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썰 어린 외숙모와의 깊은 추억 -에필로그
페이지 정보
본문
야썰 어린 외숙모와의 깊은 추억 -에필로그
외숙모와의 이야기를 이곳에 처음 쓴 동기는...얼마 전 일요일, 오랜만에 외숙모가 전화를 저에게 하셨습니다. 제가 결혼 한 후, 아주 특별한 일이나 집안 행사 같은 일 아니면 웬만해선 저에게 먼저 전화를 잘 하시지 않으시는 데,, 사무실 근처라고 잠깐 얼굴을 보자고 하시더군요. 별 생각 없이 나갔는데, 제가 좋아하는 자연산 장어 사주신다고 드라이브도 할 겸 청평으로 빠지자고 차에 타라고 하십니다. 정말 당황스럽더군요. 급하게 외국시간에 맞춰 초치기 할 일들이 산더미로 쌓여있는데,,,,, 그래서 일요일인데도 나와서 일하는데....
제가 하는 일을 자세히는 말씀 드리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솔직한 이니셜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밝혔고, 유학 갔던 것도 짧게 언급을 했습니다. 나이는 90학번 또는 91 학번으로 볼 수 있는 만나이로 38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 정보만으로는 누군지 잡아내기가 참 힘듭니다. 하지만 정확한 직업까지 언급되면 혹, 고등학교 동창이 이 글을 본다면 윤곽이 보일 것 같아 그러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나 오늘 저녁까지 끝내서 넘길 일들이 정말 많은데,,아~~ 미리 말 좀 하고 오지..” 난처한 표정으로 제가 말을 합니다.
“갑자기 집안에 급한 일 생겼다고 직원들에게 오늘 하루 만 좀 부탁해..나 일부러 왔는데..그리고 오늘이 일요일이자나. 사장이 그 정도도 못해?” 오늘따라 이상한 외숙모...
“아니 그러니까, 일부러 오려고 계획 잡았으면, 나한테도 계획을 사전에 알려줘야지. 뜬금없이 이러니 그렇지. 나랑 요 옆에서 맛있는 식사만 하고 오늘은 가고, 이번 달 중순 쯤 나 안 바쁠 때 장어 먹으러 가자고”
차 운전석에 앉아 내린 차창 너머로 저를 말없이 계속 바라보십니다. 50 중반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아이가 없어 아이들 육아와 교육에 쓸 에너지와 시간을 본인에게 많이 투자하셔서 그런지, 제 와이프와 비교해도 언니뻘 정도로 보입니다.
“알았어, 일 하는데 주책 부리면서 방해해서 미안해, 간다..들어가서 일해..바쁘고 더워도 끼니마다 밥 챙겨 먹고” 그리고선 바로 엑셀을 밟으시고, 차는 떠나갑니다.
이 일이 있었던 날이 지난 일요일 그러니까 7월 4일 점심 무렵 이었습니다.
일을 겨우 기한에 아슬아슬하게 맞추고 파김치가 된 저는 수고한 직원들을 데리고 간단히 회식을 하며 소주를 빈속에 넘겼습니다. 일 때문에 하루 온종일 신경을 안 쓴 핸드폰을 그제야 열어 봅니다. 이젠 제법 문자도 잘 찍는 초등학교 2학년인 큰딸의 앙증맞은 문자도 보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이 학교 안가는 놀토니까 놀이동산 가잡니다. 피식 웃으면서 도착한 문자들을 보는데 외숙모의 문자가 하나 와있습니다. 아마 저에겐 처음으로 보내신 문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매년 7월 4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을 위해 내가 죽을 때 까지 비워두겠다고 왜 거짓말해서, 네가 뭔데 늙고 외로운 나를 생일날 울리니?”
헉.....맞다...외숙모 생일이 7월 4일 입니다.
대학교에 입학을 한 후, 학기 초반에는 외숙모를 자주 보기위해 과외도 외숙모집 근처에 잡았고, 시간만 나면 자주 외숙모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중간고사다 기말고사다 각종 학교행사다..그리고 새로 사귄 대학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만날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들더군요. 그렇다고 외숙모를 향한 마음이 식었던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예전 같이 애틋한 그런 느낌은 섹스 횟수가 늘어나면서 많이 퇴색된 상태였습니다. 어디로 도망도 안가고, 항상 나를 위해 기다려 준다고 생각을 하니, 그때부터 너무 방심하고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들어도 넘기던 잔소리에도 말대꾸를 하게 되었고, 잠깐 헤어졌던 애인을 다시 몰래 만나는 기간 동안 저는 절대 아니라고 거짓으로 우겼지만 육감으로 너 여자 있는 것 같다고 추궁하시고, 그 뒤 무의미한 말싸움을 하고, 결국 헤어지자고 외숙모가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서럽게 우시고, 그리고 몇 주 동안 안 만나다.. 제가 집으로 찾아가서 사과하면 다시 받아주시고.. 그 당시 우리의 관계는 남들의 눈을 피하는 떳떳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연애였습니다. 서로 원하고 사랑을 하고, 가장 둘이 잘 맞는데도 결혼도 못하고 그렇다고 헤어지지도 못하고, 피눈물 나는 고통이었습니다.
근친의 무서움은 친족관계란 이유로 성관계는 정리해도 인간관계 까지는 정리를 못하는 점입니다. 집안의 일만 있으면 좋건 싫건 만나야 하고.....
서로 예상 못했던 상황 속에서 한참동안 둘 모두 힘들었습니다. 저도 외숙모도 기억나는 짜릿하고 달콤한 순간들 이상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근친의 시발점은 섹스였지만 그것은 정말 일부분입니다. 남의 눈을 피하면서 인간관계를 비밀스럽게 유지하면서 필연적인 상처를 서로에게 주고, 그것을 후회하고, 뒤돌아 몇 번이고 헤어질 각오를 하지만 상대편이 나 없으면 힘들어 할까봐.....언젠가는 분명히 헤어진다는 공포감속에서 하루하루 연인관계를 연장해가는 피 마르는 관계였습니다.
둘의 그런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 대학교 첫 여름방학 때 외숙모와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외숙모는 제주도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간다는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만드셔서 가능했습니다. 촌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니 더 흥분되더군요. 2박 3일로 간 여행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외숙모가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수줍게 말합니다. 늦은 시간이라 제과점에서 케이크도 못 구하고, 겨우 호텔 객실 서비스에 부탁해 조각 케이크 위에 어설픈 초를 꼽아 조촐하게 생일축하를 해주었습니다.
너무 행복하다고, 제가 나중에 장가가고 가정을 꾸며도, 최소한 자기생일날 만큼은 단 둘이서 점심이라도 꼭 하자고...
“무슨 소리야! 점심이라니 외숙모 생일이면 항상 이렇게 여행 와서 내가 축하해 줄게..‘7월 4일 생?’ 미국 독립기념일 이네! 영화제목하고도 같고! 절대 안 잊어먹겠네”
너무나 행복한 미소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외숙모는 저에게 안기셨습니다.
외숙모의 문자를 보고 그 당시의 쓰고 달았던 에피소드들과 허망한 약속이 기억났습니다. 그 지겹도록 질긴 인연이 또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외숙모를 울리나 하여. 직원들을 뒤로하고 혼자 바에서 폭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외숙모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 싶어 힘든 용기를 내어 처음에는 언제 끝날지도 몰랐던 글을 이곳에 올리기 시작한 겁니다. 잊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외숙모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미안함에 글을 쓰며 몇 번을 흐느껴 울었답니다. 동시에 아이들과 부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쓰며 가족에 대한 미묘한 미안함까지 뒤섞여 이번 한 주는 뭔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그냥 후일담까지 빨리 써야 카페 회원님들에게 한 약속에서 해방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글을 쓰며 느끼는 만감의 교차가 비록 부끄럽지만 언젠가는 직면해야할 스스로에게 향한 고해성사를 위한 에너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 온 후, 어느 정도 둘의 관계는 차분해 지고 성숙해 졌습니다. 무조건 무리해서 만나는 것 보다는 최대한 둘이 보고 싶을 때 까지 참았다 만나는 패턴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섹스에만 몰두하기 보단, 영화나 연극도 보고, 미술전람회에도 가고, 외숙모에게 운전도 배우고...데이트의 장소가 다양해 졌습니다.
섹스에 대한 환상도 많이 시들해져서 외숙모만 보면 덤비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니, 외숙모의 학창시절 얘기, 가족들 얘기, 취미 등 대화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처음엔 오로지 몸 하나만 보고 달려들었지만, 폭풍과도 같았던 초반의 갈등이 사라지면서 상당히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외숙모가 워낙 집안 살림도 빈틈없게 잘 하셔서 외삼촌의 의심이나 가정불화도 없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소개팅 해준다고, 그리고 술자리나 모임에 여자들 보러 가자고, 나이트에 여자 꼬시러 가자는 등 유혹들이 많았지만, 새로운 여자에 대한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뭐 남들 다 가는 거라 별로 두려움이나 아쉬움은 없었지만, 소중한 많은 것들을 두고 간다는 불안감이 입대 날자가 다가오면서 점점 커져갔습니다. 외삼촌이 들어만 봤던 룸살롱에 저를 데리고 가서 술을 사주시더군요. 우리끼리의 비밀이니 저 보고 파트너 아가씨와 2차를 나가라고 하셨는데, 외숙모 생각에 극구 사양을 했습니다. 입대를 코앞에 둔 어느 날 외숙모와 단둘이 명동에서 낮술을 마셨습니다. 빈대떡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기 전에 저를 미용실에 데리고 가서 머리도 짧게 자르게 해 주셨습니다. 이발소 가도 된다고 하는데 극구 자기 눈으로 보고 싶다고..아 놔... 그건 그렇고 정말 왜 그리 대낮부터 빈대떡집에서 우시는지.. 그 날 모텔에서 정말 격렬하게 서로를 탐했습니다.
휴가 때 나와서 남들 눈을 피해 외숙모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나오는 휴가라 그런지 저의 이동 동선이 뻔히 노출이 되어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핑계를 대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아침시간이나 낮 시간을 쪼개서 애절하게 외숙모를 만났습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니, 미래가 불안합니다. 뭐를 해서 밥벌이 할지부터, 외숙모와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불안...
어느 날 아버지가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가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외숙모를 혼자 남기고 가는 미안함..이미 그 당시에 외숙모는 저 없으면 못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외숙모는 저에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것도 외숙모와 조카라는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관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말입니다.
힘들게 외숙모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드리니, 무슨 고민이냐고 당연히 가야 하는 거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가끔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십니다. 큰언니 집이 미국에 있으니 겸사겸사 핑계대면 애도 없는데 그깟 미국 못 가겠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과 달리 나중에 단 한 번도 미국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오실 그깟 미국에 말입니다.
3년 7개월을 미국에 있었는데 한국에는 두 번 정도 여름에 나왔습니다. 그때 마다 외숙모를 만났는데, 무엇인지 예전과 다릅니다. 나중에는 제가 힘들게 연락을 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더 이상 안 찾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전화를 걸면 외삼촌이 분명 오해를 하실 테고, 편지를 쓰고 싶어도 외삼촌이 혹시 우편물을 받으실 수도 있으니 그러지도 못하고, 정말 근친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시절입니다.
“외숙모! 애인 생긴 거야? 응? 나한테 까지 비밀 만들 필요 없잖아. 왜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거야?”
“애인?? 왜?? 만들었으면 좋겠니? 남편 두고 너랑 이러니까 내가 남자에 환장한 여자로 보이니?”
너무 놀라운 외숙모의 말에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먹먹해 지더군요. 말없이 손을 잡고 모텔로 가자는 눈치를 주었습니다.
“나 오늘 그날이야..”
“그럼 하지 말고 안고만 있자...”
“왜 외국가면 네 큰 물건 인기도 좋았을 텐데..여자 많이 굶었니?”
“허....왜 그래? 그런 말 하는 사람 아니자나, 외숙모 왜 이렇게 변한거야?”
“모든 게 변하는데 나만 똑같이 너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너만 기다리고 살아야하니? 나 몸 안 좋으니 이만 들어갈게”
두 번째 한국을 방문했을 때, 외숙모는 제 앞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다시 미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받고도 끊으시더군요. 남은 방학기간을 한국에서 소주에 몸을 담구며 보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편지를 썼습니다. 처음으로 외숙모에게 쓰는 편지였습니다. 무슨 용기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지, 혹시 외삼촌이 보시기라도 하면...., 하지만 집안에서 살림을 하시는 외숙모가 외삼촌이 출근한 이후 분명 우편물을 받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하는 불안감에 글을 쓰는 내내 엄청나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외숙모에게 제 마음을 전달할 방법은 당시에는 그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메신져나 이메일만 있었어도 그런 마음고생을 안했을 텐데요..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빽빽하게 글로 채운 종이가 20장이 넘습니다. 일반우편으로는 무게 때문에 못 보낸다고, 서류소포로 보내랍니다. 처음엔 간단한 안부 편지로 시작하다가.. 예전 기억에 감정이 심하게 일렁이면서 너무나 애절한 사랑의 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이른 저녁에 전화가 울립니다. 외숙모가 엉엉 웁니다. 예전에 저랑 처음 관계를 맺고 울던 눈물 토해내는 서러운 소리입니다. 울지 말라고 진정하라고 달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눈물 콧물에 정확한 발음은 아닌데 너무 보고 싶다고 미안하다고...너무 힘들어 죽겠다고 더는 못 참겠다고 엉엉 웁니다. 외숙모는 우편물을 받자마자 서서 그 자리에서 읽다가, 마룻바닥으로 쓰러져 울었다고,,제가 한국에 왔을 때 제 미래를 위해서 그만 놔주려고 일부러 쌀쌀맞게 군것이 너무 후회된다고..저도 엉엉 서럽게 울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서러웠습니다.
이혼하고 바로 짐을 싸서 미국으로 온다는 걸 말리는데 굉장히 애를 먹었습니다. 단 하루라도 남의 눈 신경 안쓰고 제 부인으로 살고 싶다고 하십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냥 미국으로 와서 둘이 혼인신고 하고 평생 숨어사는 상상을 했다고..
정말 그 어떤 쇠가죽 보다 질긴 근친의 연은 일반인 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작하기보다 끊기가 더 어렵습니다.
시간이 흘러 자랑스러운 아들로 귀국을 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 하는 회사에 좋은 자리 만족할 조건으로 취직도 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외숙모와 호텔에서 만나 몇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서로를 탐했습니다. 사정하면 또 제 물건을 키우고 발기되면 또 쑤시고, 룸서비스로 제가 미국에서 너무 먹고 싶었다고 했던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그 동안 쌓인 육체의 갈증을 원 없이 풀었습니다.
이젠 결혼을 하라고, 선도 보라고 집에선 성화입니다. 아버지께선 손자를 안아보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강요를 하십니다. 대학교 입학하기 전에 애인 한명 사귀는 것을 보신 이후에는 여자 사귀는 것을 단 한 번도 못 보셨으니 당연히 불안해하십니다. 오죽하면 외삼촌을 통해. 혹시 제가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혹시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대신 물어보게 만드실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동안 외숙모의 몸속에 쏟아 부은 정액만 몇 십 리터인 것을 알면 부모님이나 외삼촌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만큼 저와 외숙모의 관계는 누구도 의심 못 할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직장이 여의도였는데 늦게 끝나는 날도 많고, 출퇴근 시의 극심한 교통 체증 때문에 직장 근처에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얻고 주말이면 집으로 오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외삼촌이 골프장에 가셨다고 외숙모가 오신다고 합니다. 오시면서 찬거리와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득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미 몇 번 저의 아파트로 오셨기에 외숙모의 짧은 반바지와 나시티 그리고 속옷들 까지 옷장에 잘 감쳐두고 있었습니다.
오셔서 같이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절정의 섹스를 즐겼습니다. 외숙모는 나시 티셔츠에 하의는 팬티와 다름 없는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으시고, 반찬을 만들어 주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파트 벨소리가 납니다. 저와 외숙모는 정말이지 순식간에 완전 얼어붙습니다. 인기척을 내고 있었기에 사람이 없는 척을 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누구세요”
“어 나 박차장이야…….”
그렇습니다. 근처에 사시는 차장님이 토요일 날 맥주를 사가지고 놀러 오신다고 했던 것입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도저히 문을 안 열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열면서 “안녕하세요..들어오세요..외숙모님이 오셔서 반찬을 해주고 계셨는데..인사하세요...저희 외숙모...”
차장님이 외숙모를 위아래로 빨리 훑어보시더니 아주 당황한 표정을 짓습니다. 제가 봐도 외숙모의 젖은 머리 그리고 거의 다 벗은 복장은 정상적인 조카와 외숙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냥 숨겨둔 연상 애인이라고 했으면 잘 넘어갔을 상황이었습니다.
더 난처한 상황이 연속으로 발생합니다. 얘기치 못한 불청객의 방문에 당황하신 외숙모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죄인같이 반찬을 성급하게 냉장고에 넣고는, 내 방에 들어가 입고 오신 얌전한 정장으로 다시 갈아입으시고 도망치듯 사라지셨습니다.
그날 정말 어색하게 저는 차장님과 맥주를 마셨고, 서둘러 차장님은 나가셨습니다.
그 후, 평소에는 얌전하시던 차장님은 회식 자리에서 취기가 많이 오르시면 항상 저를 구석으로 불러, 외숙모 얘기를 하십니다. 진짜 외숙모 맞는지? 보통 외모가 아니던데, 자기에게 고객으로 소개 좀 해달라고, 그건 그렇고 둘이 상당히 의심되는 모습이던데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고 구설수에 오르면 바로 모가지라고.. 상당히 낌새를 차리신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 외숙모는 절대 제 아파트에 오시지 않았고,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압박은 더 심해졌습니다. 부모님이 제 허락도 안 받고 맞선 자리를 덜컥 잡아 두신 경우는 부모님 체면에 몇 번 나가기도 했습니다.
“XX야..결혼해.. 달라지는 건 없어. 간단히 생각하자고.. 나도 네 외삼촌하고 결혼을 했으니 너를 만난거야.” 외숙모도 저에게 정상적인 애인을 만들어 결혼을 하라고 하십니다.
외아들인데 도저히 아버지의 계속된 부탁을 외면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외숙모의 소개로 아가씨들을 만났습니다. 외숙모와 친하고 잘 아는 여자와 결혼을 하면 외숙모를 더 자연스럽게 만나고, 나중에도 여러 면으로 편한 분위기에서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외삼촌 외숙모께서 모든 인맥을 동원하고 까다롭게 외숙모가 여자들을 심사해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외숙모가 소개해 주는 여자들은 거부하지 않고 일단 만나자, 부모님은 외숙모에게 고맙다고 고맙다고....
몇 명의 여자들을 만났는데 별로였습니다. 그냥 시장에 물건이 판매되기 위해 나온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결국 몇 명의 아가씨를 만난 후, 아주 마음이 곱고 참한 현재의 제 집사람을 만났습니다. 외숙모 이 후에 처음으로 끌리는 여자였습니다. 키, 외모, 분위기, 그리고 전공 까지 외숙모와 많이 비슷해 같이 어디 나가면 언니 동생으로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외숙모가 둘을 도와주었습니다. 둘이 좀 친해지자 외삼촌과 같이 자연스러운 자리를 만들어 커플로 맺어지도록 도와주시더군요. 속전속결로 양가 부모에게 서로 인사를 하러 갔고, 갑자기 현재의 와이프가 아이를 갖게 되어 급하게 양가 부모님이 만나셔서 결혼식 날짜를 잡았습니다.
외숙모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후련하다고 정말 아들 장가보내는 심정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자기는 이제 점점 늙어가니까 저를 만족 시켜주기 힘들다고 섹스는 예쁘고 젊은 부인과 하고 가끔 만나서 밥이나 먹고 데이트나 하자고 하십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나와, 독립을 했습니다. 의기투합한 부하 직원 몇 명을 데리고 고객이었던 사장님들이 푸쉬를 해줘서 용기를 얻어 조금 이르게 별로 돈도 못 모아둔 상태에서 일을 저질렀습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는 않았습니다. 결혼할 때 아파트도 해주셔서..그리고 처갓집에서도 말을 꺼내면 도와줄 기세였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 혼자 힘으로 스폰해 주시고 거래해 주시는 주위 어른들의 도움으로 힘들게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사업이라서 그런지 예상보다 왜 그리 돈이 많이 나가는지....인건비다 기본 유지비다.. 거기에 예상하지 못한 각종 지출들은 끝이 없고,, 겉으로 보기엔 떼돈을 번다고 생각하는데 초창기 몇 달은 있는 돈 없는 돈 써가며 회사를 돌려서 생활비도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집에 가져다 줄 정도였습니다. 경기가 많이 좋아진 시점이었지만, 좀 고생을 했습니다.
어느 날 외숙모가 회사 앞 커피숍에서 잠깐 보자고 하시더군요. 봉투 하나를 꺼내시더니, “너 사업하는데 섣불리 도와주면 네가 오해할까봐……. 외삼촌이 눈치 안챌 정도의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회사에 풀지 말고 정말 급할 때 너나 집안 비상금으로 써.” 그리고 혹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돈이 부족해 사업이 힘들면 외삼촌에게 대놓고 도와달라고 하라고 코치해 주십니다.
“너희 아버지가 우리 남편 S대 4년간 학비 대줘서 졸업했고 우리 신혼집 전세비도 대출 받아 빌려주신 거였어. 지금 좋은 직장 임원으로 잘 다니고 있잖아. 그리고 우린 애도 없어서 큰돈도 안 나가고 네 외삼촌 의외로 알차게 재테크했어. 네 부탁 안 들어 줄 사람 아니야. 그러고도 또 다시 힘들어 지면 나라도 대출 받아 줄 테니 돈 때문에 젊은 애가 위축되지 말고 사업해” 몇 번 안 받는다고 거절을 했는데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시더군요.
커피숍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봉투를 살짝 열어봤습니다. 수표 다섯 장, 오백이더군요. 개인 비상금으로는 큰돈이었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정말 성공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입금을 하려고 은행에 가서 수표를 봉투에서 꺼냈는데 오백이 아니라 오천입니다. 가정주부가 해주기엔 너무 큰돈이라 돌려드리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전화를 안 받으십니다. 까불지 말고 줄때 챙겨두란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집안 대소사에 항상 큰 관심을 가져 주시고 애들 육아나 제 집사람에게도 장모님 보다 더 극진하게 신경을 써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아들을 안겨 드리지 못했지만, 저의 두 딸들은 가족의 따뜻한 축복과 사랑을 받습니다. 매순간 좋은 기억 속엔 외숙모의 축복과 축하가 함께 하고 있고요.
사업도 몇 번의 ups and downs가 있었지만, 큰 고통은 없었고 부족한 점은 아직 많지만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글을 어제 올리지 못한 게, 어제 외숙모를 모시고 인천에 다녀왔습니다. 불쑥 아침에 찾아가서 집 앞에서 전화를 드리니 너무 놀라서 나오시더군요, 뭐 드시고 싶은지 여쭤보니, 자장면이 드시고 싶다고. 그래서 드라이브 겸, 인천차이나 타운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거기를 간 건 처음이었는데 드라이브라고 하기엔 너무 막히고, 솔직히 운치도 없더군요. 하지만 정말 간만에 외숙모와 예전 얘기들을 했습니다. 막히는 도로위의 시간마저 즐기면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최근에 이곳에 글을 올리며 잊었던 작은 기억들도 제 머릿속에 다시 살아나 있었습니다, 외숙모도 잊고 있던 얘기를 제가 생생하게 끝없이 풀어내니,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며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던 기억들을 되살려 맛보시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시는 것 같았습니다.
외삼촌이 돌아오시기 전에 집에 모셔드려야 해서 오랜 시간을 같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모텔 앞을 지나면서 "오랜만에 잠깐 들어갈까?” 하니 당황해 하셨지만 기분 좋은 미소로 싫다고 고개를 저으시면서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꼭 잡아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외숙모와 섹스를 한 것이 언제 인지... 적어도 2년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끔 차안이나 외숙모집에 단 둘이 있을 때 저에게 뜨거운 키스를 해주시거나, 오랄로 저를 사정하게 해주신 적은 몇 번 있으십니다. 그런데 다음 단계를 요구하면 웃으시면서 기분 나쁘지 읺게 섹스는 거부를 하십니다. 힘 아꼈다가 애들 엄마에게 풀라고합니다. 차에서 내리시는데 외숙모가 좋아하시는 진한 보라색으로 포장한 선물을 하나 드렸습니다.
“뭐니?”
“생일선물,,,지금까지 번번이 받기만 하고 준 건 기억에 남을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손목시계야.. 화려하지 않고 가죽밴드라서 그냥 평상시에 찰 수 있을 거야, 부담 될 만큼 아주 비싼 거는 아니니까. 외삼촌에겐 쇼핑하다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고 해.. 현금으로 사고 영수증 넣었으니 필요하면 알리바이 만들고,,” 항상 외숙모가 저에게 선물을 주시면서 하시던 말을 저도 해봤습니다.
외숙모와 함께 했던 시간,, 그리고 현재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앞으로의 시간을 상징하는 선물이길 바랬습니다.
돌이켜 보면, 세상을 향해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으시고, 나이가 드시고도 넉넉한 다른 사모님들처럼 있는 척 거들먹거리시지도 않으시고, 오로지 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신 우리 외숙모입니다.
외숙모가 어제 (이 글을 토요일과 일요일 새벽까지 이틀간 써서 금요일입니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나 말야, 정말 애인은 잘 둔 것 같아. 이 세상에..20년 넘게 헤어지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애인이 어디 있어? 요즘은 부부도 1/3이 이혼을 한다는데 말이야. 너 같은 남자에게 지금까지 받은 사랑만 생각해도 과분해.. 애들 엄마한테 더 잘해..”
이제 정말 외숙모와 저의 얘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여기서 밝힐 외숙모와의 얘기는 없습니다.
이글을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같은 종류의 아픔을 경험한 분이 읽으시고, 옆의 그분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보란 듯이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