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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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방은 불야성이 되었다.
이불상은 내통 혐의로 감금 투옥되고, 악중평은 비무로 얻은 중상으로 운신을 못하는데다가 고운경은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3대 원로가 저마다 사정으로 꼼짝 못하는 사이 강무제는 창룡대를 성내에 전격으로 배치 하고 친정에 나섰다.
하극상 이후 몇 년간은 술과 계집질에 빠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흑룡대원들이 어떻게 하오문도들을 통제 했는지 지켜본 터라 어렵지 않게 장악할 수 있었다. 강일도에게 흑룡대가 있었다면 그에게는 창룡대가 있다. 강무제가 직접 선발한 창룡대원들은 그 수는 전체 흑룡방의 1할 밖에 되지 않았지만 3배는 강했다.
"염가 년을 찾아라!"
친정을 나선 강무제의 첫 명령이었다. 천 냥의 빚이 있는데다가 하오문의 딸이라면 그녀를 죽임으로서 헛된 망상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추격을 핑계로 흑룡방 뿐만 아니라 남창 일대에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강무제의 명에 따라 창룡대원들은 거침없이 남창 일대를 누비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들은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하오문도 일색인 하부 조직에 단단히 경을 쳐댔다. 참다 못해 반항하는 하오문도들은 3대 원로에게 탄원을 하거나 방심한 틈을 타서 각종 수법으로 암습을 가했다. 강무제는 상명하복의 질서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폭압적인 대응으로 싹을 뽑아갔다.
그렇게 일 주일 가량이 덧없이 흘러갔다. 강무제의 눈이 남창을 넘어 강서 일대로 뻗어갈 조짐을 보일 무렵 이불상이 주화입마에 걸렸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원인은 울화병이라고 한다. 그대로 죽어버리면 좋겠지만, 병자를 계속 뇌옥에 둘 수는 없다는 고운경의 진언대로 강무제는 이불상을 악중평의 거처로 옮겨주었다. 최근 고운경은 강무제에게 붙기로 결심했는지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기 시작했다.
"노부가 어리석었소이다. 자리보전에 연연하다보니 시야가 좁아진 듯 하오. 앞으로 흑룡방의 대의를 위해 협조 할터이니 이불상과 악중평의 목숨만은 붙여주시구려."
고운경은 말뿐만 아니라 창룡대원을 동석해서 염미홍의 행방을 찾거나 반항하는 하오문도들을 달래는데 열심이었다. 전향한 고운경의 간언을 강무제는 들어주었다. 덕분에 남창의 명의가 흑룡방으로 번번히 출입하게 되었다. 병이 들면 대게 친인이 간호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불상에게는 외손녀 소월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월하는 흑룡방으로 오지 않았다. 차츰 방도들 사이에 이런 쑥덕임이 일어났다.
"외손녀라면서 너무 매정하군.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 정이 없는건가?"
처음에는 귓속말로 하던 것이 나중에는 공공연한 성토로 번졌다. 이 소리는 상층부로 올라가 강무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혈육이니 마땅히 병시중을 들어야 할 것이다."
강무제는 소월하에게 흑룡방으로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그녀가 경국의 미녀라는 점을 기억한 점도 있지만 겁탈하면 이불상을 압박하는 수단을 삼을지도 모른다는 음험한 계산이 서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 사람을 보내고 강무제가 친필을 보내고서야 소월하가 움직였다. 가마를 탄 소월하가 대동한 인원은 10명 남짓. 의약품과 옷가지 및 패물을 간직한 짐보따리였다. 강무제가 전면에 나선 뒤로 창룡대가 내외 감시를 엄격히 했지만 이 일행에 대해서는 첫 짐꾼만 검사 했을 뿐 형식에만 그쳤다. 아는 얼굴인데다가 원치 않게 오는 상황에서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마에서 내린 소월하는 수심에 잠긴 기색으로 이불상의 거처로 바로 향했다. 원래는 강무제에게 인사해야 도리다. 그러나 소월하는 외조부의 안위를 살핀다음, 야밤에 찾아가겠다고 통보함으로서 시간을 끌었다. 소월하를 취할 생각이었던 강무제는 흔쾌히 승락했다.
소월하는 이불상을 찾아가기 전에 고운경의 처소에 방문했다. 고운경은 두 명의 창룡대원을 동반하고 있었다. 요주 인물이라 감시를 붙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월하는 그들의 존재를 모른 척,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격조하셨어요."
"무슨 일 있었느냐? 이 노제가 몇 번이나 널 찾았단다."
앉아있는 고운경의 질문에 소월하는 약간 민망한 티를 냈다.
"역술에 대한 한 가지 난제가 있어서 답안을 찾느라 늦었어요."
"음, 역술은 모르지만, 굉장히 난해한 학문이라는 걸 알고 있지. 네 성격상 침식도 잊고 매달렸을 것 같구나. 방주가 부르길 잘했다. 그러다 너까지 앓아눟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고운경은 걱정하는 투로 말했지만 소월하는 그의 눈이 긴장으로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부연하듯이 말을 꺼낸 것은 감시로 붙은 창룡대원에게 들으라는 것이리라.
"명심할게요. 그런데 요즘 바쁘신가봐요?"
"아, 임강부에 소요가 새겨서 가봐야 한다. 신속히 제압하라는 방주님의 명이 있으셔서 오늘 내로 떠나야할 것 같구나."
"할아버님을 만나고 싶어요. 데려온 짐들도 하역 시켜야하고요. 바쁘신 중에 죄송하지만, 안내해주실 수 있겠어요?"
"그야 어렵진 않지."
고운경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두드렸다. 3대 원로 중에서 가장 연장자가 그였다. 소월하가 부축하듯이 곁에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말이 아니세요."
"나이가 있으니 운신이 예전만도 못한 것 같아. 네 외할아버지를 보거든 놀라지나 말거라."
속임수라고는 하나 혈육이 아프다는 말에 소월하는 가슴이 저렸다. 고운경은 악중평의 사처로 안내했다. 대나무가 호위하듯이 서 있는 사처의 마루에는 악중평이 바둑판에 앉아 홀로 복기하고 있었다. 어깨에 장삼만 걸쳤을 뿐 상체는 벌거숭이로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형욱과 비무로 얻은 상처였다.
"왔느냐?"
악중평은 소월하를 보자 카랑한 어조로 말했다. 완고한 노인은 정감을 표현하는 데 지독히도 말을 아꼈다. 소월하는 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악 할아버지, 저와 바둑 한 판 두시겠어요?"
"좋다. 허나 이 형의 정신부터 먼저 붙여놓고 말하자꾸나."
악중평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바둑에 집중했다. 소월하는 한숨과 함께 옆에 난 방문을 열었다. 약탕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할아버지..."
소월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침상 위로 엎어지듯 매달렸다.
"으...으...."
노인은 외손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 신음을 흘렸다. 소월하는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문을 열고 보던 고운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문을 닫았다. 둘만 있게 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창룡대원은 설마 이들이 자신의 이목을 가리게 만드려는 수작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문이 닫히자 이불상이 눈을 뜨며 일어났다.
퀭한 안색이었으나 두 눈에는 정기가 가득했다.
-거사는 언제냐?
전음에 소월하는 입으로는 곡성을 내면서 이불상의 손에 재빨리 문자를 썼다.
-오늘 저녁이에요.
-너무 빠르지 않느냐?
-속전속결이에요. 할아버님이 유폐되신 후에 남창 일대가 발칵 뒤집혔어요. 이 소요가 가라앉으면 강서무림의 주인이 누구인지 천하가 알게 될 거예요.
그 주인은 강무제가 될 것이다. 그 전에 제거해야한다. 이불상은 가만히 탄식했다. 순리대로라면 강무제가 방주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3대 원로를 비롯한 하오문 출신들은 흑룡방 자체를 제 몸처럼 여기지 못했다. 원래 흑룡방의 전신은 하오문이고, 강일도는 염곽정이라는 머리를 바꿔치기 해서 수족을 장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3대 원로와 강일도의 관계는 진실한 주종이 아니라 계약적인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
강일도는 이들을 포옹할 만큼 대기였으나 강무제는 그렇지 못했다. 폐륜이라는 명분상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 대신 암암리에 3대 원로에게 권한을 대폭 실어주었으며, 절정고수로 다른 십패를 막아주는 상징적 방패이기도 했다. 그런 관계도 염미홍의 등장으로 깨져버렸다. 강무제는 3대 원로를 무력화시키고 흑룡방의 힘을 자신에게로 결집시키기 위해 하오문 출신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 내일 해가 뜨기 전에 강무제는 고혼이 되어야 해요.
손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다보던 이불상은 문득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 사랑하는 외손녀가 자신 때문에 독심을 품고 모반을 꾸미니 말이다. 그러나 소월하는 그런 감상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구한다는 마음 외에도 드디어 자신이 뜻을 펼친다는 흥분이 지배하고 있었다. 강무제가 주색잡기로 은거 아닌 은거를 들었듯이, 소월하도 휴양을 핑계로 시가지에서 세상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도록 늘 촉각을 세워왔다.
색이 다른 두 기다림이 드디어 하나로 결착을 지을 때가 온 것이었다.
외조부의 침묵을 망설임으로 짐작한 소월하는 손가락을 계속 놀렸다.
- 제 계획을 믿을 수 없나요? 아니면 염미홍님을?
- 너는 믿는다. 그러나 염씨는 아니다. 여자아이를 방주로 삼는다면 천하가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사실 염 문주님의 딸인지도 의심스럽다. 고 노제는 그녀가 분명히 딸 일거라 믿고 있지만 말이다.
- 강 씨를 치기에는 염 씨의 혈육만큼 적임자가 없어요. 적어도 이번 거사가 하극상으로 순리를 거스리는 일은 아니게 되죠. 오히려 여자이기에 합당한 주인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불상도 젊었을 적에는 3원로 중에서 지낭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외손녀의 말을 듣는 순간 이해했다. 염곽정과 염미홍의 혈연 여부는 중요한게 아니었다. 강무제의 자리를 대신할 명분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그녀의 곁에는 절정고수가 있다고 하니 당장 전력의 공백을 매꿀 수 있으리라.
이불상은 무른 감상을 잘랐다. 강씨 부자와는 근본적으로 융화될 수 없다. 고개를 숙일만한 명분과 힘없는 자의 현실로 따랐지만 궁지에 몰린 이상 더는 지킬 필요가 없었다.
-시작하자꾸나.
무림인으로 눈을 뜬 이불상의 전음이 울리고, 소월하는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밖으로 나온 소월하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가지고 온 짐들 중 일부를 덜고 짐꾼들을 동반하여 흑룡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식솔들의 거처와 무사들을 만날 때 마다 안부 인사라며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창룡대원들은 소월하를 감시할 뿐-혹은 미모를 구경하려거나- 그녀의 짐꾼들이 심부름이라는 명목으로 흑룡방 구석구석 보내지는 것까지 신경쓰지 않았다.
낯선 10인의 출입에 경계를 서던 무사들은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소월하의 사람이라는 말에 즉시 풀었다. 소월하가 어린 시절에 흑룡방에 자란 점도 있거니와 할아버지의 와병으로 인한 불미스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월하와 10명 남짓한 하인들은 하루도 되지 않아 흑룡방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황혼이 서쪽으로 가물가물 저물자 주변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유지를 감싼 등불이 하나 둘 여기저기 켜지시 시작하더니 주변 전각을 휘황찬란하게 밝혔다. 이불상의 방에서 나온 소월하는 수수한 백의를 입은 채 마당으로 나왔다.
야트막한 바위에 올라선 소월하는 문득 들어온 찬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멍하니 이지러지는 달을 바라보는 가운데 누군가가 인기척을 내며 접근했다. 창룡대원이었다.
"소월하님, 방주님께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달밤의 흥취게 깨진 소월하는 몸을 돌렸다. 창룡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교교한 달빛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항아를 연상시켜 여신과 같은 신비한 마력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유감이에요."
소월하는 동정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창룡대원은 그녀의 흥을 깬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고개를 영원히 들지 못했다. 목뒤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젖까지 관통한 것이었다.
"큭!"
눈 앞이 완전히 암흑으로 갇히면서 창룡대원은 쓰러졌다. 그 배후로 두 여자가 걸어왔다. 비도를 던진 염미홍과 호위하듯 따라선 형욱이었다. 이들은 열명의 짐꾼 외에 소월하의 시녀로 분장하여 잠입한 것이었다. 둘다 미인이었지만, 가급적 다소곳하며 수수한 복장을 하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소월하의 외모를 최대한 치장하여 들러리 같은 존재감으로 희석시킨 것도 작용했다. 소월하를 보던 염미홍은 휘파람을 불었다.
"월하미인이라, 그림이 되는 걸?"
소월하는 살풋 웃었다. 그녀의 경험상 접근한 남자의 칭찬은 7,8할이 흑심이지만, 같은 여자의 칭찬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탄이었다. 질투나 선망을 동반하더라도.
"장소는 다 숙지하셨나요?"
"예, 순억이 시작하면 나랑 형욱은 바로 위로 가면 되는 거죠?"
"그곳에서 강무제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죽은 창룡대원의 겉옷을 입는 형욱에게 눈길을 주며 소월하는 말을 이었다.
"낮에 고 할아버지가 창룡대의 대부분을 차출해서 임강으로 향했으니 돌아오려면 아무리 빨라야 사흘은 걸러요. 여기 남아있는 창룡대 무사들은 극소수. 점고를 알리는 다락을 점령해서 서로 연락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첫번째에요."
"순억이라면 잘 할 수 있을거예요."
"순억 씨와 친구분이라면 믿을만 하지요. 남창에 손꼽히는 호한인걸요."
염미홍의 강조를 소월하는 부드럽게 받았다.
"그 뒤에 다락을 나와 신호를 쏜 뒤에 방내의 식구들을 선동하는 것이 두번째에요. 그럼 창룡대들은 혼란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를 거예요. 강 무제는 산정상 자기 거처에 따로 있으니,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면 승산 있어요."
형욱이 옷을 다 걸쳐입고 준비되었다는 듯 검자루를 쥐었다.
"악 할아버지를 따르는 무사는 오십 남짓이에요. 왼 소매를 벗어서 어깨를 드러냈으니 쉽게 구분할 수 있을거예요. 이름난 고수는 아니지만 악 할아버지를 따라 백전을 거친 무사들이죠. 남은 창룡대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이고."
소월하는 다짐을 주듯이 일렀다.
"큰 변수가 없는 한 이쪽이 다소 우세하거나 백중세를 유지할 거예요. 승리의 추를 이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은 형욱님의 무위에 달려있어요."
어려운 상대가 될 거라는 말에도 형욱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건 도박이에요. 앞으로 두 번 다시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반드시 이기고 오세요."
소월하의 간원을 담은 시선이 형욱과 미홍을 항했다. 거사 직전까지 아군이 최대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도록 여러 수단을 발휘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그런 처지에서 막상 거사를 실행을 하려니 떨렸다. 젊음이 주는 열정은 가득해도, 남에게 믿음을 줄 만큼 연륜은 없는 것이다. 불안의 그림자를 감지한 염미홍은 헛기침을 하더니 소월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움켜쥐었다.
"월하.말 놓아도 되지?"
"네? 아, 예."
어깨에 실리는 무게를 느끼면서 소월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였다.
"좀 더 자신을 믿으라구."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널 믿을 수 없으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 줘. 네 두려움은 내가 모두 가져갈테니."
염미홍은 한 손을 내려 소월하의 가슴에 손을 살짝 올리며 무언가 움켜쥐는 시늉을 하더니 자신의 가슴에 턱하니 놓았다. 우스꽝스러울만큼 큰 동작이었지만 소월하는 신기하게도 미혹을 떨치고 잔잔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염미홍과 이어지는 착각 비슷한 느낌도.
"염미홍님은 두렵지 않으세요? 일이 잘못 되면..."
"죽어도 한 번만 죽잖아. 어차피 인생도 그런거 아니야? 난 살아서 고통을 받는 게 두렵지, 죽은 다음에는 알 바가 아니야.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거, 한 점의 미련도 남기지 말고 달리자구."
염미홍은 씩 웃었다. 그러다 자신히 한 말을 되뇌이며 속으로는 깜작 놀랐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간덩이가 부었나 은근히 캥기는 마음이 들 무렵,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형욱도 한 마디하였다.
"강무제 한테는 꼭 받아야할 빚이 있다."
이야기가 늘어지기 전에 재촉을 한 것이다. 소월하는 힘있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다녀오세요. 주군의 낭보를 기다리겠어요."
"아아, 우리 군사님도 몸 조심해."
염미홍은 어깨를 토닥이고는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흑룡방 내에 점고를 울리는 북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리소문 없이 찢겨졌다. 순억을 비롯한 장정들이 짐 밑에 숨겨둔 단병기를 거머쥐고 다락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점령한 것이었다. 점고를 맡은 방도의 무공이 높은 것도 아닌데다가 불시에 당한 일이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불이야! 불!"
다락을 나온 순억들은 지시를 받은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허공으로 포를 쏘았다.
-팍! 펑! 퍼펑!
폭음과 함께 지상 다섯 군데에서 쏘아올려진 불꽃이 어두운 하늘을 가로 질렀다. 성채는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칼을 들고 나온 사람, 계집을 끼고 한창 용두질을 하다가 전라로 뛰쳐나온 사람, 심지어는 요강을 들고 나온 사람들로 대소동이었다. 그들 속에는 창룡대 무사들의 모습도 있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을 깨닫고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왔지만, 사방이 이미 아수라장인데다가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불이 번지기 전에 성밖으로 빠져나가자!"
누군가가 연거푸 외쳤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급히 문가로 내달렸다. 패닉에 빠진 군중심리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위로!"
한 창룡대 무사가 외쳤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강무제의 주위로 모여야한다는 의식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들의 뇌리를 사로 잡았다. 역류를 거스리는 물고기들처럼 창룡대원들은 성채 밖으로 나가려는 무리들 헤치고 방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멈춰라! 더는 못간다!"
집무전으로 통하는 돌층계에 이르렀을 때 입구에서 , 담 모퉁이에서 전각 밑에서 한쪽 어깨를 드러낸 무사들이 줄지어 나왔다. 박도와 철심을 박은 몽둥이들로 무장한 이들은 거슬러 올라오는 동안 한 군데에 모인 창룡대원들을 사면에서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챙 채챙! 땅! 캉!
"크아아악!"
병장기끼리 토해내는 합주와 함께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몇 명의 창룡대원들은 목숨을 잃었으나 살아남은 창룡대원들은 즉시 원진을 만들어 수비하였다. 그렇게 되자 초반에 잠깐의 우세도 사라지고 잠시간 결착 상태가 되었다.
"우리가 누구인줄 알고 겁도없이 공격하다니 역도들 작정했구나!"
창룡대의 대장이 외침에 무사들 사이에 한 노인이 나섰다. 장삼을 걸치고 복부에 천을 드러낸 악중평이었다.
"우리가 역도면 너희들은 반도다! 쳐라!"
악중평이 거칠게 외쳤다. 그와 함께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검진을 공격해갔다. 무사들은 창룡대에 비하면 확실히 무공이 떨어지지만, 모든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사면포위의 이점을 차지한 상태에서 악중평의 지휘 하에 투지로 열세를 매웠다.두 집단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한 쌍이 은밀히 입구 옆의 담장을 넘어 부드러운 흙 위로 착지했다.
거의 동시에 착지했지만, 소리는 염미홍에게만 났다. 절정에 달한 형욱은 새의 깃털을 연상할 정도로 가볍게 착지하였기 때문이다. 정면에는 깔린 청석이 대청으로 이어졌고, 양쪽 처마에는 등불이 휘영청 밝았다. 사람 하나도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도망간거 아냐?"
염미홍은 불쑥 말하다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중문 앞에 흑삼인이 서 있었다. 등불 아래 드러난 모습은 선이 굵은 인상의 젊은이였다.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 사이는 내 천자 접혀 살기를 띄고 있었고, 코밑과 턱은 수염이 거뭇하게 나 있었다. 그는 형욱을 뚫어지게 보더니 염미홍을 알아보았다.
"계집, 제 발로 여기까지 오다니 간이 부었군."
"요즘은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염미홍은 강무제의 으르렁거림을 여유롭게 받아 넘겼다. 이전이라면 살기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나, 형욱으로부터 실컷 생사의 고비를 넘긴데다가 덕후의 뻔뻔함에 어느정도 전염되어 있었다.
"밖이 시끄럽군. 네 년이 꾸민 짓이냐?"
대상련의 사자가 왔을 때, 강무제는 그녀가 하오문을 되찾겠다고 설친 사연을 들어 알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3대 원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으리라.
"겸사겸사. 전에 감히 날 안겠다고 말했지? 천 냥으로 봐줄까 했는데 뒷구녕이라도 좋아라 빨아먹겠다고 달려드는 얘들이 있지 뭐니? 그래서 수지 좀 맞추려고 직접 왔지."
강무제는 노화가 치밀었다. 천 냥을 떼어먹힌 일 때문에 추격꾼을 보냈었다.
"여태 소식이 없어서 이상타 싶었는데 역시 죽였군?"
"응, 얘가 그랬어."
염미홍은 고혹적인 몸짓으로 형욱의 어깨에 기대듯이 손을 착 올리고는 쌩긋 웃었다. 강 무제에는 그 모습이 눈에 시어 으드득 이를 갈았다.
"네 년은 잡히기만 하면, 젖가슴을 도려내고 보지에다 칼을 박아서 자궁을 들어내주지."
두 눈에 푸른 귀화가 맺히는 것처럼, 증오의 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저주의 말에 염미홍은 속으로 서늘해졌으나 겉으로는 평정을 잊지 않았다.
"난 예의를 아는 규수니까 목으로만 만족해줄게. 누구처럼 야만인은 아니니까."
"크크크...."
흉소를 흘리던 강무제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간 형욱의 몸도 흐릿해졌다.
- 챙!
염미홍은 눈 앞에 형욱의 등이 나타나 얼떨떨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사정을 알고 급히 뒷걸음질 쳤다. 눈깜짝 할 사이에 강무제가 염미홍을 잡기 위해 거리를 좁힌 것이고, 그것을 눈치챈 형욱이 막아선 것이었다.
쉭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형욱과 강무제의 인영이 한 차례 붙었다 떨어졌다. 둘은 심각한 안색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강무제는 허리와 뺨에 혈선이 그어졌고, 형욱은 어깨와 바깥 허벅지에 검상을 입었다. 한 차례 충돌하는 동안 열 차례의 도격을 교환한 결과였다.
"제법이군."
강무제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혀로 훔쳤다. 강무제는 순간 상대의 동공이 좁혀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강무제는 자신의 전면으로 질풍처럼 짖쳐오는 기세를 느꼈다. 그 질풍의 끝에는 은빛 호선을 그며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목이 뚫리려는 찰나 강무제의 왼발이 뒤로 비스듬히 빠지더니 몸이 반바퀴 회전했다. 회전의 돌출부가 형욱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팔꿈치로 가격하는 것이다. 형욱은 예도를 쥔 손은 그대로 내뻗은 채 반대편 손으로 육장을 날리듯이 잡았다.
그 순간,
-쉬익!
형욱은 허리춤으로 섬뜩한 기운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팔꿈치 공격은 속임수였고, 숨은 한 수는 비수였다. 몸을 돌리는 순간, 형욱의 사각을 이용해 자신의 패도를 땅에 꽂아넣은 것이었다. 양팔이 봉쇄 된 상황에서 절체절명에 빠진 형욱은 뒤로 쓰러지듯이 오른 다리로 낮은 차기를 날렸다.
-팍! 슉!
비수는 형욱의 허리 곁을 스쳤다. 발 차기를 맞아 균형이 흐트러졌기 때문이었다. 강무제는 맞은 다리가 저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땅에 꽂은 패도를 급히 잡았다. 형욱이 쓰러진 틈을 타 연환도격을 날렸다. 형욱은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땅을 뒹굴며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개처럼 구르는 군!"
신나게 비웃으면서 강무제는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도기가 바닥을 난자하며 돌가루와 흙먼지를 피웠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형욱은 눈 밑으로 올린 도봉과 도극을 잡고 공력을 있는대로 주입하여 올렸다.
-탕!
도기가 정면 충돌하자 별똥별처럼 기파가 발생했다. 강무제는 도를 거두지 못하고 공력을 주입한 채 내리눌렀다. 형욱도 이에 대항하여 공력을 돋궜다.
-후우우우우웅!
형욱의 검이 조금씩 들려졌다. 내력은 형욱이 더 앞선 것이다. 대환단의 힘이라 쓰고 덕후가 주입한 막무가내 내력이라고 읽는 경우가 이때 조금 이득을 본 셈이다. 강무제는 와락 인상을 썼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것이 실전뿐만 아니라 이토록 심후한 내력을 지닐지는 몰랐다.
"이랴아아아아!"
순간적으로 십성 내력으로 눌렀다가 거두자 반탄으로 강무제의 몸이 허공으로 붕 뛰어올랐다. 그 반탄력이 정점에 달한 순간 강무제는 전력을 다해 뇌운구류도를 펼쳤다. 아홉 줄기의 뇌전이 밤하늘을 찢고 낙하했다. 형욱을 치기 위해 내려치는 아홉 갈래 도격은 그물처럼 촘촘하기 그지 없었다.
형욱은 양 다리를 급히 들어올렸다가 땅을 힘껏 차면서 반동으로 상체를 접듯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딛은 한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승천하는 용처럼 비상했다.
-카아아아아아앙!
공간을 찢으며 벼락 구름과 일섬이 충돌했다. 일섬은 벼락 구름을 해치며 아홉 갈래의 도격을 흡수하듯이 지워갔다. 일섬과 벼락이 중첩될 때마다 도운은 산산 조각났다. 그 끝에는 경악한 강무제의 얼굴이 들어왔다.
"커헉!"
일섬은 일말의 저항도 저항없이 강무제의 가슴을 관통하였다. 절초에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부었기에 몸에는 일말의 호신기 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 강무제는 가슴이 꿰인 상태로 형욱의 몸 위로 무너졌다. 벌어진 상처를 타고 나온 뜨거운 피가 형욱의 몸을 차츰 적셨다.
"크크크...."
고통은 없었다. 숨이 턱 막혀오면서 머리가 아득해졌다. 손발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온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대신 강무제를 엄습한 것은 기묘하게도 정적과 같은 고요함이었다. 강무제의 몸이 타력에 의해 밀처졌다. 가슴을 채운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더니 은빛 선이 허공을 갈랐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서 목 없이 쓰러지는 몸뚱이가 보였다. 검귀의 칼에 분리된 목은 차가운 땅위를 데구르르 굴러갔다. 폐륜아다운 최후라는 것이 강무제가 떠올린 마지막 상념이었다.
유럽 쪽인가, 사형수 연구가가 현장 실습(?)해보기를 기요틴 같은 걸로 목 잘릴 경우 2초간 의식(or 감각)이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건 그렇고, 이 글은 삭제한 전작들을 대신하여 리메이크 한다, 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개나 구성이 산만한 편입니다. 글을 올릴 때 날잡고 한 번에 치는 것이 아니라, HPC를 끼고 틈날 때마다 짬짬히 하는 것이라 중간에 앞뒤를 깜빡 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초고 상태로 올리는 것이니.;
개연성에 모순이 생긴 부분이 있다면 지적을 달게 받겠습니다. 케릭터에 대한 지적도....뭐, 이 경우에는 독자에게 충분히 공감을 형성시키지 못한 작가의 역량부족이니 할 말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