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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검은 립스틱* - 2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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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8 회 작성일 23-12-12 23: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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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휑하니 가버리고 음식점을 나온 강민우는 송나희와 어깨를 나란히 걸어갔다. 어린이 대공원 담장 길을 따라 걷는 그들의 머리 위로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강민우가 점퍼 깃을 올리며 송나희의 옆모습을 힐끔 훔쳐보았다.



“춥지 않아?”

“아뇨! 별로요.”



강민우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송나희의 프렌치코트 깃을 올려주었다. 송나희는 자잘한 눈웃음을 쳤다. 강민우에게 그녀는 자신만이 열수 있는 누구에게도 영원히 닫혀있는 성곽 안의 왕비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눈송이가 내리고 있는 담장 길에는 이따금 종종 걸음을 하는 사람들만 보였다.

송나희는 강민우가 승진대신 묘한 직책을 부여 받은 것이 못내 궁금했었다.



“민우 씨! 직책은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 거예요?”

“하하~! 당분간 개인적으로 시간이 필해서 내가 원한 거야.”

“외람된 말이지만.......! 이제 그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아직은 할 일이 남았어.”



송나희의 걱정스러워하는 말을 들으며 강민우는 이진아를 떠 올렸다. 이진아를 봐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민우의 대답을 듣고 송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집착하는 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점점 그들의 어깨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송나희의 어깨위에 쌓인 눈송이를 털어주던 강민우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의 손길을 의식한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서연이가 그러잖아요. 엉큼하다고.”

“때로는 엉큼한 용기도 필요하니까.”



“사람들이 봐요.”

“보면 어때! 못할 짓을 했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인데.”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송나희는 걸음을 멈추고 빤히 쳐다봤다. 지금까지 서로의 감정으로만 느낀 것이고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에 농담같이 들렸다. 자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민우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어 끌어 않았다. 송나희는 주변을 살피며 당혹스러워 했다.



“민우 씨! 사람들이 봐요.”

“내 말이 농담 같이 들리나봐. 나희 씨를 사랑한다고! 나희 씨는......!?”



질문을 하는 강민우의 눈동자 속에 부끄러워하는 송나희의 모습이 들어났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시간이 멈추어진 것 같았다. 강민우의 입술이 가슴에 안겨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입술로 다가왔다. 머뭇거리며 눈빛을 반짝이던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저도요.”



송나희의 목소리가 입술을 포개는 강민우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담장 옆길에는 굵어진 눈송이가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강민우의 가슴속에 안긴 송나희는 아늑함에 빠져들었다. 강민우가 그녀의 혀를 입속으로 강하게 빨아 당겼다. 그녀는 다리가 휘청거리는 전율을 느끼며 강민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멀리서부터 눈을 밟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온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도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가슴속의 열정을 느꼈다. 이어서 술 취한 남자들이 왁자지껄하며 다가왔다. 습한 열기 속에 묻혔던 그들은 마지못해 포옹을 풀고 걷기 시작했다.



송나희의 집에 가까운 대로변에서 강민우가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주춤거리던 강민우를 태운 택시가 눈 내리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던 송나희는 왠지 아쉬웠다. 스킨십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강민우와 깊은 페팅을 했지만 아직은 지켜야할 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는 강민우의 여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싹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여자가 되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지만 왠지 허전했다. 이사를 하고 한 번도 강민우를 초대하지 않았는데, 집에 들려 차를 마시자는 말도 못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과 새해는 경기침체로 인해 국민경제의 곳곳에 주름살이 깊어졌다. 다만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매스컴에는 정치적인 이슈가 두드러졌다. 다른 해의 형식적 선거였던 국회의원선거와 달리 그 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정치인들이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해금되어 선명야당을 기치로 한 새로운 당을 창당하여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민주세력이 결집이 가속되는 정치였다. 제5공화국 정부의 강권통치에 눌려 지내왔던 많은 국민들이 합동연설회장으로 몰려들었다.



선거에는 어느 해보다도 많은 정당이 참여하였고 지역구에 사백 명이 넘는 후보가 출마하는 경쟁률을 보였다. 우려하는 집권여당의 노심초사와는 다르게 정보활동을 전개한 안기부는 여당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는 단순한 이변을 넘어선 "돌풍" 그 자체였다. 이전에 비해 높은 투표율로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이 그대로 표출된 선거였다.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된 신생 정당이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수도권에서 당당히 우위로 당선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여당 후보가 차석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사실상 전국구를 배분한 결과여서 사실상 여당이 패배한 선거였다.



이에 여당 수뇌부는 격노하였고 잘못된 선거 분석을 내놓은 안기부장이 국무총리에 기용되었지만 사실상 경질이었다. 그러나 정치 판도가 바뀌어도 경기침체는 여전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국민들만 늘어갔다. 수출 실적도 저조하였고 정치와 사회적 불안 등도 겹쳐 기업의 시설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경기침체가 계속되자, 일부 기업들은 감원 등 감량경영에 나섰다. 연쇄반응으로 가장인 실업자를 중심으로 실업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졸업정원제 실시 후 대졸출신의 신규실업자까지 부쩍 늘어나는 등 실업은 새해의 큰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국민들은 궁핍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하지만 신문에 게재되는 정치 상황은 예전이나 변함없었다. 신문에는 변화되지 않는 정치현실이 언제나 반복 기재되고 있었다.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강민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화풀이 하듯이 신문을 집어던지고 일어섰다.



꽃망울이 피어나는 정원 한쪽에서는 이진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승용차를 세차 중이었다. 강민우도 세차를 하다가 고무장갑을 낀 채 배달된 신문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정원에 주차된 승용차는 두 대였다. 검은색 승용차는 비트 작전의 포상으로 지급받은 강민우의 승용차이고, 흰색 승용차는 강민우가 이진아의 대학합격 선물로 구입해준 것이었다.



업무에 바빴던 강민우의 염려와는 다르게 이진아는 대학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진아는 명성 있는 KH대학 체육과에 합격한 것이다.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합격한 이진아는 예전과 다른 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도 없어지고 철없는 행동이 사라지고 있었다. 숙성해지는 자태만큼 발랄하고 조순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차를 하고 있던 이진아가 강민우를 힐끔 바라봤다.



“오빠! 뭐해. 혼자 힘들어 죽겠는데, 세차 안 해?”

“응, 알았어.”



반바지 밑으로 매끈한 허벅지를 들어낸 이진아가 하얗게 눈을 흘겼다. 선웃음을 흘린 강민우는 세차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별안간 그녀가 들고 있던 호스를 강민우에게 향했다. 호스 끝에서 쏟아지던 물줄기가 강민우를 덮쳤다. 갑작스런 물세례를 받은 강민우는 당황하였다.



“이런.......!?”

“헤헤.......!”



물줄기를 피하는 강민우에게 호스를 겨냥하며 그녀가 키득거렸다. 물을 뒤집어 쓴 강민우의 셔츠와 바지가 흠뻑 젖었다. 강민우는 양손을 뻗쳐 물줄기를 막으며 이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을 하였다. 뒷걸음치는 그녀는 쫓아오는 강민우에게 계속해서 호스의 물줄기를 쏟아 부었다.



“너 정말 이럴 거야!?”

“키 킥킥~!”



물줄기를 맞으며 다가선 강민우가 그녀에게서 호스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끝에서부터 물줄기를 쏟아 부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티셔츠와 반바지가 금방 물에 흠뻑 젖었다. 물에 젖은 그녀의 매끈한 몸매가 그대로 들어났다. 울상을 한 그녀가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 잉! 몰라! 미워 죽겠어.”

“또 그럴 거야?”

“싫어! 안할 거야!”

“하하~!”



들고 있던 호스를 던진 강민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뽀로통해진 그녀는 눈을 흘기며 세차하던 승용차로 다가갔다. 유쾌한 표정을 지은 강민우는 세제가 묻은 걸레로 세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곁눈질 하던 이진아가 물이 가득담긴 양동이를 들고 강민우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섰다. 그리고 양동이 물을 강민우의 머리위로 쏟아 부었다.



“허 억~!”

“호호호........!”



강민우가 급히 숨을 들이키며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이진아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강민우는 물에 빠진 쥐처럼 허우적거렸다. 돌아선 강민우가 이진아를 잡으려고 뛰어갔다. 깔깔거리던 이진아는 현관문으로 다가서며 약을 올렸다.



“메롱! 내가 질줄 알고.”

“너, 안 한다고 그래놓고. 잡히기만 해봐라.”



강미우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뒤쫓아 강민우도 거실로 들어갔다. 한사람은 잡으려하고 한사람은 피하느라 거실 탁자를 뱅뱅 돌았다. 강민우의 뻗친 손을 피한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방 일을 하고 있는 진씨 할머니 등 뒤로 가서 울상을 하였다.



“할머니! 빨리 오빠 좀 말려줘.”

“애구! 이게 웬일이여!”



두 사람 모두 물에 흠씬 젖어 있었다. 할머니의 놀라는 모습을 본 강민우는 겸연쩍은 표정을 했다.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인 이진아는 소파에 놓인 인형을 집어 들어들었다. 그리고 인형을 끌어안아 입맞춤을 했다.



“응, 우리 애니!”



빙긋이 웃음을 흘린 강민우는 이진아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세면장 문을 열었다. 세면장으로 들어가려는 강민우에게 이진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피 잇! 약 오르지 롱!”

“하하~!”



강민우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닫힌 세면장 문을 쾅쾅 두드린 이진아는 깡충 걸음으로 정원으로 나갔다. 물이 쏟아지고 있는 호스를 집어 들고 승용차에 묻은 세제 거품을 닦아냈다. 푸른 잎사귀가 그늘을 만들어가는 정원에는 그녀의 미소처럼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꽃봉오리가 터져 활짝 피어나기 시작하고, 이진아는 캠퍼스를 오가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숲과 들은 점점 푸른색으로 변하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응집하여 광주사태 진상규명 요구 시위를 하였다. 이진아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시위 저지선을 경계로 경찰과 대치한 학생들은 괭가리와 북을 두드렸다. 이진아는 학생들의 구호를 외치는 선봉대에 끼여 주먹을 치켜들었다.



“독재정권 타도하자!”

“광주사태 진상규명!”



학생들이 시위하는 장소에는 정보 수집 지시를 받은 강민우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강민우는 학생들의 시위를 저지하거나 학생들을 해롭게 하는 정보를 수집할 생각은 없다. 광주사태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 중에 자신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방관하는 그는 오히려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시위장소를 돌아보던 강민우는 회기동의 대학가에 인접한 경찰서에 승용차를 주차 시켰다. 이진아가 다니고 있는 KH대학으로 향했다. 어느 장소든지 경찰과 대치한 학생들의 시위는 마찬가지였다. 대학 정문 앞에는 시위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함성이 요란했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애국학생이 용공이냐!”



시위대의 선두에는 도로로 나가려는 학생들과 경찰들 간의 몸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던 강민우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학생들의 선두 그룹에 이진아의 모습이 보였다. 경찰이 밀고 나오는 방패를 이진아가 걷어차고 있었다. 걷어 채인 방패로 경찰이 뒷걸음질 하다가 엉덩방아를 찌며 쓸어졌다.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이진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경찰들과 이에 대항하는 이진아 사이에 순식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진아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이 빠른 몸놀림으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무술에 단련된 이진아라고해도 에워싸는 경찰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여려 병의 경찰들에게 팔과 다리를 붙잡힌 이진아가 끌려 나오고 있었다. 강민우는 바라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경찰들을 헤치고 저지선으로 들어갔다. 이진아를 끌고 나오는 네 명의 경찰들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안기부 요원 신분증을 내보였다.



“내가 데려갈 테니 놓아줘!”

“네!? 왜 그러십니까?”

“말 안 들려? 안가 요원이라고.”

“네.......!?”



서로 눈치를 살피던 경찰들이 이진아를 풀어주었다. 강민우를 바라보는 이진아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이진아는 입가에 묻은 피를 주먹으로 문지르며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경찰들에게 잡힌 것이 분했기 때문이었다. 강민우가 이진아의 손목을 움켜쥐고 시위대 밖으로 끌고 나갔다.



“조심해야지.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남자도 아니고, 요령껏 해야지.”

“괜찮다니까!”



날카롭게 팩 쏘아 붙이고 돌아선 이진아가 다시 시위대를 향해 뛰어갔다. 강민우는 시위대 속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진아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강민우는 함성이 일어나고 있는 시위 현장을 벗어났다.



시위 현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강민우에게는 오히려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가 집착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틈틈이 곽춘호의 행방을 찾아 군산지역을 수소문하며 다니고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들의 시위현장을 돌아보고 방이동으로 돌아왔을 때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다.



NTIS 건물의 미로처럼 얽힌 통로를 지나치다가보니 전산 실 너머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송나희의 모습이 보였다. 전산실에는 대형 모니터들이 한쪽 면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헤드셋을 쓴 전산 요원들은 개인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산실로 들어가려던 강민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세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다른 요원들은 관심이 없는 공간에는 달랑 직원 한명만 지키고 있었다. 좁은 공간을 지키고 있는 요원은 예전에도 강민우 팀에 소속되었던 문경환이었다.



문경환이 할 일이라고는 강민우가 부재중에 걸려온 전화를 메모했다가 전달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문경환은 천직이려니 생각하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일반 공무원처럼 월급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시간에 대한 경력이 쌓이면 어느 때인가 진급을 할 수 있다는 편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문경환은 요즘 스릴러 소설을 탐닉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강민우가 들어오자, 문경환은 읽고 있던 책을 덮어놓고 일어섰다.



“실장님! 전화가 왔었습니다.”

“전화.......!?”

“네. 군산이라고 하던데. 전화번호를 메 놓았습니다.”

“........!”



메모지를 건네주는 문경환은 해야 할 의무를 다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강민우는 메모지를 받아들고 자신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지친 다리를 책상위에 올리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메모지를 펴들었다. 메모에는 달랑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곽춘호를 찾아다니면서 군산 폭력배들에게 남겨두었던 명함이 떠올랐다.



전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리려다가 멈춘다. 책상 앞에는 문경환이 명령을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문경환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퇴근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슨 이유로 걸려온 전화인지도 궁금했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강민우가 메모지로 책상을 툭툭 쳤다.



“자네는 퇴근해도 좋아.”

“다른 지시는 없습니까?”

“음, 오늘 수고했어.”

“네.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문경환은 돌아서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예전과 달리 감찰실장이 된 강민우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상태가 편하기는 하지만,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서 암시를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업무를 지시하는 것도 아니어서 답답하기도 했다.



문경환이 사무실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강민우는 메모지에 적힌 전화번호의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벨이 한참 흐른 뒤에 ‘딸깍!’하는 소리에 이어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일강입니다!”

“나일강.......!?”



낯선 상호를 듣고 강민우는 ‘쿡!’하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여기 석관동인데, 누가 전화를 하셨습니까?”

“석관동........!?”



전화를 받은 남자가 누구에겐가 형님이라고 불렀다. 쑤군거리는 소리에 이어서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몇 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처럼 반가운 억양이었다.



“이이고! 형님. 저 문열 공파의 전주 최가 중혁입니다..”

“최 중혁........!?”

“왜 이러십니까! 그사이에 불곰을 잊어버렸습니까?”

“아, 불곰! 웬일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네. 형님 덕분에 클럽을 차렸습니다.”

“클럽.......!?”

“뭐, 짭짤한 술집입지요. 놀러 오십시오.”

“그러지. 그 말하려고 전화한 거야?”



“그것보다도 형님이 곽춘호라는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까?”

“곽춘호.......!?”

“네.”



강민우는 곽춘호라는 말에 책상위에 뻗었던 다리를 내려놓고 다가앉았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랬었지!”

“그 사람의 행방을 알려면 저를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조건부야?”

“그게 아니고요. 제가 이 구역 조직에게 상납을 하고 있는데 조직보스가 망치라는 악랄한 놈입니다. 그런데 망치가 우리 가게에 형님이라며 같이 놀러온 사람이 곽춘호라는 사람이더라고요. 망치에게 그 사람에 대해서 물어 봤다가 애들 보는 앞에서 창피만 당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망치가 필로폰을 밀수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중혁은 망치를 쓰러트리고 곽춘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라는 말이었다. 강민우는 불곰이 전화를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역을 관리하고 있는 폭력배 조직을 쓰러뜨림으로서 지역권을 빼앗으려는 망치의 속셈을 강민우는 간파했다.



“그러니까, 나더러 망치의 조직 일당을 밀수범으로 체포해 달라는 거야?”

“어차피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잖습니까?”

“밀수는 몇 년 살고 금방 나올 걸.”

“음~! 망치를 감방에서 못 나오게 하려면 살인했다는 증거가 필요 하겠군요?”



“아마,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이겠지.”

“망치가 자기 조직의 행동대장 광수를 죽여서 매장한 걸 알고 있습니다.”

“왜?”

“망치가 탐내던 자기 여자를 강간했다고요. 사실은 광수가 부하들에게 더 신임이 두터워지는 것을 시샘한 거지요.”



“증거가 있어?”

“강간이 아니라, 그 여자 조은숙은 제 친구인 광수를 좋아 했습니다. 망치는 은숙이마저 부하들에게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광수를 생각한 부하들이 은숙이를 피신시켰습니다. 은숙이는 광수의 아기를 낳고 부산에서 다방을 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있던 은숙이나 부하들뿐만 아니라, 저도 광수가 매장된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망치의 이름이 뭐야?”

“이노마입니다.”

“이름이 뭐냐니까?”

“이, 노, 마라고요.”



최중혁이 한자 한자 끊어서 또박또박 다시 말하는 것을 듣고 강민우는 피식 웃었다.



“이름도 더럽군. 알았어, 다시 전화할게.”

“형님!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강민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최중혁에게 곽춘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었다. 어쨌든 곽춘호 일당을 찾아야하지만 폭력배 조직에 접근하려면 혼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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