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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德厚の野望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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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4 회 작성일 24-01-05 16: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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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한 분위기가 소주 일대에 흐르고 있었다. 안팎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심가장의 한 객소에 두 여자가 입구에 서서 정원수 너머의 높은 담벽을 보며 감상을 토로하고 있었다.


"어째 좀 부산스럽네? 영웅 대회는 이미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붉타는 듯한 적색 경장을 입은 염미홍과 옥의를 입은 소월하의 미태는 불과 물의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아서 거리로 나가면 주변의 눈길을 한 눈에 끌 것 같았다. 실제로 객소 앞을 드나드는 남자 치고는 그녀들에게 눈길을 던지지 않은 이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수작을 부리려고 가까이 접근하는 이들은 없었다. 입구에 험상궂은 거한이 사천왕처럼 우뚝 서있기 때문이다. 거한은 순억으로 염미홍의 지기이자 천하문의 전속 숙수였다.


"정말로 상관 세가랑 붙을 생각인가?"
"가능성 높죠. 정식으로 동맹 요청이 들어온게 너무 일러요. 한 반 년 정도로 생각했는데. 한 달 만이라니...심가장 사태도 뭔가 수상쩍고."
"그 인간이 개입했을테니까."


염미홍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소월하의 아미가 약간 휘어졌다.


"너무 확신하는군요."
"으응, 꼭 안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니구, 잔머리는 워낙 팽팽히 돌아가잖아. 소 군사도 솔직히 그런 부분은 인정하지 않아?"
"네...."


소월하는 마지못해서 동조했다. 덕후는 다른 건 몰라도 권변權變에 대해서는 무척 뛰어났다. 몸을 사리지 않는 이간계로 조부 이불상이 톡톡히 당했고, 자신 역시 무림에 출도한 계기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황궁 출신이라서 그런지도 몰라.


그런 점이 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황태자에 버금가는 신분이 매타작도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자존심을 용궁에다가 맡기고 온 마냥 헤헤거리는 사람. 지현과 안면이 있어도 거들먹거리는 무리들을 적지 않게 보아온 소월하는 그 점이 두려움으로 와닿았다. 몸을 섞은 사이지만 아무생각 없이 대하기에는 부담이 있다. 그것이 소월하의 심정이건만, 주군인 염미홍은 빨리라도 만나지 못해 안달인 상태다.


-바보 같이 뭐가 그렇게 즐거워?


그러다 소월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염미홍이 천하문에서 과외(?)로 많이 혹사 당한 것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일문의 주인에 어울리게, 여자라고 얕보이지 않도록 스파르타로 교육 시켰으니 이래저래 쌓이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선객이 있나요?


청아한 음성이 와닿는다. 소월하와 염미홍, 그리고 입구를 지키던 순억까지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백의를 기조로 한 한쌍의 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한 걸음 뒤에 서있고, 말을 건넨 한 명은....너무도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월하와 염미홍이 말문을 멈춘 것은 그 것만은 아니었다. 금발,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금을 무수한 가닥으로 아주 가느다랗게 연성하고, 호수의 심층을 퍼다가 조각하면 저리 될까 하는 벽안이다. 그리고 피부역시 잡티 없이 깨끗하고 이목구비 역시 심혈을 기울인 명장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시대의 감각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눈 앞에 있었다. 건드리면 환상처럼 덧 없이 사라질 거 같은....


"천사?"


염미홍은 문득 덕후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서쪽나라의 천사를 떠올렸다. 순백의 옷과 날개를 입은 이들이 눈 앞에 현신한 것 같았다. 금발벽안의 소녀는 염미홍의 속내를 안듯 생긋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영호 세휘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빈 방있나요?"
"아, 예, 자리는 있고요."


얼결에 대답하는 염미홍을 두고 소월하가 눈치를 주었지만, 영호 세휘라는 소녀는 여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마님, 방이 있다고 하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마님이라는 소리는...."
"그 호칭은 쓰지 말라면서요?"
"....아니 됐다."


여인은 몸에 벤 듯 우아한 걸음으로 왔다. 이번에 염미홍과 소월하는 여인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영호 세휘가 워낙 이질적이라 눈이 가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절세 미녀라고 할만한 미모였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목덜미 아래 둥근 어깨와 쇄골, 그 밑에 풍만한 가슴이 백의 안에 감춰어져 있었다. 영호 세휘가 인형 같다면 이쪽은 현숙한 귀부인 처럼 섬세하고 고귀한 분위기를 내재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경애와 보호가 당연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이 염미홍과 소월하의 마음에 거리감을 만들었다. 소월하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닌가요? 이곳은 단독으로 예약 받은 곳인데요."
"어머나, 집사가 실수 했나보네요. 호실은 맞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두 분 참 좋으시겠다."
"뭐가요?"


염미홍의 물음에 생긋 웃으며 말하는 영호 세휘는 순억을 가리켰다. 순억은 영호세휘와 여인의 미태에 홀려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쪽처럼 좋은 바람막이가 없거든요."
"어? 아, 아, 가, 감, 감사합니다."


더듬이가 된 순억, 염미홍은 보이지 않게 이를 갈며 등뒤로 가 그의 술통 같이 두툼한 허리를 꼬집었다. 순억의 인상이 대번에 험상궂어졌다. 영호 세휘가 깜짝 놀란 듯 걱정스럽게 묻는다.


"어머? 어디 아프세요?"
"아니에요. 바람막이 임무에 충실하느라 가끔 표정 연습하는 겁니다."


염미홍이 재빨리 말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순억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사방으로 눈을 부라렸다. 사실은 꼬집은 허벅지를 여기저기 비틀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지만. 영호 세휘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염미홍은 얼른 손을 놓으며 물었다.


"통성명을 안했네요. 저는 염미홍이라고 하고, 이쪽은 제 친구 소월하, 그쪽은?"
"이 분은 우희선 마님이십니다. 바람 피우신 남편을 찾아 경사(수도 부근, 즉 북경 근처)에서 예까지 내려오셨죠."


우희선의 몸이 움찔했다. 어처구니 없어 하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염미홍은 바람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머나, 그 인간 참 못된 사람이네요. 이런 귀부인을 두시고 바람이라니... 경사라니, 정말 먼 길을 오셨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남자란 원래 토끼같은 마누라를 두고서도 여우 같은 년이 지나가면 절로 눈길을 준다잖아요. 우리 마님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해주신답니다."
"마음이 넓으시군요. 저 같으면 다리부터 분지르고 볼텐데."
"호호호, 이제보니 화끈한 여장부시네요."


둘의 수작을 지켜보던 소월하는 여우같은 년은 영호 세휘를 가리키는 것이라 속으로 태클을 걸면서, 줏대없이 넘어가는 상전에게 절망했다. 좀 생각이 있으면 수 백리도 넘는 거리를 달랑 여자 둘이서 올 리가 없잖은가? 게다가 그냥 귀빈도 아니고 동맹의 자격으로 왔으니 초특급이다. 아무리 빈객들로 미어터져도 푸대접할 작정이 아니라면 독방 원칙일 수 밖에 없다. 그걸 무시하듯이 왔으면 꿍꿍이가 있을거라는 건 뻔할 뻔자가 아닌가!


"남편이 누구죠? 성함이랑 인상착의를 알려주신다면 제가 대신 찾아드릴게요."


염미홍의 오지랖 기질이 발동했다. 구파일방의 시절에 정보망하면 개방 그 다음으로 하오문을 쳤고, 천하문은 하오문을 계승했다. 다른데는 몰라도 최소한 강동 일대는 앞마당이나 다름 없었다. 영호 세휘는 우희선의 눈치를 살피는 척 보다가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분은 주 씨 성에 남경에서 가장 큰 집의 주인이시죠."
"엑?"


염미홍은 화들짝 놀랐다. 영호 세휘가 가리키는 남편이라는 작자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외면하고 있던 소월하도 긴장한 표정이다.


"접근한 저의가 무어죠?"
"첫 인사일까요? 같은 상공을 모시는 처지에 미리 친해두려구요."
"은근슬쩍 묻어가지 마렴."
"마님, 제가 비록 부록 같은 입장이지만 별미 쯤은 있는게 좋지 않아요. 그래야 바람을 덜 피우죠."
"후우, 상공은 그런 분이 아니란다."
"웃흥~, 그 분을 어서 빨리 뵙고 싶네요. 우리 형욱이도 함락 되었을까나."


우희선이 점잖게 제지 하려고 시도 했지만, 영호세휘는 구렁이 담넘듯이 유들하게 흘려내다가 자기 망상을 주체하지 못하고 양뺨에 손바닥을 대고 꺄아꺄아~! 환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염미홍의 질린 표정에 우희선은 난감한 듯 했다.


"얘가 가끔은 이렇답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래요."
"아, 네에,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별 말씀을."


소월하는 염미홍과 우희선의 만담 같은 사과를 지켜보면서 낯빛을 굳혔다. 염미홍이 헤실헤실 넘어가도 군사인 자신이 바싹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경종이 울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우희선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렇게 의심하실 것은 없어요. 본 천은 그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테니까.
-본 천이라면, 설마?


전음을 받던 소월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떴다. 북쪽에서 귀빈이 온다는 전갈은 받았지만, 형욱의 배경과 연관을 지어 신도 세가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였다. 염미홍이 무언가 발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구 밖으로 쏜살 같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서방님~!"


오 장 안 되는 거리에서 덕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방문을 알리기 위해 대전로 들어갔던 형욱이 동행하고 있었다. 덕후는 염미홍이 달려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같이 달렸다.


"아이고, 여보야~!"


희극적으로 들리는 소리를 하며 둘은 백주대낮에 와락 안겼다.


"어이구, 잘 지냈어? 못본 사이에 피부가 많이 상해진 것 같네."
"그러는 우리 오빠도 마찬가지네."


찰떡처럼 붙더니 서로 손을 뻗어 얼굴을 매만진다. 주변에서 남우세스러워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봉을 만끽하고 있다. 입술이 가까워지려는 찰나에 보다 못한 형욱이 둘의 목덜미를 잡아서 분리시켰다 .


 "체통을 지키십시오!"


형욱은 퉁명스레 꾸짖었다. 그리고 노상에 있을 때 남녀 관계에 대해 올바르면서도 상식적인 설교를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 찰나였다.


"꺄아~ 형욱군~"


이번에는 영호 세휘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형욱은 누군가 접근한 것을 알고 검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뽑지는 못했다. 상대를 알아보고는 형욱의 얼굴에는 모처럼 부동심이 깨지고 경악이 그득했다.


"너, 너는..?"
"응~나야. 형욱 군이 보고 싶었어. 형욱군은 나 보고 싶지 않았지?"
"그, 그럴리가....그런데 너는 여기에 왠 일이지?"
"마님을 봉행하느라고."
"마님?"


저기, 라며 눈짓을 주자 형욱은 우희선을 알아보고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부복했다. 그 몸짓에는 상전을 알아보는 것도 있지만, 부비부비하는 영호 세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려는 심정이 절절이 담겨 있었다.


"강녕하셨습니까? 이곳까지 오셨는데 영접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만 일어서세요. 방금 왔으니 탓할 것도 없습니다."
"네, 하온데..."


형욱은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괴로운 듯 신음을 삼켰다. 우희선은 그것을 아프도록 이해했다. 그래서 수심에 잠긴 안색을 하였다. 형욱의 얼굴에도 가을바람의 낙엽을 보는 듯한 쓸쓸한 표정이었다. 덕후는 신기한 표정으로 두 여인의 변화하는 안색을 지켜보다가 우희선을 발견하고 성큼 다가가 손을 잡았다.


"누님, 오랫만이오. 정말 먼 걸음을 하셨어."
"상공께서 부르시는데 천녀가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우희선은 남들이 보는데 손을 잡은 잡은 데 쑥스러움을 느꼈지만, 빼지 않았다. 아까 염미홍과 육덕(?)스러운 해후를 보며 살짝 정신적 공황을 겪은 뒤라 덕후의 스킨쉽에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심리가 있었다. 덕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영호 세휘쪽으로 질문을 던졌다.


"소저는 뉘시오?"


그 물음이 툭, 던지듯 심드렁한 것이라 영호 세휘는 약간 발끈했다. 형욱은 이런, 하는 심정이었다. 자신과 회주인 우희선마저 쩔쩔 매게 만드는 그녀만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상대의 정체를 이미 짐작하면서도 씹고 나간다.


"과년한 처자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공자의 이름을 밝혀야 순리 아닐까요?"
"훗, 소저는 이 몸의 옥음을 들었다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아야하오. 그러니 들은 값 치룬 셈 치고 알려주시오."
"목소리 값 치고는 너무 싸군요, 자고로 여자는 사랑받기 위해서 조물주가 빚어내 주신 존재랍니다. 태어나고도 남자로서 자격을 얻기 위해서 분투하는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족속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죠."
"허어, 뭘 모르시는군? 인류보편의 관점에서 볼 때 여자 하나와 남자 백 있는 거 보다, 남자 하나에 여자 백이 있는 것이 종의 생존에 보다 유리하다오. 이것이 조물주의 진정한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자고로 영웅은 삼처사첩이라는 것에도 이런 까닭이오."
"그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남자가 영웅이라는 잘 개량된 종마여야 한다는 것을 놓치셨군요. 백대 일의 적자생존에 노출된 남자랑 하나하나가 사랑받고 보호 받을 자격을 가진 여자를 비교하면, 어느쪽이 개체로서 우월한지는 답은 나왔죠."


덕후와 영호 세휘는 하하호호 웃었다. 그런 둘의 배경으로 남들이 접근하기 힘든 삼엄한 투지가 끓었다.


"서로 임자를 만난 것 같네."


소월하의 기막힌듯한 어조에 일동들은 내심으로 동의했다. 저 둘을 계속 방치하고 있을 수는 없는지라 우희선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만들 하시고 자리를 옮기죠?"
"마님, 얘는 누구죠?"
"누님, 얘는 누구요?"


서로를 노려보며 이구동성으로 나온 말에 우희선은 골치가 아팠다.


"이분은 네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왕야이시고, 이쪽은 제 보좌인 영호 세휘입니다."


영호 세휘와 덕후는 서로를 탐지하듯 노려보았다. 잠시 후, 영호 세휘는 입을 삐죽이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오랜 궁녀 생활로 안정감이 깃든 자세로 예를 취했다.


"실례했사옵니다. 왕야."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리고 여기서는 사정상 신분을 감추고 있으니 공자로 불러주시오. 영호 소저."


덕후 역시 포권하며 예를 표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둘 사이에 방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둘의 대립으로 좌중은 서로를 소개할 기회를 놓치고, 상관 부용이 금보옥이 기다린다는 전갈을 가지고 오고나서, 응접실로 장소를 바꿔 정식으로 하게 되었다.


"2년만이네요. 언니."
"몰라보게 변한것 같구나."
"세월의 힘이죠."


짤막한 대화만큼 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교환했다. 왕후의 기품을 타고난 여제와 패자의 자질을 갖춰가는 여왕의 미묘한 대치. 이를 지켜보던 덕후는 먹이를 둔 암사자들의 탐색전 같아 은근히 살이 떨렸다.


"언니에게 소개해드릴 분이 있어요."


금보옥은 염미홍과 소월하를 소개했다. 미리 언질을 받은 소월하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염미홍은 처음에는 뜬구름 같다가 감을 잡지 못하다가 소월하가 거듭해서 밝혀주고 나서야 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입을 쩍 벌렸다. 그러더니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우희선에게 폭사했다. 잘하면 덮칠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라 우희선마저 살짝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덕후는 염미홍의 반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21세기 박순희들의 전형적인 증후였으니까.


다행히 염미홍은 그녀를 아는 주변의 우려대로 폭주하지 않았다. 인생의 절반을 눈치밥을 먹고 살아온데다가, 문주라는 입장은 세뇌 교육으로 몸 구석구석 각인된 상태였다.


인사를 나누는 동안 덕후의 관심은 새로 등장한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미녀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덕후였으나 눈 앞의 여인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공략본을 뒤져도 영호 세휘라는 케릭터는 없었다. 이레귤러인 셈이다. 그녀의 정체를 캐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지라 나중으로 미루고 불안과 당혹을 아이같은 유치한 신경질로 덮은 상태였다. 그렇다보니 덕후와 영호 세휘가 주고받는 눈빛은 끈끈한 밀애나 호기심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 혹은 원숭이와 같은 수준로 변했다. 여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덕후는 영호 세휘와 함께 방치되었다.


"해를 넘기기 전에 상관세가와 전쟁을 하시겠다니....너무 전격적이지 않나요? 대상련은 상관 세가만 상대하면 되지만, 우리는 동쪽만 제외한 나머지가 다 적이에요."


금보옥이 심가장에 있던 사태와 밀천회의 지원을 설명하고 향후 방침을 밝히자, 소월하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천하문은 북으로는 신도 세가, 서쪽으로는 영호세가, 남으로는 우문세가가 있다. 이들을 확실히 견제하거나 화친을 하지 않는 이상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덕후가 대상련을 대신해 급전을 보내서 왔지만, 금보옥의 구상에 대해서는 반려할 작정이었다. 그녀들이 이 곳으로 직접 온 것은 북쪽에서 온다는 귀빈에 대한 호기심과, 거절하더라도 성의를 보이려는 문제와, 천하문 터를 지키는데는 3원로가 있는 쪽이 효과적이라는 복합적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문주와 군사보다는 3원로가 이름값이 높은 현실이다.


"그 문제는....언니가 설명해줄거예요."


금보옥도 문제점이라 생각해두었던 것을 지적 당하자 우희선에게 넘겼다. 나름 방안을 생각해두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감히 밀천회주를 시험하려는 음흉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덕후는 분명 이번 일에 있어서는 우희선을 최고 책임자로 치고 있었으니까. 우희선이 금보옥을 바라보자 금보옥은 눈길을 피하며 그녀 답지 않게 딴청을 부렸다. 내심을 어느정도 짐작한 우희선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대신 받았다.


"신도 세가는 형욱 공자가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중립을 지켜줄 거예요."
"형욱 님이?"
"네, 신도 세가의 무남독녀이니까요. 신도 세가와 본 천의 관계는 소 군사 정도 식견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어요."


신도 세가는 밀천회의 후원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십패의 성립으로 모래알 같았던 무림방파가 거대화되자, 경계심을 느낀 밀천회는 완충제로 두 패를 키웠다. 바로 중원과 하북을 아우르는 신도 세가와 강남의 상권을 쥔 대상련이었다. 대상련이 상인과 표국 연합으로 출발한데 반해, 신도 세가는 처음부터 무문으로 출발했다. 초창기에는 영호 세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무위를 떨쳤으나, 영호 세가가 농서 일대의 유목 민족으로 기마전에 능한 혁련 세가를 끌어들이고 나서는 백중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영호세가는 우문세가를 끌어들임으로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문 천강이 즉위한 이래로 강경 노선을 고집하고 있어 국지적으로 마찰을 빚고 있으니까 판을 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우문 세가는 남방의 이족들이 세운 세가였다. 한족의 번성으로 융화되지 못한 이족들은 남방으로 이주해서 각자 터전을 잡았다. 초기에는 한족과 영역을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왔으나 십패의 시대에 호광에 영호세가가, 운남과 귀주에 성교가 발호함으로서 관계가 깨졌다. 성교와 영호 세가의 등을 업은 한족들은 이족들을 박해하거나 터전을 쫓아내기 이르렀고, 자연스럽게 이족들은 한족에 대해 엄청난 불만과 원한을 품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걸출한 인물이 우문 세가의 초대가주 우문 광륭이었다.


우문 광륭은 서쪽으로는 성교를, 북쪽으로는 영호 세가를 적으로 두고 꾸준히 세를 확장했고, 우문 천강에게 가독을 물려줄 때에는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영호 세가와 우문 세가만을 놓고 보면 우문 세가가 다소 불리해요. 우문 천강이 강경파라지만, 판도를 읽을줄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영호 세가는 녹수맹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요. 독각룡 도설귀가 삼협에서 십 년동안 꼼짝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죠. 영호세가에서 녹수맹주 연독고를 막을만한 인물은 그 밖에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영호 세가의 힘을 덜어내는 방법이 있어요."


우희선의 말은 이랬다. 신도 세가와 천하문이 주력을 이끌고 영호세가의 경계에 어슬렁거린다. 영호세가는 대응을 위해서라도 세가의 무사를 어느정도 빼둘 수 밖에 없다. 전력의 삼분지 일이 독각룡 휘하에 있는 상황에서, 천하문과 신도 세가를 맞이하려면 삼분지 일을 더 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우문 천강은 결과적으로 영호 세가의 삼분 지 일의 전력만 상대하면 되는 셈이다.


"다행히도, 우문 천강은 한창의 피가 끓는 나이고 신임가주가 된지 얼마 안된 상황이니, 충분한 승산이 있다면 호기를 부리려 들거에요. 우문 천강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신임 가주로서 밖으로 위엄을 드높이고, 안으로는 권세를 강화시킬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요. 그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소월하와 금보옥은 우희선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그녀가 자신들과 차원이 다른 전략적 사고와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천하문과 대상련이 무력이 약한 반대급부로 정보에 밝다고 하나, 3대 첩보기관(동창, 서창, 금의위)과 관부조직의 정보망을 근저로 하는 밀천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단하세요, 언니. 저는 그저 금품이나 이권으로 중립 선언이라도 받아내면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금보옥의 찬탄에 소월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처지라면, 할아버지들에게 부탁해서 신도세가와 우문세가와 공수를 맺어 영호세가를 견제한다는 정도로만 꾀를 냈었다.


"금 매의 의견도 나쁜 것은 아니야.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적당히 상잔 시켜둘 필요가 있지."


대상련과 천하문이 상관세가와 싸운다면 승패가 어떻게 나든 희생은 불가피 할 것이다. 제 3자의 입장이라면 상처입은 짐승은 좋은 먹잇감이 될 터. 그러나 정작 그 자신도 막 상처를 입은 상태라면 그림의 떡이 된다. 수습할 시간을 버는데 매우 요긴할 것이다. 우희선은 둘처럼 피동적인 대책을 세운 게 아니라 상대가 아예 적대할 여지가 없도록 수를 쓴 것이다. 이런 대전략가를 모셔온 덕후는 뭐하고 있냐면,
 
"형욱 군의 임자는 나요."
"영혼의 친구인 저의 동의 없이는 뜻대로 될 것 같아요?"
"어허, 나도 형욱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데 왕야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는데, 그대는 고작 친구라는 것만 내세우고 횡포를 부리다니 우정이 다 울겠소."
"친구니까요. 윗 사람이나 아랫 사람의 입장에서 열 번 좋은 말하는 것보다는, 동등한 관계일 때 따끔한 충고 하나가 미래에 백배 도움이 된답니다."
"내가 보기에는 잘 봐줘야 악우 같더구만?"
"저어, 두 사람 그만 싸우고 회의에 집중 좀 해줄래?"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있는 형욱을 두고 영호 세휘와 아옹다옹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염미홍이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끼어들고 있었다. 천재 트리오들은 잠시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가 목상 하나와 바보 트리오들을 방임하기로 상쾌한 결론을 내렸다. 천재들의 주제는 상관 세가의 공략으로 옮겨갔다. 금보옥이 상관 부용이 준 지도를 탁자에 펼쳤다.


"육지와 바다 둘 중에 어느 쪽이 주공일 것 같아요?"


주산군도를 경유하여 항주만을 어지럽히는 것과 절강과 복건, 두 성의 경계인 포성에서 무사들을 모아 항주까지 직진하는 루트, 용위수가 짠 전략을 셋도 어렵지 않게 예단했다. 상관 세가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세가의 최측근 동향을 덕후가 낱낱이 알고 있었다. 용위수가 섭정으로 지씨와 하씨를 끌어당겨 주가를 누른 것과 최근에 절정고수가 된 경위까지, 용악천을 생으로 집어삼킨 효과(?)였다. 그리고 그 정보는 그대로 금보옥의 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최근에 두각을 보이는 용위수는 강무제 같은 부류에요. 지씨와 하씨로 나누어서 선발로 보내고 그 자신은 후방에서 일단 전황을 지켜볼 계획인 것 같아요."
"하면, 한 쪽이 지나치게 우세하거나 불리할 때 주력을 투입할 심산이겠군요. 그가 향하는 방향이 분수령이 되겠네요."


시원스레 결론을 내린 후, 그녀들의 안건은 현재 가진 전력과 지휘를 배치하는 문제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결정한다고 그대로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조직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제대로 협조를 얻거나 설득을 하기위해서 사전 모의 해보려는 것이었다. 덕후들은 여전히 회의에 겉돌고 있었다.


"천하문이 육전을 맡죠. 바다 쪽은 아무래도 서투르니까요. 선박이랑 수부도 없고요."


소월하의 주장에 금보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공수에 역할을 나눈다면 대상련은 지리적이나 입장상 해안 쪽을 맡게 될 것이다. 상관 세가는 해외무역 뿐만 아니라, 뒤로 밀무역과 인신매매에 관여하고 있었다. 해적들과 손을 잡았다는 풍문이 돌 정도이니, 이번 전쟁에서는 이들을 용병으로 모조리 고용해서 분탕질을 부추길 확률이 높았다. 자신이 적의 수장이라도 그렇게 지시할 것이다.


"육전 지휘는 소 군사가 할 것인가요?"
"염 문주님과 형욱 님이 같이 계셔야겠지요."
"혹시 군사 자리를 해전으로 옮기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우희선의 제안에 소월하 뿐만 아니라 금보옥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희선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대신 육전에 상공과 세휘 양을 넣고 싶네요. 그 둘이라면 충분히 소 군사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을 거예요."
"어머, 인력 낭비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죠. 방치하는 것이 만사는 아니니."


전염이 된 듯 금보옥도 우희선과 닮은 미소를 지었다. 소월하는 자신의 입초리도 저들을 따라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요.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 같아서...."
"형욱군을 보모로 남기는 것은? 애당초 육전에 같이 할 계획이었잖아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제가 그쪽으로 간다한들 도움이 될까요? 강과 바다는 틀릴텐데요."
"상공께서는 소 군사라면 한신에 견줄만하다며 극찬하셨답니다. 금방 익숙해질거예요. 우리 자방 선생님은?"
"어쩔까나...."
"월녀 흉내는 어떨까요? 아무래도 우리 대상련은 고수가 적다보니, 적을 제압할 상징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괜찮을 거 같네. 내 무공도 보타암에서 발원한 것이니 해적을 무찌르는 여협 흉내나 내볼까?"


세 여자는 공감대 속에 음모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은 출신과 성격은 달랐지만 한 가지에서는 일치를 두고 있었다. 바로 덕후에게 한 번씩은 조종당한 경력이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는 다 좋게 나왔지만,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재녀들인만큼 자부심까지 은근히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기회에 본전에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받아볼 생각이었다.


영호 세휘와 신경전을 벌이던 덕후는 나중에 세 여자의 결정을 통보 받고 항의하지만, 이미 떠나간 배였다.


 


 

케릭터 프로파일 #5

 

염미홍 : 무공 79 지모 77  정치 75
모티브 : 다키가와 가즈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내   력 : 고아 출신.
항주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라서는 예인으로 강남 일대를 전진했다.
아는 글자가 거의 없으나 암기력이 좋다.
생존이 좌우하는 사안에서는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다.(악운에 강함.)
염곽정의 딸이라고 하나 실제로 혈연은 이어져 있지 않다.
천하문 문주.
덕왕부 염빈.
암기와 경공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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