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남매 -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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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
“야! 너 거기 안 서?”
난장판이 된 교실 안에서 찬성은 묵묵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약간 짜증이 나 있다. 이제 고등학교 생활에 좀 적응이 된 녀석들이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는 데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다. 찬성은 처음 입학하던 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강남에 입성했다고 내심 위축되고 쫄았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찬성에게 말을 걸어왔다.
“공부 잘 되니?”
찬성이 책에서 눈을 떼고 보니 날씬한 여학생 하나가 자신을 보고 있다.
‘유성희.’
170이 조금 넘을까?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고양이처럼 암팡지며 섹시한 여자애다. 항상 곁에 추종자가 붙어다니고 전용 운전기사가 등하교를 시켜주는 재벌 2세. 뭐 아빠가 한국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대그룹의 주인이라나?
하여간 성희는 지금 찬성의 반에 존재하는 3명의 학교 명물 중 하나이다.
한 명은 담임선생. 명문대학교 출신에 탤런트 뺨치는 외모로 학교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0순위에 드는 이 학교 교사들의 자랑이다.
그리고 유성희를 뺀 다른 한 명은 바로 찬성이다.
찬성이 학교명물로 꼽힌 이유는 모의고사 때문이었는데 고교 첫 모의시험 결과가 나오던 날 학교가 찬성으로 인해 발칵 뒤집혀졌다. 모의시험에서 찬성이 전 과목 100점을 맞았던 것이다.
전 과목 만점자가 전국에서 2명이란 사실로 인해 약간 영광은 희석되었지만 다른 한 명이 한국 특목고 중 최고를 자랑하는 대성외고 수석 입학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찬성의 모의고사 만점은 학교가 생긴 이래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찬성이 다니는 양지고등학교는 특목고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였던 것이다.
담임은 말 할 것도 없이 기뻐했고 몇 번이나 찬성을 따로 불러 밥이나 간식을 사주었다. 그러면서 담임 스스로 말했다. 자신이 교사 생활을 한 3년 동안 학생을 편애해 본 적이 없었는데 찬성만은 예외라며 찬성에게 분에 넘치는 애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
찬성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으로 묻자 성희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수업 끝나고 시간 좀 내라.”
성희의 강압적인 말투에 찬성은 울컥, 마음속에서 반발심이 생긴다.
‘지가 재벌집 딸이면 다야?’
뭐라 한 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찬성은 참고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라. 나 따로 시간 내기 힘들어.”
“잠깐이면 돼.”
잠깐이라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다.
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희가 빙그레 웃으며 물러난다.
그 모습을 학생들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접근하기 쉽지 않은 상대들이다.
성희는 예쁘고 날씬하지만 고양이 같은 얼굴 상호에 앙칼진 성격이라 남자애들이 감히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하기 어려웠고 찬성 또한 반에서 여학생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지만 다른 여자애들이 접근하지 못했다. 모의고사 결과가 난 뒤 찬성이 보통 수재가 아니란 걸 알았고 또 찬성은 쉬는 시간에도 시간을 아껴가며 항상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두 명물 중 여자 쪽에서 먼저 남자에게 말을 건 것이다.
수업이 모두 끝났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지만 찬성은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찬성!”
성희가 부르자 그제야 찬성은 책에서 눈을 떼고 소리나는 곳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
텅 빈 교실안에 성희와 평소 그림자처럼 성희를 따르던 여학생 둘이 서 있었다.
찬성은 책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걸음을 옮겨 성희 앞에 서자 성희가 입을 열었다.
“따라 와.”
고압적인 자세로 말하며 돌아서는 성희의 뒷모습을 보자 찬성은 상대도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찬성은 꾹 참고 성희의 뒤를 따랐다.
교실을 벗어난 성희가 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러갔다. 찬성과 두 추종자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성희는 운동장 구석에 세워진 승용차로 갔다. 한 눈에 봐도 고급 외제차란 걸 알 수 있었는데 그 차 운전석에서 한 중년사내가 내리더니 성희에게 굽신거리며 인사를 한다.
“아가씨. 수업 끝났죠? 집으로 모실 까요?”
“됐어요. 아저씨는 잠시 비켜서고 너희들도 오늘은 그만 집에 가봐라.”
두 추종자에게 성희가 말하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보자.”
그러나 찬성과 성희를 번갈아가며 흘낏 거리는 둘의 얼굴엔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할까?”
성희가 묻자 찬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시간 없어. 그냥 여기서 해.”
찬성이 사무적으로 말하자 성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얼굴을 펴고 성희가 말했다.
“그럼 차안에 들어가서 하자.”
성희가 차의 뒷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자 찬성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 뒷좌석에 같이 앉았다.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자 성희가 제지한다.
“아저씬 내가 부르기 전까지 들어오지 마요.”
“예 아가씨.”
차에 두 사람만 남자 찬성이 물었다.
“할 말이 뭐니?”
그러자 성희가 찬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
성희가 말없이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자 찬성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조용히 성희의 입을 주시했다.
찬성이 말없이 기다리자 성희는 어쩔 수 없는지 입을 열기 시작한다.
“찬성이 너 사귀는 여자 있어?”
“내가 그걸 너에게 말해야하니?”
“너 왜 그렇게 딱딱거리냐? 같은 반 친구끼리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돼?”
성희가 눈을 치켜뜨며 말하자 찬성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법 예쁜 얼굴이다. 찬성은 이렇게 고양이처럼 암팡지게 생긴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매력이 있는 타잎인 것 만은 분명하다.
“여자 친구 없어.”
찬성의 말에 성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보아하니 과외도 받지 않는 것 같은데 혼자 공부해서 그 정도 성적을 내려면 여자 같은 건 사귈 시간도 없겠지.”
‘뭐야. 이 녀석? 내 뒷조사까지 다 한 거야?’
찬성은 놀라 성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성희가 찬성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너 나랑 사귀지 않을래?”
순간 찬성이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럴 생각 없어.”
성희의 얼굴이 굳어진다.
“여태까지 한 번도 남자새끼한테 데이트 신청한 적 없는데 처음 신청에 거절이라니...... 자존심 졸라 상하는데?”
성희가 찬성을 노려보며 말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안 하나 할까?”
“......?”
“나하고 사귀면 내가 돈을 줄게. 한 달에 백만원씩. 어때? 그 돈으로 과외를 받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테니 그 시간 동안 나와 사귀는 거야. 괜찮은 조건이지 않니?”
“허허.”
찬성은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너 같은 멍청이는 트럭으로 실어다 줘도 사양할란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런 바보를 상대로 다투는 것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찬성은 마음을 바꿨다.
“네 제안은 고마운데 어쩌지?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싫어?”
성희의 얼굴이 흔들린다.
“응. 난 대학 들어갈 때까지 여자랑 사귈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런 일에 시간 뺏기는 것도 싫고 또 여자에게 전혀 흥미도 없거든. 그러니까 단념하고 다른 남학생이나 찾아 봐.”
순간 성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내가 남자가 없어서 너에게 이러는 줄 알아?”
“아! 미안하다. 내가 말을 실수했나보다. 그럼 나 이만 가 볼게.”
찬성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성희가 뒤따라 나오며 소리친다.
“야. 나 할 말 아직 안 끝났어.”
“뭐야? 할 말 있으면 여기서 다 해.”
찬성도 이젠 참을 만큼 참아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막 성희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한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찬성. 유성희.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니?”
찬성이 돌아보니 담임선생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퇴근하는 중에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선생님.”
찬성이 얼른 담임의 곁으로 다가갔다. 담임이 막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성희가 한 걸음 나서며 담임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냥 퇴근하세요.”
성희의 말을 듣고 담임의 얼굴이 변한다. 찬성도 담임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성희가 이렇게 담임에게까지 대놓고 막말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담임이 성희를 쏘아보자 성희도 지지 않고 담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찬성은 놀랐다. 감히 선생님에게 이처럼 무례하게 대하다니...... 자신은 몇 번이고 생각해도 성희 같은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담임이 할 말을 잊은 듯 잠시 숨을 고르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긴 학교야. 그리고 너흰 내가 담임을 맡은 학생들이고. 난 충분히 너희들에게 묻고 들을 권리와 책임이 있어.”
담임의 얼굴과 입에서 나오는 말의 어조로 찬성은 그녀가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성희는 담임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녀석은 알고도 모르는 척 흔연스러운 표정으로 담임에게 말하고 있다.
“어머?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학생들의 사생활까지 참견할 건가요? 지금 우리 둘은 사적인 얘길 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 그만 가 보시라구요.”
성희가 빤히 담임을 쳐다보며 말하자 담임은 한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얼굴만 붉히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찬성이 보건데 담임은 아마도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 같았다.
담임의 붉어진 얼굴을 보다 찬성은 갑자기 성희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응?”
찬성이 부르자 담임이 찬성에게로 눈을 돌린다.
“저 성희하고 볼 일 다 봤어요. 그만 갈 건데 선생님도 저랑 같이 가시죠?”
“으응. 그럴까?”
담임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찬성은 먼저 교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담임이 성희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다 찬성의 뒤를 따랐다.
성희가 찬성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찬성! 너 그럴 거야?”
뒤돌아보지 않아도 성희의 화난 얼굴을 느낄 수 있었지만 찬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담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학교를 빠져나왔다.
“집에 갈 거야?”
담임의 말에 찬성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
아직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얼굴에 붉은 기운이 어려 있다.
“예. 선생임은요?”
“선생님도 집에 가야지. 참. 너 저번에 선생님이 책 빌려주기로 한 거 있었지?”
“예.”
“책이 집에 있는데 잠깐 들렀다 갈래?”
“선생님 집에요?”
“응.”
“선생님 집 여기서 가까워요?”
“응. 걸어서 5분 정도면 돼.”
“그러면 잠시만 들렀다 갈게요.”
“그래.”
담임이 기쁜 듯 얼굴에 웃음을 가득 떠올린다.
잠시 후 찬성은 담임과 함께 그녀가 사는 원룸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담임이 찬성을 침대에 앉히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 선생님 좀 씻고 나올게.”
“예.”
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담임은 한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 남은 찬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
방이 하나였지만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거실과 침대, 책상과 옷장, 그리고 기다란 소파까지.
찬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책을 발견하고 찬성은 책을 뽑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치며 읽어 내려갔다.
달칵-
욕실의 문이 열리며 담임이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찬성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볼 만해?”
바로 옆에서 담임의 음성이 들리며 콧속으로 엷은 향수냄새가 들어왔다.
찬성은 담임에게 시선을 돌렸다.
‘......!’
욕실에서 마술을 부리고 왔을까? 담임의 얼굴이 들어가기 전과 확 달라져 있었다.
학교에서 같이 올 때만 해도 성희와의 일로 마음이 상해서인지 담임의 얼굴은 기색이 나빴다. 한데 지금 그녀의 얼굴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얼굴을 씻고 가볍게 화장을 했는지 살결은 투명했고 그렇지 않아도 선명한 이목구비는 더욱 뚜렷해 찬성의 시선을 사정없이 잡아끌고 있었다.
찬성이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담임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보니?”
“아, 아닙니다.”
찬성이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담임이 집요하게 묻는다.
“뭐야? 너도 선생님을 무시하는 거니?”
“예?”
“너도 성희처럼 선생님을 무시해? 그래서 묻는 말에 대답을 않는 거야?”
“아, 그것이 아닌데.”
찬성이 당황해 고개를 숙이자 담임이 짓궂은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한다.
“뭔데. 선생님 궁금하니까 말해봐. 왜 그렇게 선생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
찬성은 담임이 바라고 있는 대답을 해 줘야 일이 해결될 것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너무 예뻐서요.”
“정말?”
기대하던 대답을 찬성에게서 듣자 담임은 활짝 웃으며 되묻는다.
“예.”
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담임은 갑자기 손을 뻗어 찬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호. 귀여워.”
담임이 더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은 탓인지 향수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겨나왔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찬성은 갑자기 하복부에서 발끈, 뭔가가 치밀어 오르며 자지가 단단하게 섰다.
담임은 서 있는 상태고 찬성은 의자에 앉아 있다. 찬성이 눈을 드니 담임의 가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
크고 성숙한 여자의 가슴이다.
욕실에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는지 담임은 약간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찬성의 머리를 쓰다듬느라 손을 뻗은 상태여서 옷 사이로 가슴의 굴곡진 부분이 찬성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노출된 하얀 브래지어와 가슴 윗부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찬성이 담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수냄새를 맡고 있을 때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찬성의 손을 잡았다.
“이리와.”
담임은 찬성을 끌고 침대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에서 담임이 찬성의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찬성이 넌 선생님께 말해 줄 거지?”
“뭘요?”
“조금 전 성희랑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담임의 말을 듣고 찬성은 그녀가 조금 전 성희에게 받은 충격이 의외로 컸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제자에게 그런 무시를 당했으니......
찬성은 밝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말씀 드리죠. 별 일도 아닌데요.”
“대체 무슨 일이야? 선생님 궁금해 죽겠어.”
“오늘 성희가 제게 말을 걸어왔어요. 전 평소에 그 애 뿐 아니라 누구하고도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그 애가 수업 끝나고 할 말이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담임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있게 듣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찬성은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참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성희가 가자는 대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조금 전 선생님이 보신 그 차 앞이에요. 거기서 성희가 저에게 그랬어요. 자기랑 사귀자구요.”
“사귀자구? 그 애가 먼저, 찬성이 너에게?”
“예.”
“그래서? 넌 뭐라 그랬니?”
“당연히 싫다고 그랬죠.”
찬성이 잘라 말하자 담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그래서 성희가 꽤 화났겠구나.”
“뭐. 그러든지 말든지 저는 그 애한테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정 사귀고 싶으면 다른 남잘 알아보라고 그러고 나는 집으로 가려는 참이었는데 선생님이 오신 거죠.”
“정말 별 거 아니네.”
담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선생님. 아까 성희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하셨죠?”
“응. 사실 내 교사 경험이 짧기도 했지만 조금 전처럼 황당한 경험을 한 것도 처음이야. 제자에게 그런 무시를 당하다니. 더구나 찬성이 네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찬성은 담임의 얼굴을 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미 그녀의 해맑은 얼굴엔 조금 전 받은 충격의 그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찬성은 담임의 얼굴을 보면서 이 여자가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문 Y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요즘 가장 뜨는 직업인 교사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얼굴과 몸매가 최상급이어서만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자기를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그에 맞는 헤어스타일, 어떻게 관리하는지 모르지만 항상 빛이 나는 피부에 옷도 세련되게 입을 줄 알았고 거기에 성격 또한 긍정적이면서도 중용을 잘 지켜 한 쪽으로 치우침이 별로 없었다. 한 마디로 결격사유가 없는 전인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괜히 저 때문에 선생님이 그러신 것 같아 죄송해요.”
찬성이 성희 대신 사과하는 마음으로 말하자 담임이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 찬성의 뺨을 만졌다.
“이렇게 순진하긴. 왜 네가 미안하니?”
“그냥.”
“후우. 어쩌면 똑같은 학생인데 사람마다 다른지 몰라. 어떤 애는 그토록 착실하고 순수한가 하면, 어떤 녀석은 어른 뺨치게 교활하고 되바라진 것을 보면 말이야. 나 교사 생활 이제 3년이지만 어떨 땐 이 직업을 내가 잘못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담임이 찬성의 뺨에 손을 떼지 않고 말하는데 찬성은 약간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담임이 착하고 순수한 애는 자신을 빗대어 말하는 것 같은데 자기는 벌써 중학교 1학년 때 은지라는 애와 섹스도 경험했고 날마다 동생의 가슴과 보지를 만지며 자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실을 담임이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담임이 손을 떼며 말한다.
“찬성이 너하고 계속 3학년까지 갔으면 좋겠다.”
“네?”
“3년 동안 네 담임을 계속 했으면 좋겠어. 너 이대로 공부 열심히 하면 3학년 마칠 때 틀림없이 좋은 대학엘 갈 텐데 그 걸 내가 곁에서 꼭 보고 싶어.”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찬성이 웃으며 말하자 담임이 찬성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뭐 마실 것이라도 줘야하는데 선생님이 깜박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우리집에 처음 온 손님인데.”
“제가 여기 처음 온 거예요?”
“응. 선생님 고향은 시골이거든? 여기 학교에 부임하고 원룸에 입주했는데 한 번도 다른 사람 들인 적 없어. 내가 그런 데 조금 민감하거든.”
“그럼 전......”
“그만큼 찬성이 넌 내게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선생님 실망시키지 말고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 불량스런 친구는 아예 사귀지도 말고.”
담임이 직접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성희하고 사귀지 마라는 뜻인 것 같아 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친구 사귈 시간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요. 친구는 대학에 가서나 사귈 생각이고 지금은 책과 친구할 거예요.”
“그래.”
담임이 기분 좋은 듯 활짝 웃으며 말한다.
“오늘 선생님이랑 같이 저녁 먹을까?”
찬성이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야 해요.”
“왜?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습니다. 저녁은 꼭 집에서 먹어야 할 사정이 있어서요.”
찬성은 공손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 딱 한 번 담임이 찬성에게 저녁을 사준 적이 있었다. 그때 맛있게 저녁을 먹고 들어간 찬성은 동생 찬주가 그때까지 저녁을 먹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심결에 담임과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고 말해버린 찬성은 그때 찬주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혼자서 저녁을 먹는 동생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지만 이미 가득 찬 배속에 또 음식을 집어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날 밤 공부를 마치고 찬성은 찬주 곁에 누워 항상 해 오던 대로 동생의 가슴을 만지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동생이 몸을 반대로 홱 틀며 찬성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무안해진 찬성은 더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동생의 행동이 신경쓰여 한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일어난 찬성은 전 날 밤 찬주의 행동으로 미루어 동생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고 찬주에게 다시는 담임과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생의 얼굴이 풀어졌고 그날 밤부터는 예전으로 돌아가 오빠에게 자신의 가슴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 뒤로 담임에게 간식 같은 것은 얻어먹은 적이 있었지만 저녁은 같이 하지 않았다.
찬성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담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선생님 기분이 그래서 찬성이 너와 저녁 같이 먹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다음에 기회 봐서 하자.”
“예. 전 이만 돌아가 봐야할 것 같아요.”
“그래. 선생님이 네 시간 너무 뺏었다.”
“감사합니다. 이 책은 읽고 곧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다른 책도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학교 시간이 아니더라도 좋아. 선생님 집으로 이렇게 와도 괜찮으니까.”
“예 선생님.”
찬성이 공손하게 절하고 원룸을 나왔다.
막 길가로 걸어가려는데 한쪽에서 누군가 찬성을 불렀다.
“김찬성!”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무척 귀에 익었는데 바로 성희의 것이었다.
‘뭐야?’
찬성이 짜증난 얼굴로 돌아보니 짐작대로 성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학교에서 본 외제차가 서 있었다.
“이리 와!”
성희가 자신을 부르자 찬성은 더 이상 자제심을 잃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하면 네가 와라.”
찬성이 곧이라도 갈 듯한 자세를 취하자 성희가 다급했는지 황급히 찬성이 있는 쪽으로 뛰어온다.
“뭐야 너? 여기까지 쫓아 온 거니?”
찬성이 불쾌한 표정으로 묻자 성희가 찬성의 얼굴을 노려보며 되묻는다.
“너 왜 그렇게 오래 있다 나왔어? 너 담임하고 사귀냐?”
찬성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허허. 너 미쳤냐?”
“그럼 들어간 지가 언젠데 이렇게 늦게 나오는 거야?”
“내가 늦게 나오든 말든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흥. 상관이 있을 걸? 내일 너하고 담임하고 사귄다고 학교 전체에 소문나면 좋겠니? 그렇게 해 줄까?”
“뭐야? 너 정말 못됐구나. 진작부터 선생님께 빌릴 책이 있었는데 오늘 만난 김에 책 빌린 거뿐이다. 그리고 네가 선생님께 했던 싸가지 없는 행동도 내가 대신 사과했고 선생님이 음료수를 준비해줘서 마시고 나왔다. 됐냐?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너에게 이런 해명까지 해야 하지?”
찬성이 책을 성희 앞으로 내밀며 소리치자 성희는 그제야 화가 약간 풀린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너랑 담임이랑 같이 집으로 가는데 궁금해서 따라와 봤다. 그러다 한참을 기다려도 네가 나오지 않으니까 이상한 생각이 든 거야. 하여튼 너 나랑 사귀는 거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시간 많이 뺏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아까 말 했잖아? 난 다른 여잘 사귈 시간이 없다니까? 정 네가 나랑 사귀고 싶으면 3년 기다려라. 대학 가서 생각해 볼 테니까.”
“난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성희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찬성은 어이가 없었다. 상대가 싫다는 데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애는 난생 처음이다.
“집에 가서 공부해야 해. 그만 간다.”
찬성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떼자 성희가 얼른 다가와 찬성의 팔을 붙잡았다.
“내 차에 타. 집에까지 바래다줄게.”
“싫어.”
“그러지 말고 타라. 너 시간 뺏기는 거 싫어하면서. 내가 바래다주면 시간 절약하고 좋잖아?”
“걸어가도 10분이야. 괜찮으니까 너도 집에 가라. 이만 간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찬성이 성희의 팔을 뿌리치고 집을 향해 걷자 뒤에서 성희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결국엔 나랑 사귀게 될 거야. 괜히 힘 빼지 말고 포기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자 찬주가 문을 열어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응. 일이 좀 있었어.”
찬성의 얼굴에서 짜증을 읽은 찬주가 묻는다.
“저녁 먹고 왔어?”
“아니. 너랑 먹어야지.”
“응. 조금만 기다려.”
찬성이 씻고 나오자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남매는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찬주가 오빠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반에 또라이 같은 녀석이 하나 있어서 사람 귀찮게 한다.”
“어떤 애야? 남자?”
“아니, 여자.”
“왜?”
여자라니까 찬주의 얼굴색이 변한다.
“응. 오늘 책 보고 있는데 수업 끝나고 할 말이 있다면서 만나자고 하더라?”
“그래서?”
“같은 반 애라서 거절하는 것도 그렇고...... 만났지. 그런데 그 녀석이 나하고 사귀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싫다고 했지. 그랬더니 저하고 사귀면 돈까지 주겠다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짜증만 치밀어 오르는데 미치겠더라. 하여튼 그 또라이 같은 녀석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찬주가 오빠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내가 한 번 만나볼까?”
찬성이 놀라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야. 너 절대로 그러지 마. 그 녀석 재벌집 딸이란다. 뭐 재계 서열 5위안에 드는 막강한 집이라는데 괜히 잘못 건드렸다 우리만 큰 피핼 보니까 넌 절대 나서지 마. 알았지?”
찬성이 다짐하듯 말하자 찬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응.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빨 괴롭히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찬주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찬성은 자신이 괜히 동생에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냥 늦게 집에 온 것을 해명하려 한 것인데 동생의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오빠가 알아서 해.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오빤 너에게 이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 말 못한다.”
“알았어.”
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에 열중하자 찬성도 그제야 마음을 편하게 갖고 밥을 먹었다.
........................
글을 자주 올려달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 짬을 내서 올리기 때문에 2~3일에 한 번 정도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 글을 올릴 때 너무 열심히 쓰다 하마터면 직장에서 잘릴 뻔한 일도 있었고...
비망초 님은 정확하게 짚어주셨군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해 전의 글보다 집중력도 떨어지고 만족도가 덜 하네요.
양해하시고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야! 너 거기 안 서?”
난장판이 된 교실 안에서 찬성은 묵묵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약간 짜증이 나 있다. 이제 고등학교 생활에 좀 적응이 된 녀석들이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는 데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다. 찬성은 처음 입학하던 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강남에 입성했다고 내심 위축되고 쫄았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찬성에게 말을 걸어왔다.
“공부 잘 되니?”
찬성이 책에서 눈을 떼고 보니 날씬한 여학생 하나가 자신을 보고 있다.
‘유성희.’
170이 조금 넘을까?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고양이처럼 암팡지며 섹시한 여자애다. 항상 곁에 추종자가 붙어다니고 전용 운전기사가 등하교를 시켜주는 재벌 2세. 뭐 아빠가 한국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대그룹의 주인이라나?
하여간 성희는 지금 찬성의 반에 존재하는 3명의 학교 명물 중 하나이다.
한 명은 담임선생. 명문대학교 출신에 탤런트 뺨치는 외모로 학교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0순위에 드는 이 학교 교사들의 자랑이다.
그리고 유성희를 뺀 다른 한 명은 바로 찬성이다.
찬성이 학교명물로 꼽힌 이유는 모의고사 때문이었는데 고교 첫 모의시험 결과가 나오던 날 학교가 찬성으로 인해 발칵 뒤집혀졌다. 모의시험에서 찬성이 전 과목 100점을 맞았던 것이다.
전 과목 만점자가 전국에서 2명이란 사실로 인해 약간 영광은 희석되었지만 다른 한 명이 한국 특목고 중 최고를 자랑하는 대성외고 수석 입학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찬성의 모의고사 만점은 학교가 생긴 이래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찬성이 다니는 양지고등학교는 특목고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였던 것이다.
담임은 말 할 것도 없이 기뻐했고 몇 번이나 찬성을 따로 불러 밥이나 간식을 사주었다. 그러면서 담임 스스로 말했다. 자신이 교사 생활을 한 3년 동안 학생을 편애해 본 적이 없었는데 찬성만은 예외라며 찬성에게 분에 넘치는 애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
찬성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으로 묻자 성희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수업 끝나고 시간 좀 내라.”
성희의 강압적인 말투에 찬성은 울컥, 마음속에서 반발심이 생긴다.
‘지가 재벌집 딸이면 다야?’
뭐라 한 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찬성은 참고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라. 나 따로 시간 내기 힘들어.”
“잠깐이면 돼.”
잠깐이라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다.
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희가 빙그레 웃으며 물러난다.
그 모습을 학생들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접근하기 쉽지 않은 상대들이다.
성희는 예쁘고 날씬하지만 고양이 같은 얼굴 상호에 앙칼진 성격이라 남자애들이 감히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하기 어려웠고 찬성 또한 반에서 여학생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지만 다른 여자애들이 접근하지 못했다. 모의고사 결과가 난 뒤 찬성이 보통 수재가 아니란 걸 알았고 또 찬성은 쉬는 시간에도 시간을 아껴가며 항상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두 명물 중 여자 쪽에서 먼저 남자에게 말을 건 것이다.
수업이 모두 끝났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지만 찬성은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찬성!”
성희가 부르자 그제야 찬성은 책에서 눈을 떼고 소리나는 곳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
텅 빈 교실안에 성희와 평소 그림자처럼 성희를 따르던 여학생 둘이 서 있었다.
찬성은 책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걸음을 옮겨 성희 앞에 서자 성희가 입을 열었다.
“따라 와.”
고압적인 자세로 말하며 돌아서는 성희의 뒷모습을 보자 찬성은 상대도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찬성은 꾹 참고 성희의 뒤를 따랐다.
교실을 벗어난 성희가 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러갔다. 찬성과 두 추종자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성희는 운동장 구석에 세워진 승용차로 갔다. 한 눈에 봐도 고급 외제차란 걸 알 수 있었는데 그 차 운전석에서 한 중년사내가 내리더니 성희에게 굽신거리며 인사를 한다.
“아가씨. 수업 끝났죠? 집으로 모실 까요?”
“됐어요. 아저씨는 잠시 비켜서고 너희들도 오늘은 그만 집에 가봐라.”
두 추종자에게 성희가 말하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보자.”
그러나 찬성과 성희를 번갈아가며 흘낏 거리는 둘의 얼굴엔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할까?”
성희가 묻자 찬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시간 없어. 그냥 여기서 해.”
찬성이 사무적으로 말하자 성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얼굴을 펴고 성희가 말했다.
“그럼 차안에 들어가서 하자.”
성희가 차의 뒷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자 찬성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 뒷좌석에 같이 앉았다.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자 성희가 제지한다.
“아저씬 내가 부르기 전까지 들어오지 마요.”
“예 아가씨.”
차에 두 사람만 남자 찬성이 물었다.
“할 말이 뭐니?”
그러자 성희가 찬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
성희가 말없이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자 찬성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조용히 성희의 입을 주시했다.
찬성이 말없이 기다리자 성희는 어쩔 수 없는지 입을 열기 시작한다.
“찬성이 너 사귀는 여자 있어?”
“내가 그걸 너에게 말해야하니?”
“너 왜 그렇게 딱딱거리냐? 같은 반 친구끼리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돼?”
성희가 눈을 치켜뜨며 말하자 찬성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법 예쁜 얼굴이다. 찬성은 이렇게 고양이처럼 암팡지게 생긴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매력이 있는 타잎인 것 만은 분명하다.
“여자 친구 없어.”
찬성의 말에 성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보아하니 과외도 받지 않는 것 같은데 혼자 공부해서 그 정도 성적을 내려면 여자 같은 건 사귈 시간도 없겠지.”
‘뭐야. 이 녀석? 내 뒷조사까지 다 한 거야?’
찬성은 놀라 성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성희가 찬성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너 나랑 사귀지 않을래?”
순간 찬성이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럴 생각 없어.”
성희의 얼굴이 굳어진다.
“여태까지 한 번도 남자새끼한테 데이트 신청한 적 없는데 처음 신청에 거절이라니...... 자존심 졸라 상하는데?”
성희가 찬성을 노려보며 말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안 하나 할까?”
“......?”
“나하고 사귀면 내가 돈을 줄게. 한 달에 백만원씩. 어때? 그 돈으로 과외를 받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테니 그 시간 동안 나와 사귀는 거야. 괜찮은 조건이지 않니?”
“허허.”
찬성은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너 같은 멍청이는 트럭으로 실어다 줘도 사양할란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런 바보를 상대로 다투는 것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찬성은 마음을 바꿨다.
“네 제안은 고마운데 어쩌지?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싫어?”
성희의 얼굴이 흔들린다.
“응. 난 대학 들어갈 때까지 여자랑 사귈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런 일에 시간 뺏기는 것도 싫고 또 여자에게 전혀 흥미도 없거든. 그러니까 단념하고 다른 남학생이나 찾아 봐.”
순간 성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내가 남자가 없어서 너에게 이러는 줄 알아?”
“아! 미안하다. 내가 말을 실수했나보다. 그럼 나 이만 가 볼게.”
찬성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성희가 뒤따라 나오며 소리친다.
“야. 나 할 말 아직 안 끝났어.”
“뭐야? 할 말 있으면 여기서 다 해.”
찬성도 이젠 참을 만큼 참아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막 성희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한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찬성. 유성희.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니?”
찬성이 돌아보니 담임선생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퇴근하는 중에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선생님.”
찬성이 얼른 담임의 곁으로 다가갔다. 담임이 막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성희가 한 걸음 나서며 담임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냥 퇴근하세요.”
성희의 말을 듣고 담임의 얼굴이 변한다. 찬성도 담임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성희가 이렇게 담임에게까지 대놓고 막말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담임이 성희를 쏘아보자 성희도 지지 않고 담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찬성은 놀랐다. 감히 선생님에게 이처럼 무례하게 대하다니...... 자신은 몇 번이고 생각해도 성희 같은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담임이 할 말을 잊은 듯 잠시 숨을 고르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긴 학교야. 그리고 너흰 내가 담임을 맡은 학생들이고. 난 충분히 너희들에게 묻고 들을 권리와 책임이 있어.”
담임의 얼굴과 입에서 나오는 말의 어조로 찬성은 그녀가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성희는 담임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녀석은 알고도 모르는 척 흔연스러운 표정으로 담임에게 말하고 있다.
“어머?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학생들의 사생활까지 참견할 건가요? 지금 우리 둘은 사적인 얘길 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 그만 가 보시라구요.”
성희가 빤히 담임을 쳐다보며 말하자 담임은 한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얼굴만 붉히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찬성이 보건데 담임은 아마도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 같았다.
담임의 붉어진 얼굴을 보다 찬성은 갑자기 성희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응?”
찬성이 부르자 담임이 찬성에게로 눈을 돌린다.
“저 성희하고 볼 일 다 봤어요. 그만 갈 건데 선생님도 저랑 같이 가시죠?”
“으응. 그럴까?”
담임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찬성은 먼저 교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담임이 성희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다 찬성의 뒤를 따랐다.
성희가 찬성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찬성! 너 그럴 거야?”
뒤돌아보지 않아도 성희의 화난 얼굴을 느낄 수 있었지만 찬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담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학교를 빠져나왔다.
“집에 갈 거야?”
담임의 말에 찬성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
아직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얼굴에 붉은 기운이 어려 있다.
“예. 선생임은요?”
“선생님도 집에 가야지. 참. 너 저번에 선생님이 책 빌려주기로 한 거 있었지?”
“예.”
“책이 집에 있는데 잠깐 들렀다 갈래?”
“선생님 집에요?”
“응.”
“선생님 집 여기서 가까워요?”
“응. 걸어서 5분 정도면 돼.”
“그러면 잠시만 들렀다 갈게요.”
“그래.”
담임이 기쁜 듯 얼굴에 웃음을 가득 떠올린다.
잠시 후 찬성은 담임과 함께 그녀가 사는 원룸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담임이 찬성을 침대에 앉히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 선생님 좀 씻고 나올게.”
“예.”
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담임은 한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 남은 찬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
방이 하나였지만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거실과 침대, 책상과 옷장, 그리고 기다란 소파까지.
찬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책을 발견하고 찬성은 책을 뽑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치며 읽어 내려갔다.
달칵-
욕실의 문이 열리며 담임이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찬성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볼 만해?”
바로 옆에서 담임의 음성이 들리며 콧속으로 엷은 향수냄새가 들어왔다.
찬성은 담임에게 시선을 돌렸다.
‘......!’
욕실에서 마술을 부리고 왔을까? 담임의 얼굴이 들어가기 전과 확 달라져 있었다.
학교에서 같이 올 때만 해도 성희와의 일로 마음이 상해서인지 담임의 얼굴은 기색이 나빴다. 한데 지금 그녀의 얼굴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얼굴을 씻고 가볍게 화장을 했는지 살결은 투명했고 그렇지 않아도 선명한 이목구비는 더욱 뚜렷해 찬성의 시선을 사정없이 잡아끌고 있었다.
찬성이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담임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보니?”
“아, 아닙니다.”
찬성이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담임이 집요하게 묻는다.
“뭐야? 너도 선생님을 무시하는 거니?”
“예?”
“너도 성희처럼 선생님을 무시해? 그래서 묻는 말에 대답을 않는 거야?”
“아, 그것이 아닌데.”
찬성이 당황해 고개를 숙이자 담임이 짓궂은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한다.
“뭔데. 선생님 궁금하니까 말해봐. 왜 그렇게 선생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
찬성은 담임이 바라고 있는 대답을 해 줘야 일이 해결될 것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너무 예뻐서요.”
“정말?”
기대하던 대답을 찬성에게서 듣자 담임은 활짝 웃으며 되묻는다.
“예.”
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담임은 갑자기 손을 뻗어 찬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호. 귀여워.”
담임이 더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은 탓인지 향수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겨나왔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찬성은 갑자기 하복부에서 발끈, 뭔가가 치밀어 오르며 자지가 단단하게 섰다.
담임은 서 있는 상태고 찬성은 의자에 앉아 있다. 찬성이 눈을 드니 담임의 가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
크고 성숙한 여자의 가슴이다.
욕실에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는지 담임은 약간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찬성의 머리를 쓰다듬느라 손을 뻗은 상태여서 옷 사이로 가슴의 굴곡진 부분이 찬성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노출된 하얀 브래지어와 가슴 윗부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찬성이 담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수냄새를 맡고 있을 때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찬성의 손을 잡았다.
“이리와.”
담임은 찬성을 끌고 침대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에서 담임이 찬성의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찬성이 넌 선생님께 말해 줄 거지?”
“뭘요?”
“조금 전 성희랑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담임의 말을 듣고 찬성은 그녀가 조금 전 성희에게 받은 충격이 의외로 컸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제자에게 그런 무시를 당했으니......
찬성은 밝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말씀 드리죠. 별 일도 아닌데요.”
“대체 무슨 일이야? 선생님 궁금해 죽겠어.”
“오늘 성희가 제게 말을 걸어왔어요. 전 평소에 그 애 뿐 아니라 누구하고도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그 애가 수업 끝나고 할 말이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담임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있게 듣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찬성은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참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성희가 가자는 대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조금 전 선생님이 보신 그 차 앞이에요. 거기서 성희가 저에게 그랬어요. 자기랑 사귀자구요.”
“사귀자구? 그 애가 먼저, 찬성이 너에게?”
“예.”
“그래서? 넌 뭐라 그랬니?”
“당연히 싫다고 그랬죠.”
찬성이 잘라 말하자 담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그래서 성희가 꽤 화났겠구나.”
“뭐. 그러든지 말든지 저는 그 애한테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정 사귀고 싶으면 다른 남잘 알아보라고 그러고 나는 집으로 가려는 참이었는데 선생님이 오신 거죠.”
“정말 별 거 아니네.”
담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선생님. 아까 성희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하셨죠?”
“응. 사실 내 교사 경험이 짧기도 했지만 조금 전처럼 황당한 경험을 한 것도 처음이야. 제자에게 그런 무시를 당하다니. 더구나 찬성이 네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찬성은 담임의 얼굴을 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미 그녀의 해맑은 얼굴엔 조금 전 받은 충격의 그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찬성은 담임의 얼굴을 보면서 이 여자가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문 Y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요즘 가장 뜨는 직업인 교사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얼굴과 몸매가 최상급이어서만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자기를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그에 맞는 헤어스타일, 어떻게 관리하는지 모르지만 항상 빛이 나는 피부에 옷도 세련되게 입을 줄 알았고 거기에 성격 또한 긍정적이면서도 중용을 잘 지켜 한 쪽으로 치우침이 별로 없었다. 한 마디로 결격사유가 없는 전인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괜히 저 때문에 선생님이 그러신 것 같아 죄송해요.”
찬성이 성희 대신 사과하는 마음으로 말하자 담임이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 찬성의 뺨을 만졌다.
“이렇게 순진하긴. 왜 네가 미안하니?”
“그냥.”
“후우. 어쩌면 똑같은 학생인데 사람마다 다른지 몰라. 어떤 애는 그토록 착실하고 순수한가 하면, 어떤 녀석은 어른 뺨치게 교활하고 되바라진 것을 보면 말이야. 나 교사 생활 이제 3년이지만 어떨 땐 이 직업을 내가 잘못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담임이 찬성의 뺨에 손을 떼지 않고 말하는데 찬성은 약간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담임이 착하고 순수한 애는 자신을 빗대어 말하는 것 같은데 자기는 벌써 중학교 1학년 때 은지라는 애와 섹스도 경험했고 날마다 동생의 가슴과 보지를 만지며 자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실을 담임이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담임이 손을 떼며 말한다.
“찬성이 너하고 계속 3학년까지 갔으면 좋겠다.”
“네?”
“3년 동안 네 담임을 계속 했으면 좋겠어. 너 이대로 공부 열심히 하면 3학년 마칠 때 틀림없이 좋은 대학엘 갈 텐데 그 걸 내가 곁에서 꼭 보고 싶어.”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찬성이 웃으며 말하자 담임이 찬성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뭐 마실 것이라도 줘야하는데 선생님이 깜박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우리집에 처음 온 손님인데.”
“제가 여기 처음 온 거예요?”
“응. 선생님 고향은 시골이거든? 여기 학교에 부임하고 원룸에 입주했는데 한 번도 다른 사람 들인 적 없어. 내가 그런 데 조금 민감하거든.”
“그럼 전......”
“그만큼 찬성이 넌 내게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선생님 실망시키지 말고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 불량스런 친구는 아예 사귀지도 말고.”
담임이 직접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성희하고 사귀지 마라는 뜻인 것 같아 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친구 사귈 시간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요. 친구는 대학에 가서나 사귈 생각이고 지금은 책과 친구할 거예요.”
“그래.”
담임이 기분 좋은 듯 활짝 웃으며 말한다.
“오늘 선생님이랑 같이 저녁 먹을까?”
찬성이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야 해요.”
“왜?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습니다. 저녁은 꼭 집에서 먹어야 할 사정이 있어서요.”
찬성은 공손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 딱 한 번 담임이 찬성에게 저녁을 사준 적이 있었다. 그때 맛있게 저녁을 먹고 들어간 찬성은 동생 찬주가 그때까지 저녁을 먹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심결에 담임과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고 말해버린 찬성은 그때 찬주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혼자서 저녁을 먹는 동생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지만 이미 가득 찬 배속에 또 음식을 집어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날 밤 공부를 마치고 찬성은 찬주 곁에 누워 항상 해 오던 대로 동생의 가슴을 만지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동생이 몸을 반대로 홱 틀며 찬성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무안해진 찬성은 더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동생의 행동이 신경쓰여 한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일어난 찬성은 전 날 밤 찬주의 행동으로 미루어 동생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고 찬주에게 다시는 담임과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생의 얼굴이 풀어졌고 그날 밤부터는 예전으로 돌아가 오빠에게 자신의 가슴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 뒤로 담임에게 간식 같은 것은 얻어먹은 적이 있었지만 저녁은 같이 하지 않았다.
찬성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담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선생님 기분이 그래서 찬성이 너와 저녁 같이 먹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다음에 기회 봐서 하자.”
“예. 전 이만 돌아가 봐야할 것 같아요.”
“그래. 선생님이 네 시간 너무 뺏었다.”
“감사합니다. 이 책은 읽고 곧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다른 책도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학교 시간이 아니더라도 좋아. 선생님 집으로 이렇게 와도 괜찮으니까.”
“예 선생님.”
찬성이 공손하게 절하고 원룸을 나왔다.
막 길가로 걸어가려는데 한쪽에서 누군가 찬성을 불렀다.
“김찬성!”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무척 귀에 익었는데 바로 성희의 것이었다.
‘뭐야?’
찬성이 짜증난 얼굴로 돌아보니 짐작대로 성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학교에서 본 외제차가 서 있었다.
“이리 와!”
성희가 자신을 부르자 찬성은 더 이상 자제심을 잃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하면 네가 와라.”
찬성이 곧이라도 갈 듯한 자세를 취하자 성희가 다급했는지 황급히 찬성이 있는 쪽으로 뛰어온다.
“뭐야 너? 여기까지 쫓아 온 거니?”
찬성이 불쾌한 표정으로 묻자 성희가 찬성의 얼굴을 노려보며 되묻는다.
“너 왜 그렇게 오래 있다 나왔어? 너 담임하고 사귀냐?”
찬성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허허. 너 미쳤냐?”
“그럼 들어간 지가 언젠데 이렇게 늦게 나오는 거야?”
“내가 늦게 나오든 말든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흥. 상관이 있을 걸? 내일 너하고 담임하고 사귄다고 학교 전체에 소문나면 좋겠니? 그렇게 해 줄까?”
“뭐야? 너 정말 못됐구나. 진작부터 선생님께 빌릴 책이 있었는데 오늘 만난 김에 책 빌린 거뿐이다. 그리고 네가 선생님께 했던 싸가지 없는 행동도 내가 대신 사과했고 선생님이 음료수를 준비해줘서 마시고 나왔다. 됐냐?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너에게 이런 해명까지 해야 하지?”
찬성이 책을 성희 앞으로 내밀며 소리치자 성희는 그제야 화가 약간 풀린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너랑 담임이랑 같이 집으로 가는데 궁금해서 따라와 봤다. 그러다 한참을 기다려도 네가 나오지 않으니까 이상한 생각이 든 거야. 하여튼 너 나랑 사귀는 거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시간 많이 뺏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아까 말 했잖아? 난 다른 여잘 사귈 시간이 없다니까? 정 네가 나랑 사귀고 싶으면 3년 기다려라. 대학 가서 생각해 볼 테니까.”
“난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성희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찬성은 어이가 없었다. 상대가 싫다는 데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애는 난생 처음이다.
“집에 가서 공부해야 해. 그만 간다.”
찬성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떼자 성희가 얼른 다가와 찬성의 팔을 붙잡았다.
“내 차에 타. 집에까지 바래다줄게.”
“싫어.”
“그러지 말고 타라. 너 시간 뺏기는 거 싫어하면서. 내가 바래다주면 시간 절약하고 좋잖아?”
“걸어가도 10분이야. 괜찮으니까 너도 집에 가라. 이만 간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찬성이 성희의 팔을 뿌리치고 집을 향해 걷자 뒤에서 성희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결국엔 나랑 사귀게 될 거야. 괜히 힘 빼지 말고 포기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자 찬주가 문을 열어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응. 일이 좀 있었어.”
찬성의 얼굴에서 짜증을 읽은 찬주가 묻는다.
“저녁 먹고 왔어?”
“아니. 너랑 먹어야지.”
“응. 조금만 기다려.”
찬성이 씻고 나오자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남매는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찬주가 오빠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반에 또라이 같은 녀석이 하나 있어서 사람 귀찮게 한다.”
“어떤 애야? 남자?”
“아니, 여자.”
“왜?”
여자라니까 찬주의 얼굴색이 변한다.
“응. 오늘 책 보고 있는데 수업 끝나고 할 말이 있다면서 만나자고 하더라?”
“그래서?”
“같은 반 애라서 거절하는 것도 그렇고...... 만났지. 그런데 그 녀석이 나하고 사귀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싫다고 했지. 그랬더니 저하고 사귀면 돈까지 주겠다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짜증만 치밀어 오르는데 미치겠더라. 하여튼 그 또라이 같은 녀석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찬주가 오빠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내가 한 번 만나볼까?”
찬성이 놀라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야. 너 절대로 그러지 마. 그 녀석 재벌집 딸이란다. 뭐 재계 서열 5위안에 드는 막강한 집이라는데 괜히 잘못 건드렸다 우리만 큰 피핼 보니까 넌 절대 나서지 마. 알았지?”
찬성이 다짐하듯 말하자 찬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응.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빨 괴롭히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찬주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찬성은 자신이 괜히 동생에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냥 늦게 집에 온 것을 해명하려 한 것인데 동생의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오빠가 알아서 해.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오빤 너에게 이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 말 못한다.”
“알았어.”
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에 열중하자 찬성도 그제야 마음을 편하게 갖고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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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자주 올려달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 짬을 내서 올리기 때문에 2~3일에 한 번 정도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 글을 올릴 때 너무 열심히 쓰다 하마터면 직장에서 잘릴 뻔한 일도 있었고...
비망초 님은 정확하게 짚어주셨군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해 전의 글보다 집중력도 떨어지고 만족도가 덜 하네요.
양해하시고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천62 비추천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