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위 포식자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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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입
[입양 무효 소송.]
영주가 다시 한번 서류의 이름을 확인했다.
올 것이 왔다.
설이현이 기어이 제게 소송을 걸어왔다.
물론 설이현과 법정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변호사들과 법정에서 다루어질 사안이지만, 이건 원래 영주도 바랐던 것이다.
입양을 통한 호적 따위, 찢어 버리고 싶은 것이 진심이다.
이미 영주에게는 [설 회장의 혼외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사진을 끈질기게 찍던 기자들은 기어이 그런 제목으로 기사를 올렸고 어느새 영주는 설 회장의 혼외자식이 되어 버렸다.
자극적인 제목이 붙은 일간지에도 실렸다.
그런데 이제 입양 무효 소송이 시작되면 기자들에게 더 시달리지 않을까.
‘이판사판이라는 거네.’
어차피 이 소송은 자신이 지게 되어 있다.
져도 상관없는 소송이기도 하다.
아니, 지면 좋은 소송이다.
이 빌어먹을 입양이 무효가 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며칠 동안은 적어도 이 입양이 효력을 가져야 한다.
“하아…….”
서류를 가방 안에 집어넣은 영주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차는 조용히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뒤에서 차고의 셔터가 내려왔다.
이런 식으로 들어와야 기자들의 카메라를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런 배려를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설주원이다.
그 설주원.
“내려.”
주원이 차 문을 열어 주자 영주가 가방을 메고 차에서 내렸다.
이 집에 다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집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하나다.
“집이 조용하지? 전부 쫓겨났거든.”
앞서 걷던 주원이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쫓겨나기 전에 자기 발로 나간다며 짐 싸서 나갔고 이제 나만 남았어. 아니다. 너와 나만 남았네.”
다른 혼외자식들이 전부 나간 집에 영주가 들어온 이유는 엄마 때문이다.
설주원이 이 인간이 기어이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갤러리, 빌라, 그리고 갤러리 안의 그 작품들 전부 여사님 소유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엄마는 당연히 넘어갔다.
갤러리 안의 작품들의 가치는 빌라나 빌딩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걸 전부 주겠다는 말에 엄마는 앞뒤 가리지 않고 영주를 닦달해 댔었다.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되는데, 그걸 못해?]
못한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결국에 엄마가 병원에 실려 가는 걸 보고 난 후에는 영주도 두 손을 들었다.
엄마는 영주를 너무 잘 알았고, 영주 역시 엄마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엄마는 한번 마음먹으면 포기를 모르고, 영주는 엄마의 고집을 꺾은 적이 없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물론 설주원이다.
“죽을상 짓지 마. 누가 진짜 하래? 그냥 그림만 나오게 하면 돼. 그림만.”
말이 쉽다.
그림만? 그게 그렇게 쉬운 짓이면 직접 하지 왜 자신을 끌어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설이현 그놈은 무슨 짓을 해도 통하지 않는 놈이야.”
앞서 걷는 주원이 잘도 나불거린다고 영주가 생각했다.
솔직히 주원에 대한 영주의 느낌을 말하자면 입만 살아 있는 욕심 가득한 멍청이다.
명색이 SC건설의 사장이라는 자가, 물론 머잖아 그 자리를 내놓고 내려와야 하겠지만 하여튼 사장이라는 자가 하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꾸미는 짓을 보면 그냥 시정잡배나 다를 바 없다.
물론 그건 설이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도 영주는 설이현이 제게 했던 말과 행동을 잊지 못한다.
[다리 벌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 가슴까지 만졌었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일도 있었다.
다리를 벌리라는 말이나 그림을 찢은 것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겼지만 실은 그날, 설이현의 손이 내 가슴 중앙을 꾹 찍었던 것이 사실이다.
‘피가 그런가?’
설주원을 보고 있으면 이건 설 회장의 피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설주원도 정상이 아니고 설이현도 정상이 아니다.
둘 다 다른 의미로 미쳤다.
설주원은 탐욕스럽게 미쳤고 설이현은 오만하게 미쳤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둘 다 개새끼라는 거지.’
사람에게 굳이 강아지의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지만 저 배다른 설씨 형제들은 그냥 개다.
“그런 놈을 협박하려면 치명적인 스캔들이 가장 효과적이지.”
영주의 입술이 아주 작게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이다.
‘그렇게 치명적인 스캔들이 효과가 좋으면 아예 자기가 설이현을 덮쳐서 배다른 형제끼리 실은 동성 연인이었다 라는 개막장극을 찍지 날 왜 끌어들이고 난리야?’
설주원이 그리고 있는 계획은 저급하고 유치하다.
이 집에 굳이 들어오게 한 것 역시 그 저급하고 유치한 계획 때문이다.
[속옷만 입고 이현이 그놈과 침대에 같이 있는 사진 한 장이면 돼.
둘 다 전부 벗고 있으면 그보다 좋은 건 없고.
끝내주잖아? 배다른 여동생과 금단의 관계.
배덕한 관계.
그런 더러운 스캔들이 터지면 그룹 총수 얼굴에 아주 똥칠을 하는 거지.
게다가 아버지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는 타이틀까지 붙으면 말이야.]
어떻게 그런 더러운 계획을 생각해 내는 걸까?
저 머릿속이 궁금하다.
쓰레기를 생산해 내는 쓰레기 공장이 저 머리 안에 있는 걸까.
[물론 진짜 공개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너도 곤란하잖아?
그 사진으로 이현이 그놈을 협박만 할 거야.
내 몫을 내놓지 않으면 나도 이판사판으로 판을 다 깰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가 못 가지면 판을 다 깨 버리겠다는 개 같은 이기심이다.
그 더러운 계획에 영주 자신이 도구로 사용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내 몫을 챙길 수밖에.’
죽는다고 난리를 친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주원의 이 미친 막장극에 동참은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빈손으로 나올 수는 없다.
챙길 건 다 챙겨야 더 억울하지 않겠는가.
“오래 끌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오늘 밤에 할 거야.”
설주원이 서두르는 이유를 영주도 안다.
자신이 이 집에 들어온 것을 알면 설이현은 바로 내쫓을 것이다.
내쫓기면, 그냥 계획은 끝이다.
그러니까 설이현이 눈치채기 전에 속전속결로 해치워 버리자는 생각이다.
‘진짜 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사진만 찍으면 끝인데 뭐.’
진짜 같이 자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처럼 보이게 사진만 찍으면 된다.
어렵지 않다.
‘빨리 끝내고 인연을 끊고 살아야지.’
이 일을 끝내고, 입양 무효 소송까지 끝나고 나면 엄마에게 그토록 원하던 갤러리의 작품들을 전부 안겨 준 다음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생각이다.
그 정도면 엄마에게 넘치도록 효도를 하는 셈이다.
일생의 효도를 이 한 번으로 다 한다 생각하고 전부 다 쏟아부어서 끝낸 다음에 이젠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할 거다.
엄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방의 한 갤러리에 이력서를 보낸 상황이다.
채용한다는 답장이 오면 정말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거다.
“약은 내가 먹일 거니까 너는 네 할 일만 생각해.”
약.
정말 치사한 방법이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은 영주도 동의한다.
자신이 옷 벗고 덤빈다고 설이현이 꿈쩍이나 하겠는가.
강제로 질질 끌려 나오기밖에 더하겠는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도 없을뿐더러, 운 좋게 사진을 찍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빼앗길 거다.
그래서 결국은 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약을 먹여서 설이현을 재우고 자신이 잠든 설이현을 덮치는 정말 치사하고 끔찍한 계획이다.
2층의 전망 좋은 예전의 자신의 방(하루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으로 들어선 영주가 곧장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베개로 머리를 누르며 소리 없는 고함을 질러댔다.
실컷 쏟아 내야 이 최악의 기분이 조금 풀릴 것 같아서였다.
***
“저게 왜 이 집에 있지?”
영주를 발견한 순간 이현이 꺼낸 첫마디였다.
이현은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중이었고 영주는 2층에서 내려가던 중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딱 마주쳤다.
[저게]라는 단어가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차린 영주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욕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설이현은.
“야, 너.”
이현이 영주를 향해 손가락을 구부렸다.
내려오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를 보는 순간 영주는 내려갈 생각이 싹 사라졌다.
맨 정신의 설이현과 부딪치고 싶지 않다.
이미 그가 맹금류의 포식자라는 사실은 지난번에 충분히 확인했다.
다시 그 무서운 경험을 하고 싶진 않다.
“당장 안 내려와?”
무섭지만, 내려갈 수는 없다.
영주가 빙글 돌아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란다고 내려가면 험한 꼴밖에 더 당하겠는가.
그때는 설 회장이 [잘 지내라]고까지 했는데도 그런 짓을 당했었다.
설 회장도 죽은 마당에 일종의 무단 침입 비슷한 짓을 한 자신이다.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르고 말려 줄 사람도 없다.
물론 있으나 마나 하지만 그땐 이 집 안에 다른 혼외자식들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마저도 없다.
진짜 설이현이 자신을 죽여서 내다 버려도 모른다.
“한영주. 당장 내려와.”
뒤에서 자신을 불러도 영주가 내빼듯이 방으로 도망쳐 왔다.
문을 닫고 불안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문득 조금 전 이현이 저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영주라고 불렀네.’
설영주가 아니라 한영주라고 불렀다.
영주는 설영주라고 불리는 게 싫다.
그냥 한영주가 좋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한영주. 그게 더 좋다.
설 회장의 입양자 설영주보다는 말이다.
‘오늘 안에 진짜 끝내고 나가야 하는데… 내가 여길 왜 또 들어와서…….’
지금 당장이라도 뒤에서 문을 부수고 설이현이 들어올 것만 같아서 영주가 꽉 잡은 문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경찰을 불러야 하나?
물론 설주원이 도와줄 것 같지는 않다.
“…….”
1분, 5분이 지나도 설이현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진 않았다.
그래도 영주가 문고리에서 손을 뗀 것은 10분이 지난 후였다.
“저녁도 못 먹겠네.”
영주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것은 저녁 식사 때문이었다.
벌써 7시다.
누가 차려 주는 음식을 기대한 것은 아니고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라면이나 끓여 먹을 생각으로 라면 한 봉을 손에 들고 내려가다 그런 일을 당했다.
“컵라면으로 가져올 걸…….”
침대에 앉아 영주가 때늦은 후회를 했다.
“설주원은 도시락이라도 사 오던가. 사람을 이용하기만 하고 배려할 줄은 모르네.”
이기적인 인간이다, 설주원은.
“생라면이라도 뜯어 먹어야 하나?”
배는 고프고 손에는 라면이 있다.
그러나 영주는 생각만 할 뿐 진짜 그러지는 않았다.
“계속 아래층에 있진 않겠지. 10시 정도에는 먹을 수 있겠지.”
결국 라면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영주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저건…….”
몇 시간 전에 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없었다가 지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때는 발견하지 못하고 지금 발견한 것이다.
침대 머리맡의 벽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전에 이 집에 왔을 때는 텅 비어 있던 벽이었다.
“실레의 그림이다…….”
에곤 실레의 [빨래가 널린 집들]이다.
그때 설이현이 찢었던 그림.
모작이지만 정말 잘 그렸던 그림이, 그 똑같은 것이 지금 제 머리맡에 걸려 있다.
“저걸 왜 여기에 걸어 놓은 거지?”
자신이 이 집을 나갔던 사이에 이 방을 다른 사람이 사용한 걸까?
그럴 리는 없다.
방이 수도 없이 많은 이 집에서 누가 굳이 이 방을 사용했겠는가.
이 방은 그냥 빈방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그림은 누가 여기에 걸어 놓은 걸까.
‘역시… 좋은 그림이야…….’
누가 걸어 놓았건 간에, 보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림이다.
라면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로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영주가 살짝 웃었다.
그림이 좋은 건 감정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가슴에 품고 있는 쓸쓸한 감정,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감정, 무언가를 동경하는 감정, 분출할 곳 없는 분노와 넘쳐흐르는 슬픔. 그렇게 가슴에 꾹꾹 눌러 놓았던 감정들은 그림을 대하는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중에서도 저 그림은 동경을 이끌어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늑하고 평범한 가족을 꿈꾸는 이들의 가슴에 숨겨 놓은 동경, 혹은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리움을 끌어내는 그림이다.
아무렇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빨래가 널려 있고 집집마다 따뜻한 불이 켜져 있고, 그 불 켜진 창문 너머에 일을 마친 가족들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그림이다.
언젠가는 모작이 아니라 진짜 작품을 보고 싶지만 경매에서 팔린 작품은 구매자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아마 저 그림의 진품을 볼 일은 없을 거다.
가슴에 품은 라면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설이현은 저 그림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는 저런 풍경의 그림을 보며 어떤 감정을 떠올릴까.
‘돈? 가치? 재테크? 비자금?’
풍경이나 그리움이나 아늑함이나 그런 것을 느끼기보다는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값어치,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비자금, 그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그림을 찢을 수 있는 거겠지.’
모작이니까 가치가 없는 거고,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가차 없이 찢어 버릴 수 있는 거다.
그건 그림이 아니라 다른 것에도 적용될 수 있다.
설이현에게 있어서 가치 없는 것은 별것 아닌 이유로 찢어 버리거나 망가뜨릴 수 있을 것이다.
모작이나 가짜 자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설이현에게는.
가짜에게는 가치를 두지 않고 찢어 버려도 미련이 없는 남자에게 자신은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파리일까, 아니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오염되는 쓰레기일까.
“빨리 끝내고 다 잊고 살고 싶다, 정말…….”
영주가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언제 설이현이 저 문을 두드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귀는 문을 향하고, 눈은 감은 채로 영주가 손가락만 움직였다.
바스락바스락, 라면의 포장지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
띠링-.
문자 알림음에 영주가 퍼뜩 눈을 떴다.
‘깜빡 잠들었었네…….’
그냥 라면을 품에 안고 누워 있었는데 그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몇 시지?’
배가 고픈 것보다 시간이 더 궁금했다.
휴대폰을 보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라면… 못 먹었네…….’
자고 일어나니 더 배가 고픈 이유가 뭘까.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문자의 내용이다.
[지금, 잠들었어.]
주어가 없지만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있다.
발신인은 당연히 설주원이다.
“밥이 중요하진 않지.”
배는 고프지만 지금 상황에서 밥이 중요한 건 아니다.
오늘 자신을 본 설이현의 반응을 봐서는 내일 아침 당장 쫓겨날 수도 있다.
이건 시간을 다투는 문제고, 그래서 설주원도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갈게요, 지금.]
영주도 주어가 없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사진은 공개하지 않고 그냥 협박용으로 쓴다고 했으니까…….’
설주원은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사진을 공개해서 설주원이 얻는 건 없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공개되는 순간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 사진은 절대로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영주도 믿고 있다.
“…….”
셔츠 안쪽을 슬쩍 들여다봤다.
속옷은 아이보리색이다.
물론 아래쪽도 같은 색의 속옷이다.
‘아직 모태 솔로인데.’
대중탕도 꺼려서 남들 앞에서 벗은 몸을 보여 준 적도 없는데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설이현에게 보여 주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설주원도 포함해서 말이다.
‘약 먹고 잠들었으니 설이현은 모르겠지. 중간에 깨진 않겠지?’
필요한 사진은 고작해야 몇 분이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분?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테니까 금방 끝내고, 금방 방으로 돌아와서, “라면이나 먹자.”
이런 말을 굳이 하는 건, 이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짚어 주기 위해서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설이현에게 있어서도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설이현은 고작해야 SC건설을 설주원에게 주면 끝나고, 자신은 엄마에게 갤러리로 효도하고 떠나면 끝난다.
각자 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후련하게 다시 안 볼 사이로 돌아가면 끝이다.
방문을 열고 나온 영주가 곧장 향한 곳은 복도 끝에 있는 이현의 방이었다.
거기가 이현의 방이라는 것은 설주원이 알려 줬다
.
사실 영주는 이 집의 구조를 잘 모른다.
하루밖에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넓은 집은 미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여기서 코너를 돌면 첫 번째이자 마지막 방.’
이현의 방문 앞에서 영주가 심호흡을 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조금 멀찍한 곳에 떨어져 서 있는 주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원은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폰으로 찍어도 충분할 텐데 굳이 카메라까지 준비한 그를 보며 영주가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이거, 도움이 될 거야.”
다가온 주원이 영주에게 맥주 캔을 내밀었다.
“사진만 찍을 거잖아요.”
“누군가의 약점을 잡는 일을 하는 거니까. 떨면 안 되잖아.”
“그 정도로 떨지는 않거든요.”
“하긴, 한 여사 딸이었지.”
그 말에 영주가 주원을 노려봤다.
지금 주원은 제 엄마가 술집 접대부 출신이었고 설 회장의 정부였다고 노골적으로 저런 말을 던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진짜 정부의 자식은 설주원 자신이면서 제게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우습고 기도 차지 않는다.
“맞아요. 우리 엄마 딸이죠. 적어도 설 회장님 딸은 아니죠.”
이 말을 해 주는 것이 영주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적어도 이 미친 막장 설씨 성을 가지진 않았다.
주원의 손에서 맥주 캔을 빼앗은 영주가 그대로 원샷했다.
긴장이 풀리는 건 모르겠지만 확실히 목은 시원했다.
목이 한참 말랐던 참이었으니까.
‘얼른 들어갔다 나오자.’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영주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다.
‘이렇게 어둡게 하고 자나?’
보통은 잠잘 때 무드 등 하나쯤은 켜놓고 잠드는 법이 아닌가?
이렇게 어두우면 잠이 올까?
‘침대가…….’
커튼까지 전부 쳐놓았는지 어두워서 분간도 잘 되지 않는다.
‘이렇게 어두워서야, 카메라에 제대로 나올까 몰라.’
쓸데없는 걱정인지 모르겠지만 플래시를 켠다고 해도 대략적인 윤곽만 나올 뿐 얼굴이나 그런 것들이 찍히지 않을 수도 있다.
‘정말 푹 잠들었겠지?’
어떤 약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푹 잠들어서 내일 아침까지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라는 건 그거다.
‘여긴가?’
더듬거리며 어둠 속을 걷던 영주의 손에 이불이 만져졌다.
손을 조금 더 뻗자 발목이 손에 닿았다.
‘설이현.’
영주가 한 번 더 심호흡을 했다.
‘옷만 벗으면 돼. 옷을 벗고 위에 올라가 앉아 있기만 하면 끝나. 설이현은 깨지도 않을 테고…….’
셔츠를 벗고 바지까지 벗은 영주가 속옷만 입은 채로 더듬더듬 설이현의 위로 올라가 앉았다.
‘뭐야. 다 벗고 자?’
영주도 잘 때에는 속옷만 입고 자긴 하지만 이 남자도 그런 걸까.
이불을 옆으로 밀어내고 잠들어 있는 남자는 몸에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손으로 짚은 남자의 아랫배가 살갗 그대로 만져졌기 때문이다.
‘난감하다, 정말.’
남자도 전부 벗고 있고 자신도 거의 벗고 있다.
‘이렇게 앉으면 등만 찍히려나?’
영주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얼굴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왜 안 들어오지?’
설주원은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걸까.
지금쯤이면 들어와서 자신과 설이현을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 기다려야 하나? 이 꼴로? 하지만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없잖아. 그러다가 이 인간이 깨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결국 영주가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보지.’
이현의 위에 올라앉은 채로 영주가 제 아래에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어둡지만 이제 얼굴은 대충 윤곽이 보였다.
‘얼굴은 잘생겼는데, 잘생긴 쓰레기지…….’
얼굴만큼이나 인격도 좋다면 다행이겠는데 신이 이 인간을 만드실 때 얼굴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인격은 남에게 주고 남은 자투리만 준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을 가리켜서 [저게]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거, 저거. 물건을 가리키듯이 자신을 불렀다.
“어…….”
그때였다.
영주의 시야가 흔들렸다.
‘뭐지?’
영주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시야는 여전히 흔들렸다.
‘뭐야. 나 취한 거야? 고작 맥주 한 캔에?’
말도 안 된다.
영주의 주량은 겨우 맥주 한 캔으로 취하는 정도가 아니다.
맥주 열 캔에 소주 3병을 마셔도 영주는 끄떡없다.
대학 다닐 때 술대장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취한 건 아닌데 왜 이러지?’
시야가 흔들리고 갑자기 몸이 나른해졌다.
전신의 긴장이 풀리며 허리에서 힘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설주원은 쓰레기다.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정말 쓰레기 같은 짓을 할 줄 몰랐던 건 자신의 실수다.
‘맥주에 약을……’
그놈은 설이현의 마실 것에만 약을 탄 것이 아니라 제게 준 그 맥주에도 약을 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
둘이 함께 벗고 있는 모습을 사진만 찍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 인간은 아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리라.
하긴 그 정도로는 약하다.
영주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약하다.
진짜로 협박하려면, SC건설 정도를 손에 넣을 정도로 협박을 하려면 벗고 있는 사진이 아니라 실제로 섹스하는 동영상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설주원은 손에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그건, 액션 캠이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그 인간쓰레기가 자신을 함정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 인간은 상관없을 거다.
재산만 손에 넣으면 되는 그런 인간이니 말이다.
‘나가야 하는데…….’
나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주량이 세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경험을 영주는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것이 다 낯설다.
그때였다.
“한…영주?”
아래에서 설이현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순간 영주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깼어?’
설이현이 깼다.
아침까지 푹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깨 버렸다.
‘수면제를 먹인 게 아니었어. 그 인간 진짜 쓰레기… 개새끼…….’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욕을 삼키며 영주가 비틀거리는 손을 이현의 아랫배에 짚었다.
“한영주네?”
설이현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정확히는 발음이 이상하다.
‘설마 취했어?’
술에 취했든 약에 취했던, 취한 것은 맞다.
설주원이 설이현에게도, 그리고 제게도 약을 먹인 거다.
물론 목적은 하나뿐이겠지만.
‘미쳤어, 그 인간.’
“한영주구나.”
이현이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침대 머리맡의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것을 영주는 쳐다만 봤다.
지금 그녀는 두 손으로 이현의 아랫배를 짚고 옆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 수도 없고 자꾸만 눈앞이 흔들려서 기절할 것만 같다.
‘이대로는 못 버텨…….’
빨리 이 방에서 나가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정말 죽고 싶어질 거다.
더군다나 상대가 설이현이라면, 최악이다.
“한영주.”
그런데 이 인간은 조금 전부터 왜 계속 자신의 이름만 부르는 걸까.
“아……!”
그때 영주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머리가 울리고 눈앞이 흔들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위에는 설이현이 올라타 있었다.
“살다 보니 한영주가 나오는 꿈도 꾸네.”
‘꿈이 아니거든요?’
지금 이 인간은 이게 전부 꿈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약에 취했으면 그럴 수도 있다.
‘안 돼, 정신 차려 한영주.’
지금까지 겨우 붙잡고 있던 영주의 머릿속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자꾸만 흔들리는 의식을 잡으려고 애를 써도 머릿속이 몽롱하게 물들어 갔다.
“…한…주…려…….”
‘뭐야… 뭐라고 말하는 거야…….’
이제는 설이현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잘 들리지 않는다.
‘몸이 뜨거워…….’
대체 설주원 그 쓰레기는 술에 뭘 탄 걸까.
그리고 설이현은 대체 지금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입술이…….’
이현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 남자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잘생겼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영주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은 것도 같았다.
이현이 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다.
그냥 몸이 뜨겁고, 정신이 몽롱하고,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