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2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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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저택은 서울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지만 이 나라 어디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광활한 부지였다.
하나의 동네 전체를 합친 정도의 규모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끝도 없이 이어진 높은 담벼락을 지나고 나서야 보안 센서가 사방에 달린 출입구가 나왔다.
출입구 앞에는 외국처럼 커다란 셰퍼드를 둔 경비 직원까지 몇몇 있었다.
차 안을 검문하다시피 확인한 그들이 문을 열어 준 뒤에도 학교 운동장보다 넓은 정원을 한참 달려야 했다.
‘이렇게까지 경비를 삼엄하게 하는 이유가 뭐야?’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이런 병적으로 폐쇄된 환경까지 보게 되자 희민은 숨이 막힐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문득 젊은 여자들을 주기적으로 넣어 준다고 하던 그 소문이 떠올랐다.
‘여자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환경에서 안에 갇힌 여자가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건 분명했다. 아니, 설마 그러려고……. 하지만…….
끼익―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마침내 정사각형의 큐브를 몇 개 겹쳐 둔 듯한 생소한 건축물 앞에서 차가 멈췄다.
앞에는 차 실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차 실장이 안내하듯 앞장서서 건물 입구로 향했다.
희민은 한눈에 보기에도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인테리어의 거대한 건축물을 긴장된 눈빛으로 보다가 차 실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교도소에 있던 동안 웬만한 일에는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남자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손바닥 안에 땀이 찼다.
‘괜찮아. 최악은 이미 넘겼어.’
완벽한 현대식 모더니즘을 보여 주는 실내 인테리어는 분명 훌륭했지만 감상할 새도 없이 오로지 차 실장만을 따라 걸으며 희민은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적어도 둘 다 죽는 상황은 면했으니 최악은 넘긴 게 맞아.’
예술품이 전시된 공간을 지나 체스판처럼 블랙과 화이트로 이루어진 대리석 바닥이 깔린 곳으로 들어섰다.
‘어?’
희민이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순간 산소량과 습도가 갑자기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집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부터는 분명 그 몇 배로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여기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차 실장이 넓은 공간 안에 덜렁 놓인 검은색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그대로 그녀가 나가 버리자 희민은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하아.
소파에 앉으니 피로와 긴장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희민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나오기 전에 최소한의 화장을 하려다가 그만뒀다.
‘누굴 위해서 꾸민다고……. 잘 보일 것도 없는 사람인데.’
회사에 다닐 때 그녀의 화장은 전투복 중 하나였다.
완벽하고 세련된 차림을 한 여자에겐 나이 많은 남자들도 쉽게 대하지 못한다.
늘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날그날 일정에 맞춰 신경을 썼고, 중요한 상대를 만날 땐 더 공들여 차려입곤 했다.
지금 그녀는 맨얼굴로 머리칼은 하나로 높이 올려 묶고 시크한 스트라이프 셔츠와 블랙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남자를 위해 꾸며 줄 마음은 전혀 없다는 걸 나타냄과 동시에 그녀 스스로도 일부러 여성성을 배제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그녀의 긴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걸 희민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포멀한 차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예쁘장한 얼굴은 경계 없이 드러낸 치부와 같았다.
‘언제 오는 거야.’
한참이 지나도록 서정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민은 초조해졌다. 온갖 소문들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기에 차라리 빨리 그와 대면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설사 듣던 것보다 더한 괴물이라도 차라리…….
“한희민 씨?”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를 흠칫거린 희민이 고개를 돌리자 한쪽 입구에 남자가 서 있었다.
‘저 남자가…… 서정혁?’
희민은 예상과 전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끔찍한 외모를 생각했지만 서정혁은 너무나 멀끔한 모습이었다.
아니 멀끔하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그레이 컬러 셔츠에 블랙 팬츠를 입고 우뚝 서 있는 그는 무척 신장이 컸고 어깨가 수영 선수처럼 넓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두상이 더 작아 보였다.
창백하게 느껴지는 흰 피부에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콧대와 짙은 눈썹을 가진 그는 눈동자 색이 독특했다.
어떻게 보면 회색 같았고, 어떻게 보면 다크 올리브 같은 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렌즈 낀 건가? 아니면 혼혈?’
희민이 남자의 특이한 눈동자 색을 저도 모르게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움직여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정혁은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봤다.
‘아.’
희민은 그제야 자신이 남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조금 당황한 듯 입술이 살짝 벌어진 희민을 조각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응시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실망했습니까?”
“……실례였다면 미안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실망이 아니라 안도였지만 일단 사람을 너무 대놓고 쳐다봤다는 데에 희민은 사과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지나쳤다.
“사과할 것까진 없습니다.”
서정혁의 목소리는 중저음에 가까웠다. 감정 없는 목소리를 들은 희민이 시선을 슬쩍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이번엔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하나하나 관찰하듯 응시하는 눈동자는 가까이에서 보니 더 신비로운 색이었다.
정확히 색을 구분 지어서 설명할 수 없는 색소가 부족한 듯한 그 눈은 어딘가 사람을 긴장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눈 때문이…… 아닌가?’
희민이 테이블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땀이 밴 손바닥을 펴 바지 위에 닦아 냈다.
이 긴장의 이유는 눈동자 색이 아니라 이 남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웃음기 없이 관찰하듯 보고 있는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냉기가 흘렀다.
‘이 남자, 뭐지?’
정혁과 시선을 마주한 희민이 초조한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녀가 커리어로 성공 신화를 쓰게 된 이유는 물론 업무적 성과도 있지만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해 내는 남다른 감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서정혁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심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섬세한 입술을 느른하게 휘어 올렸다. 이상한 미소였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전혀 호의가 느껴지지 않는 미소라니.
“눈동자가 바쁜데요. 뭔가 파악해 보고 싶다면 묻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상대를 간파하기는커녕 자신이 간파당하게 되자 희민은 정곡이 찔린 듯 눈이 조금 커졌다.
한편으로 당황스러웠지만 희민은 곧 표정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왜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한 거예요?”
희민은 빙빙 돌리지 않고 곧바로 핵심을 질문했다.
“…….”
정혁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한쪽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앉은 자세로 방금 전과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 한희민 씨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를 묻는 겁니까?”
남자의 말투도 생각보다 정중해서 의외였다. 이런 계약 관계라면 자신을 노예처럼 부릴 남자라고 예상했었으니까.
“네.”
희민이 똑바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물론 노예처럼 부린다고 해서 순순히 뜻대로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건 계약 조항에 없는 거니까.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실제 그의 모습을 보고 난 뒤에 의문이 들어서였다.
이런 외모를 지닌 태원그룹 회장이 거액을 투자해서 임신 계약을 한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의 재력과 수려한 외모를 생각하면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의 아이를 낳고 싶은 여자는 차고도 넘칠 정도로 보였다.
‘내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겠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을지도…….
희민이 그런 생각을 하며 정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가만히 시선만 맞추던 그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지만 내용까지 친절하진 않았다. 역시 서정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는 것만 봐도 그랬다.
희민의 얼굴에 긴장이 흐르는데 정혁이 입술 끝을 엷게 휘어 올렸다.
“그래도 첫날이니 말해 줄게요. 내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는, 당신밖에 없어서입니다.”
나밖에 없어서?
희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거기까지만 알아 두는 게 좋아요. 한희민 씨.”
정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 올려다보니 그의 압도적인 신장이 더 확연히 느껴져 희민은 입을 다물었다.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아니면 우선 식사부터 하겠습니까?”
정혁이 무감한 얼굴로 쳐다보자 희민은 순간 멈칫했다.
‘본론이라면, 섹스?’
마치 섹스를 전혀 성적이지 않은 것처럼 담백하게 말해서 순간 그가 다른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 식사부터 할게요.”
희민이 대답했다. 지금 무언가를 먹으면 체할 것 같았지만 만나자마자 바로 그런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려는 의도였다.
“준비시키도록 하죠. 잠시 기다려요.”
정혁이 그녀를 지나쳐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희민의 어깨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하아…….”
내내 크게 내쉬지 못했던 숨을 그제야 입 밖으로 토해 낸 희민이 눈썹을 찡그렸다.
‘나밖에 없어서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머릿속이 잔뜩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