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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德厚の野望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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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8 회 작성일 24-01-07 15:0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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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끼가 발바닥을 문지른다. 퍼뜩 싫은 기억에 부용은 품에 안은 마라천인혈정을 꽉 쥐며 움찔 했지만 등을 보이는 덕후는 무정하게 앞서가고 있었다. 흙과 물의 비율이 7 대 3인 복건은 수로가 매우 발달해 있었고, 비밀 통로조차 수로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산책하지 않을래?”


포성에 갔다 온 후 덕후가 밑도 없이 알린 통보다. 그때까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부용은 무반응이었고, 덕후는 긍정으로 제 멋대로 확신한 뒤에, 만사를 다른 이들에게 맡겨놓은 채 부용만을 데리고 여러 날에 걸쳐 여기까지 끌고 왔다. 자신이 납치 되다시피 도망쳐 왔던 상관세가로 말이다.


상관 세가에서 나고 자란 부용도 모르는 비밀 수로를 덕후는 제 집 인 양 잠입하고 있다. 용악천의 기억을 통해 상관 신지를 데리고 가출했던 곳을 되짚어가는 것이지만 부용이 알 리가 없다.


“한 마디도 하지 않는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나?”


문득 고개를 돌린 덕후가 장난스런 미소를 올린다.


“어디로?”
“좋은 거 하러.”


부용은 그것으로 답이 된 듯 눈을 내리깔았다. 호기심이라고는 한 푼도 내비치지 않는 덕후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 모퉁이만 돌면 상관세가의 심처로 향하는 입구다. 덕후는 편편한 지대를 고르더니 그 위에 장의를 벗어 깔았다.


"일단 얘기 좀 하자."


부용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가 앉았다. 한 겹의 장의 덕분에 엉덩이에 축축한 느낌은 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눈초리가 덕후를 향한다.


"상관세가는 곧 망해."


부용은 미미하게 끄덕였다. 붕 뜬 존재마냥 있었지만, 가까이 붙어 다녔으니, 따로 주의를 안줘도 고급 정보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여기까지 너를 끌고 온 것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기회?"
"과거를 쿨~하게 청산하고, 쁘띠하고 프랜들리한 제 2의 인생을 위해서 말이지."


쌍권총 포즈를 취한 채 경박하게 말하는 덕후. 부용은 오래된 담수처럼 반응이 없다. 농담이 통하지 않자 덕후는 진지한 안색으로 돌아왔다.


"뭐, 내 입장에서는 넌 그녀들과 달리 혹 덩어리니까, 그냥 사고사 같은 걸로 자연스럽게 죽어줬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이왕이면 그 금발 여자와 세트로.."


부용의 품에 있던 마라천인혈정이 은은하게 운다. 부용과 오감이 통해있는 마라는 덕후의 폭언에 항의하고 있었다. 부용은 마라를 다독이듯 쓰다듬었다. 공허한 마음에 파랑이 일었다. 덕후도 그 기색을 알아챘는지 쓰게 웃으며 덧붙인다.


"그래도 마라한테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재고를 하는 것이지."
"재고?"
"그래. 적어도 정상인이 되길 바라. 너 스스로 먹고 살 기능을 할 수 있고, 마라를 강탈당하지 않을 정도의 정상인."


부용은 갑자기 입안이 아교를 넣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정상인? 덕후가 말하는 개념이 와닿지 않는다. 그녀의 세상은 거대했다. 세상은 더운 숨결을 내뱉고 자궁부를 유린하는 괴물 그 이상은 아니었다. 작은 소녀의 몸으로 발악하고 울부짖어도 세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허락 된 것은 체념에 덧씌워진 망각뿐. 비참? 언제부터 존중받은 적이 있던가? 수치? 그런 것은 수 백도 넘는 강간에 버린지 오래다. 복수? 돌아갈 곳이라도 있기라도 한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워진 자신들인데.


-우리들를 괴물로 만들어줘요.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마라천인혈정에 심장을 대고 쓰러진 상관세가의 희생양들은 한결 같이 그런 심정이었으리라. 괴물이 된다면 자유롭겠지. 악의 존재가 된다해도 그 영혼만은 새처럼 얽매이는 것이 없으리라.


괴물이 아닌 정상인이라, 외길로만 보던 부용에게는 호기심이 들만한 소리다.


"원하는 게...있어요?"
"호오, 거래란 발상을 하다니 생각보다 망가진 것은 아니군."


후후 웃는다. 부용의 상태는 어느 정도 자기방어적 성향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완전히 파탄 나버린 자에게는 그마저 소용없다. 그러나 부용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바보취급하는 것 같아 속이 흔들렸다. 부아라는 감정이다.


"...나를 원하나요?"


덕후는 무슨 소리냐는 듯 부용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너를 안을 바에 동녀를 사서 덜 여문 보지를 유린하는 게 낫지 않나? 인형 같을 너보다는 아프다고 앵앵 울기라도 할 것 아닌가? 그 여린 마음에 멍울을 새겨주고 그걸 평생동안 지고 갈 걸 생각하면 가학심이 충족되지 않겠어?"


불한당 같은 말투가 오싹하게 느껴진다. 을러댔으니 달랠 차례라는 듯 덕후는 빙그레 웃었다.


"아직 그럴 생각은 없어. 마누라들 눈치가 보이고....베베 우는 빡빡한 가랑이를 탐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마님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는 게 우선순위 거든. 뭐, 너무 오래 살아서 만사가 권태롭다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지."


당과를 다 먹을 까봐 천천히 꼼꼼하게 아껴먹는 아이 같이 천진하게 웃는다. 종잡을 수 없는 덕후의 변화에 부용은 침묵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네가 정상인이 된다면, 한 가지 일을 해줬으면 한다."
"일...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정상인이 된다는 것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응, 정상인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 전에 상관세가와 너 사이에 계약을 갱신해야하지 않겠니? 중복으로 위약금을 물어주기는 싫다고."


계약....부용의 뇌리에 무언가 꿈틀 거렸다. 대상련에 금보옥의 곁을 보면서 계약이라는 행위에 어렴풋 감을 잡았다. 서로 준수해야하고 어기면 그만한 배상을 해야한다. 상관세가라는 절대적인 금제에 얽힌 부용으로서는 덕후의 말이 생소했다. 하지만....실패한다고 나쁠 건 없지 않은가?


대상련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거나 억지로 옷을 벗기고 강간하는 이들은 없었다. 공기처럼 희박한 존재로 취급했다.(덕후의 조언으로 일부러 관심을 차단한 것이지만) 마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희미하지만, 결심을 한듯  기색에 덕후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덕후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부용도 따라 일어섰다. 습기로 눅눅해진 장의를 돌돌 말아 덕후에게 주었다. 덕후는 한 팔에 받아들더니 상체를 약간 숙이며 손을 죽 내밀었다. 레이디 퍼스트의 자세다.


이번에는 부용이 앞서고 그 뒤를 덕후가 쫓았다. 모퉁이를 돌아 위로 올라가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힘을 주자 쉽게 열렸다.


둘이 올라선 곳은 석실이었다. 방위를 짐작할 수 없는 돔 형태로 사방이 5장은 되는 듯 했다.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라 석실 자체에 인료를 바른 것처럼 희미하게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용이 느낀 것은 뼛속까지 에이는 한기였다. 수로를 해집으며 젖었던 발이 차가운 돌바닥에 닿자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오므렸다.


"우...우...우...다 끝났어..."


무기력한 신음이 울린다. 부용은 흠칫하면서 진원지로 걸어갔다. 우묵한 곳에서 벽에 붙어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고, 그 입구의 끝에 비대한 체구의 남자가 머리를 부여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누, 누구냐!"


비대한 남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번쩍 들며 새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유령처럼 나타난 부용을 보고 안색을 하얗게 탈색시켰다. 자신에게만 시선이 고정되고 움직이지 않자 의아해진 부용은 고개를 돌렸지만, 덕후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너...너 였느냐?"


후우, 하고 안도의 숨을 쉰다. 부용은 한 때 자신의 위에 올라타 헐떡였던 남자를 응시했다. 괴뢰 가주인 민공은 부용의 품에 있는 마라천인혈정을 보고 눈을 번뜩였다.


"검을 가지고 있구나! 그, 그걸 내게 다오. 그것만 있으면 빌어먹을 용가를 없앨 뿐만 아니라 선조의 유지를 이룩할 수 있다!"


탐욕에 물든 민공은 상관부용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도 파악할 생각도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비대한 몸이 자신에게 드리워지자 부용의 미약한 결심 따위는 무너져버리고 꼼짝 못했다. 학대 당한 육신이 주인에게 거역을 못하는 것이다. 무기력하게 품에 있던 마라천인혈정을 민공에게 강탈 당하고 밀어붙이는 기세 탓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흐하하하,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천하는 나의 것이야. 잘도 나를 깔봤겠다!"


민공은 붉어진 눈으로 마라천인혈정을 치켜든 채 발작적으로 외쳤다. 민공의 손에 들렸던 마라천인혈정이 거세게 요동쳤다. 역천의 비술로 금제를 쌓은 덕분에 마검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최음제를 받은 것 마냥 상관세가의 피에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 공명은 검에 그치지 않고 석실 전체로 미쳤다. 푸르슴했던 인광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붉게 변했다. 심장이 맥동하는 것처럼 부용은 자신의 귀에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감지했다. 그것은 자신 뿐만은 아닌 듯했다. 광소하던 민공도 이상을 감지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쿵! 쿵! 쿵!


"선조의 말씀 대로군. 검과 제물, 그리고 제단이 갖춰져야, 마라천인혈정이 완성된다고."


민공은 희열에 차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부용은 죽음을 예감했다. 제물이 된 여인들도 이곳에서 죽어갔으리라. 널브러진 부용의 손발, 그리고 벌려진 다리를 보자 민공의 가운데 다리가 팽배해졌다.


"그 전에...마지막 보시를 베풀어주마."


민공은 더운 숨을 내뱉으며 부용에게 손을 뻗쳤다. 민공에게 부용은 편하기 짝 없는 계집이었다. 남들처럼 무기력한 자신을 비웃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추악한 자신과 함께 파묻어버릴 작정이다.


옷이 벗겨지고 부용의 하얀 나신이 붉은 석실에 요요하게 비쳤다. 탐욕스런 손길이 목덜미를 훑고 약간 솟아오른 유방을 쥐어짤 때도 부용은 가만히 있었다. 한순간만 참으면 끝나는 일이다. 한 순간만....두툼한 손이 비소에 닿자 부용은 참을 수 없었다.


마라천인혈정을 쥔 그의 반대편 손을 타고, 접촉한 손을 통해 민공의 사고가 적나라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싫어!"


반사적으로 민공을 밀친 부용은 몸을 후다닥 뺐다. 소녀의 미약한 반항임에도, 민공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곧 그의 얼굴이 퇴행적인 증오로 일그러졌다.


"너....네년 마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냐! 너는, 너는 그냥 숨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이다! 옛날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바로 상관세가가 말이다앗! 전대가 그러했듯 너는 내꺼다!"


민공의 절규는 부용에게 주박이 되었다. 탁한 호흡을 뱉으며 접근함에도 부용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뺨에 불이나면서 몸이 꺾였다. 비강이 막히면서 비릿한 것이 가뜩 채웠다.


민공의 입에서 잔인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계약을 하자구.


순간의 환청. 다정한 말이나 따스한 위로보다는, 신용이 없는 장난스런 속삭임. 혐오감이 치솟는다. 눈 앞의 남자에게 인지, 최초로 자각한 자신에 대해서인지, 여기까지 인도해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진 덕후에 대해서인지.


10년 가까이 정지했던 사고의 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부용은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그래도 이 년이!"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가 꺾인다. 이번에는 입안이 터졌는지 입가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그래도, 그래도, 민공의 폭력은 부용의 전신에 쏟아졌다. 감정의 둑은 이제 무너져 분출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이제 그만!"


피멍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흔들며 부용은 오열했다. 누구에게 닿을지도 모를 호소를 터뜨린다. 내가, 내가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 건데! 왜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봉인이 깨지면서 묻었던 욕구가 검은 진흙처럼 부용을 덮쳤다. 구타당하면서 부용은 울면서 동시에 화를 냈다. 차라리 나 대신 다른 이들이 당해버리라고, 이 따위 가문은 망해버리라고 악을 썼다. 더러운 이기심이지만, 최초로 솔직함이었다.


"죽어!"


악다구니 쓰며 반항을 하는 부용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민공은 칼을 들어 찔렀다. 마라천인혈정은 놀랍도록 부드럽게 부용의 유방을 절개하여 심장으로 파고 들었다.


"아?"


평생을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부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최후는 비탄과 원망으로 가득했다. 칼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작은 소를 이루었다.


"후하하하하! 이제 나는 최강이다!"
"그럼 나는 무적을 하지."


등 뒤로 끼어든 음성에 민공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끼고 석실에 어깨를 기댄 청년이 있었다.


"삼류 사이코드라마였어. 휴먼이 아니라 호러로 끝나기는 했지만."


짝짝, 박수를 치면서 덕후는 발을 뗐다.


"너는 누구냐, 여길 어떻게 온 거냐?"
"쯧쯧, 늦어. 그건 저 처자한테 진즉에 물었어야지. 흠, 너희들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니까 불필요한 질문인가?"
"흐...좋아. 어차피 마검이 완성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너를 첫 기념으로 삼아주마!"


민공은 그렇게 외치면서 검자루에 힘을 주어 뽑으려했다. 그러나 마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잡은 손을 단단히 쥐는 것이 아닌가.


"응?"


민공은 깜짝 놀라 떨치려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라천인현정은 요사한 빛을 토하며 떨었다. 석실의 불빛이 점멸하듯 깜빡이면서 요동쳤다. 먼지와 돌부스러기가 떨어진다. 흡사 통곡하는 것과 같았다.


부용이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공중 부양하는 것처럼 수평으로 오르더니 서서히 선체로 전환한다.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감겨있던 부용의 눈이 반개한다. 일반적인 검은 눈이 아니라, 사이할 정도로 붉은 혈안이었다.


마라천인혈정의 마기가 정지한 심장을 대신하여 기능했다. 단 혈액에 흐르는 것은 정기가 아니라 마기였다. 천령개에서 회음혈까지 주천을 이루고 사지백해로 퍼져간다. 일반적인 정종무학과 방문좌도로는 해설할 수 없는 기사였다.


"흐이익?"


민공은 떨어지지 않는 손을 반대편으로 뿌리치려 애를 쓰면서 부용의 변화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석실에 검붉은 연기가 치솟는다. 천장에서 벽에서 그리고 바닥에서. 그것은 각자 형체를 이루었다. 한결 같이 젊은 여인들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민공은 물론 덕후도 그 정체가 상관세가의 야욕에 짐승보다 못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음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음혼들은 부용을 향해 서서히 모여갔다. 정확히는 마라천인혈정에 감응한 것이다. 흩어졌던 혼백과 음기가 마라천인혈정을 타고 부용의 전신에 돌자, 부용의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주입한 마기가 음혼과 합쳐지자, 더욱 기세좋게 전신의 혈을 돈 것이다. 임맥과 독맥은 물론 생사현관까지 관통한 것이다. 뼈와 근육이 부러졌다 다시 이어지면서 환골탈태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무림인이 꿈에도 바라마지 않는 기연을 맞히하는 것이지만, 부용의 경우에는 그 주체가 마기라는 점, 그리고 마검령의 인도라는 점에서 유독 특별했다. 겉은 빙기옥골처럼 투명해지면서, 내부로는 상중하의 삼단전이 소통해진다. 그와 함께 부용은 천지인의 합일을 이루고 있었다.


천령개가 열리면서 무저갱에 빠졌던 부용의 의식이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두어 살 어려보인다. 누구냐고 묻기 전에 붉은 머리의 소녀는 와락 안겨들었다.


-엄마!
-마라?


실체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부용은 친근함을 느끼며 마주 껴안았다. 이 광경을 온전히 보는 것은 덕후뿐이였다. 민공의 눈에는 마라천인혈정의 붉은 운무가 부용의 전신을 덮은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깨어나면 모든 게 끝날테니까. 작별하기 전에 보고 싶었어.
-너는?
-원래대로 돌아갈거야.


마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더 이상 어미들의 심장에 칼을 박는 신세는 더는 없을테니까. 인간도 아니고 심성을 지닌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라는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보다는 부용을 살리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그런게 어디있어. 네가 사라지는 건 싫어.


마라의 소멸을 예감한 부용은 도리질했다. 마라에게 난처한 감정이 전달된다.


-웅, 엄마도 은근히 고집쟁이네. 진작에 발휘했으면 좋았을 걸. 그래도 앞으론 걱정 없겠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검은 잘 아껴 줘. 의식이 없을 때부터, 엄마들이 보듬어주는 손길은 참 좋았거든.
-가지 마, 제발. 응? 차라리 내가 이대로 죽을게.
-모처럼 살아나는건데 그런 소리하면 어떡해....그리고 난 원래 사람이 아니라 도구였잖아.
 -그렇게 따지면 나도 도구나 다름없는 걸. 우린 서로가 없으면 영원히 반쪽이야.
-반쪽...


마라의 말이 잦아들었다. 부용이 워낙 의지를 총 동원해 마라에게 엉겨붙자, 마라는 본신인 검에 돌아가지 못하고 붙잡혀 있었다. 검을 매개체로 부용을 재생시키던 마라가 붙들려버리자 컨트롤을 잃고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부용의 전신을 치달으는 마기가 방향을 잃고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라가 떼어놓고 이야기하자니, 부용은 나만 살 바에 같이 죽겠다며 더욱 매달렸다. 마라는 처음으로 감동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함께 조바심을 느꼈다. 마라가 타일러도 부용은 한번 터뜨린 감정에 함몰된 듯 부정만한다.


결국 마라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될 무렵, 누군가 접촉을 느꼈다. 고양감과 함께 청량함이 마라에게 전달되었다. 그 감각은 그대로 마라에게 힘을 불어주었다.


-아빠?


마라는 의심스럽다는 듯 반문했다. 의식을 깨워준 이래로 아빠라고 여겼지만 엄마를 대할 때 방치하다시피 하고, 위기의 순간 도와주지 못 할망정 계약 운운으로 죽음으로 몰아갔으니 불신감을 느낄 만했다. 그러나 덕후는 개의치 않았다. 마라가 여전히 자신을 맹종하여 따랐다면 오히려 불편해 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작정이냐?
-하지만, 엄마가 말을 듣지 않는걸. 반쪽짜리는 싫다구 해.
-서로 반쪽이면 하나로 합치면 되겠네.
-하나?
-뭐, 신검합일身劍合一 이라는 게 있지 않냐.


어디까지나 비유다. 알리가 없는 마라는 부용을 설득할 방법이 있다는 데 반색했다.


-아빠 천잰데?


말투에 쓴 웃음이 났다. 출저를 물어봐야 자기한테 배웠다고 할 것이 뻔하므로 덕후는 굳이 탓하지 않았다. 힐끗 옆을 보니 민공은 원혼들에게 둘러싸인 채 마라천인혈정에게 정기를 갈취당하고 있었다. 눈은 동태눈처럼 썩어 있었고, 비대한 몸집이 피골이 상접해 있어, 미이라로 변했다. 선대가 쌓은 업보를 그대로 받는 셈이니 덕후는 일말의 감흥도 없었다.


그쯤에서 덕후는 부용과 마라천인혈정에서 손을 떼었다. 마라가 부용을 설득하는 듯 했다. 이윽고 부용의 몸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심장에 꽂힌 마라천인혈정이 신기루처럼 스며들더니, 상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머리가 물결치는 듯하더니 선홍빛으로 변했다. 평범한 얼굴에 눈초리가 약간 올라서고 입술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하얀 피부와 선명히 대조되어 풋풋함과 요염함이 조화를 이루었다.


긴 속눈썹이 떨리면서 올라가자 붉은 호박빛 눈동자가 자리잡았다. 민공은 이미 생기를 잃어 재로 흩어진지 오래였다. 공중에 떠 있던 육신이 중력의 구제를 받아 땅에 닿았다. 불길하게 울던 석벽은 평소의 푸르슴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원혼도 사라졌는지 석실은 처음 왔을 때처럼 음습함은 없었다.


대신 소녀에게 아찔한 마기가 뿜어졌다. 손짓 발짓에 사람의 심혼을 송두리째 홀릴만큼 요기를 두르고 있었다. 선천적인 기운이 송두리째 마의 영역으로 탈바꿈한 결과였다.


그러나 장본인은 의식을 못하는 듯, 새로 태어난 소녀는 손발을 내려보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의식 세계에서 각성한 적은 있지만, 현실로 실체한 것은 처음이었다.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부드러운 체감에 소녀는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냄새를 맡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동시에 오랜 시간동안 잊었던 것을 자각한 것처럼 낯익었다.


"축하한다. 그런데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하나?"
"부용도 마라도 나야."
"....그럼 둘 사이만 있을 때만 마라라고 하자."
"응!"
"그런데 검은 어쨌냐?"
"안에 있어. 보고 싶어?"


마라는 심장 부위에 손을 가져가더니 그대로 쑤셔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뽑았다. 근처의 피부색이 암석처럼 거무튀튀하게 경화되더니, 위험하고 날카로운 검을 뽑아낸다. 부용이 뽑아낸 마라천인혈정은 검신만 있었다. 갈라진 부위는 생체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봉합되며 원래의 살색으로 돌아갔다.


덕후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마라의 눈이 우려를 담는다.


"질량보존의 법칙이.....으으음, 아니다. 신경쓰면 지는 구석이니까,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어."
 
마라가 걱정했던 부분은 아닌 듯 했다.


"남들한테는 그건 보여주지 마라."
"왜? 난 아직도 정상인이 아니라서?"
"자고로 여자는 말 못할 비밀을 한 두가지는 가져야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거든."


그런거야? 하고 반추하는 마라.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니 덕후는 와락 껴안고 부비고 싶었다. 정력이 약한 일반이었다면 당장 쓰러뜨리고, 정력이 고갈될만큼 매달리다가 복상사를 자극할만큼 염기艶氣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 어떠냐?"
"잘 모르겠어."


마검령의 본래 사명, 피를 보면서 날뛰고 싶어하는 마성은 발현되지 않는 듯 했다. 참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겠다는 수준이면, 마라의 속성은 마성을 누를 만큼 심지가 완성됬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아빠, 밖에 나가고 싶어."
"음, 그전에 심법 하나 배우고 가지 않으련?"


옷자락을 잡는 마라에게 덕후는 권했다. 이대로 나가면 중원의 반이 발정날지도 모른다. 덕후가 이 점을 들어 설명을 하자 마라는 잠자코 고개를 끄떡였다. 덕후는 구결을 낭송했다. 탈마의 경지에 이른 마도고수의 비급으로, 현문정종의 묘리와 상통하는 구결이 상당수 있었다. 


이미 정기신의 합일을 보고 의식이 대폭 확장된 마라는 덕후가 일러주는 구결을 한 번 듣고는 바로 소화했다. 가부좌를 틀고 마기를 통제하고 갈무리했다. 선홍빛 머리카락과 살인적인 염기는 도인을 계속할 때마다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핏빛 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것은 앞머리를 길러 내리는 것으로 해결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석실을 벗어나는 계단에 오르면서 마라는 불쑥 물었다.


"아빠, 근데 해야할 일이 뭐야?"
"아, 맞다. 세휘라고 금발 여자 알지?"
"응. 좀 이상한 여자."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속으로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덕후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랑 좀 친하게 지내라."
"그 뿐이야?"
"그래. 어찌 보면 우리 부녀지간을 맺게할만큼 인연이 깊은 사이니까. 아빠가 시켰다는 이야기는 잊고, 그냥 친하게만 지내."
"응."


세휘가 자신을 이리로 보낸 장본인이라면,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덕후를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휘는 하고 많은 것 중에 궁녀를 선택했다. 바로 덕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포성에서 유인해서 본심의 일부를 들을 때까지, 덕후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해 당혹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세휘는 올림푸스나 발할라처럼 천상에서 내다볼 위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마라의 각성을 자극했다는 내막도 모를 것이다. 서로가 신상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한 이상, 덕후는 세휘를 두고 탐색전을 할 마음은 없었다. 세휘 역시 머리가 좋고, 자신이 모르는 정보의 이점을 쥐고 있으니까. 하지만 덕후가 권모술수를 쓸 때 가장 신경 쓴 전제는, 상대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몰라야한다는 점이다. 세휘에게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으므로 차선으로 제 3자를 접근시킬 작정이었다.


이 세계에 속하면서도 근본은 어긋난 자를 통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화가 마무리가 될 것 같군요. 연말이라 갈 곳이 많습니다.  


ps- 3장 마무리입니다. 완결은 아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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