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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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순간은 당사자의 심경에 따라 짧거나 혹은 긴 법이다. 경덕진에서 멀지 않은 포구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한 쌍을 중심으로 둘러싸듯이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주인공들은 겉보기는 멀쩡한 선남선녀인데, 착 달라붙은 행태가 바퀴벌레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제가면 언제 오나요, 달링?"
"후후, 마이 허니. 련주님께서 본련에 돌아가셔서 가신들에게 선포를 한 뒤, 곧 돌아오겠소."
"아, 당신이 없이 그 시간을 저 혼자 쓸쓸히 보내란 말인가요."
"정 쓸쓸하면 미동을 데리고 적당히 노시오. 단, 내가 돌아올 때까진 뒤탈 없도록 처리하는 것을 잊지 말고."
"흑, 미우셔라. 하지만 이 외로움을 참고 기다리는 쪽이 더욱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겠죠?"
"오, 내 사랑. 지금 여기서 증명해보이리다."
덕후는 참지 못하고 염미홍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였다. 염미홍도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정도로 두 사람의 입술은 도통 떨어질 기미를 안보였다. 닭살 돋는 표정을 짓고 있던 소월하는 형욱에게 눈짓을 하였고, 거의 동시에 이해한 형욱은 고개를 끄떡였다.
"거기까지 하시죠."
각자 반대편에서 덜미를 잡힌 염미홍과 덕후는 같은 극에 놓인 자석마냥 휙 떨어졌다. 양측에 허우적 거리는 몸 동작은 참 애절하기까지했다. 그러나 장내의 시선들은 싸늘했다.
"놔! 놔! 달링과 좀 더 있고 싶다고!"
"해괴망측한 서역어는 어디서 주워 들어가지고, 제발 문주로서 체통 좀 지켜욧!"
참다못한 소월하가 버럭 잔소리하였다. 염미홍은 소월하가 본격적으로 화내자 시무룩했다. 그녀가 덕후에게 이런 닭살 행위를 한 것은 애정이 2할, 8할은 동지의식 및 도피심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하문주로 오른 뒤로 각종 격무에 시달려왔기에, 실패할 것을 뻔히 아는 가출을 번번히 시도하였다.
위로는 3원로한테는 문주로서 용인술과 처세훈을, 아래로는 소월하와 신진 간부들에게는 실무와 비무로 들볶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 재능이 있는데다가, 이를 악물고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일취월장 하고 있지만 빡빡한 스케줄에 심신이 조금씩 지처가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에 덕후를 만났으니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비록 두 마녀의 사주를 받은 형욱의 감시 덕분에 찰떡같은 섹스를 하지는 못했지만, 덕후의 카운셀링으로 기력을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꿈 같은 시간이 깨지니 필사적일 수 밖에 없다.
한편, 덕후로서는 모처럼 만났는데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으니 아쉬워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세계야 야동이나 H망가를 보면서 "왼손을 거들 뿐." 하겠지만, 현재는 절세미녀를 곁에 두고서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하지 않은 금보옥과 형욱은 당장은 불가능하다. 소월하는 찜을 해둔 상태라 섣불리 꼬드기도 그랬고, 왕야인 것이 들통났으니 섹스를 하면 무언가 요구하는 대가가 따를 것 같았다. 가장 만만한 상대는 염미홍 밖에 없는데 남은 세 여자들이 강력히 제지하고 있다.
-후우, 하렘지도는 정녕 어렵도다.
그렇게 푸념을 한 덕후는 모두가 승선을 한 뒤에 맨 마지막으로 배에 올랐다. 당분간 세 미녀들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한창 천하문을 리모델링 중인 중요한 인재들을 사심으로 빼올 수는 없었다. 문파의 실질적인 설계사인 소월하, 상징으로 조직을 장악하는 염미홍, 반정으로 꺾인 무력을 다시 키우기 위해 안배한 형욱 등으로 한창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고, 대상련의 지원이 시작되면 더욱 탄력을 받을 터였다.
-문내에 절정고수가 하나 더 있더라면....
덕후는 자신을 대신해서 무력이 되어줄 형욱의 존재가 빠진 것이 특히 아쉬웠다. 어쨌거나, 선미에 자리 잡은 덕후는 그녀들이 육안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보였다. 반응한 이는 염미홍뿐이었다.
남선북마라 하여 수로가 발달한 강남의 풍경이 미끄러지듯 흘러가고 있었다. 선미에 우뚝 선 덕후는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머리카락과 치마가 미풍에 살랑이며 요염한 방향을 흘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참 좋구려. 헌데 아가씨에게는 조금 쌀쌀할지도 모르겠소."
한 차례 휘파람을 불던 덕후는 장옷을 벗어 금보옥의 어깨에 둘렀다. 금보옥은 덕후의 생각치도 못한 호의에 당황한듯 머뭇거렸다. 둘은 잠시 나란히 서서 뱃전이 스치며 만들어낸 포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 보겠어요."
"흠? 좀 더 있지 않고."
쌀쌀 맞은 듯한 반응에 덕후는 씩 웃었다. 금보옥이 포구의 촌극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아까 일 때문에 그렇소?"
"천하문주님을 그토록 아끼신다면 좀 더 곁에 있어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저와는 혼인식에 잠깐 얼굴만 비치면 되니까요."
금보옥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덕후는 부채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질투든 뭐든 최소한 반응이라도 이끌어내길 바랬는데 무덤덤하니 타산이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금보옥은 자신과 관계를 철저히 필요에 의한 정략혼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하기사 로맨스나 드라마 찍는 것이 아닌 이상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무능은 아니나 금보옥이 반할만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굽신굽신하는 연출만 하였으니.
"바람 잦은 곳이 유난히 신경쓰여서 말이오. 이렇게 훠이~ 하고 진정 시킨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까 하오."
쥘부채를 활짝 펼치며 휘젓는 익살맞은 모습에 금보옥은 고개를 모로 틀었다. 웃음이 나오는 일차 감정외 왕야라는 지고한 신분으로 저렇게까지 낯출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물론, 덕후가 같이 가주면 련내 참새들의 지저귐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오나, 앞으로는 왕야의 신분으로 상인들과 하나하나 면담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못합니다. 자칫 구설수에 오르신다면 누가 될 것입니다."
"정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잖소. 비록 관습으로 사농공상의 서열이 있다고 하나 그 관계는 수미상응이고."
흔한 노점상이나 객상이라면 모를까, 회관을 보유할 정도로 거상이라면 필연적으로 지배층인 신사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상인의 자식들이 과거에 나아가 관료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들과 끈이 닿는 상단에 각종 편의를 도모했다. 대상련은 그 중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져 관직에 몸담은 이들의 절반이 대상련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가질 정도였다.
"....왕야의 말씀은 소녀에게 너무 어렵습니다."
금보옥이 경계하는 듯하자 덕후는 일순 난감한 표정을 드러냈다.
"미안하오. 그저 현실이 그렇다는 것일 뿐. 구변진을 순조롭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강북의 장성들 못지 않게 강남의 대상들 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대가 방금 심씨를 떠올렸다면,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천지에 두고 맹세하겠소."
덕후가 언급한 심씨는 심만삼으로 원말명초의 유명한 상인으로 중국 역사상 10위권 안에 드는 거부였다. 재력이 어느정도였냐면, 명 건국에 소요한 비용을 심만삼의 재산으로 충당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일례로 명 태조 주원장이 남경을 수도로 정했을 때, 증축한 성곽의 1/3의 비용을 심만삼 개인의 자산으로 감당하였다. 이후 주원장은 심씨 일족을 경계하여 몰락을 유도, 결국에는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보내서 죽게 만든다. 황족인 덕후의 발언은 상인인 금보옥으로서는 쉬이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까지는....소녀가 괜히 왕야께 심려를 끼친듯 합니다."
덕후의 해명에 금보옥은 경계의 빛을 다소 누그러뜨렸으나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덕후는 화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다소 짧은 감이 있긴 하나 이번 여행은 어땠소?"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손익을 따지는 것 말고, 금보옥이라는 개인으로서 재미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 말이오."
"재미라...."
금보옥은 소매 끝으로 입가를 가리고 생각에 잠겼다. 자연스럽게 녹아든 몸짓으로 혹시라도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들도 금 소저의 또래가 아니오?"
"마치 소녀에게 친구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피차 마찬가지 아니오?"
덕후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석대숭이 원했던 손자가 아니라 손녀로 태어나 대상련의 주인이 되기 위해 절치탁마했던 그녀에게 친구란 존재는 없었다. 규중 처녀들이 어머니나 친척 여자들에게 내훈을 배우며 또래들과 신랑감 이야기를 나눌 때,그녀는 할아버지 곁에서 시중을 들며 회계나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과 상대하는 법을 배웠다. 규중 아가씨들과는 같은 나이라도 몸담는 세계가 틀리고, 상인들과는 같은 세계에 살아도 근본적인 정서에는 괴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금보옥은 방금 덕후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만나는 동안 즐거웠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정을 통한 여자들과 사이좋았음을 인정하면, 덕후가 여자들을 거느리는 것을 보다 합리화시킬 구실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도 한 명은 있습니다. 심주혜라고요."
"심주혜?"
덕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본능이 그녀 못지 않은 미녀라는 예감은 팍팍 드는데 알던 설정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명이기 때문이었다.
"소주 심가장의 금지옥엽이죠. 날 때부터 몸이 약해 장에서 한 발짝 나온 적도 없건만 소주제일미로 불린답니다."
"강남제일미가 되지 못한 건 분명 소생 앞에 있는 누군가 때문이겠구려."
덕후는 빠르게 아부했다. 어이없기도 하고 싫지는 않은 마음에 금보옥은 살짝 찡그린듯 눈웃음을 쳤다.
"그 얘와 무슨 경쟁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총명하기 이를데 없을 뿐만 아니라 심성도 무척 고운 아이에요."
"동생처럼 여기고 있구려."
"그래요. 다만....몸이 약해서 특별한 처방을 하지 않는 한 없는 한 스물을 넘기기 어렵다고 해요."
"몸이 약하다 함은 혹시 구음절맥이라도 되는가 보오?"
덕후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금보옥은 살짝 놀란듯 덕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걸 어떻게....? 그건 본인과 직계 가족 외에는 저 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그냥 말해본 거였소."
뒷걸음치니 로또 주운 걸까? 어떨 때는 진짜 다른 세상 같으면서도 이런 부분은 묘하게 전형적 패턴이라 어느 쪽 사실인지 뒷골이 다 땡겼다. 말문이 막힌 듯 한 덕후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금보옥은 일말의 기대감을 담으며 물었다.
"혹시 치료하는 방법을 아세요?"
"구음절맥에는 다른 건 필요없고 딱 한 가지만 있음 되오."
천고의 영약으로도 쉽게 고치기 힘들다는 구음절맥이다. 금보옥은 덕후의 말이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바로 남주요. 그 것만 있음 자세한건 이하 생략."
"남주? 생략?"
점점 아리송한 금보옥이다. 남주는 남자 주인공의 줄임말이고 이 시대의 자기 본명과 오해 살것 같아 일부러 얼버무렸다. 구음절맥 치료약으로 노루표 으쌰으쌰~ 라고 말했다가 싸대기 맞지나 않음 다행일 것이다.
"허허허, 요새는 새로운 처방으로 세맥타혈이 있다지?"
"흐음, 어쨌든 상공께서는 치료법을 알고 계시는 것이군요."
"아마도."
금보옥은 생각에 잠긴 듯 가늘게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면 심가장에 들러보시겠어요?"
한참 후에 나온 이 말에 덕후는 살짝 놀랐다.
"나더러 심 소저를 만나 보란 말이오?"
"단지 그 뿐만은 아니에요. 회맹을 하러 나가는 동안 주문 받은 것들이 있으니 돌아가서 중개상에게 넘겨야하잖아요? 소주에는 심가장이 있어 오랜 거래처에요. 저 개인적으로는 의숙부님 가족도 뵈옵고 겸사겸사....목숨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꽤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구려."
금보옥은 담담히 웃었다. 그녀로서는 덕후의 엉뚱하기까지 한 호색 기질을 있었다. 소주제일미녀라는 심주혜를 소개한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덕후는 순순히 좋다라고 답하지 않았다. 심주혜가 소주제일미녀적 측면 보다는 본격적인 변수 요인으로 받아들인 탓이었다.
"그보다, 심가장은 어떤 곳이오?"
금보옥은 미진한 감을 지우지 못한 듯 했으나 순순히 답해주었다.
"장주 심우진님은 할아버님과 오랜 친분을 가지고 계셨어요. 젊었을 때는 경쟁하는 사이였지만, 서로 손을 잡고서 지금의 대상련을 일구신 것이죠. 만약 그 분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천효 오라버니가 있더라도 소녀가 가주 대행을 맡기 어려웠을 거예요."
덕후는 심가장의 내력을 들으면서 흠,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심 우진이라...확실히 후견인 비슷한 역할을 맡은 이는 있었지. 심 주혜란 아이도 난데없이 나타 난 것은 아니군. 하지만 금보옥에게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을텐데...
덕후는 노회한 상인으로 창업주와 대상련을 반분해왔고 지금은 어린 것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2인자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것은 원래의 흐름을 기억하는 덕분도 있었다. 킹왕짱 실력으로 흑룡방을 때려잡고 돌아오니 금보옥이 련주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는 전개 때문이었다. 주인공(덕후 아님)이 흑룡방을 접수하고 오는 사이에 상관 세가의 인물들이 후견인의 꼬드김을 받아 금보옥을 억지로 취하려 하는 것이었다. 이 배후에는 주인공(역시 덕후 아님)과 금보옥의 결합을 방해하려는 후견인의 음모였다. 역시 이 전개도 우왕굳 전개로 상관 세가 일당은 응징을 받고 후견인은 만천하에 죄를 실토하고 자결한다. 그리고 주인공(또 다시 말하지만 덕후 아님)금보옥의 하트를 겟한 뒤 화촉불을 밝히며 으쌰으쌰 모드로 들어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힘에 제약이 없을 때나 가능한 전개다.
-미치겠군. 다 때려치고 막장으로 달려갈 수 없고.
자고로 무림에는 서푼의 실력을 감추라는 격언이 있지만, 그 반대로 가진 힘의 99.97%를 숨겨야하는 덕후로서는 불가한 사항이다. 현재 무공을 사사한 우희선도 일류 정도로 알고 있다. 가장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주 노인도 자신을 절정 초입으로 들어서다가 주저앉은 걸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평소 경지를 벗어난 무위를 선 보인다? 초기야 "님 좀 짱 인듯." 주변에 감탄과 칭찬을 받을 순 있어도 세상 이치에 따라 반드시 지닌 힘에 대한 대가와 책임을 요구 받게 된다. 안부낙도를 위해서는 피해야할 사항이다. 때문에 덕후는 무림에서 보편적으로 보는 일류 이상의 무공을 체득한 뒤로는 절정은 일부러 등한시 하였다.
무공만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극한은 보아도 그 선을 초월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자신이 자각한 "힘"의 성질이 무림인의 "힘"과는 상궤를 달리하는 상황에서라면 신중해야 한다.
덕후가 상념에 빠지자 금보옥은 그가 앞으로 일 때문에 내면으로 잠겼다고 여겼다. 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것은 덕후의 버릇이었다. 무공이나 인성은 별로 믿음이 가지 않지만 흑룡방을 빼앗고 회맹을 주도한 수완은 인정하고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금보옥은 물러나 정익훈을 불러 덕후의 신변에 신경을 쓰도록 당부하고는 조용히 선실 쪽으로 사라졌다.
금보옥 일행을 태운 상선들이 바야흐로 양자강을 타고 태호에 이르렀다. 호면이 오백리에 이르는 태호 근방에는 소주가 있다. 금보옥의 상선은 정기항에 배를 대고 하역을 하였다. 주 목적이 교역이 아니라 회맹에 있었으므로 목록을 정리하고 관련 서류를 처리하는 데 반나절 걸리지 않았다.
"태호의 경치 좋은데 구경시켜 주지 않겠소?"
금보옥이 일을 마치자 옆에서 좌불상 흉내를 내고 있던 덕후가 조르기 시작하였다. 평소라면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면서 흘려보낼 그녀였으나 장기간 좁은 선박 안에 있다가 뭍으로 나오니 좀이 쑤시는 감이 있었다. 금보옥은 정익훈을 불러 저녁을 들고 올 동안 배와 사람 관리를 부탁하였다.
"혼자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정익훈이 못미더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금보옥은 그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어머, 저 혼자가 아니랍니다. 상공과 함께 가는 걸요."
"혼자나 마찬가지가 아닐지요."
바로 그 상공이란 놈을 믿지 못한다는 듯 정익훈이 토를 단다. 정익훈은 첫 대면에서 덕후에게 말발로 깨진 일이 있어 안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무인의 기질과 사내다운 호방함을 아울러 갖추고 있기에 여행 도중 군말하지 않았다. 여자인 금보옥의 능력에 일말의 회의는 품고 있긴해도 경외하는 석대숭의 일점혈육이자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귀여운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금보옥을 꼬셔서 나들이가는 모습을 보이자 참다 못해 끼어든 것이었다.
"제게 다 생각이 있으니 정 숙부는 이해해주세요."
금보옥은 희고 가는 팔뚝을 들어내보이며 힘차게 말했다. 평소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행동에 정익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보기와는 달리 고수이며, 익힌 무공의 성향이 기억난 덕분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 분을 먼저 방패로 삼으십시오. 정체불명의 상공 열보다는 제게 아가씨가 더 소중합니다."
"명심하죠."
금보옥은 생긋 웃었다. 그러면서 정말 자신을 소중히 한다면 대상련주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정익훈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명문에 기품이 있는 좋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 평범하게 사는 것일테니까. 그나마 정익훈은 우치명이나 다른 가신들과 달리 타산이 적기에, 기질이 안맞음에도 가까이 두고 있었고 이번 여행에도 동행시킨 것이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몇 번 다짐을 받은 뒤에서야 금보옥은 정익훈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덕후는 포구에서 죽 이어진 시가의 입구에 있었다.
"소녀를 버려두고 먼저 가는 게 어디있습니까?"
"가까이 있으려니 귀가 가려워서 말이오."
"다 들으셨군요?"
금보옥의 물음에 덕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좋은 사람이오."
".....그렇네요."
"완고하나 역으로 잘 납득시키면 아가씨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것 같소. 다만, 오래 끌면 좌도를 정도로 착각해서 일을 벌이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 전에 빨리 설득하는 게 좋을거요."
"꺼려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듯 작게 말했으나 못들을 리 없는 덕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꺼리는 것은 맞소. 개인적으로 술상대로 저런 사람을 만나는 건 딱 질색이니까. 방금 말은 그냥 익살꾼의 허섭한 감상이라고 해두시오."
금보옥은 광대를 자처하는 남자의 뒤를 가만히 따랐다.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양파 껍질마냥 새로운 면을 보여주길 반복한다. 익숙해질 법 하면 방심하지 말라는 듯 지금처럼 툭툭 생소한 느낌을 일깨운다. 자신이 걸었던 기대와 정반대 행동을 보임에도 쉽게 호오를 가늠하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둘은 포구에서 가장 유명한 "용화정"으로 찾아갔다. 삼층누각 구조인 이 주루는 풍광이 좋기로 유명해 번화가와 인접해 있음에도 시인묵객이 제법 찾는 곳이었다. 마중나온 점소이에게 덕후는 3층을 주문했다. 점소이는 덕후와 금보옥을 보고 군말 없이 안내했다. 한 층 올라갈수록 따라 자리값과 식대가 차원이 틀렸다. 1층이 번다하고 소란스러운 느낌이 강했다면 3층은 조용하고 호젓했다.
둘은 누대(발코니) 근처의 자리에 잡아 차와 음식을 시켰다. 근처 풍광과 주루를 보다가 덕후는 병장기를 차고 한결 같이 정광어린 눈빛을 한 이들이 좌석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을 파악하고는 금보옥에게 살짝 물었다.
"무림인들이 많아 보이는군?"
"흔한 일은 아니에요."
평소 이렇게 많냐는 질문에 금보옥은 아니라는 뜻을 비쳤다. 소주와 항주가 있는 강남 지방은 중원과 달리 명문거파가 없었다. 십패로 일어선 대상련이 있지만 다른 십패와 달리 무인 집단이라기 보다는 무력을 겸한 상단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 젓가락을 집을 무렵 둘에게 다가오는 일행이 있었다.
"실례지만, 근처에 좋은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합석할 수 있겠습니까?"
포권을 하며 말을 걸어온 이는 청의를 입은 영준한 용모의 젊은이였다.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도 한결같이 기린아를 이었다. 제의를 받은 금보옥이 싫은 듯 무표정한 반면에 덕후의 눈빛은 반짝 빛냈다.
-오옷! 이것은 합석 이벤트!
패턴 발동의 예감이 들었다. 분명 저 청년들은 금보옥에 혹해서 한번 말을 걸어볼까 접근한 것이라. 분명 쟁쟁한 위명을 떨치는 실력이나 배경을 가지고 있을 터. 보통은 약간 개념을 말아잡수고 주인공(덕후 아님)의 여자에게 껄떡대다가 무력 선보이기용으로 희생양이 될 터이지만, 덕후에게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저 저런 존재가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났다는 신기함 때문에 두근두근 할 뿐이었다. 또한 약간의 장난도 곁들여서. UFO를 직접 본 공상과학소년류의 뜨거운 눈빛을 오해했는지 청년들은 불길한 예감에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괜찮습니다. 사해가 구멍 동서이고 옷깃만 스쳐도 탈의할 인연이라고들 합니다."
"형장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좌측에 턱이 네모지고 선이 굵은 청년이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따지고 든 청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영웅들의 헌앙한 자태에 잠깐 홀딱 반했지 뭡니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사과는 맞는데 자신을 위아래 훑어보는 눈길에 송충이가 오슬오슬 기어다는 것 같았다. 최초로 청년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눈에 띄는 미모를 지닌 금보옥이 있길래 수작 걸 마음을 품고 접근을 했건만 왕건을 밟았다는 후회가 든 모양이었다.
"헌데 영웅들은 어인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하, 사실은 이곳이 아니라 심가장에 영웅대회가 있다해서 한번 참석해볼까 와본 것이오?"
"영웅대회라뇨?"
덕후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금보옥은 무표정을 유지한 가운데 귀를 집중했다. 처음 말건 자가 금보옥의 관심을 끌어볼까 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심우진 장주님이 얼마 전 부터 심 소저의 베필을 구한다고 영웅대회를 연다고 선언 하였소. 나이는 서른 이하로 정사마를 떠나서 인재를 구한다고 하더군. 일등은 아니더라도 본선에 진출한 자들은 요직을 맡을 수 있다고 하더군."
"호오, 그렇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덕후는 빈자리를 자신의 옆으로 바싹 끌어당긴 채 탁탁 두들겼다. 청의청년은 원했던 답을 얻었지만 곤혹스러운 마음이었다. 저 자는 왜 의자를 곁으로 바싹 끌어당기는 것인가? 그때 좌측에 말없이 있던 백면서생 같던 청년이 소화불량이 걸린 안색으로 급히 청년들의 소매를 당기더니 귓가로 속닥였다. 청년들이 께름칙한 시선으로 덕후를 보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금보옥을 보는 순간, 시종일관 무표정한 금보옥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절세 미녀의 윙크에도 셋은 사색이 되었다.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각나서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헛? 가시게요? 곧 술이 나올텐데요. 정력에 좋도록 특별한 약을 섞은 거랍니다. 마시고 난 후에는 남자"들"끼리 오붓한 곳에서..."
"아하하, 좋은 시간 방해하기도 그렇고, 한시라도 바쁜 일이니 이만."
청년은 급히 포권하는 둥 마는 둥 손사레를 치면서 동행들과 후다닥 3층에서 벗어났다.
"저 사람들 왜 저러죠?"
금보옥이 의아한 듯 낄낄 거리며 웃고 있는 덕후에게 물었다. 방금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한 것은 덕후의 전음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이었다. 그녀는 방금 덕후의 괴이쩍인 행동과 그로 인해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갔다는 것을 알뿐 구체적인 정황을 알지 못했다. 떨거지들이 알아서 물러났으니 나쁠 것은 없지만 자신을 못 볼 것을 본 마냥 후다닥 달아는 모습은 찜찜한 여운을 남겼다.
사실은 댁을 여장남자로 착각하게 만들었소, 라고는 말할 순 없기에 덕후는 의뭉을 떨었다.
"글쎄 말이오. 동년배끼리 좀 친해질까 했더니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올바른 인사법부터 배워오라고 권하고 싶군요."
"커흠! 아무튼, 영웅대회라? 금시초문 아니오?"
"본련에 통보하지 않고 이런 대규모 행사를 주최하실 분이 아닌데....너무 급작스럽군요. 무언가 내막이 있지 않고서야..."
금보옥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덕후는 조금 머리 속을 가다듬다가 제의하였다.
"그러면 일정을 조금 바꿔봅시다. 곧바로 방문하지는 말고 영웅대회라는 거 돌아가는 꼴을 본 다음에 향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상공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금보옥은 별 이견없이 수긍하였다. 둘은 벌써 식어버린 요리를 다시 데워오도록 시켜 식사를 마친 후, 거처로 돌아왔다. 금보옥은 정익훈을 불러 주루에 있던 일을 추려서 알리는 한편 본련에 급히 사람을 보내도록 시켰다.
다음 날, 금보옥은 덕후와 함께 소주의 심가장으로 향하였다.
약방의 감초 영웅대회! 비무초진! 꾸냥 겟의 정석 이벤트!....주혜 낭자가 나오긴 했는데, 김칫국 들이킬까봐 언급합니다만, 스토리 전개상 겟 제외입니다. 상관 부용에 대한 가교역할 정도라서리.^^;(미리니름 금구인데 여기 연재공간 특성상 공략 안했다고 할까봐 선수를...;)
주인공(덕후 임)의 힘의 정체는 당연히 마법 아닙니다. 파트2의 끝부분에 잠깐 씬을 넣을 예정입니다.-_-; (힘의 성향에 대한 비교를 굳이 끌어보자면 인수라 짝퉁? 소환이나 합체 같은 건 없지만.;) 슬슬 주인공(덕후 임2)의 마각이 조금 나오겠지요. 뭐, 지금까지 하는 행동거지는 댄디로 치면 lawful neutral 입니다만, 실은 true neutral & chaotic neutral 의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