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1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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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 부 ** [수정일. 2006 년 2 월.]
제 1 장. 혈혈단신(孑孑單身) 1.
황하 남쪽에 위치한 중원의 중심 하남(河南) 대평야에 위치해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는 송(宋)의 수도 개봉(開封), 그곳 분주하고 활기가 가득찬 저자거리를 지나 길 양옆으로
푸른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선 관도의 한쪽 넓은 공터에 화려하게 들어서 있는 주루 화영루(華
榮樓)..!
그 화영루의 출입문 아래 무릎을 꿇고 않아, 고개를 숙인 채 아래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제 겨우 일고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온몸에는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고 머리는 길어 산발을 한 영락없는 거렁뱅이의 모습 이었으나
그 아이의 맑은 눈망울 만은 초총초롱 빛을 발(發)하며 무릎 앞에 놓인 한권의 서책을 뚫어지
게 보고 있는 것이었다.
- 푸훗.. 크흐흐..!
화영루를 찾는 손님이 어린 거렁뱅이 아이를 내려다 보고는 웃음을 흘리며 출입문을 들어가곤
했다.
그 곳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스워 보이는 아이의 작태(作態)..!
거렁뱅이 꼬마아이의 주제에 열심히 책장을 넘겨가며 읽고 있는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슬며시 바라본 화영루의 손님들 눈에 들어온 한권의 서책..!
그책이 흔하디 흔한 천자문(千字文) 책자 한권인 것을 알고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화영루의
문을 향해 들어서곤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적혀져 있는 글자의 모양만 눈으로 익혀갈 뿐, 계속해서 책
장만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뜻을 알 것도 알 필요도 없었다.
가르쳐 주는 이도 물어 보는 이도 없이 책장만 넘기고 또 넘기고 하는 아이는 글자의 모양만
눈에 익히는게 고작인 것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는 그 아이의 눈앞에 쨍그렁.. 댓닢의 동전이 떨어져 뒹굴었다.
책에서 눈을 떼고 올려다 보는 아이의 눈앞에, 신기한 놈이 다 있구나 여기는 듯 만면에 웃음
을 띠며 사대부 차림의 한 중년선비가 온화한 얼굴로 내려다 보며 말했다.
「요놈아.. 그 책의 글자를 모두 소리내어 읽는다면 그 동전을 모두 네게주마..!」
아이는 그 중년 사대부를 올려다 보며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었다.
「나.. 나는 이글을 읽을줄 모릅니다. 다만 눈속에 익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동전을
도로 가져 가십시오.」
그 중년선비는 이상하다는 듯이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읽을 줄도 모르는 글자를 뭣 때문에 그리도 열심히 보며 뒤적이고 있는 것이냐..?」
아이는 중년선비의 말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백번 천번을 되풀이 해서 익히면 언젠가는 글자가 익혀지며 뜻을 알게 되겠지요. 선비어르신
이 어찌 그 이치를 모르십니까..? 이 동전은 제 것이 아닌 듯 하니 어른께서 도로 가져 가십시
오.」
「아니다, 그냥 하거라. 너의 글읽는 모습이 기특해서 주는 것이니 그것으로 음식을 사먹도록
해라.」
「어르신.. 아무런 이유없이 이돈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손으로 땅바닥이 흩어져 있는 동전을 집어 중년 선비의 손에 쥐
어 주었다.
「허허, 그놈참..! 그래 열심히 글을 익히거라. 다음에 또 보자.」
중년선비는 재미있는 아이를 발견 했다는 듯 빙글 웃음을 지으며 주루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해가 저물어 사방이 어둑해질 무렵..!
어린아이는 앉아있던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나타나지를 않는구나..!」
가끔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돌아 나오는 숲길을 바라보곤 하는 아
이의 모습이 마치 긴시간 누구를 기다리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무릎아래 깔고있던 거적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는 휘적휘적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한없이
무거워 보이는 아이는 숲속을 찾아들어 고목나무의 밑둥에 난 조그만 구멍속으로 기어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오늘도 힘든 하루가 지나갔구나..! 그 계집애, 꼭 다시 만나 이것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할아버지께서 절대로 힘(力) 앞에서 비굴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글은 필히
익혀야 한다고 말씀 하셨으며, 이책 한권만을 남겨 주셨다. 글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아이의 손에는 푸른빛이 도는 옥패(玉佩)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옥패(玉佩)를 손바닥으로 만지작 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속에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 * * * * * *
달포전 화영루(華榮樓)의 앞..!
황구(黃狗) 한마리가 허연 잇빨을 드러내고 으르릉 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 마주해 거지꼴을 한 어린아이가 황구와 같은 자세로 엎드려, 그 누른 강아지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화영루를 드나드는 손님들은 그 광경을 신기한 듯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으나, 어린아이는
눈에 불길을 번득이며 앞에 놓인 개밥그릇에 담긴 먹다 남은 고기조각과 황구(黃狗)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개와 어린아이는 그들의 가운데 놓인 그릇에 담긴 찌꺼기고기를 챙취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 왕.. 왕.. 크르릉.. 휘익..!
한동안 경계를 하다 나는 듯 뛰어와 팔을 덥석 물어 버리는 황구(黃狗)의 거친 행동도 아랑곳
하지않고 아이는 다른팔을 이용해 얼른 고기덩어리를 집어 입속에 넣어 무물 거리며 맛있게 삼
키고 있었다.
황구가 아이에게 달려들어 팔을 문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한쪽 팔에는 두꺼운 거적이 둘둘 감겨 있었고, 그 한 팔을 황구(黃狗)에게 내밀어
물도록 유인을 한 것이었다.
「크크크크.. 어린놈이 제법 살을 내주고 뼈를 벤다는 병법(兵法)까지도 터득했구나..!」
둘러선 군중들이 개와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거렁뱅이
아이의 굶주림은 아랑곳 하지 않았고 그 괴이한 싸움을 보며 즐기고 만 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 무슨 병법이 있었을까..? 이 아이의 행동은 단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취한 본능적인
행동 이었던 것..!
아이는 황구에게 물린 한쪽 팔을 위로 치켜 들고는 던져진 고기조각을 열심히 씹어 목구멍 속
으로 삼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아이의 앞에 조그만 그림자가 다가사서며 무엇인가를 툭.. 던졌다.
- 털썩..!
땅바닥에 동그란 물체 하나가 떨어지며 갑자기 빙둘러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하나,
둘 뒤로 물러나 비켜서고 있었다.
아이는 살점하나 남지 않은 뼈다귀까지 손에 들고 게걸스럽게 뜯고 있던 행동을 멈추며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보았다.
(허헉.. 선녀(仙女)다..!)
아이의 눈앞에는 분홍빛이 맴도는 화려한 옷을 입은 조그만 소녀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초생달을 그려놓은 듯한 눈썹, 학처럼 단아한 모습, 아름다움 가득한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붉은입술..!
마치 천상(天上)의 선녀(仙女)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아이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의 뒤에는 몇 사람의 건장한 무인(武人)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소녀를 지키고 있었다.
「얘, 강아지밥 뺏아 먹지말고 배고프면 그것으로 먹고 싶은 것 사먹어..!」
손가락으로 바닥에 던져진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 보는 아이의 눈에 들어온 물건.. 노리게...!
옷 춤에 달고 다니는 노리게.. 제법 값이 나갈 것 같은 은은한 푸른삧이 감도는 옥(玉)노리게
였다.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지듯 변했다.
(할아버지께서 남에게 고개를 숙여 구걸을 하지 말며, 스스로 노력을 해 정당하게 취한 것이
아니면 가지지 말고, 어떠한 경우에도 무상(無償)의 동정은 없으니 받지 말라고 했다.)
「이 계집애, 난 거지가 아니야..! 이런 것 내게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손을 소녀앞에 쑤욱 내밀었다.
그순간 소녀의 뒤에 서 있던 무인이 앞으로 나서서 막아서며 억센 손바닥으로 아이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뒤로 밀어 버렸다.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버릇없이 입을 놀리느냐..!」
그 순간 무인(武人)의 행동을 제지하는 계집아이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 그냥 놓아 두세요.」
「그것참.. 너무 마음이 고우셔서.. 저런 거렁뱅이까지도 마음에 두십니다. 이제 부터는 저따
위 인간들은 무시를 하고 상종을 마십시오..!」
아이의 귀에 들려온 말이었다.
(무공(武功)이 높아 보이는 여러 무인들이 철저히 경호를 하고 있는 저 소녀는 지체 높은 집
안의 고귀한 신분임이 분명하다. 또한 마음까지 곱다. 그러나 저 호위 무사들은 나를 감히 거
렁뱅이 같은 인간으로 취급을 하고 있다..!)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고개를 들어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들은 벌써 등을 돌리고 갈길을 채촉
하고 있었다.
(그래, 꼭 다시 만나 이 옥패(玉佩)를 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시를 당해야 할
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어야 겠다.)
이제 겨우 여덟 살된 어린아이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결심이었다.
* * * * * * * * * *
꿈결처럼 지난 일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던 아이는 새벽의 찬이슬에 오슬오슬 추워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 눈앞에 뿌옇게 다가오는 새벽안개 속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심산유곡(深山幽谷) 깊은 골짜기의 동굴 속에서 태어난 어린아이..!
그러나 그 산고(産苦) 를 이기지 못해 태어난 아이의 생명과 맞바꾼 어머니의 죽음..!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조광윤(趙匡胤)의 칼을 맞아 목숨이 경각에 달린 할아버지를 구하
기 위해 온몸이 불에 타 그을리는 것도 모르고 화마(火魔)속에서 들쳐업고 나온 할아버지를 겨
우 이곳 동굴에 피신시키고는 죽음을 맞이한 아이의 아버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 앞에서도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가문이 멸문(滅門)을 당한 것을 애통(哀痛)해 할뿐, 그 애틋함
조차도 할아버지의 뜻을 쫒아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 오로지 백성이 평안(平安)하기를 기원하
며 스스로 감수하셨던 것이었다.
그렇게 후주(後周)와 명운을 같이하려 고집을 세웠던 할아버지가, 아이의 어미가 이 아이를 임
신을 한 것을 알고는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을 끈질기게 유지시켜 스스로 아이의 어미를 지켜
왔던 것이었다.
(오호..! 상천(上天)이 우리 가문의 대(代)를 이어주시는 구나..!)
은둔의 생활 열 달만에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보며 하늘에 감사를 드린 할아버지였다.
그 아이가 여덟살이 되어가던 해,
할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아이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얘야, 이 할아비의 말을 명심 하거라. 너는 후주(後周)의 남부럽지 않은 명문가(名門家)의
자손이다. 다만 이 할아비는 후주(後周)와의 마지막 의(義)를 택하여 신 왕조를 따르지 않은
것일 뿐, 신 왕조를 세운 그들의 궐기는 옳다고 생각했기에 심정적으로는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너의 부모들이 그렇게 가고 말았고, 너 또한 천애고아로 남겨지게 되었구나.
그러나 너는 굳센 아이다. 아니 굳세게 자라야만 할 아이다. 그리고 다 자란 후 네가 한사람의
몫을 할때가 되면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왕조를 지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왕조가 백성에
게 잘못을 하거나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때에는 가차없이 응징을 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왕조가 잘못을 한다면 이 할아비는 그들의 행동을 묵인한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며, 이 할아
비의 잘못된 고집 때문에 가문(家門)을 지키지 못한 죄, 그리고 너의 어미 아비를 비명에 죽게
한 죄를 저승에 가서라도 사죄를 해야 할것이다. 이 할아비의 말을 깊이 명심해야 하느니라.」
어린아이는 할아버지의 긴 말씀을 듣고만 있었다. 아직 어린 그에게는 그 말들이 어떤 의미를
가진 말들인지 어느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 뜻은 몰라도 분명 옳고 중요한 이야기 일 것.. 그 말들을 마음속 깊
이 새겨듣고 있었다.
「그리고 얘야, 이 할아비가 너에게 남겨줄 것은 이 낡은 천자문(千子文) 책 한권 뿐이다. 내
가 너에게 지금껏 글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이세상에 혼자 남아야 할 너이기에 무엇이든 네 스
스로 모든 것을 터득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부디 열심히 읽어 스스로 글을
익혀야 한다. 글을 모르면 이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나 아이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는 겨우 글자뿐인 천자문
의 글을 알고 난 후, 그 책자를 소홀히 하여 혹시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손에서 책자를 놓
지 못하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던 것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튼 숨을 몰아쉬며 할아버지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가 않았다. 아이에게
내력을 이야기 한 후 할아버지는 천명(天命)을 다했던 것이었다.
* * * * * * * * * *
어느듯 맑은 해가 떠 올라 고목나무의 동굴앞을 환하게 비추어, 뿌옇게 서려있던 하얀 안개를
걷어가 버리고 그 안개속에 은은히 어려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맑은 햇빛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화영루(華榮樓)앞으로 다시 가보아야 겠다. 기필코 그 계집애를 만나 돌려 주어야 한다.
이 조그만 옥패(玉佩) 한조각 때문에 그 무사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할아버
지께서 나에게 언제나 당당하라고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아이는 두팔을 하늘로 향해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켜며, 주섬주섬 거적을 말아 옆구리에 끼고 주
루를 향해 발걸음을 채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