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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德厚の野望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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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82 회 작성일 24-01-05 17: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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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에 전운이 감돌았다. 대상련-천하문 VS 상관 세가로 대전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십패의 발호 이래로 잠잠했던 강호 무림에 난세가 도래하는 조짐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나 강담자들이 원하는 대로 당장이라도 땅이 울리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격전은 아직 어지지 않았다. 양측은 서한과 사자를 보내 서로 죄과를 추궁하는 척, 상대의 동향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물 밑으로 착실히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상련 육로군의 보좌를 맡은 영호 세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오늘도 서류를 한아름 들고 복도를 거닐다가 정원에 있는 형욱을 발견했다. 석등을 배후로 연못가 근처에 서 있었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흑발이 미풍에 살랑인다. 하얀 이마와 함께 곧게 뻗은 콧등, 그리고 그 아래 한일자로 다문 입술은 절제된 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반개한 형욱의 손이 검자루에 올라가는 순간,


"으왁!"


하고 세휘가 돌연 소리 질렀다. 형욱의 손이 내려가며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가라앉은 시선이 와닿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로 주눅이 들만큼 냉막했으나 세휘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춘풍이 돌았다.


"어머, 수련을 방해다는 듯한 눈초리인데...."


계단을 내려와 형욱의 다가간 세휘는 돌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한 무사는 언제나 주변을 열어두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는데, 너는 내가 소리 지르고나서야 온 것을 알았어. 아직 미숙해, 더군다나 그렇게 몰두하다가는 암습당해도 할 말 없을거야."
"장난 친걸 얼버무리지 마라."


장황하게 떠드는 세휘에게 형욱이 차갑게 말했다. 세휘는 볼을 부풀렸다.


"흥, 좀 심술 부렸다 뭐. 누구는 먹물 냄새에 절임당하고 있는데, 누구는 정원에서 호젓하게 노닥질이나 하고 있으니."
"할 말은 그거 뿐인가."


세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성격과 외모는 천양지차지만 과거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무문 출신으로 황궁에 인질로 바쳐지고, 비슷한 시기에 우희선의 눈에 띄어 다년간 보좌 역으로 뛰어다녔다. 동료라고 할 수 있지만 세휘는 형욱을 몇 번 사석으로 이용한 적이 있고, 형욱 역시 밀명 완수를 위해서라면 세휘의 안전을 신경쓰지 않고 강행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둘은 우정이라고 하기에도 적의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기묘한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머리수가 어느 정도 모였어. 낼이면 대강 열병을 할 거야. 거기서 군기 담당을 해줘."
"알았다."


왜 자신인가 묻지 않았다. 그런 형욱의 성격을 아는 세휘는 조금 진절머리 나는 표정을 지었다. 3년만의 재회인데도 이 부분은 고쳐지지 않는 것 같았다.


"오해사지 않도록 덧붙여줄게. 염 문주는 아직 위엄이 부족하고, 왕야는 전면으로 나서는 걸 꺼려하셔. 강무제를 죽인 너의 협명이라면 낭인들이 따를거라는 게 왕야의 판단이야."
"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상관에게 밉보이기 쉬운 타입이다. 그러나 그 한결같음이 세휘의 마음에 들었다. 북경에서는 표정이나 말투까지 권력에 부합해서 꾸며야 했다. 겉과 속이 다름은 세휘의 장기지만, 다른 이들도 그러니 대화하는 매 순간마다 입따로 속따로 계산을 해야한다. 그런 치들에 비하면 형욱은 대하게 편했다. 세휘는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르자 형욱의 미간이 약간 꿈틀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응? 아, 형욱 군이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왜?"
"왜냐니, 내 방중술로 녹여서 노예로 삼으려고. 나를 위해서 죽어줄 기사님은 하나쯤 확보해놓는게 좋잖아?"


형욱은 완연히 싫은 안색을 했다. 세휘는 베시시 웃었다.


"뭐, 이렇게 담백한 관계도 싫다는 건 아냐. 남자랑 관계라면 달라붙을테니 좀 끈적거리는걸 감수해야하잖아."
"담백한게 아니고 건조하고 푸석거리는 거겠지."
"어머, 형욱 군도 되받아칠 줄 아네?"


세휘가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 형욱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모난 심정까지 감추진 않았다.


"너랑 같이 있으면 그렇게 된다."
"내가? 이거 참, 3년 동안 헤어져있었는데? 혹시 잘 때 양 대신 나를 센거야?"


흐응, 하고 세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형욱의 얼굴에 바짝 대었다. 형욱은 먼눈을 하고 호수를 보았다.


"왕야한테 반한게 사실이구나?"
"큼!"


형욱은 사레를 삼키는 듯 묘한 소리를 냈다. 영호 세휘는 형욱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그녀의 입꼬리가 치켜올라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변했다.


"그래서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그런 것 없다."


세휘는 형욱이 캥길 정도로 빤히 쳐다보다가 방긋 웃었다. 거짓말이라면 형욱의 반응은 이보다 극적일 것이다. 표정은 억눌러도 몸짓이나 나머지로 감정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뭐 단단히 결심한 것 만은 사실인 것 같네. 주군을 바꾸겠다며?"
"회주께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
"바꾸겠다고 말하는거야 네 자유지만, 그런 식으로 간언하면 남의 손을 빌려서 자살하는 짓이라구? 다행히 회주님이 마음이 하해같으셔서 넘어갔지. 태감이나 첩형한테 그 소리 했어봐."


세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이 자유롭다면 손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나는 다음 날 중으로 하나뿐인 동기한테 독이 든 차를 내주거나, 독 묻은 비수로 등에다 조용히 찔러줘야 했을거야."


형욱은 세휘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안다. 소리장도에 가장 어울리는 표본이라면, 형욱은 주저없이 세휘를 가리킬 것이다. 상성으로 치면 둘은 천적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건, 가능한 그런 경우는 피하기 위해서야. 알았지?"


웃는 얼굴이 웃는 게 아니다. 형욱은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동기를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화내고 있는 거냐?"
"어?"


이번에는 세휘가 깜짝 놀란 듯 형욱을 보았다. 들고 있던 서류가 땅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았다. 형욱은 허리를 굽히며 땅에 쓰러진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세휘도 그제야 정신 차리고 흩어진 서류를 한 구석에다 모았다.


"왠 일이니? 왕둔탱이가 눈치 좀 볼 줄 알고?"
"내가 눈치가 있다고?"


눈치 없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형욱이다. 형욱은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 스스로 변화를 모르는 것 같아서 세휘는 픽 웃었다. 하나도 안 변했다는 것은 취소. 형욱은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잘 모르겠는 걸."
"그래 그래, 왕야는 어떤 분이시니? 몇 달간 모셨을테니 그냥 네가 느끼거나 판단한대로 말해 줘."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때 세휘는 자신의 안목 뿐만 아니라 형욱의 감상을 묻곤 했다. 극과 극의 인상을 절충하면 대강 틀리지 않는다는 주관적인 지론에서 였다. 형욱은 의심없이 질문을 받고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너나 회주님을 보는 거 같다. 그런데 색을 밝히고 체신을 버릴 때가 종종 있다."
"호호, 평가가 좀 짠데?"
"네 입장에서는 전문이지 않나?"


애교 뒤 농락에 있어서는 가히 독보적이니까. 정작 세휘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상체를 굽히며 손가락으로 앞섶을 당겼다. 뽀얀 앙가슴이 보인다.


"으응, 이렇게 모션을 취해보았지만 넘어오지 않던데?"
"가끔 이상한 서역어를 섞는 것은 너랑 같더군."
 
형욱은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세휘의 야릇한 포즈를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모르겠다. 세휘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후후, 뜻밖에 공통점을 발견했네."
"분발하렴. 백마 탄 왕자님~ 하고 좋아라했으니."
"호오, 지금 질투하는거니? 그렇지?"


그렇게 기고만장한듯 고개를 치켜든 세휘였지만 속내는 편지 않았다. 사실 모션을 취한 것은 한 번만 했다. 덕후는 혹한 듯 헐떡이다가 헛기침을 하며 점잔을 빼는 시늉을 했지만, 극히 짧은 순간에 오싹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지나치게 예민한 탓인지 모르지만 세휘는 다시 시도하다가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 후로 덕후는 성적인 농을 하며 세휘가 다시 한번 모션을 취할 분위기를 유도했지만, 세휘는 눈을 딱 감고 모른 척 했다. 황궁에 여인들이 왕야한테 한 조각 은총이나 제 2의 만 귀비를 꿈꾸며 멋 모르고 접근하다가 모조리 제거당한 것은 높으신 분들 사이에 쉬쉬하는 비밀이었다. 오죽하면 황궁의 실세라던 만 귀비조차 지학 때의 혈육을 사무치게 두려워해서 문후조차 마음대로 하라고 하겠는가.


"네가 보는 전하는 어떤가?"


형욱이 슬며시 물었다. 세휘는 상념을 재빨리 갈무리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너도 아닌 척하면서 관심 있었구나?"
"시끄럽고."
"글쎄, 광대의 마음을 가진 왕, 혹은 왕의 힘을 지닌 광대일까나?"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래?"
"흥이다, 내 질문을 무시한 대가야.억울하면 니 머리로 풀어 봐."


세휘는 혀를 내밀고 서류를 주워들었다. 형욱은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약간 달싹였을 뿐 굳게 다물었다. 그 순간 세휘가 지나치듯 입을 열었다.


"너는 그대로 하면 돼. 최소한 네 꿈을 배신해줄 사람은 아니니까."
"너는?"
"글쎄올시다."
"별론가?"
"아니, 내가 딱히 생각한 모습은 아니라서."


세휘는 드물게 난처한 낯빚이었다. 받아든 자료로는 기사왕이나 영웅왕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흉왕을 재림시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무심코 말하는 것이 덕후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을 세휘는 잊지 않았다.


"아직은 시험중이랄까?"


누가 누구를 시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면 형욱으로선 현기증이 돌만큼 팽팽하게 돌 것이다. 그럼에도 형욱은 망설이다가 불쑥 말했다.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응."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처음에는 낯설어 하다가 이내 이해하는 듯 세휘는 꾸밈없이 웃엇다. 세휘가 사라지자 형욱은 석등의 머리에 있는 연꽃 장식에 손을 대었다. 장식이 원래 분리 된것 처럼 형욱의 손에 잡혔다. 잘려나간 단면은 거울처럼 매끈했다. 세휘가 이것을 보았으면 필시 섬뜩해했을 것이다. 형욱은 이미 세휘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갑작스런 외침에도 동요하지 않고 원하는 목표로 발검을 마친 뒤였다. 세휘의 모습이 사라지자 형욱은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안그러면 너를 베야할지도 모르니까."
 
형욱은 장식을 원래 위치에 놓으려다가 영호 세휘가 온 복도 쪽을 바라보며 잠깐 무언가 생각에 잠긴 후 자리를 비웠다. 석등의 장식은 약간 어긋나 있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형욱은 해가 서쪽으로 완만하게 기울 무렵에 심가장에서 멀지 않는 대택지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채비를 마치고 나선 형욱은 낭인이나 장정들이 무질서하게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얼추 보아서는 3천은 넘어보였다. 한 달도 못되는 기간에 이렇게 많이 모이는 것은 천하문과 대상련 산하 문파나 방파들이 인근의 낭인과 장정들을 긁어모아 책임지고 집단 단위로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소주의 심가장까지 인솔을 무사히 마친 제자나 담장자는 긁어온 머리의 수치에 따라 할당량을 대상련에서 받았기 때문에 개개인이 찾아오는 것보다 비교적 빠른 시일에 이만큼이나 모을 수 있던 것이다. 빠져나간 액수가 제법 되어 땜질하느라 금보옥이 사재를 털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사람 조달하는데 열을 올렸다.


북쪽에는  임시로 쌓은 단이 위치하고, 그 주변에 병참인 듯한 수레가 수십 대 있고 웃통을 벗은 일꾼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쉬고 있었다. 그리고 단 앞에는 일렬로 특이한 복장을 한 이들이 있었는데, 대체로 덕후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대부분 중년이나 초로로 하나같이 몸집이 억세고 인상이 얽혀 보였다.  단상 위에서 염미홍과 세휘랑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덕후의 차림은 붉은 두건에 염색을 실패한 것 같은 알록달록한 무늬의 녹의경장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현대인이 보았다면 훈련소 포지션 짜깁기다! 이라고 외쳤겠지만, 이 시대에 알아보는 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형욱이 단상으로 올라서자 덕후가 두 팔을 벌리며 맞이했다.


"군감 나으리 오셨군!"


군감이라는 말에 형욱은 잠깐 멈칫했다. 군사를 감독하는 자리로 주로 전선을 이탈하거나 모반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군대에 몸 담아본 적이 있는 형욱으로는 낯설은 것은 아니었다. 형욱은 단상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염미홍은 머리에 붉은 빛이 도는 옥비녀를 꽂고 그 아래는 화려한 붉은 옷차림이었다. 마치 혼례복을 개량한듯 듯했다. 화장을 입혔는지 평소보다 요염하고 염기가 뚝뚝 떨어질 듯한, 가시를 숨긴 장미와 같았다.


"다들 왔으니 시작해볼까?"


세휘는 황색경장에 회교도 처럼 두건을 뜨고 눈가만 내놓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차림은 형욱과 상관 부용 정도였다. 형욱은 상관 부용이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지 궁금했으나 신경을 껐다. 나중에 세휘한테 듣기로는, 덕후가 부용을 내주지 않으면 육로군을 맡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린 모양이라 후견인 형식으로 덕후 근처에 있는 식이라고 한다.


덕후가 염미홍에게 사인을 보내자, 염미홍은 심호흡을 하고 단상 끝으로 갔다.


"여러분, 이렇게 모집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천하문주를 맡고 있는 염미홍이라고 합니다!"


활기찬 목소리로,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올리니 구석구석에까지 미쳤다. 내기를 원하는 부위에 운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무위가 일류에 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천하문 3원로와 소월하가 빡세게 굴린 성과였다. 낭인들과 장정들은 계집아이가 문주라고 자처하고 나서는데 놀랐다. 개중에는 아! 하는 탄성을 올리는 이도 있었다.


"흑룡방을 뒤집어버리고 계집아이가 문주가 되었다는데....설마?"
"뭐야, 저렇게 어렸어?"
"제법 색기는 있는 거 같구만."


중구난방 터져나오는 소리에 염미홍은 방실방실 웃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제 삼촌이나 아저씨뻘 되니 말 놓을게!"
"크하하하하핫! 오냐, 아저씨만 믿어라. 지켜주마!"
"이따 저녁에 술 한잔 따라주고!"
"흐흐흐! 맞다, 맞아!"


염미홍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가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모인 남자들은 크게 웃고 떠들어 장터 바닥처럼 변했다. 염미홍이 내기를 쓴 것을 아는 경험이 풍부한 무인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모이면서 안면을 트게 된 이들에게 넌시지 충고를 하고 있었지만 소수였다.


-여자들 셋이 모여서 그릇이 깨짐, 남자들이 모이면 솥이 깨지는군.


속으로 투덜거린 염미홍은 겉으로 떠드는 남자들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덕후의 계획대로라면 당분간 상갓집 개 신세보다 못한 처지가 되리라. 그러니 당장은 마음 껏 웃게 내버려둬도 상관 없을 것이다.


"자, 여기 계신 분은 천하문의 빈객이신 형욱 님이야. 무도한 흑룡방주의 목을 베신 고절한 검협이셔."


형욱이라는 말에 소음이 잦아들었다. 염미홍은 천하문주라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그다지 없었지만 형욱은 달랐다. 출신도 모르고 혜성처럼 나타나 십패의 수장 목을 날려버린 무림신성이었다. 소속 없이 빈객으로 머물며 수련하는 모습은 무도를 꿈꾸는 자에게 이상형이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이들은 앞으로 나와서 백 명씩 삼렬 종대로 서라."


형욱은 일부러 저음을 내며 덕후로부터 받아든 명단을 꺼내 무미건조하게 불렀다. 역시 내공이 실려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나오는 이들은 약 삼 백명 정도 모였는데 차림은 허술했으나 저마다 눈빛이 살아있는 자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염미홍이 나설 때 웃지 않거나 생각에 잠긴 자들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지나가면서 한사람씩 검을 휘두를테니 부르는 자만 한 발 앞으로 나오도록. 어기는 자는 벤다."
 
형욱은 그렇게 말하고는 칼을 뽑은 채로 종대 앞을 걷기 시작했다. 일정한 형식도 없이 장난처럼 휘둘러서 처음에는 긴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뭐하는 짓거리인지 저들끼리 속닥였다. 그러나 막상 코 앞에 칼날이 일렁임을 겪은 이들은 아니었다. 셋에 둘은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섬뜩한 예기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거나 뒤로 피했으며, 그 때마다 형욱은 그들을 한 발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검에서 기파를 내쏘아 상대가 지닌 기감이 어느 정도인가 훑도록 하는 것인데, 기대한 만큼  반응이 뜨면 부르고, 나오지 않는 이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쯤 되자 뒷열에 있는 이들 중 몇몇은 눈치채는 이들이 있었다.


"너! 나오란 말을 하지 않았다."


3열의 중간쯤 갔을 때 막 쥐상의 30대 장한이 한 발 앞서자 형욱이 경고했다. 잘 흉내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절정고수인 형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쥐상의 장한은 움찔했으나 배에 힘을 주고 따졌다.


"제기랄,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도 아니...컥!"


호흡이 꺾이는 소리가 들리며 진흙무더기처럼 장한의 몸이 쓰러졌다. 눈이 돌아 간 장한의 미간에는 붉은 꽃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점홍이 중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밖혔다.


"어기는 자는 죽는다고 했지?"


형욱은 죽은 쥐상 장한의 옷에 칼이 묻은 피를 닦으며 다음 열의 사람에 가 물었다.


"어기는 자는?"


조용했으나 역시 내공이 실려 3천의 후미에도 또렷히 들렸다. 아까는 솥이라도 깰 것처럼 시끄러웠던 바닥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질문을 받은 다음 순번의 낭인은 잔뜩 굳었으나 목청까지 막힌 것은 아니었다.


"어기는 자는?"
"죽습니다."
"그래."


그 뒤로 형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지막 사람까지 점검한 다음에 단상 앞으로 올라섰다. 안그래도 냉막한 표정이 어린 외모라해도 함부로 하기 힘들었는데 일고의 여지 없이 척살해버리고 내려보니 중인들은 불길함과 주눅감이 들었다.


"한 발 앞으로 나온 이들은 다시 일렬 종대로 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서서 앉도록."


형욱의 명에 나온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고보니 앞 열에 나선 이들은 약 백 오십 정도는되었다.


"너희들은 자질이 있다.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지금 경지보다 한 단계 이상은 올려 줄 것이다. 원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천하문과 대상련에 정식 무사가 될 수 있도록 추천을 넣어줄 수 있다. 그도 아니고 "숭검단"에 남겠다면 무의 끝을 보려는 여정에 동반자로 삼겠다."


그 말에 앞 열에 있던 이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입을 쩍 벌리거나 벼락을 뒤집어 쓴 듯 전율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원래 무공 전수는 비인부전을 핑계로 함부로 전수하지 않는다. 연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조차 금기시하여 친인 외에 보는 것을 대단한 결례에 속했다. 심지어 본 당사자를 죽여도 할말 없을 정도였다.


정식 무사가 되는 것도 그런데, 초창기는 난세라 비록 출신이 한미할지라도 꾸준히 고용되었으며, 실력만 있다면 자파 내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거나, 개방 된 무공을 터득하여 고수로 이름 날리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그러나 십패의 정체기가 오고, 수십 년이 흐르자 그때 출세했던 이들조차 기득권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구파일방처럼 문턱이 높아져 버린 것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형욱의 말은 엄청난 파격이었다. 선택받은 이들 중에서 성급한 이들은 강호무림을 호호탕탕 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살귀 같았던 형욱에게 존경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생각이 깊은 몇몇은 형욱이 받아든 명단으로 인해,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주시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형욱은 합격자들을 하나로 묶어 "숭무단"이라고 명명한 뒤에 단상 옆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숭무단원들은 어깨를 펴고 순순히 따랐다.


남겨진 이들은 선택받은 이들을 시기와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자격이 되었는데 탈락한 이의 경우에는 이를 북북 가는 이조차 있었다. 이번에는 교대하듯 염미홍이 나섰다. 그리고 그 옆을 덕후가 호위하듯 버티고 섰다.


염미홍은 단하의 일꾼에게 치워지는 장한의 시체를 잠시 주었으나 무표정했다. 아까까지 애교를 떤 것과는 달랐다. 3천명의 시선이 모인다. 보검을 뽑은 염미홍의 입에서 문득 노래가 터져 나왔다.


격정적인 음색에 어울려 염미홍의 몸이 낭창낭창한 율동을 빚어냈다. 황혼의 노을빛에 붉은 옷은 여인의 춤은 마치 축융의 무희가 화염의 옷을 걸치고 춤추는 것 같았다. 원래 예인 출신인 염미홍은 춤에 일가견이 있었고, 덕후의 연출에 힘입어 그 효과가 극대화 된 것이었다. 군웅들은 넋을 잃고 단상의 염미홍을 바라보았다.
 
"장부로 태어나 공명을 세워야지.
공명을 세움이여 평생의 자랑이 되네.
평생에 자랑거리여 이제 나는 취할 것이라.
내 취함이여 흥겨워 노래를 부르리다."


소녀의 높고 힘찬 음성이 군웅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치는 무리도 있었다. 염미홍은 검무를 추었던 칼을 높이 들었다.


"방금 것은 오의 명장 주유가 강동의 호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군영회에서 부른 노래야."


염미홍은 덕후의 대본을 암기하며 연기에 몰입했다. 아니, 이 순간만은 진심이었다. 염미홍의 눈은 생기로 빛났고 검무를 마친 전신에는 약동하는 젊음이 감돌았다. 그것이 군웅들에게 한낱 가희의 몸놀림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신임 문주로 각오와 품격을 필사적으로 담아내기 때문이었다.


여긴 모인 이들은 모두 일자무식들이었지만, 적벽전의 이야기 정도는 들었고, 강동의 대표적인 남아로 이름을 떨친 주유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 것은 여태 뜻을 펼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빗대어 볼만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 할래. 이번 상관 세가와 전쟁에서 아저씨들은 소모품에 불과해. 적의 발을 붙잡는 정도 밖에 못하겠지. 요행히 운이 잘 풀려서 전쟁이 끝난다면 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떠돌이 낭인 생활을 전진해야할 거야. 뭐, 몇몇 눈에 특별히 띄는 사람은 나나 대상련에서 고용해주겠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고."


염미홍의 어조에 중인들은 그 풍경을 머리 속에 그린 듯이 떠올리고는 몸처리쳤다. 여기 모인 이들은 농투성이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최소한 자의로 참석한 이들이었다. 평생 땅파기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 가업을 잇기 싫어서 혹은 입을 덜기위해서 모인 이들이었다. 염미홍의 노래로 감수성을 자극받은 터라 마음 속에 울리는 파문은 그 어느때보다 컸다.


"하지만 난 그러기 싫어. 아저씨들은 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일뿐이야. 재능이 없다고? 아직 찾지 못했던 거야. 무공이 없다고? 시작이 절반이라구. 소속이 없다고? 여기 이 자리에서 만들면 돼. 싸우는 데 자신 없다고? 이제부터 함께 진법을 익히면 되지."


가라앉은 중인들의 얼굴에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염미홍의 음성은 낭랑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크게 그리고 또렷히 와닿았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하나의 대를 만들 생각이야. 이름하여 군영대라고 짓겠어."
"이름을 짓는 거야 좋지만, 어떻게 싸워 이길 생각입니까?"


명단에 뽑혔으나 탈락한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염미홍은 고개를 끄떡였다. 미리 심어둔 바람막이었다. 먼저 공대를 하게 함으로서 중인들에게 은연중에 문주의 위엄을 주입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탈락하신 아저씨들은, 자질이 있어. 안타깝게도 저 절정 고수님의 기준에서는 약간 미달일 뿐, 자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아저씨들은 앞으로 나눌 대오의 분대장이 되어주어야 해. 여기 단하에 계신 분들은 사정상 퇴역하셔서 그렇지, 대명제국의 병사 출신이시니 고문 자격으로 분대를 운영하는데 도와주실거야."


염미홍의 말에 탈락한 이들은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그러자 아까 질문했던 이가 재차 물었다.


"분대장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서 당사자는 주변으로부터 엄청나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안그래도 탈락했는데 더 떨구려는 수작으로 비칠만했다.


"아니요, 적당합니다. 알다시피 이 강남 땅은 강호가 종횡으로 얽혀 이동이 어렵거든. 그래서 효율적인 이동을 위해 분대를 작게 나누는 것이지."


그 말에 당사자는 알아들었다는 듯 얼른 자리에 앉았다. 계속 서 있다는 주변의 눈빛에 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우리 군영회 소속은 모두가 하나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 일당백으로 적을 무찌른다 한들, 죽으면 다 소용없어. 그것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적이 공격하면 우린 물러나면 돼. 적이 멈추면 우리가 도발하면 되고.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가 쳐들어가서 싸우면 돼. 적이 도망가면 우린 추격하면 되고."


이 4가지 전술 원칙은 마오쩌둥의 유격 교본으로 무기와 숫자가 모두 열세인 조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오의 전술은 역대 중국전쟁사에 자주 쓰이는 패턴이었다. 덕후가 표절하고 염미홍의 음성을 탄 이 원칙은 효과적으로 입안되었다.


"오늘 이후로 군영회에 남겠다면, 그리고 내 지휘를 받겠다면 이 네가지는 꼭 기억해 줘. 신나게 싸우고, 악착같이 살아 남자."
 
무인의 명예나 영광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사실 염미홍의 발언은 강호무림의 도의로는 비겁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가진 게 한 몸 뿐이고 밑바닥 진창에 뒹굴었던 이들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녀는 적수공권으로 흑룡방을 뒤집고 천하문을 개파한 여걸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눈 앞의 소녀가 처음과 같이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자신을 이끌 지휘자로 최초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였다.


염미홍은 탈락한 이들을 한 사람씩 부르며 대오를 정돈해갔다. 당장 100개가 넘는 분대가 완성되자 염미홍은 시범 삼아 이들을 다시 배치했다. 정연함은 없었지만 염미홍의 연설에 감동받아 자발적으로 움직여 금새 정리 되었다. 염미홍은 첫 지시가 순조롭게 먹히자 허리 춤에 손을 얹고 경쾌하게 외쳤다.


"오늘은 뜻을 세운 기념비적인 날이니 술과 고기를 넉넉히 준비했어. 허리끈을 풀고 마음 껏껏 먹고 죽자고! 내 말이 마음에 안들어서 떠나 갈 사람은 가고!"


일꾼들이 수레를 단상 앞으로 내오더니 덮개를 벗었다. 밀봉된 술과 푸짐한 안주가 등장하자 군영대원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싸구려 탁주와 곰팡이가 핀 음식이 아니라 최소한 중류 이상의 음식점에서 조달한 먹거리였다. 곧 흥겨운 먹자판이 벌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염미홍은 등을 돌려 단상 뒤로 내려섰다. 층계가 없기에 덕후가 손을 내밀자 거기에 의존해서 내려왔다. 땅을 딛고 서자 긴장이 풀어짐과 함께 덕후의 품에 기대는 형세가 되었다.


"나, 뭐 실수한거 없었어?"
"최고의 연기였어. 내가 다 반했다니까."
"에이, 다 자기의 예측 범위에 들어있잖아?"
"내가 무슨 만능 마술사냐?"
"응."


품에서 떨어진 염미홍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아니야? 하는 되묻는 표정에 덕후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인지라 덕후는 어쩡쩡하게 머물거렸다. 염미홍이 심술궃은 웃음을 지었다.


"부정은 안하는 거보니...혹시 왕자병 증세가?"
"나 왕자 맞거든? 이거나 먹어."


염미홍에게 품에서 단환 하나를 꺼내 삼키라는 손짓을 했다. 염미홍은 순순히 삼키며 눈으로 물었다.


"초강력 술 해독제다. 천일주를 당일주로 해줄만큼 효과가 좋지. 가서 마무리하고 오라고."


술판에 끼어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술은 첫날 만났어도 당장 호형호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방금 먹은 약이면 군영대 전부와 술 내기해도 지지 않을 것이다. 염미홍은 군영회에 난장판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잠시 주저하는 낯이었다.


"내가 가도 괜찮을까? 아저씨들이 워낙 많아서..."


거세불안증인가, 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덕후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염미홍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너만의 세력을 만들 기회야."


용장도 지장도 못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얻는 것 뿐이다. 다른 여인들에 비해서 염미홍의 장점이라면 세사를 읽는 일에 민감하고 필요하면 냉큼 자신을 낮출 줄 안다는 점에서 적임이었다. 유교에서 거창하게 말하는 예의지신이 아니라, 건달패들을 하나로 뭉치는 협객의 논리라도 좋았다 . 아직 어리고 경험이 적은 염미홍에게 덕후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구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고비마다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덕후의 이런 행동도 엄밀히 말하면 인재란 자원에 투자를 하는 것이지만, 염미홍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이래도 되나? 어쩐지 월하한테 미안해지는 데."
"네가 자체적 힘을 가지는 것도 소월하의 짐을 덜어주는 측면도 있어. 서로 반목할 수 있지만, 월하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덕후는 헹, 하고 코웃음쳤다. 이렇게 거창하게 이벤트 연출한 것은 소월하에 대한 복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염미홍의 표정이 갑자기 격양되었다.


"다른 여자들도? 상공도?"


기습적인 질문이 터져나왔다. 덕후는 가볍게 한 방 먹은 약간 얼떨한 표정이었다. 염미홍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여기는 지 당황하여 사과했다.


"미, 미안해. 딱히 의도가 있는건 아니구."
"미홍아."


덕후는 염미홍의 손목을 붙잡으며 횡설수설하려는 것을 제지했다. 염미홍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덕후는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이 나도록 애썼다.


"나도 예외는 아니야."
"...응."


알았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덕후는 그 기운 없는 음색에 이해가 없음을 알았다.


"네가 상대가 옳고 그름을 가리려면, 그 언행을 우선해야지 상대의 신분을 먼저 봐서는 안 돼. 지적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가슴 한구석에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해."
"하지만 상공은 왕이잖아?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가 될 수 있다며? 그리고 황제의 명은 지엄해서 어기면 구족이 성치 않다고 하는데. 황제의 혈육인 왕의 명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상공이 명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지 않아?"


염미홍의 물음에 덕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무거운 안색으로 열었다.


"그 이야기는 누가 했지?"


염미홍은 주눅이 들어 눈치를 살필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 딴에는 언급한 사람한테 피해가 갈까 그런 것 같았다. 덕후는 속으로 참을 인 대신 십팔번과 십장생을 번갈아 열 번 되뇌었다. 방금 전까지 잘난 척하던 자신에 대한 엄청난 자책이었다.


-어리석었다.


눈 뜰 때부터 황궁이라는 복마전에 태어나, 걷고 말하는 것보다 권모술수 부터 아로 새긴 자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온 전생의 이력과 공략본에다 꾸준한 현지정보 갱신으로 거의 신에 가까운 예지를 지닌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진행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강호에 나와 자유의 공기에 취해 자신의 여인들은 예외이거나, 자식을 보고 나서 안착된 훗날 일거라는 안일한 판단을 마음 한구석에서 해버린 것이다. 덕후가 모르는 사이에 한 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벌써부터 내부 자리의 포석에 들어간 것이다. 그나마 권모술수에 덜 노출된 염미홍만이 단편적인 언질을 받고는 끙끙 앓다가 우연찮게 감정을 폭발해버린 것이고.


여기는 게임 속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다. 주변 사람은 NPC들이 아니다. 전생과 비교하서 가치를 낮게 취급할 수는 있어도, 본질까지 폄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바보인 척을 했더니 진짜로 바보가 된 셈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벌 주지 마. 응? 내가 잘못했어. 감히 상공을 떠보려 했던 거 잖아요."


덕후가 모두 다 알고있다고 지레짐작한 염미홍은 사색이 되어서 덕후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아 덕후는 가만히 포옹을 했다. 덕후의 품에 안긴 염미홍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팔에 느껴지는 약력이 불안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일단은 상관 세가와 전쟁에만 집중해."
".....응."


염미홍은 당장 급한 불을 끈 듯 안도하며 답했다. 그러나 덕후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기회에 너만의 세력을 확실히 만들어."
"상공과 적이 되는건 싫어. 차라리 죽으라고 해."


어두운 예감에 염미홍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든다. 덕후는 으득, 하고 이를 갈고 말았다. 초기에는 왕야라는 신분에 놀라긴 해도 덕후의 달램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염미홍이다. 그런데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우희선과 염미홍, 소월하 사이의 알력에 끼여서 어느 정도 실세를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적으로 돌리라는 게 아니라, 나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울 만큼 세를 확보하란 말이야."
"싫단 말이야! 상공이 원하는대로 하면 나를 다른 여자처럼 견제할 거 아냐?"
"서로 견제하고 이용하려 드는 건 당연한거야. 오래전부터 세상이 그걸 요구하고 있고, 선악으로 구분할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다고 내가 아내들을 가짜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잖냐. 이건 이거 그건 그거 구분하지 않음 평화가 깨지니까 선을 긋는 거고. 왜 그걸 몰라?"
"그러니까 그게 싫다구! 알고 있니까 더 싫은거야!"


염미홍의 외침은 생떼에 가까웠다. 다행이 단상 아래 뒤였기에 망정이지 단상 앞이었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덕후는 그렇게 싫으면 떠나! 라고 외쳐려다가 주저앉아 우는 모습을 두고 도로 삭였다. 아녀자의 쓰잘데기 없는 감상일지도 모른다. 허나, 염미홍의 마음까지 어찌 부질없다 하리오. 말라붙은 내 가슴에 순결한 눈물을 더하는데.


"이번 일이 마무리 되면 둘이서 튀자.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여관 하나 잡자. 당신이 음식 만들고 내가 손님 접대할게. 그리고 밤이면 같이 얘 만들기도 하구...지,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람."


활기차게 말하던 염미홍은 잠깐만 연발하며 눈물을 그치려고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망가진 수돗물럼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덕후는 가만히 염미홍의 머리를 안았다. 가슴 섶이 축축해져갔다.


".....난 최악의 여자인가 봐."
"최저의 남자야. 날 원망해."


한동안 안겨 있던 염미홍은 갑자기 덕후를 밀쳤다. 어둠속에서 그녀의 눈이 삵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이렇게까지 울며불며 매달렸는데 포기 안해?"
"독이 올랐네. 좋군 좋아."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하기는 커녕 기세 올렸다고 반가워하는 덕후에게 염미홍은 질려버렸다. 대체 이 사람이랑 함께 지내면 재미있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야? 과거의 자신이 눈 앞에 있다면 너냐? 너냐? 를 연발하며 바늘로 마구 찔러줄 것 같은 충동이 든다.


"...월하가 상공을 꺼려하는 이유를 좀 알거 같애."
"이 것만은 감히 약속하지. 너희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둘게. 가고 안가고는 너희들 마음이지만."


염미홍은 아리송한 얼굴을 하다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느글거리는 표정을 짓다가, 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성큼 걸음으로 군영대 쪽으로 걸어갔다. 덕후가 원래 제시한 목적이야 어쨌든 술을 퍼마시면서 응어리를 풀고 싶으리라.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겠지만.


"미움 받아버렸네요."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 상관 부용을 재우고 온 영호 세휘였다. 덕후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쪽은 군영대와 다른 구석에 있는 숭무단이었다. 군영대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없었지만 조용히 자작하는 풍취가 있어 보였다. 아까까지만해도 한 무리였는데, 갈라지더니 벌써부터 특색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
"최악의 여자...부터요."


덕후는 침묵했다. 무언의 강요로 받아들였는지 세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요, 사실은 같이 여관을 꾸미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알은 체 하기도 그래서 모른척하고 있었던거라구요."
"처음부터 들었다고 가정하고 있어."


덕후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고개를 돌려 세휘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감정의 편린도 없었으나, 세휘의 생존본능이 최악의 타이밍에 왔다고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여기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진짜 목이 날아갈 수 있다. 무공으로 보면 그보단 자신이 우위에 있지만, 그가 진심으로 작정하면 무의미한 우열이다.


"네, 뭐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죽더라도 이해하고 싶은 게 있어요. 스스로를 사랑있게끔이라니, 무슨 소리죠? 길을 열어둔다는 것은 또 무엇이고?"
"알아서 뭐하게?"
"너희라고 했으니 저도 포함되는 거 아닌가요? 후보지만요."


세휘는 곧 꺄아꺄아~ 하고 몸을 꼬았다. 그리고 덕후는 세휘의 기분을 친절하게 급랭시켜주었다.


"너는 열외야."
"...매정하군요."


세휘는 풀이 죽은 시늉을 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있었던 살기가 슬그머니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내심 안도했다. 어쨌든 한 고비는 넘긴 것이다. 기운을 추슬린 세휘는 덕후가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를 캐물을까 충고했다.


"여자로서 말하죠. 뭔가 사명감이나 책임을 느끼는 거 같은데 적당히 하는 게 좋아요."
"그런게 아니야."
"그럼?"
"청소하는 거지. 내가 버려둔 것에 대한, 한 때의 흥미로 방치된 것에 대한 정리."
"그런 걸 보통 책임이라고들 합니다만?"
"아니, 굳이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수습은 해두고 싶어."
"그럼 고집이라고 할까요?"
"아집이 좋겠군. 내 결심에 대한 아집."
"우와, 굉장히 삐뚤어진 발언이네요. 듣기 좋은 말을 두고."
".....책임은 나눠갈 수 있지만, 아집은 아니니까."


거기까지 말한 덕후는 군영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염미홍이 술을 주는 대로 덥석덥석 마셔대자, 주변 남자들에게 찬탄과 함께 엄지 치켜세움을 받고 있었다.


"좋아, 적을 칠 방패들과 비수의 틀이 얼추 짜였군. 떠날 준비는 되었나?"
"필요한 물자랑 숙소는 배치해두었습니다."
"간세는?"
"세 명 파악 했어요."
"다행이군, 억지로 부용을 데려온 수고를 해서. 고생 했어. 물러가 쉬도록 해."
"왕야께서는?"
"저러다 뻗으면 침실로 모셔드려야할 거 아닌가. 약간의 다툼이 있긴 했지만 사랑하는 마누라니까."


덕후는 씩 웃었다. 세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네네 하고 한숨을 쉬고는 물러났다. 홀로 남겨진 덕후는 대지에 드러누웠다. 팔을 올려 머리깍지를 한 채 하늘을 보았다. 은하수가 눈에 들어왔다. 현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장부로 태어나...."


누군가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다. 그와 함께 별빛이 점점 밝아져갔다.


 


 


 


 



군영회 노래 가사 임의로 각색하였습니다. 원문과 틀리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전 화 프로파일에 우희선에 대해 빠진게 있는데, 현재 그녀의 직위는 "후侯" 입니다. 즉, 제후의 반열이라 덕후 앞이니까 고개를 숙이지, 소림방장한테도 절을 받는 입장입니다. 나머지 무림방파야 말할 것도 없지요. 공신의 후손에 황족인 화명사태의 후임으로 밀천회주가 되었기 때문에 받았다는 설정입니다. (소설이니 가능한 편법입니다. 네.) 어쨌든 현재 금의위장, 제독태감들, 첩형들이 다 그녀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덕후랑 짝짜궁한 결과물이지요.(...)



케릭터 프로파일 #7


신도 형욱 : 무공 95 지모 61 정치 53
모티브 : 우에스기 가케카츠, 미야모토 무사시
내   력 : 신도 세가의 무남독녀.
10세에 첫 살인을 했다. 그후 가주의 명에 따라 궁녀로 들어간다.
우희선에 눈에 띄어 번역으로 종사했다. 이때 같은 소속인 영호 세휘와 인연을 맺는다.
사퇴 후, 구변진 복무와 왜구 토벌에 종군하여 살검을 익힌다.
귀환 후에는 우희선의 명을 받아 덕후를 호위하다가 은혜를 입어 본적을 옮긴다.
소유한 무학으로는 화산파의 검공, 그 중에서 독고구검을 각별히 익혔다. 또한 동영에 발원한 연혼쇄옥류를 습득. 훗날 두 검공의 특징를 융화시켜 선수필살과 후발섬인의 요체로 집약된 검류를 창안한다.
웃는 일이 평생 손에 꼽힐 만큼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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