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2 회
페이지 정보
본문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2 회 죽음 뒤에 숨은 지략(智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길)가 병사(病死)한 후, 칠년 전란(戰亂)이 드디어 왜군(倭軍)의
패배로 막을 내리려는 그 시기 왜군(倭軍)의 군영은 급박하게 철군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의 임시 군막(軍幕)안에서 은밀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진린(陳璘)도독님.. 고니시(小西)장군의 전언입니다. 고니시님께서는 장군께 황금 일만 냥과
저희들의 진중에 잡혀있는 조선(朝鮮)의 미녀(美女) 백 명을 상납하겠답니다.」
「흐흐흐.. 황금과 미녀라.. 요구조건은..?」
진린(陳璘)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스쳤다.
「예, 이순신의 눈을 피해 우리가 철수 할 뱃길만 확보해 주시면 됩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고니시(小西)의 수군(水軍)이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해로(海路)
를 흥정하고 있는 자리였다.
(으음.. 이놈들이, 그러나 이곳에도 없구나!)
그들이 밀담(密談)을 나누고 있는 막사의 꼭대기에 찰싹 붙어 대화를 엿듣고 있던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진다.
* * * * * * * * *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명의 수군제독 진린(陳璘)과 철군의 협상을 벌이고 있는 그 시각,
또 다른 한곳 왜군의 군영(軍營)에서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아수라를 이루고 있었다.
별빛조차도 숨어버린 어두운 밤,
관솔불을 밝히고 철군(撤軍)준비에 부산한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장군 진영(陣營)의 구석
진 한곳의 막사에는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넓은 막사의 실내에는 왜군들에게 끌려온 수십 명의 조선 여인들이 벌벌 떨며 겁에 질린 표
정을 하고 모여 있었으며, 번들번들한 욕정(欲情)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십여 명의 왜군 장졸
들에 의해 이미 겁탈을 당한 듯 그녀들은 치마속의 고쟁이는 모두 찢겨져 너덜거리고 벌어진 가
랑이 사이에서는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했다.
「어이 야스다.. 이년들을 모두 배에 태워 옮길 준비를 하라는 고니시장군의 명령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한구석에 말없이 서있는 장수를 향해 군막의 입구로 다가오던 병
사가 소리를 쳤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리게. 크흐흐흐.. 네년들은 한사람 남김없이 일본으로 데려간다. 더 이
상 소란을 피우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또다시 앙탈을 부린다면 부하들을 시켜 네년들의 아랫
도리가 남아나지 않도록 짓이겨 놓을 것이다.」
문 앞의 동료가 야스다라고 부르던 고니시 군(軍)의 그 일본군의 장수가 기진을 한 채 힘없이
가랑이를 벌리고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조선의 여인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야스다의 눈은 군막의 한쪽 구석을 노려보며 음침한 색광(色光)을 뿌리고 있었다.
「크흐흐.. 네년이 그리도 앙칼지게 달려들었단 말이지?」
야스다의 앞에 꼼짝없이 앉아있는 분홍색 저고리의 여인..! 그녀의 모습은 농익은 여인이라기
보다 초봄에 막 피어나는 참꽃 같은 싱그러움을 지닌 처녀였다.
- 찌익.. 찌이익..
야스다의 손에 의해 발기발기 찢겨나가는 분홍빛 저고리와 치마..!
그 속의 새하얀 속옷까지 한점 남기지 않고 모두 걷어낸 야스다는 색정이 가득담겨 충혈된 눈으
로 처녀의 나신(裸身)을 아래위로 훑었다.
이제 스물 두 셋은 됐을까? 동그란 어깨.. 물 흐르듯 곱게 흘러내린 아랫배.. 적당히 살 오른
허벅지.. 쭉 뻗은 다리.. 투명하리 맑은 살결..! 그 고운 나체를 야차같은 남정네 앞에 드러내
조금은 당황할 만도 하나, 그녀의 초승달처럼 맑은 눈동자는 야스다의 음흉한 눈빛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당당히 마주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내손으로 이 목을 찌를 것이다.」
바장한 목소리로 일갈(一喝)을 하는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조그만 은장도가 쥐어져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야멸치고 냉정(冷情)한 목소리였다.
「어허.. 이년이..!」
이도 저도 못하고 난감해 하는 야스다의 등 뒷쪽에서 조금 전 그 무사가 다급히 고함을 지른다.
「야스다.. 그 아이는 오사카(大阪)성의 미쓰나리(三成)님에게 상납할 진상품이다. 고니시장군
께서 그 아이에게 흠집 하나 만들지 말라 하셨다.」
「허허.. 이시다(石田)님에게.. 그것 참.. 알았네.」
잔뜩 마음먹고 겁간(劫姦)의 재미를 보려던 야스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벗어나 군
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막사의 트진 틈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막사안의 여인들을 이리저리 자세히 살피다 실망스러
운 얼굴로 돌아서서 아쉬움을 남긴 채 까만 밤하늘 허공(虛空)으로 사라져갔다.
미쳐 그 막사의 어두운 구석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 처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다.
* * * * * * * * * *
「스님.. 왜군(倭軍)에게 납치 되어간 누님은, 감금(監禁)되어 있을 만한 어느 곳을 살펴도 흔
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감금된 조선의 여인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철군의 준비로 경비가 겹
겹이 강화되어 있었고 그 여인들 중 일부는 밀약의 제물로 삼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머
지의 여인들도 고관들의 진상품으로 삼아 왜국으로 끌고 가려는 듯 합니다.」
「.........!」
「아마 연(蓮)누님은 일찌감치 일본으로 옮겨진 듯 싶습니다.」
묵묵부답(默默不答)인 동안(童顔)의 스님,
복천암 주지승 혜암스님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스님.. 부모님의 원수를 생각하며 오늘까지 견뎌 왔으며 연(蓮)누님을 구하는 일이 앞으로
의 저의 삶입니다. 연(蓮)누님은 저의 목숨과도 같습니다. 저도 철군(撤軍)하는 왜선(倭船)을
따라 일본으로 가겠습니다.」
끝내 대답을 않는 혜암스님의 앞에 큰 절을 올리고 암자를 나서는 약관의 청년 명(明)의 등 뒤
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明)아.. 따르거라.」
「예..? 예..!」
절의 마당으로 내려와 명(明)을 앞에 두고 마주선 혜암스님이 손에 쥔 선장(禪杖)을 바닥에 툭
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베어 보아라!!」
「스.. 스님..!」
「진검(眞劍)이다. 어서 뽑지 못할까??」
선장(禪杖)을 오른발 한자 앞 땅바닥에 짚고 고요히 명(明)을 응시하고 있는 혜암스님의 모습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 스르르릉.. 쉬익..
명(明)이 손에 든 지팡이에서 석자 검(劍)을 빼어내 천천히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들어올린다.
하늘에 떠있는 달의 그림자를 벤다는 월영검(月影劍)의 자세다.
「한치 어긋남 없이 나를 베어야만 하느니라!!」
일각(一刻).. 이각(二刻).. 한식경.. 두식경.. 점점 시간은 흐르고 있었으나 두사람은 미동도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
정중동(靜中動).. 말없이 서있는 가운데 서로의 마음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베었느냐?」
「예.. 베었습니다. 스님..!」
조그만 움직임조차 없이 마주해 있던 두 사람이 조용히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심검(心劍)의 일합(一合)을 겨루었던 것이다.
「이젠 됐다. 명(明)아.. 비록 나의 진전을 모두 물려받았다고는 하나 왜국(倭國)은 낯선 곳이
다. 부디 경거망동(輕擧妄動)은 말고 진중(珍重)하게 행동 하거라!!」
* * * * * * * * * *
달도 구름 속에 숨어 그 빛을 감추어 버린 칠흑(漆黑)같은 밤..!
한산도 통제영(統制營)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지휘소 군막(軍幕)안 밀실(密室)..!
그 밀실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이순신의 앞에는 이순신의 조카인 완과 설아(雪娥), 영경
(瑛璟), 그리고 윤충(尹忠)이 어금니를 꽈악 다물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처절하게 굳어있었다.
「칠년을 이어온 이 전쟁도 이제 내일이면 끝이 난다. 허나 큰 걱정이 앞서는 구나.」
「장군.. 앞일을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에 어른께서 저희들을 장군께 보
내셨습니다.」
이순신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는 그 어른이라는 사람이 이들 세사람을 급히 이곳으로 보내 긴요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리였다.
「그래.. 그 점이 걱정이로구나. 으음.. 완아 내일의 출전에는 네가 나의 곁을 지키거라!」
이순신은 이제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는 표정을 보이며 완에게 명(命)했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그리고 내.. 오늘밤을 도와 너희들이 가져온 이 헌원비록(獻元秘錄)의 끝맺음을 할 것이다.
마무리 되는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 은밀히 어른께 전하도록 하라.」
「예.. 장군..!」
「됐다.. 이제 모두 물러가거라. 나는 잠시 쉰 후 지휘소로 나가 휘하장수들과 내일 행해야 할
작전을 의논할 것이야.」
* * * * * * * * * *
자리에 혼자 남은 이순신은 깊은 고뇌속으로 빠져 들었다.
(정유년에 이 나라 조선을 재침략한 왜군이 지금 철군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로 인해 불안해진 저들의 정정(政情)때문일 뿐이다. 차후 정국
이 안정을 되찾는다면 저들을 또다시 침공을 시도 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 그러나 이
전란이 종식된 다음의 우리 조선은 어떠할까?)
휴우.. 한숨을 내쉬며 다시 궁리에 잠겨들었다.
(조정의 수구대신들은 왜란의 전공을 서로 자신들의 공로라 하며, 자신들의 입지가 유리해 지도
록 만들기 위해 나의 목숨을 담보로 지극한 당파싸움의 혼란에 빠져들게 분명한 사실. 그 중 오
직 한사람 유성룡 대감만이 군사력의 증강을 역설할 것이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오히려 궁
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그 일을 예감한 어른께서 나에게 이 비록을 보낸 것. 이제는 그 어른과
밀약한 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구나!!)
* * * * * * * * * *
선조 31년(1598년) 11월 19일
노량의 앞바다는 시뻘겋게 물들었다.
「장군.. 적선(敵船)은 관음포(觀音浦) 앞 해상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그 퇴로를 진린(陳璘)
도독이 차단을 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도주하던 왜군의 함선에 포위를 당한 형세가 되어버렸습
니다.」
「추격하라. 적선을 모두 격파하는 동시에 진린도독도 구출한다. 단 한 놈도, 단 한 척의 함선
도 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선박, 모든 군사를 몰살시켜 왜국이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려는 이순신의 처
절한 마음이었다.
남해 방면으로 도주하는 적선을 필사적으로 추격하던, 삼도수군통제사의 기함임을 나타내는 군
기 ㅡ 三道舟師司命(삼도주사사령) ㅡ 이라 쓰여 진 깃발이 펄럭이는 그 아래 지휘소에서 화
급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필사의 추격을 감행하던 그 순간 왜군의 흉탄을 가슴에 맞은 이순신이 쓰러진 것이다. 이순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큰아들 회와 조카 완이 혼비백산 놀라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숙부님.. 왜.. 갑옷도 착용하지 않고 출진을 하셨습니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순신을 본 완은 이 중요한 전투에 갑옷을 벗어던지고 싸움에 임한 숙부가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아니 갑옷뿐만이 아니었다. 화살이나 총탄을 막기 위해 갑옷속에 받쳐 입
는 닥종이를 겹겹으로 해 만든 내의(內衣)도 입고 있지 않았다. 조총의 총알은 감히 뚫지도 못
하는 그러한 닥종이 내의, 왜 그 내의를 입지 않았던가? 못내 그점이 궁금한 완이다.
「조용히 하고 내가 보이지 않게 앞을 가려라. 여립은 어디에 있느냐?」
흉탄에 맞아 왼쪽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던 이순신이 지근장수 송여립
의 위치를 물었다.
「송장군은 갑판위에서 독전(督戰)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완아.. 그에게 알리지 말고 가까이 와 내말을 명심해 듣거라.」
슬픔을 눌러 참고 무릎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간 완의 귀 가까이 입을 가져간 이순신은 조용히
그러나 또록또록하게 한마디 한마디 들려주기 시작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모두.. 모든 사람들 에게..!」
`전방급 신물언아사 라.. 지금은 전쟁이 무르익어 급하니, 아직은 삼가 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지휘관이 자신의 죽음을 숨기려 부하들에게 전하는 결연한 말처럼 들렸다.
그런 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순신이 겨우 입을 달싹거리며 다시 한번 강조를 한다.
「완아.. 내말을 깊이.. 깊이 새겨들어야만 한다!!」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다시 그 말을 되뇌던 완의 눈이 뻔쩍 빛났다.
「모든 사람들에게..? 수.. 숙부님.. 숙부님께서 고뇌(苦惱)하시던 일이 이것이었습니까?」
「완아.. 알아들었느냐?」
「예.. 숙부님. 염려 마십시오.」
그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어느 누구도 이순신의 시신을.. 아니 이순신이란 인물을 다시금 본
사람은 없었다. 아마 시신이 사라진 의문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인물은 어른이라 불리는 그 한
사람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