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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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16 회 혜안(慧眼)과 망집(妄執) 1
오카(岡)의 별채에서 숨어 지낸 날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충분히 다친 어깨를 치료를
해 이제 몸이 거뜬히 회복이 되어 후원의 마당에서 검을 휘둘러 기력을 점검해보던 윤충(尹忠)
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설아(雪娥)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설아.. 그 명(明)이란 청년은 어디에 있더냐..? 내가 찾는 다고 전해라.」
「오라버니.. 무슨 일로..?」
「그 사람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 빨리 오라고 하거라.」
명령을 하듯 다그치는 윤충(尹忠)의 재촉에 설아(雪娥)는 급히 명(明)을 찾아 후원으로 나섰다.
그곳 연못옆 정자위에서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명(明)과 하루(春)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두 사람은 한 달 내내 어쩌면 저렇게도 꼭 붙어있는 걸까..?」
질투의 감정인가..! 조금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명(明)에게 가까이 다가가 윤충(尹忠)의 말을
전했다.
「충(忠)오라버니께서 명(明)공자님을 지금 좀 뵙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무슨 일이랍니까..? 여기 하루(春)님과의 긴요(緊要)한 의견을 나누고 있으니 끝나는 대로 찾
아 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명의 대답에 설아(雪娥)는 눈살를 찌푸려 힐끗 하루(春)를 치켜보며 발길을 되돌렸다.
* * * * * * * * * *
「무슨 일로 소생을 찾으셨소이까?」
후원의 마당에서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몸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있는 윤충(尹忠)에게
다가간 명(明)이 보자고 한 이유를 물었다.
그런 명(明)을 윤충(尹忠)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명(明)공자.. 긴히 나눌 말이 있다 하였는데 어찌 이리도 늦게 온 것이오?」
힐책(詰責)을 하는듯한 말투였다.
「하하하.. 하루(春)님과 담소를 나누느라 좀 늦었소이다. 그래 소생을 보자고 한 연유가 무엇
입니까?」
「쯧쯧.. 이보시오..! 내가 찾는다 전했으니 내 전언보다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내 뒤를 따르시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앞장을 서고 있는 윤충(尹忠)의 뒤를 말없이 따르고 있는 명(明)기색을 살
피던 설아(雪娥)는 윤충의 고압적인 말투에 조마조마 불안한 마음으로 윤충(尹忠)의 표정을 살
피고 있었다.
후원 연못의 곁에 놓여있는 돌로 된 의자에 앉은 윤충(尹忠)이 명(明)과 설아(雪娥)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정자위에는 아직 하루(春)가 그곳이 남아 연못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잉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명(明)이 돌의자에 채 앉기도 전에 윤충(尹忠)이 불쑥 말했다.
「나와 설아(雪娥)는 조정의 중대한 밀명을 띠고 이곳에 왔소. 오사카성에 침입을 한 이유도 그
밀명 때문이었으나, 나와 설아의 힘이 부족해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오. 그러니 공자가 우리 두
사람을 도와 임무를 완수하도록 협력을 해 주어야 겠소이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 강요를 한다.
「허허허.. 말씀은 잘 알겠으나 소생도 이곳에서 꼭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윤
(尹)공의 그 말을 따를 수가 없구려..!」
「어허.. 이놈이..! 내말은 곧 조정의 명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개인의 일보다 나라의 사명이
우선 하는 것..! 내 그대에게 나의 부하가 되기를 명하니 우리를 도우도록 하라..!」
윤충(尹忠)의 억지에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던 설아(雪娥)의 눈이 둥그레졌다.
「푸하하하.. 이보시오 지체높은 조선의 관리나리..! 아직도 그 조그마한 권력에 백성이 눈 아
래로 보이시오..? 답답한 사람이로고..! 그냥 조선을 위하는 일이니 도와 달라고 나에게 사정을
하시오. 그러지 않아도 행선지가 같아 이 먼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게 안쓰러워 함께 행동을 하
려 했건만..! 이제는 그 마음조차도 없어져 버렸소이다.」
「이.. 이놈이..!」
휙..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돌리는 명(明)의 등뒤에 고함소리가 울렸다.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는 명(明)의 곁으로 부리나케 달려온 설아(雪娥)가 명(明)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변명을 했다.
「공자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충(忠)오라버니가 답답한 처지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공자
께 한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으니 부디 함께 동행을 해 주시기를..!」
한 달여를 함께 이곳에서 생활을 한 설아(雪娥)는 그동안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명(明)을 대하
는 태도를 보며 에도(江戶)에서의 활동에는 명(明)의 도움이 지극히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특히 하루(春)가 명(明)을 대하는 자세(姿勢)보다도 그들의 주위를 언제나 먼 발치에서 지
키며 마치 주군을 모시듯 일심으로 호위를 하고 있는 고로(吾郞)의 충심에 감탄을 하고 있었던
설아(雪娥)였다.
때문에 명(明)의 존재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꼭 필요한 인물이라 여겨져 언젠가는 설아
(雪娥)스스로가 명(明)에게 도움을 부탁하려던 생각이 거드름을 부리는 윤충(尹忠)의 태도에 의
해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명(明)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하하하.. 염려 마오. 그래도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 우리는 같은 조선인일 것을!」
「공자.. 고맙습니다. 제가 대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됐소..!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어어어.. 저.. 저사람 들은..?」
설아(雪娥)의 마음을 달래어 주고 있던 명(明)의 눈동자가 갑자기 둥그렇게 커지며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설아(雪娥)낭자.. 나중에..!」
그리고 급히 말을 내뱉으며 휘익.. 몸을 날려 벌써 저 멀리 정자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지난날 고로(吾郞)와 함께 있던 그 닌자(忍者)들이다. 전쟁중인 고니시와 함께
있어야 할 저들이 하루(春)를 찾아 왔다는 것은 분명 전장에서의 변고가 생겼다는 말이다.)
단숨에 정자까지 달려와 하루(春)의 앞으로 다가가는 명(明)의 앞에 먼저 와 있던 고로(吾郞)가
앞을 막아섰다.
「명(明)님.. 저들은 제가 남겨 두었던 표지를 보고 이곳까지 찾아 왔습니다. 지금 하루(春)아
씨에게 주군 고니시님의 근황을 보고하고 있으니 잠시만 듣고 계십시오. 두 사람은 계속 보고를
하라..!」
보고를 듣고 있는 하루(春)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씨마님..! 세키가하라(關ケ原)의 전투는 도쿠가와가 이끄는 동군(東軍)의 승리로 끝나고
주군 고니시님께서는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이시다님 역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후회
없는 한판의 승부였으니 아씨께서는 주군의 죽음을 애타하지 말라는 엄한 명이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알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하루(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두 마디 뿐..!
부친의 전사소식 들은 그 충격에 잠시 안색이 변하고 온몸을 경련하고 있던 하루(春)는 이제 미
동도 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
이 흘러내렸다.
「고로(吾郞)님.. 어서 하루(春)아씨를 방으로 모십시오. 충격이 오래가면 쓰러집니다.」
명(明)의 재촉에 얼른 하루(春)를 들쳐 업은 고로(吾郞)가 후원의 별채로 들어갔다. 그러나 방
안으로 옮겨진 하루(春)는 당당한 자세로 앉아,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집주인 오카(岡)를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오카(岡)님.. 더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졌습니다. 그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저
분의 부상도 완쾌되었으니 한시바삐 떠나고자 합니다.」
과연 고니시의 딸 다웠다.
금방 몸을 추스려 그 충격을 이겨내고 다음 행보를 결심한 하루(春)의 각오였다.
* * * * * * * * * *
사카이를 떠난 일행들은 두필의 말에 여자인 하루(春)와 설아(雪娥)가 나뉘어 타고 나머지 인원
들은 빠른 걸음으로 오사카에서 에도(江戶)로 진입하는 가장 가까운 길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다케(竹)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말의 뒤를 다르고 있는 윤충(尹忠)과 닌자(忍者)들보다 몇 걸음 뒤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걸음
을 재촉하고 있는 명(明)의 모습은 깊은 생각에 젖어 있는 듯 했다.
좌우의 눈치를 살피던 고로(吾郞)가 모두가 멀찍이 앞서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결심한 듯
명(明)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와 조그만 소리로 말을 건넨다.
「명(明)님.. 저의 주군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저에게 두 가지 밀명(密命)을 내리
셨습니다.」
갑작스런 말에 조금 당황한 명(明)은 고개를 돌려 고로(吾郞)에게 되물어 보았다.
「밀명이라..? 고니시(小西)의 밀명을 어찌 저에게 말하려 하는 것이오..?」
「예.. 주군께서는 일찍부터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대마도에서
명(明)님이 주군의 보호를 마다하고 시마쓰(島津)장군과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그때에도
주군께서는 명(明)의 의중을 짐작하고 계셨습니다.」
「나의 생각을 짐작하고 계셨다..? 그래.. 그 짐작이 어떤 것이라 하더이까..?」
「예.. 명(明)님, 주군께서는 히데요시님의 사(死)후 이에야스님과 미쓰나라님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 점은 명(明)님께서도 파악하고 있던 바와 같이 정국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벌어질 불가피한 전쟁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잘 보았습니다. 나도 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느끼고 있었지요.」
「그때 주군께서는 명(明)님의 선택이, 즉 그 전쟁에서 살아남는 사람을 선택해 일본에서의 배
경으로 삼으려 한다고 짐작한 것입니다. 시마쓰(島津)장군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 전쟁에서 살아
남을 만한 인물이니까요..!」
「허허.. 고니시(小西)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그리 짐작을 하신 것일까..?」
「주군 자신과 시마쓰(島津)님의 성품(性品)을 스스로 비교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에야스님과
의 교분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상활을 면밀히 파악해 주군 자신은 막약 전쟁이 발발한
다면 그 전장에서 목숨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겠지만 시마쓰(島津)장군은 어떤 빈틈을
찾아내더라도 그 전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성으로 돌아가 전쟁 후의 상황을 대비할 것이라 말
씀 하셨습니다.」
「오호..? 그런데 그 짐작이 나의 의중과 무엇이 같다는 말이오..?」
「주군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명(明)님도 주군 자신과 시마쓰(島津)장군, 두 사람이 가진
성품(性品)의 차이를 뚜렷이 짐작하고 계신다고..! 해서, 그 전쟁에서 삶과 죽음으로 나뉘어질
인물이 누군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명(明)님이 이 일본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에 도움이 될 한
사람을 선정(選定)해 그를 배경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명(明)님이 선택한 그
한 사람이 시마쓰(島津)장군이었지요.」
「허허..! 내가 대마도에서 본토로 건너올 때 시마쓰(島津)장군과 함께 한 것은 꼭 그 이유 때
문에 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니시(小西)님이 나에게 생각하신 그 점은 분명 한 부분을 차지하
고 있었습니다. 그래.. 두 가지의 밀명이란 것은 무엇이오..?」
「예.. 말씀드리지요. 그 한 가지는 저에게 명(明)님의 주변을 철저히 지켜 명(明)님을 보좌하
라는 명(明)이었습니다. 명(明)님께서는 하루(春)아씨를 보호하겠다던 대마도에서의 약속을 기
필코 지키실 분이니 명(明)을 잘 호위(護衛)하는 일이 하루(春)아씨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고니시(小西)님께서 은근히 나에게 짐을 지우셨습니다 그려..! 그리고 또하나의 밀명은 무엇
입니까..?」
「으음.. 그것은..! 예.. 이왕 명(明)님을 모시기로 한 몸..! 모두 말씀드리지요. 주군께서는
명(明)님이 에도의 이에야스님의 주변까지 침입을 할 것이라 짐작을 하고 계셨습니다. 시마쓰
(島津)장군의 목숨을 구해주면서까지 그의 철군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온 명(明)님의 사명은
그만큼 절실한 일이리라 판단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명(明)님의 기량(技倆)으로는 언젠가는
에도성(江戶城)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할 것이라 여기셨습니다.」
에도성(江戶城)의 침입이라..? 죽음을 예견한 고니시(小西)가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고로(吾
郞)에게 지시한 명령일 것이다. 일순 명(明)은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