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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수라기(獸羅記) 40번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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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9 회 작성일 23-12-21 08:4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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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우(友), 살(殺) 二

(1)

형산, 호남성에 위치한 중원 오악(五嶽) 중의 하나.
다른 산에 비하여 산세의 매력은 적으나 많은 명산 고찰들이 자리 잡아 종교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형산을 찾는다. 구릉과 산지가 넓어 호남성의 삼분지이가량을 차지할 정도였다.
또하나 형산이 유명하게 된 까닭은 이 곳에 자리잡은 하나의 문파, 형산파 혹은 형산검파라 불리우는 무림의 세력이었다.
형산파(衡山派)
형산 연화봉에 자리잡은 무림 문파. 검을 주로 사용하는 무공들로 알려져 있다. 철저한 실전의 무예를 추구하는 문파의 기풍 때문에 타 문파로 부터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제자들의 무공하나하나가 유수한 강호의 방파와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는터라 대놓고 비난을 하지는 못하였다. 현 장문을 맡고 있는 철혈검 나조락 의 무위는 비무로 하면 오파의 장로보다 떨어지고 실전의 결투로 하면 장문 급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산의 무수한 봉우리 중의 하나, 선라봉(仙羅峰). 그리 산세가 험하거나 장관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맛을 내는 산세와 토양이 비옥하여 기화이초들이 많이 자라는 사람들이 곧잘 찾는 봉우리였다.
선라봉의 끄트머리 한줄기에 있는 제법 번성한 도읍인 선라현의 어귀에 하나의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크기나 장식에 있어 다른 마차와는 다를 것이 없지만 특이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다름아닌 마부석에 앉아있는 두 사내 중 한 사내, 딱벌어진 어깨에 언뜻 보기에도 거한인 듯 체격이 엄청나게 커보였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굳게 다문 두툼한 입술이 그의 강한 의지를 일면 보여주었다. 아환이었다. 항상 등뒤에 매던 칼은 마차의 지붕 위에 올려놓고 묶어 고정을 시키고 마부석에 앉은 채로 형산까지 여행을 한 것이었다. 마차는커녕 말 조차 제대로 타본 적이 없는 아환으로서는 형산까지 여정의 방법을 마차를 빌어 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특별히 생각나지 않았다. 사화 중 그 아름다움이 으뜸이라는 천향매화를 얼굴을 드러내고 활보하기엔 불편함이 많아 부득불 아환은 마차를 빌었다. 돈이야 서가장주에게서 받은 전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장사를 떠난지 삼일째 되던 날 아환 일행은 형산 어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선라봉에서 이번의 사화지연을 갖는다 했다. 그리고 사화가 모이는 곳은 다름 아닌 선라현의 한 객잔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이번 사화지연을 주관하는 이는 만검창룡 남궁비였다.
사화지연을 사화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관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림사화들이 순수하게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상적인 만남을 가진 것이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무림사화를 흠모하는 후지기수들이 그들을 추종하여 사화의 모임에 따라 나선 것이 사화지연이라는 명칭이 붙고 마치 크나큰 무림의 행사처럼 굳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사화를 초청하여 사화지연을 주관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위세와 함께 사화의 관심을 끌고자 사화에게 청을 넣어 허락을 받아 사화지연을 개최하였다. 주관자들은 무예뿐만 아니라 집안 자체도 명문이 아니면 사화의 승낙을 받기가 어려워 여태까지의 주관자들은 오대세가나 칠룡을 비롯한 내노라하는 자들이 많아 부러움과 질시를 많이 받았다. 그런 관계로 인하여 이번의 사화지연을 만검창룡 남궁비가 주관한다고 하였을 때 세간의 사람들은 칠룡 중의 으뜸이라는 남궁비의 명성에 걸맞는 사화지연이 준비되리라 예상하고 더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악소저, 객점의 이름이 무어라 했소?”
“선라주점이옵니다.”
옥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영롱한 음성이 마차안에서 흘러나왔다.
아환은 여정을 떠나면서 악서령에게 충분한 주의를 주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호칭이나 서로간에 대하는 관계를 확실히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 경우 타인들의 의심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아환이 목표로 하는 것에 접근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아환은 남궁비가 이번 사화지연을 개최한다는 말을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밤에 같이 생활한 악서령에게서 들었다. 아환이야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남궁비를 논할 때 악서령의 평은 그야말고 극찬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품과 무예, 그리고 평소 술은 즐겨하나 여색에 빠지지 않는 다는 점등. 악서령은 남궁비를 상당히 높게 평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아환과의 밤의 행위시 전신에 붉은 선을 예전보다 더 많이 새기게 되었지만..
아환은 여태 만났던 무림의 후지기수라 해봤자 대표적인 것이 목영근이었다. 자신보다 무예 수준도 낮고 예에 치우친 듯한 태도 등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아환은 그 목영근의 당당함이랄까 공정함에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황보지약이나 악강 등의 인물들은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악강이야 첫 출도에서 단지 사명감에 불타 오르다 원수의 딸을 구해주고 그녀의 손에 바로 저세상으로 가버린 멍청한 인물. 이에 반해 황보지약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 정파 무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미망인으로 남겨져서 처녀성을 유지한 채로 다른 이들과 변형된 성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준 원수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린 여인. 아환의 황보지약의 심기에 대하여 일부는 긍정적, 다른 한쪽으로서는 부정적의 시각이 공존하는 입장이었다. 적어도 백척간두의 칼위에서 밥을 먹고 살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할 때에는 더 할 수 없이 독해져야 하는 게 강호인이 마음 먹어야 할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상당수의 무인들이 명예라는 것에 목숨을 걸고 치욕을 받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것은 최소한 자신이 살고 난 이후였다. 타인에게 목숨을 구걸받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것은 보통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다. 문파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였으며, 가문에서 거리가 있는 방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파라는 것은 대단한 보호막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아닌 한 다른 이가 피해를 입었을 때 그 보호막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아 자결을 강요하고 때로는 문도의 손으로 치욕을 입었다 생각되는 인물을 처단하였다. 그 결과 문파의 명예는 지켰을지 몰라도 사람의 목숨은 잃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죽은 사람은 득 보다 실이 많았다.
아환은 또 거기에서 악서령의 경우를 되짚어 보았다. 이 여자는 치욕을 당하고 앞으로 계속되어질 폭행과 모욕을 알면서도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 남아 아직까지 자신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다. 만약 자신이라면 어찌 하였을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끝까지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도 원치 않았고, 매일 매일을 수치와 분노를 감내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악서령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밤마다 괴롭힘을 당하면서 까지 다리를 벌리고 입술에 육봉을 물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것일까?
마차를 타고 오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생각을 하였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때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사님, 선라현에 다 왔습니다요.”
“음?..아! 선라현에 왔소? 그럼 선라주점이라는 곳을 찾아야 하는데...”
“저기 앞에 있습니다요. 그리로 갈깝쇼?”
“그래 주시오.”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가다가 마침내 주점 앞에서 멈추었다.
선라주점(仙羅酒店)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중원의 주점이 그러하듯 주점이란 보통 식당과 찻집, 그리고 여관을 겸하기에 건물이 보통 꽤 규모가 있었다. 이 선라주점은 이 곳 선라봉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대표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는 만큼 그 규모나 주변 경관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훌륭한 외관을 보였다.
“악소저, 도착했소. 선라주점입니다.”
“그래요? 도착했군요. 자! 내리자.”
차분한 음성과 함께 마차의 문이 스륵 열렸다. 그러면서 한 발이 발판을 내딛으며 훌쩍 뛰어 내린다. 어른의 발 치고는 너무 작은 아이의 발 이었다. 그 발을 이어 또 하나의 작은 발이 바닥에 내려섰다.
“어서 옵쇼.”
점소이의 발빠르게 객점에서 재빨리 튀어나와 마차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그런 점소이와 부딪힐 뻔 한 마차안에서 나온 첫번째의 인형을 뒤이은 작은 인형이 꾸짖는다.
“청청. 행동을 조심해. 사부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넌 항상 덜렁덜렁해서 사부님이 늘 걱정하시잖니?”
“피이! 홍홍. 너나 신경 써. 사부님께서는 이런 내 모습이 보기 좋다 그러시던데?”
“너! 청청. 이 언니의 말에 대드는 거니?”
“언니는 누가 언니?”
“그만하거라.”
사람의 마음을, 그것도 남자의 마음을 청아하게 만드는 음성이 마차에서 조용히 울려나오더니 분홍빛의 비단 신발이 발판을 내딛고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면서 주위에 은은하게 주위를 감싸면서 퍼져나가는 상쾌한 향기..
이제 저녁 시간이 가까워 지는 터라 객점의 주변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게다가 사화지연이 여기에서 벌어진다는 말이 무림에 떠돈지 꽤 되는 지라 여기저기 병기를 맨 무림의 후지기수들이 객점의 주위에서 눈에 띄었다. 그 중의 하나가 우연히 기이한 향이 콧속에 들어오자 잠시 그 향에 취하다가 눈에 악서령의 모습을 보게 되고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이 향기는 천향…천향매화다! 천향매화가 도착하였다.”
“오오! 천향매화 악소저시다.”
“어디..어디..천향매화가 어디 계시는가?”
“아! 저 우아한 자태라..침어낙안(沈魚落雁)이요, 폐월수화(廢月隨花), 빙기옥골이라는 형용어로도 어찌 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으리요..”
악서령은 면사를 쓰고 전신을 분홍빛이 감도는 라의 로 감싸고 나타나 타인들이 악서령의 얼굴 조차 볼 수 없는 데도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라도 바라 본 이들은 한결같이 찬사를 내뱉었다. 무림사화 중 아름다움으로 으뜸인 천향매화 이니 그 면사를 벗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이들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주변에게 보내고는 악서령은 아환이 앞을 서고 홍홍과 청청이 양 옆에서 악서령의 손을 잡은 채로 선라주점에 발을 들여 놓았다. 점소이의 표정이 가관이다. 침을 옆으로 질질 흘리며 눈은 몽롱한 채로 악서령의 내렸던 마차 앞에서 이미 악서령이 주점안으로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악서령이 처음 발을 딛었던 곳에 고정시킨채 움직일 줄 몰랐다. 결국은 악서령의 뒤를 쫓아 들어가는 다른 남정네들에게 치이어 넘어져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객점안.
역시 밖과 다를 바 없었다. 천향매화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대부분의 자리에 앉은 사내들이 의자를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일제히 눈길이 객점의 문에 고정되었다.
차르르..
주렴이 걷혔다. 그러면서 객점안을 들어오는 칠척의 거한. 가히 정문이 가득찰 정도로 장대한 사내가 들어오자 일순 천향매화를 기대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악소저. 드시지요.”
“예. 너희들도 들자꾸나.”
“예. 사부님.”
아환이 주렴을 잡은 상태에서 밖을 보고 얘기를 하자 영롱한 음성과 함께 하얀 피부에 하얀 면사로 눈 밑을 가린 악서령의 아리따운 옥용이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야..천향매화다..”
“천향매화..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로다..”
“천향매화 악서령. 역시 무림제일미로구나. 어찌 저리..”
각양각색의 찬사가 문밖과 마찬가지로 객점 안에서도 쏟아져 내렸다. 등에 칼을 매었건 매지 않았건 사내라면 거의 대부분이 일어서서 천향매화의 고운 자태를 조금이나마 더 보고자 고개를 빼어들었다. 그에 반하여 객점 안의 여인들은 나이를 불구하고 하나 같이 동경과 질시로 눈을 번득이며 앉은 자세로 들어온 천향매화를 노려보았다.
악서령은 선라주점의 안에 들어서서 눈을 이리 저리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그러다 이층의 창가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눈을 멈추곤 그리 쳐다보다 얼굴이 환해지고 웃음을 지었다. 객점안의 다른 이들이 그러한 악서령의 미안에서 웃음이 지어질 때 눈주위 밖에는 볼 수 없었지만 그린 듯 봉목이 곱게 휘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말그대로 질질 쌀 정도의 표정으로 천향매화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주 소협. 저리 가시지요.”
“예. 소저.”
등에 여섯 자에 이르는 검은 칼을 칼집도 없는 채 등에 메고 태양혈이 부리부리하게 솟은 구리빛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체격의 사내를 바라보는 객점의 다른 이들의 표정이 고울 리 없었다. 그들의 이상이자 꿈이라 할 수 있는 천향매화를 안내하는 영광을 가진 저 외가의 무사는 누구란 말인가? 천향매화의 말을 듣자하니 저 놈은 천향매화와 일행인 듯 한데 어찌 화산의 금지옥엽이며 절세의 내가 무예를 가진 천향매화가 저런 쓰잘데 없는 외공의 삼류와 같이 동행한 것일까? 사내들의 눈에 칼이 달려 있다면 이미 수만번의 난도질을 당했을 아환이었다.
악서령과 아환, 그리고 청청과 홍홍이 객점의 이층으로 올라섰다. 악서령은 아까 눈이 마주쳤던 곳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더니 창가의 좋은 자리에 다가섰다. 이미 거기에는 한 사람이 앉아 소채와 차를 들고 있었다. 여인이었다. 한 이십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그리 용모나 다른 것에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처자였다. 검이나 칼 등의 병기를 들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도 아닌 듯 했다. 허나, 이어진 악서령의 말에 객점안이 놀라고 술렁였다.
“유언니! 언제 오셨어요? 선라현에는 언제 도착하신거예요?”
악서령이 태연하게 그 여자의 앞에서 자리를 잡으며 여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유언니. 악서령에게서 유언니라는 칭호를 받을 이야 적지 않겠지만 이 곳 사화지연이 예정된 선라현에서 유언니 라는 불림을 악서령에게 받을 여자는 오직 하나.
이 앞의 여인은 난화성녀 유가형이었다.
“난화성녀다!”
“설마..난화성녀..저런 외모를 가진..”
“난화성녀일까? 다른 유씨 성을 가진 친분이 있는 여자인가?”
“유소저는 사화중의 하나인데 어찌 저 정도 밖에..”
악서령이 등장했을때와는 전혀 상반된 반응들.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도저히 무림사화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는 그저 그런 용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두 여자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잘 있었어! 령매. 오느라 힘들었지. 난 어제 늦게 도착했어. 오늘 낮에는 업무를 좀 보느라고..여기에 들어온 것은 얼마 안돼. 그래. 령매는 지금 도착한거야?”
“예. 언니두 잘있었죠? 전 지금 막 도착했어요. 그런데 영이나 란매는 오지 않았나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아. 곧 오겠지. 그런데 이 분은..”
여인이 악서령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더니 옆에선 거한이 신경이 쓰이는지 말끝을 흐린다.
“아! 예. 저는 주환이라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악소저를 모실 영광을 입은 지라..두분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다른 자리에 가 있겠습니다.”
아환이 정중하게 말을 맺고는 몸을 돌려 옆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한 아환의 모습을 빛나는 눈길로 바라보는 여인, 유가형. 무슨 뜻인지 의미가 담겨진 시선으로 아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돌려 악서령을 쳐다 보았다.
“목 공자는 오지 않으셨네?”
“예. 중간에 일이 있어서..”
중간에 목영근은 옆의 사내에게 두들겨 맞고 자신은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고 밤마다 다리를 벌리며 사내의 물건을 머금고 체액을 받아들이며 아랫배에는 화인까지 찍혔지만 이 모든 과정을 ‘일’이라는 짧은 말로 끝내었다.
“그렇구나. 간만에 목 공자도 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이 귀여운 쌍둥이들은 누구니?”
악서령이 그제서야 아직 옆에 서 있는 쌍둥이, 홍홍과 청청에 눈길을 돌리고는 말을 한다.
“인사드려라. 난화성녀 유가형 여협이시다. 이 사부가 언니로 모시고 있는 분이시다.”
“홍홍이 난화성녀 유 여협님께 인사 올려요.”
“청청이 난화성녀 유 여협님께 인사 올려요.”
귀여운 음성으로 예를 올리는 두 어린 쌍둥이 계집아이들. 홍홍은 붉은 옷, 청청은 푸른 옷을 입었기에 더욱 쌍둥이가 특이한 귀여움을 자아내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이리 앉으렴.”
유가형이 좌우에 홍홍과 청청을 하나씩 앉혔다.
“아유. 아주 귀여운 아이들이로구나. 령매. 언제 제자를 둔거야?”
“지난 번 장사에 갔을 때 객점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자질이 쓸만한 것 같아 화산으로 데려갈려구여. 아참! 언니가 이 애들을 한번 진맥해주시겠어요?”
정말 악서령이 홍홍과 청청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는 이 아이들이 범상치 않은 집안의 여식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맥? 왜?”
“그 동안 이 애들이 떠돌아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래서 많이 허약해진 것 같아요. 의원에 한번 데리고 갈까 하다가 시간이 되지 않아 못 가고 있었는데 마침 언니를 뵈니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네요.”
“그랬구나. 하긴 요즘 세상이 어지러우니.. 그래. 한번 맥을 봐주어야 겠네.”
이삼일을 제대로 먹고 입었지만 여전히 앙상히 마른 나뭇가지 같이 가늘고 거친 팔목을 유가형이 고운 손으로 잡았다. 안스러운 마음을 가지고는 유가형은 신경을 집중하여 홍홍의 맥을 짚어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손을 대어 보던 유가형이 손을 떼고는 홍홍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청청의 손을 잡고는 진맥을 하여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 처럼 오래 잡고 있지 않고 얼마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래. 아하..”
“왜 무슨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유언니?”
“령매. 걱정할 것 없어. 이 두 아이는 영양이 좀 결핍되었을 뿐이지 건강해. 앞으로 잘 먹이면 그 것은 해결될 거고..으흠. 난 깜짝 놀랐어. 이 애들을 진맥하다 정말 엄청나게 놀랐어.”
“왜요? 무엇때문에요? 혹시..뭐 안 좋은 거라도..”
“그건 아니고 그게 있잖아..”
“언니. 그 얼굴의 가면 좀 벗고 말할 수 없어요? 도통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목석하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그건 그렇고 그런데요?”
“아! 그래. 내 깜박했네. 잠시만..”
유가형이 손을 얼굴에 가져가더니 턱선과 귀뒤를 매만졌다. 그러더니 손끝에 무언가를 걸어 얼굴의 인피면구를 벗겨내렸다. 곧이어 드러난 유가형의 얼굴.
주변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 탁자에 전신의 신경을 곧추세우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귀를 기울이다가 유가형이 얼굴의 면구를 벗는다는 말을 듣고는 일제히 고개를 돌려 유가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오오오..”
“으휴…”
“과연…과연..”
유가형의 얼굴은 사화 중의 하나로써 조금의 손색도 없는 그러한 아름다운 옥용이었다. 고운 피부색하며 그린 듯 선이 이어진 눈썹이며 깊은 봉목이며 오똑 솟은 코와 붉은 빛을 반짝이는 입술..얼굴선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완만하였기에 악서령의 화사함보다는 여유롭고 편안함을 보여주었다. 일견해서 악서령 보다는 그 아름다움이 앞서지는 않지만 유가형은 내미지상이라 이미 세상에 알려진 여인. 내미지상이라 함은 말그대로 내적인 아름다움이 외적인 아름다움을 능가한다고 하여 여인 중의 여인이라 평을 받는다. 성품이 온화하고 차분하여 지고 지극한 성심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 상을 타고 난 사람의 용모는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이 배가가 되는 것이 내미지상을 뛰어난 미안으로 정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객잔의 다른 군중들이 유가형의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아환, 역시 경탄과 놀람 그리고 그와는 별개의 감정, 소유욕을 느꼈다. 유가형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너는 면사를 벗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네가 면사를 벗으면 아마 난리가 날꺼야. 그리고 아까 하던 말인데 이 아이들은 천성적인 재질을 타고 났어. 나도..”
문득 말을 이어나갈려다 유가형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주위의 이목이 신경쓰이는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악서령에게 말을 잇는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아무래도 여기서는 안되겠다.”
“예, 언니. 그러세요. 참! 그런데 남궁 공자는 아직이신가요?”
악서령도 그러한 유가형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유가형이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유가형의 정혼자인 남궁비가 보이지 않음에 의아함을 느껴 유가형에게 질문을 하였다.
“아직..그는 아직..”
미적 미적 대답을 하는 유가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악서령은 유가형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지라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정말 날씨 더워지네요. 여기는 남쪽이라 더 더운 것 같아요. 이제 여름이네요.”
“그래. 덥지.”
쓸쓸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유가형. 아환은 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다 보니 무슨 문제가 있음을 짐작하였다.
‘남궁비와 유가형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가? 일반적인 남녀관계인가? 아니면..다른..’
저녁에 악서령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터 일단 궁금증은 접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신경은 옆 자리의 두 여자에게 집중시켰다.
일상적인 대화의 수준이 계속 이어졌다. 아리따운 두 여자의 재잘거림에 객점 안의 사람들이 모두가 이 들을 지켜 보며 황홀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천상선녀의 화음을 듣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대화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은 토시 하나라도 놓칠까봐 유가형과 악서령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차르르..
객점 정문의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과 음성에 정신을 몰두하고 있어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나 이어서 들리는 쇳소리가 이상하게 세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크르르..철커덕..크르..처럭..
귓속을 후펴 파는 듯한 탁하고 거칠은 소리에 하나 둘씩 눈을 돌리는 중인. 그 중 무림인이라 여겨지는 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몸이 굳어졌다. 눈을 돌려 들어선 인영을 본 사람들의 얼굴, 그 얼굴에 떠 오른 것은 다름아닌 공포, 그것도 극심한 공포심이었다.

간신히 하나를 더 올립니다. 시간이 쉽게 나지 않네요.
짧은 글입니다.
아환의 무공의 결정은 2부 막 장에 가서야 그 윤곽이 확실히 잡힙니다. 조금 더 참고 기다려 주시길..
다음 주에는 시간이 좀 여유로울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짧은 것 보충할 예정입니다.
한가지..야설이니까 드리는 힌트인데 그 흔한 남장여인이 빠져서도 안되겠지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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