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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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23 회 심계검풍(心計劍風) 2
에에야스와 에도성의 많은 중진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본전의 뜰 앞에 마
주하고 있는 명(明)과 야스다(安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명(明)의 정안을 향해 겨누어진 야스다(安田)의 대도(大刀)에는 예리한 검
광(劍光)이 흐르고 그의 눈빛은 이글거렸다.
그러나 미동도 않고 서있는 명(明)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다.
우연히 찾아낸 부모의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마음의 동요(動搖)가 없으랴만 잠시 방심을
하여 사다에의 연심(戀心)에 낭패를 본 명(明)인지라 다시 한 번 스승의 당부를 각심(刻心)하는
순간이었다.
(저놈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목숨으로 대신해야만 할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어찌 해야만 하는가!)
명(明)은 뇌리에는 상대와의 승패가 아니라 오히려 살려주느냐 목숨을 끊어 철천지(徹天之)의
원한(怨恨)을 갚아야 하는가 그 결말(結末)을 고뇌(苦惱)하고 있는 것이다.
「흐흐흐 애송이..! 내 칼을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터..! 자.. 간다. 원극의 세(勢)..!」
어전시합에 장원을 해 기세가 등등해진 야스다(安田)..!
한껏 자신감이 넘쳐 손에 든 그의 대도(大刀)가 명(明)의 눈앞에 일직선으로 뻗어와 두자 앞에
서 멈춘다. 그 순간 대도(大刀)의 끝에서 푸른빛이 발광(發光)하며 점점 청광(靑光)의 범위가
넓어지더니 이윽고 야스다(安田)는 칼 빛의 테두리에 숨어들어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수많은
검광(劍光)이 명(明)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주변에 자리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네노리의 얼굴에 심려(心慮)가득한 표정이 스쳐 지났다.
아니 무네노리뿐 아니라 고로의 표정을 더욱 불안해 보였다.
(허헉..! 원극의 세(勢)..? 지금껏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군베에(軍兵衛)의 절정기예..! 언
제 야스다가 그 원극의 검(劍)를 익혔단 말인가?)
그러나 명(明)의 표정을 한가로왓다.
「원극의 검이라..! 하하하.. 좋은 자세(姿勢)..!」
얼굴에 엷은 미소까지 머금은 명(明)은 지팡이속의 칼을 빼들어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쥐고
검 끝으로 하늘의 중앙을 찌르듯 천천히 들어 올린다.
「월영검(月影劍)..! 팔방허무(八方虛無)의 세(勢)..!」
조그만 소리를 내뱉는 순간 명(明)의 귀에는 스승 혜암스님의 말이 울려오는 듯 했다.
(명(明)아.. 심검(心劍)이다. 눈을 감고 달 그림자를 베어 보아라!!)
명(明)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야스다의 칼에서 뻗어난 푸른 검광(劍光)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명(明)을
에워싸고 전신을 향해 날아든다.
그러나 명(明)은 미동도 않고 다만 하늘을 향해 치켜든 검 끝을 정점으로 하여 조금씩 아래로
이동해 큼직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원월(圓月)의 자세다.
명의 검 끝이 천공에서 한 바퀴 돌아 지상에 향하는 순간..! 야스다(安田)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이 터졌다.
검광(劍光)속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보던 야스다가 드디어 온몸에 드러난 명(明)의 빈틈을 발견
하고 한칼에 목을 베려 검기(劍氣)를 뿜어낸 것이다.
- 휘익.. 슉.. 슈욱..!
바람을 가르며 예리한 칼날이 명(明)의 목을 섬뜩하게 베고 지나갔다.
「악.. 아아악..!」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그 비명은 명(明)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아니라 저쪽 한 켠에 서서 조마조마하게
장중을 바라보고 있던 사다에의 입에서 터진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 명(明)의 몸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광경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사다에의 귀에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그대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개심(改心)을 바라는 마음으로 목숨은 살려둔다. 나
머지 인생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불쌍한 백성을 위하는 일에 전념하라.」
- 퍽.. 퍼억.. 쿵..!
웃음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명(明)의 검이 섬광을 뿜으며 번개처럼 야스다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
다.
「악.. 으아악.. 내.. 내 그것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야스다의 곁에 조그만 살덩이가 툭.. 떨어지며 고간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 올랐다.
두 손으로 다리사이를 붇들고 때굴때굴 구르는 야스다를 내려다보며 명(明)은 한마디를 더 던진
다.
「이제 네놈을 사내구실을 하지 못할 터..! 네놈의 그 음욕에 목을 매고 죽어간 조선의 모든 여
인들에게 속죄를 하며 세월을 보내도록 하라!!」
* * * * * * * * * *
이에야스의 내실에 불려온 명(明)과 윤충 그리고 설아의 눈빛이 놀라움에 흔들리고 있다.
(이상하다. 야스다와의 목숨을 건 대결에서도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하던 명(明)공자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저 두 남녀도 역시 심신(心身)이 흔들리고 있다. 허나 저 공자와
두 사람의 눈빛이 다르다. 그렇다면 각각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가 다르다는 말인데..?)
과연 이에야스를 호위하는 무네노리였다.
그 짧은 순간 명(明)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이에야스가 옆에 다소곳 앉아 있는 조선옷 차림의 여인(女人)..! 분명 연(蓮)이었다. 오매불망
(寤寐不忘)그 흔적을 찾아 헤매던 연(蓮)이 뜻밖에도 이에야스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
다. 그리고 그 옆의 조그만 탁자(卓子)가 놓여 진 옥함(玉函)..! 다름 아닌 헌원비록(獻元秘錄)
을 담아 둔 옥함이 아닌가?
때문에 그 놀란 원인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미묘한 차이까지 감지한 무네노리 역시 뛰
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태연을 가장하는 사람은 그들 뿐 아니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
지못한 연(蓮)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모른 척 외면(外面)을 했다.
「대단한 청년이로다. 허나 그대에게는 야스다를 용서 못할 깊은 원한이 있는 듯 했다. 진검승
부라고 내게 청하던 그대가 어찌하여 야스다의 목숨을 살렸는가?」
명(明)이 인정을 베푼 이유가 궁금해진 이에야스의 은근한 물음이었다.
「예.. 합하(閤下),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원죄는 합하
(閤下)처럼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다이묘(大名) 대 영주(領主)들이 작당하여 조선을 침략한 그
일에 있겠지요. 하찮은 저놈의 목숨을 거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헛..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眼前)이라고 그 따위 망발(妄發)을..!」
명(明)의 대답에 당황한 무네노리가 노여움을 나타낸다.
「괜찮다. 놓아 두어라. 조선전쟁의 유민이었더냐? 많은 원한이 사무쳐 있는 말투로다. 허나 우
리가 패한 전쟁이 아니더냐!」
「섬나라 왜국(倭國)이 어찌 동방의 나라 조선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결과이지요.」
이에야스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이내 평온(平穩)을 되찾으며 진중히 말을 이었다.
「이.. 이놈이..! 내 너를 중히 여기려 했건만..! 허허허.. 너의 그 말은 원수를 눈앞에서 만난
분노 때문이라 여겨 더는 문제 삼지 않으마.」
「으하하하.. 합하(閤下)께서도 조선 출병의 예비대로 남아 계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히데요시
님이 살아계셨고 조선의 전쟁이 길어졌다면 합하(閤下)께서도 바다를 건넜을 것입니다. 어찌
전쟁을 일으킨 참상을 회피하려 하십니까?」
「어허.. 당돌한 놈, 그만 입을 다물라 했거늘..!」
「입을 다물지요. 허나 합하(閤下)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히데요시님은 점점 커져가는
다이묘(大名)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 들의 입막음으로써 조선을 택한 것으로 압니다. 만
약 합하께서 이 나라를 통일해 정국이 안정 된다면 또다시 전철을 되풀이 할 요량이십니까?」
「어허.. 이놈이.. 그래도..! 크하하하.. 그 기개가 내가 높이 사마..! 됐다. 그만 하거라. 내
너의 재주를 중히여겨 더 이상 추궁은 않으마. 그래.. 장원을 한 야스다를 이기면 한 가지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말해 보아라.」
이에야스는 대인(大人)의 풍모(風貌)를 과시하며 명(明)을 회유하려 했다.
「좋습니다 합하(閤下)..! 그러시다면 합하(閤下)의 곁에 앉아있는 저 조선의 여인을 저에게 내
려 주십시오.」
「뭐.. 뭐라 했느냐?」
명(明)의 엉뚱한 제안이 이에야스뿐 아니라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
다.
「허허허허.. 알았노라. 내 깊이 생각해 보마. 밖에 내관은 있느냐? 이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
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