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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올 가 미 - 3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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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8 회 작성일 23-12-12 17: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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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니 아이들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딸애는 컴퓨터를,



아들은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신경질을 예상하고 애들이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분이 좋아서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점심은 먹었니?”



애들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침은?”



고개를 끄덕인다. 산정호수에서 오빠가 사준 오리 바비큐를 주며 아이들을



안방으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예상 밖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거실부터 정리하고 청소해 나갔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안방 문을 열고 물어 보았다.



“아빠 전화 없었니?”



“있었어. 엄마가 고생이 많다고 하셨어.”



딸애의 대답에 가슴이 찔렸다. 하지만 남편에게도 득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교육 같던 남편이 첫 출근 했던 날. 저녁에 싱글 벙글하며 귀가했다.



새로 오신 공장장이 불러서 가 보았더니 자기대학교 10년 선배더란다.



앞으로 잘 돌봐 줄 테니 열심히 해 보라고 하더란다. 나는



“아이고 잘 됐네.”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사무직으로 보내달라고 하라고 부추겼다.



시간되면 식사를 같이 하던가 집으로 한 번 모셔 오라고 능청을 떨었다.



남편은 아이들까지 안아주며 좋아했다.



산정호수에 다녀 온지 일주일째 되던 날. 아침부터 폰에 메시지가 들어 왔다.



오빠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간 날 때 ** 앨범에 가 보라고.



남편 출근하고 애들 학교가고 거칠 것이 없었다. **를 열었다.



앨범으로 직행했다. 온몸 승부, 가슴 짱, 다리 짱, 거시기 짱에 내가 가면을 쓰고



발가벗고 누워 있었다. 모텔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얼굴은 안보여도



몸만 봐도 나를 알 수 있었다. 손목시계와 목걸이, 귀걸이가 켕겼다. 남들이 알아 볼까봐.



제목은 ‘사랑 받고 싶은 녀.’ 댓글 쪽지 보고 맘에 들면 하룻밤 섬기겠다고



부연 설명이 붙어 있었다. 30대 중반의 유부라고도 밝혀 놓았다.



예쁜 것은 공유함이 옳다고도 덧붙여 놓았다. 올린이가 ‘칼있으마’였다.



오빠도 아이디를 하나 만든 모양이었다. 내 아이디는 아니었다.



나도 댓글을 하나 달아 놓았다.



보지 털은 뽑는 것이 어떠냐? 테이프 붙여서 확 당기면 즉 빵.”



내가 적은 댓글 보고 내가 웃었다. 내 보지 털 뽑으려고 남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흐흐흐. 남자들은 왜 여자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다.



오빠에게 답 메시지를 보냈다.



“남자들 찾아오면 오빠가 책인 지세욧.”



그 이후로 우리는 산정 호수에 두 번을 더 갔다. 하루는 펜션에서 자고 왔다.



또 한 번은 야외 알몸 촬영을 했다. 모텔에서의 사진이 반응이 좋아서



야외 노출을 하겠다고 오빠가 공언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나 한번 먹어 보겠다고



오빠에게로 쪽지를 보내 왔다고 했다. 오빠는 그 중에 젊은 놈 다섯과 대화하고 있다고



나에게 귀띔 했다. 나는 시간만 나면 ** 앨범을 열었다. 내 사진에 붙은 댓글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별의 별 말이 다 있었다. 예쁘다. 아름답다. 명품이다. 예술이다는 말이 좋았다.



야외 노출은 온갖 짓궂은 장면을 연출했다. 가면을 쓰니 두려움도 걱정도 없었다.



애 몸을 보고 환장하는 남정네들의 댓글과 침을 상상하면 신이 났다.



내 알몸을 보고 얼마나 많은 머스마들이 허공에 정액을 뿌려댈지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사진에 키스하는 남자도 있을 것이고 좆을 문지르는 남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맺힌 성욕을 풀어주고 스트레스를 해소 해 주니 나는 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선녀가 따로 있나? 남자들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여자가 선녀지.



나는 오빠가 원하는 모든 포즈를 취해 주었고 오빠는 100 번 가까이 셔터를 눌러 댔다.



오빠는 나와 만나면 그냥 헤어지지 못 했다. 속옷도 사 주고 액세서리며



애들 먹을 것도 꼭꼭 챙겨 주었다. 나는 점점 오빠의 애인이고 싶어졌다.



나는 주방일도 열심히 배웠다. 사장의 어깨너머로 열심히 훔쳐보았다. 모르는 것은



억척스럽게 꼬치꼬치 물었다. 그리고 노트에 정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주방을 나에게 맡겨 주었다. 사장은 주방과 홀을 감독만 했다.



그 동안 반장은 오빠와 두 차례 술자리를 하며 화해하고 우정을 쌓았다.



남편도 기술연구소 대리 자격으로 발령이 났다. 기술연구소는 남편이 옛날 회사에서



인정받았던 부서였다. 남편은 적성에 맡는 일을 받았음에, 선배라는 든든한 배경에



신바람이 났다.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있다하는데 자기에게 그것이 왔다고 좋아했다.



조장의 승진 발령을 축하한다고 반원들이 삼삼 칼국수에서 송별식을 했다.



나는 종업원이 아닌 주인공의 아내로 참석 했다. 회식이 진행되는 내내 나와 반장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은 껄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골목에서 나를 벽에 세워 놓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했던 남편의 동료 사원이



나에게 축하주를 부어 주었다. 손님의 희롱에 분개했던 유도하는 직원이 남편 옆에 앉아



정말 잘 만난 부부라고 칭찬해 주고 있었다. 두 분이 성실하게 사니까 하늘이



돌보는 것이라고 주위의 박수를 끌어냈다. 내가 참석한 직원들에게 일일이 소주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반장 차례가 됐다. 나는 평상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반장은 안절부절 못했다. 꿇었다가 앉았다가 한 손으로 쥐었던 술잔을



얼른 두 손에 모아 쥐기도 했다. 나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이었다.



새로 조장된 사람이 중대 발표를 하겠다고 했다.



“공장장님이 이 자리에 직접 오시지는 못하시고 맥주 한 박스를 보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아우성을 쳤다. 휘파람도 불어댔다. 뒤이어 맥주 한 박스가



들어오고 병 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송별식이 파하고 아쉬움이 남았는지



일행은 노래방으로 향했다. 나도 참석했다. 조신하게 얌전을 빼며 독창 한 곡.



남편과 이중창 한 곡을 불렀다. 노래방은 장장 세 시간이 흘렀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유도를 했다는 동료가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남편을 붙들었다



몇몇이 포장마차로 몰려갔다. 남편은 반장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지만 약속이 있다며



반장은 가 버렸다. 나하고 함께 있는 것이 불편 했으리라. 짐작이 갔다.



포장마차엔 진짜 남편하고 친했던 사람들만 모인 셈이었다. 국수를 한 그릇씩 말아 먹었다.



그리고 또 소주잔이 돌았다. 나는 마시지 않았다. 혹시나 취하면 모든 게



까발려질까봐 두려웠다. 엉뚱한 행동이라도 해서 남편 얼굴에 먹칠 할까 봐서 였다.



송별식 이틀 후, 남편은 현장과 결별을 했다. 연구소로 출근을 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깔끔하게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자가용을 하나 장만해 주었다. 그 것도 오빠의 입김으로 싸게 구입했다.



청첩장이 한통 날아들었다. 남편의 외삼촌이 딸을 치운다는 내용이었다. 그니까



남편의 외사촌 여동생이 시집을 간다는 소식이었다. 남편은



“같이 갈래?”



물어 왔다.



“그때 보고.”



했더니 영 서운한 눈치였다. 사실 나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식당 사정도 봐야하고



오빠가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장담을 할 수 없음이었다. 남편의 외삼촌은 평생 교단에



몸담아 온 분이었다. 사범대학 졸업하고 교육청으로 발령 났으면 교육부 장관도



노려보는 건데 교사로 발령 나서 이제 꼭대기까지 올라 버렸다고 너털웃음을 날리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아들 둘은 아직 공부를 하고 있고 막내인 딸이 먼저



결혼을 하는 셈이었다. 내가 시집 왔을 때 코 찔찔이 초딩이더니 세월 참 빠르다고



남편과 나는 입을 모았다. 남편은 부조금 십 만원을 준비 하라 했다.



나는 삼십 만원 하자고 우겼다. 앞으로 남동생 둘 한테도 부조해야 한다고



남편이 말했다. 외숙모님이 우리 걱정을 얼마나 해 주는데 남들만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내가 우겼다. 둘이 버니까 그 정도 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외숙모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내가 시집 왔을 때 얼마나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는지 모른다. 내 집 장만 할 때도 모자라는 돈을 변통해 주신 분이었다.



남편이 실직했을 땐 수시로 전화를 걸어 와 안부를 묻고 보살펴 주었었다.



남편은 자기 사촌이니까 내 주장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댁을 챙겨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외숙모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를 해 주었다.



외숙모는 매우 좋아했다. 사돈이 중소기업 사장이고 사위는 대기업 인사과에 근무 한단다.



이미 36평 아파트를 분양 받았고 혼수가 부담된다고 엄살을 떨었다.



남편은 기술 연구소로 옮겨가서 특허를 2건이나 제출했다. 다년간 현장에서 고생한 것이



재산으로 돌아 왔다. 이론과 실무에 두루 밝은 사람이 되었다. 현장에 샘플을 만들러 가도



사원들의 협조도가 높아 일하기 쉽다고 했다. 사무직 사원들이 현장에 샘플 만들러 오면



생산에 지장 준다고 싫어하는데 같이 고생한 남편에게만은 호의적이란다. 또한



남편은 현장의 기계를 알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직접 만들어 오기도 한다고 했다.



특허를 많이 출원하면 특진의 기회도 주어진다고 남편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오빠는 원칙적이고 양심적이고 철저한 사람이라고 남편에게 전해 들었다.



실습생에게도 절대 반말하지 않는 품성에, 말단 직원가지 존중해 주는 지성파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너무 철저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뒤에서 헐뜯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오빠는 수시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산정호수에서 찍은 사진 **에 올렸다는



전갈이었다. 오빠는 하루에 3장 이상 올리지 않았다. 너무 많이 한꺼번에 올리면



잼 없다고 했다. 나는 수시로 들어가 내 몸뚱아리에 대한 남정네들의 품평을 즐기는 것이



낙이 되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도 쪽지가 날아들었다. 메신저 공개하라고



난리들이었다. 쪽지는 일일이 답해 주었지만 메신저는 공개하지 않았다. 오빠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름이나 전번. 주소도 오빠의 허락이 없어 알려주지 않았다.



남편은 업무상. 모기업이나 협력업체에 출장을 자주 갔다. 남편이 출장 가는 날은



오빠와 내가 즐기는 날이었다. 우리는 모텔 보다 공원에서 스킨십하고 카섹스를 즐겼다.



결혼식이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오빠에게 폰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일욜, 호수에 가실레여?”



오빠에게서 답장이 왔다. 중요한 선약이 있다고. 그래서 나는 식당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남편을 따라 결혼식장엘 갔다. 혼주를 만나보고 신부를 만나 보았다.



외숙모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부 쪽 하객들은 축의금 전하고 속속 입장하는데



신랑 측 하객들은 봉투를 들고 광장까지 2줄로 서 있었다. 하객만 봐도 신랑 측의 위세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예식 시간 전에 정리가 다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친지들을 만나고 있는데 남편이 내 팔을 툭 쳤다.



“공장장님 오셨어.”



“웬 일이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부리나케 달려갔다.



남편을 쫒아보니 중요한 선약이 있다던 오빠가 자기 아내와 아들까지 데리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달려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악수했다.



오빠가 남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한 대리 여기 웬일인가? 하객인가?”



“공장장님. 혼주가 저의 외삼촌이십니다.”



오빠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하예지다가 노래졌다. 약간 비틀 거렸다.



남편이 얼른 부축을 했다. 가족들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내 가슴은 이유 없이 발랑거렸다.



“아니야. 잠시 현기증이. 좋은 시간 보내고 가게나.”



오빠는 다시 남편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갔다. 혼주와 정답게 얘기하는 모습을 끝으로



나는 그날 오빠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예식이 끝나고 남편이 공장장님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고 찾아 다녔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바쁘신 일 있는 같다고 남편을 내가 말렸다.



결혼식이 있은 지, 사흘 만에 남편의 출장이 있었다. 출장을 보내고 나니 어김없이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식당에 대충 핑계를 대고 결근을 했다.



이번엔 ** 모텔이었다. 처음 만났던 303호실이었다. 나는 미리 속옷을 입지 않고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만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잔잔한 흥분이 나를 떨게 했다.



모텔 방문을 빼꼼이 열었다. 노크 따윈 생략해도 될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빠는 옷도 벗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양주를 들이 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병을 잡고 두 손으로 한 잔 따라 주었다. 오빠도 내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우리는 건배를 했다. 그리고 또 한 잔씩 주고받았다.



갑자기 오빠가 일어서는가 싶더니 내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보게. 이 주책없는 어른을 용서 하시게나.”



돌발 상황에 나는 놀라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시물레이션이란 말인가?



무슨 플을 하고 싶어 사람을 이렇게 놀래키는가 묻지도 못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도 하고 관계도 하지만 해야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는데 내가 너무 경솔 했어. 인간의 도리를 망각했었어.”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오빠의 겨드랑이를 잡고 일으켰다. 의자에 마주 앉아



양주를 나누며 오빠의 얘기를 들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그러나 오빠는 크게 놀라고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남편의 외삼촌과 오빠는 초.중.고를



같이 다녔다. 대학은 따로 다녔지만 50년 우정을 쌓은 불알친구였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가장 친한 친구의 생질의 부인이란 걸 안 순간.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몰랐단다.



며칠 밤을 새우며 괴로워했다고 했다. 얼굴 들고 친구를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오빠. 괴로워 마세요. 세상 다 그런 거에요. 서로가 좋아서 했잖아요.”



친구의 생질을 유린했으니 자기는 잡놈이고 천벌을 받아 마당하다고 오빠는 흐느껴 울었다.



“똑같은 여자인데 아는 사람은 안 되고 모르는 사람은 된다는 논리가 있나요?”



“나는 너에게 죄를 짓고 네 남편에게 죄를 짓고 친구에게 죄를 지었다.”



나는 잠시 우리 사이는 정당하다고 항변하다가 점점 오빠를 달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과거를 없었던 일로 하고 관계를 청산하기로 했다.



나는 의남매로 지내기를 원했지만 오빠는 차차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보자며



일단은 서로를 잊자고 제의 했다. 우리는 다음에 다른 경로로 의남매를 맺기로 하고



그동안의 모든 관계는 청산하고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기로 언약했다.



그날, 우리는 아무런 행위도 없이 헤어졌다. 오빠는 아파트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갔다. 우리는 이별의 키스도 하지 않았다. 오빠는 애들 먹거리도 챙겨주지 않았다.



다음날 **에 들어가니 내 알몸 사진이 모두 삭제되고 없었다. ‘칼있으마’에게 쪽지를



보내려고 했더니 탈퇴한 회원에게는 쪽지를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오빠의 메시지가 곧 도착할 것



같아서였다. 오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보턴 누르는 환상도 여러 번 가졌다.



차츰 나의 자위 횟수만 잦아졌다. 오빠에게 암캐 짓하는 상상 속에.



남편이 회사 소식을 전해 왔다.



“갑자기 김강배 반장이 중국 공장으로 발령이 났어. 승진 발령이지만.”



“중국 공장에 가면 되겠네요. 바람도 쏘이고 경험도 쌓고.”



“그 곳이 얼마나 열악한데. 신설 공장이라 준비도 안 됐고 말도 안 통할 것이고

삶에 기반이 여기에 있는데 쉽지 않지.“



“그럼 어떻게요?”



“인사권은 회사에 있고 싫으면 관둘 수밖에.”



“김 반장 안 됐다. 우리에게 잘 해 줬는데.”



“김 반장이 총무과에 올라가 난리를 치고 내가 공장장님을 만나 보았어.”



“그래서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사장 지신데 어떻게. 공장장님 말씀도 김 반장이 중국 공장에 꼭 필요 하다는데.”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김 반장이 왜 중국 공장으로 갑자기 발령이 났는지.



공장장을 천벌 받을 죄인을 만든 죄였다. 안타깝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며칠 후 남편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 왔다.



“김 반장이 옛날에 공장장을 두들겨 팼다네.”



내가 아는 얘기였다. 그게 어떻게 소문으로 퍼졌을까?



“김 반장님은 중국에 간데요?”



“가면 뭐하겠어? 얼마 버티지 못 할 걸. 회사 그만 둘 거야.”



“그럼 뭐해 먹고 산데요?”



“내가 알어? 안 죽으면 살겠지.”



만나서 위로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나도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망가뜨린 벌을 제대로 받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꿈에 개 줄을 차고 벌거벗고 길거리를 네 발로 김 반장에게 끌려 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김 반장이 사표를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반장이 마누라를 두들겨 패 갖고 잡혀 갔다는 소문은 식당에서 들었다.



나 때문에 생긴 평지풍파가 잠잠해 지는 줄 알았더니 어느 날, 남편이 보따리를 챙겨 왔다.



사직서를 냈다나. 어쨌다나. 공장장과 사장이 붙들고 늘어지는데도 뿌리치고 나왔단다.



김 반장과의 의리 때문인가 했던 내 짐작은 어긋났다. 회사를 그만두고 차를 몰고 3박 4일



여행을 다녀 온 남편이 평온한 얼굴로 내 앞에 작은 가방을 하나 내 놓았다.



가방을 열어 본 나는 어지러웠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가방 속에는 김 강배 반장이 나를 촬영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개목걸이하고 기어 다니는



알몸 사진이였다. 남자의 좆을 열심히 빠는 사진, 좆물 먹고 좋아라하는 사진. 적나라했다.



나에게 사용한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개 줄, 수갑, 딜도, 채찍, 꼬리, 깃털 등등.



남편은 나보다 더 놀라서 나를 병원으로 옮겼다. 정신을 차리니 남편은 나의 모든 것을



용서 하겠다고 했다. 이미 지난일이니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고 모든 것을 까발려 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그 가방을 받고



홧김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 나를 죽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여행을 떠났다.



혼자 돌아다니며 많은 생각을 했다. 자기만 용서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맺고 나에게 사실을 알려는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보여 준 것이라 했다.



나는 미안해서, 고마워서 엉엉 울었다. 이렇게 좋은 남편을 속인 죄가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의 바지를 벗겼다. 간호사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도리질 치는



남편의 좆을 꺼내 주읍 즙 빨아 주었다. 그리고 물을 빼 먹었다.



남편 앞에 꿇어앉았다. 평생을 남편의 암캐가 되어, 노예가 되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섬길 것을 맹세 했다. 남편은 나의 맹세를 받아 주었다.



나는 식당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식당을 차렸다. ‘지희네 식당’



형편이 되면 산정호수로 옮길 작정이다. 나는 주방을 보고 남편은 배달을 한다.



나는 남편이 배달을 하고 오면 달려가 목에 매달려 뽀뽀를 날린다.



손님이 없을 때는 네발로 멍멍 짖으며 걸레질을 한다. 나는 남편이 사 주는 옷만 입는다.



입으라는 옷만 입는다. 주방 안에서는 발가벗고 앞치마만 두른다. 남편 앞에서



나는 항상 개다. 새로운 행복을 찾았다. 몰래할 필요도 없는 충성이라서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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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드립니다. 지희네 식당에 놀러 오세요.

주방은 들여다 보지 마세요. 부끄럽삽니다.ㅎ ㅎ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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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 마지막 달에 시작해서 햇수로 3년, 달수로 20개월이 걸렸네요.



그 동안 싸이트를 못 찾아 헤메기도 했고 의욕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읽어 주시고 추천해 주시고 댓글과 쪽지로 응원해 주셔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점 감사하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제 인생에 돈 안 되는 곳에 글을 써 본 것은 **가 처음입니다. ㅎ ㅎ



괜히 시작했다고 후회한 적도 있지요. 그러나 내 글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셔서



끝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 합니다. 모두 하시는 일 번창 하시고 성공하십시오.



글을 맺으면서 생각하니 읽어 주시는 여러분들이 예상외로 예리하시다는



느낌에 감탄 합니다. 제가 올가미를 처음 시작 했을 때 쪽지를 보내 와



경상도에 사느냐고 물으셨던 분. 애칭을 기억 못해 죄송하지만, 제 글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지적해 주셨던 분. 감사 합니다. 앞으로 침은 절대 춤이라고 적지 않겠습니다.



올가미를 마치면서 또 하나 느끼는 점은 인간성입니다. 단편 첫경험과 주리의 고백 28부.



올가미 38부 합치면 원고지로 2700매 정도 되는데 20개월 동안 써 올렸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써야 할 글은 100매도 부담으로 억눌렸는데 쓰고 싶어 쓰는 글은



부담 없이 쓰게 되는 힘든 줄 모르고 쓰게 되는 저의 속성을 발견 했습니다.



제가 쓴 글들이 모쪼록 여러 님들에게 읽을거리와 삶에 여유를 드렸다면 기쁘겠습니다.



아울러 제가 ** 야설을 쓰면서 상상력이나 문장력이 일취월장하였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하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지희와 반장과 공장장처럼 우리는 어디서 어떤 연유로



만나게 될른 지 스쳐 갈른 지 모르잖아요? 지희 남편처럼 자기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대 사건이 진행되고 마무리 되는 것도 모르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사잖아요?



모쪼록 주변분들 잘 챙기시고 건강 잘 챙기시고 인생 잘 챙기시고



건강하게 사세요. 인연이 허락하면 어디에서 어떻게든 다시 만나길 기대하며



인사에 갈음합니다. 횡설 수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것도 저의 아쉬움의 표현으로



헤아려 주시리라 믿으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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