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3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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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우는 묵묵히 편집국장을 끌고 가는 요원들을 따라 욕조와 책상, 그리고 의자만 있는 좁은 공간의 취조실로 들어갔다. 흐린 전등불 아래 이희수 편집국장은 팬티차림으로 벗겨져 결박당했다. 그리고 수사요원이 서류보따리를 들고 들어와 전 과장에게 건넸다. 이희수를 취조하기 위한 서류들은 강민우가 예상한데로 중공 폭격기 기사가 보도된 경위를 밝히라는 것이 아니었다. 서류를 검토한 전 과장이 서류를 이희수 앞에 들이댔다.
"이런 기사를 쓰는 것이 국가에 협조하는 거야? 당장 사직서를 쓰는 것이 좋을 거야."
".......!"
전 과장이 이희수 편집국장의 턱을 받쳐 들었다. 옆에 있던 조사관이 자신의 권위를 보이려는 듯이 이희수 편집국장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각목으로 편집국장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의자에 묶인 편집국장은 미리 각오를 했는지 이를 악물며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전 과장이 서류에 적힌 죄목을 들이대며 취조를 했고, 그때마다 조사관의 구타는 이어졌다.
"보도지침을 어긴 저의가 뭐냐고?"
"아 악~! 난 몰라! 할 말 없어."
"편집국장이라는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아?"
"하 앗! 모, 몰라."
“혹시 북한 노동당 프락치 아냐?”
“하 아 악.........”
비명을 지르는 이희수에게 수사관들은 숙련된 솜씨로 폭력을 가했다. 이 국장의 입술에는 피가 터지고 얼굴은 얼마 되지 않아서 피멍으로 가득해졌다. 주먹세례에 이 국장이 몸을 웅크리면 발길질과 몽둥이가 날아갔다. 이희수는 신음소리만 낼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스로 화가 치민 수사관이 이희수의 머리를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처박았다가 꺼냈다.
버둥거리던 이희수는 죽기 직전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숨을 급히 들이켰다. 그러나 고문하는 수사관의 표정은 냉혹하고 오히려 즐기는 것만 같았다. 수사관의 고문과 전 과장의 취조는 한동안 이어졌다. 가혹행위에도 신음만 흘릴 뿐 이희수 편집국장에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뒤편에 서있는 강민우는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윤리와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전 과장이나 수사관들의 취조에 가세할 수도 없어 난처하기만 하였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만든 법을 무시하고 또 다른 편견의 법을 만든다. 법을 대변하는 수사관이 법에 보호 받아야할 이희수를 고문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포악함을 보여주는 단면목이다.
한 시간 가량 고문이 이어지고 취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취조실에 있던 요원들이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 검은 선글라스를 쓴 왕릉의 안기부 정보국의 차문기 국장과 남산 감찰실 홍 실장이었다. 취조실로 들어선 차 국장이 대뜸 머리를 떨어트리고 있는 이희수 편집국장에게 다가섰다.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모양이군.”
차 국장은 이희수를 향해 말을 하면서 전 과장과 강민우를 훑어보았다. 선글라스를 써서 차 국장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말투로 보아 못마땅하다는 뜻이었다. 아직까지도 이희수에게 원하는 자백을 얻어내지 못했냐는 추궁이었다. 들고 있는 지휘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들긴 차 국장은 구둣발로 이희수의 다리를 걷어차면서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 간첩 아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신문사 편집국장 정도의 신상처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각하도 양해한 사실이다. 당신을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버릴 수도 있고, 자동차로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 데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
“............”
동공에 초점을 잃고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이희수는 조소를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조하는 질문 자체가 황당하기에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은 당연하였다. 차 국장이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이희수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이희수의 턱을 쳐들더니 피가 흘러나오는 입속으로 지휘봉을 집어넣고 쑤셨다. 이희수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했다.
“악! 으그르르.......”
“자백해. 너 빨갱이지?”
“........”
“네가 접선하는 야당 정치인이 누구야? 말하면 풀어줄게.”
“으........르르륵. 아, 르르.......”
고통스러움에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 된 이희수는 발버둥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보국장의 말은 취조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정보국장은 이희수의 입속에 틀어박힌 지휘봉을 뿌리 뽑듯이 빼냈다. 의자에 묶인 이희수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푹 고개를 떨어트렸다. 옆에 섰던 홍실장이 이희수의 머리에 양동이에 담긴 물을 들어부었다.
물을 뒤집어 쓴 이희수가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눈동자로 어깨를 늘어트린 이희수를 바라보던 정보국장이 뚜벅거리며 취조실 안을 맴돌았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을 하던 정보국장이 전 과장과 강민우를 훑어보더니 퉁명스런 목소리를 흘렸다.
"NTIS는 이제 가도 좋아. 우리가 맡을 테니까."
그 말은 이희수를 광릉 안기부에서 처리할 테니 NTIS는 필요 없다는 명령이었다. 전 과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NTIS에 체포를 하라고 지시하고 이제 와서 필요 없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전 과장과 강민우는 돌아보지도 않는 차 국장에게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취조실을 나왔다.
왕릉안기부에서 이희수 편집국장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희수 편집국장이 안기부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잔인한 폭력과 고문을 당할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전 과장은 직무상 부여받은 업무라 어쩔 수 없는지 몰라도 강민우는 어차피 이희수를 취조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취조실을 나온 강민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옆으로는 취조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 과장 뒤에서 멀찌감치 복도를 걸어가던 강민우는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취조실 문 앞에서 주춤거렸다. 취조실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취조실에서 나오는 안기부 요원과 마주친 강민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강민우의 시선이 마주친 요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민우 아닌가?”
“오! 상운이구나! 여긴 어쩐 일로?”
취조실에서 나온 사람은 안기부 광주지부에 있었던 한상운이었다. 중정시절에 NDSS 특공대에서 강민우와 같이 근무했고 절친했던 사이였다. 강민우가 흑사회 조직원들을 찾느라고 돌아다니다가 송화살롱에서 직업여성들을 외국으로 밀입국시키던 민한해운의 민한구를 한상운에게 인계해주기도 했었다. 반가워하는 한상운이 강민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 작년 말에 남산 분실로 왔어.”
“그래! 난 왕릉에 있어.”
“넌 역시 여전하구나.”
“살아남기 힘들지 뭐.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강민우는 눈높이에 있는 유리창으로 취조실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취조실 안에는 삼십대 가량의 미모 여인이 슬립차림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힘든 취조를 당했는지 축 늘어진 여자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상운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골치 아파. 우리한테 이산가족 찾기를 시키지 않나, 골치 아파.”
“정부인사 가족인가! 누군데?”
한상운은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마주친 강민우의 신분이 의심스러웠다. 물론 같은 안기부 요원이지만 남산분실까지 온 강민우에게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강민우도 한상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주 분실에 있던 한상운이 인사 이동시기도 아닌데 갑자기 남산분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잡았던 손을 슬며시 빼낸 한상운의 시선이 창밖의 모이를 쪼고 있는 비둘기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둘기 군.”
강민우는 한상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오 차장의 말을 듣고 JRS 멤버가 되었으나 막상 닥치고 보니 한상운이 창밖의 비둘기를 보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JRS의 암호를 말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반신반의한 강민우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암호에 응답을 했다.
“........비둘기 칠!?”
창밖을 향해 있던 한상운의 시선이 강민우를 향했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띠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다시 강민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강민우는 처음으로 JRS 멤버를 만난 것이다. 남들의 이목을 생각해서 JRS멤버 운운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 서로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한상운이 강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도 한잔 할까?”
“그러지 뭐.”
한상운은 휴게실로 갈 생각으로 강민우의 등을 밀었다. 그때 편집국장을 취조하던 취조실 문이 벌컥 열렸다. 복도를 거슬러 걸어가려던 한상운이 재빨리 자신이 나왔던 취조실 문을 열고 강민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들어간 강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취조실 문을 닫은 한상운이 벽에 바짝 붙어서며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하라고 했다. 강민우도 한상운을 따라 출입문 옆에 몸을 감추었다.
“홍 실장과 차 국장은 GIS 멤버야.”
한상운이 귓속말을 했다. 한상운의 말에 강민우를 신경을 곤두세웠다. 편집국장 취조실에서 나온 사람이 남산 감찰실 홍실장과 차문기 국장이었다. 취조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복도를 걸어오다가 멈추어 섰다. 앞서서 걷던 차 국장이 뒤쫓아 오는 홍 실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희수는 오래 붙잡고 있을 수가 없어. 신문사마다 들고 일어나고 IPI(국제신문인협회)에서도 문제 삼을 것 같으니 적당히 버릇을 고쳐서 풀어주라는 K 지시야.”
“네. 알았습니다.”
“권진경은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
“큰일인데! K가 언론에 당하기전에 빨리 조치해야 하는데.”
“지방 요원들에게도 열일 젖히고 찾으라고 했는데, 아직.”
“조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K가 곤란해진다고 GIS에서도 독촉인데,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내에서도 K를 불신임 할 수 있어.”
“알았습니다. 그런데 권진경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하여튼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했다. 시선을 마주하던 두 사람이 한상운과 강민우가 있는 취조실 앞을 지나쳐 사라졌다. 강민우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한상운에게 물었다.
“지금 저들이 말하는 지금의 K가 누구인가?”
“아마 지금 안기부장을 말하는 것일 거야.”
“K 와 권진경은 어떤 사이인데 저들이 권진경을 찾는 건가?”
“우리 정보로는 K의 사생아라고 알고 있어.”
“그럼 안기부장의........?”
“그렇지.”
강민우는 오민국 차장이 말하던 이미연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떠 올렸다. 정치 생명을 위해 한 여자의 생명을 없애려는 음모였다. 그것도 자신의 핏줄이 아닌가. 몸이 오싹하도록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강민우는 취조실 안에 기절했는지 의자에 묶여 목을 떨어트리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 여잔 뭐야?”
“저 여자 배우잖아! 마약 건으로 들어왔는데 통 불지를 않아. 부산 자갈치 시장을 한때 주름잡던 박종규의 애첩이기도 했지.”
“마약 밀수?”
“아니 상습적으로 마약을 사용했는데, 구입 경로가 점 조직이라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야. 이제 풀어 줄 도리밖에 없을 것 같아.”
“박종규라고 했나?”
강민우는 흑사회 조직원 명단 중에 턱수염을 기른 동일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강민우는 만약을 생각해서 NTIS 요원인 것을 밝히지 않았다. 한상운이 지친 듯이 목을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응, 우리도 마약공급자로 박종규를 의심했는데, 자취를 감췄기에 행방을 찾고 있어.”
“저 여자 이름이 뭔데?”
“왜!? 무슨 정보라도 있어?”
“꼭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박종규가 턱수염을 기르고 있지 않았나?”
“그랬었나. 글쎄!? 수염이야 깎으면 그만이지. 저 여자 진소희라는 배우이고 본명은 진상미야.”
“집이 어딘데?”
“이상한 걸........!? 꼬치꼬치 캐물으니. 뭔지 나도 좀 알자. 하하하........!”
“하하~! 세상이 이상하니까. 나도 가끔 이상해지기도 하지.”
“저, 여잔 주로 부산에서 활동했지. 혹시, 정보가 필요하면 연락해.”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한상운이 씁쓸한 표정을 하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취조실 문을 열고 나왔다. 취조실 안의 여자를 힐끔 바라 본 강민우도 그를 따라 취조실을 나왔다. 한상운은 다시 차라도 마실 생각인지 복도 끝의 휴게실 푯말이 붙은 곳으로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강민우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나, 지금 가봐야겠는데, 너도 바쁘겠고.”
“그래! 다음에 만나면 술 한 잔 하자.”
강민우는 한상운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한상운이 강민우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왼손으로 강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강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어 보인 한상운이 밝은 웃음을 흘리며 출구 반대편 복도로 걸어갔다. 한상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민우는 박종규라는 이름과 진소희의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강민우의 허리에 차고 있는 호출기에서 호출신호가 울렸다. NTIS에서 온 호출임을 확인한 그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출구를 향해 갔다.
수도꼭지를 틀어 쏟아지는 물을 주전자에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이진아는 무척 긴장하고 있다. 그녀가 용두목장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목장에서 그녀가 할 일은 힘들지 않았다. 술집 직업여성으로 생활하다가 젊은 나이에 곽춘호의 아내가 된 김애경은 아내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이진아에게 살림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이진아는 힘들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자는 여자보다 성적인 욕구가 강하고 충동적이다. 이진아는 처음부터 곽춘호의 게슴츠레한 눈빛을 의식했다. 그녀의 계획이 순조롭게 시작된 것이다. 첫날부터 곽춘호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주방으로 들어와 설거지를 하는 이진아에게 스킨십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이진아의 엉덩이와 젖가슴을 쓰다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이진아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몸을 사린다. 이진아는 곽춘호가 더욱 달아오르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손님이 찾아오지 않던 목장에 방문객이 찾아 온 것이다. 이진아의 계획은 우선 곽춘호를 통해 흑사회 놈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방문객을 살펴본 이진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민우의 파일에서 보았던 흑사회 조직원 중에 한 명이었다. 기린처럼 유달리 목이 긴 주승균이 확실했다.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곱슬머리를 잊을 수는 없는 이진아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전자에서 끓는 물을 찻잔에 붓고 커피를 타는 이진아의 손이 떨린다.
“애리야! 뭘 그렇게 꾸물거리니. 빨리 가져오지 못하고.”
“네. 지금 가져가요.”
거실에서 신경질적인 김애경의 말에 대답한 이진아는 커피를 탄 찻잔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곽춘호와 김애경, 그리고 곱슬머리 주승균이 소파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멈춘 그들의 시선이 쟁반을 들고 들어가는 이진아에게 향했다. 이진아는 다소곳이 탁자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스커트 자락을 찰랑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아담한 둔부가 흔들리는 뒷모습을 주승균이 빤히 바라봤다.
“형님! 저 쌈박한 영계는 누굽니까?”
“아! 그냥 집안 일 거들어주는 여자.”
주방으로 들어온 이진아는 거실로 통하는 문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유리탁자위에 찻잔을 놓는 소리가 이어졌다. 주승균의 간사스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순천여자는 미인이라던데, 형수님은 갈수록 아름다워집니다.”
“그렇게 보여요!? 호호.......!”
김애경이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곽춘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외면했다. 주승균이 곽춘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곽춘호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님이 잘해 주시나 봐요. 형수님이 몸매도 갈수록 처녀 같아지는데요.”
“처녀는 무슨.......!? 그나저나 철오나 종규는 요즘 보기 힘든데 뭣들하고 지내냐?”
곽춘호는 김애경을 칭찬하는 주승균의 말이 시답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많은 여자들을 상대해 본 곽춘호는 세상에 여자는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 수없이 아내로 인정하고 있는 김애경에게 식상감과 권태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형님! 모르쇼? 철오는 문한이한테 가 있잖아요. 종규는 짭새들 피해 부산으로 애들 데리고 가서 토박이 놈들하고 전쟁 한판 치르고 자리 잡았지요.”
“문한이는 잘하고 있지?”
김애경은 새침한 표정으로 곽춘호를 흘겨본다. 그러나 곽춘호는 그녀를 무시하고 양팔을 들어 기지개를 한다. 곽춘호의 질문에 주승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문한이는 이제 이름난 교주가 됐어요.”
“너는 요즘도 인천에서 사채놀이 하냐?”
“전당포도 하나 차렸지요.”
“돈 많이 벌은 모양이구나.”
곽춘호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뻗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앉았던 김애경이 잽싸게 곽춘호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땅치 않으나 이런 세계에서 군주나 다름없는 곽춘호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주승균이 곽춘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쇳가루가 모자라 형님 찾아 왔는데 도와주십시오.”
“나도 요즘 돌아가는 돈은 없다.”
곽춘호는 주승균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한 주승균이 곱슬거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곽춘호는 길게 목을 빼고 고개를 숙이는 주승군의 모습이 안됐는지 덧붙여 말했다.
“물 있는데 팔아서 쓸래?”
“저야, 좋지요.”
곽춘호가 말하는 물이라는 것은 마약을 말하는 것이다. 곽춘호는 며칠 후에 중국 상선으로 도착할 밀수품들과 필로폰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얼굴빛을 들어낸 주승균이 구부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곽춘호는 어렵게 들여올 필로폰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던진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 주쯤에 연락할게 들려.”
“고맙습니다. 형님.”
그들은 밀수품을 중개업자에게 넘길 계책을 꾸몄다. 문 뒤에 몸을 감추고 있는 이진아는 그들의 대화를 낱낱이 듣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눈 주승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곽춘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주승균을 배웅한 곽춘호가 거실로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김애경이 곽춘호에게 투정을 했다.
“자기는 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거예요? 먼저 번에는 자기 심부름도 거절했는데.”
“넌 잔말하지 마! 내가 애들하고 똑같으면 어떡해. 친형제 같은 아우들인데 보살펴 줘야지. 언젠가는 다 써먹을 때가 있으니 참견하지 마.”
곽춘호는 김애경이 자신의 일에 관여치 못하도록 명령하듯이 언성을 높였다. 새침해진 김애경이 주눅이 들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내의 간섭이 마땅치 않은 곽춘호도 소파에 앉으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집밖에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인부들 왔나 봐요.”
곽춘호의 눈치를 살피던 김애경이 소파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하루에 한 번씩 목장을 돌보러 올라오는 아랫마을에 사는 인부들이 온 것이다. 주방 문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진아는 싱크대 앞으로 다가가 찻잔을 씻기 시작했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려던 곽춘호가 슬며시 주방으로 들어와서 이진아의 등 뒤로 다가섰다.
항상 이진아에게 흑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는 그였다. 이진아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설거지에 열중하였다. 그녀로서는 그를 더욱 유혹하여 신뢰하도록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등 뒤로 바짝 다가서는 그의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꼈다. 그녀의 등을 껴안은 그의 손길이 앞가슴을 더듬었다. 그때서야 이진아는 젖가슴을 주무르려고 하는 곽춘호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섰다.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아줌마한테 혼났단 말에요.”
“괜찮아! 제까짓 게 어쩌지 못해. 애리가 귀여워서 미치겠다.”
게슴츠레한 눈빛을 한 곽춘호가 우격다짐으로 이진아를 껴안았다. 역겨운 열기를 느끼는 이진아가 그의 가슴을 밀치며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곽춘호는 장난감을 다루듯이 이진아를 다시 돌려 세워 등을 껴 안았다. 티셔츠를 들어올린 그의 손길이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왔다.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거머쥔 그가 부르르 떨었다. 이진아는 이질감과 함께 묘한 촉감을 느꼈다.
"아 잉! 아저씨 이러시면 안돼요. 저 쫓겨 나요."
"괜찮아 넌 나만 믿어."
그것은 육체적인 짜릿함보다는 보복해야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쾌감이다. 싱크대 위의 진열장 유리에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이진아와 남자의 모습이 들어났다. 밀려 올라간 티셔츠 위로 완연하게 들어난 젖가슴이 남자의 손끝에서 주물려지는 모습도 비쳐진다. 이진아는 발기된 남성이 둔부 사이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숨소리가 높아간다. 그때 현관 문 밖에서 김애경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뭐해요? 얼른 나와요. 사슴 뿔, 자를 때도 됐잖아요.”
“천천히 해도 되는데 지랄이야.”
퉁명스런 목소리를 흘린 곽춘호가 못내 아쉬운 눈빛으로 이진아를 바라보며 주방을 나갔다. 이진아는 엿들었던 말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박종규가 부산에서 조직폭력배 조직의 보스로 있다든 것과 주승균이 인천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사채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주라는 허문한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런 기사를 쓰는 것이 국가에 협조하는 거야? 당장 사직서를 쓰는 것이 좋을 거야."
".......!"
전 과장이 이희수 편집국장의 턱을 받쳐 들었다. 옆에 있던 조사관이 자신의 권위를 보이려는 듯이 이희수 편집국장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각목으로 편집국장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의자에 묶인 편집국장은 미리 각오를 했는지 이를 악물며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전 과장이 서류에 적힌 죄목을 들이대며 취조를 했고, 그때마다 조사관의 구타는 이어졌다.
"보도지침을 어긴 저의가 뭐냐고?"
"아 악~! 난 몰라! 할 말 없어."
"편집국장이라는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아?"
"하 앗! 모, 몰라."
“혹시 북한 노동당 프락치 아냐?”
“하 아 악.........”
비명을 지르는 이희수에게 수사관들은 숙련된 솜씨로 폭력을 가했다. 이 국장의 입술에는 피가 터지고 얼굴은 얼마 되지 않아서 피멍으로 가득해졌다. 주먹세례에 이 국장이 몸을 웅크리면 발길질과 몽둥이가 날아갔다. 이희수는 신음소리만 낼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스로 화가 치민 수사관이 이희수의 머리를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처박았다가 꺼냈다.
버둥거리던 이희수는 죽기 직전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숨을 급히 들이켰다. 그러나 고문하는 수사관의 표정은 냉혹하고 오히려 즐기는 것만 같았다. 수사관의 고문과 전 과장의 취조는 한동안 이어졌다. 가혹행위에도 신음만 흘릴 뿐 이희수 편집국장에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뒤편에 서있는 강민우는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윤리와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전 과장이나 수사관들의 취조에 가세할 수도 없어 난처하기만 하였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만든 법을 무시하고 또 다른 편견의 법을 만든다. 법을 대변하는 수사관이 법에 보호 받아야할 이희수를 고문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포악함을 보여주는 단면목이다.
한 시간 가량 고문이 이어지고 취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취조실에 있던 요원들이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 검은 선글라스를 쓴 왕릉의 안기부 정보국의 차문기 국장과 남산 감찰실 홍 실장이었다. 취조실로 들어선 차 국장이 대뜸 머리를 떨어트리고 있는 이희수 편집국장에게 다가섰다.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모양이군.”
차 국장은 이희수를 향해 말을 하면서 전 과장과 강민우를 훑어보았다. 선글라스를 써서 차 국장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말투로 보아 못마땅하다는 뜻이었다. 아직까지도 이희수에게 원하는 자백을 얻어내지 못했냐는 추궁이었다. 들고 있는 지휘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들긴 차 국장은 구둣발로 이희수의 다리를 걷어차면서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 간첩 아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신문사 편집국장 정도의 신상처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각하도 양해한 사실이다. 당신을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버릴 수도 있고, 자동차로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 데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
“............”
동공에 초점을 잃고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이희수는 조소를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조하는 질문 자체가 황당하기에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은 당연하였다. 차 국장이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이희수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이희수의 턱을 쳐들더니 피가 흘러나오는 입속으로 지휘봉을 집어넣고 쑤셨다. 이희수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했다.
“악! 으그르르.......”
“자백해. 너 빨갱이지?”
“........”
“네가 접선하는 야당 정치인이 누구야? 말하면 풀어줄게.”
“으........르르륵. 아, 르르.......”
고통스러움에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 된 이희수는 발버둥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보국장의 말은 취조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정보국장은 이희수의 입속에 틀어박힌 지휘봉을 뿌리 뽑듯이 빼냈다. 의자에 묶인 이희수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푹 고개를 떨어트렸다. 옆에 섰던 홍실장이 이희수의 머리에 양동이에 담긴 물을 들어부었다.
물을 뒤집어 쓴 이희수가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눈동자로 어깨를 늘어트린 이희수를 바라보던 정보국장이 뚜벅거리며 취조실 안을 맴돌았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을 하던 정보국장이 전 과장과 강민우를 훑어보더니 퉁명스런 목소리를 흘렸다.
"NTIS는 이제 가도 좋아. 우리가 맡을 테니까."
그 말은 이희수를 광릉 안기부에서 처리할 테니 NTIS는 필요 없다는 명령이었다. 전 과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NTIS에 체포를 하라고 지시하고 이제 와서 필요 없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전 과장과 강민우는 돌아보지도 않는 차 국장에게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취조실을 나왔다.
왕릉안기부에서 이희수 편집국장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희수 편집국장이 안기부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잔인한 폭력과 고문을 당할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전 과장은 직무상 부여받은 업무라 어쩔 수 없는지 몰라도 강민우는 어차피 이희수를 취조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취조실을 나온 강민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옆으로는 취조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 과장 뒤에서 멀찌감치 복도를 걸어가던 강민우는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취조실 문 앞에서 주춤거렸다. 취조실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취조실에서 나오는 안기부 요원과 마주친 강민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강민우의 시선이 마주친 요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민우 아닌가?”
“오! 상운이구나! 여긴 어쩐 일로?”
취조실에서 나온 사람은 안기부 광주지부에 있었던 한상운이었다. 중정시절에 NDSS 특공대에서 강민우와 같이 근무했고 절친했던 사이였다. 강민우가 흑사회 조직원들을 찾느라고 돌아다니다가 송화살롱에서 직업여성들을 외국으로 밀입국시키던 민한해운의 민한구를 한상운에게 인계해주기도 했었다. 반가워하는 한상운이 강민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 작년 말에 남산 분실로 왔어.”
“그래! 난 왕릉에 있어.”
“넌 역시 여전하구나.”
“살아남기 힘들지 뭐.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강민우는 눈높이에 있는 유리창으로 취조실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취조실 안에는 삼십대 가량의 미모 여인이 슬립차림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힘든 취조를 당했는지 축 늘어진 여자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상운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골치 아파. 우리한테 이산가족 찾기를 시키지 않나, 골치 아파.”
“정부인사 가족인가! 누군데?”
한상운은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마주친 강민우의 신분이 의심스러웠다. 물론 같은 안기부 요원이지만 남산분실까지 온 강민우에게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강민우도 한상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주 분실에 있던 한상운이 인사 이동시기도 아닌데 갑자기 남산분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잡았던 손을 슬며시 빼낸 한상운의 시선이 창밖의 모이를 쪼고 있는 비둘기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둘기 군.”
강민우는 한상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오 차장의 말을 듣고 JRS 멤버가 되었으나 막상 닥치고 보니 한상운이 창밖의 비둘기를 보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JRS의 암호를 말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반신반의한 강민우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암호에 응답을 했다.
“........비둘기 칠!?”
창밖을 향해 있던 한상운의 시선이 강민우를 향했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띠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다시 강민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강민우는 처음으로 JRS 멤버를 만난 것이다. 남들의 이목을 생각해서 JRS멤버 운운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 서로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한상운이 강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도 한잔 할까?”
“그러지 뭐.”
한상운은 휴게실로 갈 생각으로 강민우의 등을 밀었다. 그때 편집국장을 취조하던 취조실 문이 벌컥 열렸다. 복도를 거슬러 걸어가려던 한상운이 재빨리 자신이 나왔던 취조실 문을 열고 강민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들어간 강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취조실 문을 닫은 한상운이 벽에 바짝 붙어서며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하라고 했다. 강민우도 한상운을 따라 출입문 옆에 몸을 감추었다.
“홍 실장과 차 국장은 GIS 멤버야.”
한상운이 귓속말을 했다. 한상운의 말에 강민우를 신경을 곤두세웠다. 편집국장 취조실에서 나온 사람이 남산 감찰실 홍실장과 차문기 국장이었다. 취조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복도를 걸어오다가 멈추어 섰다. 앞서서 걷던 차 국장이 뒤쫓아 오는 홍 실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희수는 오래 붙잡고 있을 수가 없어. 신문사마다 들고 일어나고 IPI(국제신문인협회)에서도 문제 삼을 것 같으니 적당히 버릇을 고쳐서 풀어주라는 K 지시야.”
“네. 알았습니다.”
“권진경은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
“큰일인데! K가 언론에 당하기전에 빨리 조치해야 하는데.”
“지방 요원들에게도 열일 젖히고 찾으라고 했는데, 아직.”
“조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K가 곤란해진다고 GIS에서도 독촉인데,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내에서도 K를 불신임 할 수 있어.”
“알았습니다. 그런데 권진경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하여튼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했다. 시선을 마주하던 두 사람이 한상운과 강민우가 있는 취조실 앞을 지나쳐 사라졌다. 강민우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한상운에게 물었다.
“지금 저들이 말하는 지금의 K가 누구인가?”
“아마 지금 안기부장을 말하는 것일 거야.”
“K 와 권진경은 어떤 사이인데 저들이 권진경을 찾는 건가?”
“우리 정보로는 K의 사생아라고 알고 있어.”
“그럼 안기부장의........?”
“그렇지.”
강민우는 오민국 차장이 말하던 이미연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떠 올렸다. 정치 생명을 위해 한 여자의 생명을 없애려는 음모였다. 그것도 자신의 핏줄이 아닌가. 몸이 오싹하도록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강민우는 취조실 안에 기절했는지 의자에 묶여 목을 떨어트리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 여잔 뭐야?”
“저 여자 배우잖아! 마약 건으로 들어왔는데 통 불지를 않아. 부산 자갈치 시장을 한때 주름잡던 박종규의 애첩이기도 했지.”
“마약 밀수?”
“아니 상습적으로 마약을 사용했는데, 구입 경로가 점 조직이라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야. 이제 풀어 줄 도리밖에 없을 것 같아.”
“박종규라고 했나?”
강민우는 흑사회 조직원 명단 중에 턱수염을 기른 동일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강민우는 만약을 생각해서 NTIS 요원인 것을 밝히지 않았다. 한상운이 지친 듯이 목을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응, 우리도 마약공급자로 박종규를 의심했는데, 자취를 감췄기에 행방을 찾고 있어.”
“저 여자 이름이 뭔데?”
“왜!? 무슨 정보라도 있어?”
“꼭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박종규가 턱수염을 기르고 있지 않았나?”
“그랬었나. 글쎄!? 수염이야 깎으면 그만이지. 저 여자 진소희라는 배우이고 본명은 진상미야.”
“집이 어딘데?”
“이상한 걸........!? 꼬치꼬치 캐물으니. 뭔지 나도 좀 알자. 하하하........!”
“하하~! 세상이 이상하니까. 나도 가끔 이상해지기도 하지.”
“저, 여잔 주로 부산에서 활동했지. 혹시, 정보가 필요하면 연락해.”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한상운이 씁쓸한 표정을 하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취조실 문을 열고 나왔다. 취조실 안의 여자를 힐끔 바라 본 강민우도 그를 따라 취조실을 나왔다. 한상운은 다시 차라도 마실 생각인지 복도 끝의 휴게실 푯말이 붙은 곳으로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강민우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나, 지금 가봐야겠는데, 너도 바쁘겠고.”
“그래! 다음에 만나면 술 한 잔 하자.”
강민우는 한상운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한상운이 강민우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왼손으로 강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강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어 보인 한상운이 밝은 웃음을 흘리며 출구 반대편 복도로 걸어갔다. 한상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민우는 박종규라는 이름과 진소희의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강민우의 허리에 차고 있는 호출기에서 호출신호가 울렸다. NTIS에서 온 호출임을 확인한 그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출구를 향해 갔다.
수도꼭지를 틀어 쏟아지는 물을 주전자에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이진아는 무척 긴장하고 있다. 그녀가 용두목장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목장에서 그녀가 할 일은 힘들지 않았다. 술집 직업여성으로 생활하다가 젊은 나이에 곽춘호의 아내가 된 김애경은 아내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이진아에게 살림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이진아는 힘들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자는 여자보다 성적인 욕구가 강하고 충동적이다. 이진아는 처음부터 곽춘호의 게슴츠레한 눈빛을 의식했다. 그녀의 계획이 순조롭게 시작된 것이다. 첫날부터 곽춘호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주방으로 들어와 설거지를 하는 이진아에게 스킨십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이진아의 엉덩이와 젖가슴을 쓰다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이진아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몸을 사린다. 이진아는 곽춘호가 더욱 달아오르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손님이 찾아오지 않던 목장에 방문객이 찾아 온 것이다. 이진아의 계획은 우선 곽춘호를 통해 흑사회 놈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방문객을 살펴본 이진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민우의 파일에서 보았던 흑사회 조직원 중에 한 명이었다. 기린처럼 유달리 목이 긴 주승균이 확실했다.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곱슬머리를 잊을 수는 없는 이진아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전자에서 끓는 물을 찻잔에 붓고 커피를 타는 이진아의 손이 떨린다.
“애리야! 뭘 그렇게 꾸물거리니. 빨리 가져오지 못하고.”
“네. 지금 가져가요.”
거실에서 신경질적인 김애경의 말에 대답한 이진아는 커피를 탄 찻잔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곽춘호와 김애경, 그리고 곱슬머리 주승균이 소파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멈춘 그들의 시선이 쟁반을 들고 들어가는 이진아에게 향했다. 이진아는 다소곳이 탁자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스커트 자락을 찰랑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아담한 둔부가 흔들리는 뒷모습을 주승균이 빤히 바라봤다.
“형님! 저 쌈박한 영계는 누굽니까?”
“아! 그냥 집안 일 거들어주는 여자.”
주방으로 들어온 이진아는 거실로 통하는 문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유리탁자위에 찻잔을 놓는 소리가 이어졌다. 주승균의 간사스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순천여자는 미인이라던데, 형수님은 갈수록 아름다워집니다.”
“그렇게 보여요!? 호호.......!”
김애경이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곽춘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외면했다. 주승균이 곽춘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곽춘호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님이 잘해 주시나 봐요. 형수님이 몸매도 갈수록 처녀 같아지는데요.”
“처녀는 무슨.......!? 그나저나 철오나 종규는 요즘 보기 힘든데 뭣들하고 지내냐?”
곽춘호는 김애경을 칭찬하는 주승균의 말이 시답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많은 여자들을 상대해 본 곽춘호는 세상에 여자는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 수없이 아내로 인정하고 있는 김애경에게 식상감과 권태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형님! 모르쇼? 철오는 문한이한테 가 있잖아요. 종규는 짭새들 피해 부산으로 애들 데리고 가서 토박이 놈들하고 전쟁 한판 치르고 자리 잡았지요.”
“문한이는 잘하고 있지?”
김애경은 새침한 표정으로 곽춘호를 흘겨본다. 그러나 곽춘호는 그녀를 무시하고 양팔을 들어 기지개를 한다. 곽춘호의 질문에 주승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문한이는 이제 이름난 교주가 됐어요.”
“너는 요즘도 인천에서 사채놀이 하냐?”
“전당포도 하나 차렸지요.”
“돈 많이 벌은 모양이구나.”
곽춘호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뻗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앉았던 김애경이 잽싸게 곽춘호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땅치 않으나 이런 세계에서 군주나 다름없는 곽춘호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주승균이 곽춘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쇳가루가 모자라 형님 찾아 왔는데 도와주십시오.”
“나도 요즘 돌아가는 돈은 없다.”
곽춘호는 주승균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한 주승균이 곱슬거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곽춘호는 길게 목을 빼고 고개를 숙이는 주승군의 모습이 안됐는지 덧붙여 말했다.
“물 있는데 팔아서 쓸래?”
“저야, 좋지요.”
곽춘호가 말하는 물이라는 것은 마약을 말하는 것이다. 곽춘호는 며칠 후에 중국 상선으로 도착할 밀수품들과 필로폰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얼굴빛을 들어낸 주승균이 구부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곽춘호는 어렵게 들여올 필로폰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던진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 주쯤에 연락할게 들려.”
“고맙습니다. 형님.”
그들은 밀수품을 중개업자에게 넘길 계책을 꾸몄다. 문 뒤에 몸을 감추고 있는 이진아는 그들의 대화를 낱낱이 듣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눈 주승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곽춘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주승균을 배웅한 곽춘호가 거실로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김애경이 곽춘호에게 투정을 했다.
“자기는 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거예요? 먼저 번에는 자기 심부름도 거절했는데.”
“넌 잔말하지 마! 내가 애들하고 똑같으면 어떡해. 친형제 같은 아우들인데 보살펴 줘야지. 언젠가는 다 써먹을 때가 있으니 참견하지 마.”
곽춘호는 김애경이 자신의 일에 관여치 못하도록 명령하듯이 언성을 높였다. 새침해진 김애경이 주눅이 들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내의 간섭이 마땅치 않은 곽춘호도 소파에 앉으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집밖에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인부들 왔나 봐요.”
곽춘호의 눈치를 살피던 김애경이 소파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하루에 한 번씩 목장을 돌보러 올라오는 아랫마을에 사는 인부들이 온 것이다. 주방 문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진아는 싱크대 앞으로 다가가 찻잔을 씻기 시작했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려던 곽춘호가 슬며시 주방으로 들어와서 이진아의 등 뒤로 다가섰다.
항상 이진아에게 흑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는 그였다. 이진아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설거지에 열중하였다. 그녀로서는 그를 더욱 유혹하여 신뢰하도록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등 뒤로 바짝 다가서는 그의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꼈다. 그녀의 등을 껴안은 그의 손길이 앞가슴을 더듬었다. 그때서야 이진아는 젖가슴을 주무르려고 하는 곽춘호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섰다.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아줌마한테 혼났단 말에요.”
“괜찮아! 제까짓 게 어쩌지 못해. 애리가 귀여워서 미치겠다.”
게슴츠레한 눈빛을 한 곽춘호가 우격다짐으로 이진아를 껴안았다. 역겨운 열기를 느끼는 이진아가 그의 가슴을 밀치며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곽춘호는 장난감을 다루듯이 이진아를 다시 돌려 세워 등을 껴 안았다. 티셔츠를 들어올린 그의 손길이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왔다.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거머쥔 그가 부르르 떨었다. 이진아는 이질감과 함께 묘한 촉감을 느꼈다.
"아 잉! 아저씨 이러시면 안돼요. 저 쫓겨 나요."
"괜찮아 넌 나만 믿어."
그것은 육체적인 짜릿함보다는 보복해야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쾌감이다. 싱크대 위의 진열장 유리에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이진아와 남자의 모습이 들어났다. 밀려 올라간 티셔츠 위로 완연하게 들어난 젖가슴이 남자의 손끝에서 주물려지는 모습도 비쳐진다. 이진아는 발기된 남성이 둔부 사이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숨소리가 높아간다. 그때 현관 문 밖에서 김애경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뭐해요? 얼른 나와요. 사슴 뿔, 자를 때도 됐잖아요.”
“천천히 해도 되는데 지랄이야.”
퉁명스런 목소리를 흘린 곽춘호가 못내 아쉬운 눈빛으로 이진아를 바라보며 주방을 나갔다. 이진아는 엿들었던 말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박종규가 부산에서 조직폭력배 조직의 보스로 있다든 것과 주승균이 인천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사채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주라는 허문한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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