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경석은 26살의 중견기업 마케팅 부서의 신입사원이다. 그는 마케팅 부서 중에서도 직접적인 대인 홍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동안 대학 전공인 화학을 잘 살려서 여러 가지 향수나 반짝이는 색깔 등의 아이디어를 내보고는 했지만 번번히 팀원들에게 묵살당했다. 마케팅 부서 중에서 그와 같은 방에서 근무하는 팀원은 경석까지 모두 4명. 다른 3명은 전부 여자들이다.
경석이 이 회사에 들어온지 채 3달이 안 되었지만, 사회 생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만큼 알았다. 평소 대학 다닐 때 혼자만의 연구에 몰두하던 경석으로서는 사람들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는 일이 여간 힘들고 낯선 게 아니었다. 거기다 학창 시절부터 여자들에게는 쑥맥이었던지라 미혼 여상사들을 만족스럽게 모시기는 거의 불가능이었다.
“이봐요 마경석씨, 오늘도 마케팅 아이디어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회사 거저 다녀요? 아 정말...이래서 남자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이승희, 현재 33살로 23살에 대학을 마치고 곧바로 입사했으며, 마케팅 부서 전체 총괄 팀장으로의 승진이 유력한 여자다. 경석이 있는 부서가 신설된 하부 조직이어서 틀을 잡아주기 위해 잠시 내려와 있는 중이다. 일처리가 워낙 완벽하고 깔끔하며, 동시에 남자들에게는 지극히 사무적으로만 대해서 얼음여왕이라는 별병을 지니고 있다. 이지적인 얼굴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그리고 검은색 바지 정장을 고집하는 게 트레이드 마크다. 자기 능력만큼이나 남자들을 무시하기로 유명하다. 회사에서는 그녀의 탁월한 업무 능력을 높게 사주고 있으며, 특히 회장이 여성이고 임원의 70% 이상이 여성인 이 회사의 특성과도 부합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경석은 승희가 항상 부담스럽고 껄끄러웠다.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까 어느새 집에 오면 항상 냉장고에 가득찬 병맥주를 꺼내 취할 때까지 마시다 쓰러져 자는 게 일이 된지 오래였다.
‘아...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회사를 옮길까? 그렇다고 내가 뭐 뾰족이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아...젠장...’
경석은 사실 이 회사에 입사한 것도 행운이랄 정도로 스펙이 안 좋았다. 토익은 900점도 안 되었고 학교 성적은 평점 2.8이었다. 마침 경석이 지원했을 때 운좋게도 (회사 입장에서는 운 나쁘게도) 지원자가 일시적으로 미달되어서 합격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렸었다.
승희의 닦달에 못 이겨 경석은 하는 수없이 또다시 아이디어를 짜내기 시작했다. 즉석에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라...흐음...
“아, 그걸 한번 해보면...”
경석은 무릎을 치며 순간적으로 탄성을 질렀다. 대학교 때 경석이 몰입하던 분야가 바로 동물 페로몬이었다. 당시에는 졸업에 급급해서 본격적인 연구는 하지 못 했지만, 각종 전문 서적과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 그 누구보다도 페로몬의 구조식과 성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당시 경석은 합성 페로몬을 만들면, 동물들끼리 이성을 유혹하기만 하는 페로몬의 성격이 상대방의 말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피암시성을 지닌 물질로 변화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확인한 바 있었다.
마침 결혼 계획도 없고 회사 월급이 한 달에 300만원 정도 되기 때문에 필요한 연구 자재들은 자비로 모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서를 작성해서 내면 분명 승희가 트집 잡고 비아냥 거리고 자를 게 뻔하기 때문에 일단 무언가를 만들어서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1개월 후>
‘이제야 완성인가? 일단 만들기는 했는데, 효과를 어떻게 알 수 있지? 일단 내가 이 냄새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면역 주사는 맞아놨고. 누군가 실험 대상이 필요한데...그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경석은 사무실이 있는 7층의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출근시간보다 1시간이나 더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걸리면 나는 끝장이다...’
경석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느껴졌다. 지금 자신이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여자 화장실에 몰래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고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경석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에 있는 방향제 뚜껑을 열어 시약을 변기에 버린 뒤, 자신이 연구한 페로몬을 안에 집어넣었다. 뚜껑을 닫자 방향제가 자동으로 시약을 분무했다.
‘이건 남자 화장실에 있는 거랑 같은 거니까 30분 간격으로 분무되겠지. 한번 분무할 때마다 시약 1ml씩 나오니까 3-4일이면 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여자들은 모두 이 합성 페로몬의 영향을 받게 될 거다. 어차피 실패해도 난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고. 아...떨리는구나.’
경석은 뚜껑을 닫자마자 곧바로 여자 화장실을 나왔다.
<3일후>
경석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제 시간에 출근했다.
‘음...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한번 슬슬 실험을 해봐야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겠지?’
그 때 저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승희에게 먼저 말을 건 여자는 부팀장인 안지원이었다. 28살로, 승희를 우러러 보며 자신도 승희와 같은 커리어우먼이 되고자 마음 먹고 사는 여자다. 승희와는 달리 경석을 갈구기보다는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며 상대를 안 하는 편이다.
“팀장님! 화장실에 방향제요...향기가 좀 변한 것 같지 않으세요?”
“어, 나도 좀 그런 게 느껴졌어. 뭐라고 할까...말로 표현하기는 좀 그런데 암튼 평소 나던 그 향기는 아닌 것 같더라. 그래도 뭐...방향제가 상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겠죠? 참, 팀장님 오랜만에 커피 한잔 타드릴까요?”
“그럴까? 그거 좋지.”
그 순간...
“부팀장님!”
경석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원을 불렀다.
지원은 대답도 안 한 채 감히 니까짓게 나를 불렀냐는 식으로 경석을 쳐다보았다.
“부팀장님, 저도 커피 한 잔 타주시겠어요?”
‘에라 모르겠다. 될데로 되라. 어차피 이런 식으로 사느니 된통 당하고 회사를 떠나던가 하자.’
경석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지원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지원은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죠 뭐. 마경석씨도 같은 팀원이니까 한잔 갖다주죠 뭐.”
‘휴우...’
경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사해서 4개월이 지난 동안 출퇴근 시간 때 인사 외에는 거의 해본 적도 없는 지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뭔지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분명 효과가 있어. 그래...한번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경석은 점차 자신감을 가졌다.
지원이 자판기가 있는 복도로 나간 사이, 경석은 자신의 바로 옆 책상에 있는 정은혜에게 다가갔다. 은혜는 나이는 24살로 경석보다 아래지만 회사는 먼저 들어왔다. 단아하고 동양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으며, 두 여자 선배들에게는 깍듯이 대하지만 경석은 나이와 상관 없이 완전 아랫 사람 부려 먹듯이 대하고는 한다. 게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도 거의 항상 경석에게 맡기는 편이라, 경석은 그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곤 했다.
“정선배님!”
“어? 왜?”
은혜는 경석에게 항상 반말이었다.
“아...오늘 입고 온 검정 스커트 정말 잘 어울리는데요?”
경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느끼하면서도 너무나 상투적인 멘트를 날렸다.
“어 그래? 마경석 씨가 좀 보는 눈은 있네? 고마워. 호호호. ”
“하하, 그럼요. 특히 정선배 다리가 정말 예뻐요. 각선미가 아주 죽이는데요? 평소에도 항상 치마 입고 다녀봐요. 굳이 아름다운 몸매 숨기려고 하지 말구요.”
경석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너무 오버했다 싶었다. 은혜에게 이런 말투로 편하게 얘기한 건 입사 첫날 뿐이었다. 경석은 그 날 이런 식으로 만만하게 말했다가 하루종일 질책 당하고 1주일을 밤샘 근무로 시달린 뒤 어제까지 깍듯한 존대말만을 써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경석은 이미 뒤가 없었다. 은혜의 표정은 아까 지원의 표정처럼 약간 미묘해진 순간이 나타나더니 이내 곧바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그런가? 알아주는 사람이 경석 씨밖에는 없네?”
“하하하. 천만에요.”
‘저 불여우 같은 게 화도 안 내고 좋게 넘어가다니! 이 정도면 완전 성공이다!’
경석은 싱글벙글한 표정의 은혜를 뒤로 한 채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상념에 잠겼다.
‘아...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은혜와 지원은 외부 계약 수주 건으로 출장을 나갔고, 사무실에는 승희와 경석 둘만이 남았다.
경석은 아침보다 훨씬 더 편해진 마음으로 지원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네? 무슨 일이죠?”
“계속 그렇게 일만 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시죠?”
“아...뭐 내가 해야 될 일들이니까요...괜찮아요.”
승희는 약간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 네에...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오래 일하면 목이 뻣뻣해서 안 되요. 아무래도 목과 어깨 부위 마사지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네? 마사지요?”
“네, 자, 마우스 놓고 이렇게 의자에 몸을 기대보세요. 제가 확실하게 주물러 드릴께요.”
“네? 아 정말 괜찮은데...”
승희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차마 경석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경석의 말을 들으면서 실제로 자신의 목과 어깨가 굳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석은 승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감촉 좋다...’
“자, 내 손에 모든 걸 맡기고 편하게 그렇게 기대어 앉으세요. 내 손이 약손이에요. 점점 목과 어깨에 힘이 빠질 거에요.”
승희는 점차 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끼며 정신도 몽롱해져갔다.
그런 승희를 바라보며 경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아. 완전히 내 손아귀에 떨어지는구나. 이 참에 아예 최면까지 시도해볼 수도 있겠는데?’
경석은 페로몬 향기를 통해 최면을 유도하는 사례까지도 공부했었고, 지금이 그것을 시험해볼 수 있는 적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자아...좀 더 숨을 천천히 쉬구요...하나...두울...세엣...네엣...좋아요...이번에는 더 천천히...있는 힘껏 들이마쉬었다가 다시 내쉬는 거에요. 하나아...두우울...세에엣...네에엣...”
승희는 어느새 경석의 말에 자신의 모든 걸 맡긴 채 충실히 따라하고 있었다.
“자아...좋아요...이제 승희씨의 몸은 완전히 풀렸어요. 몸 어디에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요. 지금은 단지 그동안 회사를 위해 혹사했던 승희씨의 몸에게 소중한 휴식 시간을 주는 거에요.”
“네에...”
승희의 나지막한 대답이 들렸다.
“하지만 몸만 휴식을 취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몸과 마음은 하나이니까, 몸이 쉬면 마음도 소중한 휴식을 취해야겠죠?”
“네에...”
“좋아요. 그동안 승희씨는 너무나 많은 결정을 내리고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어요.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면 되요. 알겠죠?”
“네...그럴께요...아무 생각도 없이...듣기만 할께요...”
“좋아요...내 목소리는 믿음직스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질 거에요. 그런가요?”
“네...듣고 보니까 정말 그래요. 경석씨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 수록 더 듣고 싶어지고...부드러우면서도 강해요...아...계속 말씀해주세요.”
“네. 승희씨는 그동안의 내 모습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나는 게 있나요?”
“네? 그동안의 모습이라면...”
승희가 경석의 예전 모습에 대해 떠올리려 하자, 곧바로 경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생각하려 해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을 거에요. 그냥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는 없었을 거에요. 그렇죠?”
“네? 아...네 그래요. 그동안 따로 관심을 갖지 않아서...그냥 워낙 혼자 일을 열심히 잘 하니까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승희는 경석의 말이 평소 자신의 생각과 다른데도, 오히려 경석의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후후, 이게 바로 최면 암시의 특징이지. 사람들은 생각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생각하거든.’
“자...지금 이순간부터 승희씨는 나, 마경석의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될 거에요. 내 목소리만큼이나 자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남자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런 모습들 말이에요.”
“네...그럴 거에요...”
“그리고 당분간은 매일 내가 특별히 시간을 내서 승희씨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거에요. 승희씨는 단지 나에게 몸과 마음을 그대로 맡기기만 하면 되요.”
“네...전부 당신께 맡길께요.”
“그래요. 말을 잘 들어서 참 착하네요. 평소에도 승희씨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마음이 편해지고 나에게 따르고픈 마음이 들 거에요. 왜냐면...당신은 이미 나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기기로 했으니까요. 그렇죠?”
“네...그래요. 저는 경석 씨에게 저의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기기로 했어요. 평소에도 경석씨 목소리와 눈빛에 따를 거에요.”
“좋아요. 그럼 지금 눈을 떠서 나를 쳐다봐요.”
승희는 살며시 눈을 떴다. 앞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경석이 따뜻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늠름하고...강해...따뜻하고...’
승희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훗. 승희씨, 오늘 내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아주 편해질 거에요. 앞으로도 계속 내 말에 따르도록 해요. 그럴 수록 승희씨는 점점 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겠죠?”
“네...경석씨의 말에 계속 따르겠어요. 아...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봐요.”
“자...그럼 이 행복한 기분을 그대로 느끼면서 내가 다섯에서부터 하나까지 세는 동안 승희씨의 몸에 점점 힘이 돌아올 거에요.”
“네에...”
“자아, 다서엇...네엣...세엣...두울...하나아...”
“아함...”
승희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이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경석을 바라보았다.
“아...경석씨 너무 고마워요. 몸과 마음이 진짜 상쾌해요. 정말 앞으로 매일 해주시는 거죠?”
“하하 그럼요. 승희씨에게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경석은 당장이라도 이 지적인 노처녀를 접수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도도했던 년이 완전히 야들야들하게 녹여서 제발 박아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만들테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