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3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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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3 부 ** [수정일. 2006 년 3 월.]
제 1 장. 혈혈단신(孑孑單身) 3.
서문가(西門家)에 들어서자 듣는 첫마디가 자신을 향한 모욕의 말 한마디 였다.
그러나 명(明)은 시익.. 웃음을 흘리고 화령(華怜)이라 불린 여자아이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한 얼굴을 살핀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딸 화령(華怜)을 향해 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그리 가르치지를 않았거늘.. 화령(華怜)아 어서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하겠느냐..?」
이제 열 살이 된 서문화령(西門華怜)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이렇도록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겨우 사과의 말 한마디를 한 후 울먹거리며 집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딸아이를 놓아두고는,
곁에 다가와 서있는 집사(執事)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깨끗이 목욕을 시켜 새옷으로 갈아 입힌 후 내방으로 데리고 오너라.」
* * * * * * * * * *
「오, 훤하게 잘생겼구나..! 화령(華怜)아, 이렇게 잘생긴 아이를 본적이 있느냐..? 이 애비가
사람을 사귈 때에는 그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면 안된다고 누누히 말하지 않았더냐..!」
서문인걸(西門仁杰)은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들어서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져 보이는 것
에 놀라며 옆에 앉아있는 딸에게 준엄하게 꾸짖듯 말했다.
「어서 앉거라. 오늘부터 아침 저녁으로 이방에 와서 나에게 글을 배우도록 해라. 화령이 너도
이 아이를 동생처럼 생각하고 함께 글공부를 하며 명아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도록 해라..!」
그러나 화령(華怜)은 내키지 않는 듯, 대답 대신 입만 삐죽거리며 듣지못한 척 앉아만 있었다.
아무말 없이 한참을 서있던 아이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상관명(上官明)이라 합니다. 그때는 사정이 있어 저의 성을 밝히지 못한점 사죄 드립니다.
단 일각(一刻;짧은시간)의 가르침을 주신다 해도 저에게는 스승이십니다. 스승의 예(禮)를 받
으십시오.」
여덟살 아이의 말이 아니었다. 어느 어른인들 이렇게 반듯한 말을 할수 있겠는가..! 아이의 태
도에 서문인걸(西門仁杰)은 갈수록 놀라움이 더해가고 있었다.
「그래, 성씨가 상관(上官)이었던가..? 상관명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나는 서문인걸(西門仁
杰)이라 한다. 가만 가만, 상관이라 했던가..? 그럼 혹시 전 왕조(王朝)의 명문(名門)인 그 상
관가문과 관계가 있느냐..?」
서문인걸(西門仁杰)은 언뜻 후주(後周)의 패망과 함께 멸문을 당한 상관가문(上官家門)을 떠올
린 것이었다.
「어르신, 저는 저의 선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지금 저의 이름이
상관명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바가 없어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허.. 알겠다. 나도 더 물어볼 것이 없구나.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열심히 학문을
배우도록 해라. 밖에 집사는 있느냐..? 이 아이의 방을 안내해 주어라..!」
* * * * * * * * * *
천(天)은 하늘이요 지(地)는 땅이며 현(玄)은 검은 것이고 황(黃)은 누른 것이다. 눈으로 모양
만 익혀오든 글자의 뜻을 알아가는 재미에 시간흐르는 줄 모르고 보낸 지난 날의 세월..! 상관
명(上官明)이 서문가(西門家)의 식객이 된지 벌써 이년이 가까워 지고 있었다.
「얘, 이리와서 내 발좀 주물어 줘. 너무 뛰어놀아 발이 아프단 말이야..!」
「예, 화령(華怜)아가씨..!」
대답을 하고는 아무런 내색없이 다가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꼭꼭 누르고 있는 상관명의 가슴을
발을 들어 툭.. 차버리는 화령(華怜)이었다.
「간지러워, 주물어 달라고 했지 누가 간지럽히라고 했니..!」
뒤로 벌렁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상관명은 말없이 화령(華怜)의 발바
닥을 주물어 주고 있었다.
언제나 조그만 핑계라도 만들어 틈만나면 이렇듯 괴롭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익.. 웃으며
태연히 시키는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는 상관명이 화령(華怜)의 눈에는 더욱 가증스럽게 보이
는 것이었다.
(이 어린 거지놈이 아버지의 앞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나보다 이놈을 더욱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기재(寄才)를 찾았다는 흐뭇함에 자신보다 상관명을 더욱 가까히 하며 보살피고 있는 것을 보
며 화령(華怜)은 어린 마음에 시샘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열두살이 되어 점점 처녀의 티를 보이는 서문화령(西門華怜)은 아직도 상관명을 처음 보
았을 때의 거지같은 차림을 생각해 업신여기며 제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틈만 나면 마치 하인
다루듯 행세해 도도한 자신을 더욱 보라는 듯 과시하고 있었다.
매일 매일 변화없이 되풀이 되는 서문가(西門家)에서의 두해 가까운 나날들..!
사서(四書)를 읽고 삼경(三經)을 공부하며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외우고 서경, 시경, 주역
의 자구(字句)를 중얼거리기를 이년, 글을 읽어 뜻을 익혀 가는 반복된 날들에 이제는 점점 지
겨워져 공부에 싫증이 느껴져 가는 어느날,
그날 밤은 유달리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있었다.
- 주르륵.. 솨악.. 좌르르..!
선잠이 깬 침소에서 둥근 보름달을 올려다 보며 시름을 달래고 있던 상관명의 귀에 물이 흘러
내리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이 밤중에 어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기왕에 잠에서 깨어난 지금, 혹시나 물 길어 나르는 하인들을 도울까 마당으로 나가 보았으나
마당은 적막같이 고요해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주르르.. 솨아,
어렴풋이 뒷뜰의 목간(沐間)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였다.
(헉..! 누가 이 늦은 밤에 목욕을..?)
호기심이 가득 밀려와 상관명은 살며시 목간방으로 다가가 틈사이로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어엇, 저애가 이 밤중에 왜..?)
화령(華怜)이었다.
경건한 얼굴을 한 화령이 발가벗고 물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여자아이의 몸이었지만 평생 처음 여인의 나체를 보는 순간 상관명의 가슴은 주체 할
수 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봉긋 솟아 오는 젖가슴,
아름다운 뱃살을 타고 다리 사이로 흘러 내리는 달빛아래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나신(裸身),
어린 상관명의 눈에도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는 화령(華怜)의 자태였다.
문틈 사이로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때,
- 휙.. 휘이익..!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허공(虛空)을 넘어 뒤뜰을 향해 날아 가고
있었다.
「어어.. 난다..! 사람이 하늘 위로 날아 다닌다...!」
정신이 없었다.
화령(華怜)의 벗은 몸을 보았을때 보다도 더욱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어찌 새도 아닌 인간이 허공을 날 수 있단 말인가..?)
신기하고 놀라웠다.
(아아.. 나도 저렇게 날아 보았으면..! 에이, 책만읽어 무엇에 쓸까..? 나에게는 닭 한마리
잡을 힘도 용기도 없는 것을..!)
스스로를 한탄하며 흑영(黑影)이 사라진 쪽을 물끄럼이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 스르륵.. 바람
소리를 뒤로하며 또하나의 그림자가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우와.. 또 날아간다..!」
놀라움 속에 상관명의 눈은 그림자의 뒤를 쫒고 있었다.
(앗차.. 내가 정신을 놓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서문가(西門家)의 장원(莊園)을 침입한
야객(夜客:밤도둑)을 보고도 감탄만 하고 있다니..!)
뒤를 쫒으려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삐거덕.. 목간(沐間)방의 문이 열리며 화령(華怜)이 걸어나와 그녀 역시 휘익.. 몸을 날렸다.
(어어어..! 저애까지도 허공(虛空)을 난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계집아이가 땅바닥 위를 달리는 것 보다 더 수월하게 허공(虛空)을 날아
가고 있었다.
(후후, 지금껏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상관명의 마음에는 회의(懷疑)가 가득 밀려왔다.
그러나 그 마음보다 우선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세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 날아간 그 곳을 찾
아 살펴보고 싶은 호기심 이었다.
* * * * * * * * * *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가며 다가간 곳은 후원(後園)의 한쪽에 언제나 담으로 둘러져 어느
누구도 접근을 하지 못하게 막아놓은 곳이었다.
상관명은 벌어진 조그만 틈으로 겨우 안이 들여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보름달을 등(燈)
으로 삼아 눈을 반짝이며 그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 담의 안에는 두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고 그 앞에 화령(華怜)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상관명의 귀에 그들의 말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서문(西門)사제..! 준비 되었는가..?」
「예.. 사형, 화령(華怜)도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령(華怜)은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도록 속가(俗家)에 제자를 두어 힘들게 수련을 하며 일년에 한번씩 그 성취를 점검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현 왕조(王朝)의 억불(抑佛)정책 때문임을 유의하고 어렵더라도 수련에
증진을 해야 할 것이네. 화령(華怜)의 무공도 많이 늘었는가..?」
「예, 지덕대사(智悳大師)님. 소녀 일년동안 오늘만을 학수고대 기다려 왔습니다. 저의 무공진
전(武功進展)을 살펴 주십시오..!」
화령(華怜)은 어서 빨리 자랑하고픈 급한 마음에 얼굴조차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 장하구나. 너는 비록 소림에 정식으로 입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 아비의 면(面)을
생각해서 아비와 함께 소림무공의 수련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하니 더욱 더 연마를 게을리 해
서는 않된다.」
「예.. 대사님,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화령(華怜)의 무공을 먼저 살피도록 하자. 화령아 앞으로 나서거라..!」
지덕대사(智悳大師)의 명(命)에 화령(華怜)은 일어나 대사의 앞으로 나서며 몸을 낮추고 팔을
앞으로 뻗어 무공을 펼쳐보일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서문 어르신은 낙향한 선비로만 알았는데 그도 숨어있는 무림인(武林人)이었구나..! 과연
어르신의 말씀대로 사람은 겉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디 저 화령(華怜)아가씨의
솜씨를 구경이나 해볼까..!)
상관명은 속으로 생각을 하며 더욱 정신을 차려 장중(場中)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령(華怜)이 한발을 앞으로 내밀고 두손을 단전(丹田)에 모았다가 천천히 앞으로 뻗어내고
있었다. 소림무공(小林武功)의 첫 초를 펼치기 위한 기수식(起手式)이었다.
「지법(指法), 일지선공(一指仙功)..!」
지덕대사(智悳大師)의 입에서 일갈(一喝)이 터져 나왔다.
화령(華怜)의 신형(身形)이 휘-익.. 앞으로 내닫으며 손가락을 튕겨내듯 쏘아 내었다.
- 슈우웅.. 파앙..!
화령(華怜)의 여린 손가락 끝에서 섬광이 뻔쩍하며 번개같은 지경(指經)이 한줄기 뻗어나가
후원의 아름드리 소나무의 가장 큰 둥근가지를 소리도 없이 잘라버렸다.
「허허 제법이구나. 다음은 장법(掌法), 항마복호장(抗魔伏虎掌)..!」
화령(華怜)의 신형이 바닥에 납작 업드렸다 튀어 오르며 양손을 번갈이 아래위로 휘저었다.
- 휘이잉.. 크르르릉.. 펑..!
장풍(掌風;손바람)이 화오리를 일으켜 바닥의 흙모래를 휘몰아 올려 보름달을 뿌옇게 가렸다.
「잘했다. 많이 늘었구나. 다음은 경신법(輕身法), 능공천상제(陵空天上梯)..!」
지덕대사(智悳大師)의 구령이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화령(華怜)의 신형(身形)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휘이익.. 그 신형(身形)이 십여장 허공(虛空))으로 날아올라 수평을 이루며 빙글빙글 비행(飛
行)을 했다.
화령(華怜)의 신형(身形)이 마치 보름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허허.. 제법 제대로 익혔다. 작년 보다 많은 발전이 있었구나..!」
화령(華怜)의 성취에 지덕대사(智悳大師)가 감탄을 하고 있던 그순간..!
「누구냐..! 누가 감히 숨어서 엿보고 있느냐..!」
날카로운 화령(華怜)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능공천상제(陵空天上梯)를 펼쳐 보이며 허공을 비행하고 있던 화령의 눈 아래에 시커먼 그림자
가 담옆에 숨어서 그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였던 것이었다.
훌쩍.. 날아내린 화령(華怜)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호호호.. 네놈 이구나..!」
상관명의 양쪽 뺨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가 울렸다. 화령(華怜)이 손바닥 가득 진기(眞氣)를 실
어 상관명의 양볼을 후려 갈긴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복호장(伏虎掌)으로 상관명의 복부를 내질러 버렸다.
화령(華怜)은 비밀리 하고있던 무공수련을 들켰다는 조바심과 그 숨어 보고있던 상대가 상관명
이라는 사실에 미움과 분노가 한층 더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컥.. 으윽..!」
상관명은 신음을 내뱉으며 배를 움켜쥐고는 땅바닥에 털썩 나뒹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