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교환 - 2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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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의 설명을 들은 희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 그런것이라면 대부분 남녀 관계에서 자주 일이었고 그렇다면 여자에게 손을 대는 남자가 최소한 근처에 있다는 말이 성립되었다.
희정의 말에 영호는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여자를 때리다니....
유희의 모습이 생각났고 그리고 그 몸의 상처들이 떠올랐다.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남녀관계는 제 삼자가 나서면 안되는거야. 영호씨도 그렇게 화 낼 필요도 없고...그리고 꽤 똑똑해 보이는 여자니 잘 할거야. 혹시 알아? 자기가 원해서인지도..호호.”
희정의 말에 영호는 괜히 서운해져 희정을 쳐다보았고 자신의 말도 안되는 농담에 스스로 썰렁해진 희정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영호를 바라본 희정은 은근히 웃음이 나왔다.
“영호씨..혹시?”
“혹시? 뭐 생각하시는 건가요?”
“호호, 아니예요.”
영호를 보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희정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경철은 희정에게 봉투를 건냈다.
“누님, 이것이 조사한 겁니다. 세상 참...”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경철은 희정이 봉투를 개봉하는 것을 보면서 사무실을 나갔다.
희정이 봉투의 내용을 살펴본 후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 내용물을 봉투에 닫은 후 아무말 없이 창가에 서서 회색빛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정의 눈에서 한방울의 이슬이 반짝였다.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너무 화가 나요.”
캐빈은 평소와는 너무 다른.. 아니 처음 보는 희정의 분노한 모습에 희정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평소 그토록 온화하고 평온하던 희정의 모습만 보던 캐빈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 모습 안에 감추어진 강한 카리스마마저 느꼈다.
“어느 정도 생각하는 거야?”
“생각 같아서는 다 날려버리고 싶어요.”
“날려? 하하하.”
캐빈은 언어마저 과격해진 희정의 표현에 한층 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어디 보자. 먼저 이 형민이라는 사람을 떼어 놓는것이 중요하겠군...”
“그냥 떼어 놓는다고 떨어질까요?”
“아니지, 이런 사람은 혹독하게 다루어야만 해.”
캐빈의 손에 들린 서류에 나와 있는 야비한 모습의 형민을 보면서 희정은 몸서리를 쳤다.
“혹독하게요?”
“죽이던지..아님 사지를 절단하던지....”
“안되요. 그런일은...”
깜짝 놀라 소리치는 희정의 모습에 캐빈은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농담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캐빈을 쳐다보는 희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꼭 끌어 안는 캐빈이었다.
희정과 캐빈은 머리를 마주하고 열심히 계획을 세웠다.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최대한의 계획을...
희정은 출근하면서 영호에게 이야기를 했다.
“영호씨, 유희씨 기억하지요?”
영호는 느닷없이 희정의 입에서 유희의 이름이 거론되자 화들짝 놀랐다.
요즘 영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유희에 대한 생각이었다.
“네, 보스. 왜요?”
한달간의 미국생활은 희정과 영호 사이에 웃긴 칭호를 갖다 주었다.
상사나 윗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호칭인 보스를 영호가 사용한 것이다.
“그 보스란 소리 뺄수 없어요?”
“아, 네.”
“음, 제가 좀 알아 봤는데요. 좀 많이 안 좋아요.”
“뭐가요? 뭐가 어떻게 안 좋다는 말인가요?”
희정은 영호에게 유희의 당한 일과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영호는 유희란 한 여자가 처한 상황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듣고는 가슴속 한 구석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인가 결정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장님, 형민이란 사람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그 최회장이란 사람과 그의 부인이란 사람.. 제 능력 밖이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호는 부탁이란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희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한번 해 보지요. 저도 화가 많이 나네요.”
희정은 출근을 한 후 경철을 불렀다.
희정의 방으로 들어간 경철은 굳게 굳어져 있는 희정의 얼굴을 보고 부른 이유를 눈치챘다.
처음에는 유희 주변을 조사해 달라는 희정의 요청에 탐정놀이라도 하는 듯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던 일이 알게 되면 될수록 경철의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한국 굴지의 그룹인 한성 건설의 최회장의 세컨드로 있다가 그 회장의 부인이란 사람의 질투와 미움에 의해 한낱 사기와 간통, 그리고 강간의 범죄로 인해 전과 오범의 딱지를 가지고 있는 형민이란 사람에 의해 구렁텅이로 빠진 가련한 여인, 그리고 천사라 해도 될 만큼의 심성으로 당하고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 범죄자의 손에 농락당하는 바보같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 경철도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면 할수록 유희라는 여자에 대해 큰 연민이 들었고 세상에 그렇게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여인이 있다는 것과 그런 여자에게 닥친 세상에 있어서는 안될 그런 일에 대해 무척이나 분노감이 들었다.“
“최회장과 한성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봐 주세요. 회사의 재정과 부채, 그리고 주식상황 및 개인적인 일을 포함한 모든 것 말이예요, 특히 그 부인에 대한 일은 특별하게 취급해 주세요.”
희정의 강한 의지가 담긴 말에 경철도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정은 경철에 이어 민우를 불렀다.
민우는 방에 들어서자 희정의 굳은 얼굴에 무엇인가를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본 채 말이 없던 희정이 민우를 보고 말했다.
“우리 현재 자금 동원력이 얼마나 되지요?”
“현재 현금 보유율은 13%정도입니다. 약 이백억정도지요. 순수 회사의 지분은 그중 오십프로구요. 그리고 일주일정도 시간을 갖는다면 사십프로 정도로 올릴수는 있습니다만...”
“그럼 삼백칠십오억 정도 되는건가요?”
“네. 그정도 될 것 같네요.”
다시 희정이 말이 없어졌다.
“네, 알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민우는 보기 드물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희정의 행동을 이해할수 없다는 듯이 한번 어깨를 어쓱 하고는 천천히 나갔다.
영호는 예전처럼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유희를 보았다.
“오늘은 담배가 필요하지 않으신가 보네요.”
유희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아..죄송합니다. 괜히 혼자 계시는데..”
영호의 당황한 표정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 때 처음 펴 본 거였어요. 어떤가 하고...”
“그랬었군요.”
담배를 주려 내밀다 만 영호의 손을 본 유희는 손을 내밀었다.
“하나 주세요. 뭐, 오늘도 그날하고 같은 기분이니..”
영호는 무표정하게 담배 하나를 내밀었다.
“쿨럭..쿨럭...”
유희는 담배만큼 가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고 영호가 건네주는 라이터를 받아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 들였다.
하지만 담배는 초보자가 쉽게 자신을 빨아들이도록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침을 하던 유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영호를 바라보면서 겸연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피지 마세요. 안 어울려요.”
“그런가요.....”
유희는 다시 눈을 들어 회색빛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희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영호의 눈빛이 도시의 색깔에 물들어 가는 듯 회색빛을 띠었다.
형민은 또 다시 다가올 즐거움에 몸서리를 쳤다.
오늘은 어떤 행위로 쾌감을 느껴볼까...
트렁크에 실린 가방 안의 도구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생각해보자 곧 보게 될 최고의 장난감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급해졌다.
형민은 유희의 집과는 상당히 먼 곳에 주차를 시켰다.
그리고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연 후 그 안의 가방을 꺼냈다.
한참을 뒤적거린 형민은 그 중 가죽으로 된 긴 채찍이 손에 잡히자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거야. 그 하얀 피부에 빨간 줄이 쭉쭉 그어지면...아휴...죽인다..’
검은 비닐 봉투에 그것을 담고 주위를 둘러보는 형민은 자신의 용의주도함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검은 선글래스를 치켜 올렸다.
유희의 아파트는 대로변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 뒤쪽은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형민은 항상 이쪽을 애용했다.
한밤중의 초등학교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불빛이 이곳에서만은 그 빛을 잃었다.
불이 꺼져 온통 깜깜한 커다란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형민은 그 건물 뒤쪽의 낮은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천천히 건물을 돌아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한쪽에 위치한 작은 농구장을 지나 지금은 쓰지 않는 쓰레기 소각장을 지나면 우거진 나무들로 길을 막아 놓은 곳이 나온다.
하지만 사람들의 습성으로 인해 이미 작은 길이 뚫려 있었고 형민은 이 길을 지나 아파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제 곧 닥쳐 올 쾌감에 한껏 기대를 하면서 쓰레기 소작장을 지나 나무들 사이의 작은 길로 들어선 형민은 어둠 속에 가려져 나무인줄 알았던 한 사람에 의해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으로 툭툭 앞쪽을 차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형민은 기분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손을 품안으로 집어 넣어 평소 가지고 다니던 잭 나이프를 쥐었다.
형민은 돌아라도 가고 싶었으나 워낙 우거진 나무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할 수 없이 그 사이 나 있는 작은 길 바로 한쪽에 서 있는 남자를 스쳐 지나가야 했다.
형민의 나이프를 든 손에 땀이 배였다.
소각장을 지나 나무숲을 벗어나는 길은 삼십여초정도의 거리에 불과했으나 형민은 오늘따라 왠지 그 길이 무척이나 길어 보였다.
“형씨!”
남자의 말소리에 막 남자를 지나쳐 약간 안심이 되려던 형민의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나 말인가?”
기세에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형민은 말을 놓았다.
“그래, 당신 말이야. 혹시......”
“혹시? 혹시 뭐?”
“불 좀 있나?”
형민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불이라....난 담배 안 펴.”
“그렇군. 오래 살겠어...아주..오래..”
남자의 말이 점점 바닥에 깔렸다.
남자가 기대었던 나무에서 몸을 떼었다.
“뭐지?”
“오래 살고 싶어 담배도 안피는 모양인데....아무래도 그 소원은 이루지 못할 것 같네.”
“당신 뭐야? 뭘 원하는 거야?”
형민은 본능적으로 품 속의 칼을 꺼냈다.
그리고 나이프의 날을 폈다.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나이프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호의 입가에 비웃음이 자리 잡았다.
“최회장이 보낸것인가? 아니지, 그 고상한 최회장의 부인인가?”
영호는 가만히 형민을 응시했다.
참 비열하고 못생긴 얼굴이었다.
영호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웃음을 짓자 형민은 더욱 마음이 떨려왔다.
“음... 언젠가는 이럴줄 알았지만....알았소. 손을 떼겠소.”
형민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영호를 향해 다가왔다.
“나도 이제 그만 두려던 참이었소,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이 번쩍 들리면서 영호의 얼굴을 그어오는 나이프의 날이 어둠속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충분히 자를수 있는 거리였는데...’
형민은 자신의 손이 허공을 가름에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으나 손목에 가해 오는 강한 충격이 나이프를 놓치고 말았다.
나이프가 길 한가운데에 작은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뒷머리를 땡기는 느낌이 들면서 무릎 뒤쪽에 강한 충격을 받고 고개를 치켜 든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꿇었다.
영호는 손에 움켜쥔 형민의 머리채를 강하게 잡아당기면서 형민의 한쪽 팔을 뒤로 꺽었다.
“아악..그만..그만...미안하게 됬소. 정말 이젠...이젠 그만 두겠소.”
형민은 상대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둠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만둔다라.....그만둔다라...... 쉬워서 좋군. 그만 두면 끝이라는 생각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절대...절대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당연히...”
영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형민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손과 팔을 꺽은 손을 놓아 주었다.
“다시는 접근도 접촉도 하지 마라..”
칼을 쥐었다가 맞은 손목이 시큰거리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손목을 문지르던 형민의 눈이 독사처럼 빛났다.
어느 순간 형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놓아지면서 뒤쪽을 향해 몸이 돌아갔다.
그리고 접혀진 팔의 가운데 뽀족한 팔꿈치가 영호의 머리쪽을 향해 날아갔다.
영호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면서 팔이 올라갔다.
그리고 형민의 팔꿈치 위쪽을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오른쪽 팔을 들어 형민의 손목을 역수로 잡아갔다.
팔꿈치 위쪽을 막아 공격을 막아낸 영호의 왼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와 팔꿈치를 덮었고 그 순간 손목을 잡은 오른손이 형민의 손목 안쪽을 툭 쳤다.
그리 강하지도 않아 보이는 영호의 작은 몸짓에 형민의 팔이 접히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접혔다.
“아악....”
형민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처절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땅에 주저 앉았다.
삶을 살아오면서 온갖 사기와 도둑질, 그리고 강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 다치기도 했지만 이런 고통과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과 오범의 자랑스러운 딱지는 형민을 어느 정도 스스로를 상당한 위치의 악당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지만 이 한순간에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형민이었다.
이가 딱딱 부딫치도록 온 몸을 엄습하는 고통에 형민은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
“아픈가?”
형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영호의 손이 형민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엄청난 힘이 형민의 얼굴을 우그러트렸다.
형민의 얼굴이 고통 속에서도 느껴지는 수치심에 우그러진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벌레 같은 놈.”
영호의 손이 형민의 뺨을 때렸다.
단지 손바닥으로 때린 것에 불과했지만 형민의 상체가 땅바닥에 강하게 부딫혔다.
영호가 일어나 형민의 얼굴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지긋이 발을 눌렀다.
“아....악....제발...”
이가 부러져 피가 입가로 흘러나왔고 그 피가 영호의 발에 의해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죽고 싶으면 또 덤벼라..그리고 앞으로 그녀 근처에 얼쩡거리기라도 하면 마져 사지를 부러뜨려 주마.”
영호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손과 몸을 툭툭 털고 자리를 떠났다.
형민은 몸서리쳐지도록 강한 고통에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 후에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린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형적으로 비틀어진 팔이 덜렁거렸다.
팔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형민이 그 팔을 다른 팔로 잡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소각장쪽으로 다시 걸어가는 형민의 쭉 찟어진 눈에서는 공포와 독기가 번갈아 가면서 비쳐졌다.
열한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묵직한 종이 울리자 유희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리고 온 몸을 감싸는 빨간 스타킹만을 입었다.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을 칠했다.
거울을 보면서 립스틱을 칠하는 유희의 손이 떨렸다.
쇼파에 앉아 유희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무 표정 없이 인형처럼 유희는 그렇게 앉아있었다.
열두시를 알리는 종이 열두번을 쳤다. 그리고 한시를 알리는 종이 칠때까지 유희는 그 모습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두시, 세시.....
네 번의 종이 치자 유희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섯 번의 종이 치자 유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빨간 스타킹을 벗었다.
장롱에서 평소 있던 속옷을 꺼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유희는 속옷을 입고 그리고 가운을 둘렀다.
침대에 몸을 뉘인 유희는 잠이 오지 않았다.
한시간여를 뒤척인 유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탄 후 거실로 나가 베란다로 나갔다.
어느새 검게 어두웠던 하늘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지만 유희는 몸도, 그리고 마음도 무척 상쾌했다.
분명 그런것이라면 대부분 남녀 관계에서 자주 일이었고 그렇다면 여자에게 손을 대는 남자가 최소한 근처에 있다는 말이 성립되었다.
희정의 말에 영호는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여자를 때리다니....
유희의 모습이 생각났고 그리고 그 몸의 상처들이 떠올랐다.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남녀관계는 제 삼자가 나서면 안되는거야. 영호씨도 그렇게 화 낼 필요도 없고...그리고 꽤 똑똑해 보이는 여자니 잘 할거야. 혹시 알아? 자기가 원해서인지도..호호.”
희정의 말에 영호는 괜히 서운해져 희정을 쳐다보았고 자신의 말도 안되는 농담에 스스로 썰렁해진 희정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영호를 바라본 희정은 은근히 웃음이 나왔다.
“영호씨..혹시?”
“혹시? 뭐 생각하시는 건가요?”
“호호, 아니예요.”
영호를 보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희정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경철은 희정에게 봉투를 건냈다.
“누님, 이것이 조사한 겁니다. 세상 참...”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경철은 희정이 봉투를 개봉하는 것을 보면서 사무실을 나갔다.
희정이 봉투의 내용을 살펴본 후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 내용물을 봉투에 닫은 후 아무말 없이 창가에 서서 회색빛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정의 눈에서 한방울의 이슬이 반짝였다.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너무 화가 나요.”
캐빈은 평소와는 너무 다른.. 아니 처음 보는 희정의 분노한 모습에 희정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평소 그토록 온화하고 평온하던 희정의 모습만 보던 캐빈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 모습 안에 감추어진 강한 카리스마마저 느꼈다.
“어느 정도 생각하는 거야?”
“생각 같아서는 다 날려버리고 싶어요.”
“날려? 하하하.”
캐빈은 언어마저 과격해진 희정의 표현에 한층 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어디 보자. 먼저 이 형민이라는 사람을 떼어 놓는것이 중요하겠군...”
“그냥 떼어 놓는다고 떨어질까요?”
“아니지, 이런 사람은 혹독하게 다루어야만 해.”
캐빈의 손에 들린 서류에 나와 있는 야비한 모습의 형민을 보면서 희정은 몸서리를 쳤다.
“혹독하게요?”
“죽이던지..아님 사지를 절단하던지....”
“안되요. 그런일은...”
깜짝 놀라 소리치는 희정의 모습에 캐빈은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농담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캐빈을 쳐다보는 희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꼭 끌어 안는 캐빈이었다.
희정과 캐빈은 머리를 마주하고 열심히 계획을 세웠다.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최대한의 계획을...
희정은 출근하면서 영호에게 이야기를 했다.
“영호씨, 유희씨 기억하지요?”
영호는 느닷없이 희정의 입에서 유희의 이름이 거론되자 화들짝 놀랐다.
요즘 영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유희에 대한 생각이었다.
“네, 보스. 왜요?”
한달간의 미국생활은 희정과 영호 사이에 웃긴 칭호를 갖다 주었다.
상사나 윗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호칭인 보스를 영호가 사용한 것이다.
“그 보스란 소리 뺄수 없어요?”
“아, 네.”
“음, 제가 좀 알아 봤는데요. 좀 많이 안 좋아요.”
“뭐가요? 뭐가 어떻게 안 좋다는 말인가요?”
희정은 영호에게 유희의 당한 일과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영호는 유희란 한 여자가 처한 상황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듣고는 가슴속 한 구석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인가 결정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장님, 형민이란 사람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그 최회장이란 사람과 그의 부인이란 사람.. 제 능력 밖이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호는 부탁이란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희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한번 해 보지요. 저도 화가 많이 나네요.”
희정은 출근을 한 후 경철을 불렀다.
희정의 방으로 들어간 경철은 굳게 굳어져 있는 희정의 얼굴을 보고 부른 이유를 눈치챘다.
처음에는 유희 주변을 조사해 달라는 희정의 요청에 탐정놀이라도 하는 듯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던 일이 알게 되면 될수록 경철의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한국 굴지의 그룹인 한성 건설의 최회장의 세컨드로 있다가 그 회장의 부인이란 사람의 질투와 미움에 의해 한낱 사기와 간통, 그리고 강간의 범죄로 인해 전과 오범의 딱지를 가지고 있는 형민이란 사람에 의해 구렁텅이로 빠진 가련한 여인, 그리고 천사라 해도 될 만큼의 심성으로 당하고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 범죄자의 손에 농락당하는 바보같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 경철도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면 할수록 유희라는 여자에 대해 큰 연민이 들었고 세상에 그렇게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여인이 있다는 것과 그런 여자에게 닥친 세상에 있어서는 안될 그런 일에 대해 무척이나 분노감이 들었다.“
“최회장과 한성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봐 주세요. 회사의 재정과 부채, 그리고 주식상황 및 개인적인 일을 포함한 모든 것 말이예요, 특히 그 부인에 대한 일은 특별하게 취급해 주세요.”
희정의 강한 의지가 담긴 말에 경철도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정은 경철에 이어 민우를 불렀다.
민우는 방에 들어서자 희정의 굳은 얼굴에 무엇인가를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본 채 말이 없던 희정이 민우를 보고 말했다.
“우리 현재 자금 동원력이 얼마나 되지요?”
“현재 현금 보유율은 13%정도입니다. 약 이백억정도지요. 순수 회사의 지분은 그중 오십프로구요. 그리고 일주일정도 시간을 갖는다면 사십프로 정도로 올릴수는 있습니다만...”
“그럼 삼백칠십오억 정도 되는건가요?”
“네. 그정도 될 것 같네요.”
다시 희정이 말이 없어졌다.
“네, 알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민우는 보기 드물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희정의 행동을 이해할수 없다는 듯이 한번 어깨를 어쓱 하고는 천천히 나갔다.
영호는 예전처럼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유희를 보았다.
“오늘은 담배가 필요하지 않으신가 보네요.”
유희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아..죄송합니다. 괜히 혼자 계시는데..”
영호의 당황한 표정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 때 처음 펴 본 거였어요. 어떤가 하고...”
“그랬었군요.”
담배를 주려 내밀다 만 영호의 손을 본 유희는 손을 내밀었다.
“하나 주세요. 뭐, 오늘도 그날하고 같은 기분이니..”
영호는 무표정하게 담배 하나를 내밀었다.
“쿨럭..쿨럭...”
유희는 담배만큼 가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고 영호가 건네주는 라이터를 받아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 들였다.
하지만 담배는 초보자가 쉽게 자신을 빨아들이도록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침을 하던 유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영호를 바라보면서 겸연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피지 마세요. 안 어울려요.”
“그런가요.....”
유희는 다시 눈을 들어 회색빛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희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영호의 눈빛이 도시의 색깔에 물들어 가는 듯 회색빛을 띠었다.
형민은 또 다시 다가올 즐거움에 몸서리를 쳤다.
오늘은 어떤 행위로 쾌감을 느껴볼까...
트렁크에 실린 가방 안의 도구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생각해보자 곧 보게 될 최고의 장난감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급해졌다.
형민은 유희의 집과는 상당히 먼 곳에 주차를 시켰다.
그리고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연 후 그 안의 가방을 꺼냈다.
한참을 뒤적거린 형민은 그 중 가죽으로 된 긴 채찍이 손에 잡히자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거야. 그 하얀 피부에 빨간 줄이 쭉쭉 그어지면...아휴...죽인다..’
검은 비닐 봉투에 그것을 담고 주위를 둘러보는 형민은 자신의 용의주도함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검은 선글래스를 치켜 올렸다.
유희의 아파트는 대로변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 뒤쪽은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형민은 항상 이쪽을 애용했다.
한밤중의 초등학교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불빛이 이곳에서만은 그 빛을 잃었다.
불이 꺼져 온통 깜깜한 커다란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형민은 그 건물 뒤쪽의 낮은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천천히 건물을 돌아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한쪽에 위치한 작은 농구장을 지나 지금은 쓰지 않는 쓰레기 소각장을 지나면 우거진 나무들로 길을 막아 놓은 곳이 나온다.
하지만 사람들의 습성으로 인해 이미 작은 길이 뚫려 있었고 형민은 이 길을 지나 아파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제 곧 닥쳐 올 쾌감에 한껏 기대를 하면서 쓰레기 소작장을 지나 나무들 사이의 작은 길로 들어선 형민은 어둠 속에 가려져 나무인줄 알았던 한 사람에 의해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으로 툭툭 앞쪽을 차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형민은 기분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손을 품안으로 집어 넣어 평소 가지고 다니던 잭 나이프를 쥐었다.
형민은 돌아라도 가고 싶었으나 워낙 우거진 나무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할 수 없이 그 사이 나 있는 작은 길 바로 한쪽에 서 있는 남자를 스쳐 지나가야 했다.
형민의 나이프를 든 손에 땀이 배였다.
소각장을 지나 나무숲을 벗어나는 길은 삼십여초정도의 거리에 불과했으나 형민은 오늘따라 왠지 그 길이 무척이나 길어 보였다.
“형씨!”
남자의 말소리에 막 남자를 지나쳐 약간 안심이 되려던 형민의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나 말인가?”
기세에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형민은 말을 놓았다.
“그래, 당신 말이야. 혹시......”
“혹시? 혹시 뭐?”
“불 좀 있나?”
형민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불이라....난 담배 안 펴.”
“그렇군. 오래 살겠어...아주..오래..”
남자의 말이 점점 바닥에 깔렸다.
남자가 기대었던 나무에서 몸을 떼었다.
“뭐지?”
“오래 살고 싶어 담배도 안피는 모양인데....아무래도 그 소원은 이루지 못할 것 같네.”
“당신 뭐야? 뭘 원하는 거야?”
형민은 본능적으로 품 속의 칼을 꺼냈다.
그리고 나이프의 날을 폈다.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나이프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호의 입가에 비웃음이 자리 잡았다.
“최회장이 보낸것인가? 아니지, 그 고상한 최회장의 부인인가?”
영호는 가만히 형민을 응시했다.
참 비열하고 못생긴 얼굴이었다.
영호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웃음을 짓자 형민은 더욱 마음이 떨려왔다.
“음... 언젠가는 이럴줄 알았지만....알았소. 손을 떼겠소.”
형민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영호를 향해 다가왔다.
“나도 이제 그만 두려던 참이었소,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이 번쩍 들리면서 영호의 얼굴을 그어오는 나이프의 날이 어둠속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충분히 자를수 있는 거리였는데...’
형민은 자신의 손이 허공을 가름에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으나 손목에 가해 오는 강한 충격이 나이프를 놓치고 말았다.
나이프가 길 한가운데에 작은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뒷머리를 땡기는 느낌이 들면서 무릎 뒤쪽에 강한 충격을 받고 고개를 치켜 든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꿇었다.
영호는 손에 움켜쥔 형민의 머리채를 강하게 잡아당기면서 형민의 한쪽 팔을 뒤로 꺽었다.
“아악..그만..그만...미안하게 됬소. 정말 이젠...이젠 그만 두겠소.”
형민은 상대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둠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만둔다라.....그만둔다라...... 쉬워서 좋군. 그만 두면 끝이라는 생각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절대...절대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당연히...”
영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형민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손과 팔을 꺽은 손을 놓아 주었다.
“다시는 접근도 접촉도 하지 마라..”
칼을 쥐었다가 맞은 손목이 시큰거리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손목을 문지르던 형민의 눈이 독사처럼 빛났다.
어느 순간 형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놓아지면서 뒤쪽을 향해 몸이 돌아갔다.
그리고 접혀진 팔의 가운데 뽀족한 팔꿈치가 영호의 머리쪽을 향해 날아갔다.
영호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면서 팔이 올라갔다.
그리고 형민의 팔꿈치 위쪽을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오른쪽 팔을 들어 형민의 손목을 역수로 잡아갔다.
팔꿈치 위쪽을 막아 공격을 막아낸 영호의 왼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와 팔꿈치를 덮었고 그 순간 손목을 잡은 오른손이 형민의 손목 안쪽을 툭 쳤다.
그리 강하지도 않아 보이는 영호의 작은 몸짓에 형민의 팔이 접히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접혔다.
“아악....”
형민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처절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땅에 주저 앉았다.
삶을 살아오면서 온갖 사기와 도둑질, 그리고 강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 다치기도 했지만 이런 고통과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과 오범의 자랑스러운 딱지는 형민을 어느 정도 스스로를 상당한 위치의 악당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지만 이 한순간에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형민이었다.
이가 딱딱 부딫치도록 온 몸을 엄습하는 고통에 형민은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
“아픈가?”
형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영호의 손이 형민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엄청난 힘이 형민의 얼굴을 우그러트렸다.
형민의 얼굴이 고통 속에서도 느껴지는 수치심에 우그러진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벌레 같은 놈.”
영호의 손이 형민의 뺨을 때렸다.
단지 손바닥으로 때린 것에 불과했지만 형민의 상체가 땅바닥에 강하게 부딫혔다.
영호가 일어나 형민의 얼굴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지긋이 발을 눌렀다.
“아....악....제발...”
이가 부러져 피가 입가로 흘러나왔고 그 피가 영호의 발에 의해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죽고 싶으면 또 덤벼라..그리고 앞으로 그녀 근처에 얼쩡거리기라도 하면 마져 사지를 부러뜨려 주마.”
영호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손과 몸을 툭툭 털고 자리를 떠났다.
형민은 몸서리쳐지도록 강한 고통에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 후에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린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형적으로 비틀어진 팔이 덜렁거렸다.
팔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형민이 그 팔을 다른 팔로 잡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소각장쪽으로 다시 걸어가는 형민의 쭉 찟어진 눈에서는 공포와 독기가 번갈아 가면서 비쳐졌다.
열한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묵직한 종이 울리자 유희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리고 온 몸을 감싸는 빨간 스타킹만을 입었다.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을 칠했다.
거울을 보면서 립스틱을 칠하는 유희의 손이 떨렸다.
쇼파에 앉아 유희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무 표정 없이 인형처럼 유희는 그렇게 앉아있었다.
열두시를 알리는 종이 열두번을 쳤다. 그리고 한시를 알리는 종이 칠때까지 유희는 그 모습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두시, 세시.....
네 번의 종이 치자 유희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섯 번의 종이 치자 유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빨간 스타킹을 벗었다.
장롱에서 평소 있던 속옷을 꺼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유희는 속옷을 입고 그리고 가운을 둘렀다.
침대에 몸을 뉘인 유희는 잠이 오지 않았다.
한시간여를 뒤척인 유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탄 후 거실로 나가 베란다로 나갔다.
어느새 검게 어두웠던 하늘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지만 유희는 몸도, 그리고 마음도 무척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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