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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악연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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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6 회 작성일 23-12-13 12:2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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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을 떴을 때 벤츠는 반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낮은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공장 바닥용 경질 우레탄 제품으로 공사를 한 주차장은 불규칙한 토지 모양에 맞추느라 삐뚤어진 사다리꼴을 하고 있었는데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 쪽 벽면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터져 있었음에도 반지하 특성상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침침했다.

제대로 마무리 작업을 하지 않은채 공사를 마쳤는지 주차장엔 각종 폐자재와 실리콘, 페인트 따위를 담았던 플라스틱 통들이 흩어져 있었다.

"못 좀 치우지. 씨발, 빵꾸나겠네."

자신의 저급한 취향을 대변하듯 노란 색과 파란 색이 정신없이 섞여 들어간 레이온 셔츠 위로 싸구려 블랙수트를 걸쳐 입은 운전수가 혼자서 투덜대며 미리 주차되어 있던 회색 승합차 옆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포함 지하 1층, 지상 7층에 외벽을 오렌지색 드라이비트로 거칠게 마감한 그 건물은 원래 1종 근린생활시설의 용도로 구청에서 허가를 받고 건축을 시작한 빌딩이었다.

그러나 건축 시공 중 시행사가 부도처리 되는 바람에 정화조 공사를 완료하지 못해 건축물 사용승인이 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현재까지는 입주한 사람이 없는 빈 건물이다.



건축주가 매입할 용지를 담보로 해서 은행으로부터 PF를 일으키는 것은 건설업 상 일반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애초 이 공사를 시작한 건축주의 정체가 매우 애매했다는 것이다.

이쪽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업체도 아니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정체 애매한 이 건축주는 건설 시행사를 급조한 후 은행을 드나들며 매우 능수능란한 솜씨로 PF를 따냈다.

감탄할 만한 손놀림으로 은행을 주무르던 시행사는 시공권을 팔아먹을 시공사를 구하지 못하자 직접 하도급 업체를 선정해서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공사를 시작한 후에는 도급을 준 업체들에게 어음을 남발하며 차일피일 지급을 늦추다가 휘슬과 함께 버저비터가 터지는 것처럼 완공 직전 극적으로 파산해버리고 말았다.

애초부터 애매했던 건축주는 이미 간 데 없고 시행사의 대표로 있던 바지사장이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가버렸는데 이 지경이 되자 손해를 떠안은 은행에서 최대한 손실을 줄이고자 건물을 경매에 내놓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일이 생기는데 경매에 참여하려는 입찰자들이 도통 나타나질 않는 것이다.

그나마 참여를 희망했던 입찰자들도 식사를 한다던가 차를 마신다던가 건물 하나를 장만해 보겠다는 꿈을 안고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난 후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응찰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매가 무산되나 싶던 마지막 순간, 마치 혜성처럼 나타난 자가 있었으니 무명의 G&S development 라는 회사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허수아비같던 무력한 입찰자들을 제치고 거저나 다름없는 싼 가격으로 매물을 삼켜버렸다.



회사 등기 주소란에 G&S는 구로구 수궁동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그곳엔 크진 않더라도 업무에 열중하는 사원들과 천정형 냉난방기가 휙휙 돌아가는 아담한 회사 건물이 있는 대신 항상 문이 잠겨있는 자그마한 사무실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이 사무실을 빌린 임차인은 이제 실체는 없고 간판만 떠돌아 다니는 해성리츠 소속 조직원 중 한 명이었고 그나마 임대인은 소득세가 걱정된 나머지 임차인과 제대로 된 계약서를 작성하지도 않았다.

한 달 20만원 하는 월세가 그의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가기만 한다면 임대인은 아무 것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해성리츠는 이 사건과 관계된 어느 서류를 뒤져봐도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은행을 벗겨먹고 사라진 애매모호한 건축주의 정체 역시 그들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잠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아파오고 나프탈렌만 퍼먹어가며 2,3일간 한 잠도 못 잔것처럼 입 안이 쓰고 정신이 멍했다.

한순간 무슨 버스가 이렇게 좁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는데 단속나온 투전판처럼 뒤죽박죽된 머리로도 곧 자신이 납치당하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갸날픈 신음소리만 새어 나올뿐이었다.

차 문이 열리고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엎드려 있던 그녀의 양 어깨죽지 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끌어냈다.

힘없이 죽 끌려 차밖으로 나온 그녀를 남자가 가볍게 뒤집으며 어깨에 걸쳐 매고는 비상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씨..본드 냄새."

그녀 옆에 탔던 남자가 차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옛날에 이거 끊느라고 힘들었었는데.."

운전수가 그의 말에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들은 앞서가는 사내를 따라 비상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팔과 다리를 늘어뜨린 채 반으로 접혀 그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비상구는 컴컴했으며 위에서 내려오는 빛 때문에 그나마 계단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계단은 한 층을 더 내려간 곳에서 끝났고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철문 하나가 옹색하게 붙어있었다.

뒤따라 오던 남자들이 1회용 라이터를 철컥 대며 길을 밝혔다.

티셔츠 사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좀 넓은 지하실이었는데 위 층 주차장처럼 천정을 받치는 기둥 몇 개가 규칙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지하실 중앙엔 통상 하우스비닐이라고 부르는 PP필름이 사방 3,4미터 정도 넓이로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한 남자가 의자에 포박된 채 앉혀져 있었다.

그 주위에 서있던 남자 너댓명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티셔츠 사내 쪽을 쳐다보았다.

"걔야?"

"뭐 이래 늦었어. 씨발. 한참 기다렸네."

그들은 저마다 남자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짝다리를 짚고 서 있던 한 녀석이 흥미로운 눈으로 늘어져 있는 그녀를 훑어봤다.

"뭐야, 기절했어?"

"엄청 무거워,이 년."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전화해. 다 왔다고."

폭이 넓은 금반지를 왼 손에 세 개나 낀 녀석이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감독이 그렇게 자주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구 그렇게 해서는 필드에서 일을 진행하기도 어렵겠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검은 날염이 번지는 듯한 옹브레 체크 셔츠를 입고 옻칠을 입힌 긴 나무젓가락으로 참치 스시를 집으며 말했다.

참치의 한쪽 표면만 직화로 익혀 고소하게 만든 초밥이었다.

"주기적으로 하는 시기가 있고 인폼이 온다거나 제보를 받는다거나..이상한 낌새가 보인다거나 하면 그땐 하죠."

냉큼 참치 스시를 입에 집어넣는 남자의 셔츠 주머니 윗부분에는 Financial service commission 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찍힌 뱃지가 붙어 있었다.

"자,자. 문 서기관, 한잔 하지. 김 과장도 들어요."

다소 나이가 들어보이고 반죽을 묽게 한 파전처럼 푹 퍼진 인상의 남자가 맞은 편에서 술병을 들었다.

서기관이라고 불린 남자와 광길은 도자기로 만든 작은 술잔을 들었다.

"아우..아직 근무 중이라 그냥 받아만 놓겠습니다."

문 서기관은 잠시 입술만 축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술잔 한 구석에 일본어로 잇신 스시라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스시집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사이프러스 우드블럭으로 벽면을 장식한 4인용 룸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창호로 만들어진 미닫이문 뒤에는 100여평의 넓은 홀이 있었고 홀의 넓은 쪽 벽면에는 캘리포니아 퍼시픽 연안에서 베어 온 홍송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바가 있어 4명의 주방장이 그들의 손놀림을 구경하느라 바에 바짝 달라붙은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몇 개의 커다란 실링 라이트와 수많은 매입등, 천정의 루브와 벽 사이 코브에 감춘 브래킷이 잘 익은 옥수수 빛으로 주방장들이 만들어낸 스시를 먹음직스럽게 비추었다.



광길은 반 잔 정도를 들이키고는 술을 따랐던 남자가 호기롭게 잔을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이 자는 요새 최강의 실세라고 불리는 청와대 민정 수석의 동생이었다.

원래는 지방에서 부동산 중개를 업으로 하던 사람이었는데 형이 권력의 심장부로 들어가자 그 위세를 업고 정부부처에 인맥을 넓혀가며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중이었다.

이 자에게 줄을 대기 위해서 보스와 광길은 값비싼 가격에 미스코리아 출신의 모델을 한 명 섭외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벤틀리 컨티넨탈 GT 안에 거의 속옷만 걸치다시피 한 그녀와 현금이 가득 담긴 박스를 함께 집어넣고서야 그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번호를 받아올 수 있었다.

지금이야 모른체 하고 있지만 욕심은 스크루지 뺨 치도록 많은 반면 뒷처리가 깔끔하지 못해 그가 벌인 이권 사업들은 정권이 바뀌면 게이트로 발전할 소지가 대단히 컸다.

그 사실을 모르는건 그 자신뿐이었다.

최근 연예 기획사를 겸하는 모바일 업체에 대표 이사로 취임했는데 자신을 회장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대단히 좋아해서 광길은 꼬박꼬박 그를 강 회장님이라고 불러주고 있었다.



강회장이 술잔을 내려놓자 광길은 번개같이 일어나 그의 잔에 얌전히 술을 채워 놓았다.

"그래요, 그래. 공무원들이야 업무 처리가 항상 깨끗하지. 하지만 업체 쪽에서야 어디 그런가. 아닌게 아니라 부주의한 누락만 있어도 바로 신고가 들어가는게 이쪽 바닥인데.."

강회장이 광길에게 넌지시 눈짓을 했다.

너도 한마디 거들라는 뜻이다.

서기관이 잠자코 성게알을 넣어 김으로 싼 스시 쪽으로 젓가락을 뻗었다.

"필요한 인,허가는 국토부에서 다 받았구요, 단지 저희가 염려되는 것은 증자 후에 주주구성이 해당 요건에 미흡하다고 관계기관에서 판단내리는 것입니다.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융통성이 발휘될 수 있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해당 요건이야 정확히 명문화되어 있는 건데."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 비율이라는 것이 매번 다르고..사실 저희야 불건전한 자산을 건전하게 만든다는 선의가 목적이기도 한데 약간의 인컴플리션은.."

"사업은 이익이 목적이죠."

문 서기관은 간단히 그의 말을 잘랐다.

까칠한 새끼.

광길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다시 강회장을 보았다.



문 서기관의 의도는 확실했다.

그는 자신과 얘기할 만한 사람과 얘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융위 금융정책국 정책과장으로서 자기가 얘기할 만한 사람은 광길 정도의 피라미가 아니라 강회장 쯤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제 퇴근 시간 부위원장이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며 그를 이 자리에 나가게 한 것은 그들의 청탁을 들어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뭐, 어쨌든 좋다.

공무원으로서 자존심이나 명예는 눈 한번 질끔 감으면 된다.

지금까지 특별히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적은 없지만 청렴이 공무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들이 청탁의 댓가로 아마도 돈을 내밀겠지만 사실 지금 당장 돈이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처음 금융위에 들어올 때는 3400 의 연봉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것의 배 이상 뛰었다.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돈이 탐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군소리 없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돈 외에 한가지 탐나는 것이 있어서였다.

그는 부위원장 측 라인이 탐났다.

그가 국장이나 기획조정관, 혹은 상임위원으로까지 승진하기 위해서는 그 라인이 필요했다.

부위원장은 증선위원장, 그러니까 증권선물 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직급상으로야 부위원장 위에 위원장이 있지만 임기가 이제 6개월 남짓 남은 위원장은 금융정책 상 이견을 보여온 청와대와 이미 척을 지고 있었다.

위원회 내부 실세는 명실공히 부위원장이다.

사기업으로 간 서기관의 친구들은 이미 이사를 달고 억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직업의 안정성이나 권력의 면에서 그는 자신의 직위를 그들보다 못하다고 전혀 생각지 않고 있지만 한편 40이 넘은 지금 승진의 기회에서 멀어진 채 만년 서기관으로 남지는 않을까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부위원장이 보내는 시그널을 알아챘다.

소문이 맞다면 강회장은 결정적으로 그를 부위원장 라인에 태워줄 만한 사람이다.



"그럼 평상시 감독 업무는 아예 없는가?"

강회장이 캐리어를 과시하듯 느긋한 어조로 전어 스시를 먹으며 말했다.

"1차 감독은 금감원 쪽..그러니까 금투부에서 할 일이죠. 저희야 제도 개선이라던가 금감원에서 협의가 들어올 때 나서구요."

"그렇지. 하지만 감사 청구가 들어가면?"

"정황이 확실하다면 나서겠지만. 그 경우에도 금투부의 조사가 불확실하다고 여겨질 때 나서는 것이 관례이고.."

"우리가 말하는게 그걸세. 최종적으로 자네들이 나서는 경우. 어떤 이유에서든지 키를 쥐었을 때 말야."

"그렇게 된다면요?"

강회장이 다시 광길을 쳐다보았다.

광길이 서기관을 향해 말했다.

"그쪽에서 오피서가 되면 시간을 좀 길게 달라는 것입니다. 조사든 감독이든 발표할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

서기관은 여전히 강회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강회장이 난처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여러 변수들이 있을 테니 핸들링 할 시간도 필요할테고.."

문 서기관이 재빨리 말했다.

"변수라는 건 어떤 걸 말하시는 겁니까?"

"서류 작업이나 보고 절차 같은거 말이네."

"그런 거야 별로 문제가 되질 않죠. 요새 많이 간소화되서.."

"무슨 소리인가. 공무는 보고서라는 말도 있질 않나. 회사에서도 제안 하나 통과시키려면 몇 군데를 거쳐야 되는데."

강회장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문 서기관이 귀를 만지며 입을 다물었다.

"예컨대 이런 걸세. 서류작업이 미비해서 몇 군데 보고라인에 이상이 있을 수 있네. 그럴 경우 감사가 늦어지는 거지. 감사를 안하는 건 아니잖나."

강회장이 그를 가리켰다.

"그것은 자네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세. 다만 업무가 좀 늦어지는 것일 뿐이지. 우린 그 정도면 된다는 걸세."

그때 전화가 왔다.

광길이 발신자를 슬쩍 보더니 그들에게 허락을 구했다.

"받아요, 받아."

강회장이 손을 흔들자 그는 문 서기관의 눈치를 보며 몸을 돌려 한 쪽 손으로 송화구를 막으며 전화기를 귀에 댔다.

통화는 짧았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금반지를 낀 녀석이 전화기를 닫자 티셔츠 입은 사내는 비닐이 깔려진 바깥 쪽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 위치에서는 포박된 남자를 옆에서 볼 수 있었는데 봉두난발을 하고 얼굴과 옷이 피로 더러워진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셔츠는 군데군데 찢긴 채 가슴까지 벌려져 있었고 발은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그는 자신의 발끝을 보고 있었는데 그의 배가 빠르게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거친 호흡을 하는 것으로 보아 사내들을 매우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신들어?"

티셔츠 사내는 주저앉아있는 그녀의 턱을 들어올리고는 손바닥으로 뺨을 한 대 올려붙였다.

그녀의 얼굴이 스파이크 당한 배구공처럼 옆으로 휙 돌아갔다.

짧게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뺨을 가렸다.

"썅년이 어디서 소릴 질러?"

서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거친 음성으로 외쳤다.

고함이 지하실에서 음침하게 에코되고 뒤따라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느리게 돌아가던 그녀의 시상하부 신경체계들이 공포와 함께 뛰어올랐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감싼 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저씨, 저는.."

아무 말 없이 남자가 다른 쪽 뺨을 내질렀다.

그녀가 반대쪽으로 엎어지며 다시 비명을 올리자 서 있던 남자들 쪽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 년이 근데 장난치나."

"가죽을 벗겨 버려, 썅년."

"또 한번 떠들면 이걸로 패."

쇠파이프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녀 앞에 떨어졌다.

그녀가 겁에 질려 입을 막았다.

아무리 안 보려해도 의자에 묶인 남자 쪽으로 흘깃흘깃 시선이 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입닥치고 가만히 있어. 똑바로 앉아. 무릎꿇고. 똑바로."

그가 때릴 듯이 다시 손을 쳐들자 그녀는 얼른 몸을 움츠리며 무릎을 꿇었다.

"손은 무릎 밑에 넣어. 그렇지."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고분고분하게 그의 말에 따랐다.

"이제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입 벙끗 하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는거야."

그가 얼굴을 낮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말했어. 알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조용히 해. 혀 놀리면 아주 혀를 뽑아버릴테니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널 보자는 분이 있어서 데려온거니까 그 분이 너한테 말 하기 전까지는 이대로 있는거야. 알았니?"

그녀가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티셔츠 사내는 그녀의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여기는 특별한 곳이야. 이상한 곳. 무서운 곳. 우리 세상. 알았니? 니가 살던 곳이 아니야. 여기서 넌 벌레에 불과해. 우리는 너 산채로 잘라서 땅에 묻을 수도 있고 그래봐야 아무도 알 수 없어."

그가 자신의 말이 잘 전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말을 멈췄다.

"이거 하나는 확실해. 니가 사느냐 못사느냐는 이제부터 니가 만날 사람한테 달려있다. 명심해. 이제부터 너 만나겠다는 분은 하늘이다. 알았니?"

그녀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눈 앞에서 번쩍 불이 튀었다.

"이 썅년이 아직 정신을 못차렸네."

그가 다시 손을 올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며 엎드렸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똑바로 앉아. 이년아."

얼굴에서 손을 떼자 그녀의 양볼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것이 보였다.

그녀가 와들와들 떨며 다시 손을 무릎 밑에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널 볼 분이 뭐라고?"

"하늘..하늘이요."



문 서기관은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았다.

청탁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면 이야기를 빨리 마무리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뻔뻔스럽고 확실하게.

"좋습니다. 저도 강회장님한테 한 가지 청이 있는데요."

강회장이 깜짝 놀라 눈을 들었다.

"아..이거. 문 서기관."

그가 광길을 보며 껄껄 거렸다.

"내 문 서기관 처음 볼 때부터 알아봤지. 응? 화통한 사람인거 말야. 알아봤다니까."

"물론 응당 섭섭치 않게 대접하겠습니다. 저희 회사 사장님께서도 이런 경우.."

"부 위원장님의 연구모임이 있습니다. 목요회라는 것이죠."

문 서기관은 광길의 말은 듣지도 않고 말했다.

"순수한 연구 모임입니다. 부위원장님 사비로 운영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미나도 하시고 내부 회원 대상으로 연구 결과를 발간도 하십니다. 근데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강회장의 빈 잔에 천천히 술을 채웠다.

"거기에 저도 논문을 내고 싶습니다."

광길은 조심스레 강회장을 쳐다보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 고생을 하며 강회장에게 줄을 댄 것이다.

보스가 시작한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가 강회장 입에 달렸다.

잠시 문 서기관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말없이 술잔을 잡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죽 들이켰다.

"그 까짓게 뭐 어렵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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