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라기(獸羅記) 61번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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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낮은 탄성이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고아한 학을 연상케하는 희고 우아한 선을 지닌 단정히 검은 윤기가 도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기품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아름다운 옥용이 아직 거무스름한 외지에서 환하게 드러났다. 서기(瑞氣)라 할 정도의 광채를 발하는 하얀 얼굴엔 반듯한 이마에서 심유한 눈망울과 마늘종같이 오똑 솟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콧매와 촉촉히 이슬을 머금은 바알간 두 입술이 오밀조밀 제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 밑에 섬세하게 뻗어내려간 목덜미의 선이 가히 천상의 선녀라 하여도 무방할 절세의 미모를 창출해 내었다. 가히 사화와 버금간다 평할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이 여인만이 가진 독창적인 고귀한 기품이 은은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왠지 모를 비애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공에 담겨 있음에 색다른 매혹을 자아내었다.
“맞군요. 봉황성모 선배님이 맞으시군요.”
자신도 여자이고 세간에서 천하절색이라 칭함을 받지만 탈속한 선녀를 보는 듯한 기분에 잠겨 있던 제갈수란은 중얼거렸다. 거의 사십년전 강호를 뒤흔들었던 신주오존의 수좌라 여기어지던 봉황성모, 그 당시 검후란 선배 고인이후 최고의 여협이었던 초절정 무림인이었다. 다른 사존과는 달리 세간에 일에 그리 많이 간여를 하지 않아 그 신비로움이 더더욱 증폭이되어 있던 봉황성모였다.
“성모님도 흑천 소속이신가요? 아니, 선배님께서 흑천의 장문이신가요?”
봉황성모가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 봉목에 슬픔이 가일층되었다.
“그렇다면 감히 누가 선배님 같은 분을..흑천의 장문이 누구인가요?”
만개한 꽃에 비유할 만한 여인, 봉황성모는 복면을 벗은 이후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거나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어 그녀 스스로의 복잡하고 뒤헝클어진 심정을 표현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수란의 말이 이어질수록 봉황성모의 눈빛만이 차츰 어둡게 변할 뿐 벙어리인양 여인은 도톰하게 자리잡은 매혹적인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중원에서 성모라 칭함을 받는 성모님께서 흑천 같은 암중의 세력에 몸을 담고 계시다니..그 동안의 위명에 커다란 오점이 남는 행위가 아닌가요? 신비의 봉황곡은 강호무림을 사마외도의 무리들로부터 은연중에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요? 지금같이 어지러운 세상, 이민족의 황실이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한 이 시기에 선배님 같은 분이 나서서 질서를 바로 잡아주셔야 되는 마당에 중원을 어지럽히는 검은 무리들과 같이 하다니..그러고도 어찌 봉황성모의 명호를 쓰실 수가 있나요?”
“....”
우아한 봉황성모의 아미가 곱게 찡그려지면서 봉황성모의 입가에 살짝 피가 보였다. 이를 악물다 보니 여린 입술이 터져 나갔나 보았다. 몹시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벗어든 복면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심각한 심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나는..”
퍼엉..
봉황성모가 떨리는 음성으로 무슨 말을 막 하려는 찰나 신호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에 불꽃이 하나 피어 올랐다. 봉황성모는 그 쪽을 향해 잠시 눈을 고정시키더니 다시 눈길을 아환과 제갈수란 쪽으로 돌렸다. 되돌려진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전의 심란한 모습이 사라지고 거의 무표정할 정도로 냉랭히 얼굴을 굳히고는 눈을 들어 아환과 제갈수란을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쳐다 보았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할 시간이군요.”
무심한 음성, 조금전의 떨리는 음성과 비감어린 눈빛은 간데 없고 냉정한 기운을 발하는 초절정고수로 탈바꿈한 봉황성모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하얀 소수에서 투명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상당한 진기를 끌어 올려 출수를 하려는지 점점 소수는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휘황찬란한 보석을 한낮에 들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환히 빛나는 두 손은 서서히 봉황성모의 가슴쪽으로 올라갔다.
“흑천의 성격을 대충 알 것 같네요.”
금방이라도 손을 쓸것만 같은 봉황성모의 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제갈수란은 봉황성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적어도 봉황성모를 부릴 정도라면 흑천의 꽤 수뇌급의 인물의 명령에 의하여야할 터, 이 곳 형산어림에 그 정도의 위치에 인물이 있다는 것이 하나예요. 그 동안 정보망에 수집된 흑천의 본거지가 강북이라 파악되었는데 이 곳 호남에 수뇌급이 존재한다 함은 철저히 세력을 분산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인원 하나하나가 점조직화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하지요.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신주오존 중의 일인인 봉황성모 선배님 같은 분을 본의아니게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어떤 수단인지는 몰라도 능히 오존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그것도 옳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하나 하나 제갈수란이 말을 뱉어내었다.
“흑천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도무림과는 등을 돌리고 있는 듯 하네요. 않그런가요? 선배님.”
“과연 다지현봉답군요.”
봉긋이 솟은 가슴어림까지 광채를 발하는 두 손을 든채로 담담히 그 말을 받는 봉황성모였다.
“이제 그만하면 저 소협이 어느 정도 상세를 회복한 것 같은데..더 이상의 시간은 필요없겠죠?”
뜨끔..
아환과 제갈수란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생강은 늙을수록 맵다더니 지금껏 제갈수란이 계속 봉황성모에게 말을 붙인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 봉황성모라는 초고수는 진작부터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다 알고 계시니까 뭐 더 드릴 말씀은 없네요. 하나만 더 물어도 되요? 흑천의 주인은 신주오존인가요?”
“...”
“대답하실리 없죠. 휴~.”
“그는..그는..위선..”
무어라 말을 하려던 봉황성모가 말을 채 끝맺지 않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시나무 떨 듯 봉황성모의 전신이 세차게 떨렸다. 그러더니 하얗던 봉황성모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홍조는 눈가에서 시작되더니 뺨에 번진 후 급기야는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열병을 앓는 이 처럼 봉황성모의 얼굴에서 금새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바알간 색조가 번졌다.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무슨..”
“이..”
아환과 제갈수란은 순간적으로 변해버린 봉황성모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막 입을 열려던 아환은 말을 하려다 말고 귓가에 들려오는 가느다란 음성에 문득 옆의 제갈수란을 쳐다보았다.
‘기회예요.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야해요. 무언지는 몰라도 봉황성모는 어떤 금제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 금제가 막 발동을 하였고 그 증상으로 봉황성모가 저렇게 변한 것 같아요. 서둘러요. 상공!’
정말 그랬다. 봉황성모는 몸을 진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꼭 감은채 그 자리에 있었다. 휘황한 광채를 내뻗던 양손은 이미 빛을 잃고 하얀 피부빛만 발하고 있었으며 한손은 가슴에 다른 한손은 아랫배 어림에 위치한채 잔떨림을 보였다.
“후..우..”
봉황성모의 들떠 있는 듯한 숨소리에 아환과 제갈수란은 눈을 마주치더니 순간적으로 뒤로 튕기듯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는 각자 최대한의 진기를 끌어올려 전력으로 경신술을 전개하였다. 무영행을 펼치는 아환과 제갈세가의 비전 경신술을 발휘하는 제갈수란은 순식간에 수십여장을 벌려놓고 온 신경을 뒤에 집중시킨채 도주를 하였다.
휘리릭..휘릭..휘리..
아환과 제갈수란이 도주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봉황성모의 뒤에서 아환과 제갈수란이 자리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섯 인형이 아환과 제갈수란의 쪽으로 날아가듯이 달려갔다. 이 곳에 등장한 다른 여러 인물들처럼 검은 경장에 복면을 한 것으로 보아 이 다섯 역시 흑천의 인물로 보였다. 쾌속한 몸짓으로 아환과 제갈수란을 뒤쫓던 그들의 경신법은 아환이나 제갈수란 못지 않은 절예라 여겨졌다. 잔뜩 준비를 하고 있다가 나온 사람모양으로 그들은 아환, 제갈수란과의 수십여장의 간격을 좁히지도 벌리지도 않은채 둘을 좇았다. 잠시후 그 뒤로 요요히 허공에 떠오르는 신형이 또하나, 붉게 물들은 안색에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채 일그러져 있는 여인, 봉황성모였다.
전력으로 질주하던 아환은 슬쩍 뒤를 돌아다 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보였다. 자신들과 수십여장의 간격을 두고 쫓는 이들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우아한 봉황의 자태가 보였다. 아환이나 제갈수란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보이는 신법과는 차원이 다른 무예를 봉황성모는 보여주고 있었다. 느릿 느릿 떠올라 너울거리는 듯 보이지만 앞서 도주하고 있는 자신들과 그녀, 봉황성모 사이의 공간은 접혀져 있는 것처럼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붉은 혈광을 곱디 고운 봉목에서 줄기 줄기 내뻗으며 아환등을 뒤쫓는 봉황. 가히 혈봉황이라 할 귀태(貴態)였다.
아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 있지 않아 자신과 제갈수란은 저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험한 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환은 제갈수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가늘은 입술을 꼬옥 다문채 앞을 보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제갈수란의 반듯한 이마에 송글 송글 땀방울이 맺힌 것이 보였다. 채 회복이 되기 전에 신법을 발휘한 때문인지 안색 역시 많이 창백해 보였다.
‘건곤의 화(化), 진(進)’
양의심결을 운용하여 어렵게 어렵게 진기를 나누었다. 무영행을 펼치는 것을 계속한 채 아환은 양손에 각각 화와 진의 기운을 응축시켰다. 아환의 얼굴에서 비오듯 땀이 줄지어 흐르는 것을 보아 지금 그도 최대한의 내력을 짜아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아환의 등뒤 십여장의 거리에 까지 봉황성모의 기세가 느껴졌다.
‘수란, 나중에 보자!’
거구를 제갈수란의 뒤에 붙이고 아환은 양손을 포개어 제갈수란의 등뒤에 갖다대었다. 화결을 짚은 손은 제갈수란의 등에 직접 닿았고 그 손위에 진결의 손이 덮어졌다. 그러더니 아환은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내력을 터뜨려 신형을 제갈수란의 등에 밀착하다시피 가져간 후 온힘을 다해 두 손을 떨쳐 제갈수란을 앞으로 밀어내었다. 아환은 제갈수란을 살리고 싶었다. 아마 그 이유는 아환이 제갈수란을 절실히 사모해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집안이 멸문된 후 아환에게 있어서 여인을 만나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였다. 제갈수란 역시 그러한 목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아직 아환의 뇌리 속에는 진청청의 잔영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갈수란을 뒤로 밀수도 있었지만 아환의 잠재된 기억 속 진청청의 모습이 되풀이되서 제갈수란과 겹쳐지고 있었기에 아환은 제갈수란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환이 뒤에서 밀어주는 강력한 추진력에 의하여 수배의 증폭된 속도로 제갈수란의 교영이 폭발적으로 쏘아져나갔다. 제갈수란은 자신의 몸을 휘어감은 무형의 기운이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자 곧 그 힘이 아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돌린 눈속에 아환이 양 입가에서 두 줄기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잡혔다. 제갈수란의 깊은 눈에 여러 가지 혼재된 기이한 감정이 아로새겨졌다. 괴로움일까? 의아함일까? 복잡한 눈빛으로 두 발로는 계속 경신술을 펼치고 있지만 고개는 돌린채 아환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제갈수란의 작은 신형이 점점 멀어져 갔다.
아환은 무리하게 끌어올린 진기로 인하여 아물려던 내상이 심중해졌다. 아환은 제갈수란을 밀어붙임과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 여태까지 자신이 달려가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렸다. 억지로 진기를 운용하여 역행한 것이라 기혈이 들끓어올라 다물어진 입을 헤집고 피가 흘러나왔다. 낮게 침잠된 두 눈은 제갈수란의 뒷모습을 잠시간 보다가 획 돌려 바로 수장 뒤에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환상 같은 봉황의 그림자와 부딪혀 갔다.
쿠오오..
거대한 도기가 공기를 가르는 기성과 함께 해일처럼 봉황성모를 덮쳐 들었다. 건곤형의 붕, 지난 격돌과 별 차이가 없는 무결이었다. 전번에 봉황성모가 어렵지 않게 파훼한 무공이지만 아환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그리고 가장 뚜렷이 체득했다고 생각되는 건곤형의 응용 방식이기에 아환은 쾌속한 기세에 더불어 힘을 실은 것이었다.
펑..퍼엉!
굉음이 터져나왔다. 봉황성모는 아까와는 틀리게 경력을 흩트리는 대신에 경공(硬功)으로 부딪혔다. 두 섬섬옥수가 붉은 빛에서 일순 환한 백광이 어린다 싶더니 연달아 도세를 쳐대었다.
“읍..”
장대한 아환의 거구가 뒤로 밀려났다. 일장 가까이 밀려나 휘청거리는 신형을 가다듬는 아환의 앞에 수개의 발자국이 깊숙히 땅을 파헤친채 남겨져 있었다. 아환은 진탕되어 역류하는 기혈을 억누르면서 발목어림까지 묻힌 자신의 발을 땅에서 빼내었다. 크게 내상을 입었는지 아환의 입에서는 이제 핏줄기가 아닌 핏덩이가 뭉클 뭉클 배어나와 벗은 상체를 타고 바닥에 고였다.
조금전의 충돌로 아환이 낭패를 심하게 본것과는 달리 봉황성모는 반탄되어 오는 기운에 순응을 하며 서너자 교영을 물리더니 바닥에 내려섰다. 봉황성모 역시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다소 창백해지며 검은 상의가 군데 군데 찢겨져 나갔다. 땅에 내려선 봉황성모의 얼굴이 차츰 제 빛깔을 회복해 갔다. 붉은 기운도, 조금 하얗게 변하였던 안색이 곧 원래의 백옥 같은 투명한 빛깔을 드러내었다.
어느새 봉목에 담겨있던 기이한 열욕과 혼돈의 기운이 가라앉고 원래의 깊게 침잠된 투명한 눈빛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방금의 격돌은 봉황성모 역시 충분한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로인하여 정돈되지 않은 이성으로 강공을 펼쳤기에 강렬한 충격이 발생하였고 이는 봉황성모에게 이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길..좋지 않군..’
가닥 가닥 끊기는 진기를 어렵게 끌어올리며 봉황성모를 쳐다보던 아환은 첩첩산중이었다.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당할 자신이 조금도 있지 않은데 하물며 저렇게 냉정하게 본 모습을 찾은 모양이니 앞으로는 더욱 난해하리라.
휘익..휘리릭..
그제서야 봉황성모를 뒤따라 오던 다섯 인형들이 장내를 거쳐 제갈수란이 향했던 쪽으로 계속하여 몸을 날렸다. 사전에 묵계가 있었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눈길도 주지 않고 그들은 아환과 봉황성모의 대치상태를 지나쳐 갔다.
“강하군요. 얼마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그 정도의 성취를 얻었다니..”
“성모야 말로 대단하오. 과연 오존의 수뇌, 정말 강하오.”
“저 멀리 사라진 저 여자 후배는 잡기가 쉽지 않겠군요. 소협과 별 차이가 없는 무위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벌써 이렇게 거리가 벌어졌으니..”
흠칫.
속으로는 경악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채 하는 아환은 봉황성모의 말, 제갈수란이 자신과 별 차이가 없는 무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제갈수란은 본신의 절예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협의 정인인가요? 그래서 그녀를 살리기 위하여 그런 행동을 한건가요?”
“...”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왜 그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차후에 무림을 영도할 만한 젊은 영웅을 스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러는 선배는 왜 흑천에 몸을 담은 거요?”
계속 진기를 다스리며 몸을 추스리는 아환의 질문에 봉황성모의 눈빛에 전과 같은 슬픈 기운이 묻어나왔다.
“글쎄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독백처럼 나직히 중얼거리는 봉황성모, 그 음색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봉황성모는 눈을 내리 감은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환에게 몸을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일까? 아환은 봉황성모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지런히 진기를 순환시켜 기혈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에 출두하여 처음 당해보는 절망감이 스며들자 세차게 주먹을 꽉 쥐어 그것을 떨치려 하였다.
“선배.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럴까요? 준비는 되었나요?”
비무를 하는 사람들처럼 둘의 대화에 살기라던지 분노라던지 하는 감정이 사라졌다. 한쪽은 죽이려는 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살려는 자였다. 팽팽한 살기가 대기를 가를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흉험하게 느껴졌다.
“가겠소.”
‘건곤의 쾌(快)’
아환의 발이 태극의 방위를 밟으며 작은 원을 그리며 맴을 돌았다. 그러더니 그 태극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아환의 움직이는 속도도 급격히 빨라졌다. 아환은 도를 든 손으로는 쾌자결을 운용하면서 다른 한손에는 진자결을 운용하여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아환의 보결에 그려지는 태극의 지름이 계속 펼쳐지며 급기야는 삼장여의 거리에 있는 봉황성모의 신형까지 그 영향권안에 들어섰다.
투명한 눈빛으로 아환의 보결을 밟는 동작을 아무런 준비없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봉황성모는 아환의 태극의 원이 자신을 휘어감으며 은근한 암경이 자신을 옥죄어 오자 그제서야 진기를 방출하여 짓눌러오는 압력에 대항하였다. 가볍게 생각하여 오성의 공력으로만 대항하려던 봉황성모는 점점 중첩되면서 압박감이 강해지자 서서히 그에 맞추어 내공을 끌어올렸다.
스읏..
찰나 일직선으로 시커먼 선이 섬전처럼 수평으로 자신의 가슴어림으로 쇄도해왔다. 극쾌의 빠름! 쾌도를 바라보는 봉황성모의 눈에 감탄이 잠시 실렸다. 왠만한 고수라 할지라도 이 쾌도를 쉽게 막지 못하리라. 더군다나 태극신보의 경력이 옥죄어 오는 동안은 더더욱 그리할 것이다.
스르르..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봉황성모가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앞을 아환의 도가 스치며 지나갔다. 신형을 완전히 도의 궤적에서 빼어냈음에도 도에 담긴 여력은 봉황성모의 내장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면서 살짝 그 도기가 미세하게 닿았는지 검은 경장의의 가슴부분이 조금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유백색이 살결이 조금 내비추어졌다.
일반적으로 강호에서 여인들의 중요부위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명망있는 이들은 혹시라도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상당히 수치스러워 하였고 심지어는 패악무도한 색마로 오인받는 적도 있었다. 허나 조금 전 아환이 칼을 휘두르면서 봉황성모의 가슴부위를 노렸고 그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속살이 드러났음에도 아환과 봉황성모의 표정에는 수치심이나 당혹감등은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찾으라면 탄복이랄까?
아환은 칼이 한바퀴 원을 크게 그리며 지나가자 억지로 칼의 궤도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몸을 빙글 돌려 칼의 기세에 몸을 실었다. 그 속도가 거의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아환의 칼끝이 다시금 봉황성모를 향하자 허리춤에 있던 진자결을 담은 다른 손이 도의 손잡이를 밀어쳤다. 그러자 노도와 같은 강력한 내기가 도신에 실리면서 일직선으로 검후의 젖가슴쪽으로 뻗어갔다. 전신의 내력을 총 집중시켜서 발휘한 일합이었다.
엄청난 경력을 담고 자신에게 쇄도해 들어오는 거무튀튀한 거도를 응시하는 검후의 눈에 경탄의 감정이 담겼다. 연결동작으로 뻗어오는 이 도세를 막을 무인이 무림에는 그리 흔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황성모의 두 손이 위로 올라간다 싶더니 환한 은빛을 내면서 아환의 도세를 마주쳐갔다. 은색 광채는 아환의 도와 닿았을 때 폭발적인 빛을 더하더니 도신을 두손으로 잡았다. 양쪽 면에 각각 한손을 대고는 도의 전진을 막은 것이었다.
휘청.
파드드듯..
봉황성모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의 흑의가 세찬 바람을 맞은듯 거세게 휘날렸다. 그러나 그뿐, 봉황성모는 더 이상의 물러섬이 없이 도신을 잡고 아환의 눈을 마주 보았다. 봉황성모의 진경에 다다른 무위의 벽은 아환이 뚫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앞으로 진격하려던 아환의 ‘건곤형의 진’의 내력이 채 발산되기도 전에 봉황성모의 힘에 눌려 고스란히 아환의 체내로 되돌아왔다. 그결과 진기가 흐르는 경락과 내장, 혈맥등 아환의 신체는 그 충격이 역류하자 진탕되고 파괴되었다.
“크아악!”
털썩.
아환의 입에서 분수같이 붉은 피가 허공으로 터져나왔다. 새빨간 기혈과 내장 부스러기까지 섞여 산산히 비산하였다. 아환은 반탄력에 도를 놓치고 무지하게 크고 세찬 둔기에 전신을 강타당한 사람처럼 뒤로 튕겨져 이장 여를 날아간 후 땅으로 널부러졌다. 떨어진 후에도 몇바퀴를 뒹굴면서 바닥의 돌멩이와 나뭇가지에 군데 군데 살갗이 찢겨나갔다.
반탄 여력이 사라진 후에도 아환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면서 일어나지 못했다. 계속해서 입으로 피가 줄지어 흘러내렸고 헝클어진 내기는 밖으로 뿜어나가지 못하고 아환의 경맥을 따라 제어불가능하게 날뛰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물가물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점점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져갔다. 아환은 흙에 얼굴을 묻은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온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신경마디가 가닥 가닥 끊어져 극렬한 통증이 아환을 휘감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 하지만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소진되어 일부나마 남아 있던 공력은 아환의 몸을 점점 훼손하고 있었다. 그러한 아환의 처참한 상태를 본 봉황성모는 손에 들고 있던 거도를 아환의 옆에 던졌다. 바닥에 꼿꼿이 꽂히는 칼.
그때 아환의 신체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외부에서는 보지 못할 변화였다. 단전과 기해를 비롯하여 전 혈도 곳곳에서 기이한 열류와 냉기가 솟아났다. 그 기운은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아환의 온몸을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 둘과 또다른 사이한 기운이 음유하게 내재되어 그 뒤를 따라 아환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음양신단의 약효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사한 기류였다.
아환의 몸에 채 융합되지 않고 상당부분 뭉쳐 있던 음양신단은 천고의 영약답게 아환의 현 상태가 매우 심중함에 반응을 하여 급격히 용해되기 시작하였고 뜨겁고 찬 음양의 성질을 갖는 기운이 아환의 경락을 따라 아환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또하나, 음양신단에 눌려 있던 기운 역시 음양신단이 폭주함에 따라 속박에서 벗어나 아환의 신체 곳곳에 퍼져나갔다.
봉황성모는 아환이 튕겨져 나가 쓰러지고 바닥에서 꿈틀거렸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아환의 신체가 곳곳에서 불룩 불룩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숨을 쉬듯 올라오던 근육질의 남성의 육체가 급기야는 전신 곳곳에서 빠르게 휘돌아다니고 물이 끓어오르듯 아환의 몸에서 일어났다.
‘뭐지? 주화입마인가?”
봉황성모의 의구심은 곧 사라졌다. 아환의 몸이 떠오르듯 일어서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빳빳히 굳은 시체마냥 아환의 몸이 쓰러진 그 상태에서 머리부터 땅에서 떨어져 바로 일어섰다.
“헛!”
아환을 바라보던 봉황성모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었고 부릅뜨여진 두 눈에서는 혈광이 이글거렸다. 전신의 모든 혈맥은 터질 듯 불거져 나와 있었고 아환의 몸에 가득차 있는 괴기운은 아환의 몸을 끊임없이 씰룩였다. 벌어진 입에서 탁한 침이 흘러 아환의 가슴어림을 적셨다. 불타오르는 것처럼 혈광을 내뿜는 두 눈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졌다.
봉황성모는 순간적으로 변화한 아환의 괴경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 역시 수없이 무림을 질타한 무인으로서, 여걸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존재였다. 그런 봉황성모조차 지금 같은 광경은 처음 보았다. 무공을 대결하다가 내력을 주체할 수 없어 주화입마를 당하는 경우는 무림에도 종종 있었다. 심마에 빠져든 이들도 있었다. 허나, 주화입마를 당한 것처럼 보이는 상대가 저렇게 흉험한 기세를 뿜어내는 것은 본적도 들은적도 없었다. 처음 아환을 접하였을때보다 오히려 더욱 강맹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어쩌면 자신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극강의 힘이었다.
아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앞에 꽂혀있는 칼을 잡았다. 아환은 그 칼을 뽑아들음과 동시에 앞으로 한발 내딛고는 빠르게 주먹을 뻗었다. 위맹한 경력이 아환의 정권에 담겨 봉황성모의 얼굴로 날아갔다. 풍영섬, 무이관의 풍도십팔식이 아환의 손에서 펼쳐졌다. 섬전 같은 빠름이 봉황성모의 고운 얼굴로 짓쳐오자 봉황성모는 장력을 일으켜 그 손에 맞섰다.
펑!
폭발음과 함께 아환의 신형이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휘청거리던 아환의 몸이 재차 봉황성모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봉황성모 역시 뒤로 한걸음 물러선 후 돌진해 오는 아환의 공세를 마주쳐 갔다.
펑..펑..펑..
연이은 폭발음이 터져나오고 아환의 신형이 실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땅에 처박힌 아환의 몸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아까와 똑같이 뻣뻣히 일어섰다. 차이점은 더 빨라졌다는 것. 땅을 박찬 아환의 발이 보결을 밟는다. 이제 의식이라고는 없는 아환의 신형은 천궁의 천화선보의 방위를 따라 봉황성모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아환의 칼이 움직였다.
고오오..
대기가 뒤흔들리는 기괴한 음향이 번져나갔다. 아환의 칼은 느릿하게 아래에서 위로 들리더니 하늘을 향해 도끝을 겨눈채 그대로 봉황성모에게 접근해 갔다. 서서히 도신이 아래로 내려오고 그 도가 그리는 궤적의 앞에 봉황성모가 서있었다.
웅장한 기운이 봉황성모에게 물밀듯이 밀려갔다. 봉황성모의 안색이 굳어졌다. 희디흰 빛을 내는 소수가 무형의 힘에 맞서 봉황의 날개짓을 펼쳤다. 원을 그리듯, 그러다 안으로 두 손을 끌어당기고 앞으로 뻗어낸 봉황성모의 봉황지존수가 아환의 도에 충돌하였다.
펏..
미약한 기음이 그 충돌 지점에서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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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원래 구상한 양이 채 되지 않아 올리기 힘들어 못올리겠다 싶었는데 그냥 여기까지 올립니다. 이 것도 회사에서 눈치를 보아가며 쓰는 글이니 무어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디 계획으로는 이번에 5-6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시간이 허락하질 않네요.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럽고..싼 노트북이라도 하나 사야하나..
야설인데 설정을 너무 많이 넣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70 비추천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