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13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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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주면 말할게요.”
“이대로 말해.”
지금 말하면 당신은 거짓말을 간파해 버릴 거잖아.
초조한 눈빛을 보이던 희민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싫진 않아요.”
“…….”
희민이 내뱉듯 말한 순간 정혁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일렁거렸다.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삼키려 하자 희민이 당황한 듯 얼른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시, 싫지 않다고 했을 뿐이에요. 좋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희민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마트 직원이 얼른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거봐요. 구경거리잖아. 지금.”
희민이 소리 낮춰 말하자 정혁이 손을 떼어 달라는 듯 눈짓으로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희민이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내자 그의 입술 끝이 느른하게 휘어 올라가 있었다.
“대답하면 놔준다고 했으니 우선 약속은 지키지.”
정혁이 그녀의 몸을 놔주자 한 발 뒤로 물러선 희민이 붉어진 얼굴을 하곤 제 머리칼을 정돈했다.
“…….”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 희민을 보며 정혁이 입을 열었다.
“난 허기가 져서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매일 한희민 곁을 맴도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눈빛이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어딘가 피로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말이 진심으로 들리는 건 그런 탓인지도 몰랐다.
“솔직히 이런 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스럽고.”
정혁이 커다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더는 계약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거예요?”
희민의 물음에 정혁이 눈썹을 찡그린 채 미소 지었다.
“……사랑이든 동정이든. 뭐든.”
희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정이요?”
“불쌍해 보이지 않아? 지금을 위해서 수십 년을 달려왔는데, 그 모든 걸 날릴 위기인데도 당신에게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매달리고 있는 건데.”
“그러니까 당신, 서정혁을 동정하라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희민이 인상을 찌푸리자 정혁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손길에 희민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럼 날 사랑하면 되겠네.”
“…….”
정혁의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날 사랑하면 되잖아. 한희민이.”
두근.
정혁의 처음 보는 눈빛에 희민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반응했다.
‘이런 반응……은, 좋지 않아.’
희민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잡힌 손에서 빠져나왔다.
“안 되겠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우선 들어가야겠어요.”
선언하듯 빠르게 말한 희민이 옆으로 밀쳐진 카트를 붙잡았다.
“이번엔 정말 따라오지 말아요.”
희민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서둘러 주차된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희민의 뒷모습에 남자의 시선이 오래도록 따라붙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희민은 심장의 울림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미열과 합쳐진 요란한 심장 박동은 어딘가 초조한 사람처럼 온 집 안을 서성이게 했다.
장 본 것을 다 정리하고도 괜히 이것저것 건드리며 집 안을 닦고 다니던 희민은 문득 시계를 봤다.
“벌써 1시가 넘었네…….”
새벽이 될 때까지 이러고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진 희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잊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 게 아니라 뭔가 결론을 내기 위해 움직인 거였는데 아무것도 결론 나지 않았다.
서정혁에게 이 정도로 휘둘리는 게 한심했지만 이것도 자신의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에게 빠져선.’
한숨을 내쉰 희민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거실 베란다로 향했다.
서늘한 바깥 공기를 마시면 머리가 좀 차갑게 식지 않을까 생각하며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달이 밝네.”
예쁘게 걸린 반달이 제 마음도 모르고선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내 마음도, 반쪽이라도 좋으니 저렇게 선명하게 빛나면 좋을 텐데…….
제 마음은 온통 흐리기만 한 것 같아서 희민은 속상했다.
뭐가 이렇게 답답하고 힘들고 어려운지.
그 남자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지 못하고 하염없이 흔들리는 감정 사이에서 혼탁함을 느꼈다.
달을 보던 희민이 어두워진 얼굴로 문득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아래에서 창문을 올려다보는 남자는 새벽이라 작게 보였지만, 서정혁이 분명해 보였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희민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언제부터 있던 걸까, 저 남자는. 오늘만 저기 있던 걸까? 아니면 혹시 그 전에도?
평소 베란다에는 잘 나와 보지 않는 탓에 희민은 알 수가 없었다.
‘난 허기가 져서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매일 한희민 곁을 맴도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아까 들었던 낮고 절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
탁.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희민이 베란다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
“나와 줄 줄은 몰랐는데.”
정혁이 근사한 미소를 짓자 도톰한 카디건을 걸치고 나온 희민이 눈을 치켜떴다.
“오늘만 있던 거죠?”
그가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대답이 없자 희민이 다시 물었다.
“매일 여기 서 있던 건 아니죠?”
“당신 편한 쪽으로 생각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희민이 눈썹을 찡그리고는 가슴 위에서 팔짱을 꼈다.
“그런데 당신 나한테 완전히 말 놓기로 한 거예요? 전에는…….”
관계할 때만 놨잖아요.
자신이 하려던 말을 깨달은 희민이 멈칫거리곤 입을 다물었다. 정혁이 그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
“전에는?”
“……아니에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가만히 고개를 저은 희민이 정혁을 바라봤다. 달
빛과 가로등 때문에 새벽이지만 그의 얼굴 윤곽이 제대로 보이는 편이었다.
표정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희민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이 서정혁이라는 것밖에……. 아니 어쩌면 김지훈일 수도 있겠지만.”
정혁이 그녀 앞에 선 채 희민이 꺼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잘 알겠죠. 나조차 모르는 것들까지 당신에게 보고됐을 테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에겐 중요해요.”
희민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를 사랑이든 동정이든 할 수 없으니까.”
“…….”
정혁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희민의 뺨을 어루만졌다.
“알게 해 줄게.”
그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원한다면 어떤 거든 알게 해 줄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뭐든……. 그럼 되는 건가?”
가까이서 시선을 맞춰 오는 정혁을 희민이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둡게 잠겼다.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눈빛이 달빛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어요.”
“뭐든 말해 봐.”
정혁이 그녀의 말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 사람처럼 입술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끼며 희민이 입을 열었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날 안지 말아요.”
정혁이 의외라는 듯 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잔인하네, 그건.”
“그게 조건이에요. 받아들인다면 당신에 대해 알아 가 볼게요.”
희민이 달빛에 비친 맑은 눈동자로 정혁을 바라봤다.
육체적인 계약이 있었던 과거의 방식과는 다른 관계이고 싶었다. 새로운 관계에서 서정혁을 알아 가고 싶었다.
희민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던 정혁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내가 거절할 리가 없잖아. 한희민이 내 옆에 있어 준다는데.”
정혁이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그 저택에서 늘 자신을 볼 때마다 일렁이던 불길이 지금 그의 눈동자에서 똑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희민은 우습게도 가슴이 떨렸다.
“키스도 안 된다고는 하지 마.”
“키스는…….”
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혁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아읍.”
입술이 닿자마자 탁한 숨결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간 축축한 혀가 곧장 희민의 혀를 휘어 감았다. 허기진 듯 혀를 빨아 대는 감촉에 희민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하읍, 음…….”
고개가 옆으로 깊이 기울자 물컹한 혀가 뜨겁게 엉켜들었다. 희민의 입술이 더 크게 벌어지며 숨을 헐떡였다.
“하.”
정혁이 입술을 놔주자 살짝 보풀아 오를 정도로 자극을 준 희민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그 입술에 강렬한 시선을 꽂은 정혁이 거친 숨을 흘렸다.
“……이 입술을 삼키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기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키, 키스만……이에요.”
희민이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정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젠 다른 쪽으로 괴롭히는데.”
신음처럼 내뱉은 정혁이 희민을 품에 안았다.
“무슨 말이에요?”
희민이 안긴 채로 의아한 목소리를 내자 정혁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시듯 깊이 숨을 들이켠 그가 말했다.
“아니야. 당신 말대로 할게. 뭐든.”
“…….”
“뭐든 할 테니까 이렇게 옆에만 있어.”
잦아든 목소리와 정혁의 가슴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에 희민은 가슴이 떨려 왔다. 어쩌면 자신의 심장 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 다일지도…….’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강한 울림이 서로를 울리고 있었다. 한동안 가만히 안겨 있던 희민이 몸을 세웠다.
“매일은 못 있어요. 나도 내 생활이 있고.”
희민이 작게 말하며 시선을 들자 정혁이 다시 키스하려는 듯 일렁이는 눈동자로 고개를 숙여 왔다.
“그만. 오늘은 이만 들어갈래요. 당신도 그만 들어가요. 여기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으니까.”
희민이 한 걸음 물러서며 말하자 정혁의 짙은 눈동자에 아쉬움이 맺혔다.
“휴대폰 번호 알려 줘.”
“폰 어디 있어요? 거기에…….”
“그냥 말해. 외울 거니까.”
희민도 폰 번호 정도는 한번 들으면 외우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고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번호를 불러 준 희민은 정혁에게 말했다.
“이제 가요.”
“먼저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갈 테니까.”
“난 집 앞이잖아요. 당신 먼저 가요.”
“보고 갈게.”
정혁은 먼저 돌아설 생각은 전혀 없는 듯 우뚝 서 있었다.
희민은 순간 자신들이 연인과 헤어지기 싫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처럼 느껴져 멋쩍음을 느꼈다.
“그럼 갈게요.”
먼저 몸을 돌린 희민이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왔다. 왠지 돌아보고 한 번 더 인사하기엔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도망치듯 집에 들어오자 온몸에 감돌던 미열의 온도가 한층 높아진 것 같았다.
‘하…… 이건 분명 위험한 일이야. 날 망친 장본인일 수도 있는 남자를 상대로.’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은 서정혁을 뿌리칠 수가 없으니까. 그 남자를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도저히 그게 되지 않는데 어떡하라고.’
희민이 신음을 흘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 위에 뜬 처음 보는 번호를 보자 희민이 숨을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네.”
“잘 들어갔어?”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심장이 반응하자 희민이 습관적으로 가슴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들어가는 거 봤잖아요.”
“집 현관까지 본 건 아니니까.”
“잘 들어왔어요. 당신은 운전 중이에요? 아…… 기사가 운전하나?”
희민이 갈피를 못 잡는 질문을 하자 그가 낮게 웃는 게 느껴졌다. 정말 몰랐다.
서정혁이 이런 식으로 웃는 사람일 줄은. 그때도 웃긴 했지만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느른하게 웃긴 했어도 사람 가슴 뛰게 하는 웃음은 아니었는데…….
“내가 해. 혼자 왔어.”
“……직접 운전하기도 하네요.”
“필요할 때는. 그보다, 이게 내 번호니 저장해 두고 내일 몇 시에 가면 되지?”
당연한 듯 하는 말에 희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매일 만나진 못한다고 했잖아요.”
“잠깐이라도 좋아. 얼굴만 보여 줘.”
“…….”
거절하려고 했는데 정혁의 말을 들은 희민은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정말 왜 이럴까. 꼭 죽을 듯이 연애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그럼 내일 문자할게요. 그 시간에 와요.”
“이왕이면 전화로 해.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이 남자가 정말.
“알았어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끊을게요.”
눈썹을 찌푸린 희민이 대답도 듣지 않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얼굴이 뜨거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피부를 달군 열감이 뜨거울 정도였으니까.
희민이 나직이 숨을 토해 냈다. 사춘기도 아닌데 왜 고작 통화 하나로 빨개져선. 이 남자와는 훨씬 더한 짓들도 했는데.
‘하지만…….’
희민이 가슴을 누르고 있는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지금 시끄럽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말해 주고 있었다.
설사 후회하더라도,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그를 믿고 있었다.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 서정혁이 자길 망친 사람은 아닐 거라고. 그 뜨거운 눈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만약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후회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겠지.’
그를 거부하지 못한 대가일 테니.
손끝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울림이 잦아들길 기다리며 희민이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