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輪 3편 인연(人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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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옷은 어찌 보면 그냥 보통의 경장으로 보였고, 어찌 보면 목부터 발끝까지를 감싸는 정교한 갑옷처럼 보였다. 기이한 윤기를 흘리며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빛의 옷은 그 착용자와 하나가 되어, 대기중에 따로 떨어진 다른 세계, 그의 영역을 만드는 것 처럼 보였다.
일초진천수(一秒振天手) 정화, 사람들은 청년을 그렇게 불렀다. 금으로 된 꽃을 수놓은 그의 백의는 악인들에게는 죽음으로의 초대장이었다.
무림성의 대정수호 금검대(大正守護 金劍對)의 대장인 그는 평소에 시간을 내어 무림의 악당들을 퇴치하는 일을 해오고 잇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그물에 포착된 것이 성숙쌍선이였다.
강도, 방화, 살인, 강간... 저지르지 않은 죄를 헤아리는 것이 더 편할 지경인 이 나이 많은 악당들은 스스로를 성숙쌍선이라 불렀지만 사실 성숙이괴(二怪)라를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 노악당을 추적해 산동에 있는 이룡산으로 몰아넣은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산에서 나올수 없게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반대로 들어가기도 곤란한 지형이었다는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정화는 일단 데려온 부하들과 근처에 있던 개방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다 봉쇄했다. 그리고 이 두 악당을 처리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던 도중, 그는 흑운을 만났다. 폭이 비교적 좁은 숲길에서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창을 들고 터벅거리며 걸어가는 흑운의 특이한 모습은 그에게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친밀감 같은 것이었다.
아직 정화는 하북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와 흑운은 스쳐 지나갔다.
흑운을 지나쳐 관도를 날듯이 달리던 정화는 산중에 서 있는 작은 객잔을 발견했다. 짚이는 바가 있어 정화는 주저없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 어서 옵쇼. "
점소이와 주인이 그를 반겨 맞았다. 평범한 얼굴들 이었다.
" 소면 하나와 탁주 한병만 주시오. "
" 네네 곧 대령합지요. "
소면을 기다리는 중에, 아까 지나친 검은 기마무사도 객잔에 도착했다.
" 어서옵쇼~ 오늘은 손님이 두분이나 오시다니, 운이 좋군요. "
주인은 연이어 손님이 들어오자 신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 소면 하나와 탁주 하나. "
(우연히도)같은 것을 주문하고, 흑운은 정화와 떨어진 구석자리에 가서 앉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정화는 그에게 호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이 먼져였다.
" 소면 대령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요~ "
탁주와 소면이 날라져 오고, 정화는 아무런 의심 없이 소면으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는 주인과 점소이의 눈빛이 야릇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 아아~ 잘 먹엇다. "
흑운이 소면을 들기 시작했을 무렵, 이미 정화는 소면을 전광석화같이 해치운 상태였다. 그는 배를 두드리며 잔에 탁주를 채웠다.
" 흐흐흐... "
" 흐흐흐흐... "
낮은 웃음소리가 주방으로부터 들려왔다.
" 일초진천수, 마침내 걸려들었구나! "
" 내 이럴줄 알았지. "
정화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날 동안, 손에 기이한 모양의 병기를 든 점소이와 주인이 그를 압박하는 방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로 보아서는 보통의 고수가 아니었다.
" 허풍도 여기까지, 너는 중독되었다. "
" 흐흐흐흐... 살고 싶다면 순순히 항복해라. "
정화는 일어서서 요대에 걸쳐진 검을 잡았다.
" 누가 소괴냐? "
점소이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 나다. "
" 그래서 음흉하게 웃었군 너. "
성숙소괴의 취미는 남색이었다. 점소이로 변장해 있던 그의 눈은 이미 변태적인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정화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두 악당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뭔가 이상한거 같다고 생각되지 않냐 너희들? "
" 지금쯤은 내장이 토막나는 고통으로 뒹굴고 있었어야 할 시간... 설마? "
정화는 소매자락에서 섭선을 꺼내들어 펼쳐 보였다. 거기엔 붉은 꽃이 그려져 있었다.
" 일초진천수는 백독불침이야. "
" 왜 나를 살려 주었지? "
유몽화는 흑운을 향해 물었다. 모닥불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 위로 반사되며 일렁이고 있었다. 타고난 미모에 밤의 장막, 그리고 모닥불... 유몽화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흑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손을 뻗어 유몽화의 몸을 덮고 있던 모피를 끌어올려 줄 뿐이었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다.
오랫동안 암살자로 살아오며 여자를 버렸던 유몽화의 가슴에 따스한 온기가 차올랐다. 오래 전에 헤어진,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유몽화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카캉!
놀랍게도 정화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청강으로 살을 댄 섭선의 끝에서 불꽃이 튀어오르며 정화는 두걸음 뒤로 물러섰다.
현저하게 공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산공독? "
" 흐흐흐... 이제 알았느냐. "
두 노괴의 공격은 실로 교묘했다. 그리고 정화는 백독불침이었지만, 산공독은 몸에 해를 끼치는 그런 종류의 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잠시 공력이 모이지 않게 하는 약일 뿐이었다.
" 젠장... 내 자신감이 좀 지나쳤나보군. "
기회는 앞으로 한두 번 밖에 없었다. 정화는 가만히 서서 기회를 기다렸다.
" 포기한거냐? 흐흐흐... "
찢어진 인피면구 사이로 노괴의 흉측한 몰골이 보엿다. 그 얼굴은 도저히 다른 단어로 표현하기 역겨울 만큼 상태가 안좋았다.
" 훗훗... 그렇게 자신 있다면 어서 잡아가 잡숴 보시지 그래. "
정화는 비아냥 거리는 소리로 상대를 도발했다.
" 걱정하지마라, 곧 살려달라고 사정하게 될테니... "
다시 두명의 연수합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몆차례 손을 섞어본 후라, 정화는 그들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공력을 쥐어짜, 정화는 섭선에 달린 장치를 발동시켰다.
퍼퍼퍽!
키애애액!!!
우아악!!!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빛나는 청강(靑强)으로 만들어진 섭선의 살은 무서운 암기였다. 장치의 발동과 함게 용수철의 힘으로 튀어 나간 그 죽음의 살들은 성숙소괴의 머리를 온통 구멍투성이로 짓이겨 놓았고, 성숙노괴의 한 팔을 자르고, 같은 쪽의 허벅지에 깊숙히 박혀 들어가 있었다.
" 으으으... "
성숙노괴는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며 일으켰다. 혈도를 찍어 지혈을 한 후, 그는 성숙소괴쪽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섭선의 살을 세개나 두들겨 맞은 성숙소괴의 머리는 거의 짓이겨져 있었다. 가망이 없는 치명상이었다.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힌 채로 똥오줌을 지리며, 성숙소괴의 팔다리가 경련하고 있었다.
" 영제(英弟)야!... 네 이놈... 영제를... "
성숙노괴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정화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한 손에는 그동안 그들의 악명을 떨치는 데 기여했던 예의 기문병기, 성숙장이 쥐어져 있었다.
이미 정화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서 끝나는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멋진 마지막 한마디를 구상하고 있을 때, 그제사 소면을 다 먹은 흑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떻게... ? 너도 산공독에 중독되었을 텐데? "
두사람은 뭔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흑운을 쳐다보았다. 창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흑운은 천천히 걸어서 성숙노괴를 지나쳤다.
나가던 도중에, 주방에 죽어 널브러져 있는 주인과 점소이의 시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네가 저들을 죽였나? "
나직한 목소리였다. 거의 내공조차 실려있지 않은 것 같은. 하지만 오랜 실전을 통해 단련된 성숙노괴는 알 수 있었다. 아니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자는 절대 검을 들이대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그 느낌을 부정하기 위해 그는 소리없이 자신의 성숙장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보던 정화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것은 정화 자신이 보고 있었더라도 막기 힘든 거리와 각도에서 이루어진 절묘한 공격이었다. 필생의 무공의 집약이었던 것이었다.
터엉!...
" ... ?... "
바로 다음 순간, 성숙노괴는 명치를 창에 관통당한 채 객잔의 맞은편 벽에 매달려 있었다.부릅떠진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 커...헉!... "
한번 피를 토해낸 후, 성숙노괴의 혼은 그 몸에서 빠져 흩어져 갔다. 추괴한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촤악!
유몽화는 벌써 열흘째 흑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이었지만, 그녀는 굳이 은신을 하고 움직였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유몽화는 자문해 보았지만 대답을 얻을수는 없었다. 흑운도 굳이 그녀가 뒤따르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대부분 버린 상태였다. 그녀의 잔월문은 사라졌고 그녀 자신도 더이상 암살자를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흑운을 죽이는 일을 청부받았지만 그것도 이젠 지킬 수 없엇다. 아니 지키려던 유몽룡은 죽었다.
이제 그녀에겐 그를 죽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고, 그에게는 빈틈이 없었다.
무적이란 무엇인가.
흑운은 오래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찾았다고 생각했다.
결코 산 목숨을 해하지 않으려던 착한 소녀, 그와 정 반대의 힘을 계승하게 된 작은 소녀에게서.
그는 최강이었지만, 최고는 아니었고, 무적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보다 위에 있었다. 누구에게도 성의를 다하는 친절함과 상냥한 미소로, 누구도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를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다.
"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묻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너를 앞서 보내고 남을 자신은 없구나. "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바라는 겁니다. 저에겐 무한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단 일각이라도 더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
그녀에게 있어 그는 스승이었고, 아버지였고, 정인(情人)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딸이었고, 제자였고, 아내가 되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웃게 만들 수 있는 말하는 꽃.
만약 적들이 그녀와 그를 내버려 두었다면, 적어도 그녀의 생에서 만큼은 그가 전장에 나서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출현은 그 저열한 자들이 가지는 열등감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무적>에 너무 안도하고 있었다.
바람이 전해오는 소식에 그는 미친듯이 달렸지만, 그가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파괴된 그들의 정원과 그녀의 차가운 시신 뿐이었다.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남의 목숨을 앗으려 하지 않았다. 공격자들은 스스로의 무공에 다쳤다.
하지만 산 목숨을 해하려 하지 않았던 그녀와는 달리, 그는 파괴의 화신이었다.
이제 그것들이 그녀의 목숨을 앗았으니, 나는 그녀의 피 한방울에 만 마리씩의 댓가를 치루어 주겠다.
그는 맹세했고, 그는 한번도 맹세를 섣불리 한 적이 없었다.
짧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 흑운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눈에 뜨이지 않는 가까운 거리의 어둠 속에서, 유몽화가 그를 지켜보며 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깊이 잠들지는 않은 상태로.
그녀는 죽은 소녀와는 닮지 않았지만 그다지 미운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 전, 그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그가 그녀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피사검보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10년전 마교를 토벌한다는 명목 하에 정사지간의 문파들을 학살한던 와중에 얻은 검법이었다. 그 위력이 극강하지만 초식이 워낙 악랄하고, 사람의 인성을 해친다는 전설이 있어 그동안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잃을 것이 없었다. 절망의 늪에서 부여잡은 악의 손. 피사검법의 진전은 빨랐다.
츠츠츠...
퍼버벅!...
손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가벼운 바람소리가 지나간 직후 연공실의 벽에는 번갯불의 형상을 닮은 검흔히 새겨졌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검이 아니라 작은 나뭇가지였다.
" 흐흐흐... 겨우 1성의 내공을 주입했을 뿐인데 이정도의 극쾌와 극강이라니... 왜 이걸 처음부터 익히지 않았던가 흐흐흐... 흐흐흐흐... 언제라도 오거라... 네놈의 심장을 뽑아 내고 피로 축제를 벌여 주리라... "
모용언달의 눈은 빠르게 붉은 빛을 띄어 가고 있었다.
촤악!
창을 털어내는 흑운. 그 발 아래에는 피범벅이 되어 짓이겨진 고기 덩어리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산동으로 들어와서만 벌써 세개의 무림성 휘하의 문파를 몰살시키고 있었다.
피바다 속에는 여전히 노인과 소년소녀, 아녀자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의 적이 아녀자를 죽였으므로, 그도 손속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에는 이로, 피 한방울에 만 마리의 목숨으로
맹세는 지켜지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검을 든 자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흑운은 무림에 발을 담고 있는 자들을 모두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그게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웃음을 짓던 그녀와 다른, 그의 방법이었다.
산동성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무림성 분타의 근처에만 있어도, 무림성과 관련만 맺어도 몰살당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무림성의 분타 근처는 이미 공동화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곧바로 무림성이 민중과 유리되고 있는 것을 뜻했다.
무림성에서는 이를 악물고 몆번에 걸쳐 추격조나 지원조를 파견했지만, 시체의 산을 만드는 것은 어지간한 문파 정도는 하룻밤에 쓸어버릴 전력인 그 지원대쪽이었다. 십수명의 당주급 고수들의 목이 떨어졌고, 그 휘하의 고수들도 몰살을 면치 못했다.
검은 옷을 입은 창기병
흑운의 인상착의는 사방에 알려졌지만, 그를 추적하는데 성공한 자들은 다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려서 그의 종적은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무림성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산동을 훝어내리듯 하는 그의 여정은, 소림사가 위치한 회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가 소림인것은 분명해 보였다.
" 소림사에서 그를 맞아 싸워야겟소. "
모용언달이 빠진 밀실에서는 무림맹주인 송강이 나머지 3명과 작전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위지량은 벌써 두달째 흑운을 쫒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와 대면할 결심은 서지 않았다. 따라잡으려면 그럴 수는 잇었다. 하지만 그의 종적은 희미했고, 느리긴 했지만 예측하기 쉽지 않은 길이었다. 소림사로 간다는 정도는 그도 알 수 있었지만, 어느 길로 가는지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았다.
그가 하북에서 지급받은 병사들과 교대한 동창의 고수들이 그를 재촉했지만, 그는 다만 아직 그를 확실히 모르겠다는 말 밖에 해 줄 수 없었다.
" 그럼 언제 그를 잡으려 하는가? 폐하께서는 이 오랑캐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시다. "
오랑캐라. 오랫동안 그 오랑캐들의 나라에서 첩자로 일한 위지량은 속으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봐, 고구려인에 비하면 우리 쪽이 오랑캐라구.
하지만 그런 말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어쨌건, 그는 관인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연락용의 검은 비둘기가 날아왔다. 발목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명예를 구하는 남녀노소의 무림인들이 검은 창기병이 소림을 노린다는 격문을 보고 소림사를 지키기 위해 달려왔다.
" 저사람은... "
임시로 마련된 군막에서, 다시 무림성의 장로들과 대소문파의 장문인들, 그리고 전대고인들이 모였다.
" 아시다시피, 화산의 장문인인 오행신검께서는 영애의 신변에 일어난 불상사로 인해 소림사에 오지 못한다고 통고해 왔소, 대신 그는 화산의 제자들 백여명을 보내 왔소이다. "
" 정과 사를 막론하고 수많은 고수들이 소림사라는 무림의 상징을 지켜주시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여주신것을, 나 송모는 무한한 감격으로 생각합니다. 무림성을 대표하여 개인 자격으로 참가해 주신 수많은 영웅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마지 않습니다. "
" 아시다시피, 우리 무림은 중대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북...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수가 이 두달 동안 하북과 산동의 대소문파들 15 군데를 유린하며 바로 이 소림을 향해 남하하고 있습니다. "
" 이에 우리는 소림사를 지키기 위해 정사를 초월한 무림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여기엔 예전에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분들도 있지만, 이번만큼은 사소한 원한을 접고 대동단결 해야 합니다. "
" 우리의 적은 간교하고 강합니다. 더 많은 피가 흘려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결한 것만으로도 큰 진보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동맹자가 여기 오셨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동맹을 얻었습니다. "
송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막의 문에 걸쳐져 잇던 주렴이 소리없이 젖혀지고, 한사람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 실례하오. "
추풍신개의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 아니 마교 교주, 혈염신군(血炎神君) 번서! "
붉은 용이 새겨진 금빛 전포에 몸을 감싼 당당한 체구의 중년인은 우아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좌중에게 목례했다.
" 그렇소 본인이 번모요. "
십년전, 마교의 총사로 회서에서 커다란 세력을 누리던 마교를 전국적으로 키운 사람이 번서였다. 무공, 지략, 조직력, 언변, 매력까지 그는 역사상 그 어떤 마교 교주보다 완벽한 지도자였다. 그의 아래에서 마교는 단합했고, 휘하의 수많은 고수들이 그를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를 제거하고 마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4대 문파와 정도맹(무림맹의 전신)은 사상 유래없는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회서의 방산, 마교의 총단이 있는 곳 벌어진 정사대회전에서, 10만에 이르는 쌍방의 세력이 격돌했다. 8만대 2만의 싸움이었다. 마교는 그 이름조차 없어졌다.
마교교주의 전각은 불타올랐지만, 번서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앗다.
하지만 그곳에서 거의 구할에 달하는 정도고수들도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었다. 당시 방주와 12 명의 장로들 중 10명을 잃어야 했던 개방은, 아직도 그때 받은 타격을 다 회복하지 못했다. 추풍신개는 그 회전에서 생존한 몆 안되는 개방의 고수였다.
그것이 겨우 10년 전의 일이었다.
" 아직도 내가 원수같아 보이겠지만 지금은 으르렁댈 때가 아니오, 젊은 거지. "
놀랍다기보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던 추풍신개는 그제사 제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그때가 잊혀지진 않았지만, 번서의 능력을 생각해 본다면 그가 아군으로 있는것은 확실히 다행 중의 다행이었다.
" 그럼 이제부터 이 흑... 아니 말을 탄 흉적에 대한 방어책을 구상해 보도록 합시다. 제갈 가주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
송강이 언급한 제갈가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비록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제갈세가는 형주 유수의 세가였다. 그들은 유명한 재갈량 같은 인물을 배출해 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병법과 기관진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대의 가주는 소서풍(笑西風) 제갈현이었는데, 젊은시절 가주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으로 무림에 출도했을 때 주로 서북지방에서 활동했고, 그의 행적과 활동이 실로 경쾌하고 통 쾌했다는 세평으로 소서풍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오랜 숙적이었던 사마가문과도 화해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바로 그 사마가에서 부인을 얻었다. 부인 역시도 무림에서 재녀로 이름을 날리는 천수일미(千手一美) 사마경영 이었는데 그녀도 남편의 옆자리에 동석해 있었다. 그녀의 별호에서 보듯이 그녀는 암기전문가로, 무공으로는 오히려 남편보다 낫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 저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단독으로 1개 문파를 몰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면 우리 역시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직 기억하시는 10년전의 정사대전에서 수많은 고수를 잃은 지금 우리는 그런 일은 피해야 합니다. "
주변인들은 그 말에 동의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 문파라고는 하지만 내공 수련도 제대로 쌓지 않은 어중이 떠중이들의 집합체들이 대다수인 것이 지금 중원 무림의 현실이었다.
" 따라서 저는 소림사 주변을 여기 모인 많은 군웅들을 이용한 몆겹의 절진으로 감싸고, 진법을 통과하느라 진기를 소모한 적을 상대로 소림사의 자랑인 108 나한을 투입해 승부를 굳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소림사의 108 나한은 일종의 차륜진을 이루어 공격한다. 108나한들 개개인은 몸이 금강불괴에 가까운 상태였고, 그들의 병기인 선장의 무게도 백여근이 넘었다.
이런 108승들이 이룬 나한진은 아직 한번도 깨져 본적이 없었다. 실제로 수많은 고수들이 죽고 다친 정사대회전에서도, 소림사의 장문인은 죽었지만 108 나한은 한명의 낙오자 없이 살아 돌아 왔었다.
미지의 적을 상대로 정도무림이 가지고 있는 최강의 카드를 사용해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판단은 확실히 옳았다. 모두들 그의 계획에 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