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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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18 회 거친 여인(女人) 1
과연 닌자(忍者)의 은형술(隱形術)은 묘하고도 신비했다.
몸을 숨기고 다케(竹)언덕을 내려간 명(明)의 일행이, 한 무리의 닌자(忍者)들이 사라져간 그
쪽으로 안내를 하는 고로(吾郞)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순간 명(明)과 윤충(尹忠)의 눈앞에
서 고로(吾郞)의 모습이 스르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어..?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고로(吾郞)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리둥절 뚫어지게 앞을 살피던 명(明)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언덕의 아래쪽 관도로 통하는 입구의 다리를 막고 검문 초사(哨舍)의 앞에 늘어서 있는 병졸들
은 오가는 길손들을 하나 남김없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개천은 수위(水位)가 어른의 무릎정도여서 다리 아래를 숨어 지나
려 해도 병졸들의 눈에 드러나기 십상인 위치였다. 그러나 단 한곳 그들의 눈에 뜨이지 않고 통
과 할 수 있는 장소..!
다리를 받치고 있는 교각(橋脚)은 그늘이 져 다른 곳 보다 는 훨씬 어둠이 짙어 그림자조차 분
간되지 않는 장소였다.
고로(吾郞)는 그 교각에 몸을 밀착시켜 그 곳의 어두움을 이용해 마치 보호색을 만들듯 교각의
색과 같은 천으로 몸을 감추어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허허.. 과연 뛰어난 재주..! 윤충(尹忠)공.. 보았지요? 저게 닌자들이 몸을 숨기는 은형술(隱
形術)의 본상(本像)이외다. 자.. 함께 저곳으로 끼어듭시다.」
교각에 붙어있는 고로는 어서 두 사람이 뛰어들기를 기다리며 몸을 숨길 천의 한쪽을 열고 기다
리며 재촉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 * * * * * * * * *
날이 어둑해진 에도(江戶)의 거리는 음산(陰散)한 기운이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겨우 다케(竹)언덕을 벗어나 다리 아래로 숨어든 명(明)의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에도로 잠입해
하루(春)와 약속한 외성(外城)의 오층탑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관도를 지나는 군중들의 얼굴은 모두 긴장을 해 웃음 띤 모습을 별반 볼 수가 없고 길가에는 부
상을 당해 몸을 채 가누지 못하는 군졸들과 전장의 와중에 삶의 터전을 잃은 낭인들과 굶주린
백성들이 즐비했다. 이런 상황이 에도의 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으음.. 이곳도 역시 전쟁의 비극을 겪고 있구나. 고로(吾郞)님, 그대의 판단이 옳은 듯 하오.
이 난국을 헤쳐 나갈 힘을 가진 인물은 이에야스라는 그대의 생각 말이오.」
「예.. 명(明)공자님, 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 군상(群像)들도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명(明)앞에서 어조(語調)까지 공손해진 고로(吾郞)였다.
「그렇지..! 이제 이 혼란을 끝내야 하겠지. 그러나 정국의 안정을 이루고 나면 또 다른 욕심이
싹트지나 않을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니오, 혼잣말이오. 자 어서 발걸음을 재촉 합시다. 너무 저물기 전에 탑(塔)에 당도를
해야 예의(禮儀)일 거외다.」
「알겠습니다. 서두르지요.」
빠른 걸음으로 관도를 벗어나 에도성(江戶城) 외곽으로 부리나케 달려간 그들의 눈에 멀리 오층
답이 보이며 그 곁에 서있는 하루(春)의 모습이 띠였다.
「오.. 공자님, 하루(春)아씨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탁한 손님도 함께 오신 듯 합니다.」
「그러게..! 빨리 갑시다.」
* * * * * * * * * *
한걸음에 그들 앞으로 다가간 명(明)의 일행을 하루(春)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명(明)님, 무사히 당도하셔서 다행입니다.」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하루(春)의 곁으로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던 명(明)이 주춤 발걸음을
멈춘다.
갑자기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흘러드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저 여인에게 서다. 예사롭지 않은 기(氣)를 뿜어내는 저 여인(女人)..! 서른의 중반은 된 듯
보이구나. 헌데 저 여인의 자세는 마치 검을 들고 마주해 있는 것 처럼 조그만 틈도 보이지 않
는다. 무예의 달인임이 분명하구나!!)
하루(春)의 오른편 옆에 말없이 서서 다가서는 일행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女人)..! 얼
굴에 기품이 넘쳐흐르며 모습은 물 흐르는 듯 조용하나 고요히 서있는 그 자세에는 한줌 빈틈을
보이지 않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잠시 경계를 하며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그 여인의 가녀린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눈에 보이지 않게 슬쩍 움직였다.
- 슉.. 슈우욱..!
- 피웅.. 피이잉..!
날카로운 파공음(破空音)을 울리며 여인의 손끝에서 떠난 섬뜩한 수리검 두 자루가 명(明)과
윤충(尹忠)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이런.. 허헉..!」
반가운 마음에 아무런 방비 없이 그들에게로 다가서던 명(明)은 갑자기 날아든 수리검에 당황하
여 몸이 굳어 버린 듯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
아니 급작이 파고드는 수리검을 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듯 눈까지 감아버린다. 그 급박한 순
간 윤충(尹忠)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이 무슨 짓..! 하핫..!」
윤충(尹忠)의 신형이 옆으로 한발 비켜나며 손에 들린 검집에서 섬광(閃光)이 번득였다.
- 쉬익.. 챙그렁..!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발도술(拔刀術)이었다. 그러나 그도 오직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리검을 털쳐 낼 뿐이었다.
「어어어.. 명(明)공..!」
다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윤충(尹忠)의 눈길엔 초조함이 묻어났다. 아직도 그 자리에 얼어
붙은 듯 눈을 감고 굳어있는 명(明)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 휘이이잉.. 슉.. 슈 욱..!
또 하나의 수리검은 명(明)의 귓가를 스치듯 지나 등 뒤에 서있는 고목나무의 덩굴이 깊숙이 박
힌다. 다행히 수리검은 명(明)의 정수리를 비켜난 것이었다.
「휴우..!」
주변에 둘러서 있던 설아와 하루(椿)를 비롯한 닌자들 까지도 그 긴장 속에 한 고비를 넘긴 한
숨이 새어 나왔다.
번쩍 눈을 뜬 명(明)이 한발 한발 천천히 그 여인의 가까이에 다가가 가슴 두근거리며 서있는
하루(春)에게 잠시 목례를 한 후 여인의 얼굴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부인.. 뛰어난 솜씨외다. 소생..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얼굴에 방긋 웃음을 머금고 오히려 명(明)을 향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공자의 깊이를 생각 못하고 감히 시험을 하려했던 이 여인을 용서하세요. 근데 어찌 알고 계
셨는지?」
「하하하.. 부인, 과찬입니다.」
두 사람 첫 대면의 인사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가고 있다. 그리고 여인은 번개 같은
칼놀림으로 자신이 던진 수리검을 막아낸 윤충(尹忠)의 무예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아예 그쪽은
쳐다 보지도 않고 명(明)과 알쏭달쏭한 말들만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주변의 인물들이 오히려 더욱 괴이하게 여기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사다에님.. 무엇을 알고 있었냐고 묻는 거예요? 이분이 제가 말씀드린 명(明)님 입니다. 어서
인사나 나누도록 하세요.」
그러나 사다에라고 불린 그 여인은 하루(椿)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 방글거리는 얼굴로
명(明)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분명 날아오는 수리검에 오금이 저려 꼼짝도 못하고 얼어있던 명(明)이 아니던가! 그런데 두 사
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모든 상황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다에의 말이었다.
모든 사람이 환시(環視)리에 바라보고 있던 조금 전의 그 광경..! 꼼짝 못하고 있는 명(明)과
대조를 이루어 윤충(尹忠)은 뛰어난 발도술(拔刀術)로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던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였다.
「하하하.. 나뭇잎 한 장의 간극(間隙;사물과 사물사이의 틈)..! 소생 그 틈을 느끼고 있었습니
다.」
그러자 사다에는 희고 가녀린 손을 들어올려 살며시 입술을 가리며 미소를 띄운다.
「호호호.. 공자님, 결국 제가 던진 수리검이 공자를 비켜나리라는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
다는 말이군요?」
「허허.. 부인을 믿었지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서로 처음만난 사람.. 그 조차도 목숨을 노리고 수리검을 날린 여인에게
믿음이라니??
어리둥절해진 하루(春)와 주변의 인물들은 이제 두 사람의 대화를 궁금증 가득한 마음으로 듣
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자님, 분명 수리검은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으로 알았을 터인데 어찌 그리도 태
연하실 수가 있었습니까?」
「하하하..! 부인이 던진 그 수리검에는 살기(殺氣)가 전혀 깃들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소생의 목숨을 노린 투검(投劍)은 분명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소생이 굳이 피하려 할 필요가
없었던 일..!」
「그 짧은 순간에 살기의 유무(有無)까지 판단하시다니..! 과연 뛰어난 혜안(慧眼)을 가지셨습
니다. 저의 만용을 용서하세요.」
「천만에..! 명(明)이라 하외다. 이렇게 출중(出衆)한 분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 오히려 영광입
니다.」
명(明)의 대답에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사다에의 모습에는 고혹(蠱惑;매력에 홀려 정신을 못 차
림)스러운 표정이 흘렀다.
「명(明)공자님, 가까운 곳에 저의 누옥(陋屋;누추한 집)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우
선 저의 집으로 가서 말씀을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다에의 권유에 명(明)이 얼른 하루(春)의 표정을 살피니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렇게 하지요. 모두들 부인의 집으로 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