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 3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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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제 38 부 : 외로운 오솔길
‘이….이…이형사!..이형사! 누구 없어? 썅……’
문간에서 총을 뽑은 채로 소리를 질러대는 진검사는 팔다리가 후둘둘 떨리고 있었다. 곧 이어 사무실에서 문을 박차고 달려 나오는 이형사와 다른 사람들…..
‘아니….이?, 이?, 이!….검사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피비린 내와 함께 방안의 참혹한 모습을 목도한 이형사 마저 총을 뽑아 들었다. 계속해서 웅성거리는 통에, 복도는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사이, 우왕좌왕 다급하기만 했던 진검사는 도리어 미주의 부친을 살해한 범인이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형사, 얼릉…..범인은 아직 건물 안에 있어. 어서 정문이랑, 이 건물에 드나들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있는대로 다 닫아 걸라구 해. 어서!’
‘네……’
이형사는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정문으로 연락을 날렸다.
‘진검사! 이기 무신 일이야? 응? 대체?’
소리를 냅다 지르며, 다가온 부장검사는 열린 방안의 전경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여자 화장실에서 입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며, 비명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여자들이 보였다.
‘이건 또 뭬이야?’
사람들은 또다시 여자 화장실 쪽으로 우 하며, 몰려 가버렸다. 화장실 바닥에는 날렵한 단도에 피가 흥건한 채로 바닥에 떨구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진검사의 판단으로는 범인이 미주의 부친을 살해하고, 바로 도주하기 전에 범행에 쓰인 도구를 버리기 위해 여자 화장실로 튀어 들어간 것으로 판단 되었다. 그러나, 주변을 살피던 진검사의 눈에 화장실 천장의 베니아 판이 조금 비틀어져 공간이 드러난 것이 눈에 띄고 있었다.
‘저 진검사님,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으며, 언제까지 막아야 하느냐고 정문에서 되려 야단 인데여, 어떡하져? 청사를 지금부터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긴 헌데…..’
‘관둬…..여기까지 치고 들어와서 저 짓거리 하고 발른 자식인데, 어련할라구? 지 도망갈 구석도 챙기질 않고 들어올 리가 있었겠어? 그건 그렇고, 화장실이랑,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 알았지?’
‘자네 나 좀 보세나.’
이 형사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부장검사가 진검사를 불러 세웠다.
‘꾸중 허실꺼면 쫌 나중에 허시져?’
‘아니, 이 사람이 오라면 올 거이지…..’
방으로 따라 들어간 진검사는 부장검사와 마주 앉게 되었다.
‘자네 요즘, 허는 일이 뭔가? 이 일 말고 뭐 따로 알바라도 뛰나? 아님, 아예 때려 치우고 변호사로 나설라고 눈치나 까고 앉았나? 입이 있으면 변명이나 들어보세나. 이기, 이기 뭔 일인지….내 참, 건물에 얌전히 지 발로 찾아 들어간 계집 하나를 잡질 못하고, 눈 벌거이 뜬채루 다가 놓치질 않나? 청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기어 들어와 목줄기 따고 토끼는 새끼들이 없나……참, 기가 막혀서….자네 그러고도 검사라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나 있냐 이 말이야, 내 말은….’
‘부장님 보담야 낫죠. 아니, 그리고, 토끼는 새끼들 이라고 하셨는데, 범인이 어떻게 남자라고 그렇게 단정 지으실 수 있져, 그리구 여러명 인줄 첨부터 알고 계셨나여?’
‘아니,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깐?’
‘선배, 이쯤에서 우리 톡 까놓고 얘기 합시다. 하늘 같은 선배라고 해서, 예예 하고는 있었지만, 이건 아니라고 봐여. 허구 많은 검사들 중에서 나같이 숨겨놓은 돈이나 긁어다 셀 줄이나 알고, 남 뒷주머니에 뭐가 있나 용케 털어내는 것뿐이 못하는 인간을 살인사건에 떡 하니 배치시켜 놓은 거 부텀, 내 의심 않한 건 아니었수. 위에서 다 알고 내려다 보는 거, 이젠 눈치 다 깠다 이 말이우. 내가 스스로 자리를 되물림 하기 전까지나, 아님, 위에서 나를 진정으로 직위해제 시켜 빨가 벗기고 싶다면 그래 드리리다. 그러나, 이거 한가지 만은 알아야할 거여. 내가 상록순지 뭔지 허는 개나발 같은 좇거튼 쉐이들 뒷덜미를 꿰찬 이상은 내 끝까지 갈아 마실 터이니 그리 아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부탁인데, 제발 그렇게 살지마쇼.’
‘흠, 그래? 다 알게 됐다구? 그럼 얘기는 더 간단 하구만. 흥분을 가라 앉히구 거기 쫌 앉지? 세상 일이란 게, 북쩍대구, 속 뒤집는다고 되는 게 하나도 없거덩? 안 그런가? 담배 필텐가?’
슬며시 담배를 권하는 부장검사의 얼굴은 도리어 여유가 있어 보였다.
‘후우……다들 첨에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사명감에 불타서 눈에 불을 켜고 달겨 들지, 그러다, 세월이 차츰 가고, 세상의 테두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게 아니거덩? 내가 어쩌자고 그렇게 좇 빠지게 대가리 싸매면서 공부 했던가 하는 후회가 차츰 밀려 오면서, 사는 것의 계단들이 가슴으로 느껴지기 시작허지.
누구는 몇평의 아파트에 사네, 누구는 밍크를 둘렀네, 누구는 골프 회원권이 얼마 짜리네, 집 값만한 차를 굴리고 있넹…..글쎄, 인생에서 특별히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저 시키는 일이나 잘 허고, 명예직 이겠거니 살아대면 그뿐 아니겠나? 그런데, 가족이란 뒷짐이 어깨 위로 올려 붙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 가다보면,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는 오아시스들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게 되어있지.
멋 모르는 것들이야, 초장에 큰 덩어리 잘못 삼켜서 아가리가 째지거나, 생선가시 걸리듯이 목 막혀 뒤져 버리는 것들도 있지만, 쌓아온 경륜으로 걸러 내다 보면, 정말 놓치기 아까운 떡밥들이 곳곳에 있게 마련 이거덩. 상록수? 말 한번 잘했네. 자네 우린 국록을 먹고 있는 공무원 이라 할 수 있어, 안 그런가? 그런데, 우리가 제일루 겁 내는 건 무언가? 여자? 불법적인 향응제공? 건강?....아니지….제일 걱정하는 건, 남들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좌절감이야.
요즘이야 떡살에 찍어 내듯이, 고시합격이 무신 공장에서 떨구어 나오는 대량생산품처럼 흔해지고 있지만, 우리 때야, 어디 그런가?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대가리 들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 했느냐 이 말이야. 근데, 살아가다 보니, 쒸발, 내 발꿈치에도 못 오던 것들이 나보담 빡씨게 앞서 가는 게 눈에 오지게 밟혀대? 그땐 독약이라도 처먹고 지랄 발광이라두 해보고 싶어지드구만. 내가 어떤 녀석인데, 이렇게 밖에 살아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후회가 팍 밀려오고…..정권이야, 어떤 인간이 잡으면 어떤가? 잘못 보여 꼬질대 나가는 인간들이야, 저 구름 위의 것들이고, 누가 권좌에 앉던 간에, 다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그 좇에, 그 불알들이란 거, 말 안해도 자네, 이해할 걸세. 상록수…...이름 좋잖아? 권력은 흥망성쇠가 있다지만, 갸들은 없거덩?
자네 드라마에서 쪽대본 이란 말 들어 봤나? 시간도 없는데, 대본이 나와야 연기를 할 것이고, 시청자들을 위해 녹화에 들어갈 텐데, 그 놈의 작가선생 이란 작자가 능력이 좇거튼 건지, 아님 거들먹 거릴려고 그러는 건지, 시간이 목에 찰 때가 되서야 찔끔찔끔 대본을, 그것도 한 장씩 떤진다고 해서 나온 말이지. 근데, 살다가 보니깐, 정권이랍시고 꿰차고 앉은 것들이 꼭 그 짝 이거덩! 위에 걸치고 앉았다 허면서 거들먹대며, 까만차 타고 다닌다고 으르렁대질 않나, 뭔 일이 터지면, 방법은커녕, 알아서들 해결해 주셩 허면서 눈만 멀뚱멀뚱 하게 뜨고 있질 않나, 해 주는 거라곤 쥐꼬리만도 못한 것들뿐이니, 쪽대본 날리는 작가 선생들이랑 다를 게 무에가 있느냐 이 말이야. 근데, 상록수는 다르거덩…..쳐먹어도 어디 가시라도 걸리게 놔 두나? 곱게 살을 발라서 한입에 꿀꺽 들어가게 시리, 첨부터 맘먹고 신경 써 줘, 좌천이면 어떻고, 영전이면 어떨까 싶게, 방방곡곡 어디에서건 대접 받을 수 있는 껀수를 빼놓지도 않고, 메뉴와 양념대로 팍팍 물어다 줘, 이게 정말 사는 거이지 싶게, 물심양면으로 힘써줘….그야말로 일에 목숨을 걸던 초심으로 향할 수 있게 해주니, 내가 권력을 잡은 좇방맹이들 한테 고마워 해야겠나, 아님,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상록수에게 감사해야 되겠나?’
‘그게 다 꿍꿍이가 버티고 있는 향응제공 인 줄로 아는데, 그걸 그렇게 고까와 허면서 삼켜대나? 쥐약인줄도 모르고?’
‘쥐약? 글쎄, 상록수에서 던져준 쥐약먹고 뒤졌다는 인간들, 난 보덜 못했는데, 진검사는 혹시 누구 알으? 알면 가르쳐 줘봐. 내 찾아가서 확인사살 쫌 해보게, 정말 그런가….자네 아직 젊다고 그런 거 같은데, 세월……., 그거 금방 가지. 어느새 없는 돈에 새로 맞췄다고 폼재던 양복, 입고 나가기 에도 쪽팔리게 유행 뒤떨어지는 넓은 깃을 한탄해보이 뭐 허겠나? 기브 엔 테이크 아니겠어? 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봐주고, 그들은 그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체하지도 않게시리 알맞게 시시때때로 찔러주니…..뭐 그렇다고 내가 미친갱이 살인마를 무죄라고 주장한다든가 허는 일에 나서진 않아. 그래서 상록수가 내 맘에 쏙 든다고 허는 걸세.
누가 봐도 잇권이 관여 되어있다는 일에만,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쪼로 흘러가게 툭하고 차 주면, 절대로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는 일만 골라서 안겨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나 말이야. 그리구, 쪼다들 같이 수표로 던지는 법도 없지. 수퍼에서 배달되는 라면박스에, 배상자에, 갈비짝에 교묘히 숨겨서 배달꾼도 영문을 모르고 배달을 시켜대니, 누가 사진을 찍어두 그건 수퍼에서 배달되는 음식 나부랭이지, 누구들 처럼 깜장 승용차에서 꺼내면서 인상 오지게 쓰는 돈박스가 아니라고 보여지게 하는 그네들의 세심함….죽이지 않나?
게다가 나 혼자 설쳐대고 먹기 배 쓰라려서 윗대가리에다 대고, 같이 드십세 허면서 상납할 필요도 없어여. 왜? 그게 상록수가 잘 허는 짓이지. 같은 물건을 팔아도, 말단직원이 받는 이익금이랑, 팀장이 받는 금액은 다르다며? 그 일이 굴러갈 때 나에게 떨어지는 돈이랑, 윗선에 떨어지는 돈을 밑에서 대갈대는 내가 신경 쓸 필요 뭐 있냐 이거지. 나뿐만이 아니라 오지게 다들 배 터지게 쳐먹고 있으니, 가슴 푸근허고, 살 맛난다 이 말이지. 나만 저지르고 있을 때는 범죄지만, 다같이 저지르고 있으면 트렌드 라며? 세상이 그래서 살아볼 만 하다고 누가 그러잖든가?’
‘그러고도 당신이 내 위에 있을 자격이 있나?’
‘왜 없어? 난 지금 이라두 자네를 이 일에서 손 떼게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않는 이유가 궁금허질 않나?’
‘글쎄…….별로 알고 싶진 않지만 물어봐 주지.’
‘나도 별로 가르쳐 주고 싶은 맘은 없지만 알려 줌세. 도망친 그 윤서라는 년, 못 잡아도 상관없어. 뒤진 년이야, 그렇다 치자 말이지. 재수 없이 퇴물 씹구녕에다, 쓰잘데기 없이 아가리까지 놀려 뒤졌으니 그럴 법 하다고 믿자, 이 말이야. 이번 기회야 말로 상록수가 바라고 바라던 그 것, 이를테면 자네까지 나서서 상록수와 반대 편에 서서 놀다간 어찌 되는지 보여주려는 시범 케이스라 이 말이야. 죽기 싫으면 제자리로 돌아와, 던져주는 쥐약이나 받아 먹으면서, 비굴허긴 해도, 충실한 개짓거리 허든가 아님, 랩에 싸여 희귀사 되거나, 혹은 모가지에 공기구녕이나 허벌나게 나서 뒈져버릴 각오나 하며 살든가, 이건 이른바, 양단간에 벌어질 시범 케이스의 파급효과를 지금 상록수의 지붕 아래에 있으면서도 전전긍긍 허면서 대갈빡으로 딴 짓거리 허는 쉐이들에게 생중계로 보여주려는 거, 이젠 알겠나? 또 한가지…..상록수가 원하는 것은 이제 이딴 것들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떨치고 물 위로 떠오르고 있는 거라구. 그러니, 자네도 생각 다잡아 먹고, 정리하는 거이 빠를 것이야. 이래야 씹구녕도 쑤셔보고, 똥꾸녕도 허벌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닌가? 어차피 흘러가는 이 세월, 그 안에 이리 저리 파 묻혀, 일도 열씸, 돈지랄도 빵빵, 섹스도 주구장창…...이거 보다 더 괜찮은 직종, 또 찾을 수 있겠나 말이야……안 그런가?’
‘버러지 같은 것들…..’
‘왜? 벌레가 어때서? 사회정의? 민주주의 구현? 질서와 도덕이 실현되는 사회? 좇까는 소리 작작 하라구 해. 누가 누굴 응징하고, 누가 누굴 올바르다고 손가락질? 자네 그 유행어 알지? 너나 잘하세여! 모두 응댕이에 썩은 똥덩어리 하나, 둘씩 붙이고 있는 이 마당에 누가 누굴 보고 손가락질? 증말 해주고 싶다. 너나 잘 하라고…..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총체적으로 썩어 문드러진 이 마당에 나만 잘났다고 대가리를 치켜 들어? 넌 그 썩어 문드러진 몸 안에 연결된 한 자락 아니냐 이거야? 언젠가 가만 놔두면 너도 썩고, 그 안에서 고름이라두 달가와 하며, 지내야 헐 판에, 지만 잘났다고 연고 쳐바르고 씩씩대? 아니, 고름난 상채기가 겉에만 연고 바른다고 낫는 법 있나? 목숨 아까운 줄 알 때 지켜, 저만 잘난 줄 아시는 후배님……’
‘쾅!’
그냥 문을 닫고 방을 나와 버린 진검사는 가슴 속이 뻥 뚫린 느낌 이었다. 이젠 주변의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와 얘기해도 해결이나 빛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이 가슴속을 덮쳐 왔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실내의 분위기는 진검사의 굳어진 얼굴 때문에 더더욱 살벌해 지는 느낌 이었다.
‘이 형사, 우리 오랜만에 회식이나 허까? 기분도 꿀꿀헌데….’
‘아니, 일이 이렇게 만포장으로 벌어졌는데, 회식은 쫌 그렇지 않나여?’
‘다 먹고 살자고 허는 짓인데, 어디 괜찮은 룸싸롱이나 알아 봐. 우리끼리 먹기 눈치 보이면, 유검사네 식구들이랑 같이 해보던지……’
‘그러까여?’
이 형사는 어수선한 분위기와 다르게, 자리를 들썩이며, 저녁에 있을 회식의 새끼줄을 엮느라, 유검사의 방을 들락이기 바빴다.
‘일 하라고 헐때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뭉팅 허두만, 놀아 재끼자는 말엔 어찌 저리두 신이 나누? 아니, 내가 대표선수루 다가니, 끌려가서 오지게 찐빠 먹고 올 동안, 현장수습은 다 했대?’
‘거럼여. 아니, 어디서 벌어진 사곤데, 현장 수습을 늦추겄습니까여? 일사천리로 끝마치고, 지금 보고서 올리는 거, 안 보이십니까? 요 날렵한 타법, 키보드가 다 디글거리네…..근데 어쩐 일이실까? 우리 무대까리 진검사 님께서 회식을 다 하자고 허시고….참,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네.’
‘유검사는 뭐래?’
‘뭐래긴여? 당근 오케입져. 오늘 푸지게 한턱 쏘시는 거져?’
‘그려….’
진검사는 의자에 파묻혀, 건네받은 순간부터 계속 몸에 지니고 있는 그 증거물을 바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려 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을 꺼내봤자, 남 좋은 일만 시킬 게 뻔하다는 생각에 어쩌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 근데 이건 뭐더라.’
가슴팍의 반대편에 무언가 불룩한 것이 있어서 꺼내 보았다.
‘이건?’
그건 바로 미주의 부친이 죽기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디지털 녹음기였다. 총을 뽑아들기 전에 미주 부친의 가슴을 짚어 보다가 꺼내게 된 그 녹음기….불은 들어와 있었지만, 어디까지 녹음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최대한 으로 줄이고, 겉에 표시 된대로 조금 전으로 돌린 뒤에 플레이를 시키면서 외부 스피이커를 귀에 대 보았다.
‘….. 지만 잘났다고 연고 쳐바르고 씩씩대? 아니, 고름난 상채기가 겉에만 연고 바른다고 낫는 법 있나? 목숨아까운 줄 알 때 지켜, 저만 잘난 줄 아시는 후배님……쾅!......’
그 디지털 녹음기는 그 길고 긴 사이, 상록수 예찬론을 펴던 부장검사와의 대화 내용까지 모두 담아 버린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스위치를 끄고, 진검사는 품속에 그 녹음기를 집어 넣어 버렸다. 이미 사건 현장과 시신이 수습 되었으니, 소지품의 목록에도 없을 그 녹음기….그게 또 하나의 짐이 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가 진검사의 맘속에 피어 오르고 있었다.
‘띵띠리 딩딩딩….’
오랜만에 방을 빌려 놀아대는 회식은 그 분위기부터 놀랍도록 흐트러지고 있었다. 유검사도 진검사의 호의가 싫지는 않았는지, 한 식구도 빼 놓질 않고 회식에 참석한 걸 보면 그랬다. 모두가 어디 쑈라도 나갈 것처럼, 머리에 화장지를 감고, 혁대를 목에 두르고, 앞에 나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지만, 유독 진검사와 유검사는 수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쉽사리 그 분위기에 동조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유검사, 다들 여기서 놀다 들어가라고 하고, 우리끼리는 다른 곳에서 한잔 허까?’
‘좋죠.’
진검사는 술값에다 2차까지도 나갈 수 있는 돈을 집어서 계산을 하고, 모두의 아쉬운 배웅을 뒤로 한 채, 유검사와 룸싸롱을 나왔다.
‘그래두, 저런 회식 자리, 피하지도 않고, 용케 다니긴 허네?’
‘여자라구, 빠질수만은 없죠. 일의 연장 이라는 말도 쓸데없지만은 않고해서….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한턱 쏘시는지 모르겠네…..’
자리를 옮겨 조용한 스텐드 바에서 술잔을 마주한 진검사는 평소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유검사의 말을 받았다.
‘유검사…’
‘네?’
‘자네가 검도가 몇 단 이라구 했지?’
‘3단 이요. 그건 왜여?’
‘아직도 도장에 나가?’
‘그럼요. 제 몸매 유지의 비결인데, 빼먹을 수야 없져. 직업이 그러니, 도움이 되는 것도 같고….’
‘그럼…… 도장에서 사람 목부터 가르라고 배웠어?’
‘예?.......’
‘살생이 진검승부의 첫걸음이라고 배웠느냐고 내 말은…….이해가 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유검사를 바라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되뇌인 진검사의그 질문에 유검사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놀랄 거 없어. 바보 빙신이 아닌 담에야, 여자 화장실의 그 방향 천장을 열고 기어 올라가서 다시 내려올 방이, 유검사 방 밖에 더있느냐구? 자네 방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 곳으로 도망 간거야? 우리 방의 건너편 맨 구석이 여자 화장실이고, 그 바로 옆이 유검사 방, 그 옆이 승강기 인데, 자네가 미친 지랄 났다고, 천장에서 복도를 가로질러 다른 방으로 타고 내려왔겠어? 안 그러냐구?’
‘그걸 어떻게?’
‘긴장할 거 없어. 내 주위에 온통 상록수 사람들 좌악 깔린 거 모르는 바 아니니까. 자네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방의 구조도 그랬지만, 아무리 노인이라고 해도 반항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야. 남자들의 멍청한 심리 속에는 지가 아무리 꼬꼬장 할애비 라도, 여자 하나쯤이야 문제도 아니라는 허세를 부린다는 거지. 내가 없는 사이, 설사 자네가 방안에 들어섰다고 해도, 겁을 먹지도, 달겨 들어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저깟 기집년쯤이야 하는 방심의 순간, 칼날을 들이댄 거겠지, 뭐겠어? 자네가 아니라도 그렇게 내놓아 둘러대자고 눈에 뵈는 거 없이, 설쳐대기로 맘 먹은 노친네, 상록수가 가만 놔두진 않았을 테고…..걱정마. 유검사 짓이라고 꼰질러 봐야, 위에서 헷소리 허덜 말라고, 나나 깔아 뭉게지지 별 수 있겠어?’
‘진검사님도 왠간 하시면, 이쯤에서 한 수 물러 서시지…지금 때가 어느 땐데…….’
‘때가 어느 때긴? 너나 나나 모두 상록수한테 아부 때리는 시기지, 뭐 있겠어? 나같이 돈없고 빽없고, 붙들 노끈이나 줄도 없는 사람들이야, 맨땅에 헤띵 허면서, 죽어라 고집 피우며, 살다 디지는 거지, 별 거 있을라구…..’
‘갸들이 원하는 대로 쫌만 움직여 주시면 되잖아여?’
‘왜? 뭐가 아쉬워서……유검사는 어쩐 일로 상록수의 밥을 먹고 있는 거야?’
‘저여? 국민학교 4학년때, 벌컥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똑소리 나는 학급 반장의 남은 여생, 누가 책임져 주겠어여? 동회에서 타다 먹는 밀가루나 배급쌀이 전부였는데…..상록수가 하늘아래 아무도 기댈 곳 없는 우리 삼남매, 남부럽지 않게 멕여주고, 입혀주고, 그 긴 세월 저에게 건넨 부탁은 오로지 단 한마디뿐 이었어여. 꼭 검사가 되어서 자기들을 기쁘게 해달라고……어릴 때는 자라서 검사가 되기만 하면 그 분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져. 그런데, 점점 커나가다 보니, 그게 아니었어여. 길거리에 나가 개구신이 될 뻔한 우리 삼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감싸준, 은혜라면 은혜라고 할 수 있던 그 손길은, 목숨을 바꾸어도 갚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게가 점점 실려 왔져. 사람 죽이는 거여? 아무 것두 아니에여. 지금의 제가 없다고 생각해 본다면, 이 까이꺼…문제도 아니져. 식구들의 남부럽지 않은 생활과 대학진학, 그리고, 남동생의 병역까지도 빼주시고, 게다가 번듯한 직장까지….. 모두 무슨 소설속의 얘기처럼, 우리 가족들을 위해 힘써 준 그 분들….상록수가 구지 아니라고 해도, 전 살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한 명령도 기꺼이 받아 따랐을 거에여. 제가 잘못 됐나여? 그랬다면 저를 잡아 가두세여. 어차피 법의 심판이라고 해도, 돈 있고, 빽있는 자들을 위한 허울좋은 법….이미 믿지 않은 지 오래에여. 제가 검사이긴 해도…..’
‘유검사를 나무라고 싶은 맘은 없어. 그냥 내 편이 없는 거이, 속상하고 섭섭해서 질러본 거지. 미제 사건 또 하나 생겼구만…..’
‘아녀? 내일 아침 자기가 그 노친네 죽였다고 자수 하는 사람, 나오기로 되어 있어여. 그 사람이여? 다 뒤를 봐 줄 든든한 상록수가 있으니, 알려준 대로 범인보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범행사실, 순순히 불어댈 걸요?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남겨진 식구들이, 형제가, 부모님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깟 수감생활, 똥꾸녕 쫌 딴 놈에게 쑤셔진들 뭐 대수겠어여?’
‘그런가? 참 대단허이…..상록수라…늘 푸르른….’
‘진검사님도 맘 급하게 잡숫지 말고, 여러모로 곰곰히 생각해 보세여. 권력에 아부하는 정치꾼들이나, 장차관 자리 한번이락두 꿰차려고 발버둥 치던 인간들 다 어디루 갔져? 다 정권이 썰물처럼 사라진 바닷가에 주인 없이 남겨진 조개비처럼 처량한 신세 됐다는 거 아녀여? 그러나, 상록수의 우산은 달라요. 우선 믿음직 하기도 하거니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으니까여.’
‘그럼, 유검사는 상록수의 불법적인 행동을 법적인 테두리, 아니, 법망의 교묘한 맹점속에서 끌어 안고 가자는 얘기야?’
‘평범한 사람들 피나 빨자는 양아치들이나 비리형 조폭과는 차원이 틀려여, 모르시겠어여? 이건 대세라구여, 시대의 흐름이란거 느끼지 못하시겠어여? 지금에 와서 보니,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관습으로 밝혀진 것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 볼께여. 중세 시대에는 신랑, 신부의 첫날밤 이전에 종교의 허울을 쓴, 하나님의 대변자라 일컫는 자가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욕심을 채웠지만, 누구도 그걸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져. 대세 였으니깐여. 그 예처럼 세월이 흘러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 상록수를 욕하는 사람들도 나오겠죠. 그러나, 그 사이에 그 그늘을 감사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요? 숫자 놀이에 혈안이 되는 한국 사람 기질 아시져? 권력의 창출조차 숫자의 힘이 발휘되는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서, 되도 않는 인물을 위로 밀어 올리는 그 멍청한 저력…..대세가 그 힘을 발휘하는데, 한두 사람쯤의 희생은 있을 수 있다고 봐여. 모두가 결승점에 안착할 수만 있다면야, 천국 이겠죠. 그러나, 아시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결점 투성이의 마귀소굴과 다를바 없다는 사실…..그 안에서 쉴 수 있는 그늘이 상록수로부터 제공되는데, 그걸 악법이라고 지칭할 명분이 누구에게 있는지 묻고 싶을 따름이져.’
진검사도 유검사의 맹렬한 이론적 난타에는 별 할말이 없었다. 세상의 돌아가는 꼬라지가 너나 잘하세요 판 인데, 뭐라고 할 수 있겠냐는 심정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앞으로가 문제라고 봐여. 만일 지금의 흐름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예전처럼 샌님처럼 우회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 제 생각 이에여. 지금 상록수는 타력을 받고 있어여. 가속이 날로 되고 있다니깐여?’
‘타력은 또 뭐고, 가속은 무슨 의미래?’
‘진검사 님께서 상록수의 그늘로 들어오시면 자연히 알게 되세여. 태풍이 몰려오기 직전에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 진다져? 지금 상록수는 그 고요를 만들고 싶은 거에여. 사람들로 하여금 준비된 태풍이 오고 있다는 자랑스런 과시를 하고 싶은 거져. 이제까지는 아무 소리 없이 땅 밑에서 받치고 있던 그 힘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거, 느끼셔야만 해여. 그렇다고 상록수가 무신 괴물이나 에얼리언 같은 건 아니에여.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쉬기 위해서 뿌리를 깊게 박고 싶은 거니까……항상 돌아다 보세여. 명분의 중요성이 언제 어느 때에 강조되어 왔는지를……상록수가 이제사 기지개를 펴는 것은 그 명분의 타당성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에여. 더 이상 어둠속에 있어서도, 있을수도 없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 말이져’
‘유검사는 계속해서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할테야?’
‘글쎄여. 진검사님께서 저를 하수인이라고 부르실 수 있게 될까 싶기도 하네여. 언젠가 누가 그러데여, 성공한 쿠데타는 구국의 일념이고, 실패한 쿠데타는 역심의 발로라고……상록수의 세상이 오면 감히 지금의 진검사 님이라면, 저에게 하수인 어쩌고 하는 단어를 쓰실 수 없게 될텐데……’
‘그런가? 허허…..’
그건 상록수의 예찬 일색 이었다. 술맛 보다 더 진검사의 목을 칼칼하게 만드는 것은 벽운 거사님의 지적처럼 상식을 벗어난 순리의 뒤틀림 마저도 자연스럽다고 바라보게 만드는 상록수의 악랄한 집단최면의 저의 때문 이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윤택의 처, 상군의 얘기에 의하면, 한낱 알량한 돈푼 놀음에 빠진 무리들의 장난질 이라고만 했는데, 유검사의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또 한가지 의문인 것은 과연, 벽운 거사님과 조우 했던 탱크와 삼슈라고 하는, 민윤서를 옹호하는 인물들은 과연 어떤 맺힌 것이 상록수와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기에 그렇듯 목숨을 걸고 싸워대는 것인가 하는 거였다. 진검사는 자기의 처지나 상황이 고스란히 상록수의 휘하 세력들에게 그것도 쌩으로 중계방송 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수치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건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만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검사, 만일 내가 유검사와 같은 상록수의 세력과 마주 서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텐가?’
‘그건 정말 치사한 밥그릇 쌈이 되지 않을까여? 상록수나 지금의 진검사 님처럼 그에 반한 세력이나 간에, 현재까지 누려온 점유 이득을, 삶의 터전을 뺏기려고 창자를 스스로 드러낼 자들은 없질 않겠는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상록수가 있음으로 해서 검사라고 지칭될 수 있는 모든 지위와 삶이 한번에 무너질 수 있는데, 제눈에 불똥이 튀지 않고 배긴다면, 그건 사람이기를 이미 포기한 게 아닐까요?’
그건 진정 살육과 생존만이 목적이 될, 끝도 없는 소모전을 의미하고 있었다.
-계속-
제 38 부 : 외로운 오솔길
‘이….이…이형사!..이형사! 누구 없어? 썅……’
문간에서 총을 뽑은 채로 소리를 질러대는 진검사는 팔다리가 후둘둘 떨리고 있었다. 곧 이어 사무실에서 문을 박차고 달려 나오는 이형사와 다른 사람들…..
‘아니….이?, 이?, 이!….검사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피비린 내와 함께 방안의 참혹한 모습을 목도한 이형사 마저 총을 뽑아 들었다. 계속해서 웅성거리는 통에, 복도는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사이, 우왕좌왕 다급하기만 했던 진검사는 도리어 미주의 부친을 살해한 범인이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형사, 얼릉…..범인은 아직 건물 안에 있어. 어서 정문이랑, 이 건물에 드나들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있는대로 다 닫아 걸라구 해. 어서!’
‘네……’
이형사는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정문으로 연락을 날렸다.
‘진검사! 이기 무신 일이야? 응? 대체?’
소리를 냅다 지르며, 다가온 부장검사는 열린 방안의 전경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여자 화장실에서 입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며, 비명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여자들이 보였다.
‘이건 또 뭬이야?’
사람들은 또다시 여자 화장실 쪽으로 우 하며, 몰려 가버렸다. 화장실 바닥에는 날렵한 단도에 피가 흥건한 채로 바닥에 떨구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진검사의 판단으로는 범인이 미주의 부친을 살해하고, 바로 도주하기 전에 범행에 쓰인 도구를 버리기 위해 여자 화장실로 튀어 들어간 것으로 판단 되었다. 그러나, 주변을 살피던 진검사의 눈에 화장실 천장의 베니아 판이 조금 비틀어져 공간이 드러난 것이 눈에 띄고 있었다.
‘저 진검사님,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으며, 언제까지 막아야 하느냐고 정문에서 되려 야단 인데여, 어떡하져? 청사를 지금부터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긴 헌데…..’
‘관둬…..여기까지 치고 들어와서 저 짓거리 하고 발른 자식인데, 어련할라구? 지 도망갈 구석도 챙기질 않고 들어올 리가 있었겠어? 그건 그렇고, 화장실이랑,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 알았지?’
‘자네 나 좀 보세나.’
이 형사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부장검사가 진검사를 불러 세웠다.
‘꾸중 허실꺼면 쫌 나중에 허시져?’
‘아니, 이 사람이 오라면 올 거이지…..’
방으로 따라 들어간 진검사는 부장검사와 마주 앉게 되었다.
‘자네 요즘, 허는 일이 뭔가? 이 일 말고 뭐 따로 알바라도 뛰나? 아님, 아예 때려 치우고 변호사로 나설라고 눈치나 까고 앉았나? 입이 있으면 변명이나 들어보세나. 이기, 이기 뭔 일인지….내 참, 건물에 얌전히 지 발로 찾아 들어간 계집 하나를 잡질 못하고, 눈 벌거이 뜬채루 다가 놓치질 않나? 청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기어 들어와 목줄기 따고 토끼는 새끼들이 없나……참, 기가 막혀서….자네 그러고도 검사라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나 있냐 이 말이야, 내 말은….’
‘부장님 보담야 낫죠. 아니, 그리고, 토끼는 새끼들 이라고 하셨는데, 범인이 어떻게 남자라고 그렇게 단정 지으실 수 있져, 그리구 여러명 인줄 첨부터 알고 계셨나여?’
‘아니,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깐?’
‘선배, 이쯤에서 우리 톡 까놓고 얘기 합시다. 하늘 같은 선배라고 해서, 예예 하고는 있었지만, 이건 아니라고 봐여. 허구 많은 검사들 중에서 나같이 숨겨놓은 돈이나 긁어다 셀 줄이나 알고, 남 뒷주머니에 뭐가 있나 용케 털어내는 것뿐이 못하는 인간을 살인사건에 떡 하니 배치시켜 놓은 거 부텀, 내 의심 않한 건 아니었수. 위에서 다 알고 내려다 보는 거, 이젠 눈치 다 깠다 이 말이우. 내가 스스로 자리를 되물림 하기 전까지나, 아님, 위에서 나를 진정으로 직위해제 시켜 빨가 벗기고 싶다면 그래 드리리다. 그러나, 이거 한가지 만은 알아야할 거여. 내가 상록순지 뭔지 허는 개나발 같은 좇거튼 쉐이들 뒷덜미를 꿰찬 이상은 내 끝까지 갈아 마실 터이니 그리 아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부탁인데, 제발 그렇게 살지마쇼.’
‘흠, 그래? 다 알게 됐다구? 그럼 얘기는 더 간단 하구만. 흥분을 가라 앉히구 거기 쫌 앉지? 세상 일이란 게, 북쩍대구, 속 뒤집는다고 되는 게 하나도 없거덩? 안 그런가? 담배 필텐가?’
슬며시 담배를 권하는 부장검사의 얼굴은 도리어 여유가 있어 보였다.
‘후우……다들 첨에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사명감에 불타서 눈에 불을 켜고 달겨 들지, 그러다, 세월이 차츰 가고, 세상의 테두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게 아니거덩? 내가 어쩌자고 그렇게 좇 빠지게 대가리 싸매면서 공부 했던가 하는 후회가 차츰 밀려 오면서, 사는 것의 계단들이 가슴으로 느껴지기 시작허지.
누구는 몇평의 아파트에 사네, 누구는 밍크를 둘렀네, 누구는 골프 회원권이 얼마 짜리네, 집 값만한 차를 굴리고 있넹…..글쎄, 인생에서 특별히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저 시키는 일이나 잘 허고, 명예직 이겠거니 살아대면 그뿐 아니겠나? 그런데, 가족이란 뒷짐이 어깨 위로 올려 붙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 가다보면,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는 오아시스들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게 되어있지.
멋 모르는 것들이야, 초장에 큰 덩어리 잘못 삼켜서 아가리가 째지거나, 생선가시 걸리듯이 목 막혀 뒤져 버리는 것들도 있지만, 쌓아온 경륜으로 걸러 내다 보면, 정말 놓치기 아까운 떡밥들이 곳곳에 있게 마련 이거덩. 상록수? 말 한번 잘했네. 자네 우린 국록을 먹고 있는 공무원 이라 할 수 있어, 안 그런가? 그런데, 우리가 제일루 겁 내는 건 무언가? 여자? 불법적인 향응제공? 건강?....아니지….제일 걱정하는 건, 남들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좌절감이야.
요즘이야 떡살에 찍어 내듯이, 고시합격이 무신 공장에서 떨구어 나오는 대량생산품처럼 흔해지고 있지만, 우리 때야, 어디 그런가?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대가리 들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 했느냐 이 말이야. 근데, 살아가다 보니, 쒸발, 내 발꿈치에도 못 오던 것들이 나보담 빡씨게 앞서 가는 게 눈에 오지게 밟혀대? 그땐 독약이라도 처먹고 지랄 발광이라두 해보고 싶어지드구만. 내가 어떤 녀석인데, 이렇게 밖에 살아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후회가 팍 밀려오고…..정권이야, 어떤 인간이 잡으면 어떤가? 잘못 보여 꼬질대 나가는 인간들이야, 저 구름 위의 것들이고, 누가 권좌에 앉던 간에, 다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그 좇에, 그 불알들이란 거, 말 안해도 자네, 이해할 걸세. 상록수…...이름 좋잖아? 권력은 흥망성쇠가 있다지만, 갸들은 없거덩?
자네 드라마에서 쪽대본 이란 말 들어 봤나? 시간도 없는데, 대본이 나와야 연기를 할 것이고, 시청자들을 위해 녹화에 들어갈 텐데, 그 놈의 작가선생 이란 작자가 능력이 좇거튼 건지, 아님 거들먹 거릴려고 그러는 건지, 시간이 목에 찰 때가 되서야 찔끔찔끔 대본을, 그것도 한 장씩 떤진다고 해서 나온 말이지. 근데, 살다가 보니깐, 정권이랍시고 꿰차고 앉은 것들이 꼭 그 짝 이거덩! 위에 걸치고 앉았다 허면서 거들먹대며, 까만차 타고 다닌다고 으르렁대질 않나, 뭔 일이 터지면, 방법은커녕, 알아서들 해결해 주셩 허면서 눈만 멀뚱멀뚱 하게 뜨고 있질 않나, 해 주는 거라곤 쥐꼬리만도 못한 것들뿐이니, 쪽대본 날리는 작가 선생들이랑 다를 게 무에가 있느냐 이 말이야. 근데, 상록수는 다르거덩…..쳐먹어도 어디 가시라도 걸리게 놔 두나? 곱게 살을 발라서 한입에 꿀꺽 들어가게 시리, 첨부터 맘먹고 신경 써 줘, 좌천이면 어떻고, 영전이면 어떨까 싶게, 방방곡곡 어디에서건 대접 받을 수 있는 껀수를 빼놓지도 않고, 메뉴와 양념대로 팍팍 물어다 줘, 이게 정말 사는 거이지 싶게, 물심양면으로 힘써줘….그야말로 일에 목숨을 걸던 초심으로 향할 수 있게 해주니, 내가 권력을 잡은 좇방맹이들 한테 고마워 해야겠나, 아님,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상록수에게 감사해야 되겠나?’
‘그게 다 꿍꿍이가 버티고 있는 향응제공 인 줄로 아는데, 그걸 그렇게 고까와 허면서 삼켜대나? 쥐약인줄도 모르고?’
‘쥐약? 글쎄, 상록수에서 던져준 쥐약먹고 뒤졌다는 인간들, 난 보덜 못했는데, 진검사는 혹시 누구 알으? 알면 가르쳐 줘봐. 내 찾아가서 확인사살 쫌 해보게, 정말 그런가….자네 아직 젊다고 그런 거 같은데, 세월……., 그거 금방 가지. 어느새 없는 돈에 새로 맞췄다고 폼재던 양복, 입고 나가기 에도 쪽팔리게 유행 뒤떨어지는 넓은 깃을 한탄해보이 뭐 허겠나? 기브 엔 테이크 아니겠어? 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봐주고, 그들은 그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체하지도 않게시리 알맞게 시시때때로 찔러주니…..뭐 그렇다고 내가 미친갱이 살인마를 무죄라고 주장한다든가 허는 일에 나서진 않아. 그래서 상록수가 내 맘에 쏙 든다고 허는 걸세.
누가 봐도 잇권이 관여 되어있다는 일에만,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쪼로 흘러가게 툭하고 차 주면, 절대로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는 일만 골라서 안겨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나 말이야. 그리구, 쪼다들 같이 수표로 던지는 법도 없지. 수퍼에서 배달되는 라면박스에, 배상자에, 갈비짝에 교묘히 숨겨서 배달꾼도 영문을 모르고 배달을 시켜대니, 누가 사진을 찍어두 그건 수퍼에서 배달되는 음식 나부랭이지, 누구들 처럼 깜장 승용차에서 꺼내면서 인상 오지게 쓰는 돈박스가 아니라고 보여지게 하는 그네들의 세심함….죽이지 않나?
게다가 나 혼자 설쳐대고 먹기 배 쓰라려서 윗대가리에다 대고, 같이 드십세 허면서 상납할 필요도 없어여. 왜? 그게 상록수가 잘 허는 짓이지. 같은 물건을 팔아도, 말단직원이 받는 이익금이랑, 팀장이 받는 금액은 다르다며? 그 일이 굴러갈 때 나에게 떨어지는 돈이랑, 윗선에 떨어지는 돈을 밑에서 대갈대는 내가 신경 쓸 필요 뭐 있냐 이거지. 나뿐만이 아니라 오지게 다들 배 터지게 쳐먹고 있으니, 가슴 푸근허고, 살 맛난다 이 말이지. 나만 저지르고 있을 때는 범죄지만, 다같이 저지르고 있으면 트렌드 라며? 세상이 그래서 살아볼 만 하다고 누가 그러잖든가?’
‘그러고도 당신이 내 위에 있을 자격이 있나?’
‘왜 없어? 난 지금 이라두 자네를 이 일에서 손 떼게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않는 이유가 궁금허질 않나?’
‘글쎄…….별로 알고 싶진 않지만 물어봐 주지.’
‘나도 별로 가르쳐 주고 싶은 맘은 없지만 알려 줌세. 도망친 그 윤서라는 년, 못 잡아도 상관없어. 뒤진 년이야, 그렇다 치자 말이지. 재수 없이 퇴물 씹구녕에다, 쓰잘데기 없이 아가리까지 놀려 뒤졌으니 그럴 법 하다고 믿자, 이 말이야. 이번 기회야 말로 상록수가 바라고 바라던 그 것, 이를테면 자네까지 나서서 상록수와 반대 편에 서서 놀다간 어찌 되는지 보여주려는 시범 케이스라 이 말이야. 죽기 싫으면 제자리로 돌아와, 던져주는 쥐약이나 받아 먹으면서, 비굴허긴 해도, 충실한 개짓거리 허든가 아님, 랩에 싸여 희귀사 되거나, 혹은 모가지에 공기구녕이나 허벌나게 나서 뒈져버릴 각오나 하며 살든가, 이건 이른바, 양단간에 벌어질 시범 케이스의 파급효과를 지금 상록수의 지붕 아래에 있으면서도 전전긍긍 허면서 대갈빡으로 딴 짓거리 허는 쉐이들에게 생중계로 보여주려는 거, 이젠 알겠나? 또 한가지…..상록수가 원하는 것은 이제 이딴 것들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떨치고 물 위로 떠오르고 있는 거라구. 그러니, 자네도 생각 다잡아 먹고, 정리하는 거이 빠를 것이야. 이래야 씹구녕도 쑤셔보고, 똥꾸녕도 허벌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닌가? 어차피 흘러가는 이 세월, 그 안에 이리 저리 파 묻혀, 일도 열씸, 돈지랄도 빵빵, 섹스도 주구장창…...이거 보다 더 괜찮은 직종, 또 찾을 수 있겠나 말이야……안 그런가?’
‘버러지 같은 것들…..’
‘왜? 벌레가 어때서? 사회정의? 민주주의 구현? 질서와 도덕이 실현되는 사회? 좇까는 소리 작작 하라구 해. 누가 누굴 응징하고, 누가 누굴 올바르다고 손가락질? 자네 그 유행어 알지? 너나 잘하세여! 모두 응댕이에 썩은 똥덩어리 하나, 둘씩 붙이고 있는 이 마당에 누가 누굴 보고 손가락질? 증말 해주고 싶다. 너나 잘 하라고…..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총체적으로 썩어 문드러진 이 마당에 나만 잘났다고 대가리를 치켜 들어? 넌 그 썩어 문드러진 몸 안에 연결된 한 자락 아니냐 이거야? 언젠가 가만 놔두면 너도 썩고, 그 안에서 고름이라두 달가와 하며, 지내야 헐 판에, 지만 잘났다고 연고 쳐바르고 씩씩대? 아니, 고름난 상채기가 겉에만 연고 바른다고 낫는 법 있나? 목숨 아까운 줄 알 때 지켜, 저만 잘난 줄 아시는 후배님……’
‘쾅!’
그냥 문을 닫고 방을 나와 버린 진검사는 가슴 속이 뻥 뚫린 느낌 이었다. 이젠 주변의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와 얘기해도 해결이나 빛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이 가슴속을 덮쳐 왔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실내의 분위기는 진검사의 굳어진 얼굴 때문에 더더욱 살벌해 지는 느낌 이었다.
‘이 형사, 우리 오랜만에 회식이나 허까? 기분도 꿀꿀헌데….’
‘아니, 일이 이렇게 만포장으로 벌어졌는데, 회식은 쫌 그렇지 않나여?’
‘다 먹고 살자고 허는 짓인데, 어디 괜찮은 룸싸롱이나 알아 봐. 우리끼리 먹기 눈치 보이면, 유검사네 식구들이랑 같이 해보던지……’
‘그러까여?’
이 형사는 어수선한 분위기와 다르게, 자리를 들썩이며, 저녁에 있을 회식의 새끼줄을 엮느라, 유검사의 방을 들락이기 바빴다.
‘일 하라고 헐때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뭉팅 허두만, 놀아 재끼자는 말엔 어찌 저리두 신이 나누? 아니, 내가 대표선수루 다가니, 끌려가서 오지게 찐빠 먹고 올 동안, 현장수습은 다 했대?’
‘거럼여. 아니, 어디서 벌어진 사곤데, 현장 수습을 늦추겄습니까여? 일사천리로 끝마치고, 지금 보고서 올리는 거, 안 보이십니까? 요 날렵한 타법, 키보드가 다 디글거리네…..근데 어쩐 일이실까? 우리 무대까리 진검사 님께서 회식을 다 하자고 허시고….참,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네.’
‘유검사는 뭐래?’
‘뭐래긴여? 당근 오케입져. 오늘 푸지게 한턱 쏘시는 거져?’
‘그려….’
진검사는 의자에 파묻혀, 건네받은 순간부터 계속 몸에 지니고 있는 그 증거물을 바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려 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을 꺼내봤자, 남 좋은 일만 시킬 게 뻔하다는 생각에 어쩌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 근데 이건 뭐더라.’
가슴팍의 반대편에 무언가 불룩한 것이 있어서 꺼내 보았다.
‘이건?’
그건 바로 미주의 부친이 죽기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디지털 녹음기였다. 총을 뽑아들기 전에 미주 부친의 가슴을 짚어 보다가 꺼내게 된 그 녹음기….불은 들어와 있었지만, 어디까지 녹음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최대한 으로 줄이고, 겉에 표시 된대로 조금 전으로 돌린 뒤에 플레이를 시키면서 외부 스피이커를 귀에 대 보았다.
‘….. 지만 잘났다고 연고 쳐바르고 씩씩대? 아니, 고름난 상채기가 겉에만 연고 바른다고 낫는 법 있나? 목숨아까운 줄 알 때 지켜, 저만 잘난 줄 아시는 후배님……쾅!......’
그 디지털 녹음기는 그 길고 긴 사이, 상록수 예찬론을 펴던 부장검사와의 대화 내용까지 모두 담아 버린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스위치를 끄고, 진검사는 품속에 그 녹음기를 집어 넣어 버렸다. 이미 사건 현장과 시신이 수습 되었으니, 소지품의 목록에도 없을 그 녹음기….그게 또 하나의 짐이 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가 진검사의 맘속에 피어 오르고 있었다.
‘띵띠리 딩딩딩….’
오랜만에 방을 빌려 놀아대는 회식은 그 분위기부터 놀랍도록 흐트러지고 있었다. 유검사도 진검사의 호의가 싫지는 않았는지, 한 식구도 빼 놓질 않고 회식에 참석한 걸 보면 그랬다. 모두가 어디 쑈라도 나갈 것처럼, 머리에 화장지를 감고, 혁대를 목에 두르고, 앞에 나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지만, 유독 진검사와 유검사는 수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쉽사리 그 분위기에 동조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유검사, 다들 여기서 놀다 들어가라고 하고, 우리끼리는 다른 곳에서 한잔 허까?’
‘좋죠.’
진검사는 술값에다 2차까지도 나갈 수 있는 돈을 집어서 계산을 하고, 모두의 아쉬운 배웅을 뒤로 한 채, 유검사와 룸싸롱을 나왔다.
‘그래두, 저런 회식 자리, 피하지도 않고, 용케 다니긴 허네?’
‘여자라구, 빠질수만은 없죠. 일의 연장 이라는 말도 쓸데없지만은 않고해서….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한턱 쏘시는지 모르겠네…..’
자리를 옮겨 조용한 스텐드 바에서 술잔을 마주한 진검사는 평소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유검사의 말을 받았다.
‘유검사…’
‘네?’
‘자네가 검도가 몇 단 이라구 했지?’
‘3단 이요. 그건 왜여?’
‘아직도 도장에 나가?’
‘그럼요. 제 몸매 유지의 비결인데, 빼먹을 수야 없져. 직업이 그러니, 도움이 되는 것도 같고….’
‘그럼…… 도장에서 사람 목부터 가르라고 배웠어?’
‘예?.......’
‘살생이 진검승부의 첫걸음이라고 배웠느냐고 내 말은…….이해가 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유검사를 바라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되뇌인 진검사의그 질문에 유검사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놀랄 거 없어. 바보 빙신이 아닌 담에야, 여자 화장실의 그 방향 천장을 열고 기어 올라가서 다시 내려올 방이, 유검사 방 밖에 더있느냐구? 자네 방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 곳으로 도망 간거야? 우리 방의 건너편 맨 구석이 여자 화장실이고, 그 바로 옆이 유검사 방, 그 옆이 승강기 인데, 자네가 미친 지랄 났다고, 천장에서 복도를 가로질러 다른 방으로 타고 내려왔겠어? 안 그러냐구?’
‘그걸 어떻게?’
‘긴장할 거 없어. 내 주위에 온통 상록수 사람들 좌악 깔린 거 모르는 바 아니니까. 자네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방의 구조도 그랬지만, 아무리 노인이라고 해도 반항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야. 남자들의 멍청한 심리 속에는 지가 아무리 꼬꼬장 할애비 라도, 여자 하나쯤이야 문제도 아니라는 허세를 부린다는 거지. 내가 없는 사이, 설사 자네가 방안에 들어섰다고 해도, 겁을 먹지도, 달겨 들어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저깟 기집년쯤이야 하는 방심의 순간, 칼날을 들이댄 거겠지, 뭐겠어? 자네가 아니라도 그렇게 내놓아 둘러대자고 눈에 뵈는 거 없이, 설쳐대기로 맘 먹은 노친네, 상록수가 가만 놔두진 않았을 테고…..걱정마. 유검사 짓이라고 꼰질러 봐야, 위에서 헷소리 허덜 말라고, 나나 깔아 뭉게지지 별 수 있겠어?’
‘진검사님도 왠간 하시면, 이쯤에서 한 수 물러 서시지…지금 때가 어느 땐데…….’
‘때가 어느 때긴? 너나 나나 모두 상록수한테 아부 때리는 시기지, 뭐 있겠어? 나같이 돈없고 빽없고, 붙들 노끈이나 줄도 없는 사람들이야, 맨땅에 헤띵 허면서, 죽어라 고집 피우며, 살다 디지는 거지, 별 거 있을라구…..’
‘갸들이 원하는 대로 쫌만 움직여 주시면 되잖아여?’
‘왜? 뭐가 아쉬워서……유검사는 어쩐 일로 상록수의 밥을 먹고 있는 거야?’
‘저여? 국민학교 4학년때, 벌컥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똑소리 나는 학급 반장의 남은 여생, 누가 책임져 주겠어여? 동회에서 타다 먹는 밀가루나 배급쌀이 전부였는데…..상록수가 하늘아래 아무도 기댈 곳 없는 우리 삼남매, 남부럽지 않게 멕여주고, 입혀주고, 그 긴 세월 저에게 건넨 부탁은 오로지 단 한마디뿐 이었어여. 꼭 검사가 되어서 자기들을 기쁘게 해달라고……어릴 때는 자라서 검사가 되기만 하면 그 분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져. 그런데, 점점 커나가다 보니, 그게 아니었어여. 길거리에 나가 개구신이 될 뻔한 우리 삼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감싸준, 은혜라면 은혜라고 할 수 있던 그 손길은, 목숨을 바꾸어도 갚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게가 점점 실려 왔져. 사람 죽이는 거여? 아무 것두 아니에여. 지금의 제가 없다고 생각해 본다면, 이 까이꺼…문제도 아니져. 식구들의 남부럽지 않은 생활과 대학진학, 그리고, 남동생의 병역까지도 빼주시고, 게다가 번듯한 직장까지….. 모두 무슨 소설속의 얘기처럼, 우리 가족들을 위해 힘써 준 그 분들….상록수가 구지 아니라고 해도, 전 살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한 명령도 기꺼이 받아 따랐을 거에여. 제가 잘못 됐나여? 그랬다면 저를 잡아 가두세여. 어차피 법의 심판이라고 해도, 돈 있고, 빽있는 자들을 위한 허울좋은 법….이미 믿지 않은 지 오래에여. 제가 검사이긴 해도…..’
‘유검사를 나무라고 싶은 맘은 없어. 그냥 내 편이 없는 거이, 속상하고 섭섭해서 질러본 거지. 미제 사건 또 하나 생겼구만…..’
‘아녀? 내일 아침 자기가 그 노친네 죽였다고 자수 하는 사람, 나오기로 되어 있어여. 그 사람이여? 다 뒤를 봐 줄 든든한 상록수가 있으니, 알려준 대로 범인보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범행사실, 순순히 불어댈 걸요?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남겨진 식구들이, 형제가, 부모님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깟 수감생활, 똥꾸녕 쫌 딴 놈에게 쑤셔진들 뭐 대수겠어여?’
‘그런가? 참 대단허이…..상록수라…늘 푸르른….’
‘진검사님도 맘 급하게 잡숫지 말고, 여러모로 곰곰히 생각해 보세여. 권력에 아부하는 정치꾼들이나, 장차관 자리 한번이락두 꿰차려고 발버둥 치던 인간들 다 어디루 갔져? 다 정권이 썰물처럼 사라진 바닷가에 주인 없이 남겨진 조개비처럼 처량한 신세 됐다는 거 아녀여? 그러나, 상록수의 우산은 달라요. 우선 믿음직 하기도 하거니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으니까여.’
‘그럼, 유검사는 상록수의 불법적인 행동을 법적인 테두리, 아니, 법망의 교묘한 맹점속에서 끌어 안고 가자는 얘기야?’
‘평범한 사람들 피나 빨자는 양아치들이나 비리형 조폭과는 차원이 틀려여, 모르시겠어여? 이건 대세라구여, 시대의 흐름이란거 느끼지 못하시겠어여? 지금에 와서 보니,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관습으로 밝혀진 것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 볼께여. 중세 시대에는 신랑, 신부의 첫날밤 이전에 종교의 허울을 쓴, 하나님의 대변자라 일컫는 자가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욕심을 채웠지만, 누구도 그걸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져. 대세 였으니깐여. 그 예처럼 세월이 흘러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 상록수를 욕하는 사람들도 나오겠죠. 그러나, 그 사이에 그 그늘을 감사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요? 숫자 놀이에 혈안이 되는 한국 사람 기질 아시져? 권력의 창출조차 숫자의 힘이 발휘되는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서, 되도 않는 인물을 위로 밀어 올리는 그 멍청한 저력…..대세가 그 힘을 발휘하는데, 한두 사람쯤의 희생은 있을 수 있다고 봐여. 모두가 결승점에 안착할 수만 있다면야, 천국 이겠죠. 그러나, 아시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결점 투성이의 마귀소굴과 다를바 없다는 사실…..그 안에서 쉴 수 있는 그늘이 상록수로부터 제공되는데, 그걸 악법이라고 지칭할 명분이 누구에게 있는지 묻고 싶을 따름이져.’
진검사도 유검사의 맹렬한 이론적 난타에는 별 할말이 없었다. 세상의 돌아가는 꼬라지가 너나 잘하세요 판 인데, 뭐라고 할 수 있겠냐는 심정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앞으로가 문제라고 봐여. 만일 지금의 흐름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예전처럼 샌님처럼 우회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 제 생각 이에여. 지금 상록수는 타력을 받고 있어여. 가속이 날로 되고 있다니깐여?’
‘타력은 또 뭐고, 가속은 무슨 의미래?’
‘진검사 님께서 상록수의 그늘로 들어오시면 자연히 알게 되세여. 태풍이 몰려오기 직전에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 진다져? 지금 상록수는 그 고요를 만들고 싶은 거에여. 사람들로 하여금 준비된 태풍이 오고 있다는 자랑스런 과시를 하고 싶은 거져. 이제까지는 아무 소리 없이 땅 밑에서 받치고 있던 그 힘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거, 느끼셔야만 해여. 그렇다고 상록수가 무신 괴물이나 에얼리언 같은 건 아니에여.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쉬기 위해서 뿌리를 깊게 박고 싶은 거니까……항상 돌아다 보세여. 명분의 중요성이 언제 어느 때에 강조되어 왔는지를……상록수가 이제사 기지개를 펴는 것은 그 명분의 타당성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에여. 더 이상 어둠속에 있어서도, 있을수도 없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 말이져’
‘유검사는 계속해서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할테야?’
‘글쎄여. 진검사님께서 저를 하수인이라고 부르실 수 있게 될까 싶기도 하네여. 언젠가 누가 그러데여, 성공한 쿠데타는 구국의 일념이고, 실패한 쿠데타는 역심의 발로라고……상록수의 세상이 오면 감히 지금의 진검사 님이라면, 저에게 하수인 어쩌고 하는 단어를 쓰실 수 없게 될텐데……’
‘그런가? 허허…..’
그건 상록수의 예찬 일색 이었다. 술맛 보다 더 진검사의 목을 칼칼하게 만드는 것은 벽운 거사님의 지적처럼 상식을 벗어난 순리의 뒤틀림 마저도 자연스럽다고 바라보게 만드는 상록수의 악랄한 집단최면의 저의 때문 이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윤택의 처, 상군의 얘기에 의하면, 한낱 알량한 돈푼 놀음에 빠진 무리들의 장난질 이라고만 했는데, 유검사의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또 한가지 의문인 것은 과연, 벽운 거사님과 조우 했던 탱크와 삼슈라고 하는, 민윤서를 옹호하는 인물들은 과연 어떤 맺힌 것이 상록수와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기에 그렇듯 목숨을 걸고 싸워대는 것인가 하는 거였다. 진검사는 자기의 처지나 상황이 고스란히 상록수의 휘하 세력들에게 그것도 쌩으로 중계방송 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수치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건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만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검사, 만일 내가 유검사와 같은 상록수의 세력과 마주 서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텐가?’
‘그건 정말 치사한 밥그릇 쌈이 되지 않을까여? 상록수나 지금의 진검사 님처럼 그에 반한 세력이나 간에, 현재까지 누려온 점유 이득을, 삶의 터전을 뺏기려고 창자를 스스로 드러낼 자들은 없질 않겠는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상록수가 있음으로 해서 검사라고 지칭될 수 있는 모든 지위와 삶이 한번에 무너질 수 있는데, 제눈에 불똥이 튀지 않고 배긴다면, 그건 사람이기를 이미 포기한 게 아닐까요?’
그건 진정 살육과 생존만이 목적이 될, 끝도 없는 소모전을 의미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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