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진이야기] 음란한 동거 - 2부
페이지 정보
본문
▒▒ 음란한 동거 ▒▒
지은이, 태호의 여자친구 지은이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옆에 있던 그 남자는 누구일까?
분명 태호와 헤어진 건 아닌데 그렇다면 양다리인가? 아니면 원나잇 스탠드?
아니 잠시 스쳐간 모습이지만 그 둘이 서있던 모습은 그날 만나서 즐긴 사이 같지는 않았다.
사연이야 어찌됐건 간에 지은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태호에게 알릴 생각 또한 없었다.
얼마 후면 군입대 할 마당이고, 굳이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다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데,
적어도 내 가치관으로선 남의 인생을 옳으니 옳지 않니 하며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마주치지 말아야 할 상황을 마주쳐버린 것이고,
앞으로의 숙제는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지은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였다.
머리 아픈 일요일을 보내고 드디어 월요일, 오전 수업이 없던 나와 달리 태호는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었다.
“행님, 수업 끝나는 대로 바로 오실꺼지예?”
“아니, 요번 주는 계속 도서관에 남아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예?”
“중간고사 끝나고 계속 놀기만 해서, 이것저것 할 게 많다.”
“아, 그래예?”
그게 순간적으로 둘러댄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금이라면야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했을 테지만 그땐 안보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물론 태호 때문이라도 아예 안 볼 순 없겠지만 그것도 한달 정도 남은 2학기만 버티면
그 땐 자연스럽게 마주칠 일 없게 되는 것이니까.
아무튼 그 한 마디 핑계로 일주일을 벌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 홀가분한 기분 때문인지 그제서야 지은이가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순진한 앤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당돌한 모습이 있었을 줄이야.
수진이 누나와 간단한 전화통화만 두 차례 했을 뿐,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 파묻혀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주말을 맞이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토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친구들과 오랜만에 농구를 하며 땀을 뺐고 목욕탕에서 때도 밀었다.
그리고 꿀맛 같은 낮잠.
저녁이 되어서는 당구와 4:4스타 대결로 1, 2차 술내기를 하며 박터지는 시간을 보냈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내기의 향방이 가려졌고 가까운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옛날 이야기와 서로의 치부를 들추어내며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과 순식간에 비워지는 술이 아쉬울 뿐이지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에 낄 틈도 없이 웃고 있는 사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재진이 오빠?”
“네, 누구?”
“나 지은이, 지금 통화 가능해?”
“응, 잠깐만.”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인지 의심할 사이도 없이 술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여보세요?”
“친구들이랑 같이 있나 봐?”
“응. 근데 무슨 일이야?”
“왜 전화하면 안돼?”
“아니, 그게 아니라 한번도 전화 한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했지.”
“그냥…… 가까운데 있으면 술이나 한 잔 사달라고 하려 했는데.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안 되겠네!”
“넌 어딘데?”
“친구랑 같이 있다가 친구는 남자친구 만난다고 방금 가고 방배역쪽에 혼자 있어.”
“음…… 10분 정도 걸릴 거야. 4번 출입구 쪽에서 보자.”
축 쳐진 지은이의 목소리가 “미안하다.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막아버렸다.
게다가 그 날 일에 대해 변명이든 사실이든 어떤 말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나에게 전화하기까지 수십 번을 망설였을 것이고
그렇게 힘든 결정이었을 만큼 내가 미루는 시간 동안 그녀는 잠 못 이룰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피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지은이가 날 피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지만 자기가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하고자 한다면
내가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화장실로 향하던 재신이와 마주쳤다.
“재신아. 나 집에 갔다 와야겠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제사라는데 아침부터 애들이랑 노느라고 모르고 있었어.”
“그럼 집에서 전화 왔던 거냐?”
“응. 제사 끝나는 대로 올게.”
“그 시간되면 이미 파장했겠다. 애들한테는 내가 천천히 말 할 테니까 들어가봐.”
“알았다. 그럼 잘 놀아. 내일 연락할게.”
주말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막힘 없이 한번에 달렸다.
그리고 미처 마음에 준비를 하기도 전에 지은이가 서있는 곳에 도착했다.
“금방 오네.”
“가까운데 있었어. 어디로 갈까?”
“오빠,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면 안될까? 혹시 아는 사람 만날까봐.”
“난 상관없으니까 편한 대로 해.”
다시 택시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찻길 건너로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번쩍이며 늘어서 있었다.
“여기 어디 건널목 있을 텐데.”
“오빠 번잡한데 말고 조용한데 없을까?
“나도 여긴 잘 모르는데…… 그럼 이쪽 골목으로 들어가 볼까?”
건너편 도로와는 다르게 어둑어둑하고 외진 곳, 거기서 더욱 외진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골목길 끝으로 술집 간판 하나가 보였다.
“저기 갈까? 조용해 보이는데.”
“응.”
3층까지 걸어올라 가자,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손님이 제법 있었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이쪽으로 오세요.”
“중앙 쪽 말고 창 쪽으론 자리 없나요.”
“잠깐만요.”
잠시 우리를 세워놓고는 구석으로 사라져버린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 종업원,
그녀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손짓을 했다.
“지금 창가 자리는 여기 밖에 없어요. 어떡하실래요?”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에서도 친절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여기 앉을게요.”
“잠깐만요. 박스 좀 치울게요.”
입구와는 가장 먼 구석 중의 구석, 이 곳이 손님으로 메여터지지 않는 한 사용할 것 같지 않은,
그래서인지 박스 몇 개가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구석자리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날은 오히려 그런 구석이 더 없이 편했다.
게다가 창가 자리 중엔 유일하게 아래 창문이 열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여기 소주 한 병이랑, 모듬꼬치 주세요.”
술이 오기까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내 시선은 침묵을 피하는 듯 창 밖으로 향했다.
작은 사무실 건물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는 골목길.
방금 걸어온 그 골목길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늦은 주말 저녁이라 불 하나 켜진 창문 없이 죽은 길처럼 보였지만 평일 낮이라면
이곳이 건너편보다 더 활기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술집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
그 사이 소주와 서비스 안주가 먼저 나왔다.
서로의 술잔을 채우고 건배, 그것이 그 날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쉽사리 시작되지 못했다.
결국 주문한 모듬꼬치 안주가 나오고 3번째 술잔을 들이킨 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말하기가 참 조심스럽네. 아무튼 오빠는 그 날 본거 기억 속에서 지웠어. 태호한테도 말 할 생각 없고.”
“태호한테건, 누구한테건 말 안 한다는 거 알아.”
“그럼 너도 마음 편히 가져라. 아님 나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태호한테 거짓말하게 만든 꼴이잖아.”
“물론, 태호 얼굴 보긴 좀 그래. 특히 너에 대한 이야기하고 좋아라 하는 표정 보면. 근데, 니들 둘이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지켜질 약속도 아니지만. 아무튼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아무 말 안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신경 안 썼음 좋겠어.”
“고마워 오빠!”
“태호 군대 갈 때까지만이라도 잘 해줘.”
“알았어.”
그때 지은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받아.”
“안받아도 되는 거야.”
그사이 한 번 끊어졌던 전화는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잖아. 받아봐.”
“알았어 그럼 잠깐만.”
그제서야 전화기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보세요 / 내가 어디 있건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구 / 나 이제 정말 오빠 안보고 살 거야!”
통로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서서 하는 말이 내 귀에도 들렸다.
물론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지 누군지도 알지 못했지만.
“오빠 미안해.”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하면서 지은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겨우 상황을 마무리 지었나 싶었는데 또 다른 난관이.
사실 지금도 여자가 눈물 흘리는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난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고개 숙여 우는 지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그 상황의 내 표정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르고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번엔 지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때 내 옆에 있던 남자가 내 첫사랑이고 첫 남자였어.”
“그럼 오래된 사이네.”
“응. 고 2때부터 알았으니까.”
‘그럼 태호가 중간에 끼어든 꼴인가? 그래도 지은이가 양다리 걸친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는 틈에 다시 지은이의 말이 이어졌다.
“고 3때 수능보고 나서부터 사귀게 됐는데 내가 지방대 다니다 보니까 오빠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더라구.”
“그래서 헤어졌구나.”
“결론적으론 그런데 그 사실을 1학년 여름방학 될 때까지 몰랐었어.”
“떨어져 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
“그런 것도 있고, 오빠 뺏어간 애가 내 친구였거든. 둘이서 완벽하게 연기하니까 알 수가 없었어. 결국 다른 친구가 말해줘서 알게 된 거야.”
“뺏어간 친구도 그렇지만, 그 남자애는 진짜 뻔뻔하다. 그렇게 헤어져놓고 다시 사귀자고 하는 건 뭐야?”
말을 해놓고 보니 약간 이상했다. 모텔에서 나오는 걸 본 게 불과 일주일 전 일인데,
그럼 다시 사귀게 된 것 아닌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스토리였다.
“아니, 아직도 둘은 사겨.”
“그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 친구 그 여자랑도 사귀고 너랑도 사귀고 뭐 그런 거야? 아님 니가 친구한테 복수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거?”
“아니, 복수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아. 안보면 그만이니까.”
“그럼 뭐야?”
“내가 바보라서 그래, 뿌리쳐야 했는데……”
“……”
“말했잖아 내 첫 남자라고. 나 버리고 친구한테 갔는데도 오빠 전화만 받으면 거절을 못해서.”
“그럼 니 친구하고는 계속 사귀는 거고. 너랑은 육체관계만 원한다?”
“……”
지은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앙다문 입술이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헤어지고 나서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다시 만난 거야?”
“이번 4월쯤.”
“꽤 됐네.”
“……”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솔직히 거기까진 태호와 더 이상 연결된 일도 아니고
내가 뭘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주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여자에게 첫 남자라는 의미는 이런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났다.
“여자한테 첫 남자는 그렇게나 특별한 건가?”
“첨엔 그랬던 것 같아.”
“지금은 아니고?”
“응, 솔직히 다시 만난 이후론 미련 같은 것도 없었고 원망 같은 것도 없었어.”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이 빠진 톱니바퀴처럼 헛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해할 만하면 그게 아니고 다시 감을 잡을 만하면 결국엔 장님이 코끼리 허벅지 더듬은 꼴이 되어버렸다.
“다신 안 본다고 다짐을 해 놓고도 어느새 오빠전화 기다리는 내 모습. 그게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가 언제부턴가 오히려 내가 먼저 전화를 하기도 하고, 나중엔 나도 그 오빠처럼 그냥 육체관계만 즐기게 되더라구.”
“……”
“한동안 그런 내 모습이 너무나 싫었는데 그것마저도 익숙해져 버린 거지. 하지만 모텔에서 오빠랑 맞닥뜨리게 된 날 다시 자각한 거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어. 그 동안 못 느꼈던 수치심이 한꺼번에 느껴지더라구. 진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
“오빠, 나 걸레 같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렇잖아. 섹스에 미쳐서 해야 될 거, 하지 말아야 될 것도 구분 못하고.”
이제 지은이의 말투는 별 감정도 없이 마치 푸념을 늘어놓는 듯 했다.
난 오히려 그런 지은이의 모습이 더 걱정스러웠다.
이러다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사실 쉽게 화내고 쉽게 수그러드는 성격보다
지은이처럼 평소 감정의 기복이 덜 심한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라면 모를까, 다른 이의 인생을 어떻다라고 평할 기준이 있나?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사는 거잖아.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못한 일은 못한 대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 인생 사는 거지.”
“그럼 오빤 나 같은 여자랑 결혼해서 살 수 있어?”
“……”
“거 봐, 결국엔 오빠도 대답 못하잖아.”
사실 내가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형수님과 나의 관계가 떠올랐고 지은이가 겪은 일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어설프게 위로한다고 해서 위로가 될 일이 아니란 생각으로 이어졌다.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어쨌을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알코올 기운이 내 입을 열게 했다.
“지은아, 니가 걸레면 나도 걸레야.”
“응?”
“나도 너랑 비슷한 그런 경험 있어. 게다가 상대는 선배 와이프였으니까 난 법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짓을 한 거지.”
“정말이야?”
“그래,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는데 너한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네.”
“오빠가 그랬다니까 믿어지지가 않아. 설마 나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
“널 위로하려고 없는 치부를 만들어내진 않아.”
“……”
약간의 침묵,,, 이번엔 내가 술잔을 권하며 지은이에게 술잔을 권했다.
“니 눈엔 선배 와이프를 건드린 내가 어떻게 보이는데?”
“내가 뭐라고 말할 주제가 되나.”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세상에 이런 나나 너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뭐라고 할 만큼 깨끗하게, 완벽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어?”
두 번째 소주병이 바닥을 드러내자마자 세 번째 소주병 뚜껑이 지은이 손에서 분리되었다.
이미 내 목구멍으로 넘어간 소주 한 병은 나를 더욱 직선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섹스를 즐기면 나쁜 건가? 꼭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되나? 섹스를 위한 섹스는 왜 도덕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거지? 물론, 나도 난잡한 섹스는 싫긴 한데 왜 싫은지는 모르겠어. 그냥 그런 가치관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자라서 그런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긴 하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내가 원하는 섹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나 하고 하는 건 좀 그렇잖아. 난 그런 건 싫던데.”
“내 말은 아무나 하고 한다는 전제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사람처럼 섹스만 하고 싶은 사람도 존재할 거라 생각하거든.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은 걸 텐데. 아무나가 아닌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에 맞는 교감을 하고 육체관계를 맺는 것이 그렇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일까?”
“갑자기 오빠 말이 왜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거지?”
어느새 대화는 시발점을 벗어나 버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우리 둘 다 그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새로운 주제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지은이는 그 시간만큼은 자괴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자신과 다르지 않은 부류로써 동병상련 혹은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고
어설픈 내 생각으로 인해 사고의 틀을 깨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대화는 점점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갔다.
“오빤 여자친구 없다더니.”
“없는데.”
“그럼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 같이 있던 여자는 누구?”
“아~, 친구들이랑 나이트 갔다가.”
“그럼 원나잇?”
“그런 셈이네.”
“좋았어?”
“아니. 하다 말았어.”
“왜?”
“잘 안 맞더라고.”
“어떻게 안 맞던데.”
“나도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는데, 음…… 물하고 기름을 섞어 놓은 거 같다고 할까? 설명하기 힘드네.”
“내가 태호한테 느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가 봐.”
“태호는 서툴러서 그런 거 아냐?”
“몰라, 섹스는 안 했으니까.”
“그럼 그걸 어떻게 알아?”
“키스해보니까 알겠던데.”
“키스 만으로?”
“응, 전 남자친구는 손만 잡아도 기분이 야릇해지는데 태호는 키스를 해도 별 느낌이 없어. 그러다 가슴이라도 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
“근데 왜 사겨?”
“오빠도 태호 착한 거 알잖아. 그리고 만약 태호랑 나랑 그런 쪽에서도 잘 맞았으면 그 오빠랑 다시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무엇보다도 태호와 관계하지 않았단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왜 그랬을까?
“근데, 오빠는 그 여자랑 키스할 땐 몰랐어?”
“첨엔 생긴 게 너무 이뻐서 내가 위축된 건가 싶었지. 키스하고 애무할 땐 술기운 때문에 그런가 했고. 근데, 삽입하는 순간, 그 때 확실히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데.”
“도대체 어땠는데?”
“음…… 한마디로 차갑다고 할까? 진짜 얼음처럼 차가운 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하기론 삽입하는 순간 뜨거운 느낌이 드는 게 맞거든. 근데 그 여잔 따뜻하다 정도도 아니고 그냥 차갑다는 느낌이 드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럼 오빤 여자 거기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다는 거야?”
“응.”
“데일 정도라도?”
“데일 정도? 그럴 수도 있으려나? 아직 그 정도 여자는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더 좋지 않을까 싶네.”
“그 오빠는 내가 너무 뜨거워서 불만이라고 하던데, 어쩜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그 한마디가 귓속에서 끝없이 울렸다.
땅이 크게 흔들린 뒤 거대한 댐에 생겨나는 균열.
그렇게 내 이성에도 균열이 시작되었다.
술 몇 잔이 오가는 사이 이야기는 서로의 섹스 스타일로까지 번지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노골적으로, 자극적으로 흘러갔다.
“오빠는 어떤 자세가 젤 좋아?”
“난 뒤에서 삽입하는 거.”
“남자들은 다들 그걸 좋아하나 봐?”
“그럼 넌?”
“히힛, 나도! 음,, 그리고 정자세도 좋고…… 오랄은 어때?”
“하는 거? 아님 받는 거?”
“오빤 오랄을 해줘?”
“그 남자는 안 해줬어?”
“응.”
“난 받는 것도 좋지만 하는 것도 좋던데.”
“어떤 점이?”
“내 혀 움직임에 상대가 달아오르는 모습이. 난 상대가 흥분하는 만큼 흥분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상대가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나도 더 달아 오르니까.”
“잘해?”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테크닉이란 것이 절대적인 게 아니더라고. 넌?”
“나 뭐?”
“넌 오랄 잘 하냐구?”
“음,, 잘 한다던데.”
육체관계는 물론이고 아직 손 번 잡지 않은 사이에
이렇게나 노골적인 이야기를 거침없이 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서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하지만 우린 그럴 관계도, 그럴 계획도 없이 만나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둘 다 그만큼 취해서 그랬을까? 아니, 분명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보다 더한 스릴이 있었다.
어쩌면 육체관계 중에도 느끼지 못할 흥분이 온 신경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살짝 풀려있는 지은이의 눈,
알코올 탓도 있겠지만 그런 지은이의 눈을 보면 그녀도 이 상황을 나 이상으로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난 애무도 삽입도 천천히 부드럽게 해주는 게 좋아. 그래야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근데 남자들은 안 그런가 봐?”
“나도 너처럼 부드럽게 하는 게 좋던데.”
“정말?”
“응. 너랑 나랑 스타일이 비슷한가 봐.”
“그러게.”
언제부터 발기가 되어있었던 것일까?
발기된 이후로 한번도 힘이 풀리지 않아서, 또한 이 상황이 주는 묘하고 강한 흥분 때문에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오빠 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
“그래.”
담배를 한 까치 피워 물었다.
‘확실히 지은이는 색녀 기질이 있나 보다, 지은이도 흥분되었겠지? 팬티가 젖었을까?’
연이은 상상 끝에 욕정이 치밀어 올랐다.
‘먹고 싶다. 지은이! 아~ 미치겠다.’
태호의 여자친구란 사실도 다른 도덕적 관념들도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본능만 살아 춤추고 있을 뿐이었다.
‘지은이도 하고 싶을까?’
창 밖으로 부슬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오빠, 나 오빠 옆에 앉아도 돼?”
알코올에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지은이가 옆에 서있었다.
“응, 그래.”
안쪽으로 엉덩이를 옮기자, 지은이가 내 옆에 앉으며 술잔을 들었다.
“오빠, 러브샷 하자.”
감았던 팔을 풀면서 소주잔을 내려놓자 지은이가 팔짱을 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삼두 위로 느껴지는 풍만한 지은이의 가슴, 아찔한 느낌!
겨우 정신을 수습하려는 찰라 지은이의 손이 내 사타구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내 페니스 위로 올라왔다.
“오빠,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이미 시작되었던 이성이란 댐 표면의 작은 균열들이 드디어 댐 전체를 쩍하고 갈라놓는 순간이었다.
그 틈새 사이로 본능이라는 물줄기가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아마 나의 상태는 그러했을 것이다.
<3편으로~~>
......................................................................................................................................................
제 보잘 것 없는 전작에 관심을 보여주셨던 분들부터 새로운 이야기에 다시 힘을 실어 주시는 군요.
사실,, 기억하는 분이 계시려나 했었는데...... ^^*
그리고 야설이니만큼 자극적인 글을 쓰고 싶지만 배경상황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글은,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제 글 솜씨가 부족하여 도입부분이 지루하게 생각되더라도
조급함을 잊으시고 차근차근 읽어주시기를 당부드릴께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보다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이 더 자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보는 이의 상상력이 결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제 글도 그런 매력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지은이, 태호의 여자친구 지은이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옆에 있던 그 남자는 누구일까?
분명 태호와 헤어진 건 아닌데 그렇다면 양다리인가? 아니면 원나잇 스탠드?
아니 잠시 스쳐간 모습이지만 그 둘이 서있던 모습은 그날 만나서 즐긴 사이 같지는 않았다.
사연이야 어찌됐건 간에 지은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태호에게 알릴 생각 또한 없었다.
얼마 후면 군입대 할 마당이고, 굳이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다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데,
적어도 내 가치관으로선 남의 인생을 옳으니 옳지 않니 하며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마주치지 말아야 할 상황을 마주쳐버린 것이고,
앞으로의 숙제는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지은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였다.
머리 아픈 일요일을 보내고 드디어 월요일, 오전 수업이 없던 나와 달리 태호는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었다.
“행님, 수업 끝나는 대로 바로 오실꺼지예?”
“아니, 요번 주는 계속 도서관에 남아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예?”
“중간고사 끝나고 계속 놀기만 해서, 이것저것 할 게 많다.”
“아, 그래예?”
그게 순간적으로 둘러댄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금이라면야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했을 테지만 그땐 안보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물론 태호 때문이라도 아예 안 볼 순 없겠지만 그것도 한달 정도 남은 2학기만 버티면
그 땐 자연스럽게 마주칠 일 없게 되는 것이니까.
아무튼 그 한 마디 핑계로 일주일을 벌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 홀가분한 기분 때문인지 그제서야 지은이가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순진한 앤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당돌한 모습이 있었을 줄이야.
수진이 누나와 간단한 전화통화만 두 차례 했을 뿐,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 파묻혀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주말을 맞이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토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친구들과 오랜만에 농구를 하며 땀을 뺐고 목욕탕에서 때도 밀었다.
그리고 꿀맛 같은 낮잠.
저녁이 되어서는 당구와 4:4스타 대결로 1, 2차 술내기를 하며 박터지는 시간을 보냈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내기의 향방이 가려졌고 가까운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옛날 이야기와 서로의 치부를 들추어내며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과 순식간에 비워지는 술이 아쉬울 뿐이지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에 낄 틈도 없이 웃고 있는 사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재진이 오빠?”
“네, 누구?”
“나 지은이, 지금 통화 가능해?”
“응, 잠깐만.”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인지 의심할 사이도 없이 술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여보세요?”
“친구들이랑 같이 있나 봐?”
“응. 근데 무슨 일이야?”
“왜 전화하면 안돼?”
“아니, 그게 아니라 한번도 전화 한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했지.”
“그냥…… 가까운데 있으면 술이나 한 잔 사달라고 하려 했는데.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안 되겠네!”
“넌 어딘데?”
“친구랑 같이 있다가 친구는 남자친구 만난다고 방금 가고 방배역쪽에 혼자 있어.”
“음…… 10분 정도 걸릴 거야. 4번 출입구 쪽에서 보자.”
축 쳐진 지은이의 목소리가 “미안하다.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막아버렸다.
게다가 그 날 일에 대해 변명이든 사실이든 어떤 말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나에게 전화하기까지 수십 번을 망설였을 것이고
그렇게 힘든 결정이었을 만큼 내가 미루는 시간 동안 그녀는 잠 못 이룰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피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지은이가 날 피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지만 자기가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하고자 한다면
내가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화장실로 향하던 재신이와 마주쳤다.
“재신아. 나 집에 갔다 와야겠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제사라는데 아침부터 애들이랑 노느라고 모르고 있었어.”
“그럼 집에서 전화 왔던 거냐?”
“응. 제사 끝나는 대로 올게.”
“그 시간되면 이미 파장했겠다. 애들한테는 내가 천천히 말 할 테니까 들어가봐.”
“알았다. 그럼 잘 놀아. 내일 연락할게.”
주말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막힘 없이 한번에 달렸다.
그리고 미처 마음에 준비를 하기도 전에 지은이가 서있는 곳에 도착했다.
“금방 오네.”
“가까운데 있었어. 어디로 갈까?”
“오빠,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면 안될까? 혹시 아는 사람 만날까봐.”
“난 상관없으니까 편한 대로 해.”
다시 택시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찻길 건너로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번쩍이며 늘어서 있었다.
“여기 어디 건널목 있을 텐데.”
“오빠 번잡한데 말고 조용한데 없을까?
“나도 여긴 잘 모르는데…… 그럼 이쪽 골목으로 들어가 볼까?”
건너편 도로와는 다르게 어둑어둑하고 외진 곳, 거기서 더욱 외진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골목길 끝으로 술집 간판 하나가 보였다.
“저기 갈까? 조용해 보이는데.”
“응.”
3층까지 걸어올라 가자,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손님이 제법 있었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이쪽으로 오세요.”
“중앙 쪽 말고 창 쪽으론 자리 없나요.”
“잠깐만요.”
잠시 우리를 세워놓고는 구석으로 사라져버린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 종업원,
그녀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손짓을 했다.
“지금 창가 자리는 여기 밖에 없어요. 어떡하실래요?”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에서도 친절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여기 앉을게요.”
“잠깐만요. 박스 좀 치울게요.”
입구와는 가장 먼 구석 중의 구석, 이 곳이 손님으로 메여터지지 않는 한 사용할 것 같지 않은,
그래서인지 박스 몇 개가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구석자리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날은 오히려 그런 구석이 더 없이 편했다.
게다가 창가 자리 중엔 유일하게 아래 창문이 열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여기 소주 한 병이랑, 모듬꼬치 주세요.”
술이 오기까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내 시선은 침묵을 피하는 듯 창 밖으로 향했다.
작은 사무실 건물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는 골목길.
방금 걸어온 그 골목길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늦은 주말 저녁이라 불 하나 켜진 창문 없이 죽은 길처럼 보였지만 평일 낮이라면
이곳이 건너편보다 더 활기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술집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
그 사이 소주와 서비스 안주가 먼저 나왔다.
서로의 술잔을 채우고 건배, 그것이 그 날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쉽사리 시작되지 못했다.
결국 주문한 모듬꼬치 안주가 나오고 3번째 술잔을 들이킨 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말하기가 참 조심스럽네. 아무튼 오빠는 그 날 본거 기억 속에서 지웠어. 태호한테도 말 할 생각 없고.”
“태호한테건, 누구한테건 말 안 한다는 거 알아.”
“그럼 너도 마음 편히 가져라. 아님 나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태호한테 거짓말하게 만든 꼴이잖아.”
“물론, 태호 얼굴 보긴 좀 그래. 특히 너에 대한 이야기하고 좋아라 하는 표정 보면. 근데, 니들 둘이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지켜질 약속도 아니지만. 아무튼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아무 말 안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신경 안 썼음 좋겠어.”
“고마워 오빠!”
“태호 군대 갈 때까지만이라도 잘 해줘.”
“알았어.”
그때 지은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받아.”
“안받아도 되는 거야.”
그사이 한 번 끊어졌던 전화는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잖아. 받아봐.”
“알았어 그럼 잠깐만.”
그제서야 전화기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보세요 / 내가 어디 있건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구 / 나 이제 정말 오빠 안보고 살 거야!”
통로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서서 하는 말이 내 귀에도 들렸다.
물론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지 누군지도 알지 못했지만.
“오빠 미안해.”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하면서 지은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겨우 상황을 마무리 지었나 싶었는데 또 다른 난관이.
사실 지금도 여자가 눈물 흘리는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난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고개 숙여 우는 지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그 상황의 내 표정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르고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번엔 지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때 내 옆에 있던 남자가 내 첫사랑이고 첫 남자였어.”
“그럼 오래된 사이네.”
“응. 고 2때부터 알았으니까.”
‘그럼 태호가 중간에 끼어든 꼴인가? 그래도 지은이가 양다리 걸친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는 틈에 다시 지은이의 말이 이어졌다.
“고 3때 수능보고 나서부터 사귀게 됐는데 내가 지방대 다니다 보니까 오빠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더라구.”
“그래서 헤어졌구나.”
“결론적으론 그런데 그 사실을 1학년 여름방학 될 때까지 몰랐었어.”
“떨어져 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
“그런 것도 있고, 오빠 뺏어간 애가 내 친구였거든. 둘이서 완벽하게 연기하니까 알 수가 없었어. 결국 다른 친구가 말해줘서 알게 된 거야.”
“뺏어간 친구도 그렇지만, 그 남자애는 진짜 뻔뻔하다. 그렇게 헤어져놓고 다시 사귀자고 하는 건 뭐야?”
말을 해놓고 보니 약간 이상했다. 모텔에서 나오는 걸 본 게 불과 일주일 전 일인데,
그럼 다시 사귀게 된 것 아닌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스토리였다.
“아니, 아직도 둘은 사겨.”
“그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 친구 그 여자랑도 사귀고 너랑도 사귀고 뭐 그런 거야? 아님 니가 친구한테 복수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거?”
“아니, 복수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아. 안보면 그만이니까.”
“그럼 뭐야?”
“내가 바보라서 그래, 뿌리쳐야 했는데……”
“……”
“말했잖아 내 첫 남자라고. 나 버리고 친구한테 갔는데도 오빠 전화만 받으면 거절을 못해서.”
“그럼 니 친구하고는 계속 사귀는 거고. 너랑은 육체관계만 원한다?”
“……”
지은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앙다문 입술이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헤어지고 나서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다시 만난 거야?”
“이번 4월쯤.”
“꽤 됐네.”
“……”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솔직히 거기까진 태호와 더 이상 연결된 일도 아니고
내가 뭘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주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여자에게 첫 남자라는 의미는 이런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났다.
“여자한테 첫 남자는 그렇게나 특별한 건가?”
“첨엔 그랬던 것 같아.”
“지금은 아니고?”
“응, 솔직히 다시 만난 이후론 미련 같은 것도 없었고 원망 같은 것도 없었어.”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이 빠진 톱니바퀴처럼 헛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해할 만하면 그게 아니고 다시 감을 잡을 만하면 결국엔 장님이 코끼리 허벅지 더듬은 꼴이 되어버렸다.
“다신 안 본다고 다짐을 해 놓고도 어느새 오빠전화 기다리는 내 모습. 그게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가 언제부턴가 오히려 내가 먼저 전화를 하기도 하고, 나중엔 나도 그 오빠처럼 그냥 육체관계만 즐기게 되더라구.”
“……”
“한동안 그런 내 모습이 너무나 싫었는데 그것마저도 익숙해져 버린 거지. 하지만 모텔에서 오빠랑 맞닥뜨리게 된 날 다시 자각한 거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어. 그 동안 못 느꼈던 수치심이 한꺼번에 느껴지더라구. 진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
“오빠, 나 걸레 같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렇잖아. 섹스에 미쳐서 해야 될 거, 하지 말아야 될 것도 구분 못하고.”
이제 지은이의 말투는 별 감정도 없이 마치 푸념을 늘어놓는 듯 했다.
난 오히려 그런 지은이의 모습이 더 걱정스러웠다.
이러다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사실 쉽게 화내고 쉽게 수그러드는 성격보다
지은이처럼 평소 감정의 기복이 덜 심한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라면 모를까, 다른 이의 인생을 어떻다라고 평할 기준이 있나?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사는 거잖아.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못한 일은 못한 대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 인생 사는 거지.”
“그럼 오빤 나 같은 여자랑 결혼해서 살 수 있어?”
“……”
“거 봐, 결국엔 오빠도 대답 못하잖아.”
사실 내가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형수님과 나의 관계가 떠올랐고 지은이가 겪은 일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어설프게 위로한다고 해서 위로가 될 일이 아니란 생각으로 이어졌다.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어쨌을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알코올 기운이 내 입을 열게 했다.
“지은아, 니가 걸레면 나도 걸레야.”
“응?”
“나도 너랑 비슷한 그런 경험 있어. 게다가 상대는 선배 와이프였으니까 난 법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짓을 한 거지.”
“정말이야?”
“그래,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는데 너한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네.”
“오빠가 그랬다니까 믿어지지가 않아. 설마 나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
“널 위로하려고 없는 치부를 만들어내진 않아.”
“……”
약간의 침묵,,, 이번엔 내가 술잔을 권하며 지은이에게 술잔을 권했다.
“니 눈엔 선배 와이프를 건드린 내가 어떻게 보이는데?”
“내가 뭐라고 말할 주제가 되나.”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세상에 이런 나나 너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뭐라고 할 만큼 깨끗하게, 완벽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어?”
두 번째 소주병이 바닥을 드러내자마자 세 번째 소주병 뚜껑이 지은이 손에서 분리되었다.
이미 내 목구멍으로 넘어간 소주 한 병은 나를 더욱 직선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섹스를 즐기면 나쁜 건가? 꼭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되나? 섹스를 위한 섹스는 왜 도덕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거지? 물론, 나도 난잡한 섹스는 싫긴 한데 왜 싫은지는 모르겠어. 그냥 그런 가치관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자라서 그런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긴 하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내가 원하는 섹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나 하고 하는 건 좀 그렇잖아. 난 그런 건 싫던데.”
“내 말은 아무나 하고 한다는 전제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사람처럼 섹스만 하고 싶은 사람도 존재할 거라 생각하거든.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은 걸 텐데. 아무나가 아닌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에 맞는 교감을 하고 육체관계를 맺는 것이 그렇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일까?”
“갑자기 오빠 말이 왜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거지?”
어느새 대화는 시발점을 벗어나 버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우리 둘 다 그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새로운 주제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지은이는 그 시간만큼은 자괴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자신과 다르지 않은 부류로써 동병상련 혹은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고
어설픈 내 생각으로 인해 사고의 틀을 깨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대화는 점점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갔다.
“오빤 여자친구 없다더니.”
“없는데.”
“그럼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 같이 있던 여자는 누구?”
“아~, 친구들이랑 나이트 갔다가.”
“그럼 원나잇?”
“그런 셈이네.”
“좋았어?”
“아니. 하다 말았어.”
“왜?”
“잘 안 맞더라고.”
“어떻게 안 맞던데.”
“나도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는데, 음…… 물하고 기름을 섞어 놓은 거 같다고 할까? 설명하기 힘드네.”
“내가 태호한테 느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가 봐.”
“태호는 서툴러서 그런 거 아냐?”
“몰라, 섹스는 안 했으니까.”
“그럼 그걸 어떻게 알아?”
“키스해보니까 알겠던데.”
“키스 만으로?”
“응, 전 남자친구는 손만 잡아도 기분이 야릇해지는데 태호는 키스를 해도 별 느낌이 없어. 그러다 가슴이라도 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
“근데 왜 사겨?”
“오빠도 태호 착한 거 알잖아. 그리고 만약 태호랑 나랑 그런 쪽에서도 잘 맞았으면 그 오빠랑 다시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무엇보다도 태호와 관계하지 않았단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왜 그랬을까?
“근데, 오빠는 그 여자랑 키스할 땐 몰랐어?”
“첨엔 생긴 게 너무 이뻐서 내가 위축된 건가 싶었지. 키스하고 애무할 땐 술기운 때문에 그런가 했고. 근데, 삽입하는 순간, 그 때 확실히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데.”
“도대체 어땠는데?”
“음…… 한마디로 차갑다고 할까? 진짜 얼음처럼 차가운 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하기론 삽입하는 순간 뜨거운 느낌이 드는 게 맞거든. 근데 그 여잔 따뜻하다 정도도 아니고 그냥 차갑다는 느낌이 드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럼 오빤 여자 거기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다는 거야?”
“응.”
“데일 정도라도?”
“데일 정도? 그럴 수도 있으려나? 아직 그 정도 여자는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더 좋지 않을까 싶네.”
“그 오빠는 내가 너무 뜨거워서 불만이라고 하던데, 어쩜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랑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그 한마디가 귓속에서 끝없이 울렸다.
땅이 크게 흔들린 뒤 거대한 댐에 생겨나는 균열.
그렇게 내 이성에도 균열이 시작되었다.
술 몇 잔이 오가는 사이 이야기는 서로의 섹스 스타일로까지 번지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노골적으로, 자극적으로 흘러갔다.
“오빠는 어떤 자세가 젤 좋아?”
“난 뒤에서 삽입하는 거.”
“남자들은 다들 그걸 좋아하나 봐?”
“그럼 넌?”
“히힛, 나도! 음,, 그리고 정자세도 좋고…… 오랄은 어때?”
“하는 거? 아님 받는 거?”
“오빤 오랄을 해줘?”
“그 남자는 안 해줬어?”
“응.”
“난 받는 것도 좋지만 하는 것도 좋던데.”
“어떤 점이?”
“내 혀 움직임에 상대가 달아오르는 모습이. 난 상대가 흥분하는 만큼 흥분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상대가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나도 더 달아 오르니까.”
“잘해?”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테크닉이란 것이 절대적인 게 아니더라고. 넌?”
“나 뭐?”
“넌 오랄 잘 하냐구?”
“음,, 잘 한다던데.”
육체관계는 물론이고 아직 손 번 잡지 않은 사이에
이렇게나 노골적인 이야기를 거침없이 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서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하지만 우린 그럴 관계도, 그럴 계획도 없이 만나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둘 다 그만큼 취해서 그랬을까? 아니, 분명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보다 더한 스릴이 있었다.
어쩌면 육체관계 중에도 느끼지 못할 흥분이 온 신경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살짝 풀려있는 지은이의 눈,
알코올 탓도 있겠지만 그런 지은이의 눈을 보면 그녀도 이 상황을 나 이상으로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난 애무도 삽입도 천천히 부드럽게 해주는 게 좋아. 그래야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근데 남자들은 안 그런가 봐?”
“나도 너처럼 부드럽게 하는 게 좋던데.”
“정말?”
“응. 너랑 나랑 스타일이 비슷한가 봐.”
“그러게.”
언제부터 발기가 되어있었던 것일까?
발기된 이후로 한번도 힘이 풀리지 않아서, 또한 이 상황이 주는 묘하고 강한 흥분 때문에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오빠 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
“그래.”
담배를 한 까치 피워 물었다.
‘확실히 지은이는 색녀 기질이 있나 보다, 지은이도 흥분되었겠지? 팬티가 젖었을까?’
연이은 상상 끝에 욕정이 치밀어 올랐다.
‘먹고 싶다. 지은이! 아~ 미치겠다.’
태호의 여자친구란 사실도 다른 도덕적 관념들도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본능만 살아 춤추고 있을 뿐이었다.
‘지은이도 하고 싶을까?’
창 밖으로 부슬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오빠, 나 오빠 옆에 앉아도 돼?”
알코올에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지은이가 옆에 서있었다.
“응, 그래.”
안쪽으로 엉덩이를 옮기자, 지은이가 내 옆에 앉으며 술잔을 들었다.
“오빠, 러브샷 하자.”
감았던 팔을 풀면서 소주잔을 내려놓자 지은이가 팔짱을 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삼두 위로 느껴지는 풍만한 지은이의 가슴, 아찔한 느낌!
겨우 정신을 수습하려는 찰라 지은이의 손이 내 사타구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내 페니스 위로 올라왔다.
“오빠,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이미 시작되었던 이성이란 댐 표면의 작은 균열들이 드디어 댐 전체를 쩍하고 갈라놓는 순간이었다.
그 틈새 사이로 본능이라는 물줄기가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아마 나의 상태는 그러했을 것이다.
<3편으로~~>
......................................................................................................................................................
제 보잘 것 없는 전작에 관심을 보여주셨던 분들부터 새로운 이야기에 다시 힘을 실어 주시는 군요.
사실,, 기억하는 분이 계시려나 했었는데...... ^^*
그리고 야설이니만큼 자극적인 글을 쓰고 싶지만 배경상황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글은,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제 글 솜씨가 부족하여 도입부분이 지루하게 생각되더라도
조급함을 잊으시고 차근차근 읽어주시기를 당부드릴께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보다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이 더 자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보는 이의 상상력이 결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제 글도 그런 매력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추천64 비추천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