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 - 4부1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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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제1화
긴머리를 한 여인의 뒷태가 멍한 시야속으로 파고 들었다. 베이지 색의 차광 커튼을 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햇살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몸은 납처럼 무거웠고, 머리에서는 둔중한 아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제… 그 이후로 완전히 취해버린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그저 멍할 뿐이었다. 일어나려고 힘을 주자 팔과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보지?”
“아.. 네.. 그럭저럭…”
여기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주 넓고 단단한 침대에서 희성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순백의 고급스러워보이는 시트는 온통 주름투성이었다. 순간 어제 밤 이곳에서 누군가와 살을 맞댔던 기억이 플래시처럼 지나갔다.
“목욕가운이랑 타올.. 여기 둘 테니까.. 좀 씻고 오지 그래?”
“아.. 고맙습니다”
침대 한끝으로 잘 개어진 천다발을 툭 하고 던지는 여인의 옆 얼굴이 이번에는 확실히 보였다. 엷은 밤색의 긴 머리는 부드러운 웨이브를 그리며 허리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잘 정돈된 눈썹과 약간 올라가 있는 커다란 눈. 긴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다. 곧게 뻗어있는 높은 콧대와 사랑스러워 보이는 작은 입술. 갸름한 얼굴은 최고의 밸런스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턱에서부터 목덜미를 따라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바디라인은 요염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늘씬하게 뻗은 큰 키는 발군의 스타일을 뽐내고 있었다. 화려해 보이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이었다. 온몸으로 사람의 눈길을 끌 것 같은 매력적인 기품을 풍겨내고 있었다.
“………응?”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기억을 쥐어짜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보았더라… 유미도 물론 아름다운 스타일이었다. 김지영교수도 틀림없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희성의 눈 앞에 있는 여성은 레벨이 달랐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조각가의 걸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어울릴 것 같은 세련된 미모. 유미와도 지영과도 다른 미모였다. 응? 선생님과도 다르다니..? 그럼 누구?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응? 누.. 누구세요?”
“뭐라고?”
커다란 눈이 더욱 더 커지며 여자가 졌다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야 너… 어제밤 일… 혹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거야?”
말속에 어딘가 따지는 듯한 느낌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었다. 선생님과 키스를 하고… 택시에 태워져… 고급 맨션에 놀랐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이 주던 술을 거절도 하지 않고 마셨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리고… 또… 기억을 하려면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만 있었다.
“죄.. 죄송해요..”
“졌다…”
여인은 허리에 손을 올린채 짧게 한숨을 내 쉬었다.
“뭐 할 수 없지..”
희성을 향해 싱긋 웃어보인 그녀가 당황해 하는 희성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은은한 비누향이 느껴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디선가 비슷한 경험을 한 것만 같은 느낌…손바닥에는 부드러운 피부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격렬한 행위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감각이 아랫배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서.. 설마.. 심장이 고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희성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지영이가 얘기하던 그 학생이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자.. 이제 그만 씻고 오지? 곧 아침식사도 해야 하니까 말야”
그렇게 말을 마친 여인이 방을 나서려고 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지영이가 현우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손수 요리를 만들어 주다니 말야.. 너 정말 맘에 들어하는 거 알고는 있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희성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잘 잤어?”
긴 머리를 한 여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스트레이트의 갈색. 긴 머리가 티셔츠를 입은 여인의 등뒤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간신히 엉덩이를 가릴 것 같은 미니스커트 아래로는 딱 알맞은 굵기의 맨다리가 날씬하게 뻗어내리고 있었다.
“응.. 지훈이도 잘 잤어? 아침..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탁자 위에는 토스트와 샐러드 계란 프라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다 식겠어.. 이제 그만 일어나…”
그렇게 말을 하며 뒤를 돌아보는 유미의 얼굴은 창백한 무표정이었다. 눈동자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던 따뜻한 미소는 더 이상 그 곳에 없었다. 지훈은 눈을 피하듯이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자.. 여기.. 커피…”
지훈의 눈 앞에 컵이 놓여졌다. 마주 앉은 유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기..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 맘에 안들면 먹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이라도 곧 꺼져버릴 것 같은 가는 목소리였다. 지훈은 아무말 없이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이 낡은 아타트에서 눈을 뜨자마자 아침식사가 준비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넌 안먹어?”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래?”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참.. 유미..”
설거지를 하는 유미에게 지훈이 말을 걸었다.
“응? 왜?”
“설날은 어떻게 할 거야? 부모님 돌아오지 않나?”
“… 2일에 돌아오셔.. 그날 잠깐 집에 갔다 올게”
“자, 그럼.. 그때까지는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응.. 여기… 있게 해줘”
유미는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 침대에 앉아 있는 지훈의 앞에 앉아 머리를 숙였다.
“여기 밖에 없어.. 내가 있을 곳…”
무릎 위에 올려진 손과 가녀린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커튼도 없는 창 너머로 차가운 겨울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좁은 방 한쪽에 전기 스토브가 미미한 열기를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고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훈이 보다 먼저 유미의 입이 열렸다.
“저기.. 있잖아..오늘은.. 뭘 할 거야?”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가야 돼”
“…안가면 안돼?”
“그럴 순 없어.. 집세도 내야 하고…”
“가지마…”
“응?”
“돈이라면…돈이라면 내가 낼게.. 그러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얏?”
유미는 고개를 숙인채였다. 유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집세는 내가 낼게.. 내야하는 세금들도 전부… 그러니까.. 부탁해.. 날…”
“그만해”
지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 다음에 이어질 말들이 ‘혼자 내버려 두지마’ 라던가 ‘옆에 있어줘’ 같은 자신을 원하는 말이 결코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만 비어버린 마음속을 채우고 싶어하는 욕망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안기고 싶나? 아침부터 쑤셔 박히고 싶은 모양이지? 아주 음란한 본능을 줄줄 흘리는구만 이 암캐 같은 년이..”
희성을 짓밟고 유미를 손에 넣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랬었는데… 원인모를 짜증이 그대로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 나와 버렸다.
“… 그래요”
천천히 유미가 고개를 들었다.
“유미는 음란하거든요… 자지만.. 좋아하는 유미에게 벌을.. 벌을 주세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세요.. 나를.. 짓밟아 주세요…”
거리의 창녀처럼 음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애절해 보이는 그런 표정에 지훈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유미를 그대로 침대에 눕히고 말았다.
12월 30일. 희성과 유미가 만난 이후로 따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기예보는 평년보다 한층더 심해진 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잘 잤니? 편하게 잤어? 준비 다 됐으니까 다들 앉아봐”
밝고 넓은 식당으로 들어서자 웃는 얼굴의 지영이 말을 걸어왔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목덜미에서 묶은 지영은 회색의 스웨터에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엇다. 희성이 상상조차 못하던 그런 차림새로 부엌에서 아침을 짓고 있었다. 또 한명의 여인은 핑크색 블라우스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 여인은 화이트 와인을 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조차 그녀의 행동을 기품있게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거기 앉아봐”
생선구이 한조각과 계란 말이. 된장국.. 전형적인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너도 마실 거지?”
내밀어진 와인잔을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말을 더듬으며 희성이 와인잔을 건내받畇? 여인의 등 뒤로 새파란 겨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피식 하고 웃은 여인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느껴져도 이상하게 기분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더 먹을래?”
“아뇨..배 부른 걸요”
솔직히 식욕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놀랄정도로 깨끗하게 비워버리고 말았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 요 며칠동안 혼자서 괴로워하고 고민하느라 제대로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단 한순간도 이런 편한 기분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진정된 덕분인지 여유가 생긴 희성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꽤나 넓어 보이는 거실과 식당이 이어져 있었다. 베란다로는 푸른 하늘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었다. 흰색을 베이스로 한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인테리어였다. 벽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희성의 눈에도 훌륭해 보이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저 그림… 지영 교수의 남편이 그런 것일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부드러운 표정의 지영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여기가.. 선생님 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