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0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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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0 부 ** [수정일. 2006 년 3 월.]
제 4 장. 기연인연(奇緣因緣) 2.
백옥(白玉)같은 하얀 비단옷을 걸치고 손에는 옥선(玉扇)을 든 청년이 소나무 사이로 넘어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금(古今)을 통하여 과연 어느 시절에 이렇게 단아(端雅)한 귀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마치 가장 위대한 예술품을 보고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아름다운 청년.. 상광명의 입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그 아이들도 이젠 어엿한 처녀가 되어 있겠구나..!」
상관명은 유비산(幽秘山)계곡 장야궁(長夜宮)터의 요대 앞에 서서 호수를 바라 보며 혼자말을
중얼거리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돌이키고 있었다.
「그 둘다 나에게는 은인이다. 한사람은 나의 자존심을 일깨워 주었고, 또 한사람은 나의 마음
속에 투지를 심어 주었다. 혹시 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있을런지..!」
빤짝이는 호수의 석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어있는 그는 십년 전, 이곳에 서서 천궁(天宮)을
찾아 헤매고 있던 어린아이가 아니고 이제는 훌쩍 커버린 약관(弱冠)의 미청년(美靑年)이 되어
있었다.
황금영서(黃金靈鼠)가 안내를 한 후 사라져 버린 그 동굴이 천궁(天宮)의 숨겨진 수중출로(水
中出路)였던 것이다.
십년만에 바라보는 푸른 하늘과 눈부신 태양..!
천궁(天宮)에서의 나날들..! 야명주의 휘황(輝煌)한 빛 아래서의 일상(日常) 이었다고는 하나
그 빛이 어찌 태양만은 했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오랫만에 맑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
하며 감회에 젖어 있었다.
햇빛을 받아보지 못한 그 긴 세월..! 비록 눈에 번쩍 뜨이는 미장부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상
관명의 하얀 얼굴과 축 처진 어깨.. 영락없이 과시(科試)에 떨어져 낙담을 하고있는 글방 서생
(書生)의 행색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로 가야 그들의 후손(後孫)을 만날수 있을까..!」
또 다시 어린시절과 같은 혈혈단신의 몸, 막막하기만 행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적막감속에 좌선동(左仙童) 구(龜)와 우선녀(右仙女) 학련(鶴蓮)이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기억의 저편에서 공주(公主)라 불리던 그 여자애의 모습이 눈속에 어른거려 왔다.
목에 걸고 있는 옥패(玉佩)를 만져 보았다. 그 옛날 화영루 앞에서 그 계집아이가 던져 주고
간 그 옥패(玉佩)였다.
「그래.. 화영루(華榮樓)..! 그곳으로 가보자.」
공현(鞏縣)을 떠나 천천히 산길을 넘어 정주(鄭州)의 풍물을 하릴없이 감상하며 드디어 도착한
개봉(開封), 시인묵객(詩人墨客)처럼 이리저리 풍경 살피며 관도를 어슬렁거리는 상관명의 눈
앞에 어가(御街: 황제의행차가 잦은 거리)의 옆 넓직한 광장(廣場)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화
영루(華榮樓)가 보였다.
감개무량한 듯 화영루의 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 있던 상관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나는 사람들의 행색이 왜 이렇게 생기가 없을까..? 그리고 남루한 차림에 구걸을 하는 아
이들이 어찌 이리도 많아졌는가..!」
* * * * * * * * * *
십년의 세월..!
그동안 내정(內政)을 안정시킨 황제(황帝)는 조정을 중서(中書)와 추밀원(樞密院) 양부(兩府)
로 나누어 중서(中書)에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두어 민정(民政)을 담당하게 하고
그 수장에 황보승(皇甫承)을 임명을 하고 추밀원(樞密院)에는 추밀사(樞密使)를 두어 군사(軍
事)를 담당토록 한 후, 그 수장에는 조평환(趙平換)을 임명해 중서(中書)와 추밀원(樞密院)을
국정을 논하는 최고기관으로 삼았다.
양부(兩府)를 두어 국정을 논하게 한 것은 어느 한쪽이 권력을 독점해 득세를 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의 질서가 잡혀가자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일거에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복속을 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후진(後晉)때 요(遼:거란)국에 빼았겼던 연운(燕雲) 16주를 회복 하려
고 침공을 하였으나 요(遼)나라에게 대패를 당하고 철군을 한 후 그 여파로 황제는 건강이 악
화되어 자주 병석의 몸이 되었고 황권은 극심하게 흔들렸다. 그러한 혼란기를 틈타 서하(西夏)
가 국경을 자주 침공을 해 영토(領土)를 유린하자 황제는 추밀원(樞密院)의 수장인 조평환(趙
平換)의 강압에 못이겨 전권(全權)을 그에게 위임을 하고 영토를 보존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괄시를 받던 무인이 권력을 손에 쥐자 그것을 기회로 삼아 조평환(趙平換)은 병권(兵權) 마저
손아귀에 틀어쥐고는 중서(中書)를 무력화 시키고 이제는 황제도 쉬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권
세를 휘두르며 황궁까지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게 된 원동력은 황성사(皇城司: 황궁의 비밀고수들의 집
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접보와 정보의 수집처: 오늘날의 정보부)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충성심을 지닌 밀부(密部) 혈잠령(血潛領)을 장악해 수하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악명높은 혈잠령(血潛領)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고 불평 불만자를 색출해 무자비하게 탄압
을 일삼으며 황궁내의 대신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 까지도 공포에 떨게 만들어 그 앞에서 감히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듯 지내도록 억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황권이 약해져 감을 틈타 변경의 나라들이 국경을 침범하는 전쟁은 잦아지고 그 여파로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이 점점 궁핍해져 부호와 빈민의 대립이 심화되고 그 혼란함을 틈타 빈곤
에 찌든 백성들을 구휼(救恤)한다는 기치를 든 백련채(白蓮菜)가 무민(誣民)을 하며 백성들 속
에 찾아들어 마음껏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그러나 이곳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는 화영루, 그곳에는 여전히 분주하게 손님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공자님..!」
화영루의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상관명의 앞에 점원이 조르르 달려나와 맞이했다.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 주게나..!」
힐끗 아래위를 훑어보는 점원의 시선.. 부잣집 귀한 도령같은 차림에 두말없이 이층의 창가 격
조 높은 자리로 안내를 했다.
화영루의 이층은 특별한 손님만을 모시는 장소인가..? 아랫층은 발 디딜틈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해 북적거리고 있었으나 이곳 이층은 구석 자리에 몇명의 손님들만 심각한 표
정으로 술과 음식을 들고 있을 뿐 조용하기가 그지 없었다.
「좋은 술과 안주를 좀 내오게..!」
은자 한푼을 점원의 손에 쥐어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예.. 예.. 공자님..!」
점원은 은자 한푼에 입이 귀에 걸리며, 역시 사람을 제대로 보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싱글거리
며 주방으로 달려 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 옛날 기억을 생각하며 창문 밖 길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순간,
구석진 자리에 얼굴을 맞대고 앉아,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사람의 말소리가
상관명의 귀에 생생하게 흘러 들어왔다.
* * * * * * * * * *
「방주(邦主)님.. 어른의 은밀한 전언입니다. 지금의 시국에 숭정방(崇正邦)의 협력이 꼭 필요
하다는 어른의 말씀이십니다.」
「허허.. 일면식도 없는 나를 급히 만나자고 불러놓고는 앞뒤 두서도 없이 협조를 바란다니 이
무슨 해괴(駭怪)한 말이오..!」
「죄송합니다. 다급한 어른의 분부여서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혈잠령(血潛領)
을 책임지고 있는 유극관(劉克官)이라 합니다.」
「뭐.. 뭐라, 혈잠령(血潛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며 조야(朝野)뿐 아니라
강호(江湖)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는 그 혈잠령(血潛領)을 말하는 것이외까..?」
갑자기 방주(邦主)라 불리던 사람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혈잠령(血潛領)이란 말을 듣자마자 저렇게도 당황하고 있는 그 모습이 의문스러워 그쪽을 슬며
시 바라보고 있던 상관명의 시선속에 또 한사람의 이상한 행적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두사람의 말을 엿듣고 있는 것이었다.
차림새는 평범한 장삿꾼의 모습을 하고 태연히 술을 들이키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귀를 기울여
옆자리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엿듣는 자세가 역력했다.
「어.. 어..! 저사람은 그 옛날 나에게 마구 손찌검을 가하던 그 공주(公主)라는 여자아이의
호위무사가 아닌가..? 맞아, 틀림이 없다.」
어릴적의 기억이었지만 분명했다.
당당히 맞서 호통을 쳤던 그날의 기억을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는가..!
상관명은 이층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혹시나 그 자리에 공주라는 여자아이가 함께 와
있는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둘러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도 여자아이는 없었다.
상관명은 자신의 실없는 행동이 한심스러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시 두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소이다. 그 혈잠령(血潛領) 입니다.」
「어어.. 그렇다면 그 어른이라는 분은 누구오이까..?」
「예, 방주(邦主)님께만 특별히 알려드리지요. 그 어른은 추밀원(樞密院)의 수장(首長)이신 추
밀사 조평환(趙平換)어른 입니다.」
「예 예..? 황궁(皇宮)의 실권(實權)을 한손에 쥐고 계시는 그 조대인 어른을 말씀하시는 것입
니까..?」
방주(邦主)라 불리던 사람이 덜덜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후후.. 방주(邦主)님, 진정하시고 천천히 들어 보십시오. 이제 조정안에는 어른에게 반기를
들만한 세력은 이미 없습니다. 아니 자혜공주(慈惠公主)만이 협조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요.
허나 공주의 영향력은 미미하여 별로 신경을 쓸만한 것은 아니고.. 때문에 어른께서는 강호(江
湖)의 움직임을 예의(銳意)주시하고 계십니다.」
「강호(江湖)의 어떤 움직임을 말하시는지..?」
「지금 강호는 이 조정에 불만은 품은 많은 협객(俠客)들이 복당(復唐)의 명분을 내걸고 조정
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아직 이 조정에 협조하기를 거부하는 숭산(嵩
山)의 소림사(小林寺)와 도학을 버리지 못하고 숨어든 진양문(眞陽門)이 있습니다. 현 강호에
서 가장 세력이 융성(隆盛)한 숭정방(崇正邦)이 어른과 협조를 하여 무림을 평정(平定)한 후
소림과 진양문을 조정에 복속시킨다면 이 나라가 평화를 유지할 것 이라 말씀하셨지요.」
「그.. 그렇습니까..?」
「아직은 나라의 변방이 외적의 침범에 시끄러운 이때, 방주님께서 이일을 잘 마무리 해 주신
다면 필히 어른께서 그 공로를 크게 보상을 하시어 방주님을 조정의 중요한 요직에 모실 것입
니다.」
조정의 중요한 요직(要職)이라..!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자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동하는 제안인 것이었다.
「숭정방(崇正邦)의 방주 철궁패장(撤弓覇掌) 맹우량(孟宇亮).. 대인께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
해 주십시오.」
혈잠령두(血潛領頭) 유극관(劉克官)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리 전하지요. 그리고 나는 낙양으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서문인걸(西門仁杰)이라는 소
림의 속가제자를 만나 협력을 구할 작정입니다. 소림을 흔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지요. 맹방주
의 충성 약조를 믿고 나의 복안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틀림없이 어른께 방주의 말을 전해 올
릴 테니 방주께서는 이제부터 소림과 진양문이 조정을 잘 따르도록 진력을 다해 주십시오.」
숭정방(崇正邦) 맹방주가 아니더라도 여러사람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며 이
제는 한 배를 탄 숭정방을 더욱 믿는다는 언질을 주며 분발을 시키려 하는 술책인 것이었다.
(헉.. 서문어른을 들먹인다.. 저사람이 서문어르신을 만나 치욕을 보이려 한다..!)
서문가(西門家)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떠올라 긴장을 하는 상관명 이었다.
유극관(劉克官)이 말을 마친후 자리에서 일어나자 곁에서 엿듣고 있던 그 호위무사도 슬며시
일어나 따르고 있었다.
「음.. 뒤를 쫒아 보자..!」
상관명 역시 서문인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봉의 관도를 나선 유극관(劉克官)은 산길로 접어들자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신형을 날려 낙
양을 향해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날아 가고 있었다.
「으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흐르는 듯한 저 몸놀림..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었구나..!」
상관명은 유극관(劉克官)의 공력에 감탄를 하며 무영능공비(無影陵空飛)의 경공을 펼쳐 그림자
처럼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 * * * * * *
이곳 낙양에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의 인품에 반해 많은 무림명숙(武林名宿)들과 강호협사
(江湖俠士)들이 서문가(西門家)에 모여 조정의 잘못을 성토하고 불만을 토로하며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은 그렇게 모여드는 문무협인(文武俠人)들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친밀하
게 대하며 그들 중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인재들과 한사람 한사람 친분을 맺어 인맥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의 결집을 혈잠령(血潛領)이 놓칠 리가 없었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의 곁에 강호인(江湖人)이 모여 드는 것을 파악한 혈잠령두(血潛領頭) 유극
관(劉克官)은 그들을 달래어 복속을 하게 만들거나 여의치 않으면 세(勢)가 더욱 커지기 전에
그 세력들을 와해(瓦解)시키려 달려온 것이었다.
* * * * * * * * * *
낙양성(洛陽省)의 동쪽 백미사 아래에 있는 호젓한 여숙(旅宿) 낙읍객잔(洛邑客棧)에는 여행을
즐기는 몇몇 유람객들이 자리하고 앉아 향차(香茶)와 미주(美酒)를 즐기고 있었다.
그 유람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실내의 한쪽 구석진 곳 조용한 자리에 서문인걸(西門仁杰)과 유
극관(劉克官)이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의 곁에는 보름달처럼 미려(美麗)한 처녀가 함께 자리에 앉아있었다.
「헉.. 서문 어르신이다. 그럼 곁의 낭자는 화령(華怜)아가씨 겠구나..!」
십년만에 보는 얼굴들이 아닌가.. 상관명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가까이 다가가 보아야 겠다.」
공력(功力)을 천천히 머리위로 끌어 올렸다.
어느새 상관명의 얼굴이 중년의 글방 훈장(訓長)같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무극무흔결(無極無痕訣)중 기변연환(欺變撚幻)의 기공(奇功)을 펼쳐 얼굴의 모습을 슬쩍 바꾸
어 버린 것이었다.
「자.. 이제 가까이 가볼까..!」
모른척 그들의 옆으로 다가간 상관명은 마치 아이들을 가르치고 난 후의 피로에 지친 듯한 쉰
목소리로 점원을 불러 술 한병과 간단한 안주를 시키며 자리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
고 있었다.
* * * * * * * * * *
「서문(西門)대형, 우리가 함께 조정에 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격조했습니다.」
「허허..! 유위사(衛士), 조정에 잠깐 몸담고 있던 저를 기억하시는 구려.. 그때 유위사(衛士)
는 아마 금군(禁軍)의 지휘자로 계셨지요..!」
「후후.. 대형도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랬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황성사(皇城司)의 밀부
(密部)인 혈잠령(血潛領)의 수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말에 움찔 놀라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모습이었다.
(오호.. 저 두사람은 옛 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였구나..!)
옆에 앉아있는 낭자(娘子)도 두사람이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 무슨 말
이 오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참.. 그 무서운 곳의 수장이신 그대가 어인일로 나를 찾으셨소..?」
「제가 서문대형을 은밀히 찾은 것은 대형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어른의 명(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라..! 그렇다면 황궁의 실권을 몽땅 틀어쥐고 있는 추밀원(樞密院)의 조평환(趙平換) 대인
을 말하는 것이겠다..! 후후.. 그 사람이 무슨 연유로 날 만나고자 하는 것이오..?」
「예, 어른께서 대형에게 높은 관직을 마련하겠다고 하십니다.」
은근히 권유를 하고 있는 유극관(劉克官)의 말이었다.
「하하하.. 싫소이다. 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생활에 젖어 관직(官職)에 얽매여 살지를 못
하오이다. 그대가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그러자 갑자기 곁에 있던 낭자(娘子)가 참견을 하고 나섰다.
「아버님..! 이 좋은 기회를 왜 털쳐 버리려 하십니까..?」
「처자(處子)의 말이 맞다. 가만있자.. 네가 태어 났을때 너를 한번 본적이 있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네가 아버님을 설득해 보아라.」
「어렸을 때의 저를 보셨다고요..?」
「허허허.. 그래, 네가 간난아기 였을 때 네집을 방문을 한적이 있었지..!」
그말을 들은 낭자(娘子)는 아버지를 향해 조르듯 말했다.
「아버님.. 여기까지 먼길을 찾아 오셔서 권유하시는 이 어른의 말씀을 왜 무턱대고 싫다고만
하고 계십니까..? 저는 이기회에 개봉(開封)으로 가서 살고 싶습니다.」
이시절의 개봉(開封)은 이미 인구가 백만에 가까운 거대한 도시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의 낭자(娘子)는 그 화려한 도시의 생활과 높은관직을 가진 대작(大爵)들의 풍유
(豊裕)한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화령(華怜)은 나서지 말아라. 어디 버릇없게 어른들의 말에 끼어 드느냐..! 유극관(劉克官),
네놈의 속셈은 훤히 짐작을 하고 있다. 두번 다시 관직을 미끼로 나를 회유 하려는 생각은 추
호도 꺼내지 말아라..!」
서문인걸(西門仁杰)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크흐흐.. 그렇다면 대형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지도 모를 일.. 후회를 남기지 마시오..!」
갑자기 유극관(劉克官)의 태도가 돌변하며 그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말소리가 음산하게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