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남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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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봐도 뻔하다. 이 착하고 순진한 남자가 어떻게 커피 타준 사람의 면전에서 이거 내 취향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으랴.
분명 싱글벙글 웃으며 끝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을 것이다. 이 남자라면 에스프레소를 맥주 컵으로 줬어도 다 마셨을 것이다.
“그 후로 제가 지나가기만 하면 불러서 타주는데… 돈도 안 받고 주는 걸 마시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지금도 저 형은 제가 에스프레소를 가장 좋아하는 줄 알아요.”
“미치겠다.”
“그래도 저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진짜 감사하다고. 전 정말 사람 복이 많은 거 같아요. 전 정말 주는 것 하나도 없는데 저렇게 배려해주고 신경 써주는 분들이 있어서.”
“솔직히 말해 봐요. 그때 이 가게 공사할 때 이한 씨가 못도 박아주고 나무도 날라주고 그랬죠? 지나가다 물만 얻어 마신 거 아니죠?”
“그거야 조금만 도와줬을 뿐이고.”
“정말 바보라니까.”
이 남자는 사람들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이 남자는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지 모른다. 모른다.
잘해줄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
남들이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성실하고 착한 남자라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 그래서 남들이 착한 줄 착각하는 것이다.
분명 조금만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기 일처럼 거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동생 일도 그렇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피도 반밖에 섞이지 않은 동생도 동생이라고 선뜻 받아들이다니, 바보처럼 착한 남자다.
이런 남자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바보처럼 이용만 당할지도 모른다.
바보처럼 착한 남자이니까 연애하자는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제안도 받아들인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런데 저 분, 저 싫어하는 거 같아요.”
은서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자 이한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설마요. 저 형, 사람 가리고 그러지 않는데. 그리고 엄청 착해요.”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어요. 저 사람 나 싫어한다니까요. 조금 전에도 막 째려보고 그랬어요.”
“째려봤어요?”
“응, 막 무섭게 째려봤어요.”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서 은서가 막 고자질을 한다.
“아닌데. 그런 형 아닌데.”
“너무 무섭게 째려봐서 어쩌면 내 커피에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콜록!”
은서의 말에 이한이 그만 사레가 들려버렸다.
쓴 커피가 목에 걸리며 몇 번 크게 기침을 하는 탓에 카운터에 있던 서진이 얼른 물주전자와 수건을 가지고 온다.
“괜찮아? 이한 씨?”
빈 물 컵에 물을 따라주며 수건을 올려놓는다.
“입 닦고 물 좀 마셔.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니요. 그냥 좀, 콜록!”
차마 커피에 독 탔다는 말이 웃겨서 그런다는 말은 할 수 없다.
“한 잔 더 줄까?”
“콜록!”
이번에는 은서가 사레가 들려버렸다.
가뜩이나 써서 지옥 가는 맛이라고 들었는데 한 잔 더 준다는 말에 그녀가 속으로 웃다가 사레가 들려버린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사레가 들려서 콜록거리는 모습을 서진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
“나도 지원이 만나보고 싶은데, 안 되겠죠?”
“지원이가 낯을 많이 가려요.”
‘낯을 가려서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형하고 같이 사나?’
그 말은 은서가 꼭 삼킨다. 아마 그 말을 하면 이 남자는 상처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원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아마 ‘지원이’가 아니었다면 이 남자는 복싱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원이’를 위해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원이’는 이 남자의 희생을 알고나 있을까?
‘지원이’와 이 남자는 나이 차이가 고작 여섯 살. 많이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고작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은 대학생, 본인은 중졸, 과연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동생 뒷바라지를 선택한 것일까. 나중에 동생이 고마워하기라도 할까? 무시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지원이는 알바 같은 거 안 해요?”
“제가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했어요.”
‘애가 싸가지가 없네. 형은 하루 종일 알바하고, 야간에도 알바 뛰는데, 쪼끄마한 게 안 봐도 비디오네. 싸가지가 없을 거야.’
이한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은서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지원이’가 미워진다.
은서의 머릿속에서 ‘지원’의 이미지가 마구마구 제멋대로 생성되고 있었다.
삐뚤어진 스무 살의 남자 아이. 분명 성질도 나쁘고 말도 막할 것이다.
없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옷은 말끔한 걸로 입고 다니고, 틀림없이 안경도 썼을 것이다.
원래 싸가지 없는 애들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녀가 집에서 혼자 본 드라마의 폐해가 지금 드러나는 중이다.
“아함.”
이한이 작게 하품을 하자, 그제야 은서가 이 남자가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새벽에 돌아와서 그녀와 응…을 하고 그녀가 잠든 사이에 아침을 준비하고 아침을 먹고 체육관으로 와서 링에서 뛰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면 알바를 나가야 한다.
엄청 피곤할 거라는 생각을 못한 자신이 지금은 ‘지원이’보다 더 민폐라는 생각에 은서가 얼른 남아 있던 커피를 다 마셔버린다.
“일어날까요?”
“벌써요?”
“가서 잠깐이라도 눈 붙여요. 안 그러면 이한 씨 쓰러질 것 같으니까.”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요. 가요.”
“그럼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이한이 카운터를 지나 화장실 쪽으로 가자 은서가 핸드백을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서진이 은서가 카운터 앞에 선 것을 알면서도 눈길도 주지 않는다.
대충 감이 오는 은서였다. 스물아홉 살 먹은 여자를 물로 봐서는 안 되는 법.
아무리 이 나이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봤다고 하지만 여자는 여자. 그동안 봐온 연애 드라마, 영화, 그리고 읽은 연애 소설만 하더라도 이미 연애 최고수의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계산할게요.”
“그냥 가세요.”
“네?”
“이한 씨에게는 커피 값 안 받아요.”
서진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문득 기분이 나빠진 은서가 살짝 심술궂은 생각을 했다.
“뭐 하나 말해도 될까요?”
“하세요.”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는 서진을 은서가 씬 웃으며 쳐다본다. 한 방 먹일 준비가 된 것이다.
“이한 씨, 에스프레소 싫어해요.”
“.....”
‘어떠냐? 그동안 당신이 한 짓은 그를 고문한 것이라고. 당황했지? 민망하지?’
“단 거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고요.”
기세 좋게 말하며 그의 반응을 살피는 은서를 향해 서진이 살며시 고개를 든다. 그 눈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
그러자 정작 당황한 것은 은서였다. 한 방 먹인 줄 알았는데 도리어 한방 먹은 것이다. 이 남자, 알면서도 이한에게 에스프레소를 먹여왔던 것이다.
“왜 그런 일을.”
“좋잖아요. 싫어하는 건데 꾹 참고 마시는 모습이. 날 생각해서 싫다는 거 내색도 못하고 끝까지 맛있게 마셔주는 모습이 보기 좋잖아요?”
그 대답으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은서였다.
뭔가 대충 감이 오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설마 했는데, ‘오 마이 갓!’이다. 얼굴이 굳어지는 은서를 바라보며 서진이 씩 웃는다.
“은서 씨, 감이 좋네요? 어디의 어떤 바보는 이 년 동안이나 쓴 커피를 마시면서도 감은커녕 둔해빠졌는데, 바로 알아차리네요?”
말로만 듣던 그것이다. 적어도 은서 주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것. 게이.
“아, 오해하지는 말아요. 나 게이 아니니까.”
은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다 읽는다는 듯 서진이 말한다.
“나 결혼도 해본 적 있고, 지금까지 사귄 사람들 다 여자였고, 한 번도 남자 좋아해본 적 없어요. 이한 씨만 빼고.”
‘그게 게이라는 거야-!’
은서가 소리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이 남자의 본성을 꿈에도 모르고 있을 이한을 위해 애써 참는 것이다.
그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나 진즉에 포기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경계하지 말아요.”
‘포기한 인간이 나를 그런 눈으로 째려보니?’
“그 쓴 커피를.”
서진이 그의 앞에 놓인 작은 커피 잔을 바라본다. 이한의 것과 같은 에스프레소가 담겨져 있었다.
“그 지독하게 쓴 커피를 이 년 동안이나 마셨는데도 지금도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이한 씨 보면서 나 역시 시간이 얼마가 지나더라도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거 아니까 포기했어요.
아무리 마셔도 몸에 길들여지지 않는 쓴 커피처럼, 남자가 좋아한다는 거 죽어도 받아주지 못할 사람이니까, 포기해야죠. 이젠 보란 듯이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왔으니까.”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서진이 은서를 바라본다.
“저 남자 어디가 좋아요? 순 바보 같은 남자인데.”
“바보라서 좋아요.”
은서의 대답에 서진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작게 웃음을 흘리던 서진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하긴, 나도 바보 같은 점이 좋았으니까.”
문득, 은서가 이 남자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남자가 왜 이한에게 끌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은서 자신과 비슷한 것이리라. 바보 같아서 좋다는 말에 은서가 알 수 있었다.
이 남자 역시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는 것을. 사람에 상처받아 사람과 가까이하는 것이 싫지만, 혼자는 또 외로운 것이라는 걸.
- 결혼도 해본 적 있고.
이 남자의 손가락에 결혼반지 같은 건 없다. 그 말은 결혼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상처받은 것일까?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외로운 것은 싫지만 사람을 가까이 하기에는 두려운 이들에게, 이 남자와 그녀 자신 같은 이들에게 이한이라는 남자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따뜻한 등잔불 같은 남자라는 것을.
따뜻해서… 굉장히 따뜻하고 아늑해서 저도 모르게 다가가고 기대고 싶은 남자라는 것을.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이한이라는 남자는 그런 남자라는 것을.
그래서 낯을 가린다는 ‘지원이’도 그 남자는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보가 나오네요.”
서진이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찡긋거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한이 젖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나오고 있었다.
“둘이 무슨 얘기했어요?”
뭔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향해 이한이 자기도 끼워달라는 듯 걸어왔지만 두 사람이 피식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는다.
“가요.”
은서가 먼저 돌아서자 이한이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든다.
“형, 나중에 또 올게요.”
“잘 가, 이한 씨. 그리고 은서 씨, 나중에 또 와요.”
또 오라고 말하는 서진에게 은서가 생긋 웃으며 인사한다.
“쓴 커피가 맛있게 느껴지면 올게요.”
물론, 그녀는 쓴 커피를 싫어한다. 아주 아주.
“어디 아파요?”
“아, 아니요.”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한을 쳐다봤다. 얼굴도 약간 빨간 것이 열이 있나 생각을 해본다.
‘어제 오늘 너무 혹사시켜서 병이 났나?’라는 생각이 들어 은서가 왠지 미안해지는 것이다.
지금 막 이한이 약국에서 나온 길이다.
지나는 중에 약국을 보고 은서에게 밖에서 기다리라 하고 약국에 들어갔다 나온 이한의 손에 약 봉투가 없어서 그게 또 의아스럽다.
‘그냥 드링크 하나 마시고 나왔나?’
어쨌든 빨리 돌아가서 쉬게 해주자는 생각이 은서가 걸음을 서두른다. 주차장이 이제 멀지 않았다.
“.....”
이한이 계속 불룩한 주머니에 신경이 가는 중이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지?’
뭔가를 넣은 앞주머니가 불룩하지만 은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다.
그녀가 알고 그게 뭐냐고 물으면 정말 난처해질 것이다.
조금 전 약국을 지날 때 문득 그 생각이 난 것이다.
콘돔이 없다는 것을. 알바 하는 가게의 형이 준 콘돔은 딱 하나. 그 하나를 오늘 새벽에 써버렸다.
하지만 앞으로 분명 은서와 그런 것을 또 하게 될 것이다.
콘돔이 없으면 틀림없이 곤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은서를 기다리게 해놓고 약국에 들어가 콘돔을 산 것이다.
‘콘돔 주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잠시 망설이기까지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손님이 나가기를 기다려 약사에게 아주 작게 ‘콘돔 주세요’라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더군다나 ‘어떤 걸로 드려요?’라고 약사가 되물었을 때 멘붕이 일어난 이 남자의 모습을.
콘돔이면 콘돔이지 그것도 종류가 있다는 걸 이한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됐다.
향이 나는 것, 야광 콘돔, 그리고 우둘투둘한 모양이 있는 것까지 콘돔의 세계는 다양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약사는 ‘투명한 것도 있어요, 착용감이 안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남자 분들이 선호하세요.’라는 말까지 해서 이한을 당황시켰다.
참고로 약사는 여자였다.
대체 콘돔이 야광이면 뭐가 좋을까, 콘돔에서 향이 나면 어쩌자는 걸까, 하고 이한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냥 일반적인 걸로 주세요.’라고 개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볼 것도 없는 사실이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콘돔을 의식하며 이한이 앞서 걸어가는 은서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내가 나쁜 놈일까? 자꾸 그런 것을 생각하는 내가 나쁜 걸까? 이런 거나 사고.’
은서가 얼마나 좋은 여자인지 이한이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속사정과 형편을 알고 나서도 그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보통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은서는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밝고, 여전히 상냥하게 웃는다. 세상에 저런 좋은 여자가 얼마나 될까 하고 이한이 생각했다.
저런 좋은 여자가 얼마나 될까. 이런 모자란 자신을 좋아해주는 저런 여자가 얼마나 될까.
세상에 멋진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하면서도 그런 내색도 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집, 사진으로 본 부모님의 모습은 다정해보였다.
거기에 눈에 띄는 미모, 상냥하고 밝은 성격, 마치 세상의 모든 장점을 다 갖춘 듯한 여자.
저 여자에게 부족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부족한 것이 있기나 한 걸까?
그녀는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행복을 더해줄 수 있는지 이한은 그게 궁금했다.
과연 자신이 그녀에게 행복을 더해줄 수나 있을까. 콘돔이나 사는 자신이 말이다.
그녀와 또 다시 그런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아닌 것처럼 굴었으면서, 콘돔이나 사는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놈인 것이다.
발랄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 새벽 품 안에 안겼던 그 아찔한 모습을 떠올려버리는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놈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그녀가 알면 얼마나 혐오할까.
조금 전 카페에서, 화장실에서 나올 때 카운터에 서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은서와 서진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한은 그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버렸다.
잘 어울린다는 말은 그럴 때 쓰이는 것이리라.
굉장히 잘 어울리는 두 사람.
아름다운 그녀와 잘생긴 그 남자.
두 사람 모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감이 없이 자연스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질투가 나버렸다.
처음 만났는데 이전에 계속 알던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서진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누구보다 이한 자신이 가장 잘 알지만 그녀와 웃으면서 이야기 하는 모습에 질투가 났다.
자신보다 그가 그녀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당분간 카페에는 오기 싫다, 특히 그녀와는 오지 말자, 라는 생각까지 해버린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속 좁은 남자인 것이다. 속이 좁고, 질투까지 하는 남자. 만약 은서가 이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면 어떻게 될까.
주머니에 콘돔을 넣고 그걸 하는 상상을 하며, 또 자기보다 잘난 남자에게 질투나 하는 그런 놈이라는 걸 알면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지 않을까?
실망했다고, 더 이상 얼굴 보기 싫다고 말하지 않을까? 이한의 눈에 주차장에 세워진 트럭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은서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이트에 트럭을 타는 여자. 그리고 여자 친구를 트럭에 태우는 자신.
주위의 다른 좋은 차들을 힐끗 쳐다보며 이한이 은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들처럼 저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정말, 속이 상했다.
모든 것이 다 속이 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속이 상했다.
*
“소파에서 잘게요.”
저녁 알바까지 눈 좀 붙이라는 은서의 말에 이한이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침대에서 자요. 소파에서 자면 허리 아파요.”
“괜찮은데.”
“저녁 몇 시에 깨워드려요? 다섯 시면 너무 이르나?”
“다섯 시면 돼요. 다섯 시에 일어나서 저녁 먹고 나가면.”
“그럼 다섯 시에 깨워줄게요. 얼른 가서 누워요.”
지금 누워도 다섯 시면 두 시간밖에는 자지 못한다. 은서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이한의 등을 떠밀어 침대에 눕혔다.
이한이 눕자 이불까지 덮어주며 그녀가 생긋 웃었다.
“그럼 잘 자요.”
그리고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에서 이한이 천정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홈쇼핑에서 구입한 체크무늬 시트와 이불의 침대에 누워 그가 그녀와 이곳에서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창피하지만, 아래가 단단해진 것이다.
‘진짜 답 없는 나쁜 놈이다, 변이한.’
스스로를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
“흐음.”
냉장고를 보며 은서가 잠시 고민했다. 도무지 반찬으로 쓸 만한 것이 없다. 렌지 위에 아침에 이한이 끓인 콩나물국과 반쯤 남은 달걀찜이 있지만 아침에 먹던 걸 고대로 다시 먹고 저녁에 알바 가라고 할 수는 없다.
아침을 이한이 만들었으니 저녁은 자신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은서가 벌써 십 분째 부엌에서 고민 중이었다.
“그냥 배달시킬까?”
요리라는 것은 한 번도 안 해본 은서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언제나 엄마가 해주던 음식만 먹었다.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던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봤다면 라면 정도? 그마저도 물이 맞지 않아 싱겁거나 짜거나 하기 일쑤였지만.
“그러면 정성이 없어 보이고.”
“어쩌지?”
“마트에 가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길에 마트에 들리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냥 저녁에 같이 나가서 사먹을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은서가 생각했다. 요 근처에 백반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
아직도 그 가게가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나다니며 간판을 본 것 같았다.
엄마가 가끔 동창들과 여행을 가시면 아빠와 은서 둘이서 그 백반 집에서 밥을 사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
그녀가 문득 거실의 사진을 쳐다봤다. 선반에 놓인 사진 안에서는 아직도 두 분이 환하게 웃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본 두 분의 모습도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이셨다.
- 은서 너 시집만 보내면 우리는 시골 내려가서 살 거야.
- 진즉에 시골 내려가고 싶었는데 너 때문에 참은 거야, 그러니까 빨리 남자 데려와, 이것아.
- 시골 가서 뭐하고 사시려고요? 농사짓는 법도 모르시잖아요?
- 추어탕집 차릴 거야. 네 엄마가 추어탕 하나는 끝내주게 끓이잖아?
- 그 시골에 누가 추어탕 먹으러 간데요?
- 모르는구나? 요즘은 소문나면 산골이라도 사람들이 먹으러 온다는 거. 그리고 돈 벌려고 식당 차리는 거 아니니까 괜찮다.
- 그럼 자선사업 하시게요?
- 우리 용돈은 네가 월급 받아서 주면 되고. 줄 거지? 그동안 너한테 들인 돈이 얼만데 설마 늙은 아빠 엄마 용돈도 안 주려고?
- 저도 시집가면 애 키우고 살아야죠.
- 그래도 시집갈 생각은 있나 보네? 다행이지. 여보?
- 다행이네요. 휴일에도 집에서 뒹굴거려서 남자도 안 만나길래 평생 노처녀로 늙나 싶었는데 시집은 가려는 모양이니 다행히 손주는 보겠어요.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부모님은 한적한 시골에 낡은 농가를 고쳐 추어탕집을 하시고, 주말이면 은서가 남편과 아이와 함께 시골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서 작은 용돈을 돌아오는 길에 쥐어드리고,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들이닥치기 마련.
사고. 장례식. 그리고 이어진 외로움의 긴 터널.
터널. 그래, 터널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시간들.
갑자기 비어버린 허전한 자리를 메우기 위해 만났던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순간 허전함과 외로움은 두 배로 늘어났다.
아침이 되면 밀물처럼 곁에 모여들었다가 저녁이 되면 썰물처럼 그녀의 곁에서 떠나는 사람들.
각자의 행복을 가진 그들의 삶에 그녀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함께 웃지만 그 행복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웃으면 웃을수록, 행복한 그들 속에서 같이 웃을수록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의 터널은 더 길게 이어질 뿐이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늘 웃고 있는 그녀가 실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바라는 것은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 안에 쥐어지는 작은 행복.
그녀만의 행복.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의 손안에 쥐어진 행복.
쇼 윈도우의 화려한 조명이 아닌 집안에 밝혀진 작고 따뜻한 등불 하나가 그녀가 원하는 것의 전부였다.
그 작은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누리며 살아가는 것.
달칵. 은서가 침실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침실 안은 조용했다. 침대에 누운 이한은 깊게 잠이 든 듯 움직이지 않는다.
살금살금 침대로 걸어간 은서가 이불 끝을 살며시 들어올린다.
그리고 살며시 이한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내리고 눈을 감는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의 뒤에서 이한의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한 이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 타인의 것이 아닌 그녀의 것.
붙잡고 있으면 이 남자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보라서, 바보 같은 남자라서 그녀가 붙잡고 있는 한 이 남자는 그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붙잡고 원하는 이상, 이 행복은 그녀를 버려두고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가 곁에 있는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될 것이다.
등으로 스며든 이 온기는, 언제까지나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줄 것이다.
눈을 감은 은서가 등 뒤에서 이한이 돌아눕는 것을 느꼈다.
그녀 쪽으로 돌아누운 것이다. 목덜미에 따뜻한 숨결이 닿고 있었다.
‘왓.’
은서가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들이마셨다.
이한의 손이 그녀의 옆구리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잠결에 무심코 팔을 올린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이내 깨달았다.
옆구리에 얹어진 손이 천천히 그녀의 옆구리와 아랫배를 쓰다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 깨어 있는 것이다. 티셔츠 위로 그녀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이한의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갔다.
‘으응.’
소리 내고 싶었지만 은서가 애써 참았다. 여기서 소리를 내면 이한이 그만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새벽의 기억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때의 그 뜨거움이 다시 기억나고 있었다. 손길이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천천히 가슴의 모양을 확인하듯이 손이 움직이다가 그녀의 심장 부근에서 살짝 멈춘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행여나 들킬까 봐 그녀가 ‘심장아 조용히 해!’라고 속으로 소리쳐보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은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응.’
이한의 손이 그녀의 바지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편하게 있느라 늘어진 수면 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였다.
들어온 손가락이 그녀의 팬티 위를 가만히 쓸어내린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움직이는 손가락의 아래에서 그녀의 은밀한 곳이 젖어들고 있었다.
“으응.”
마침내 그녀의 입술에서 한숨 비슷한 작은 신음이 새어나오고야 말았다.
그녀가 소리를 내는 순간 등 뒤에서 이한의 움직임이 멈췄다.
*
‘왜 가만히 있지?’
등 뒤에서 움직임이 멈추자 은서가 불안함을 느꼈다.
역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을 만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할 마음이 있으면 밀어붙이면 되는 거지, 하려는 것처럼 굴다가 멈추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목덜미에 여전히 닿고 있는 더운 숨결만 겨우 느끼며 은서가 초조하게 그 다음을 기다린다.
아직 그의 손이 그녀의 바지 안에 들어가 있었다.
‘미. 미쳤나 봐.’
그녀의 바지 안에 손을 넣은 채로 이한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이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은 채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려 얼른 자는 척을 한 그였다.
자라고 침대까지 내주었는데 안 자고 있었다는 걸 알면 그녀가 화를 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침대 곁으로 걸어온 그녀가 가만히 침대 안으로 들어와 눕는 것이 아닌가.
등을 보이며 눕는 그녀를 이한이 실눈을 뜨고 쳐다본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돌아누운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쿵덕거리는 이한이었다.
바지 주머니 안에는 새로 산 콘돔이 있고, 아직 바지 안의 그 녀석은 저 혼자 일어선 상태였다.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한순간의 충동이었다.
하지만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자 만지고 싶어진 것이다.
용기를 내서 천천히 아랫배를 만져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좋아하는 것’으로 그가 결론을 내렸다.
싫어한다면 옆에 와서 눕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졌을 때 바로 뿌리쳤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는 다는 건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리라.
용기를 얻어 그녀의 가슴을 만지는 것까지 성공했다.
손바닥 가득 부드러운 가슴이 티셔츠와 함께 잡히자 그 다음에는 홀린 듯이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랬다. 마치 홀린 것처럼. 저절로 내려간 손이 그녀의 바지 안으로 들어가 팬티 위를 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그녀가 신음을 흘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손은 팬티 안으로 들어 버렸을 것이다.
“으응.”
그녀가 작게 신음하는 순간 이한의 정신이 돌아와 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그녀의 팬티 위에 올려져 있다.
이 민망한 손가락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한 이한이 문득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젖은 감촉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팬티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잠깐 만진 사이에 젖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돌아누운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뱉는 숨소리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긴장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린다. 자신을 원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한이 한 손을 그녀의 몸 아래로 넣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지 안에 들어가 있는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그녀의 신음도 기다렸다는 듯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살짝 키스하며 이한이 깨달았다.
자신 역시 어찌할 수 없는 ‘늑대’라는 것을. 아무리 아닌 척해도 늑대인 것이다.
늑대가 아니라면 그녀의 침대에 누워서 잠들지도 못하고 그런 야한 생각만 할 리가 없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가 잠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야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야한 생각’이 그녀가 옆에 와 눕자마자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고. 성이 변씨니까 ‘변태 늑대’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한이 그녀의 팬티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온기를 머금은 곳에 이한의 손가락이 닿고 있었다.
“으응.”
은서가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이 남자의 손가락이 그곳에 닿자 기분 좋은 열기가 그녀의 하체에서 피어올랐다.
젖은 그곳으로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오고 있었다. 젖은 꽃잎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손가락이 그녀의 내부를 가만히 휘저었다.
“으응… 읏.”
신음과 함께 그녀의 허리가 떨린다. 그곳을 휘젓는 손가락의 느낌마저도 상냥하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다리를 벌려야 하나?’
그녀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옆으로 돌아누운 상태에서는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서 다리를 벌려 줘야 하나? 하지만 막상 그러려니 창피하다. 너무 노골적으로 해달라고 조르는 느낌이지 않는가.
‘어떡하지? 살짝만 들까?’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가 굽어지며 침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으응… 앗.”
이불 안에서 두 사람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점점 달아오르며 안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물에 그의 손도, 그녀의 팬티도 젖어들고 있었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이제 어떻게 하지?’
이불 안의 두 사람이 동시에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
“하아.”
이불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은서가 똑바로 누웠다. 그녀의 바지 안에서 손을 뺀 이한이 일어나 앉은 것이다.
바지에서 뭔가를 부스럭거리고 꺼낸 이한이 그걸 베개 옆에 놓아두는 것을 은서가 지켜봤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있었던 가슴은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그건 정말 최악일 것이다.
그녀가 똑바로 누운 채로 이한을 올려다봤다. 그 역시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 멈출 생각은 없어보였다.
다행이라고 은서가 생각했다.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만약 여기서 물러나버리면 진짜 그때는 자기가 덮쳐버리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한의 손이 그녀의 셔츠 단추를 전부 풀어냈다. 셔츠가 옆으로 벌어지자 브래지어에 감싸인 그녀의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그녀의 브래지어를 끌어내린 이한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얼굴을 내렸다.
그 입술이 가슴에 닿는 순간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부드러운 혀가 가슴 위를 기고 있었다.
정말 좋은 느낌. 연애하는 이들은 다 이런 좋은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이 남자라서 이렇게 특별하게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녀의 가슴이 그의 입술 안에 삼켜지자 그녀의 허리가 움찔거린다.
새벽과는 달랐다. 새벽에는 그녀도 그도 처음이라서 뭐가 뭔지 모르게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서로의 뜨거운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서로에게 각인되고 있었다.
*
“으응.”
은서가 야릇하게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기분 좋은 뜨거움에 휩싸인 그녀가 저도 모르게 이한의 어깨를 붙잡았다.
물론 멈추게 할 생각은 없었다. 멈추기는커녕 이대로 더 뜨겁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 읏.”
그녀의 손끝에서 이한의 어깨가 떨어진다. 그의 몸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더 아래로, 더 아래로.
그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그녀도 알고 그도 알고 있다.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이한이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는다.
그 아래는 바지가 가로막고 있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을 잃은 이한이 두 손으로 그녀의 수면 바지를 천천히 끌어내렸다.
“응.”
그녀가 살짝 허리를 들어 올려서 이한이 손쉽게 바지를 벗길 수 있게 도와준다. 부끄럽지만 좋았다.
신기했다. 이렇게 감정이 여러 개가 교차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녀의 수면 바지를 벗긴 이한이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자 다시 그의 혀가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위를 기어간다.
“으응.”
간질간질 뜨거운 느낌에 은서가 가쁜 숨을 내쉰다. 발가락 끝에서 시작된 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그녀의 가슴을 뒤덮고 머리까지 덮어버리고 있었다.
새벽에는 어땠더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았다는 것은 기억이 나지만 그게 어땠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를 어떻게 만져주었는지, 어떻게 이 남자에게 안겼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이 뜨거워 견딜 수 없을 뿐이다.
“흣.”
이한의 손가락이 그녀의 팬티 위, 젖은 부분에 닿았다. 젖은 부분을 만지는가 싶더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팬티 끝을 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천천히 내려간 팬티가 그녀의 발목까지 끌려 내려가 마침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은서가 다리를 벌렸다.
무릎을 세운 채로 다리를 벌리고 눈을 감아버린다. 일명 ‘마음대로 하세요’ 자세인 것이다.
눈을 감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한이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새벽에는 정신없이 하느라 자세히 보지도 못했던 은서의 몸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었다.
여자의 몸. 단지 여자의 몸이라서 이렇게 예쁜 것일까 아니면 은서의 몸이라서 예쁜 것일까.
술집의 포스트에 붙어 있던 여자들의 몸은 야했다. 가끔 배달을 가는 업소의 아가씨들을 볼 때마다 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누워있는 은서는 조금도 야하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린 채로 은밀한 곳까지 전부 내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예쁠 뿐이었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예쁘다는 생각이 든 여자.
생선 가시를 바르는 모습도 예쁘고, 짜장면 먹는 모습도 예쁜 여자.
그리고 이렇게 수줍게 다리를 벌리고 눈을 감은 모습까지 너무 예뻐서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드는 여자.
그의 입술 안에서 달콤하게 굴려지던 가슴이 실은 이렇게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오늘 새벽 그의 뜨거운 물건이 드나들던 꽃잎이 실은 이렇게나 여리고 수줍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를 무작정 안아버렸던 새벽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이한이었다.
조금 더 천천히, 자세히 그녀를 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나 서투른 남자에게 안기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서투른 자신이 부끄러워진 이한이 천천히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렸다.
바로 눈앞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하는 그곳에 그녀의 꽃잎이 뜨거운 열기를 흘리며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하읏.”
은서가 손으로 침대의 시트를 움켜잡았다. 이한의 입술이 그녀의 그곳에 닿았기 때문이다.
수풀을 파고 든 혀가 그 혀끝으로 그녀의 계곡을 핥아 올린 것이다.
처음 느끼는 감각에 그녀의 온몸이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기가 통한 것이다.
“응, 읏…!”
저도 모르게 은서가 두 손으로 이한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한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이한이 당황한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미, 미안해요.”
아마도 그녀가 그곳을 빠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한 이한이 당황해서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마치 해서는 안 될 못된 장난을 하다 야단맞은 아이처럼 당황한 이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당황한 것은 은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싫어서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밀어내버린 것이다.
전기가 온몸에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게 울려서, 그대로 이상한 소리를 내버릴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밀어낸 것인데 이 남자는 그녀가 싫어서 밀어낸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그, 그게 아니라.”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은서가 고민했다.
‘계속해 주세요?’
너무 야하다.
‘조, 좋아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으아아아아! 내가 왜 밀어냈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일 분 전으로 되돌아갈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 빨리 말하지 않으면 이 순진하고 바보 같은 남자는 그만둬버릴 것이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은서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싫지 않아요!”
소리친 순간 그녀가 세상이 끝난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더 이상 창피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아… 미쳤어. 다 끝났어. 창피해.’
혼자 소리치고, 혼자 실의에 빠져 눈을 뜰 생각도 못 하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다시 뜨거운 숨결이 닿은 것은 그때였다.
싫지 않다는 그녀의 외침에 용기를 얻은 이한이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린 것이다.
거친 숨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그 힘이 들어간 다리를 이한의 손이 가볍게 눌렀다.
“읏… 읏.”
은서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이한의 혀가 그녀의 젖은 꽃잎의 틈새 사이로 밀고 들어가자 부드러운 혀에 녹아내린 틈새 사이로 감추어졌던 붉은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