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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맛있는 남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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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2 회 작성일 23-12-12 00:09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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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아파트 현관을 열고 들어서던 은서가 문득, 어두운 거실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두운 거실, 온기 하나 없는 냉랭한 집 안. 그녀가 매일같이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해도 누구 하나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는 공간.



털썩.



그녀가 가방을 소파에 던져버린다. 신발장에는 아무렇게나 구두를 벗어놓았다. 

가방을 소파에 던져놓아도,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달칵.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 이틀 전에 사온 초밥과 닭꼬치가 들어 있다. 이틀 전,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폐점 떨이로 산 것들이다. 

딱히 먹을 것이 없어 사긴 했지만 사고 나니 먹을 마음이 없어 이틀 동안 냉장고 안에서 방치된 것들. 은서가 그중 초밥을 꺼냈다. 

랩 포장을 벗기고 냄새를 맡아본다. 


킁킁거리며 몇 번 냄새를 맡아보던 은서는 결국 그것을 먹기로 결정했다. 딱히 상하지 않았으면 대충 먹어버리자는 생각인 것이다. 


냉장고에서 이틀이나 지났으니 밥알도 딱딱하고 퍼석하다. 

전자레인지에 돌릴까 하다가 초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무슨 맛일까 싶어 그냥 포기했다.


입안에 들어간 밥알들이 전부 따로 놀고 있었다. 세 개까지 먹은 그녀가 결국 나머지를 휴지통 안에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녀가 입가심으로 다시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 캔 맥주다. 오늘도 어김없이 맥주로 배를 채우고 잠이 드는 것이다.



딱히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이상 그녀의 삶을 변화가 없다. 회사 동료들과 회식을 가지 않는 이상, 일 년에 두세 번 동창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 그녀의 매일은 이런 식이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떨이 식품이나 빵을 사고 그것으로 저녁을 때운 다음, 다음 날 아침이면 전날에 먹고 남은 것을 대충 먹고 출근한다. 


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해결한다. 그녀의 하루 세 끼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밥을 먹는 시간이 점심이다. 

돈이 없어서 이런 궁상을 떤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돈이 없어 궁상을 떠는 것이 아니라 혼자 먹는 식사에 시간도, 노력도 들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결국은 혼자 먹는 음식은 그 맛이 그 맛이니까.



재작년, 세상에서 혼자가 되어버린 그녀는 그 후로 늘 이런 상태였다. 변화가 없는 생활. 무미건조한 나날들.



카톡.



두 번째 맥주 캔을 따는 그녀의 귀에 카톡 소리가 들린다. 힐끗 쳐다본 핸드폰 액정에 익숙한 이름이 떠 있다.



- 집에 들어갔어? 내일 저녁 같이 어때?



그 남자다. 몇 달 전부터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자. 아니, 집요하게 괴롭히는 남자. 

처음에는 그저 관심을 보이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불러내서 식사나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남자. 

관심 없다는 걸 피력해도 정말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는 남자. 어차피 외로우니까 만나보면 어떠냐고?



그 남자는 유부남이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는다는 유부남이다. 게다가 그녀의 직장 상사이다. 

직장 상사, 거기에 유부남인 남자가 작업을 걸어오는 것만큼 곤란한 것은 없다. 정중하게 거절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창피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짓을 하려면 회사를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한다.물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돈이 궁한 것도 아니다. 


재작년 부모님의 사고 이후 받은 보험금과 보상금은 아직 그녀의 통장에 고스란히 잔고로 남아 있다. 

딱히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사는 것에 곤란함은 없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그녀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한 끼 식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타인과 함께 먹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유일한 식사인 그 점심이, 그녀가 유일하게 사람답게 먹을 수 있는 그 한 끼가 사라지는 것이다. 돈보다 그 한 끼가 더 아쉬운 그녀로서는 회사를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그녀는 완벽하게 세상에서 외톨이가 될 것이기에.



- 카톡.



또 다시 카톡이 울린다.



- 늦지 않았으면 내가 갈까? 우리 밖에서 맥주나 마실까?



음흉한 속셈이 뻔히 보인다.



- 뭐 먹고 싶어? 내가 사가지고 갈게.



그 정성을 집에 있는 마누라에게 쏟으면 얼마나 사랑 받을까. 

왜 멀쩡한 마누라에게 쏟을 정성을 다른 여자에게 쏟으려고 이 난리인 것일까. 



그녀가 핸드폰 전원을 꺼버린다. 더 이상 그놈의 카톡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맥주 캔을 그녀가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진다.



탕-.



운동과는 거리가 먼 그녀가 던진 캔이 쓰레기통의 모서리를 맞고 튕겨 나왔다. 하지만 다시 주워서 넣을 마음은 없다. 

어차피 집쯤이야 어질러져도 뭐 어떻단 말인가. 혼자 사는 집인데, 누가 오지도 않을 집인데. 더럽다고 말할 사람도 없는데.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소파에 가방을 그대로 던져놓은 것이 생각났지만 그냥 눈을 감아버린다.



“앗.”



그녀가 다시 일어나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핸드폰의 전원을 다시 넣는다. 망할 놈의 알람을 맞춰놓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핸드폰의 전원을 넣자마자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시끄럽게도 울린다. 



그녀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이놈의 카톡을 삭제해버리자고 생각하며 그녀가 알람을 맞춰 놓는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이렇게 무의미한 그녀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



“저기, 과장님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 않아?”



은서의 옆 책상인 그녀의 입사 동기 혜주가 은서의 귀에 소곤거린다. 



오후가 되면서 부산스러워진 사무실이었다. 쉼 없이 울리는 전화 소리와 이쪽저쪽에서 겹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과장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유난히도 짜증 섞인 과장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뭐 기분 나쁜 일 있었나?”

“글쎄?”



은서가 짐짓 모르는 척 대답을 얼버무린다. 과장이 저렇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마 다 그녀가 어젯밤 과장의 카톡을 계속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장 윤기수.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있으면서 은서에게 추파를 보내고 있는 남자. 불륜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듯 끈질기게 구애를 해오는 남자. 



생각 같아서는 한바탕 욕이라도 쏴붙여주고 싶지만 미리 언급했듯이 회사에서 먹는 점심 한 끼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녀는 늘 타협을 하는 것이다. 


참으면 된다고. 무시하자, 참으면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래라. 상대도 해주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둔한 척, 모르는 척 회피하는 중이다. 저러다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면 제풀에 물러나겠지 하면서.



“오늘 회식 갈 거지?”



혜주가 살며시 또 물어온다.



“응, 혜주 씨도 가지?”

“아니, 난 오늘 데이트.”



“데이트?”

“응, 데이트. 어떡하지? 데이트 때문에 회식 못 간다고 하면 과장이 난리 난리 칠 텐데?”



“그럼 회식 자리에서 몰래 빠져나가. 분위기 시끄러우면 모를 테니까 화장실 간다고 하면서.”

“그럴까? 그래야겠다.”

“커피 마실래? 내가 쏠게.”



은서가 동전을 흔들자 혜주가 눈을 찡긋거린다.



“차가운 거, 따뜻한 거?”

“차가운 거.”

“알았어.”



은서가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과장의 저 짜증 섞인 목소리를 잠시 피하고 싶은 것이다. 



복도로 나간 은서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철컹, 하고 캔 커피 하나가 떨어진다. 

그녀가 다시 천천히 동전을 넣는다. 사무실로 늦게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옆 자리 혜주와는 입사 동기. 마음도 잘 통하고 성격도 잘 맞는다. 

전에는 혜주와 가끔 저녁을 먹고 주말에도 만났지만 혜주에게 애인이 생기며 그마저도 사라졌다. 



혜주의 애인은 의사다. 

어느 토요일 저녁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던 혜주와 마침 응급실 당직이었던 그 남자가 눈이 맞아버린 것이다. 



만날 인연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는 걸까? 하고 은서가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짝이 없는 사람들이 없다. 

저마다 책상에 애인이나 부인, 혹은 남편 사진들을 다 올려놓고 있다. 

하다못해 고양이 사진이라도 올려놓는다. 

저 징그러운 과장도 어찌되었건 부인과 아이들 사진을 책상에 올려놓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짝이 있지만, 은서만 없다. 

우연히 다른 사람들의 책상 앞을 지나치다 그 위에 있는 사진을 보고 있자면 문득 외로움을 느끼는 그녀였다. 



애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경우였다. 

누구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드는 때는 다 늦은 밤에 혼자 밥을 먹을 때나, 주말에, 혹은 일요일에 혼자서 라면을 먹고 있을 때다. 

그럴 때는 정말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런 불륜 과장은 사양이다.



*



“자자, 은서 씨, 내 잔 받아.”

“아니요, 저 너무 많이 마셔.”



이미 취기가 은근히 돌아 사양하는 은서의 잔에 과장 윤기수가 술을 가득 채워 놓는다.



“마셔, 마셔.”



자꾸만 옆에서 마시라고 강요하는 기수 때문에 은서가 어쩔 수 없이 잔을 받았다. 

한 잔을 쭉 들이마시자 머리가 휘청한다. 주량을 초과한 것이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은서가 얼른 옆에 있던 찬물을 한 잔 들이마신다. 

여기서 더 마시면 집으로 혼자 돌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저, 과장님. 전 이제 그만.”

“어? 은서 씨 가려고? 잠깐만 기다려. 여자 혼자 보낼 수는 없지.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아니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냐, 아냐. 이런 밤중에 취한 여자 혼자 가면 큰일 나. 일어나, 내가 차로 바래다줄게.”



“과장님도 술 드셨잖아요.”


“대리 기사 부르면 돼. 아니면 내가 택시 잡아 줄게. 그건 되지? 내가 택시만 잡고 은서 씨 집에 들어가는 거 확인만 할게. 요즘은 택시도 무서워서 번호판 다 찍어서 들어가는 거 확인하고 그래야 된데.”


“네, 그러면 택시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남자의 차는 대리 기사가 운전을 해도 타고 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택시를 잡아준다는 것까지 마다할 수는 없었다. 



은서가 핸드백을 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미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원들은 취해서 거의 인사불성에 가까웠다.



*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에 조금 정신이 드는 은서였다.



“저, 과장님. 택시 타는 곳은 저쪽인데.”



은서가 자꾸만 반대쪽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기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의 손을 강제로 잡은 기수가 그녀를 자꾸만 반대쪽 골목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은서 씨 너무 취했으니까 조금 쉬었다 가라고. 한 시간 정도만 쉬었다 가면 좋을 거야.”

“네?”



쉬었다 가라는 기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은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수가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곳이 모텔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은서의 등으로 소름이 끼쳐 올랐다.



“자, 들어가자.”

“아니요, 저 그냥 집에 갈래요.”



“어허, 내 말 들어. 여기서 한 시간만 쉬었다.”

“싫다니까요. 저 그만 집에 갈래요.”

“이런 쌍년이-!”



그 순간 기수의 손이 은서의 뺨을 후려쳤다.



“꺅-!”



난데없이 뺨을 맞은 은서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술도 들어갔고, 머리도 어지러운데 갑자기 뺨을 맞자 그녀의 정신이 반쯤 달아나 버린다.



“내가 잘해주니까 아주 바보 호구로 보이냐? 응?! 너 어제 내 카톡에 왜 답장 안 했어?! 너 자꾸 내 호의 씹고 그럴래?! 이게 예쁘다고 잘해주려고 했더니. 당장 따라와. 내가 오늘 너하고 떡을 못 치면 사람이 아니다.”



“꺄악! 과장님-!”



기수의 손에 은서가 질질 끌려갔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기수가 모텔 입구로 성큼 성큼 걸었다. 

남자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거라는 걸 은서가 처음으로 알았다. 쉽게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힘이었다.



“꺄악-! 이러지 마세요-!”



울며 사정을 해도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또 어떤 남녀가 술에 취해 치정싸움을 하는가 하는 눈으로 힐끗 보고 지나갈 뿐 누구 하나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과장님-!”



눈가에 마스카라가 다 번지도록 울며 애원하는 은서를 잡고 모텔 안으로 들어서던 기수의 등을 누군가 툭툭 친 것은 그때였다.



“뭐야?!”



씩씩거리며 기수가 돌아보는 순간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여자가 싫다 잖아!”



돌아보는 순간 그의 얼굴을 누군가 주먹으로 후려친 것이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은서의 손을 놓은 기수가 얻어맞은 얼굴을 잡고 비틀거렸다.



“여자가 싫다는 데 강제로 그러면 그게 남자 새끼냐?!”



은서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 남자를 올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후줄근한 청바지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 그녀를 도와준 남자의 첫 인상이었다.



*



“이런 X팔-! 너 뭐하는 새끼야?!”



얻어맞은 얼굴을 만지며 기수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엉겁결에 얻어맞긴 했지만 주먹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기수였다.



틈틈이 취미 삼아 복싱 체육관에도 다니고 호신술도 제법 익혔다.

어지간한 깡패들은 무섭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새파란 젊은 놈이 주먹부터 날린 것이다. 

술이 좀 취했어도 이런 놈 하나는 문제없다는 생각으로 기수가 주먹을 들어 올릴 때.



퍽-!



남자의 주먹이 다시 한 번 기수의 안면을 강타했다.



“으악-!”



두 번째, 얻어맞은 기수가 코를 잡고 주저앉았다. 부여잡은 손가락 사이로 코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내 코!”



기수가 코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코뼈가 주저앉은 것 같았다.



“경찰 불러-! 경찰-! 깡패 새끼가 사람 팬다! 여기 경찰 불러!”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기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질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경찰 불러! 경찰 불러서 네가 여자 강제로 겁탈하려고 했다고 해! 경찰 불러!”



남자의 말에 기수가 남자를 노려본다.



“나 저 년 애인이야! 애인 데리고 내가 그 짓 한다는데 그게 왜 겁탈이야?!”

“애인?”

“야! 채은서! 내가 네 애인 맞아? 아냐?!”



기수가 아직도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은서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기수에게 맞은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은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기수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너 회사 잘리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 내가 네 애인이야? 아니야?!”


“.....”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기수를 멍하니 쳐다보던 은서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무릎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갑자기 맞고 끌려가는 바람에 잠시 나갔던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애인 맞아요.”

“그렇지?!”



기수가 그럼 그렇지 하며 얼굴에 웃음을 띠우는 순간,



“이 남자가 제 애인이라고요. 과장님 말고.”

“뭐?”

“응?”



놀라기는 두 남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구해준 남자의 팔을 살며시 잡으며 은서가 기수를 노려본다.



“자기, 어떻게 알고 왔어? 나 마중 나온 거야? 나 무서웠어. 자기 아니었으면 정말 무슨 일 당했을 거야.”

“어? 응, 아.”



그제야 남자가 뭔가 짐작이 가는 듯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은서의 손을 고쳐 잡는다. 

기수에게 보란 듯이 은서의 손을 잡은 남자가 기수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던진다.



“한 번만 더 내 애인에게 찝쩍거리고 그러면 다음번엔 내 손에 고자 될 줄 알아! 알겠어?!”



그리고 두 사람이 팔짱을 낀 채로 모텔을 나가자 모텔 로비에 주저앉은 채로 남겨진 기수가 멍하니 입구를 쳐다봤다. 

코에서는 코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고 얼굴은 맞아서 푸르뎅뎅하게 부어 있었다. 

모텔 안으로 들어서던 커플들이 별 웃기는 꼴을 다보겠다며 지나가고 있었다.



*



“아.”



모텔에서 멀어지자 긴장이 풀린 은서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은 은서의 팔을 부축한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일단 여기라도 좀 앉아요.”



남자가 은서를 편의점 앞 화단에 앉혔다.



“잠시만 있어요.”



은서를 화단에 앉혀놓고 남자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마셔요, 정신이 좀 날 테니까.”



남자가 내민 차가운 이온 음료를 받아든 은서의 손이 아직까지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 내일부터 과장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아찔한 생각이 들어 은서가 몸을 떨었다. 

그런 인간과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 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진짜 애인 아니죠? 그 남자?”



은서의 옆에 앉은 남자가 슬쩍 물어온다.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누라 있는 인간이에요. 자식들도 있고.”

“와, 나쁜 놈일세.”


“그 자리에서 반 죽여 놔도 됐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면 그쪽이 곤란할 것 같아서요. 같은 회사 다니는 것 같았는데, 상사죠?”



“우리 과장이요.”

“진짜 회사 잘리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은서의 일인데, 이 남자 꼭 자기 일처럼 걱정해준다.



“잘려도 상관없어요. 아니, 내 쪽에서 먼저 그만둘 거예요.”

“왜요? 왜 잘못한 것도 없는 게 그만둬요? 그 남자가 자꾸 그러면 투서 날려요.”

“투서.”



투서라는 말에 은서가 작게 웃었다.



“과장이 우리 회사 회장님 먼 친척이래요. 그래서 투서 넣어도 그 인간 안 잘려요.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요.”

“진짜 말도 안 된다.”



옆에서 당사자인 자신보다 더 열받아하는 남자를 은서가 살며시 쳐다봤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아니면 이십대 중반? 동안이면 서른 주변일 수도 있겠다. 


하고 있는 옷차림이 조금 후줄근하지만 인물 자체는 나쁘지 않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준 것으로 봐서 성격도 나쁘지 않다. 

다들 모른 척하고 지나갔는데 도와준 것으로 보면 의협심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냥 가지 않고 음료수도 사줬다. 

채은서, 먹을 것에 약한 여자다. 누가 먹을 것을 사주면 마음이 약해진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은서가 그제야 아직도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는 걸 알았다.



“아니요, 별것도 아닌데요.”



고맙다는 은서의 인사에 남자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음료수를 들이마신다.



“아, 그렇지. 전화번호 가르쳐줘요.”

“네?”



은서의 말에 남자가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일단 은인이시니까 나중에 식사 대접이라도 한번 하려고요. 이래봬도 나 은혜는 확실하게 갚아요.”

“아.”

“전화번호 좀 찍어주세요.”



은서가 자기 핸드폰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되나.”



남자가 머뭇거리며 은서의 핸드폰에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찍었다.



“변, 이한 씨?”



은서가 핸드폰에 찍힌 이름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름 재밌다.”

“성만 빼고 이름만 부르면 멋진 이름인데.”



“하긴, 그러네요. 이한 씨. 이름 멋지다. 성만 빼고.”

“그쪽은 이름이.”



“은서예요, 채은서.”

“아, 은서 씨.”



그때 이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전화 안 받아요?”



은서가 핸드폰을 흔들며 이한에게 웃어보였다. 그녀가 건 전화다.



“내 번호 저장해 놓으라고요, 임시 애인 씨.”

“네?”



“우리 과장에게 내 애인이라고 그랬으니까, 당분간 애인 해줘야 하는 거 아녜요? 그래야 과장이 진짜로 믿고 찝쩍거리지 않게.”



“아, 그런 건가요?”

“그런 거예요. 애프터는 에티켓.”



은서의 말에 남자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음료수 캔으로 고개를 숙여버린다. 

어느새 술기운이 몽땅 달아난 은서가 그런 남자의 옆에서 남아있는 음료수를 쭉 들이마셨다.




*



“그런데 계속 여기 있어도 돼요? 저 이제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



음료수 한 캔을 전부 비운 은서가 이한을 살짝 쳐다봤다. 

밤 열 시. 택시 잡기가 조금 나쁜 시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돌아갈 수는 있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골목에 있다는 것은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한도 그런 경우인데 자기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는 거라고 생각한 은서가 미안한 마음으로 그를 쳐다봤다.


편한 차림인 것으로 봐서는 친구들과 술 마시러 왔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지금 자기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미안한 것이다.



“아, 일하던 중이었는데 조금은 괜찮아요. 택시 잡는 거 도와드릴까요?”

“일? 이 근처에서 일하세요?”



일이라는 말에 은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일? 무슨 일? 이런 밤중에? 이 남자의 옷차림으로 봐서는 도무지 직업이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배달 왔어요. 이 근처 술집들이나 노래방에 들어가는 술을 배달해요.”

“배달? 주류 도매점 하세요?”



“아니요. 전 그냥 배달만 해요. 배달원이요.”

“아, 배달.”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은서도 본 적 있었다. 회식 할 때면 주점 뒷문에 트럭을 세우고 술 박스를 내리는 사람들 말이다.



“아직 정식 직업이 없어요. 이 나이 되도록 알바를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남들 준비할 때 준비 못 했으니 어쩔 수 없죠.”



이한이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이 남자는 몇 살인 것일까. 은서가 이 남자의 나이를 한번 짐작해본다. 스물 중반? 후반? 서른? 이십대라면 알바도 괜찮지만 서른이라면 알바는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주류 배달만 해요?”

“아니요, 이건 야간 알바고, 이거 끝나면 편의점에서 일해요. 자정부터 새벽까지요.”



“편의점?”

“네, 그리고 낮에는 청소해요. 빌딩 청소요.”



“아, 알바가 많네요? 그럼 잠은 언제 자요?”

“새벽에 집에 들어가서 오전에 잠깐 자고 일어나요. 아직 체력은 튼튼하니까 괜찮아요.”

“우와.”



은서가 감탄했다는 듯 이한을 쳐다봤다. 뭔가 엄청나게 열심히 산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대단하다.”

“대단하긴요. 가방끈이 짧아서 직장 못 들어가니까 알바로 도배를 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면서 이한이 애꿎은 캔만 만지작거린다. 얼마나 캔을 만지작거렸는지 캔이 자글자글 구겨져 있었다.



“저기, 택시 잡아 드릴게요.”

“차 가지고 있어요?”

“네?”



“배달하는 차 가지고 있죠? 일 끝났으면 저 태워주실 수 있어요? 저 그거 타고 집에 갈래요. 이 시간에 택시 잡기 하늘에 별 따기라서.”



“어, 전 괜찮은데… 그래도 되겠어요? 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하루에 알바 세 개 하는 성실한 변이한 씨요.”


“…차 더러운데.”

“한 시간 타는 것도 아니고 이십 분 타는 건데요. 태워주기 싫어요?”



은서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물 트럭이라서 엄청 덜컹거려요. 일단 짐차니까.”

“상관없어요.”



은서가 빙긋 웃으며 화단에서 일어났다. 치마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며 일어나는 그녀의 다리가 멀쩡하다. 이제 술이 다 깬 것이다.



*



“점심 알바 몇 시에 시작해요?”

“한 시인데, 왜요?”



은서를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 내려주며 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내일 열두 시에 같이 점심 먹어요. 저녁에는 시간 별로 없을 거잖아요.”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신세 진 거 갚는 거예요, 저 빚쟁이 만드실 거예요?”

“아니 전, 그냥.”



“열한 시쯤에 제가 그쪽 핸드폰으로 장소 찍어서 보낼게요. 식당에서 만나는 걸로 해요.”

“음.”

“그럼 내일 봐요.”



은서가 손을 흔들며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이한이 그의 낡은 트럭에 탈 생각도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뭔가 여우에 홀린 기분 비슷한 것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배달을 갔다가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서 그냥 잠깐 도와준 것뿐인데 내일 점심 약속까지 잡힌 것이다. 




채은서라는 저 여자는 분명 직장인일 것이다. 

옷차림도 말끔하고 얼굴에 구김도 없다. 

물론 미인이다. 그러니까 과장이라는 그런 놈에게 그런 짓도 당한 것이다. 

충분히 나쁜 짓 할 마음이 들 만큼 미인이다. 



성격도 괜찮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거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도와준 것이 고마웠다면 적당한 인사로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이다. 

보통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니 내일 점심 약속까지 했다.



“.....”



이한이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봤다. 배달할 때는 늘 이런 차림이다. 

낡은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 부스스한 머리카락, 여자가 한눈에 반할 어떤 구석도 없다.



“뭐지?”



이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불능인 것이다.



“나 좀 멋있었나?”



이한이 그녀를 구해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그가 생각했다. 

그럴 때 남자들이 좀 멋있어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콩깍지는 몇 번 만나다 보면 벗겨진다. 



처음 한 번만 멋있어 보이지 두세 번 만나다 보면 직장도 변변찮고 미래도 불확실한 자기 같은 남자는 곧 버려진다. 

위급한 상황에서의 멋진 모습은 일회용에 불과하다. 

결국에는 조건과 미래인 것이다. 그 두 가지 면에서 이한 자신은 불합격이다.



“뭔가 그린라이트인데, 건전지가 없네.”



이한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당당하게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배경이라는 건전지가 없다.

쓸쓸하게 웃으며 이한이 그의 고물 트럭에 올라탔다. 

부르릉- 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



“.....”


은서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다. 



그녀의 핸드폰 연락처에 적힌 이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같은 사무실 직원들의 연락처가 대부분이고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동창들의 연락처가 몇 개, 그 외에는 없다. 

일가친척도 없기 때문에 친척들 전화번호도 없다. 전부 해서 스무 개도 되지 않는 연락처가 그녀의 세상 전부다. 




이 중에서 사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번호는 다시 열 손가락에 든다. 아니, 다섯 손가락. 

그런데 어제 연락처가 하나 추가됐다. 변이한이라는 남자의 연락처. 오늘 그녀와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남자다. 



무척이나 성실한 남자. 성실 스멜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은서의 보고 들은 경험상 그런 남자는 잘살지 못한다.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일하지만 결국은 이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 대열에 끼고 말 스타일이다. 

지나치게 성실하면, 거기다 사람까지 착하면 바보 되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딱 그렇다. 세상 살기가 참 힘들 거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물론 세상 살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 채은서. 따지고 보면 부족한 것은 없다. 

딱히 부족하다고 한다면 인간관계가 짧고, 부모 형제가 없다는 것뿐, 그 외에는 사회적 기준으로 부족한 것이 없다. 

학벌? 빵빵하다. 삼대 명문에 속한다는 s대학을 나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직장? 더할 나위없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류 기업에 특채로 합격했다. 

물론 특채로 합격해서 사무직 하나, 일반 공채로 합격해서 사무직 하나 그 차이가 뭔지는 아직 그녀도 잘 모른다. 이제 겨우 3년 다녔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도 입사 원서를 내서 모두 합격했지만 그녀가 굳이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구내식당 밥이 맛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식단은 아니지만 가정적인 맛이 마음에 들어서 이 회사로 결정한 것이다.



외모? 거짓말 안 보태고 남자 사원들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다. 거리를 걷다가 연예 매니지먼트사의 명함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그녀다.



재력? 갑부는 아니지만 재산은 꽤나 빵빵하다. 

일단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꽤 된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혼자 살기에 너무 넓은 36평, 물론 그녀의 소유다. 

그리고 아파트의 작은 상가를 하나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물론 상가는 세를 준 상태다. 



시골에 땅도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귀농해서 유유자적 사시는 게 꿈이셨던 부모님이 시골에 집과 땅을 사둔 것이다. 

물론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지기 전에 사고로 두 분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두 분의 계좌에 남아 있던 현금은 모두 그녀가 상속받았고, 유가 증권도 그녀가 상속받았다. 

그리고 두 분의 교통사고 보험금과 가해자 쪽에서 선처를 바라는 합의금조로 내민 위로 보상금까지, 그녀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돈이 통장 잔고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는 분이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어 도와준다는 생각에 보험을 많이 들어두셨던 부모님이다. 

현금으로 몇 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들어 있어도 쓸 일이 없으니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는 딱히 여행을 즐기지도 않고, 명품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낙이 있다면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엄마가 해주던 부침개를 먹는 것뿐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에는 엄마가 해주는 저녁을 먹는 것이 즐거운 일상이었고, 취업한 후에는 낮에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이, 그리고 저녁에는 엄마가 해주는 따끈한 찌개를 먹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언제나 맛있는 엄마의 밥을 먹고, 휴일에는 느긋하게 쉬고, 그것이 그녀의 행복의 전부였다. 

일확천금도, 변호사나 의사 남편도, 이상한 횡재도 바라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하는 평온하고 즐거운 일상이 그녀가 바라던 전부였다. 



그러나 빗길에서 미끄러진 차 한 대로 그녀의 즐겁고 평화로운 일상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상대편 운전자는 술에 취한 상태였고 차 안에는 시골 땅의 잔금을 치르고 돌아오던 부모님 두 분이 타고 계셨다. 



두 분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러졌다.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렇게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러졌다. 



그때부터 그녀의 세상은 좁아졌다. 부모님의 분량만큼 그녀의 세상은 좁아졌다.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며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혼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둘러싼 모두가 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의 동료들도, 동창들도 모두가 타인이었다. 

그녀를 위로하며 조문을 하지만 그들은 맛있게 육개장을 먹었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그리고 비 오는 날 아침 발인에는 그녀 혼자였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모두가 타인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재미가 없어졌다. 물론 선 자리는 꽤 많이 들어왔다. 



그녀가 물려받은 유산과 보험금이 꽤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지인들이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준 적은 많았다. 

다들 괜찮은 남자들이었다. 직장도, 외모도, 그리고 학벌도 좋은 남자들. 



그러나 그녀 쪽에서 거절했다. 그들과 먹는 밥이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생 같이 살아야 하는 남자와 먹는 밥이 맛이 없다면 그건 일생 곤욕스럽다는 뜻이다. 그래서 거절했다. 



물론 그녀가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라고 왜 외롭지 않을까.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이 그녀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머지 밥은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넘어가는 성격이다. 



외로워서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숱하게 했다. 

그녀의 외로움이 보여서 과장 같은 놈이 꼬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함께 먹는 밥이 맛있지 않은 남자는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 것이라는 걸. 

함께 먹는 밥이 맛없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같이 먹어도 밥이 맛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마신 음료수는 맛있었다. 차가운 이온 음료수는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기대를 해본다. 그 남자와 먹는 점심은 틀림없이 맛있을 거라고.



띠링.



그녀가 메시지 전송을 눌렀다. 식당 위치를 그 남자에게 보낸 것이다.

메뉴는 내내 먹고 싶었지만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서 먹지 못했던 그것.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도는 그녀였다.



*



“이한 씨, 생선 싫어해요?”



은서가 맞은편에 앉아서 생선을 두고 사투를 벌이는 이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손에 든 젓가락을 무기 삼아 생선과 혈전을 벌이는 이한의 이마에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다. 



생선 싫어하는 남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생선구이 집을 약속 장소로 잡았나 싶어 은서가 미안해진다.

하지만 이집 생선구이가 너무 먹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이곳에서 곧잘 외식을 했었다. 

모듬 구이를 시키면 꽁치, 고등어, 삼치, 임연수에 갈치와 조기까지 한 마리씩 나와서 종류별로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니, 좋아하는데… 좋아해요. 좋아는 하는데.”



이한이 서툰 젓가락질을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가시를 잘 바르지 못해서.”



그렇다. 이 남자 생선 가시를 잘 바르지 못하는 남자인 것이다. 

이 남자에게 생선이란 통째로 들고 대가리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어야 하는 거지만, 차마 여자 앞에서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서 평소에 하지 않던 ‘가시’와 ‘살’을 분리하는 짓을 하려니 죽을 맛인 것이다. 도대체 왜 생선의 가시를 발라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한이다. 


잘 구운 생선은 버릴 것 없이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전부 먹어줘야 생선에 대한 예의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이렇게 숯불에 잘 구워진 생선을 말이다.



“내가 발라줄게요.”



은서가 아무렇지 않게 쓱 쓱 젓가락질을 해서 이한의 접시에 잘 바른 생선살을 올려준다. 

생선 종류별로 그의 접시에 살을 올려주는 은서를 이한을 당황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그냥 제가 혼자 먹을게요.”



그러면서도 이한의 눈이 슬쩍슬쩍 옆으로 치워놓은 대가리에 가 닿는다.

‘저 눈알이 얼마나 맛있는데…’ 하면서 이한이 슬쩍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먹지 않겠다고 옆으로 밀어둔 생선 대가리에서 차마 눈알을 빼지는 못한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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