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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환관 상열지사 3 - 수상쩍고 수상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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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6 회 작성일 23-12-11 04:5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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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윤이오.”


수윤이 묵직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알려 줬다.


‘목소리가 어쩜.’


하지만 지금 여희는 이 잘난 목소리에 취해 있을 상황이 아니다.


“송여희라고 하옵니다.”


어젯밤에 그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정말 보이지 말아야 할 꼴을 보이고 말았다.


한밤중에 일어나 보니 곁에 웬 사내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을 비비고 보니 정말 잘생긴 사내가 누워 있기에 이 사내가 누구인가 싶었는데, 저와 혼인한 그 김수윤이 틀림없었다.


김수윤이 잘생긴 것은 둘째치고, 자기 직전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그만 오줌이 마려웠다.

그래서 구석에 있는 요강을 떠올리고 살금살금 걸어가 치마를 들어 올리고 볼일을 보려던 찰나, 김수윤이 벌떡 일어나 앉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상황에서도 졸졸졸졸 그것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양반의 체면을 떠나서 그건 죽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사내가 밖으로 얼른 자리를 피해 줬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렇게 조반상을 앞에 두고 이 사내와 처음 정식으로 대면하고 앉아 있었다.

초야는 잠든 사이에 지나갔다.


‘옷을 벗겨 준 것도 이 사내겠지. 아닌가? 내가 잠결에 혼자 벗었나?’


옷을 벗은 기억이 전혀 없다.

술을 마시면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혼자 옷을 벗은 것도 기억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대로 잠들었는데 이 사내가 옷을 벗겨 준 것일까.


그거나 이거나 망신살이 뻗은 건 마찬가지다.

초야에 신부가 혼자서 옷을 벗은 것도 망신살이고, 옷을 입고 술에 취해 잠든 것을 신랑이 벗겨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것도 망신이다.

그래서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도 이 사내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좋단 말인가.


“내시들은 거세를 해서 목소리가 꼭 여인네처럼 가늘지. 생긴 것도 꼭 여인네 같다고 하지?”


혼인하기 전에 그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환관하고 혼인하게 되었다는 말이 어디서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빨래터에서 빨래할 때 주위에 앉은 아낙들이 귀에 딱지가 앉게 그렇게 말했다.

내시가 어쩌고저쩌고, 내시는 이렇고 저렇고, 내시가 이래서 저래서.

그래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그것이 없는 환관이 어떻게 처와 부부관계를 하는지 그런 망측한 것들도 들었고, 부부관계를 정상적으로 못 하기 때문에 내시가 궐에 들어간 사이에 환처들이 외간 사내를 끌어들여 부정한 짓을 많이 한다는 말까지 들어야만 했다.


환처 중에서 외간 사내로 애인 한두 명 두지 않은 여인들이 없다, 사내들이 일부러 벼슬을 하기 위해 환처들에게 환심을 사려 한다 등등의 별의별 귀를 더럽히는 말을 전부 들었다.


물론 여희는 부도덕한 짓을 저지를 생각이 조금도 없다. 아니, 그냥 살았으면 살았지, 뭐 하러 그런 부도덕한 짓을 한단 말인가.

이렇든 저렇든 한 번 혼인했으면 책임감을 느끼고 죽을 때까지 부부의 도리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라고 단단히 각오하고 왔는데 눈앞의 이 사내, 내시가 맞긴 한 걸까?


‘무슨 내시가 저렇게 어깨가 넓어? 키는 또 왜 저렇게 크지?’


게다가 목소리는 굵고, 그 굵은 목소리를 내는 목도 굵다.

게다가 목젖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


‘내시는 목젖이 없다고 아주머니들이 그러셨는데.’


빨래터의 아낙네들은 내시는 사내가 아니라 목젖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김수윤이라는 이 사내는 목 중앙에 목젖이 툭 불거져 있다.


‘뭐지? 왜 목젖이 있지?’


“이제부터는 당신이 이 집의 안주인이니 편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면 되오.”


그렇게 말한다 해도 지금 당장은 뭘 하면서 지낼 계획은 없다.

한동안은 집 구조를 익히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다.


다행스럽게도 여희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친화력이 좋아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다.

그래서 약방의 주인도 여희에게 약초 자르는 일감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여희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고 뭐든지 도와주려고 했다.

그건 여희가 어머니를 닮은 까닭이다.


어머니가 꼭 그랬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남을 도울 여유가 없어도 자기 것을 떼어서라도 남을 도왔던 사람이 어머니고 또 여희에게도 항상 그렇게 가르쳤다.


“여희야,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물에 뿌리면 언젠가는 그것이 다시 돌아오게 된단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물 위에 뿌리는 것처럼 아까워도 나눠 주면 그것들이 돌고 돌아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도움을 받게 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그사이에 없는 살림을 꾸리면서도 틈틈이 동냥을 온 거지들에게 남은 보리밥을 조금씩 퍼 준 이유도 그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여희가 조금씩 덜 먹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여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편하게 물어보시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정2품의 벼슬을 한다 해서 오만한 사내면 어쩌나 싶었는데, 거드름이나 그런 것은 피우지 않는 사내다.

전혀 오만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눈매가 부드러운 것이 진중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제게 혼담을 넣으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대감마님과 일면식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

왜? 무엇 때문에 이 사내가 제게 혼담을 넣었을까.

언제 봤다고?


머릿속을 뒤져 봐도 도무지 만난 적이 없다.

스쳐 지나간 적도 없다.


이렇게 잘생긴 사내라면 분명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혼담을 넣었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이름, 자신이 사는 곳을 어찌 알았을까.


“누가 소개해 주었소.”

“그것이 누구입니까?”




소개? 누가 이런 혼처를 소개해 준 것일까.

중매를 섰다는 것은 이 사내도 알고 자신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대전 장번 내시 대감을 알 정도로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지 지금은 말해 줄 수가 없소. 미안하오. 그 사람이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나도 약속을 어길 수가 없소.”

“제가 아는 분입니까?”

“그렇다고만 해 드리겠소. 그 질문은 여기까지 하면 좋겠소.”


자신도 아는 사람. 점점 더 궁금해진 여희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또 달리 궁금한 것은 없소?”


궁금한 것이 많다.

아주 많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묻지 못할 질문들이다.


이를테면, 정말 고환과 음경이 없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없다면 언제 잘랐는지, 어떻게 잘랐는지, 자르고 아프지는 않았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망측한 것을 어떻게 묻겠는가.


“얼굴에 궁금한 것이 많다고 쓰여 있소. 뭐든지 괜찮으니 편하게 물어도 좋소.”


남의 속도 모르고 수윤이 하는 말에 여희의 속이 탔다.


“저, 정말 없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고 쓰여 있는데 그러오.”


아니, 이 사내 뭐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담. 없다면 없는 줄 알 것이지.


“어제 초야를 치르지 못하고 먼저 잠들게 한 것은 내 잘못이니, 딱 오늘만 뭐든지 물어도 대답해 주는 것이오. 오늘이 지나면 뭘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오.”


“그것이.”


여희의 입이 간질거렸다.

뭔가 정상적인 것을 묻고 싶은데, 묻고 싶은 것이 전부 망측한 것들뿐이라서 무척이나 곤란했다.

그 곤란한 것을 이 사내는 알기나 하는 것일까.


여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물어볼까? 물어봐도 될까? 하지만 나름대로 상처가 아닐까?


“정말, 뭐든지…… 물어봐도 되는 건가요?”


하지만 평생 같이 살 상대다.

오늘부터는 부부다. 부부 사이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게 될 말인가.


누가 만약 ‘그 사람이 왜 그런가.’ 하고 물었을 때 ‘나도 몰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부부는 아닐 것이다.

어젯밤에는 그만 망측한 모습을 보였다고 그 난리를 쳐 버렸지만, 생각해 보면 부부 사이에는 그런 모습을 들켜도 그렇게 난리를 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남도, 외간 사내도 아니고, 진짜 부부인데 말이다.

비록 상대가 환관이라 그것이 없지만, 그래도 부부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부끄럽고 아프고 숨기고 싶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부부라고 여희는 생각했다.

비록 누군지 모르고 시집왔지만, 혼인했으니 부부는 한 몸이다.


‘그래, 나중에 묻는 것보다 지금 묻는 것이 낫지.’


결심한 여희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그게 잘리신 건가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스스로 자르신 것인지 아니면 사고로 잘리는 바람에 환관이 되신 것인지.”


“.”


수윤은 잠시 당황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는데 질문이 아랫도리 사연에 대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런 질문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 주기에는 아직 이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름이나 사는 곳이나 아비의 이름이나 그런 것들이 아니라 이 여자를 겪어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이름을 알고, 그가 한 일을 알고, 그리고 그의 얼굴을 안다고 해서 진짜로 아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을 충분히 겪고 난 뒤에야 할 수 있다.

그래서 섣부르게 ‘그 사람을 안다.’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겪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 깊은 내면을 알지 못하면서도 너무나도 쉽게 안다고 했다가 배신당하고 울고 후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을 수윤은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수윤은 누군가를 충분히 겪어 보기 전에는 절대로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윤은 송여희라는 이 여자를 아직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가 묻는 말에 아직은 진실을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렸을 때 개에게 물려 잘려 나갔소.”


적당한 거짓말은 이런 때 필요하다.


“저어…… 두 개 다 잘려 나갔나요?”



그런데 이 여자,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내시라면 알아서 ‘아, 내시구나.’ 할 것이지, 고환과 음경 둘 다 잘려 나갔는지 하나만 잘려 나갔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한 것일까.


“고환만 잘려 나갔소.”


두 개 다 잘려 나갔다고 하면 분명히 ‘그러면 소변은 어디로 보시나요?’ 이런 질문을 할 것만 같아서 수윤이 애초에 그 질문을 차단했다.


“잘려 나갈 때…… 많이 아프셨나요?”

“죽는 줄 알았소.”


“지금은.”

“오래전의 이야기라서, 지금은 다 아물었소.”

“그러면 저어, 전혀, 그게, 그러니까.”


“사내 구실을 못하니 환관 노릇을 하고 있지 않겠소. 궐 안에, 그것도 지엄한 대전에서 주상 전하를 지척으로 모시는 자리에 있는 자가 불경스럽게 살아 있는 음경을 달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오.”


“그렇군요.”

“이제 더는 궁금한 것이 없소?”


“네에.”


여희가 아주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도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되겠소?”


이번에는 수윤 차례였다.


“네. 물어보세요.”


궁금한 것을 물어서 조금은 후련해진 표정의 여희가 밝게 대답하자 수윤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진실을 대답해 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까운 사람을 속이는 것은 수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여자는 은인의 딸이긴 하나 아직은 잘 모르는 여자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부부가 되었으니 시간은 많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이고, 알아가는 만큼 경계가 풀리고, 경계가 풀리는 만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는 만큼 진실을 알려 줄 날이 올 것이다.


“왜 이 혼인을 수락한 거요?”

“네?”


“곱고 아리따운 낭자가 왜 사내 구실도 못하는 내시에게 시집올 생각을 하신 거냐고 물었소. 평생 과부 아닌 과부로 지내야 하는데 말이오.”

“정말 사실대로 말하기를 바라시나요?”


“그럼요.”

“실은 그날, 쌀을 실은 수레가 마당에 들어온 날 아침에 쌀독에 보리쌀이 똑 떨어졌지 뭐예요.”


“저런.”

“쌀이 전부 떨어지고 더는 먹을 것도 없고 팔 것도 없는 상황이 닥치고 보니 너무 마음이 힘든 거예요. 나 혼자 뭘 하나 싶어서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고, 아니 나아지기는커녕 상황이 더 나빠지고, 일이라도 하고 싶은데 양반 체면에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아버님께서는 남의 속 모르는 말씀만 하시고, 그렇게 지쳐서 이제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쌀이 실려 있는 수레를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설마 쌀 때문에 시집을 오기로 했다는 거요?”

“그 상태로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이 뻔하고, 굶어 죽을 상황에서 시집이나 가겠어요? 또 들어보니 대감마님께서 비록 환관이시나 입신양명하신 분이라 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건 또 무슨 대답? 에라 모르겠다?


“더는 뭔가를 책임지는 것도 싫고 끝없는 구덩이 안에서 같이 추락하는 것도 싫어서 이제는 내 살 궁리나 찾고 싶었어요. 한 마디로, 도망치고 싶었어요. 집에서요. 가난에 찌든 집에서요.”


여희의 얼굴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수윤은 궁궐에서 온종일 사람들을 상대한다. 대전을 드나드는 사람들, 임금이 만나는 사람들, 그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 수윤의 일이다.

그렇게 속에 온갖 생각을 품은 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들의 눈에서, 그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이 숨기고 있는 본심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여자의 표정은 굉장히 솔직하다.

거짓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너무 속물적인 이유라서 실망하셨나요?”

“재미있는 이유라서 오히려 좋소.”


“또 궁금하신 것이 있나요?”

“평생 생과부로 살아도 괜찮겠소?”


“궁금은 하겠지만, 그래도 부도덕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마세요.”

“부도덕한 짓?”


“환처들이 환관들이 궐에 있는 사이에 외간 사내와 부정을 저지른다고 들었거든요. 그 점에 있어서는 저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염려 푹 놓으세요.”


이상한 여자다.

제 입으로 외도를 하지 않겠다고, 그것도 초야의 다음 날에 말하는 여자가 또 있을까.


“그러면 평생 사내를 몰라도 되겠소? 만약 그것이 싫다고 하면 내가 방법을 모색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오.”


수윤이 살짝 짓궂은 농을 던졌다.

얼굴 표정이 정직하고 예상 못 한 질문과 대답을 하는 여자가 이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하는지 듣고 싶었다.


“방법이라니요?”

“그것이, 사내 구실을 못해도 여인을 즐겁게 해 주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오. 실제로 많은 환관이 그런 식으로 여인들을 품기도 하는데.”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당황해야 정상인데 여희의 표정이 살짝 이상해지는 것을 수윤이 알아차렸다.


“혹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마에 살짝 땀방울이 맺히는 건 아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이 여자, 진짜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 분명했다.


“알고 계신 것이오? 그 방법에 대해서?”

“그, 그것이. 그러니까, 아주머니들이 말씀해 주셔서.”


아하. 이런 발칙하고 귀엽고 솔직한 여자를 다 봤나.


알고 있다고?

사내의 음경이 없이 여인을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을 여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수윤이 그만 활짝 웃고 말았다.


“오늘 밤부터 내가 그리해 주기를 바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나는 내 아내를 위해서 그 정도 수고는 할 준비가 되어 있소. 목각도 굵은 것으로 준비를 하고.”


그때 여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여희가 소반에 놓인 물그릇을 들더니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물그릇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물그릇까지 집어 들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시는 것을 보며 수윤이 겨우 웃음을 참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혼인 다음 날 아침부터 조반상을 앞에 두고 박장대소를 할 뻔했다.

그건 무척이나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니, 그랬다가는 아마 어젯밤의 그녀처럼 자신도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여기, 물이 한 그릇 더 있소.”


수윤이 소반 아래에 놓여 있던 물그릇을 여희에게 내밀자 그것을 잡으려던 여희의 손가락이 수윤의 손에 닿았다.


“앗!”


손가락이 닿는 순간 여희가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히끅.”


그 순간 여희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무 놀라 헛숨을 쉰 탓에 딸꾹질이 시작된 것이다.


“히끅, 히끅, 히끅!”


쉬지도 않고 나오는 딸꾹질에 놀란 여희의 눈이 동그래지자 수윤이 얼른 물그릇을 내밀었다.


“숨을 쉬지 않고 물을 마시면 딸꾹질이 멎는다 하오. 쭉 들이켜시오.”

“히끅! 히끅!”


물을 받아 든 여희가 시키는 대로 쉬지도 않고 물을 전부 마셨는데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숨을 크게 쉬어 보시오.”

“히끅!”


그러나 아무리 숨을 크게 쉬려고 해도 딸꾹질 때문에 숨을 크게 쉴 기회가 없었다.


“히끅! 히끅!”

“안 되겠소. 내가 등을 두드려 주겠소.”


아무리 해도 여희의 딸꾹질이 멎지 않자 수윤이 그녀의 뒤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자 이번에는 여희가 켁켁 기침을 해 댔다.


“계속 기침을 하시오. 숨을 뱉어내야 딸꾹질이 멈출 것이오.”


여희의 등을 두드려 주며 수윤은 살짝 생각했다.


원래 딸꾹질을 멈추는 방법은 세 가지다.

찬물을 숨을 쉬지 않고 마시는 것, 들숨과 날숨을 길게 세 번 반복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라는 것.

사람이 깜짝 놀라면 딸꾹질이 멎는 법이다.


‘등을 두드려서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역시 놀라게 할 수밖에 없나? 그런데 어떻게 놀라게 하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중 제일은 역시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여희의 등을 두드리며 수윤이 슬며시 그녀의 귓가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마시고 단번에 큰 소리를 질렀다.


“왁!”


놀라게 하려고 한 소리에 여희가 화들짝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꺄아아악!”


갑자기 귓가에서 큰 소리가 나자 놀란 여희가 고개를 휙 돌리다 말고 비틀거리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분명히 바닥을 짚었는데 딱딱한 것이 아니라 물컹했다.


물컹. 물컹?


여희는 제 딸꾹질이 멎은 것도 몰랐다.

물론 수윤도 여희의 딸꾹질이 멎은 것을 몰랐다. 지금 딸꾹질보다 더 중요한 일이 벌어진 까닭이다.


“.”


여희가 손으로 누른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닥을 짚는다는 것이 그만 수윤의 사타구니 안쪽을 짚었는데, 딱 그 중심에 손이 닿았다.

그런데 손바닥에 만져지는 이 커다랗고 물컹거리는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꼭 바지 안에 고깃덩어리를 숨겨 놓은 것처럼 말이다.


“.”


천천히 손바닥을 떼며 여희가 수윤을 가만히 쳐다봤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혹시, 바지 안에 고기를 넣어 두셨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물었다가는 미친년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다.

누가 바지 안에 고기를 넣어 두겠는가.


“.”


당황한 것은 수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희의 손이 하필이면 제 중심을, 그것도 음경을 정확히 눌러 버렸다.

그리고 눌리는 순간, 음경이 꿈틀거렸다.


“고.”


수윤이 얼른 뒤로 물러나 앉았다.


“고환이 없어도 으, 음경은 머, 멀쩡해서 그렇소.”


그리고 이내 후회했다.


왜 이런 말을 해 버렸을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을.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수윤의 귀도 달아올랐고, 여희의 귀도 달아올랐다.

누가 봤으면 조반상을 앞에 두고 둘이서 일이라도 치른 줄 알았을 것이다.



“집이 굉장히 넓구나.”


조반상을 물린 다음 할 일이 없어진 여희가 집 구경을 나섰다.

수윤은 입궐한다고 방을 나간 후부터는 만나지 못했다.


“일벌레도 아니고. 혼인까지 했는데 일은 무슨 일.”


혼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가마를 보낸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아무리 일이 좋아도 오늘 같은 날에는 입궐하지 않고 자신과 시간을 더 가져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그 사내에 대해 알고 싶었다.

오늘 아침, 그 사내와 얼굴을 맞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척 즐거웠다.

물론 얼굴을 붉히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즐거웠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서 오랜만에 누군가와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6년 전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에는 누군가와 즐겁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유일한 말 상대는 어머니였다.


여희는 모든 이에게 살갑게 대하고, 모든 이와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다.

친절하고 다정하게 모두를 대하기 때문이다.

빨래터의 아낙네들과도 그렇게 친해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여희는 주로 듣는 쪽이다.

말하기보다는 들어준다.

잘 들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여희도 안다.

그래서 여희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꾹 참고 남이 하는 말을 주로 들어왔다

.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정말 몇 년 만에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다.

왜 혼인을 받아들였냐고 묻는 수윤의 말에 속 시원히 전부, 꾸밈없이 말한 것도 재미있었다.


만약 다른 사내였더라면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질문을 했더라도 자신이 그런 대답을 들려줬을 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런데 그 사내는 재미있다고 해 주었다.

그 웃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대답을 좋아해 주고 웃어 준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그런 사소한 것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동안 여희는 지쳐 있었다.

수윤에게도 말했듯이 너무 지쳐 있었다.


아버지와 오라비는 자신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왜 그러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 준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다.


“희야, 무슨 색이 좋으니?”

“희야, 여기에 뭘 심고 싶으니?”

“희야, 오늘은 무슨 꿈을 꾸었니?”

“희야, 누가 널 울렸니?”


단순하고 또 단순한 질문을 어머니는 계속 해 주셨다.

눈을 마주치고 자신의 표정을 살피며 그렇게 물어봐 주셨다.


그것이 좋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더는 눈을 마주치고 그렇게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을 때, 비로소 그때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가난한 것도 괜찮았다.

가난할 수 있다.

무능력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다 능력이 뛰어날 수 있겠는가.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급제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상관없다.

다만, 가난해도, 무능력해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도 적어도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신경을 써 주고, 눈을 맞춰 주고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은 할 수 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나는 네게 관심이 있어.’라는 뜻이니까.


자신은 가난에 지쳤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오라비의 무관심에 지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쌀독에 보리쌀이 부족해서 딱 두 그릇의 밥이 나오게 밥을 짓고, 자신은 나중에 남은 것을 먹기 위해 굶고 있어도 그 두 사람은 왜 같이 먹지 않느냐고 물어봐 준 적이 없다.


단오에 동네의 처녀들이 전부 그네를 타러 가도 여희는 가지 않았다.

다른 처녀들이 그날 색동 댕기를 매달고 그네를 타러 갈 때 여희는 낡은 옷에 낡은 댕기를 매달아도 상관없으니 그네를 타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양반은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는 부친의 말에 가고 싶은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날 너무 슬퍼서 울고 있을 때 그 앞을 부친도, 오라비도 지나갔으나 왜 우느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다.


이번 혼인만 해도 그렇다.

혼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상대와 혼인하는 것도 괜찮으냐, 네가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느냐, 그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

이미 혼인을 결정짓고 강요만 해댔다.


자신이 아무리 싫다고 거부해도 아버지는 기어이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싫고 지긋지긋하고 지쳐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고, 아무래도 좋으니 시집을 와 버린 것이다.

수윤에게 어제 말했듯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말이다.


그렇게 여기로 시집왔는데 여기서 자신에게 먼저 물어봐 주고, 대답을 기다려 주고, 대답에 재미있다고 웃어 주고, 또 물어봐 주는 사람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오늘 아침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혼자 방에 남았을 때 배를 잡고 웃었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지난밤에 요강에 앉아 있다가 수윤과 눈이 마주친 것도 우스웠고, 물을 마시다가 딸꾹질을 한 것도 우스웠고, 고작 손이 닿았는데 그렇게 놀란 것도 우스웠다.

자신의 등을 두드려 주다가 놀라게 하려고 소리를 질러 준 수윤의 행동도 우스웠고, 자신이 그만 그의 음경을 누른 것도 우스웠다.

그 후에 둘 다 당황해서 남은 밥을 먹느니 마느니 하다가 결국 수윤이 허둥지둥 나가던 뒷모습도 우스웠다.


“오늘 저녁에는 그래도 얼굴을 보여 주시겠지?”




얼굴만 보여 줄까?


음경이 없어도 여인을 만족시켜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여희가 또 웃고 말았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남녀 사이의 밤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내와 함께라면 밤일을 못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처럼 그렇게, 평생의 지기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말이다.


“환관의 부인이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


그렇게 웃고 있을 때 어제 안채로 안내해 준 고운 얼굴의 하녀가 다가왔다.


“마님.”


하녀의 이름은 운심이라고 했다.

운심에게는 그녀보다 다섯 살 나이가 많은 남편과 여섯 살짜리 딸이 있다.


그녀의 딸은 그녀를 닮아 미인이었다.

그녀가 딸에게 잘해 주는 것을 보며 여희는 어머니와 자신을 떠올렸다.


정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찾아서 자신이 혼인한 것을 알려 드리고 싶고, 이제는 고생을 더는 안 해도 된다고 알려 주고 싶다.


“마님, 목간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이 집에는 하인들이 많이 있다.

오늘 여희는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그 이유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매일 하던 일이 있다.

몸에 습관처럼 배어서 매일 해 왔던 일들을 하지 않으니 이상하게 허전하고 묘했다.


더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아도 되고,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고, 빨래를 손수 하지 않아도 된다.

쌀독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는 일도 더는 하지 않아도 된다.

남이 차려 주는 밥을 먹고, 남이 데워 준 물에 몸을 씻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운심 언니.”


여희는 운심을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부친이 들었으면 양반 체면에 하녀를 언니라고 부른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이 집에 부친은 없다.

뭘 해도 자신의 자유다.


“대감께서는 늦게 돌아오시나요?”

“서운하세요?”


운심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

“어젯밤은 어떠셨어요?”

“아니, 그냥 잠을 잤는데.”

“잠만 주무셨어요? 정말이에요? 초야인데?”


운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놀라지? 그게 없으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설마 그게 없으니까 다른 걸로 초야를 치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니까 대감께서는 환관이시니까 그것이 없으시니.”

“아, 그렇지요.”


그제야 운심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마님께서는 환관이셨지요. 참 그랬었지. 나도 참, 바보같이 그걸 잊어버리고. 그게 없으시지. 맞아, 맞아. 그게 없으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운심이 목간통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려던 여희의 손목을 얼른 붙잡았다.


“그쪽이 아니에요, 마님.”

“네? 하지만 조금 전에 저쪽에서 목간통에 물을 받는 것을.”

“아니에요, 아니에요. 목간 물은 이쪽입니다.”


운심이 여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손에 끌려가면서도 여희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저쪽에서 분명히 목간통을 봤다.

집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한참 물을 받고 있는 것을 봤고,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목간 물을 받는 것이라는 대답까지 들었다.

그런데 거기가 아니라고?

그렇다고 운심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자, 자, 이쪽이에요, 마님.”


운심은 여희의 손을 잡고 안채가 아닌 사랑채로 데려갔다.

물론 여희는 그곳이 사랑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집이 워낙 넓어서 아직 다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이곳에 목간 물을 받아 놓았습니다. 씻고 계시면 갈아입을 의복을 가져오겠습니다, 마님.”


운심이 등을 떠밀자 그 손에 떠밀린 여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탁.


여희가 들어가자마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안쪽은 뿌연 습기가 가득했다.

목간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문을 닫아 놓았기 때문에 안에 습기가 갇힌 까닭이었다.


‘앞이 안 보여.’


수증기가 너무 꽉 찬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여희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 손으로 앞을 휘휘 젓자 뿌옇게 앞을 가리고 있던 수증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목간통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여희가 발을 멈췄다.

목간통 앞에 누가 서 있었다.


“아.”


처음에는 살색이 흐릿하게 수증기 사이로 보이더니, 조금 더 수증기가 걷힌 후에는 그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벌거벗은 사내의 알몸이 말이다.


“꺄아아아악!”


이번에야말로 여희가 이 안이 떠나가도록 비명을 질렀다.


“이, 이, 일부러 본 것이 아니에요!”


소리를 지르며 돌아선 여희가 밖으로 달아나기 위해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밖에서 잠겼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왜 안 열려?”


문을 쾅쾅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잠근 것이 틀림없었다.


“운심 언니! 언니!”


이 안에 괴물과 같이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여희가 비명을 질러 대는 사이에 수윤이 얼른 옷을 걸쳤다.

당황한 것은 수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흘 동안 입궐하지 말라는 어명 때문에 오랜만에 집에 있게 되어서 낮 시간 동안에 목간을 개운하게 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닫히더니 여희가 들어온 것이다.

황급히 옆에 있던 옷으로 몸을 가리긴 했지만 어차피 볼 건 다 봤을 것이다.


“옷을 입었으니 그리 놀라지 않아도 되오.”


수윤이 아직도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 문을 두드리고 있는 여희를 향해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문을 두드리던 여희가 살며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봤다.


“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왔어요. 정말 일부러 보려던 것이 아니라.”

“알고 있소. 누님이 아마 짓궂은 장난이라도 친 것이겠지요.”

“누님이요?”


수윤이 운심을 부르는 호칭에 여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윤은 환관이긴 하지만 대감이다.

정2품의 품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집에서 부리는 하녀를 왜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왜 운심 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시나요?”

“그건 당신이 누님을 운심 언니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니겠소. 당신은 왜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시오?”

“그거야 윗 연배시고.”

“양반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신분이 낮은 자에게는 존대를 하지 않는데, 양반의 딸이 일개 하녀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남들이 알면 분명 흉을 볼 것이오.”


“누님이라고 부르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아요.”


여희가 두 손으로 뺨을 톡톡 때렸다.

이제야 겨우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런데 분명히.’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여희가 바지와 저고리 위에 철릭을 겹쳐 입는 수윤을 빤히 쳐다봤다.


‘틀림없이 거기에 털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분명 다리 사이의 거기에 털이 나 있었다.

아주 잠깐, 그것도 거의 짧은 순간 본 것이지만 분명 털을 봤다.

그것도 아주 수북하게 검은 음모를 말이다.


음모에 덮여 그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은 분명 오늘 아침에 자신이 손으로 꾹 누른 그 고깃덩어리, 아니 음경일 것이다.

게다가 다리에도 털이 좀 나 있었다.

짧은 시간에 별걸 다 봤다고 하겠지만, 보인 것을 어쩌겠는가.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환관인데 체격이 건장하고, 환관인데 목젖이 툭 튀어나와 있고, 환관인데 목소리가 굵으며, 환관인데 다리에 털이 나 있다.

게다가 환관인데 다리 사이에도 털이 나 있다.

환관은 털이 안 나는 것 아닌가?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수상해서 눈만 깜빡거리던 여희가 문득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입궐하신 것 아니셨나요?”


그렇다. 오늘 수윤은 입궐한다고 했다.

그런데 입궐한다고 했던 사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것일까?

설마 이 사내는 김수윤이 아니라 김수윤의 쌍둥이라든가 그런 것일까?

쌍둥이라서 한쪽은 환관이고 한쪽은 아니고?


충분히 신빙성 있는 가설이라서 여희는 스스로 감탄했다.


“여기가 궁궐은 아닐 것이고. 혹시 거짓말을 하셨다든가.”

“입궐을 할 예정이었으나.”


당황한 수윤이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만들어 냈다.


“궐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돌아왔소.”


반은 거짓말, 반은 사실이다.

궐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돌아왔다는 것은 거짓말, 정말 궐에 갔어도 문지기가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을 테니 절반은 진실이다.


“궐에서 왜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건가요?”

“그건.”


이 시점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수윤이 살짝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은 쉽게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말이다.


“어명이 내려왔소.”

“어명이요?”

“사흘 동안 입궐하지 말라는 어명 말이요. 혼인했으니 사흘 동안은 궁궐 출입을 말고 내실에만 집중을 하라는 명이 내려왔고, 어제 당신이 혼자서 전부 마신 술 역시 주상 전하께서 내리신 어주요.”


“그러면 오늘 원래 입궐 예정이었는데, 입궐하려고 보니 어명이 내려져서 입궐을 못 하고 돌아오셨다는 것인가요?”

“사흘 동안은 말미를 주셨소, 주상 전하께서.”


목소리와 얼굴을 보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 하여 그것을 구분해 낼 능력이 여희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희는 그 말의 사실 여부보다는 수윤이 오늘부터 사흘 동안 내내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온종일 이 집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수윤이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아서 거짓말의 여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하지만 좋은 것을 떠나서 수상쩍은 것은 수상쩍다.


대체 환관이라면서 왜 이렇게 전혀 환관같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가짜 환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건 또 말이 안 된다.

궁궐에 보는 눈이 몇 명이고,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대전 내시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대전 장번 내시인데 가짜 내시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궁궐 사람들이 전부 눈이 삐거나, 아니면 다들 가짜인데도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궁궐 사람들이 왜 그런 것을 눈감아 주고 같이 사기를 치겠는가.


‘가짜 환관은 아닌 듯하고. 그런데 대체 왜 환관이 털이 있냐고. 예외 없는 상황은 없다고, 환관이지만 털이 나는 희귀한 경우를 내가 본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토끼풀은 원래 세 잎이 정상인데 가끔 네 잎 토끼풀도 있지 않은가.

개나리는 봄이 피지만, 아주 가끔 날이 따뜻한 겨울에 잠시 동안 피는 미친 개나리도 있잖은가.

그런 것처럼 환관인데 털이 나는 아주 극소수의 희귀한 경우가 있고, 김수윤이 그 희귀한 경우에 해당하는 걸 수도 있다.

가짜가 아니라 말이다.


그렇게 여희가 살짝 의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래, 세상에는 그런 환관도 있는 법이지!

털 난 환관, 목젖 튀어나온 환관, 어깨 벌어진 환관, 음모가 수북한 환관도 있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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