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2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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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지 좌우에서 밧줄에 매달린 남녀 백댄서들이 나타났다. 몸매가 들어나는 타이트한 복장으로 그네를 타듯이 등장한 백댄서에 이어서, 청중들의 등 뒤의 스테이지 반대편을 향해 푸른빛갈의 레이저 광선이 비추어졌다. 레이저 광선 속에 마츠다세이코가 몸의 각선미가 그대로 들어내는 의상을 걸치고 허공을 날아올랐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가는 밧줄에 의지하여 허공을 나른 마츠다세이코가 스테이지 위에 날아가 고양이처럼 사뿐히 날아가 앉았다. 한마디로 빛의 환상이었다. 스타디움이 들썩거릴 정도로 관람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민우는 레이저 망원경으로 환호하는 관람객들을 살피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스테이지 앞과 통로, 그리고 출입구를 번갈아 살폈다. 그때 다시 레시버로 전 과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라커룸 복도에 남경식과 수하들이 나타났다. ‘비트’팀 이동 바람.”
라커룸이라면 무대 옆의 대기실이다. 강민우는 이층 공연장을 나와서 층계의 손잡이를 타고 일층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관람객들이 입장한 스타디움 복도는 혼잡하지 않았다. 강민우가 공연장 옆의 복도로 들어서는 동시에 총성이 들렸다. 하지만 총성은 공연장 안에서 들리는 음악소리와 열광하는 청중들의 이우성에 묻혀 버렸다.
라커룸을 향하는 복도 끝에서 경호원 한명이 비틀거리며 뛰어 나오고 있었다. 뒤이어 총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뛰어오던 경호원은 기어이 사내들의 총에 맞고 쓰러졌다.
어느새 강민우 주위로 요원들과 일본 경찰들이 달려왔다. 요원들, 그리고 일본경찰들이 사내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사내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복에는 총성들이 메아리쳤다. 기둥에 은신하며 총을 발사하던 사내들이 라커룸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강민우는 요원들과 같이 복도를 달려가 라커룸이 있는 복도로 들어갔다.
요원들은 복도 끝의 비상 출입구로 향하는 사내들을 뒤쫓으며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강민우는 스테이지로 향하는 출입구에서 총을 발사하고 있는 두 사내를 발견했다. 철제캐비닛을 방패로 삼아 권총을 난사하는 사내들을 바라보는 강민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점퍼를 걸친 사내와 검은 양복을 걸친 사내였다. 기둥 뒤에 은신한 강민우도 두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점퍼의 사내가 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키토 오야붕! 다마데스! 니게요요. 이꾸!”
“요이, 시아게 타노무.”
두서없이 서두르는 말에 대답한 양복을 걸친 사내는 눈초리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강민우의 눈동자가 권총의 가늠쇠처럼 캐비닛 너머로 동태를 살피는 사내에게 초점을 맞췄다. 피신하려는 사내는 앨리스 킴의 오빠 남경식이다. 남기춘이기도 하며 야쿠자가 된 일명 아키토였다. 남경식이 재빨리 스테이지로 향하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남아있는 점퍼의 사내가 권총을 발사하고 고개를 숙인 틈을 노려 강민우는 복도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우뚝 서서 걸어가며 권총의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고개를 내밀었던 사내는 머리에 총알이 관통되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강민우는 스테이지로 향하는 출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공연 중이던 스테이지와 관중석은 갑작스런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스테이지에 있던 마츠다세이코와 백댄서, 들은 피할 곳을 찾아 좌충우돌하였다. 강민우는 스테이지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남경식을 보았다. 그는 재빨리 백댄서들이 입장하던 밧줄에 붙잡고 몸을 날렸다.
스테이지 건너편에 도착한 강민우는 남경식의 등을 걷어차며 뛰어내렸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남경식이 강민우를 향해 총구를 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강민우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팔뚝이 쇠꼬챙이가 스치는 것처럼 뜨거웠다. 관통은 당하지 않았어도 총알이 스쳐간 점퍼 소맷자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남경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던 강민우가 멈칫하였다. 몸을 날려 돌려차기로 남경식의 팔을 가격하였다. 강민우는 남경식의 목숨을 끊기 전에 최태웅을 에게 알아내지 못한 흑사회 조직원들의 정보를 캐내고 싶었던 것이다. 권총을 떨어트린 남경식이 뒷걸음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강민우를 공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강민우를 향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던 남경식이 총성과 함께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강민우는 자신의 의도가 빗나갔기에 낭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쫓아왔는지 등 뒤에는 송나희가 권총을 들고 있었다. 강민우는 쓰러진 남경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살려줄 테니, 빨리 대답해. 광주사태 당시 네가 사주한 흑사회 조직원들은 어디 있어?”
“모, 몰라! 넌 누구야?”
남경식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의혹으로 가득한 눈빛을 하였다. 숨이 꺼져가는 목소리를 듣기위해 강민우는 그의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흔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살고 싶으면 시간이 없어! 놈들 있는 곳을 말해!”
“이, 이제 와서 알면.........뭘 해?”
남경식이 숨넘어가는 목소리를 흘렸다. 강민우가 남경식의 입 속에 총구를 집어넣었다.
“죽고 싶어! 놈들 어디 있어?”
“저, 정말....... 정말 몰라. 놈들이.......한국에 남고.......싶다고 해서.......자금과 호적을.......만들어 주고.......헤어져서........몰라.”
간신히 말을 마친 남경식이 힘없이 머리를 떨어트렸다. 강민우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남경식의 멱살을 놓고 일어섰다. 그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주위를 예민하게 살폈다. 그리고 스테이지를 뛰어내려 공연장을 나섰다. 어디에도 앨리스 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넓은 입구에는 피신하려는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아우성이었다. 문득 그 와중에도 입구 홀 옆의 소지품 보관함으로 다가서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손에든 열쇠 모양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엘리즈킴이 최태웅에게 귓속말을 하며 건네주던 열쇠와 여인이 들고 있는 열쇠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연장 입구로 홍성식과 송나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민우는 보관함으로 다가서는 여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여인을 낚아채고 얼굴을 확인했다. 겁에 질린 여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봤다.
“난노! 난데스까?”
앨리스 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여인이 뒷걸음질을 하며 강민우를 피했다. 강민우는 보관함에 근접하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홍성식과 송나희가 그에게 달려왔다. 송나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강민우를 쳐다봤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고 있는 강민우의 팔을 싸매주었다. 홍성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본다.
“앨리스 킴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관함이야!”
“네.......!?”
“그런데 여기가 아니야. 라커룸에도 보관함이 있지!?”
“네.”
강민우는 홍성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강민우는 다시 스타디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타디움을 빠져 나오려는 사람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쓰러져 짓밟히기도 하여 처참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역류해서 나오는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가 라커룸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라커룸의 한쪽 벽에는 보관함 박스들이 즐비했다. 강민우의 시선이 비상구로 이어지는 복도 끝으로 향했다. 두 사내와 함께 보관함 박스에 다가서 있는 여인을 향해 그의 눈동자가 클로즈 업 되었다.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걸어가고 있던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비 모양의 가면을 쓴 여인이었다.
여인은 다급하게 손에 든 열쇠로 보관함 상자 구멍에 끼워 넣고 있었다. 노란 눈의 여인, 앨리스 킴이 분명했다. 강민우는 주저 하지 않고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강민우가 발사한 총알은 정확하게 앨리스 킴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앨리스 킴은 요염한 여인이 교태를 부리듯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사내 두 명은 빠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고 강민우에게 총을 난사했다.
뒤따라서 뛰어든 홍성식과 송나희도 사내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강민우는 기둥을 하나씩 건너서 몸을 은닉하며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사내들 중 한명이 팔에 총탄을 맞고 신음을 흘렸다.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다른 사내가 쓰러진 사내를 부축하고 비상구로 튀어 나갔다.
도주하는 사내들을 확인한 강민우가 쓰러진 앨리스 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가면을 벗겨냈다. 모니터 화면으로 도청해 보기보다 더욱 남자를 유혹할 만한 미모였다.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며 쓸어졌어도 앨리스 킴은 분통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욕설을 뱉었다.
“What the fuck! Get the fuck out!”
앨리스 킴의 손에는 두 개의 열쇠가 들려져 있었다. 강민우는 묵묵히 욕설을 내뱉는 앨리스 킴의 손에든 열쇠를 낚아챘다. 열쇠에 적힌 244번의 보관함을 열었다. 보관함 속에 있는 검은 색의 작은 트렁크가방을 꺼냈다. 또 다른 열쇠로 트렁크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용기에 담긴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이 저장된 것으로 판단되는 디스켓이 있었다.
강민우가 트렁크가방을 닫고 일어섰다. 그때 복도 한쪽 벽의 중간 라커룸의 문이 덜컹 열렸다. 그리고 또 다른 사내들이 튀어 나왔다. 사내들은 대뜸 강민우 일행에게 총을 난사하였다. 사내들이 쏜 총알이 보관함 박스 하나를 박살냈다. 그리고 놈들의 총탄에 맞았는지 홍성식이 팔을 붙들고 뒹굴었다.
트렁크가방을 들고 있던 강민우는 바닥을 한 바퀴 굴러 기둥 뒤로 몸을 감추면서 사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송나희도 강민우 등 뒤로 몸을 숨겼다. 피가 흐르는 팔을 붙들고 뒤로 물러난 홍성식은 보관함 박스 뒤에 은신하고 사내들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사내들 중 삭발한 사내가 화가 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케된 거야? 간나새끼들!”
사내들은 북한공작원들이고, 물품을 인수하려고 기다리던 북한공작원 대좌 리성철이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도 끝까지 기다리다가 분통이 터진 것이다. 강민우는 들고 있는 트렁크가방을 홍성식에게 던졌다.
“부탁하네. 여기는 내게 맡기고.”
“네.”
가방을 받아든 홍성식이 몸을 돌리는데 비상구 문이 열리고, 안기부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안기부 요원들이 합세한 강민우 일행과 북한공작원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요란한 총성 속에서 북한 공작원 두 명과 요원 한 명이 총탄을 맞고 쓸어졌다. 뒤이어 제복을 한 일본 경찰들도 합세하였다. 공작원들은 중과부족인 것을 알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북한 공작원들은 스타디움을 벗어났다. 그들은 이미 도주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마치 아우성치며 스타디움을 벗어나려하는 군중들의 혼란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았다. 군중 속으로 스며들더니 대로변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이용하여 일본 경찰의 추격을 벗어나 사라졌다.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의 광릉 숲길에 찬바람이 불어 낙엽을 휘날린다. 안기부내의 어느 국장실 사무실에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와 최재인 전산실장이 있었다. 회전의자에 앉은 남자의 신분을 알 수 없으나 최 실장은 무척 긴장한 표정이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건 인계도 실패하고 제가 개입된 것이 들어 났습니다.”
“어떻게 하기는!? 외국으로 도피해 있어.”
“그렇다고 영원히 피할 수는 없잖습니까? 제 가족들도 있는데요.”
“그럼, 얼마동안 들어가 있어. 빨리 나오도록 내가 손을 쓸게. 그동안 가족은 내가 보살펴 줄 테니 걱정 말고.”
“그게 쉬울까요?”
“왜 징징거려! 최 실장답지 않게.”
불빛에 들어나는 최 실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동안 등을 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최 실장은 낙심을 하는 표정이다. 남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린다. 그리고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최 실장이 나가고 나서도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 유출사건은 국가의 중대한 사건이건만, 언론이나 매스컴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최재인 실장은 국가 기밀 누출이라는 죄명 아래 법정에 서게 되었다. 직접 북한공작원과 접선 하려던 최태웅과 남경식은 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하였다. 그리고 체포된 앨리스 킴은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국국적을 소유했기에 미국 측과의 범인 인도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현행범으로 판단하여 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을 되찾음으로서 긴장했던 정부는 한시름 덜게 되었다. 그리고 테러와 북한에 대한 방지시스템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NTIS를 더욱 조직화하여 새로운 정보망을 갖춘 기구로 승격시켰다. 대북과 대테러뿐만 아니라, 정부 주요인사와 건물에 대한 보호감시 시스템의 전산망까지 갖춘 기관이었다.
비트작전으로 홍성식 요원은 팀장, 송나희는 새로 조직된 NTIS의 전산실장이 되었다. 그 외에도 비트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에게 각각 포상이 주어졌다. 그런데 가장 공적이 많고 힘든 일을 맡았던 강민우는 감찰실장이라는 애매한 직책을 맡았다. 업무를 관리 감시하는 직책이기는 하나 알고 보면 특별한 업무가 주어진 직책이 아니기에 요원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일대,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는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여 40만평이 넘는 방이동 일대에 천 팔백 여억 원을 들여 올림픽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성하고 있는 부지 한쪽공간에는 새로 신축한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표지판에는 장차 역사체험관이 될 건물이라고 하지만, 건물을 왕래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세히 보면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두터운 방화철문이 내려져있다. 건물 한쪽은 인공호수로 막혀 있어 외부 출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건물주변에는 CCTV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건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안기부 별실이라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안기부 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시설이었다. 각층으로 엘리베이터로 이동이 가능하고 각개의 특성으로 디자인된 사무실마다 독립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요소요소마다 설치된 보안시스템과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보안카드가 필요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다. 이곳은 다름이 아닌 왕릉의 안기부에 있던 NTIS가 강화 조직되면서 별도로 옮겨온 건물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NTIS의 작전 회의실에는 팔짱을 낀 오민국 국장이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오 국장 앞의 타원형 탁자 주위에는 가슴에 NTIS명찰을 달고 있는 책임자급들만 앉아 있었다. 전희재, 강민우를 비롯하여 홍성식 등 안면이 있는 요원들이었다. 주로 ‘비트’작전에 참여했던 요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민국 국장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NTIS의 전산실장을 맡게 된 송나희가 바쁘게 걸어 들어왔다. 송나희가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에 앉고 나서 그때서야. 오 국장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요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비트 작전에 고생한 요원들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공헌한 노력을 참작하여 아마도 공로가 인정되는 요원들에게는 포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곳이 국가 대테러와 대북 정보를 수집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NTIS 본부다. 대통령께서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NTIS를 강화하게 되었다. 국가 원수의 지시에 따라 대테러, 대북뿐만 아니라, 사회 안정에 걸림돌이 되는 특수범죄에 관한 업무도 참여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주로 비트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 중심으로 선발 되었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된다. 나는 왕릉과 이곳을 왕래하겠지만 평상시 업무는 전 과장이 맡아서 할 것이다.”
오민국 국장이 들고 있는 볼펜으로 전희재 과장을 향해 가리켰다. 앉아 있던 전 과장이 일어나서 요원들을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내일, 일부 요원들은 판문점으로 가는 임무를 받을 것입니다.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순하려는 외국인이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야당 인사들의 접촉을 막고 안보 유지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 과장은 이어서 비트 작전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사망, 아울러 최재인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결과였다. 아울러 엘리스 킴에 관한 얘기에 덧붙여서 안기부내의 실세였던 권익수 차장이 면직 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 국장의 작전결과와 요원들에 대한 치하를 끝으로 요원들은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교환했다. 오 국장을 남겨놓고 요원들은 상황실을 나왔다. 강민우도 요원들과 같이 상황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던 홍성식이 다른 요원에게 물었다.
“권익수 차장이 왜 면직 당했지?”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권익수 차장이 왜 면직 당했는지 알고 있는 요원들은 없었다. 하지만 강민우는 안개작전의 파일에서 보았던 안국동 사건의 지휘자 ‘GIS"라는 이니셜을 떠올리고 있었다. 앞서서 걷고 있는 송나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머리 뒤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걷던 송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퇴근하고 뭐해요?”
“그냥 쉬고 싶어요. 왜요?”
“저녁식사 같이 할까 해서.”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송나희는 배시시 미소를 지며 걸어갔다. 일층 복도에서 멈추어선 강민우는 공연히 주위의 요원들 눈치를 살폈다. 그는 송나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전산실로 통하는 복도로 나오는 유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유서연도 NTIS 요원이 된 것이다. 유서연이 송나희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언니! 권 차장이 면직 당했다면서?”
“응, 넌 그걸 벌써 알았니.”
“왜, 면직 당했데?”
“나도 잘 모르겠어.”
유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나희는 유서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권 차장의 추천을 받고 유서연이 안기부로 입사했다는 것이다. 전산실 안으로 들어가는 송나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서연이 걸음을 재촉한다.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강민우가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민우와 마주친 유서연이 주춤한다. 그리고 생글거리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강민우가 미소를 띠며 지나치자 무슨 말인가 하려는지 멈추어 섰다. 유서연은 전혀 틈을 안주는 강민우가 야속했다. 멍하니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11월의 막바지에 날씨가 추워져 밤사이에 추적거리고 내린 비가 얼어붙어 도로가 미끄러웠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NTIS의 정보를 입증하듯이 소련인 한 명이 판문점을 관광하다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탈출했다. 북한경비병들의 추격으로 발생한 쌍방의 총격전으로 국군 1명이 전사하고 북한군인 2명이 사망했다.
비트 작전이후로 여유가 생긴 강민우는 평상시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나서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거실을 나서려다가 이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즘 한창 대학 입시공부에 매달리는 이진아는 벌써 집을 나가고 없었다. 책상위에는 공부하다가 펼쳐 놓은 책들과 그녀가 항상 안고 다니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진아의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강민우는 모니터 화면에 ‘놈들’ 이라는 폴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우스로 클릭을 하니 폴더는 비밀번호로 잠겨 있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진아에게 가르쳐준 자신의 파일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같은 비밀번호로 저장되어 있었다. 폴더가 열리고 최태웅 일당에 대한 명단과 정보가 메모되어 있었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이름에는 X 표시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강민우 자신이 작성하고 있는 정보들을 옮겨서 최근에 정리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진아는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원한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턱을 받쳐 들고 생각에 잠겨있던 강민우는 컴퓨터 전원을 껐다. 이진아의 방을 둘러보고 집을 나와서 지프차의 운전석에 올라앉는다. 거실 창문으로 진 씨 할머니가 강민우의 멀어져 가는 지프차를 내다보고 있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가는 밧줄에 의지하여 허공을 나른 마츠다세이코가 스테이지 위에 날아가 고양이처럼 사뿐히 날아가 앉았다. 한마디로 빛의 환상이었다. 스타디움이 들썩거릴 정도로 관람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민우는 레이저 망원경으로 환호하는 관람객들을 살피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스테이지 앞과 통로, 그리고 출입구를 번갈아 살폈다. 그때 다시 레시버로 전 과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라커룸 복도에 남경식과 수하들이 나타났다. ‘비트’팀 이동 바람.”
라커룸이라면 무대 옆의 대기실이다. 강민우는 이층 공연장을 나와서 층계의 손잡이를 타고 일층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관람객들이 입장한 스타디움 복도는 혼잡하지 않았다. 강민우가 공연장 옆의 복도로 들어서는 동시에 총성이 들렸다. 하지만 총성은 공연장 안에서 들리는 음악소리와 열광하는 청중들의 이우성에 묻혀 버렸다.
라커룸을 향하는 복도 끝에서 경호원 한명이 비틀거리며 뛰어 나오고 있었다. 뒤이어 총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뛰어오던 경호원은 기어이 사내들의 총에 맞고 쓰러졌다.
어느새 강민우 주위로 요원들과 일본 경찰들이 달려왔다. 요원들, 그리고 일본경찰들이 사내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사내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복에는 총성들이 메아리쳤다. 기둥에 은신하며 총을 발사하던 사내들이 라커룸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강민우는 요원들과 같이 복도를 달려가 라커룸이 있는 복도로 들어갔다.
요원들은 복도 끝의 비상 출입구로 향하는 사내들을 뒤쫓으며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강민우는 스테이지로 향하는 출입구에서 총을 발사하고 있는 두 사내를 발견했다. 철제캐비닛을 방패로 삼아 권총을 난사하는 사내들을 바라보는 강민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점퍼를 걸친 사내와 검은 양복을 걸친 사내였다. 기둥 뒤에 은신한 강민우도 두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점퍼의 사내가 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키토 오야붕! 다마데스! 니게요요. 이꾸!”
“요이, 시아게 타노무.”
두서없이 서두르는 말에 대답한 양복을 걸친 사내는 눈초리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강민우의 눈동자가 권총의 가늠쇠처럼 캐비닛 너머로 동태를 살피는 사내에게 초점을 맞췄다. 피신하려는 사내는 앨리스 킴의 오빠 남경식이다. 남기춘이기도 하며 야쿠자가 된 일명 아키토였다. 남경식이 재빨리 스테이지로 향하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남아있는 점퍼의 사내가 권총을 발사하고 고개를 숙인 틈을 노려 강민우는 복도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우뚝 서서 걸어가며 권총의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고개를 내밀었던 사내는 머리에 총알이 관통되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강민우는 스테이지로 향하는 출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공연 중이던 스테이지와 관중석은 갑작스런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스테이지에 있던 마츠다세이코와 백댄서, 들은 피할 곳을 찾아 좌충우돌하였다. 강민우는 스테이지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남경식을 보았다. 그는 재빨리 백댄서들이 입장하던 밧줄에 붙잡고 몸을 날렸다.
스테이지 건너편에 도착한 강민우는 남경식의 등을 걷어차며 뛰어내렸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남경식이 강민우를 향해 총구를 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강민우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팔뚝이 쇠꼬챙이가 스치는 것처럼 뜨거웠다. 관통은 당하지 않았어도 총알이 스쳐간 점퍼 소맷자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남경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던 강민우가 멈칫하였다. 몸을 날려 돌려차기로 남경식의 팔을 가격하였다. 강민우는 남경식의 목숨을 끊기 전에 최태웅을 에게 알아내지 못한 흑사회 조직원들의 정보를 캐내고 싶었던 것이다. 권총을 떨어트린 남경식이 뒷걸음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강민우를 공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강민우를 향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던 남경식이 총성과 함께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강민우는 자신의 의도가 빗나갔기에 낭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쫓아왔는지 등 뒤에는 송나희가 권총을 들고 있었다. 강민우는 쓰러진 남경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살려줄 테니, 빨리 대답해. 광주사태 당시 네가 사주한 흑사회 조직원들은 어디 있어?”
“모, 몰라! 넌 누구야?”
남경식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의혹으로 가득한 눈빛을 하였다. 숨이 꺼져가는 목소리를 듣기위해 강민우는 그의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흔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살고 싶으면 시간이 없어! 놈들 있는 곳을 말해!”
“이, 이제 와서 알면.........뭘 해?”
남경식이 숨넘어가는 목소리를 흘렸다. 강민우가 남경식의 입 속에 총구를 집어넣었다.
“죽고 싶어! 놈들 어디 있어?”
“저, 정말....... 정말 몰라. 놈들이.......한국에 남고.......싶다고 해서.......자금과 호적을.......만들어 주고.......헤어져서........몰라.”
간신히 말을 마친 남경식이 힘없이 머리를 떨어트렸다. 강민우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남경식의 멱살을 놓고 일어섰다. 그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주위를 예민하게 살폈다. 그리고 스테이지를 뛰어내려 공연장을 나섰다. 어디에도 앨리스 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넓은 입구에는 피신하려는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아우성이었다. 문득 그 와중에도 입구 홀 옆의 소지품 보관함으로 다가서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손에든 열쇠 모양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엘리즈킴이 최태웅에게 귓속말을 하며 건네주던 열쇠와 여인이 들고 있는 열쇠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연장 입구로 홍성식과 송나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민우는 보관함으로 다가서는 여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여인을 낚아채고 얼굴을 확인했다. 겁에 질린 여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봤다.
“난노! 난데스까?”
앨리스 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여인이 뒷걸음질을 하며 강민우를 피했다. 강민우는 보관함에 근접하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홍성식과 송나희가 그에게 달려왔다. 송나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강민우를 쳐다봤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고 있는 강민우의 팔을 싸매주었다. 홍성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본다.
“앨리스 킴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관함이야!”
“네.......!?”
“그런데 여기가 아니야. 라커룸에도 보관함이 있지!?”
“네.”
강민우는 홍성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강민우는 다시 스타디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타디움을 빠져 나오려는 사람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쓰러져 짓밟히기도 하여 처참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역류해서 나오는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가 라커룸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라커룸의 한쪽 벽에는 보관함 박스들이 즐비했다. 강민우의 시선이 비상구로 이어지는 복도 끝으로 향했다. 두 사내와 함께 보관함 박스에 다가서 있는 여인을 향해 그의 눈동자가 클로즈 업 되었다.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걸어가고 있던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비 모양의 가면을 쓴 여인이었다.
여인은 다급하게 손에 든 열쇠로 보관함 상자 구멍에 끼워 넣고 있었다. 노란 눈의 여인, 앨리스 킴이 분명했다. 강민우는 주저 하지 않고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강민우가 발사한 총알은 정확하게 앨리스 킴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앨리스 킴은 요염한 여인이 교태를 부리듯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사내 두 명은 빠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고 강민우에게 총을 난사했다.
뒤따라서 뛰어든 홍성식과 송나희도 사내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강민우는 기둥을 하나씩 건너서 몸을 은닉하며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사내들 중 한명이 팔에 총탄을 맞고 신음을 흘렸다.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다른 사내가 쓰러진 사내를 부축하고 비상구로 튀어 나갔다.
도주하는 사내들을 확인한 강민우가 쓰러진 앨리스 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가면을 벗겨냈다. 모니터 화면으로 도청해 보기보다 더욱 남자를 유혹할 만한 미모였다.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며 쓸어졌어도 앨리스 킴은 분통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욕설을 뱉었다.
“What the fuck! Get the fuck out!”
앨리스 킴의 손에는 두 개의 열쇠가 들려져 있었다. 강민우는 묵묵히 욕설을 내뱉는 앨리스 킴의 손에든 열쇠를 낚아챘다. 열쇠에 적힌 244번의 보관함을 열었다. 보관함 속에 있는 검은 색의 작은 트렁크가방을 꺼냈다. 또 다른 열쇠로 트렁크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용기에 담긴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이 저장된 것으로 판단되는 디스켓이 있었다.
강민우가 트렁크가방을 닫고 일어섰다. 그때 복도 한쪽 벽의 중간 라커룸의 문이 덜컹 열렸다. 그리고 또 다른 사내들이 튀어 나왔다. 사내들은 대뜸 강민우 일행에게 총을 난사하였다. 사내들이 쏜 총알이 보관함 박스 하나를 박살냈다. 그리고 놈들의 총탄에 맞았는지 홍성식이 팔을 붙들고 뒹굴었다.
트렁크가방을 들고 있던 강민우는 바닥을 한 바퀴 굴러 기둥 뒤로 몸을 감추면서 사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송나희도 강민우 등 뒤로 몸을 숨겼다. 피가 흐르는 팔을 붙들고 뒤로 물러난 홍성식은 보관함 박스 뒤에 은신하고 사내들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사내들 중 삭발한 사내가 화가 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케된 거야? 간나새끼들!”
사내들은 북한공작원들이고, 물품을 인수하려고 기다리던 북한공작원 대좌 리성철이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도 끝까지 기다리다가 분통이 터진 것이다. 강민우는 들고 있는 트렁크가방을 홍성식에게 던졌다.
“부탁하네. 여기는 내게 맡기고.”
“네.”
가방을 받아든 홍성식이 몸을 돌리는데 비상구 문이 열리고, 안기부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안기부 요원들이 합세한 강민우 일행과 북한공작원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요란한 총성 속에서 북한 공작원 두 명과 요원 한 명이 총탄을 맞고 쓸어졌다. 뒤이어 제복을 한 일본 경찰들도 합세하였다. 공작원들은 중과부족인 것을 알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북한 공작원들은 스타디움을 벗어났다. 그들은 이미 도주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마치 아우성치며 스타디움을 벗어나려하는 군중들의 혼란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았다. 군중 속으로 스며들더니 대로변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이용하여 일본 경찰의 추격을 벗어나 사라졌다.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의 광릉 숲길에 찬바람이 불어 낙엽을 휘날린다. 안기부내의 어느 국장실 사무실에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와 최재인 전산실장이 있었다. 회전의자에 앉은 남자의 신분을 알 수 없으나 최 실장은 무척 긴장한 표정이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건 인계도 실패하고 제가 개입된 것이 들어 났습니다.”
“어떻게 하기는!? 외국으로 도피해 있어.”
“그렇다고 영원히 피할 수는 없잖습니까? 제 가족들도 있는데요.”
“그럼, 얼마동안 들어가 있어. 빨리 나오도록 내가 손을 쓸게. 그동안 가족은 내가 보살펴 줄 테니 걱정 말고.”
“그게 쉬울까요?”
“왜 징징거려! 최 실장답지 않게.”
불빛에 들어나는 최 실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동안 등을 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최 실장은 낙심을 하는 표정이다. 남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린다. 그리고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최 실장이 나가고 나서도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 유출사건은 국가의 중대한 사건이건만, 언론이나 매스컴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최재인 실장은 국가 기밀 누출이라는 죄명 아래 법정에 서게 되었다. 직접 북한공작원과 접선 하려던 최태웅과 남경식은 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하였다. 그리고 체포된 앨리스 킴은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국국적을 소유했기에 미국 측과의 범인 인도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현행범으로 판단하여 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을 되찾음으로서 긴장했던 정부는 한시름 덜게 되었다. 그리고 테러와 북한에 대한 방지시스템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NTIS를 더욱 조직화하여 새로운 정보망을 갖춘 기구로 승격시켰다. 대북과 대테러뿐만 아니라, 정부 주요인사와 건물에 대한 보호감시 시스템의 전산망까지 갖춘 기관이었다.
비트작전으로 홍성식 요원은 팀장, 송나희는 새로 조직된 NTIS의 전산실장이 되었다. 그 외에도 비트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에게 각각 포상이 주어졌다. 그런데 가장 공적이 많고 힘든 일을 맡았던 강민우는 감찰실장이라는 애매한 직책을 맡았다. 업무를 관리 감시하는 직책이기는 하나 알고 보면 특별한 업무가 주어진 직책이 아니기에 요원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일대,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는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여 40만평이 넘는 방이동 일대에 천 팔백 여억 원을 들여 올림픽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성하고 있는 부지 한쪽공간에는 새로 신축한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표지판에는 장차 역사체험관이 될 건물이라고 하지만, 건물을 왕래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세히 보면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두터운 방화철문이 내려져있다. 건물 한쪽은 인공호수로 막혀 있어 외부 출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건물주변에는 CCTV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건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안기부 별실이라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안기부 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시설이었다. 각층으로 엘리베이터로 이동이 가능하고 각개의 특성으로 디자인된 사무실마다 독립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요소요소마다 설치된 보안시스템과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보안카드가 필요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다. 이곳은 다름이 아닌 왕릉의 안기부에 있던 NTIS가 강화 조직되면서 별도로 옮겨온 건물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NTIS의 작전 회의실에는 팔짱을 낀 오민국 국장이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오 국장 앞의 타원형 탁자 주위에는 가슴에 NTIS명찰을 달고 있는 책임자급들만 앉아 있었다. 전희재, 강민우를 비롯하여 홍성식 등 안면이 있는 요원들이었다. 주로 ‘비트’작전에 참여했던 요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민국 국장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NTIS의 전산실장을 맡게 된 송나희가 바쁘게 걸어 들어왔다. 송나희가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에 앉고 나서 그때서야. 오 국장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요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비트 작전에 고생한 요원들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공헌한 노력을 참작하여 아마도 공로가 인정되는 요원들에게는 포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곳이 국가 대테러와 대북 정보를 수집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NTIS 본부다. 대통령께서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NTIS를 강화하게 되었다. 국가 원수의 지시에 따라 대테러, 대북뿐만 아니라, 사회 안정에 걸림돌이 되는 특수범죄에 관한 업무도 참여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주로 비트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 중심으로 선발 되었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된다. 나는 왕릉과 이곳을 왕래하겠지만 평상시 업무는 전 과장이 맡아서 할 것이다.”
오민국 국장이 들고 있는 볼펜으로 전희재 과장을 향해 가리켰다. 앉아 있던 전 과장이 일어나서 요원들을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내일, 일부 요원들은 판문점으로 가는 임무를 받을 것입니다.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순하려는 외국인이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야당 인사들의 접촉을 막고 안보 유지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 과장은 이어서 비트 작전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사망, 아울러 최재인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결과였다. 아울러 엘리스 킴에 관한 얘기에 덧붙여서 안기부내의 실세였던 권익수 차장이 면직 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 국장의 작전결과와 요원들에 대한 치하를 끝으로 요원들은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교환했다. 오 국장을 남겨놓고 요원들은 상황실을 나왔다. 강민우도 요원들과 같이 상황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던 홍성식이 다른 요원에게 물었다.
“권익수 차장이 왜 면직 당했지?”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권익수 차장이 왜 면직 당했는지 알고 있는 요원들은 없었다. 하지만 강민우는 안개작전의 파일에서 보았던 안국동 사건의 지휘자 ‘GIS"라는 이니셜을 떠올리고 있었다. 앞서서 걷고 있는 송나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머리 뒤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걷던 송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퇴근하고 뭐해요?”
“그냥 쉬고 싶어요. 왜요?”
“저녁식사 같이 할까 해서.”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송나희는 배시시 미소를 지며 걸어갔다. 일층 복도에서 멈추어선 강민우는 공연히 주위의 요원들 눈치를 살폈다. 그는 송나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전산실로 통하는 복도로 나오는 유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유서연도 NTIS 요원이 된 것이다. 유서연이 송나희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언니! 권 차장이 면직 당했다면서?”
“응, 넌 그걸 벌써 알았니.”
“왜, 면직 당했데?”
“나도 잘 모르겠어.”
유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나희는 유서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권 차장의 추천을 받고 유서연이 안기부로 입사했다는 것이다. 전산실 안으로 들어가는 송나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서연이 걸음을 재촉한다.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강민우가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민우와 마주친 유서연이 주춤한다. 그리고 생글거리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강민우가 미소를 띠며 지나치자 무슨 말인가 하려는지 멈추어 섰다. 유서연은 전혀 틈을 안주는 강민우가 야속했다. 멍하니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11월의 막바지에 날씨가 추워져 밤사이에 추적거리고 내린 비가 얼어붙어 도로가 미끄러웠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NTIS의 정보를 입증하듯이 소련인 한 명이 판문점을 관광하다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탈출했다. 북한경비병들의 추격으로 발생한 쌍방의 총격전으로 국군 1명이 전사하고 북한군인 2명이 사망했다.
비트 작전이후로 여유가 생긴 강민우는 평상시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나서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거실을 나서려다가 이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즘 한창 대학 입시공부에 매달리는 이진아는 벌써 집을 나가고 없었다. 책상위에는 공부하다가 펼쳐 놓은 책들과 그녀가 항상 안고 다니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진아의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강민우는 모니터 화면에 ‘놈들’ 이라는 폴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우스로 클릭을 하니 폴더는 비밀번호로 잠겨 있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진아에게 가르쳐준 자신의 파일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같은 비밀번호로 저장되어 있었다. 폴더가 열리고 최태웅 일당에 대한 명단과 정보가 메모되어 있었다.
최태웅과 남경식의 이름에는 X 표시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강민우 자신이 작성하고 있는 정보들을 옮겨서 최근에 정리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진아는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원한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턱을 받쳐 들고 생각에 잠겨있던 강민우는 컴퓨터 전원을 껐다. 이진아의 방을 둘러보고 집을 나와서 지프차의 운전석에 올라앉는다. 거실 창문으로 진 씨 할머니가 강민우의 멀어져 가는 지프차를 내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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