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라기(獸羅記) 60번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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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지긋이 눈을 감은채 바닥에 주저 앉은 제갈수란은 나직한 신음을 토해내었다. 눈가에 주름살이 포개지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힘겹게 진기를 끌어올려 체내에 침투한 독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유일한 옷가지인 상의가 펄럭거리며 들어 올려지고 살짝 벌어진 다리사이로 매끈한 비소가 엿보였다. 내밀한 연붉은 속살이 삐죽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언뜻 보면 꽤 욕정을 불러 일으킬만한 자세이기도 하였지만 제갈수란의 현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주르르..
얇은 입술 사이로 한줄기 선혈이 줄지어 내렸다. 힘겹게 제갈수란이 몸을 움직여 가부좌를 틀었다. 여린 여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척 힘이 드는듯 고운 안색이 찌푸려지고 미약한 고통의 침음이 내뱉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다리를 움직이고 상체를 세워 결국은 제갈수란은 결가부좌를 취할 수 있었다. 옥주가 크게 열려 그 사이의 음부가 아환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제갈수란이었다. 오밀조밀한 아래의 비열이 기묘한 형태를 취하며 환한 달빛에 뚜렷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렇게 제갈수란이 내공을 일으켜서 운기요상을 하려는 동안 아환은 멍하니 서서 제갈수란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제갈수란의 특정부위를 뚫어지게 노려보듯 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주 미세한 솜털외에 아무런 터럭도 보이지 않는 제갈수란의 비부는 아환에게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또렷이 되살아나는 과거의 기억, 거친 음마들의 흉기가 출입하던 진청청의 비처와 처절하게 울부짖는 진청청의 비명등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 당시도 그랬다. 이렇게 달빛이 환하였다. 이런 자그마한 야산이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하남팔검의 시체와 피웅덩이, 그리고 뒹굴고 있는 잘려진 팔, 수급등이 처참한 광경이 더하여져서 아환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그래서였을까? 아환의 기억속에 뚜렷이 새겨진 과거의 장면은 되풀이되어 살아나서 아환의 정서를 끊임없이 자극하였다. 그가 상운진을, 그리고 검후 조설하를 대할 때 애정이 없는 정사를 하고 그녀들을 취한 것이 과거에 대한 보상일지도 몰랐다. 또한 그녀들의 체모를 다 없애버린 것도 무의식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만들려 하였는지도 몰랐다. 그가 기억하는 유년기의 여자는 오직 하나, 모친 진청청이었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로서의 의미와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여인으로서의 의미가 혼재된 존재였다. 아환은 여인들의 음모를 없앰으로서 일그러진 향수를 채우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욕망이 비참한 옛 기억에 현실을 대비시켰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외진 산속에서 또다른 무모의 여체를 접하는 것이 급격히 그에게 십여년전의 분노를 일으켰다.
질끈.
아랫입술이 아환의 위아래 이빨에 깨물려져 일그러졌다. 칼을 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 도의 손잡이 부근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치열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어느새 눈자위는 핏발이 올라 붉게 물들었고 입가가 씰룩였다. 급기야 잘근 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터져 붉은 액체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미지근하면서도 비릿한 혈향이 아환의 입안에 맴돌고 그제서야 아환은 퍼뜩 이성의 끈을 다시금 되잡을 수 있었다.
주섬 주섬 바닥에 떨어진 짐보따리에서 아환은 작은 옥병을 꺼내어 들고 마개를 열러 조그마한 환약하나를 꺼내었다. 청아한 향기가 감돌았다. 과거 악서령을 취할 때 덤으로 얻은 화산의 요상환약이었다. 악서령의 말로는 내상치유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아환은 조심스레 제갈수란의 입에 환약을 가져가 복용을 시킨다음 제갈수란의 뒤로 돌아가서 아환은 자세를 잡고 손바닥을 제갈수란의 등에 갖다대었다. 서서히 아환은 무상심결을 끌어 올려 맞닿은 손과 경맥을 통하여 진기를 주입시켰다. 거대한 진기의 흐름이 유유히 제갈수란의 체내로 흘러들어갔다.
“왝!”
제갈수란이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내었다. 대략 두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제갈수란의 안색은 조금 혈색을 되찾았다. 체내에 투입된 폭신마공의 독기와 내상으로 인한 울혈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었다. 거의 반시진 가량 제갈수란에게 진기를 주입하던 아환은 근처에 있는 작은 바위위에 주저 앉아 눈을 감은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때로는 눈가가 꿈틀거리고 입매가 일그러지기도 하였다가 곧바로 무감정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움켜쥔 커다란 주먹과 전박에 근육이 솟아 올랐다. 그러기를 얼마간 계속하다가 아환은 크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좌우로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제 실행할때가 되었군. 예상이 맞는다면..’
뜻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환은 서서히 진기를 운용하여 재차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번뜩이는 신광이 어린 눈으로 아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감지되었다. 그 무언가가 주변을 천천히 조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거무스름한 음영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속에서 미미하게 흔들거리는 것이 얼핏 보였다.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바람한점 없는 지금 괜히 나뭇가지가 출렁일리 없었다. 그 어떤 생물체가 움직이는 것이리라. 그것이 야생의 짐승일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도 싸늘하게 냉각된 공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살기로 보아 결코 아환과 제갈수란에게 친근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닌 적일 것이다.
“후우”
마침 그때 크게 숨을 내쉬면서 제갈수란이 깨어났다. 반짝! 샛별 같은 광채가 일순 제갈수란의 봉목에서 번뜩였다. 숨소리에 아환은 눈을 돌려 어느 정도 발그스레한 안색이 되돌아온 제갈수란을 보았다. 당연히 내상이 완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간의 요양을 해야 아마도 본신무공을 되찾을 것이다. 무림의 금기시되는 마공절예라 여기어지는 폭신마공이 그리 만만할 리 없었다. 전신의 잠력을 일시간 끌어올려 몸을 산산히 폭발시키는 기공이 폭신마공이었다. 그렇게 조각난 살점하나, 뼈하나, 핏방울 하나하나가 독성을 지닌 극악의 암기로 변하는 것이 폭신마공이었다. 비록 제갈수란이 폭신마공을 깨닫고 다급히 방어를 했지만 그 영향권에서 미처 벗어나진 못하였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지현봉 제갈수란의 무예수준은 훨씬 고강하였다. 혈장미 석영을 치료하느라 그 맥을 짚어본 아환은 제갈수란의 경지가 결코 석영의 아래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괜찮은가?”
육체적인 접촉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환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평어가 흘러나왔다. 제갈수란은 순간적인 눈가에 이채를 띄었지만 곧 순응을 하고 받아들였다.
“지독한 마공이예요. 폭신마공은..가까스로 내상을 다스리긴 했지만 며칠 요양을 해야할 듯 싶네요. 상공께서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으셨나요? 아까 기혈이 흔들리신 것 같던데..”
“나는 이상없다.”
“다행이네요.”
“아니, 다행이 아니야.”
아환이 중얼거리면서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갈수란 역시 아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혜지가 번뜩이는 아름다운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군요. 결코 다행이라 할 수 없죠.”
휙.
아환의 손을 떠난 하얀 물체가 제갈수란에게 날아갔다. 제갈수란이 잡고 보니 다름아닌 옷가지, 자신이 입고 있다가 아환의 손길에 벗겨진 하의와 내고였다. 재빠른 동작으로 아랫도리를 작은 천으로 감싼 후 여인은 하의를 입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갈라진 상의 사이로 속살이 언뜻 언뜻 보이거나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단정하는 등의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어둠속에 있는 그 무엇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지금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이리로 와.”
아환의 손짓에 제갈수란이 다소곳이 아환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환은 제갈수란이 자신의 근처에 가까이 오자 갑작스럽게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강렬하게 입을 제갈수란의 조그맣고 바알간 입술에 갖다대었다. 뜻밖의 아환의 행위에 제갈수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팔을 뻗어 아환의 목을 휘감았다. 신장의 차이가 꽤 있지만 아환이 상체를 조금 숙였고 입술이 마주 대어있는 상태라 제갈수란이 아환의 목을 끌어안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순간, 아환의 발이 힘차게 땅을 굴렀다.
팍!
쏜살같이 아환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한쪽의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무영행(無影行), 그림자조차 남지 않는다는 빠른 경신술이 아환의 발에서 전개되었다. 제갈수란에게 옷을 던져줄때부터 아환은 전신의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충분히 내기를 순환시켜 내기를 충만케 한다음 아환은 제갈수란이 다가오자 입술을 마주치고 바로 달려나간 것이었다. 입을 맞추는 뜻밖의 동작은 은밀히 주위를 조여오는 세력들로부터 작은 틈을 얻을 수 있었다.
“헛!”
“추격하라!”
헛숨 쉬는 소리와 잇따른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수풀 속에서 수십의 신형이 아환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서둘러 둘을 뒤따랐다.
이들은 아환과 제갈수란의 주위를 둘러싸며 포위망을 좁히려다 아환이 순간적으로 제갈수란의 입술을 빼앗자 당혹스러운 감정과 함께 찰나간 주춤하였다. 무슨 의미일까? 주변에 널부러진 시신들의 잔해와 상부로부터 전달되온 명령에 의하면 저 주환이라는 작자는 범상치 않은 고수라 하였다. 능히 무림의 칠룡을 제압할만한 무위를 가지고 있다 하였다. 게다가 또다른 한 사람은 사화 중의 다지현봉이 아닌가? 숫적 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달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급히 내려온 명령이기에 여유있는 숫자의 고수들을 모으지 못하였기에 이 일을 맡은 흑천의 사당주는 서둘러 하남팔협을 선봉으로 급파하였고 뒤이어 무리들과 달려온 것이었다.
하남팔협이 남긴 표식대로 추적을 하여 마침내 이곳에 다다른 사당주는 비릿한 혈향과 함께 자기에 비하여 약간 밖에 손색이 없는 하남팔협, 자신이 속한 당의 향주 여덟이 누워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더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그러다 예상외의 행동에 주춤거렸고 결국 조그마한 허점을 보인 것이었다.
‘제길! 저 년이 운공조식을 할 때 공격을 했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허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서 전력을 다해 뒤를 쫓아라!”
아환과 제갈수란을 뒤쫓는 이들은 온힘을 다하여 몸을 날렸다. 선기를 빼앗긴터라 아환에 비하여 뒤로 쳐진 이들은 부지런히 발을 굴렀지만 아환과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차츰 차츰 멀어졌다. 가진 바 내공이나 경신술 모두 아환을 쫓는 이들은 아환에 비해 낫지 않았다. 아환이 제갈수란을 안고 있다하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갈수란 역시 재녀답게 아환이 신형을 뽑자 의도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진기를 운행하여 최대한 자신을 가볍게 해서 아환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거의 화경에 근접한 무위를 가진 여걸다왔다.
숨가쁜 추격전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나뭇짐을 하느라 항산 어귀 상가진에서 수년동안 산을 탔던 아환이었다. 그에 반해 아환등을 쫓고 있는 자들은 자객이나 야전등을 별로 경험하지 않은 무사들, 나름대로 도심지에 터를 잡고 위세를 떨친 이들이라 대부분 야산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이들이 아환을 따라잡지 못하는 또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아환이 산위로 달려 올라가다 내려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종적을 놓치고 사당주는 품에서 작은 원통을 하나 꺼내어 위를 겨냥하며 원통 끝에 달리 줄을 당겨 신호를 쏘아 올렸다.
펑..
허공에 작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산개(散開)!”
아환등을 전력으로 쫓던 사당주는 수하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사당주의 얼굴에는 아환을 놓쳤음에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아환이 향하던 방향에 누가 있는지 알기에 사당주는 일단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절대고수! 정말 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환이 달려가는 방향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자신들은 그 고수에게 아환의 처리를 맡기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은 아환이 도망가지 않도록 주변을 감시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그 절대고수가 처리하리라.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면서 쾌속하게 달려나가는 아환은 뒤를 쫓는 이들의 이목을 따돌릴 찰나 그들이 갑자기 흩어지면서 넓게 주위를 포위하며 올라오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허나,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기에는 아직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느끼고 아환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달렸다.
무성히 우거진 숲을 지나고 작은 시내를 건너며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도 하는 등 아환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기를 거진 시진 반가량이 흘러갔다. 품에 안겨 있는 제갈수란은 눈을 지긋이 감은채 은은히 전해오는 사내의 체취에 취한 듯 갸녀린 육신을 아환에게 맡긴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반짝!
아환의 눈이 빛났다. 정면에 보이는 우거진 수풀옆 작은 바위가 얽힌 곳이 눈에 들어오자 은신처를 찾았다 생각한 아환은 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계속 몸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발을 구르고 신형을 띄운다는 것은 그만큼 노출될 확률이 많았다. 나뭇가지를 밞는 소리나 땅을 구를 때 발생하는 음향에 주의하여야만 했다. 생각컨대 이 야산은 상당부분 흑천의 인물들이 매복되어 있으리라. 아환은 서둘러 산을 벗어나기 보다는 몸을 숨길 곳을 찾은 후 상황을 보아가며 행동을 정하려 하였다.
아환이 숲 근처에 거의 도달할 무렵이었다.
피잇!
잘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일직선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고는 해도 깊은 밤중이었다. 눈으로 사물을 분별하기 이전에 전신의 신경이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본능적으로 험중한 기운을 느꼈을때 이미 그 물체가 근거리에 도달한 것을 알아채고는 아환은 제갈수란을 안은 몸을 뒤틀면서 손에 쥐고 있는 도를 도신을 세워 짓쳐들어오는 기물을 막아갔다.
펑!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음.”
깔리는 신음. 아환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새어나왔다. 창졸간의 기습이라 내기를 충분하게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도신에 주입된 내력은 물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진해 가던 아환의 신형이 뒤로 퉁겨졌다. 충격의 여파로 대여섯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가까스로 기세를 완화시킨 아환은 슬쩍 눈을 돌려 자신의 도를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점 하나가 찍혀져 있었다. 내심 묵현금에 이 정도 흔적을 남길 상대와 그 기물체가 궁금한 아환은 긴장을 하고 눈을 돌려 물체가 날아온 방향을 응시하였다.
흠칫.
주춤 아환이 한걸음 뒷걸음질 쳤다. 물체가 날아온 곳, 유령과 같이 한 인영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요요로히 처음부터 그 곳에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서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비추어지자 아환은 내심 크게 놀랐다. 틀림없이 앞에는 한 인간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은 전혀 존재감이 없었다. 아환이 눈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서있는 것 자체를 모를 정도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환은 꽤 수준이 있는 경지에 올라서 있다 생각했다. 비록 경험이 그리 많치 않지만 검후도 아환의 경지를 인정하였다.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무공을 가진 아환이었다. 그런 아환이 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라니..
아환은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을 받았다. 칼을 든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고수! 자신을 훌쩍 뛰어 넘는 고수다! 육척이 되지 않은 크지 않은 체구에 달빛에 반사된 그 인형의 윤곽을 보아하니 여인같았다. 잘록한 허리선이나 가슴부위의 음영으로 보아 사내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인물 역시 검은 복면으로 전신을 다 가리고 있었다.
번쩍!
복면인의 눈이 뜨여졌다. 아환은 일순간 벽력섬광이 온몸을 관통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주춤 주춤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정도면 인사는 되었겠지요.”
그리 크지 않은 말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란 음색이 여인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무색의 음성이었다.
“흑천인가?”
범접할 수 없는 무형의 기세가 아환을 칭칭 동여매었다. 태산 같은 위엄이 아환을 짓눌렀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아환은 정신을 추스려 그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
대답이 없다. 아환은 품에 안겨 있는 제갈수란을 내려놓았다. 제갈수란 역시 면전에 서 있는 인형이 극강의 대단한 사람임을 깨닫고는 아환의 품에서 벗어나 진기를 끌어올렸다.
“뜻밖이군요. 쉽게 그 것을 쳐내다니..화경의 경지를 넘어섰군요.”
일상의 대화처럼 쉽게 말이 뱉어졌지만 무음색의 기성은 아환과 제갈수란의 긴장감을 더더욱 일깨웠다. 아환은 슬쩍 눈을 돌려 조금 전 날아온 물체가 퉁겨져 나간 방향을 바라 보았다.
달빛에 미약하게 빛이 반사되는 조그마한 물체가 보였다. 동전이었다. 특이하거나 절세의 기물이 아닌 작은 동전 하나가 일그러진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동전이 자신을 물러서게 한 것인가? 아환의 등뒤로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이는 제갈수란도 마찬가지 였다. 그녀 역시 침중한 안색으로 찬찬히 앞에 서 있는 복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도중 아환과 제갈수란은 현연히 빛나는 두 안광 속에 잠긴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아환과 제갈수란에게 전달되어 왔다.
‘무..무엇이지? 이 기분은..비애인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외진 곳에 아환과 제갈수란을 제거하기 위하여 등장한 절대의 고수에게서 슬픔이 감지되다니..
“소녀 장안의 제갈세가의 수란이라 하옵니다. 선배님은 뉘신지요? 그 영명을 후배들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한낱 미물도 각자 자기 이름이..”
“용건은 간단하지요. 말그대로 본녀는 두 후배님들의 목숨을 취하려 왔어요. 굳이 통성명을 하면서 시간을 늘일 이유가 없다 생각되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하여 제갈수란이 말을 붙이자 친근하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그 말을 끊어 버렸다. 목숨을 취하려 왔다는 말을 하면서도 아환과 제갈수란은 약간의 살기도 느낄 수 없었고 그것이 아환과 제갈수란을 더 긴장하게 하였다. 저 복면 여인의 말은 추호도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아환과 제갈수란의 명줄을 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응당 보여야할 살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두 젋은 고수는 바싹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
‘진경! 진경의 경지!’
번갯불이 지나가듯 떠오르는 하나의 무공 경지, 진경이었다. 참된 경지, 현 무림에서도 칠왕과 오존을 제외하면 그 경지에 올라 선 인물이 없다 단언할 정도의 지고무상한 경지가 진경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 아환과 제갈수란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초고수가 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아환의 칼을 쥔 손은 이미 땀이 홍건히 흘러 밑으로 뚝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여태까지 진경의 고수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그와 가장 가깝다고 할 무예의 스승이자 성(性)의 상대자였다. 검후가 아환이 알고 있는 한 최고의 무위를 가진 고수였다. 그러나 검후는 아환에게 있어서 위협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극복해야할 존재였기에 공포감이라던지 두려움따위는 없었다. 허나, 자신들을 막고 있는 이 여인은 그와는 달랐다.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곧 출수하려 하였다.
‘일단..일단 부딪혀 본다.’
아랫입술이 질끈 물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줄이 툭 툭 불거져 나왔다. 조여오는 흑천의 인물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 질주로 경신술을 펼쳐 진기를 상당 부분 소진한지라 십성의 진기를 끌어올리지는 못하였지만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탓!
아환의 발이 크게 땅을 박찼다. 그러면서 도를 뒤로 크게 돌려 전사로 힘을 가한 후 아환은 순식간에 복면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여세를 이어 도신을 회전시키면서 일직선으로 복면여인의 목부위를 찔러갔다.
츠츠츠..
대기가 갈라지는 기음과 함께 강맹한 경기가 밀려들어오자 복면여인은 별 눈빛의 변화 없이 하얀 손을 밖에서 안으로 감아들 듯 원을 그리다 천천히 앞으로 밀어내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잠경이 맹렬히 회전되어 들어오는 아환의 거도에 맞섰고 곧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욱!”
외마디 비명과 함께 커다란 인형이 돌진하던 기세와 버금가는 속도로 뒤로 튕겨졌다. 그와 반대로 내기로 벽을 쌓아 공세를 막아낸 복면여인은 상체를 크게 움찔거렸을뿐 제자리를 지켰다. 명백한 복면 여인의 우세였다.
비릿한 핏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땅에 착지한후 뒷걸음질치며 여력을 해소한 아환의 입가에는 한줄기 붉은 선이 그어졌다.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심중하지는 않았지만 단 한수의 교환으로 명백히 우열이 가려졌다. 더군다나 전력을 다한 자신과는 달리 저 여인은 가진 힘의 일부만 출수한 것처럼 보였다. 아환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강호출도후 최고의 고수였다. 그것도 자신과 실력의 차가 월등히 나는 그런 경지에 있는 고수였다.
“봉황귀원! 헛! 설마.. 봉황성모! 선배도 흑천의 소속이신가요. 어찌..어떻게..”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이없다는 투로, 당혹한 기색이 만연하여 제갈수란이 입을 열었다. 조금전의 한수, 봉황지존수(鳳凰至尊手) 봉황곡의 절예라는 것을 무림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는 제갈수란은 알아챌 수 있었다. 애초에 복면여인이 나타나면서 제갈수란의 자신의 알고 있는 바를 되새기면서 복면 여인과 일치할 만한 여고수를 찾았다.
일단 칠왕 중의 검후나 오존 중의 봉황성모, 요후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외에 보타신니라던지 곤륜서왕모라던지 하는 수많은 기인들이 뇌리에 올라왔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던 찰나 아환과 복면여인과의 격돌로 인하여 복면 여인의 출수로 그 무공 초식이 대한 지식을 검색하여 드디어는 그 무공이 신비한 세력인 봉황곡의 비전절공인 봉황지존수 중의 봉황귀일이라는 절대 방어초식임을 알아내고는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막 아환의 뒤를 좇아 아환을 공격하려 들어가려던 복면여인이 제갈수란의 말을 듣고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예의 그 기이한 감정이 가득 담겨진 눈빛으로 제갈수란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얼굴에 가져가 복면을 벗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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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약속을 가까스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오존 중의 하나가 나오는 군요..그런데 이 봉황성모는 비운의 초인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문득 문득..
어느 분께서 어색하다 말씀하신 부분에 관하여 설정을 잠깐 설명드리자면 본문(?)에 있는 것처럼 아환의 여체에 대한 부분은 일반 정상적인 성에 비해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제가 설명드리기가 좀 쑥스럽네요. ^^;)
추석때는 못올립니다. 아무래도 마당쇠 노릇을 좀 해야되지 않을까...싶네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해라!”라는 말처럼 좋은 추석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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