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로리 -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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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모르고 있겠지
(미안해요…)
…….
(미안해요… 정현씨… 나… )
…으으윽.
(…하고…싶었는데…)
안돼.
(미안해요……. 미…)
……
……
‘이번 정차하실 곳은 여의나루, 여의나루 역입니다. 내리실 곳은…’
아, 다 왔나.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또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느덧 직장 생활 10년을 넘겼건만 언제나 아침은 힘들다.
힘겹게 지하철 역사를 빠져 나온 내 뿌연 눈망울 사이로, 아침 햇살을 받은 빌딩들이 들어온다.
……
“안녕하십니까.”
“음, 좋은 아침.”
오늘도 그녀는 일찌감치 출근해 있다.
부시시한 나와는 달리, 벌써 업무 모드로 들어가 있는 듯 하다.
“오늘 꽤 춥던데, 너무 얇게 입고 온 것 아냐?”
“아니, 지하철은 오히려 이런 날 굉장히 덥거든요.”
“아, 그런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내게 말을 건네는 이 사람은 나의 직장 상사, 이현희 부장.
요즘 세태가 바뀌긴 했지만, 업계에서 보기 드문 여자 부장이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빈틈없는 업무 능력은 그녀의 출세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놀라운 것은 업무에 대한 그녀의 엄청난 집착이다. 이 건물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열심히 일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 오늘도 가장 먼저 출근했겠지.
보통 일 중독증인 상사 밑에서 일하면 힘든 것이 당연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녀는 이것저것 시키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해내는 스타일이라, 딱히 밑에 떨어지는 업무가 많지는 않다. 업무를 끝냈을 경우 출퇴근 같은 것도 자기 눈치보지 말도록 몇 번이고 다짐해 주어서,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도 부담이 덜한 편이다.
(모두 내 눈치 보고 웹서핑 하면서 괜히 시간 죽이고 있지 말고, 가능하면 제 때 퇴근하세요.)
…이런 면에서 보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괜찮은 상사이다.
3년 가까이 같이 일하면서도, 그녀에게 그다지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김과장, 지난번에 수정하라고 한 B사 관련 보고서는 다 됐어?”
“예, 약간만 손보면 됩니다. 한 시간 정도만 기다려 주시면…”
“서둘 필요는 없고, 점심시간 전까지만 줘. 오늘까지 보내면 되지만, 내가 검토할 시간도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매력은 좀 덜한 편이다. 푸근한 맛이 없다고나 할까. 그녀는 회사 직원들 앞에서 한번도 망가진 적이 없으며, 항상 무표정한 (어떻게 보면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나 경우에 맞게 행동하기에 욕 먹는 일은 없지만, 능력에 비해 인망이 높지 않은 사람이다.
오죽하면 ‘기획3부의 철녀’라는 소문이 붙었을까.
……
보고서 수정 기안은 점심시간 이전에 완성할 수 있었다.
“음, 좋아. 이 정도면 문제 없겠네. 아, 이 파일은 따로 메일로 보내줘.”
“예,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회식 말인데,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어때? 망년회 겸 해서.”
“아니, 저… 전 그 날은 좀…”
“무슨 일 있어?”
“…그 날, 아내 기일이라서요.”
“아… 미안. 깜박했네.”
부장은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더니 안경을 고쳐 쓴다.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미안해한다는 표시다..
“죄송합니다.”
“아니, 안 그래도 힘들다는 사람이 좀 있었어. 김과장까지 빼고 하긴 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뒤로 미뤄 보지 뭐.”
“……예.”
…아내를 잃은 지도 어언 1년이 다 되어 간다.
아내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나와 별거중인 채로 용인의 친정에서 출퇴근하던 그녀는, 출근길에 서울 근교 도로에서 사고를 당했다. 트럭과의 3중 추돌. 몰고 가던 차의 형체가 완전히 변해버릴 정도의 대형사고였고, 그녀는 손쓸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 울먹이는 처제의 전화를 받고, 뒤늦게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절망적인 상태였다. 오열하는 처가 식구들 곁에서, 나는 그녀의 아주 단편적인 몇 마디 말 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들.
그 때는, 그 순간엔 그게 무슨 얘긴지 몰랐다.
……
연말치고는 신기하게도 일이 많이 없어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약속장소는 친구 녀석의 사무실 근처인 명동.
쳇, 바쁜 척 하면서 지 사무실 바로 앞으로 불러내다니. 밥은 네놈이 사는 것이렷다.
롯데백화점 앞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약속시간까지는 10분도 더 남았군.
날도 추운데 잠시 안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웬만하면 인터넷 쇼핑을 해 온 탓에, 백화점은 정말 오랜만이다.
백화점 1층 특유의 알 수 없는 향수와 화장품 내음이 코를 감싼다.
멀리 구두 코너가 눈에 띄었다.
아, 구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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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댁에 선물 하나 챙기는 게 그렇게 힘들어?”
“미안해요, 그만 깜박….”
“내가 지난번에 분명히 얘기했잖아. 어머니 구두라도 한 켤레 사다 부쳐 드리라고.”
“나도 일 있잖아요. 이번에 맡은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아, 관둬 관둬. 아니 아무리 직장 나가도 그렇지. 어떻게 시어머니 생신을 잊고 넘어갈 수가 있어? 내 참….”
“…….”
“그리고, 이제 웬만하면 일 그만하고 쉬지 그래? 어머니 생신도 못 챙기면서 직장 다녀서 뭐 할거야?”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내의 열오른 목소리.
“뭐…?”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러는 당신은 우리 엄마 생신 한 번이라도 챙겨 봤어요? 난 살림도 하면서 직장 다니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당신은 가끔 그릇 씻는 거 말고는 손도 까딱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힘들면 그만두라고…”
“왜 내가 직장 그만둬야 해요? 그리고 지금 내가 관두면 수입이 반으로 주는데, 적금이랑 애한테 들어가는 돈은 누가 대는데요? 응?!”
“아니 이 사람이…”
“직장 관두라고 큰소리 뻥뻥치지만 말고, 생각 좀 해보고 말하란 말이에요!”
“아이씨, 보자보자하니까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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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어른 생신 선물 때문에 일어났던 말다툼.
결혼한 이후 처음 보는 아내의 격한 반항에 그만 마지막엔 손찌검을 하고 말았었다.
뺨을 맞은 아내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나를 바라보다,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갔고, 다음날 귀가해 보니 썰렁한 집엔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간다는 쪽지만이 남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다.
아내에게 손을 올린 것이나, 그 즉시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나…
갑작스레 업무가 바빠졌다는 핑계로 친정에 간 아내를 바로 데려오지 않았던 것들 모두…
모든 것이, 구두 한 켤레에서 시작된 허무한 싸움이었다.
더 허무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제대로 된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구두 매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낯익은 여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현희 부장?
보통 이 시간까지도 그녀는 사무실에 있곤 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백화점인가.
여성용 구두를 이것저것 고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왠지 부드러워 보인다.
크게 다르진 않아도, 사무실에서는 보기 힘든 따뜻한 분위기가 풍긴다. 정말 처음 보는 표정이다.
쇼핑을 하면서 즐거워하다니, 부장도 역시 여자는 여자인가 보다.
재미있군.
아는 척 하기엔 어쩐지 민망할 듯한 분위기여서, 그냥 약속장소로 발길을 돌렸다.
……
어느덧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최근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몸이 좀 무겁다.
1년 전의 기억… 아내의 일을 생각하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잠들기가 무섭기도 하다. 그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게 될까 봐…
1년은 모든 것을 잊기엔 별 거 아닌 시간이다.
시계는 어느덧 6시에 가까워졌다.
“김과장, 오늘 일찍 퇴근 안 해?”
어느 틈엔가 내 곁에 서 있는 이부장이 말을 건다.
퇴근하는 건가. 가방을 메고 있다.
“아니… 별로 약속도 없어서 밀린 일이나 마치고 가려고 합니다.”
“아들 보러 안 내려가?”
아내를 영영 떠나 보낸 뒤, 하나 있는 아들은 부산의 부모님께 맡겼다.
장시간 일하는 월급쟁이가 아무래도 혼자서 애를 키우긴 버거운 일이었고, 믿을 만한 사람을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우울함이 아이에게 전이될 것 같아 두려웠다.
“오늘 밤 막차로 내려갑니다. 기차표를 구해 놓는 걸 깜박해서요.”
“아니, 고속버스도 있고 차로도… 아, 미안.”
“…괜찮습니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다음부터 나는 차를 몰지 않았다.
원래부터 운전을 즐기지도 않았지만, 그 일 이후론 왠지 더욱 도로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저녁 같이 먹을까?”
“네…?”
“약속 없으면 같이 먹자구. 오늘 딸이랑 저녁에 둘이서 만나기로 했거든.”
“아… 아뇨, 됐습니다. 가족 모임에… 근데 바깥분께선 어디 가셨나 보죠?”
“아, 그게 좀… 그렇게 됐어.”
안경을 벗어서 만지작거리는 부장.
“사실은 나, 남편이랑 별거중이야.”
“네? 아…….”
“그래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혼자 지내는 김과장 기분 같은 거.”
“…….”
“신경쓰지 말고 가자구.”
“예…예.”
……
어쩌다 보니 그녀의 차를 타 버렸다.
뭐, 시간도 남는데 저녁 한 끼 얻어먹는 셈 치자.
그녀의 차가 도착한 곳은 남산 H호텔이었다.
로비 한 켠,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예쁘장한 아가씨가 서 있다. 저 아가씨가 부장 딸인가.
“노리야…?”
“…엄마?”
역시 그렇군. 그녀가 반색을 하면서 돌아서다가, 나를 힐끔 본다.
굉장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부장이 나를 소개했다.
“얘, 이 쪽 분은 엄마 회사 동료 김정현씨… 김과장, 이쪽은 내 딸.”
“안녕…? 어유, 여고생이라고 들었는데 아가씨 다 되었네요.”
“뭐 그렇지… 노리야, 인사 드려야지.”
“…….”
부장 딸의 예쁘장한 얼굴이 순간 어두워진다.
먼저 인사를 건넸음에도,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부장을 향한다.
“……엄마.”
“왜…?”
“우리 둘이서만 저녁 먹는 거 아니었어요?”
“아저씨도 일정이 없다고 해서 식사 같이 하기로 한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허 이런. 부장님. 따님한테 전혀 얘기 안 하신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제가 참 입장이 난감하군요.
“뭐 어떠니…?”
“오랜만에 나랑 외출하는 거 아니었어요?”
“…너 자꾸 왜 이러니? 엄마 민망하게.”
“엄마, 설마 저 아저씨랑 만나는 거에요?”
이건 또 무슨 얘긴가.
요즘 소녀들의 머리 속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얘기가 이렇게 진행될 수가 있다지.
“…뭐라고?”
“아저씨, 말해봐요. 우리 엄마랑 사귀어요?”
“아니…저…하하.”
…내 참.
확실히 이부장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미인이고, 능력 있기는 하지만… 사귄다던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나보다 나이가 제법 많은 유부녀가 아닌가. 거기다가… 로맨틱한 상상을 허락할 정도로 빈틈이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맹랑한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옆에 있는 이부장의 안색은 이미 변해 있었다.
“얘…!! 노리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아저씨한테 사과드려라.”
“내가 왜요?”
“얘가 정말…”
“저기, 부장님 괜찮습니다…”
나로선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모처럼 모녀가 식사하게 된 것을 불청객이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 이 상태를 수습하고 싶다.
하지만 어린 아가씨의 날카로운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두 분이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녀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로비에서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 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제가 데려올까요?”
“아니, 괜찮아. …잠시만.”
굳은 표정으로 백에서 전화기를 꺼내는 그녀. 딸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후 말 없이 휴대전화를 접었다.
“… 안 받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김과장, 미안해할 거 없어. 애초에 저녁 먹자고 한 건 난데 뭐.”
“그래도…”
“…….”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지른 셈이 되어 버렸다.
로비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를 배경으로, 잠시 동안 암담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봐요 김정현씨.”
“예?”
부장은 눈을 내리깐 채, 트리 밑부분의 금빛 장식을 만지작거리면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에서, 나보고 저녁 혼자 먹으란 얘기야…?”
“…….”
……
무척이나 우울한 식사였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놓인 음식을 집고 있었다.
“미안해, 졸지에 아줌마랑 엮어지게 만들어서.”
“아이고 무슨 말씀을… 저야 영광이죠. 하하…”
웃으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부장의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습니까? 따님이랑 그렇게 되어서.”
“약간. 그리고 보니 딸애랑 식사해본 지 몇 달쯤 된 것 같은데.”
“몇 달만이란… 말입니까? 아니, 지금 그럼 부장님이 아니라 부군과 같이 지내는 건가요?”
“아니, 나랑 살긴 하는데… 내가 집에 거의 없으니까.”
이런.
“아무리 그래도… 따님하고 요새 좀 안 좋으십니까?”
“딱히 요새 그런 건 아닌데… 그게… 원래 조금 힘들어. 관계가.”
“네?”
“옛날부터 걔랑 얘길 많이 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익숙해지지 않아. 지금까지는 주로 시어머니가 걜 돌봐주셨는데… 돌아가셨지.”
“…….”
“사실 말이지, 오늘도 단 둘이 식사하기가 왠지 어색해서 김과장 데려온 건지도 몰라.”
그런 거였나.
“그래도 좀 많이 예민한 것 같네요. 아무래도 그 나이대가 좀…”
“아직 하이힐도 익숙하지 못한 어린애니까, 내가 달래줘야 되는데… 내 책임이 크지.”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 아이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오래간만의 식사라서 익숙하지 않은 정장을 입고 나온 때문이었겠지.
“아니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난 사실 엄마로서 실격이야.”
“…….”
그녀가 말을 잠시 멈춘 채 가만히 눈을 감으며 안경을 벗어 닦았다.
“…엄마랍시고 딸한테 신경 써준 적도 거의 없는데다, 아빠랑은 별거까지 하고 있으니… 내가 딸이라고 해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야.”
“…….”
“솔직히 딸한테 그다지 관심도 없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예에…”
뭐야, 어떻게 저런 말을 태연하게… 딸한테 관심이 없다니.
확실히 철녀는 다른 것인가. 약간 화가 난다.
“……구두 사다 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괜찮았는데…”
순간, 부장이 흘린 혼잣말에 난 깜짝 놀랐다.
혹시 얼마 전 백화점에서?
그 때 부장은 딸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었던 것인가?
“김과장, 왜 그래?”
“아, 아니요, 혹시 롯데백화점에서 구두 사신 겁니까?”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점쟁이 쳐다보듯 나를 본다.
“아, 그냥요.”
…구두 진열대 앞에서 본 부장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평상시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른, 굉장히 따뜻한 표정.
그 때는 단지 쇼핑을 좋아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딸에게 선물할 생각에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었나.
……
“조심해서 다녀와, 부산.”
“예. 부장님도 따님이랑 잘…”
“뭐, 잘 되겠지. 안 되면 할 수 없고.”
식사를 마치고 나온 호텔 밖엔 어느새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기 부장님…”
왜, 본심을 이야기하지 못한 겁니까…? 딸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게 기쁜 표정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었던 주제에.
사실은 따님이랑 잘 지내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왜…?”
“아,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십시오.”
“김과장도 메리 크리스마스.”
서울역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부장의 호의를 뿌리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도 솔직하지 못한 걸까.
뒷좌석에 몸을 싣고 눈을 감았다.
또다시, 1년 전의 그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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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보…? 정신 들어?! 여보…?! 혜숙아…!”
“저… 정현씨…”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아내가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의료진은 포기한 상태였다.
“여보…흐으…”
“미안…해요….”
“…….”
“미안해요… 정현씨… 나…. 말…하고…싶었는데….”
“뭐, 뭐라고? 혜숙아, 뭐…??!”
“미안해요……. 미….”
안타깝게도, 더 이상 아내는 말이 없었다.
“어, 언니… 언니이…!!! 으흐흑…”
“아이고 혜숙아…! 아이고…”
갑작스레 벌어진 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서, 난 슬프기 이전에 너무나 황당했다.
처제와 장모의 오열을 배경으로 멍하니 선 채로, 나는 아내의 마지막 말을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었다.
…2002년 겨울, 크리스마스까지 며칠 정도를 남겨둔 날의 일이었다.
……
아내가 그렇게 떠나간 이후 며칠간은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뭔가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분명한데,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엔 머리속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건드리면 바스러져 내릴 것 같은 상태로 집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 관리실에서 내 앞으로 온 소포를 건넸다. 사과 한 상자와 편지 한 통.
경비원 아저씨 말로는 24일 아침에 배달되었다고 한다.
흔히 있는 연말 선물이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받아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신발장 옆에 상자를 내려놓으면서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상자 겉에 쓰여진 이름은 정혜숙. 바로 전날 한 줌 재로 변해 버린 아내의 이름이었다.
아내는 아마도 사고를 당하기 전에 이 배달을 맡겼을 것이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편지를 뜯었다.
모르긴 해도,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정현씨에게.
…여보.
나 당신하고 화해하고 싶어졌어요.
뭐, 사실 지금도 그 때 전적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내 쪽에서 사과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모든 것을 떠나서 당신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당신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가 있어요.
난 줄곧 전화하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 망설이다 하지 못했어요.
알잖아요, 우리 집 여자들 솔직하지 못한 거.
그래서 결국 오늘 이 선물을 보냅니다.
내 ‘사과’를 받았다면, 전화 정도는 남자 쪽에서 먼저 해 주는 게 어때요…?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보고 싶어요.
12.24 당신의 아내 혜숙 )
나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 없는 그 편지를 쥐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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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답한 양반. 답답한 여자. 바보 같은…
난 역 구내에서 커피를 마시며, 끊임없이 이부장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아직 열차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다.
문득 직장상사의 집안 일에 분해하고 있는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스포츠신문이나 한 부 사서 생각 없이 읽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절로 화가 난다.
1년 전 내가, 바보 같은 내 아내가 했던 일을 잊을 수 없으니까.
설탕을 넣는 것을 잊었는지, 커피 맛이 유난히 썼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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