둘다가 그만 침대에 올려놓았던 수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전화가 끊겨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알몸이 됐어?”
 
하고 르네가 다시 물어왔다.
 
“네.”
 
하고 대답한 뒤,
 
“그런데 어디서 전화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반지를 끼고 있겠지?”


O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알몸 그대로 옷을 걸치지 말고 어젯밤 지시한 대로 필요 없는 옷들을 꾸려두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오후 1시가 지났다. 좋은 날씨다. 따뜻한 햇살이 소리 없이 창문으로 들어와 카페트를 간질이면서 0가 벗어놓은 나이트가운과 신선한 아몬드 껍질 색 같은 가운을 밝게 빛내고 있었다. 욕실 문에도 거울이 붙어 있고 벽과 다른 문에도 붙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삼면경을 이루고 있어 왔다 갔다 하는 길에 자신의 모습을 언제든지 비춰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가운 색과 똑같은 녹색 가죽 슬리퍼 ㅡ 로와시 에서 신었던 슬러퍼 보다 훨씬 수수한 색을 띠고 있었다. ㅡ 와 쇠 반지뿐이었다. O는 목걸이와 가죽 팔찌도 차고 있지 않았고, 또 방 안에 자신 혼자뿐이었기 때문에 목격자는 자신 한 사람밖에 없는 셈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O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사에 의해 이렇게 완전히 지배됐던 적은 없었던 듯싶다. 또 이 이상으로 속박되거나 이런 상태에 처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이다.
 
서랍을 열려고 몸을 수그렸을 때 O는 자신의 유방이 우아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2시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O는 서둘러 챙겨 놓지 않으면 안 될 옷가지들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팬티를 비롯해서 르네가 언급한 옷 나부랭이 들을 쌓아놓고 보니 작은 산을 이루었다. 등 뒤에서 채우게 돼 있는 브래지어는 물론이고 겨드랑이 밑에서 채우게 돼 있는 것도 끄집어내야 했다. O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떻게 손질을 해서 간단히 풀 수 있게 만 들면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거들은 그런 생각조차 필요 없었다. O는 장미색 천으로 만들어진 코르셋 ㅡ 그것은 등 뒤에서 묶게 돼 있는 것으로 그녀가 로와시 에서 입고 있었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ㅡ 을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옷 더미에 포함시켜야 되는지 어떤지 망설였다. O는 그것을 옷 더미와는 따로 장롱 위에 올려놓았다. 르네의 의견을 듣고 처리 하면 휠 듯싶었던 것이다.


그는 또 앞이 열리지 않는 스웨터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려줄 것 이다. 왜냐하면 목이 타이트하게 조이고 머리 쪽으로 입는 스웨터라 할지라도 말아 올려 얼마든지 유방을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슬립은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장롱 속에 남아있는 것은 레이스가 달려 있는 검은 패티코트 뿐이었다. 그것은 검은 모직물로 만들어진 해바라기형 주름치마를 입었을 때 무자비한 햇살에 스커트 밑이 투시되는 걸 막아주는 것이다.


자신한테는 얄팍하면서 짧은 패티코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O는 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로 뒤집어쓰는 옷가지 대신에 위에서 아래까지 단추가 달린 망토형의 드레스를 고르는 일이다. 또 속옷도 그런 것이 필요할 듯싶었다.


패티코트나 드레스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겠지만 속옷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속옷을 파는 여주인에게 말해볼까? 자기는 추위를 쉬 타는 체질이기 때문에 갈아입기에 편한 옷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갖다 붙이면 될 것이다. O가 추위에 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어서 O는 매서운 추위를 막아내는데 빈약할 수밖에 없는 옷가지들로 겨울을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O는 간신히 일을 마무리하고 ㅡ 그래서 자신이 갖고 있던 옷 가 지 속에서 남은 것들이라고는 가슴 앞에서 단추를 채우게 되어 있는 셔츠와 블라우스, 검은 플리츠스커트, 코트와 로와시 에서 돌아올 때 업고 온 슈트가 전부였다. ㅡ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O는 난방조절장치의 스위치를 틀었다. 왜냐하면 파출부가 응접실 난방용 장작을 충분히 해놓지 않았고, 애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응접실 난로 옆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O는 복도에 있는 커다란 바구니에서 응접실용 바구니에 창작을 가득 채워 난로 옆에 옮겨 놓고 불을 붙였다. 커다란 안락의자에 몸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그가 들어왔다. 르네가 지시한 대로 실오라기 하나 몸에 걸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O가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은 자신의 업무에서였다. 사실 곤경이 라는 것은 조금 과장된 말이다. 당혹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적절할 것 같았다. O는 어떤 사진광고 대행 점의 패션 파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는 일은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새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뽑아놓은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몇 시간에 걸쳐서 포즈를 취하게 한 뒤 완벽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O의 휴가를 보고 모두 놀라워했다. 그것도 새로운 유행이 창조되는 바쁜 시기를 택했다는 점에 대해. 하지만 그것은 그것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였다. 문제가 된 것은 O의 모든 게 갑작스레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O가 변한 모습을 한 마디로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O는 휴가 전에 비해 훨씬 자세가 좋아졌고 눈빛은 더욱 맑아보였다. 뭐니뭐니해도 더욱 인상적인 것은 O의 침착하고 절도 있는 행동이었다.


O는 남성들의 업무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여성으로서 늘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침범할 수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O의 업무에 동원되는 모델들은 직업상 의상과 장신구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통과하고 말 세심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고 캐치해 냈다.


살에 바로 닿는 스웨터는 O의 유방을 너무 부드러운 곡선으로 감싸고 ㅡ 르네는 결국 스웨터를 허용해 주었다. ㅡ 플리츠 스커트를 때리는 바람은 그 밑의 윤곽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되었다. O는 늘 이런 옷들만 입고 다녔던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싱싱해 보여.”
 
어느 날,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온 게 아주 예뻐 보이고 갈색 피부와 녹색 눈에다 금발머리를 가진 슬라브 계통의 어떤 모텔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양말 대님을 매는 건 좋지 않아, 다리가 아프잖아.”


그것은 O가 그 여자 앞에서 전혀 거리낌 없이 가죽으로 씌운 팔걸이가 달려 있는 커다란 의자에 황급히 엉덩이를 내리고 앉을 때 한 말이었다. O가 털썩 의자에 몸을 던지는 바람에 자신의 스커트가 부풀어 오른 것이다. 키가 큰 그 모텔은 O의 무릎 위에 말려 있는 긴 양말과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하얗게 빛나는 허벅지를 목도했음이 틀림없었다.


O는 그 모델이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미소였기 때문에, 도대체 그 모델이 그때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그 뜻을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O는 양말을 좀더 위로 끌어당겨서 허벅지 가운데까지 올리려 했지만 서스팬더로 고정시킬 때처럼 간단히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O는 쟈크리느에게 자기 변호를 하듯 대답해 주었다.


“이게 편리해.”


“어째서 편리하지?”
 
하고 쟈크리느가 물였다.
 
“난 가터벨트를 아주 싫어해.”
 
하고 O가 대답했다. 하지만 자크리느는 O의 대답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왼손에 끼워져 있는 쇠 반지를 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O는 며칠 동안 자크리느의 사진을 50매 가량 찍었다. 그 사진들은 O가 지금까지 찍어온 것들과 비하면 색다른 면이 있었다. 자크리느가 풍기는 분위기는 이전에 같은 일을 했던 모델들과는 달랐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자크리느와 같은 얼굴, 그리고 한 육체에 서 이토록 감동적 의미를 발산하는 여자를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O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실크와 모피와 레이스 등의 아름다움을 쟈크리느에 의해서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것이었다.


겨울에 갑작스레 나타난 요정처럼 자크리느의 아름다움에 의해서 좀더 소박한 블라우스를 최고급 밍크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자크리느의 머리카락은 짧고 짙으면서 거의 웨이브가 없었다. 따라서 잠깐 누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고개를 왼쪽 어깨 너머로 돌리기 때문에, 모피를 입고 있을 때는 모피의 옷깃에 볼이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O는 자크리느의 그런 모습 ㅡ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머리카락 이 미풍에 하늘하늘 살랑거리듯 출렁이면서,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할 듯한 광대뼈가 화롯불의 따끈한 재처럼 온기를 띠고, 푸른 기가 감도는 쥐색 멍크에 파묻혀 있는 ㅡ 을 인화지에 옮긴 일이 있었다.


자크리느는 차가운 현상액 바닥에서 창백한, 아니 창백한 상태를 즐기는 여자로 보였다. O는 그것들을 짧은 회색조로 인화해 두었다. O는 자크리느의 다른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는데 그것이 그만 자신을 감동시키고 만 것이다. 광선을 등 뒤에 두고 노출된 두 어깨와 모자가 얹혀진 머리, 베일에 가리워진 눈, 그리고 모자 위 에 부드러운 새털 깃이 꽂혀 있는 사진이었다.


옷은 중세 때의 결혼식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신부처럼 빨간 실크 드레스가 발목까지 뒤덮였고, 웨스트가 옥죄여서 가슴의 윤곽 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재단사들이 예장(體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어느 누구도 입어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굽이 대단히 높은 샌들도 마찬가지로 빨간 실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자크리느가 그 드레스와 샌들과 가면을 연상시키는 베일을 뒤집어쓰고 O의 앞에 있는 동안 O는 심혈을 기울여 포즈를 수정해 주고 옷 매무새를 고쳐 주었던 것이다. 대단치 않은 일이기는 했지만 ㅡ 허리를 좀더 옥죄고 유방을 한껏 강조해 주었을 뿐이지만 ㅡ 그것은 로와시 저택에서 자신이 걸치던 드레스와 같은 것으로 잔느가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주인들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그 즉시 두 손으로 말아 올리지 않으면 안 될 드레스였었다. 두툼하고 광택이 있으면서 구김살 이 가지 않는 실크였다.


‘맞아,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자크리느는 드레스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15분 동안 포즈를 취하고 있던 모델 대에서 내려섰다. 그 모습, 그리고 옷이 스치면서 나는 소리 역시 로와시 저택에서 수없이 목격했던 여자들의 동작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예복은 몸에 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자크리느는 몸에 꼭 껴서 답답할 듯한 금 목걸이를, 두 팔목 에도 각기 금팔찌를 차고 있었다. O는 자크리느가 가죽으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차고 있으면 아름다움이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O는 처음 ㅡ 그때까지는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ㅡ 모델들이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고 하는, 스튜디오에 딸린 널찍한 탈의실까지 자크리느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O는 입구의 문턱에 서서 화장대 거울을 바라보았다. 자크리느는 옷을 벗지 않고 그 앞에 그냥 서있었다. 그 거울은 모델들의 전선을 비추고도 남는 대형이었기 때문에 O는 자크리느와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자크리느는 자기 혼자서 팔을 들어올려 목걸이를 풀었다. 자크리느의 겨드랑이에 땀이 배어 있었다. 자크리느는 늘 겨드랑이 밑을 말끔히 면도하는 모양이었다. O는, ‘놔둬도 괜찮을 텐데 왜 면도해 버렸을까? 그것 역시 금발일 덴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O는 식물적이면서 코를 자극하는 예리한 냄새를 케치 하고 자크리느는 대체 어떤 향수를 쓰고 있는 것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어서 자크리느는 팔찌를 풀어 화장대 위에 놓았다. 그 팔찌는 그 위에 놓는 순간 쇠사슬이 부딪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자크리느의 머리는 매우 밝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피부는 그 머리카락보다 더 어두워 보여 파도가 막 물러간 모래사장 의 모래처럼 쥐색을 머금은 갈색 계통의 베이지색을 띠고 있었다. 사진에는 빨간 실크가 검게 나타날 것이다.


그때 화장품을 꺼내 들고 거울 가까이로 다가간 자크리느의 시선과 O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크리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오히려 O 자신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화장을 끝낸 자크리느가 뒤돌아 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되겠는데.”
 
“응 미안해.”
 
O는 황급히 대답하고 문을 닫아주었다.


이튿날 O는 전날 작업했던 사진을 아파트로 갖고 갔다. 밖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한 애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서 갖고 온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O는 경대 앞에서 화장을 하면서 그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멈추고 사진 속에 있는 자크리느의 눈썹과 미소 짓는 볼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렸다. 그러다가 현관의 문을 따는 열쇠소리를 듣고 그 사진들을 서랍 속에 넣고 닫아버렸다.


2주일 내내 O는 그런 복장을 강요 받았지만 그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밤, 스튜디오에서 돌아와 보니, 애인이 남겨놓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그와 그의 친구 한 사람과 같이 밖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으니 8시까지 외출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차를 보내 운전수를 방까지 올려 보낸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모피 코트를 입고 옷은 완전히 검은 옷으로 통일하고 ㅡ ‘완전히’ 라는 곳에 언더라인이 그어져 있었다.ㅡ 로와시 저택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장을 하고 향수를 사용하라고 했다. 완전히 검은 옷만 입으려면 지금이 12월 중순이므로 검은 나이론 스타킹을 신고 검은 장갑을 끼고,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두툼한 스웨터나 자켓을 걸쳐야만 한다는 소리다.


O는 욕실에서 정결하게 목욕을 한 뒤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치장에 몰두해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기묘한 감이 들었다. 요사이 자신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일반적으로 이용 되고 있는 게 아니었다. O는 자신의 화장대 서랍 속에서 볼을 붉게 보이는 데 쓰는 유성 루즈를 발견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 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O는 그것을 이용해 젖꽃판을 채색 시켰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점점 진해졌다. 그래서 너무 많이 바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알콜을 사용해서 지우곤 했다. 그것을 지우려면 아주 힘이 들었다. 그런 다음 또다시 칠을 한 것이다. 선명하지 않은 칙칙한 장미색이 그녀의 젖꼭지에 칠해졌다.
 
또 O는 짙은 숲에 둘러싸인 아래 입술에도 그 루즈를 바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거기에는 루즈가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어서 O는 같은 서랍 속에 접어 넣어 두었던 루즈케이스 안에서 키스용 루즈를 또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너무 바싹 말라 있었고 입술에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O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었다.


O는 먼저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이어서 패티코트와 스커트를 입고 자켓을 걸쳤다. 또 장갑을 끼고 핸드백을 들었다. 백 속에는 콤팩트와 루즈, 빗, 그리고 열쇠와 천 프랑이 들어 있었다.


장갑을 낀 채, O는 옷장에서 모피 코트를 꺼냈다. 그리고 베갯머리 위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15분 전이었다. O는 침대 끝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시계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벨 소리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벨 소리가 들려왔다. O는 몸을 일으켜 스위치를 내리기 전에 경대의 거울을 바라보고는 자신에 가득 차고 부드러운 순종 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차에서 내려 자그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문을 멀었을 때 O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바에 있는 르네의 모습이었다. 그는 O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O의 손을 잡고 머리카락이 회색이면서 표츠맨 같아 보이는 남자 쪽을 바라보게 한 뒤 영어로 스테판경 을 소개했다.


O는 두 남자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O가 의자에 히프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르네가 작은 목소리로 옷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그는 O가 스커트 끝을 의자 밖으로 내서 펼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의자의 가죽이 내뿜는 차가운 감촉을 O는 맨 살에 그대로 흡수했다.


O의 스커트가 의자 주위에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오른쪽 발꿈치는 의자의 다리와 다리 사이를 가로지른 막대에 걸쳐져 있고, 발끝은 바닥을 짚고 있었다.


영국인은 한 마다도 하지 않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상태에서 O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두 무릎과 양손을, 또 자신의 입술까지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O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너무 냉정하고, 또 너무 치밀하면서 자신에 차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O는 마치 자신이 어떤 관찰의 대상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O가 장갑을 벗은 것도 흡사 그의 시선에 의해 강요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장갑을 벗으면 그가 말을 걸어오겠지 하는 기대 같은 것이 있었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O의 손이 조금 특이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년의 그것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성싶었다. 또 O는 왼손 약지에 쇠 반지를 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미소 지었다. 그는 그 쇠 반지를 알아본 것이었다. 르네는 마티니를 마시고 스테판 경은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위스키 잔을 비우고 르네가 두 잔째의 말티니를, 또 O가 시킨 그레이프후르츠 쥬스 잔이 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만약 O가 그들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해 준다면 지하 1층에서 ㅡ 그곳은 이 1층의 바와 연결돼 있는 방으로 크지 않으면서 조용한 곳 이었다. ㅡ 저녁을 같이 하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하고 대답한 O는 바의 카운터에 맡겨두었던 자신의 핸드백과 장갑을 찾아 들었다. 스테판 경은 O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O에게 손을 내밀었다. O는 그것 안에 자신의 손을 디밀었다. 계속해서 그가 입을 열었는데 그것은, O의 손과 쇠 반지가 잘 어울린다면서 쇠가 O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의미였다. 하 지만 그가 그 말을 영어로 했기 때문에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특히 그것이 금속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철로 만들어진 쇠사슬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말하려는 것인지 분명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지하 방에는 테이블이 네 개뿐이었다.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었는데 거의 식사가 끝나가는 듯했다. 벽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안내하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르네의 무릎이 테이블 밑에서 O의 무릎에 닿았다. 그리고 그가 O의 귀에만 들리도록 입을 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O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O는 아이스크림은 허용되었지만 커피는 용납되지 않았다. 스테판경이 O와 르네에게 자기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세 사람이 가볍게 식사를 끝낸 것은 9시 조금 전이었다.


“운전수를 돌려보냈는데, 르네, 자네가 대신 운전해 주지 않겠나?”
 
하고 스테판 경이 말했다.
 
르네가 핸들을 잡고 O가 그의 옆에 앉고 다시 그 옆에 경이 앉았다. 차가 대형 뷰익이었기 때문에 앞 좌석에 세 거뜬히 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무들이 잎을 떨구어 버렸기 때문에 아르마 거리의 교차로를 지나자 쿠르 라 렌느가 또렷하게 내다보였다. O는 아래쪽에서 따뜻한 온풍이 두 다리 사이를 따라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스테판 경이 히터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르네는 다시 세느강 오른쪽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다시 로얄교를 건너 왼쪽으로 꺾었다. 그 다리 밑을 흘러가는 물도 지금은. 돌처럼 얼어붙은 듯한 것이 아주 어두워 보였다.


O는 흑요석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돌도 어두운 색을 띠고 있다. 그녀가 열다섯 살 무렵, 여자친구 ㅡ 그녀는 서른 살이나 된 여자친구와 사량을 하고 있었다. ㅡ 는 다이아몬드를 끼워 넣은 흑요석 반지와 목걸이를 갖고 있었다. O는 반지보다도 목에 꼭 맞는 목걸이를 갖고 싶어 했다.


O는 마리온이 자신을 튜르비고 네거리 뒤에 있는 아파트로 데리고 가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애무 당하는 마리온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별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기쁨에 젖어 떨리는 마리온의 눈이 꼭 파란 별 같았던 것이다.
 
르네가 차를 세웠다. O는 이 근처가 어딘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대학가에서 리르 가 쪽으로 통하는 작은 골목 안이었다.


스테판 경의 아파트는 지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은 대저택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모든 방은 서로 문으로 통하게 돼 있었고 제일 끝에 있는 방이 가장 크고 조용한 듯했다. 그 방은 영국식으로 조 금 어두운 마호가니 가구와 회색이 섞인 듯한 노란색 천이 돋보였다.


“당신에게 난로를 봐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입을 연 스테판 경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소파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편안하게... 르네 군이 커피를 준비할 겁니다. 당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밝은 색의 다마스커스 비단으로 씌운 커다란 소파는 난로와 수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마당을 볼 수 있는 창문을 마주하고 있고, 그 등 뒤에는 가운데 플 쪽으로 난 창이 있었다.


O는 모피 코트를 벗어 그 소파 위에 얹어 놓았다. O가 뒤돌아 보자 애인과 스테판 경은 나란히 서서 O가 소파에 앉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O는 핸드백을 코트 옆에 두고 장갑을 벗었다. 소파에 히프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그 전에 스커트를 들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자신은 언제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알몸 그대로, 또 굴욕 같은 거 생각하지 않고 차분한 동작으로 앉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르네와 생면부지의 저 남자가 저렇게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한.


O는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르네가 갑자기 소파 뒤쪽으로 돌아 와 자신의 목과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얼굴을 뒤로 잡아당겨 키스를 퍼부었다. 그 키스가 너무나 거칠고 깊은 것이라. O는 숨이 막히고 몸이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듯한 열기를 느꼈다.


르네는,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말이 O의 입에서 쥐어짜듯 터져 나올 때 까지 O를 풀어 주지 않았다. 다시 O를 부둥켜안았다. O의 양손은 꽃잎처럼 주위로 펼쳐진 그녀의 스커트 위에 힘없이 늘어 져 있었다.


스테판 경이 다가왔다. 그리고 르네가 완전히 O에게서 떨어지고 O가 다시 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O의 눈에 뜨인 것은 영국인의 회색 눈빛 이였다. 다시금 무아에 빠지고 행복한 감정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O는 그가 자신에게 넋을 잃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욕심 내고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O의 반쯤 벌어진 입술과 호텔종업원들의 제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켓의 검은 옷깃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하얀 목덜미, 놀란 듯 크게 확장된 맑은 눈동자 ㅡ 꼼짝 않고 앞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ㅡ 등에 누가 저항할 수 있을까?


스테판 경은 그저 손끝으로 O의 눈썹과 입술만을 부드럽게 애무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로의 반대쪽, 즉 O의 바로 앞에 앉아서 르네가 안락의자에 몸을 던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업을 열었다.


“나는 르네가 아직 당신에게 자기 가정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고 알고 있소. 그러니 당연히 모르는 것이 많을거요. 르네의 모친은 그의 부친과 결혼하기 전에 한 영국인과 결혼을 했었소. 그 영국인에게는 첫 결혼으로 생긴 아들 하나가 있었소. 내가 바로 그 아들이고, 르네의 모친과 내 아버지가 헤어질 때까지 나는 그분의 손으로 양육된 것이오. 따라서 나와 르네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소.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은 형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오. 르네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소. 그가 나에게 일부러 그런 사정을 설명 해 주지 않아도, 또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이오. 그건 당신을 쳐다보는 르네의 시선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나는 또 당신이 로와시 저택에 있었던 여성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소.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소. 원칙적으로 당신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쇠 반지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면 다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할 권리를 갖고 있소.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약속에 지나지 않소. 우리들이 당 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좀더 중요한 것이오.


나는 르네보다 열 살이나 많기 때문에 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절대적 자유가 유지 돼 왔기 때문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내 것이 될 수 있소.


당신은 우리들의 이런 관계에 협력해 줄 수 있겠소?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부탁하는 동시에 당신의 서약을 받을 생각이오. 그것은 당신에게 복종 이상의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오. 내게 대답해 주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은, 나와 당신의 애인인 르네는 동일인이면서 별개의 육체 조건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오. 따라서 당신의 주인은 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그 말은 내가, 로와시 저택에서 당신이 경험했던 어떤 남자들 보다 더 무서운 주인이 된다는 뜻이오. 관습과 의식을 무엇보다도 선호하는 나는 향상 여기에 있을 것이오.”
 
말을 끝맺은 그는 마지막으로 ‘And besides, I am fond of habit and rites------’ 라는 영어를 덧붙였다.


스테판경의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고요한 침묵을 이끌어 냈다. 난로의 불꽃조차 소리를 내지 않고 타는 듯했다. O는 핀으로 고정된 나비표본처럼 소파 위에 못 박힌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과 시선이 만들어낸 커다란 바늘이 O의 가슴 한가운데를 적통으로 꿰뚫었다.


O는 자신의 유방과 목과 손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이야기한 관습과 의식이 자신의 육신 모든 부위, 특히 까만 스커트 밑에 감추어진 부위를 이용하려 들 것이라는 추측은 거의 틀림없었다.
 
두 남자가 자신에게 얼굴을 돌렸다. 르네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몸 가까이 있던 램프 스위치를 꼈다. 공기가 이미 난로의 열기로 정화되었기 때문에 상쾌한 기분이 감돌았다.


“대답해 보시오. 아니면 좀더 이야기를 듣고 싶소?”


스테판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르네가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동의해 준다면 스테판 경의 취향을 내가 얘기해 줄 수도 있어.”
 
그러자 스테판경이,
 
“동의가 아니고 요구지.”
 
하고 정정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은 동의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고 O는 생각 했다.”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있으리 라고는 예상하지 않고 있다는 걸 O는 알고 있었다. 어려운 것은 입을 열고 말하는 것뿐이다. O의 입술은 뜨겁게 타오르고 침이 고갈되는 바람에 입 안이 바싹 말라 공포와 갈망과 고뇌가 목을 한껏 옥죄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손은 차갑게 습기를 띠고 있었다. 어떻게 눈이라도 감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의 눈길을 추적하고, 자신은 그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그렇게 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아니면 영원토록 인연을 끊었다고 생각한 로와시 저택의 모든 기억으로 O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O가 로와시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르네는 자신을 애무의 대상으로밖에 이용하지 않았고, 그녀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소유될 것이라고 했던 그 상징도 아무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O 자신이 그 비밀을 알고 있든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이거나 그 비밀을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입을 쭉 다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자크리느 뿐 이였다. 하지만 만약 자크리느가 로와시 저택에 있었다고 하면 그녀는 왜 자신과 똑같은 쇠 반지를 끼고 있지 않는 걸까? 또 자크리느가 이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면 자신에게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걸까?


입을 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O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령만 내려지면 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내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명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노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스스로 그런 노예로 행동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들이 O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노예 입장에서의 발언이었다. O는 자신이 지금까지 르네에게, ‘당신을 사랑해요.’ 라든가, ‘난 당신 거예요.’ 라는 말밖에 쓰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마침내 O는 몸을 일으켜 자신이 하려는 말 때문에 목이 메이기 라도 한 것처럼 자켓의 단추를 가슴까지 풀었다. 그런 뒤 O는 완전히 일어섰다. O의 두 무릎과 양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 거예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있어요.”
 
O가 르네에게 말했다. 그러자 르네가 대답했다.
 
“그게 아냐, 우리들의 것이야. 자,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해 봐. 나는 당신들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뜻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스테판 경의 날카로운 회색 눈과 르네의 눈이 O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O는 그가 문법 연습을 할 때처럼 인칭만 바꾸어서 자신에게 일러준 구절을 천천히 되 뇌었다.
 
“나는 당신과 스테판경의 권리를 인정하고...”


르네가 말했다
 
그리고 O도 명료한 목소리로 따라 했다.
 
“나는 당신과 스테판 경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또 그들이 좋아하는 방법과 생각대로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고 자신을 쇠사슬로 묶을 권리를, 마치 노예나 죄수처럼, 실수 따위와 아무런 관계없이, 아니면 단순히 울리고 싶을 때는 자신의 애원과 비명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권리.
 
“스테판 경이 나한테서, 그리고 당신 자신한테서 당신을 거둬들이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
 
하고 르네가 말했다.
 
“또 내가 당신에게 스테판 경의 요구를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도 바라고 있고.”


O는 애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로와시 에서 자신에게 말한 것을 기억 속에 떠올려보았다. 지금 한 말과 그 때의 말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그때는 그의 품에 안겨 꿈속을 헤매는 듯한 비현실적 감각과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감각, 또 아마 자신은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감각이 온 몸을 휩싸고 있는 상태에서 그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악몽, 감옥 무대장치, 요란한 옷차림, 가면을 뒤집어쓴 등장 인물들 ㅡ 그런 것들 전부가 그녀를 현실 세계에서 유리시키고, 그 시간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 것인지 불안에 몸을 떨고 있었다. 로와시 에서의 체험같이 흡사 밤에 휩싸여 있는 듯한,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꿈 속 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도 확실했었다.


꿈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들은 꿈이 어서 끝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한편에서는 결말 부분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꿈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눈앞에 다가왔다. 자신이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 그것도 자신이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그 결말이야말로 자신을 과거의 추억 속에서 현실 세계로 끄집어내는 것이었고, 폐쇄적 사회와 닫혀진 세계의 실재였다는 것이 갑작스레 드러났다. 또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우연과 습관을 사방에서 침식하기 위해서, 이미 단순한 상징 ㅡ 맨 살을 그냥 드러낸 허리와 쇠 반지 같은 ㅡ 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마지막 마무리를 강요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네가 지금까지 한 차례도 자신에게 채찍을 들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로와시 저택으로 데리고 가기 전과 자신이 거기에서 돌아온 이후의 시기를 비교해 보았을 때, 두 사람 관계의 차이는 그가 이전에 배를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허리와 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배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로와시 에서 그에게 채찍질을 당했는지 당하지 않았는지 ㅡ O는 규칙적으로 채찍질을 당하고 있었다. ㅡ 자신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능욕한 남자들 모두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O는 그가 자신을 채찍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뚱어리가 결박 당해 다른 남자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소용없는 발버둥질을 해대면서 울부짖고 있는 그 광경이 그 에게 주는 쾌락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그런 사실을 자백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가 무릎을 맞댄 채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고 흐뭇한 표정으로, 당신으로 하여금 스테판 경의 명령과 의지에 복종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뜻 깊은 일인가, 또 당신 스스로 그런 지시에 따르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판 경이 다음과 같은 일들을 요구할 때, 즉 당신에게 하룻밤, 아니면 저녁때만이라도 그와 함께 있어주기를 요구할 때, 또는 파리 시내나 교외의 어딘가에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연극을 관람할 때, 내가 직접 당신을 데리러 가지 못할 경우에는 그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아파트로 차를 보내줄 거야. 이제는 당신이 말할 차례야. 승낙해 주겠지? ”


하지만 O는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느닷없이 요구하고 있는 적극적 승낙이 의미하는 이 의지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자신을 포기하는 의지이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사전에 ‘예스’라는 대답을 해주는 의사의 표시다. 그에 반해서 자신의 육체는 채찍질에 관한 한 ‘노’ 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채찍질 이외의 일에 관해서 숨김없이 털어놓으라고 하면 자신은 스테판 경의 눈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욕망 때문에 몸들 바를 모르는 것이다.


O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생기는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그의 입술이 자신을 머금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떠올려보았다. 그 순간을 조금 재촉하고 더 늦추는 것은 틀림없이 O 자신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O는 충실한 기력을 갖추고 있었고, 또 뜨거운 욕망에 몸을 불태우고 있었으면서도, 대답을 해야 된다는 강박 관념에 몰린 나머지 기운이 갑작스레 빠져달아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스커트를 꽃처럼 몸 주위에 펼치면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스테판 경이, 차분히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공포 역시 O에게 잘 어울리는군’ 하고 확실치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상대한 것은 스테판 경이 아니라 르네였다. O는 그가 자기에게 손 뻗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O는 스테판 경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눈 속에서 갑작스레 배신자로 간주할지도 모를 어떤 색깔을 캐치해 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르네에게 고정돼 있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배신이 아니었다. ㅡ 만약 스테판 경의 소유물이 되고 싶다는 기분과 르네에게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ㅡ 구분하라고 하면 자신은 털끝만큼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 이다. 실제로 자신은 르네가 그것을 허용해 주지 않았으면, 또 어느 정도 그가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으면, 그 욕구에 따르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 속에, 너무 싱겁게 복종하면 르네가 당혹해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르네가 약간의 눈짓이라도 해준다면 그런 생각들은 순식간에 씻어버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는 아무런 사인도 해주지 않고 자신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게 세 번째 재촉이었다. O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겠어요.”
 
내리뜬 시선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 위에 두고 목에 가시라도 걸린 사람처럼 힘들여 말했다.
 
“내가 채찍질을 당해야 되는 건지 알고 싶어요.”
 
라는 질문을 하고, 스무 번도 넘게 그런 질문을 던진 자신을 탓했지만 두 사람 모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잠시 후에 스테판 경이 업을 열고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가끔.”


이어서 O는 담배에 불 붙이는 소리와 술 따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위스키를 마시려는 모양이었다. 르네는 O를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있는 무인도마냥 방치해 두었다. 르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것을 동의해도, 나는 그것을 견뎌낼 수가 없어요. 또 내가 지금 약속을 해도, 나는 그것을 견뎌낼 수가 없어요.”
 
O가 말했다.
 
“당신에게 복종밖에 요구하지 않았소. 그리고 만일 당신이 울부짖거나 애원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뒀으면 좋겠소.”
 
하고 스테판 경이 말했다.
 
“아, 부탁이에요. 잠깐만.”
 
하고 O가 말했다. 왜냐하면 그때 스테판 경이 일어섰기 때문이다. 르네도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O에게 다가와 상체를 구부리고 두 어깨를 잡은 뒤
 
“자, 대답해 봐. 동의하는 거지?”
 
하고 말했다.


O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한다고 했다. 르네는 조용히 그녀를 안아 든 다음 커다란 소파에 앉고 자기 앞에 O를 내려놓으면서 무릎을 꿇게 했다. O는 그 자세에서 소파에 두 팔을 얹은 다음 그 위에 얼굴과 가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때 O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O가 몇 년 전에 본 적이 있는 기괴한 판화로, 한 여자가 타일이 붙여져 있는 방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 아이와 개 한 마리도 구석에 묘사돼 있었다. 여자의 스커트는 말아 올려지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채찍을 여자의 머리 위에 번쩍 치켜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인물은 모두 16세말 때 유행하던 의상을 입고 있었고, 그 판화에는 O의 기분을 잔뜩 상하게 하는 제목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가정의 감방’이라고.


르네는 한쪽 손으로 O의 양 어깨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름진 앓은 천이 O의 볼을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스커트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는 O의 허리를 어루만지면서 두 허벅지 사이의 부드러운 계곡에 스테판 경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이어서 그는 좀더 무릎을 벌리라고 O에게 명령하면서 같은 속도로 O의 허벅지를 받쳐 좀더 앞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O는 묵묵히 그의 명령에 따랐다.
 
자신의 육체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르네, 스테판 경의 응답, 이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비루함. 그런 것들이 자신을 매우 격렬하면서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치심이 이글거리는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스테판 경의 소유물이 되고 싶다는 바램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O는 구제 수단으로의 채찍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과정으로 고민과 비명을 희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테판 경의 두 손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을 스테판 경에게 양도했어. 그러니까 그대로 여기에 있도록 해. 그가 마음이 내키면 돌려보내 줄 테니까.”
 
하고 르네가 말했다.


자신은 로와시 저택에서 얼마나, 그런 자세로 꿇어앉아서, 누구든 욕심껏 만끽하도록, 몸뚱어리를 드러냈던 것일까? 하지만 그때는 항상 자신의 두 팔목이 등 뒤에서 결박 당한 상태로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을 완수해 내는, 무엇 하나 필요한 게 없었던 행복한 여죄수였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의 결정에 따라 반라의 상태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일어설 수도 있고 몸을 움츠릴 수도 있는 것이다. O의 약속은 가죽 목걸이와 쇠사슬과 마찬 가지로 O를 구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약속이었을까?


르네가 돌아가기 위해서 일어서고 스테판 경이 그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그래서 O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해방감과 창부 같은 느낌을 고독과 기대의 도움을 받아 만끽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O는 볼 아래에 매끄러운 소파의 회색과 노란색 실크 천과 나일론 스타킹을 통해서 무릎 아래 바닥에 깔려 있는 질 좋은 모직 카페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스테판 경이 난로 속에 넣어 둔 장작들 -이 내는 요란스러운 소리와 열기를 왼쪽 허벅지에 느꼈다. 장롱 위에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벽시계가 찰각찰각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규칙적이면서 여린 그 소리는 주위가 조용해져야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O는 수수하면서도 세련돼 보이는 취향이 엿보이는 이 방 안에 천박한 자세로 꿈쩍 않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 시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닫혀 있는 창문을 통해서 늦은 밤에 파리 시내를 달리고 있는 차의 소음도 들려오는 듯했다.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자신이 지금 소파의 쿠션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장소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까?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자신은 이 응접실에 돌아와서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스테판 경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O는 ㅡ 일찍이 이렇게 혼자 있는 상태에서 로와시 저택에서 생면부지의 남자들의 쾌락을 맞아들이고 있었지만 ㅡ 이제는 곧, 1분 후에, 아니 10분 후에 그가 다시 자신의 몸에 손대는 모습을 상상하고 목이 단단히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O는 그가 다시 문을 열고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난로에 등을 돌리고 서서 잠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대단히 낮은 목소리로 일어서라고 한 뒤, 다시 앉으라고 했다. O는 두려움과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명령대로 행동했다.


그가 O에게 위스키잔과 불 붙인 담배를 권했지만 둘 다 사양했다. O는 그때 스테판 경이 그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회색 가운을 걸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은 아주 길었고 손톱은 짧게 손질돼 있었다.


그가 O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O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의 육체를 빼앗는 것은 튼튼해 보이는 집요한 저 손이다. 지금 자신은 그 손을 무서워하면서도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가오지 않았다.
 
“옷을 벗어, 일어서지 말고 앉은 채로 자켓만을 벗는 거야.”


하고 그가 말했다.
 
O는 큼지막한 황금색 훅을 풀고 자켓에서 두 어깨를 빼냈다. 그리고 그것을 모피 코트와 장갑과 핸드백이 놓여져 있는 소파의 한쪽 구석에 올려놓았다.
 
 “당신 젖꼭지를 가볍게 애무해. ”


하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좀더 짙게 화장할 필요가 있어, 당신 젖꼭지는 색깔이 너무 밝아. ”


하고 말했다. 깜짝 놀란 O는 지시대로 젖꼭지를 어루만져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고 두 손으로 덮으려고 했다. 그러자,
 
 “아아, 그래서는 안돼.”
 
하고 스테판 경이 말을 이었다. O는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O의 유방은 연약한 상반신이 지탱하는 게 무리인 듯 흔들렸다. O는 상반신을 의자에 기대고 두 손을 허리 양쪽에 늘어뜨렸다.
 
스테판 경은 왜 반쯤 벌려 잇바디가 드러난 자신의 입에 키스를 하지 않는 걸까? 그의 지시대로 손을 놀려 단단해지면서 부풀어 오른 젖꼭지를 향해서 손을 내밀지 않는 걸까? O는 몸을 경직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여린 호흡만으로도 젖꼭지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가와서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서 O의 몸에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쥐고 있는 손을 움직여서-그것이 의식적인 행동인지 우연한 실수인지 O는 전혀 짐작 할 수 가 없었다-아직 열기를 내포하는 있는 재를 O의 유방 위에 떨어뜨린 것이다. O는 그가 그 모욕적 태도로, 그 침묵으로, 그 무관심한 듯한 행동으로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막 자신을 욕심내기 시작한 것이다.


부드러운 가운을 걸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긴장한 것 같았다. 비록 O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게 목적이라고 해도 농락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O는 자신의 욕망을 혐오하면서 자제하고 있는 스테판 경을 증오했다. 그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만이 본심이었다. 즉 그가 스스로 인내하지 못해 자신의 입술을 눌러 주기를 바랬고, 또 자신의 몸에 힘차게 들어와 주기를 바랬고, 되도록이면 거칠게 다루어 주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눈앞에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의 욕망을 억제하는 태도를 그만둬주었으면 하고 바랬던 것이다.


로와시에서 자신을 농락한 남자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애인이 자신에게서 쾌락을 맛보는 데 필요했던 단순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손은 애인의 손이었고 그들의 명령은 그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그렇지 알다. 르네가 자신을 스테판 경에게 양도해 버린 것이다.


그가 스테판 경과 O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거나 자신을 양도하는 기쁨에 빠지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예전에 둘이서 같이 여행을 하거나 배를 타거나 승마할 때처럼, 르네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을 스테판 경과 함께 소유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 공유 관계가 지금 의미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스테판 경을 위해서라는 게 어울릴 성 싶었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갈구하고 있는 것은 상대의 흔적이고 상대의 발자국인 것이다. 르네는 아까 자신이 반라 상태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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