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마을 - 4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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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부
어두워진 길가에 희미해진 현우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혜숙은 낮에 집에 들어서는 현우에게서 본능처럼 살기어린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일에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는 있었지만 섬뜩함마저 느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지만 오후 내내 변하지 않는 현우의 행동에서 가슴속 깊이 묻어 둔 알 수 없는 느낌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결국은 조심스레 집을 나서는 현우를 붙잡을 수 있었다.
혜숙은 알고 있다.
어쩌면 화가 난 상태의 현우의 행동은 어떤 사내들 보다도 무섭고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혜숙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현우야………제발…..”
현우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바위처럼 몸을 굳히고는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혜숙의 행동을 느끼며 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분노를 삭이고만 있었고
앙 다무는 이빨로 자신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분노.
평화로움과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 갔음을 알고있는 현우에겐 짐승처럼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용서 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고 무언가를 느끼게 해줄 필요성을 실감했다.
어쩌면 자신과 함께 고통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러했으리라 생각을 했고 되도록이면 혜숙이 모르게 처리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들보다는 월등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의 분노는 현우에게 무모하리 만큼 강한 자극을 주고 있었다.
눈물 짓는 혜숙이 어느새 현우의 앞에 보여지고
자신에게 손을 뻗어 손목을 잡는 순간 그녀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며 현우는 자신 때문에 또 한번의 고통을 겪는 혜숙에게 죄스런 마음이 느껴지고
무모하기도 한 자신의 행동에 긴 한숨을 쉬며
“화가 나서 참을 수 가 없었어요. 어쩌면 저 어린애가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희망 일수도 있는데 ……”
“그래….현우야…하지만 힘만으로 모든걸 해결 할 수는 없단다…..”
“…………..”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다시 예전처럼 좋은 때가 올 때 까지는 인내하면서 기다리자꾸나………”
어쩌면 경륜이 깊은 혜숙이나 상주댁이 더 지혜롭고 현명할 지도 모른다.
현우는 치미는 감정만으로 모든걸 해결하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 받을 수 있었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없을 거란 생각에 탄식 같은 한숨만을 내쉬며 어둠에 동화 된 듯 희미하게 느껴져 간다.
마당 안으로 커다란 봇짐을 진 현우가 보여졌고 몸빼바지 차림의 혜숙과 인화가 가슴에 보퉁이를 안은 채 서성이는 게 보여진다.
다소 원기를 찾은 듯 어린소녀가 혜숙의 바지단을 잡은 채
“아줌마…어디로 갈 거예요..??….”
얼굴에 미소를 지어 올린 혜숙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소녀를 바라보며
“영순아……조금은 힘들지 모르지만….우리 영순이가 거기 가면 굉장히 좋아할 것 같구나..”
“거기가 어디예요……??…..정말 좋아요…??…”
호기심어린 눈망울이 맑게 빛나며 혜숙의 눈속으로 들어온다.
고개를 끄떡이는 혜숙은 현우의 기대처럼 빨리 안 좋은 기억을 잊어 버리고 잘 자라주기만을 생각하며 소녀를 바라다 보았다.
어쩌면 어린 소녀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황량한 도시보다는 나을 것 이라는 생각에 혜숙은 가녀린 숨을 토해낸다.
삐그덕 거리며 대문이 열렸다.
머리에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있는 상주댁이 들어서고 현우가 짐을 받아 가슴에 안아 들었다.
“아이고 …마…쪼매 싼다는 게 한짐이 되 부렀다……인자…해 넘어가기 전에…..얼렁 가거레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말도 말그레이…..마…니가 간다꼬…….. 마구다지로 싸주는 통에 한 짐이 된 거여…..”
숨이 가쁜 듯 숨을 몰아 쉬면서도 현우를 바라보는 상주댁의 눈 속엔 아쉬움과 안도의 빛이 보여진다.
“가믄….할매 말 잘 듣고…..참한 새악시 얻고 꼭 장가 가그레이……”
현우의 손을 어름 쓸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상주댁의 눈가로 눈물이 번져 나온다.
정이 깊은 만큼 이별도 슬펐는지 며칠 사이 활달했던 모습의 상주댁이 눈물로서 정감을 표시하고 문 밖으로 나서는 일행을 계속 따라 나오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짙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회색 빛 도시의 전경을 훑으며 현우와 일행은 천천히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철없는 소녀만이 자신의 신세를 잊은 듯 밝은 웃음을 지은 채 혜숙의 바지단을 꼬옥 잡고는 재잘거리며 걸어가고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한 표정을 지은 인화도 보조를 맞추고는 내리막을 내려 간다.
가끔씩 돌아보는 현우의 시선 속으로 마냥 그 자리에 선 채 손을 흔드는 상주댁만이 보이며 습기어린 눈을 하늘로 돌린 현우가 쓸쓸한 표정으로 맨 끝에서 촘촘히 걸어 나갔다.
도시를 벗어나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가끔씩 도시로 들어가는 일행들이 간간히 보였지만 자신들처럼 도시를 빠져 나가는 이들은 아직까지 볼 수가 없었다.
간혹 도시의 사정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기대가 큰 탓인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서쪽으로 해가 기울며 날이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간간히 보여지는 폐허의 건물이 중간중간 보이기는 했지만 하루 밤을 보낼 정도로 온전한 건물은 없는 듯 보이고 지친 표정의 영순이 아까부터 보채는 행동을 하면서 혜숙이 난처한 표정을 떠 올리기 시작한다.
“아직….멀었어요….??…..”
“으응….조금만 더 가면 쉴 곳이 있을거야…??…”
“아까도 조금이랬는데…..다리 아퍼요…..”
다소 무리인 듯 생각은 했지만 너무도 빨리 피로를 호소하는 영순에게서 현우는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 번 거리기 시작한다.
일찍 자리를 찾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의 감정을 떠올리며 현우는 폐허가 된 건물의 뒤쪽으로 펼쳐진 예전의 논과 밭을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나 쌓아둔 볏짚이라도 있으면 조금의 추위는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잡풀이 우거진 밭 사이로 시선을 모으고는 두루 살피는 행동을 한다.
누렇게 말라가는 풀들만이 보이며 허탈해 질 즈음
“저기 연기가 보이는 것 같애요……..저기요……”
인화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언제부터인가 많지 않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게 보이고
등에 진 짐을 수풀 위로 벗어 논 현우가 풀숲을 헤치고는 연기가 오르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 현우는 남을 믿는데 조심스러워진 것을 느낀다.
어쩌면 모든 게 부족하고 생존을 위해서 작은 것이라도 힘으로 뺏는 상황을 여러 번 본 터라 당연한 귀결인지는 몰라도 우선은 일행을 위해서라도 연기가 오르는 곳을 직접 확인하고서 장소를 정하고 싶었다.
점점 다가 갈수록 연기가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도 불을 끄려고 하는 건지 의아한 생각에 걸음을 빨리 하고는 언덕을 넘었다.
서너 명의 인영이 현우의 시선 속으로 들어오고
일행의 옆으로 한 마리의 소가 달구지를 옆에 두고는 풀을 뜯는 게 보여졌다.
다행히도 가족으로 보이는 것 같았고 저녁을 지어 먹었는지 달구지의 옆에서 그릇을 정리하는 아낙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꽤 들어보였지만 곰방대를 입에 문 장년의 사내가 휴식을 취하다 현우와 눈이 마주치고는 낮선 이를 경계 하 듯 자세를 고쳐 잡고는 현우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디를 찾소…..??….여기는 인가가 없는데……”
다소 거리를 두고는 현우에게 조심 스럽게 말을 건네온다.
“예….하루 밤 쉬어 갈만한 곳을 찾다가 연기가 나길래……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여기는 쉴만한 곳이 못 되는데…..다른 곳을 찾아야 될 것 같소만…….”
장년의 사내도 현우처럼 함부로 남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시기가 어려운 때인 만큼 나무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였고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아직 어린 애가 있어서….이 근방에 쉴 만 곳이 없네요…방해를 했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그럼…”
등을 돌리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현우의 귓가로
“잠깐만 봅시다…..젊은 양반…….”
언덕을 내려가려던 현우가 등을 돌리고 사내를 바라 보았고 사내는 난처한 듯 하면서도
“일행이 많소…..??……”
“아닙니다…..저하고 여자 셋입니다만……..”
“에..헴…..그럼…..좀 불편하더라도 이쪽에서 쉬시는 게 어떨지…..??……..거…뭐냐….요즘..세상이 뒤 숭숭해서……사람 믿기가 좀 그렇수…….”
“아…..예…..”
미소를 짓는 현우는 사내의 말뜻을 이해했다.
어쩌면 자신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을 했다.
현우가 혜숙 등과 언덕을 오르자 사내와 가족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현우의 일행을 바라본다.
장년의 아낙과 앳되 보이는 처녀 그리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소년이 일행의 시선속으로 들어왔다.
달구지를 몰고서 이주를 하는 것인지 살림도구가 달구지를 채운 채 실려 있었고 잠자리를 준비한 듯 달구지 옆으로 바닥에 깔린 이불이 보이기도 했다.
현우가 고개를 숙이며
“쉬시는데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허….길 가다가 만난 사람들인데 폐라니요…..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길이슈….??…”
“예…경상도로 가는 길입니다만…..”
장년의 사내가 습관처럼 곰방대를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떡이고 다가선 장년의 아낙이
“아유….먼길 갈 사람들이구먼…….어여….자리를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소만……”
“예…그럼……”
언덕빼기의 나무 밑으로 다가간 현우가 평평하게 고른 곳에 자리를 잡고는 짐을 벗어내고
혜숙과 인화도 서두르는 듯 봇짐을 내리고는 자리에 앉는다.
쓰다 남은 마른 나무와 커다란 질그릇의 물동이를 가지고 온 장년의 아낙이 준비 없이 자리만 잡은 혜숙에게 다가가 호의를 베풀고 선의적인 그들의 행동에 조금씩 마음을 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어두워지는 노을속에 나무주위로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녁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어느새 영순이 혜숙의 품에서 잠들어 버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의 곁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내는 가족들과 달구지 옆의 자리로 돌아가고는 잠을 자기 시작했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른해지는 기운에 현우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아 내리고 혜숙도 피곤한지
자세를 웅크리고는 영순을 껴안고는 잠을 자는 듯 보여졌다.
싸늘한 기운이 모닥불 주위를 맴돌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를 못했다.
눈을 감은 현우는 도시를 떠나면서부터 느껴지는 시원 스런 감정에 한편으로는 설레이는 감정마저도 들기 시작함을 느꼈다.
아마도 초록동으로의 귀향에 편안함을 느꼈다고 생각하며 그 동안의 안좋았던 기억들을 하나씩 정리하고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마 마을로 돌아가면 할머니인 영주댁의 성화에 장가도 가야 할 것 같은 예감과 마을을 위해서 편하지 만은 아니한 생활에 쓴웃음도 났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문뜩 자신을 기다릴 윤지를 생각했다.
아마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윤지도 볼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지만 앞으로는 만나기 조차 더 어려워 지지 않을지 걱정도 되었다.
어수선한 세상과는 다르게 마을에서는 어느 정도의 안락함과 수고한 만큼의 대가가 반드시 있었고 배곪음이 없이 그런대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어느 정도의 위안으로 생각되었다.
끼룩…끼룩….끼룩….끼룩…
먼 하늘로 기러기떼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일깨우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을 향해 가지런한 모습의 대오를 지어 날아가며 현우의 상념을 깨워가고 잠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틀던 혜숙이 자리를 비집고 일어나 앉으며 현우를 바라본다.
“잠이 안오니…??…..”
가늘게 떴던 눈이 뜨이며 현우는 상체를 세우고 모닥불의 옆으로 다가 앉고는 마른 나뭇가지를 불속으로 던져 넣으며
“……자리가 불편한지….잠이 안오네요……”
“내일부터는 더 힘들텐데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려므나…….”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 현우를 혜숙은 한 동안 바라보았다.
실타레처럼 풀렸던 끈이 다시 제자리로 감겨지는 것처럼 초록동으로의 귀향은 한도 끝도 없는 인연의 고리를 중심으로 현우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 같이 생각이 되었다.
마음 한구석에 싸하게 느껴지는 설레임이 자신을 감싸기 시작하면서 희열의 감정을 느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습관처럼 현우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기면서 혜숙은 석상처럼 자리에 앉은 현우만을 바라보며 머리속으로 피어 오르는 희디 힌 별무리를 느껴갔다.
현우는 자신을 향한 혜숙의 마음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귀향 길의 여정을 누구보다도 반기는 눈치였고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생활도 못내 부담스러웠을 거란 생각에 눈을 들어 혜숙을 마주 보았다.
혜숙의 눈 속엔 어느새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한 느낌이 있었다.
푸르름과 풍요로움이 흐르고 아기자기한 정감이 편안하게 다가오며 상기된 듯한 모습이 시선 속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혜숙은 충동적인 현우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끝내 봇물처럼 터지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머리 속을 지배하며 이제는 습관처럼 그의 손에 자신이 잠식 될 거라는 생각이 강해지며 점점 강해지는 현우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숙여갔다.
처음과 끝의 느낌을 혜숙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현우의 열정은 자신을 충분히 충족 시켰고 당연하다는 듯 현우의 행동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약처럼 자신을 불안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조금씩 깎아 내린 그믐 달이 스산하게 흐려졌다.
풀숲의 흔들림 사이로 나란히 누운 희미한 인영이 보여지며 누렇게 변해가는 마른 잎들이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추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결한 느낌의 희고 반듯한 이마에 땀이 진득하게 배어나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열기 묻은 단내가 풍겨 나왔다.
열기가 지나간 자리엔 흐트러진 모습의 혜숙이 눈을 감은 채 숨 가다듬기를 하며 수풀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이 보이고
현우는 가슴에 안겨있는 혜숙에게서 익숙하게 느껴지는 들꽃 내음에 아늑해지는 기분에 젖어 들었다.
숨가쁘고 격하게 이루어진 정사 뒤의 나른함은 편안하고도 안락함을 전해주며 정다움이 새록새록 다시금 솟아나게 했다.
오랜만에 가지는 은밀함은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고
수많은 불꽃이 수천 수만의 불티로 쪼개지며 자신을 태워버리고 사그라지는 느낌에 혜숙은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는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상황을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오랜만에 정사는 현우와 혜숙에게 소원해졌던 열정을 가져다 주었다.
예전처럼 자신을 원하며 자신을 이끌던 현우의 손을 혜숙은 뿌리 칠 수 없었고
어차피 현우의 의도대로 관계를 나누었지만 한편으론 혜숙 역시 그 순간을 기다렸으며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이제는 혜숙의 가슴속엔 현우의 모든 게 깊은 각인을 남기고 새겨져 있었다.
현우에 의해 가슴 졸이던 시간들과 함께 나누던 고통들이 주마등 처럼 뇌리를 스치며 이제는 그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숙명처럼 그를 받아 들이기로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다.
혜숙을 보듬고 있던 현우의 손이 상의를 들추고 혜숙의 맨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구석구석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세심하게 어름 쓸어 간다.
어깨와 등을 오르내리던 손이 이미 풀려진 가슴 가리개를 들추고는 주저함 없이 맨살을 잡아가고 꺼져가던 화톳불에 불이 번지듯 혜숙의 몸속으로 전율스런 쾌감이 번져 오르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감정도 반복이 되면 옅어지는지 혜숙은 터져나오는 신음소리와 함께 현우의 목으로 손을 감으며 서서히 열기가 오름을 느껴갔다.
다리 중심의 수풀로 커다란 현우의 손이 거침없이 들어오고는 예민해진 감각을 일깨우며
그녀를 달구어 가고 혜숙은 다리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들어오며 양파 껍질을 벗기듯 알몸이 되어갔다.
어두워진 길가에 희미해진 현우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혜숙은 낮에 집에 들어서는 현우에게서 본능처럼 살기어린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일에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는 있었지만 섬뜩함마저 느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지만 오후 내내 변하지 않는 현우의 행동에서 가슴속 깊이 묻어 둔 알 수 없는 느낌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결국은 조심스레 집을 나서는 현우를 붙잡을 수 있었다.
혜숙은 알고 있다.
어쩌면 화가 난 상태의 현우의 행동은 어떤 사내들 보다도 무섭고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혜숙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현우야………제발…..”
현우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바위처럼 몸을 굳히고는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혜숙의 행동을 느끼며 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분노를 삭이고만 있었고
앙 다무는 이빨로 자신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분노.
평화로움과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 갔음을 알고있는 현우에겐 짐승처럼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용서 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고 무언가를 느끼게 해줄 필요성을 실감했다.
어쩌면 자신과 함께 고통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러했으리라 생각을 했고 되도록이면 혜숙이 모르게 처리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들보다는 월등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의 분노는 현우에게 무모하리 만큼 강한 자극을 주고 있었다.
눈물 짓는 혜숙이 어느새 현우의 앞에 보여지고
자신에게 손을 뻗어 손목을 잡는 순간 그녀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며 현우는 자신 때문에 또 한번의 고통을 겪는 혜숙에게 죄스런 마음이 느껴지고
무모하기도 한 자신의 행동에 긴 한숨을 쉬며
“화가 나서 참을 수 가 없었어요. 어쩌면 저 어린애가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희망 일수도 있는데 ……”
“그래….현우야…하지만 힘만으로 모든걸 해결 할 수는 없단다…..”
“…………..”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다시 예전처럼 좋은 때가 올 때 까지는 인내하면서 기다리자꾸나………”
어쩌면 경륜이 깊은 혜숙이나 상주댁이 더 지혜롭고 현명할 지도 모른다.
현우는 치미는 감정만으로 모든걸 해결하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 받을 수 있었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없을 거란 생각에 탄식 같은 한숨만을 내쉬며 어둠에 동화 된 듯 희미하게 느껴져 간다.
마당 안으로 커다란 봇짐을 진 현우가 보여졌고 몸빼바지 차림의 혜숙과 인화가 가슴에 보퉁이를 안은 채 서성이는 게 보여진다.
다소 원기를 찾은 듯 어린소녀가 혜숙의 바지단을 잡은 채
“아줌마…어디로 갈 거예요..??….”
얼굴에 미소를 지어 올린 혜숙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소녀를 바라보며
“영순아……조금은 힘들지 모르지만….우리 영순이가 거기 가면 굉장히 좋아할 것 같구나..”
“거기가 어디예요……??…..정말 좋아요…??…”
호기심어린 눈망울이 맑게 빛나며 혜숙의 눈속으로 들어온다.
고개를 끄떡이는 혜숙은 현우의 기대처럼 빨리 안 좋은 기억을 잊어 버리고 잘 자라주기만을 생각하며 소녀를 바라다 보았다.
어쩌면 어린 소녀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황량한 도시보다는 나을 것 이라는 생각에 혜숙은 가녀린 숨을 토해낸다.
삐그덕 거리며 대문이 열렸다.
머리에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있는 상주댁이 들어서고 현우가 짐을 받아 가슴에 안아 들었다.
“아이고 …마…쪼매 싼다는 게 한짐이 되 부렀다……인자…해 넘어가기 전에…..얼렁 가거레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말도 말그레이…..마…니가 간다꼬…….. 마구다지로 싸주는 통에 한 짐이 된 거여…..”
숨이 가쁜 듯 숨을 몰아 쉬면서도 현우를 바라보는 상주댁의 눈 속엔 아쉬움과 안도의 빛이 보여진다.
“가믄….할매 말 잘 듣고…..참한 새악시 얻고 꼭 장가 가그레이……”
현우의 손을 어름 쓸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상주댁의 눈가로 눈물이 번져 나온다.
정이 깊은 만큼 이별도 슬펐는지 며칠 사이 활달했던 모습의 상주댁이 눈물로서 정감을 표시하고 문 밖으로 나서는 일행을 계속 따라 나오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짙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회색 빛 도시의 전경을 훑으며 현우와 일행은 천천히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철없는 소녀만이 자신의 신세를 잊은 듯 밝은 웃음을 지은 채 혜숙의 바지단을 꼬옥 잡고는 재잘거리며 걸어가고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한 표정을 지은 인화도 보조를 맞추고는 내리막을 내려 간다.
가끔씩 돌아보는 현우의 시선 속으로 마냥 그 자리에 선 채 손을 흔드는 상주댁만이 보이며 습기어린 눈을 하늘로 돌린 현우가 쓸쓸한 표정으로 맨 끝에서 촘촘히 걸어 나갔다.
도시를 벗어나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가끔씩 도시로 들어가는 일행들이 간간히 보였지만 자신들처럼 도시를 빠져 나가는 이들은 아직까지 볼 수가 없었다.
간혹 도시의 사정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기대가 큰 탓인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서쪽으로 해가 기울며 날이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간간히 보여지는 폐허의 건물이 중간중간 보이기는 했지만 하루 밤을 보낼 정도로 온전한 건물은 없는 듯 보이고 지친 표정의 영순이 아까부터 보채는 행동을 하면서 혜숙이 난처한 표정을 떠 올리기 시작한다.
“아직….멀었어요….??…..”
“으응….조금만 더 가면 쉴 곳이 있을거야…??…”
“아까도 조금이랬는데…..다리 아퍼요…..”
다소 무리인 듯 생각은 했지만 너무도 빨리 피로를 호소하는 영순에게서 현우는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 번 거리기 시작한다.
일찍 자리를 찾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의 감정을 떠올리며 현우는 폐허가 된 건물의 뒤쪽으로 펼쳐진 예전의 논과 밭을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나 쌓아둔 볏짚이라도 있으면 조금의 추위는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잡풀이 우거진 밭 사이로 시선을 모으고는 두루 살피는 행동을 한다.
누렇게 말라가는 풀들만이 보이며 허탈해 질 즈음
“저기 연기가 보이는 것 같애요……..저기요……”
인화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언제부터인가 많지 않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게 보이고
등에 진 짐을 수풀 위로 벗어 논 현우가 풀숲을 헤치고는 연기가 오르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 현우는 남을 믿는데 조심스러워진 것을 느낀다.
어쩌면 모든 게 부족하고 생존을 위해서 작은 것이라도 힘으로 뺏는 상황을 여러 번 본 터라 당연한 귀결인지는 몰라도 우선은 일행을 위해서라도 연기가 오르는 곳을 직접 확인하고서 장소를 정하고 싶었다.
점점 다가 갈수록 연기가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도 불을 끄려고 하는 건지 의아한 생각에 걸음을 빨리 하고는 언덕을 넘었다.
서너 명의 인영이 현우의 시선 속으로 들어오고
일행의 옆으로 한 마리의 소가 달구지를 옆에 두고는 풀을 뜯는 게 보여졌다.
다행히도 가족으로 보이는 것 같았고 저녁을 지어 먹었는지 달구지의 옆에서 그릇을 정리하는 아낙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꽤 들어보였지만 곰방대를 입에 문 장년의 사내가 휴식을 취하다 현우와 눈이 마주치고는 낮선 이를 경계 하 듯 자세를 고쳐 잡고는 현우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디를 찾소…..??….여기는 인가가 없는데……”
다소 거리를 두고는 현우에게 조심 스럽게 말을 건네온다.
“예….하루 밤 쉬어 갈만한 곳을 찾다가 연기가 나길래……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여기는 쉴만한 곳이 못 되는데…..다른 곳을 찾아야 될 것 같소만…….”
장년의 사내도 현우처럼 함부로 남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시기가 어려운 때인 만큼 나무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였고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아직 어린 애가 있어서….이 근방에 쉴 만 곳이 없네요…방해를 했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그럼…”
등을 돌리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현우의 귓가로
“잠깐만 봅시다…..젊은 양반…….”
언덕을 내려가려던 현우가 등을 돌리고 사내를 바라 보았고 사내는 난처한 듯 하면서도
“일행이 많소…..??……”
“아닙니다…..저하고 여자 셋입니다만……..”
“에..헴…..그럼…..좀 불편하더라도 이쪽에서 쉬시는 게 어떨지…..??……..거…뭐냐….요즘..세상이 뒤 숭숭해서……사람 믿기가 좀 그렇수…….”
“아…..예…..”
미소를 짓는 현우는 사내의 말뜻을 이해했다.
어쩌면 자신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을 했다.
현우가 혜숙 등과 언덕을 오르자 사내와 가족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현우의 일행을 바라본다.
장년의 아낙과 앳되 보이는 처녀 그리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소년이 일행의 시선속으로 들어왔다.
달구지를 몰고서 이주를 하는 것인지 살림도구가 달구지를 채운 채 실려 있었고 잠자리를 준비한 듯 달구지 옆으로 바닥에 깔린 이불이 보이기도 했다.
현우가 고개를 숙이며
“쉬시는데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허….길 가다가 만난 사람들인데 폐라니요…..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길이슈….??…”
“예…경상도로 가는 길입니다만…..”
장년의 사내가 습관처럼 곰방대를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떡이고 다가선 장년의 아낙이
“아유….먼길 갈 사람들이구먼…….어여….자리를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소만……”
“예…그럼……”
언덕빼기의 나무 밑으로 다가간 현우가 평평하게 고른 곳에 자리를 잡고는 짐을 벗어내고
혜숙과 인화도 서두르는 듯 봇짐을 내리고는 자리에 앉는다.
쓰다 남은 마른 나무와 커다란 질그릇의 물동이를 가지고 온 장년의 아낙이 준비 없이 자리만 잡은 혜숙에게 다가가 호의를 베풀고 선의적인 그들의 행동에 조금씩 마음을 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어두워지는 노을속에 나무주위로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녁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어느새 영순이 혜숙의 품에서 잠들어 버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의 곁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내는 가족들과 달구지 옆의 자리로 돌아가고는 잠을 자기 시작했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른해지는 기운에 현우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아 내리고 혜숙도 피곤한지
자세를 웅크리고는 영순을 껴안고는 잠을 자는 듯 보여졌다.
싸늘한 기운이 모닥불 주위를 맴돌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를 못했다.
눈을 감은 현우는 도시를 떠나면서부터 느껴지는 시원 스런 감정에 한편으로는 설레이는 감정마저도 들기 시작함을 느꼈다.
아마도 초록동으로의 귀향에 편안함을 느꼈다고 생각하며 그 동안의 안좋았던 기억들을 하나씩 정리하고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마 마을로 돌아가면 할머니인 영주댁의 성화에 장가도 가야 할 것 같은 예감과 마을을 위해서 편하지 만은 아니한 생활에 쓴웃음도 났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문뜩 자신을 기다릴 윤지를 생각했다.
아마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윤지도 볼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지만 앞으로는 만나기 조차 더 어려워 지지 않을지 걱정도 되었다.
어수선한 세상과는 다르게 마을에서는 어느 정도의 안락함과 수고한 만큼의 대가가 반드시 있었고 배곪음이 없이 그런대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어느 정도의 위안으로 생각되었다.
끼룩…끼룩….끼룩….끼룩…
먼 하늘로 기러기떼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일깨우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을 향해 가지런한 모습의 대오를 지어 날아가며 현우의 상념을 깨워가고 잠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틀던 혜숙이 자리를 비집고 일어나 앉으며 현우를 바라본다.
“잠이 안오니…??…..”
가늘게 떴던 눈이 뜨이며 현우는 상체를 세우고 모닥불의 옆으로 다가 앉고는 마른 나뭇가지를 불속으로 던져 넣으며
“……자리가 불편한지….잠이 안오네요……”
“내일부터는 더 힘들텐데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려므나…….”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 현우를 혜숙은 한 동안 바라보았다.
실타레처럼 풀렸던 끈이 다시 제자리로 감겨지는 것처럼 초록동으로의 귀향은 한도 끝도 없는 인연의 고리를 중심으로 현우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 같이 생각이 되었다.
마음 한구석에 싸하게 느껴지는 설레임이 자신을 감싸기 시작하면서 희열의 감정을 느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습관처럼 현우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기면서 혜숙은 석상처럼 자리에 앉은 현우만을 바라보며 머리속으로 피어 오르는 희디 힌 별무리를 느껴갔다.
현우는 자신을 향한 혜숙의 마음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귀향 길의 여정을 누구보다도 반기는 눈치였고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생활도 못내 부담스러웠을 거란 생각에 눈을 들어 혜숙을 마주 보았다.
혜숙의 눈 속엔 어느새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한 느낌이 있었다.
푸르름과 풍요로움이 흐르고 아기자기한 정감이 편안하게 다가오며 상기된 듯한 모습이 시선 속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혜숙은 충동적인 현우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끝내 봇물처럼 터지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머리 속을 지배하며 이제는 습관처럼 그의 손에 자신이 잠식 될 거라는 생각이 강해지며 점점 강해지는 현우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숙여갔다.
처음과 끝의 느낌을 혜숙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현우의 열정은 자신을 충분히 충족 시켰고 당연하다는 듯 현우의 행동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약처럼 자신을 불안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조금씩 깎아 내린 그믐 달이 스산하게 흐려졌다.
풀숲의 흔들림 사이로 나란히 누운 희미한 인영이 보여지며 누렇게 변해가는 마른 잎들이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추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결한 느낌의 희고 반듯한 이마에 땀이 진득하게 배어나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열기 묻은 단내가 풍겨 나왔다.
열기가 지나간 자리엔 흐트러진 모습의 혜숙이 눈을 감은 채 숨 가다듬기를 하며 수풀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이 보이고
현우는 가슴에 안겨있는 혜숙에게서 익숙하게 느껴지는 들꽃 내음에 아늑해지는 기분에 젖어 들었다.
숨가쁘고 격하게 이루어진 정사 뒤의 나른함은 편안하고도 안락함을 전해주며 정다움이 새록새록 다시금 솟아나게 했다.
오랜만에 가지는 은밀함은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고
수많은 불꽃이 수천 수만의 불티로 쪼개지며 자신을 태워버리고 사그라지는 느낌에 혜숙은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는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상황을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오랜만에 정사는 현우와 혜숙에게 소원해졌던 열정을 가져다 주었다.
예전처럼 자신을 원하며 자신을 이끌던 현우의 손을 혜숙은 뿌리 칠 수 없었고
어차피 현우의 의도대로 관계를 나누었지만 한편으론 혜숙 역시 그 순간을 기다렸으며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이제는 혜숙의 가슴속엔 현우의 모든 게 깊은 각인을 남기고 새겨져 있었다.
현우에 의해 가슴 졸이던 시간들과 함께 나누던 고통들이 주마등 처럼 뇌리를 스치며 이제는 그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숙명처럼 그를 받아 들이기로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다.
혜숙을 보듬고 있던 현우의 손이 상의를 들추고 혜숙의 맨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구석구석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세심하게 어름 쓸어 간다.
어깨와 등을 오르내리던 손이 이미 풀려진 가슴 가리개를 들추고는 주저함 없이 맨살을 잡아가고 꺼져가던 화톳불에 불이 번지듯 혜숙의 몸속으로 전율스런 쾌감이 번져 오르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감정도 반복이 되면 옅어지는지 혜숙은 터져나오는 신음소리와 함께 현우의 목으로 손을 감으며 서서히 열기가 오름을 느껴갔다.
다리 중심의 수풀로 커다란 현우의 손이 거침없이 들어오고는 예민해진 감각을 일깨우며
그녀를 달구어 가고 혜숙은 다리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들어오며 양파 껍질을 벗기듯 알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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