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랑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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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개를 헤치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정희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연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의 일이 꿈이라기엔 믿기지 않게 선명했다. 잠시 천장을 쳐다보다 빠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혜정아, 나야 정희.” “어, 그래… 아침부터 왠 일이니?” “너 혹시 강연아 아니?” “알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고-뤠? 마침 잘 됐네. 그럼 너 그 애 전화번호 아니?” “잠깐만. 핸드폰 연락처 찾아보면 있을 거야. 내가 다시 확인해보고 있으면 문자로 넣어 줄게. 근데 연아는 왜?” “뭐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빨리 찾아봐줘.” 연아의 전화번호가 적힌 문자가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문자를 바라보며 한참을 침대에서 생각 속에 뒤척이다 정희는 불현듯 일어나 서둘러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아침도 안 먹고 어디 가니?” “친구 좀 만나려구요.” 길을 나서며 연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정희야.” “누구?” “3반의 손정희라고.” “아… 그렇구나……”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니?” “어, 나는 잘. 너는?” 연아의 되물음에 정희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의 악몽은 악몽이 아니라 사실임을 지금 연아가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나도 잘.” “그랬구나… 다행이야. 걱정했었는데……” “다음부턴 그쪽 애들 조심하도록 해. 야자 끝나고 갈 땐 친구들이랑 같이 가고. 아니면… 나랑 같이 가던지. 참. 너 집이 어디지?” “나 버스 정류장 위쪽으로 쭉 올라가면 있는 아파트.” “아… 그럼 정류장 옆 횡단보도까지는 같이 올 수 있겠구나?” “그러니?” “응. 그럼 같이 갈 친구 없는 날엔 나랑 같이 가자. 마침 혜정이도 같은 방향이니 뭉쳐서 다니면 괜찮을 거야.” “그래. 좋아. 그리고… 고마워. 어젠 정말 너 아니었으면……” “아냐. 별일 없었으니. 담부턴 조심하도록 하고. 그럼 월요일 보자.” 통화가 끝나자 마자 정희는 어금니를 깨물며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김주호 선생의 원룸. 뚫어지게 문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난 후 정희가 초인종을 누르려 할 때,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정희 왔구나? 어서 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바라보는 김선생의 태도에 정희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문을 열어 놓고 돌아서는 그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주방에서 서성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못했지? 나랑 같이 하자. 내가 샐러드는 제법 잘 만들거든. 냉장고에 보면 식빵 있는데 좀 꺼내서 토스터기에 넣어줄래? 시간은 맞춰져 있으니까 눌러주기만 하면 돼. 커피는 조금 전에 내려놨으니까 여기 선반에 있는 컵 가져가서 따라 마시도록 하고. 내 것도 좀 따라줘. 참, 냉장고에 있는 계란도 좀 갖다 주면 좋겠는데. 토스트에 넣게.” 정희는 그의 말에 동전이 투입된 기계처럼 냉장고에서 식빵을 꺼내 토스터기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선반에서 그릇 하나를 가져가 냉장고에 있는 계란4개를 꺼내 분주한 그의 옆에 놓아주고 다시 컵 두 개를 꺼내 식탁에 올려놨다. 주방 한쪽에 놓인 커피포트에서 갓 내린 커피를 가져와 잔에 따르고 다시 원래의 위치에 갖다 놓은 후 그의 옆에 섰다. 샐러드를 만든다고 두 손에 비닐 장갑을 끼고 열심히 재료들을 버무리듯 섞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제법 잘 만든다고 호언하던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손길은 엉성하기만 했다. “선생님,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아냐, 내가 이런 정도는 제법 한다니까.” “그러다 완전히 떡 만드실 것 같은데요? 더 망치시기 전에 제게 맡기세요. 대신 토스트나 좀 봐주세요. 전 잼보다 버터 바른 게 좋은데… 버터 있으세요?” 그가 못이기는 척 자리를 비켜줬다. “당연히 있지. 그럼 좀 부탁해. 대신 토스트는 내가 맛있게 만들어 줄게.” “건포도는 어디 있나요?” “내가 안 꺼냈나? 있어봐, 꺼내줄게. 음… 건포도를 어디다가 두었더라…… 참, 냉장고에 주스도 있으니 맘에 드는 것으로 골라서 꺼내고.” 한동안 그렇게 익숙한 사람들처럼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으며 두 사람은 제법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먹을 만 하지?” “네. 맛있어요.” “다행이구나. 모자라면 말해. 금방 다시 해줄 테니.” “금방 제가 다시 해야 하는 거겠죠. 쿠쿡……” “그, 그런가? 하하하…… 암튼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아침식사를 하는군. 고마워.” “별말씀을요. 덕분에 제가 아침을 잘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즐거운 식사를 하고 나서 설거지도 나란히 함께 했다. 별로 할 것도 없었지만 서로 가벼운 이야기하는 재미에 한동안 푹 빠져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왜 거짓말을 하셨는지 이유를 듣고 싶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니니?” “그렇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에게 거짓말하실 필요는 없었던 것 아닌가요?” “네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야. 단지 네게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이지. 어떠니? 이젠 지난밤의 일이 그렇게 공포스럽지는 않지?” “그렇긴 해요. 그런데……” 온기를 손에 담듯 커피잔을 감싸 쥔 그가 시선을 돌려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듯, 아니 보신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의 이런 느낌… 맞나요?” 그는 여전히 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 하지. 그런데 알고 있니? 실상은 보이는 것보다 많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단다.”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정희는 그로부터 나오는 것의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것도 본다는 것이 네겐 무척 큰 부담이었겠지.”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던 정희의 손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의 몸 전체가 진동했다. “다른 것이라뇨?” “후후...... 부인하고 싶니?” “말씀해보세요. 어떤 다른 것인데요?” “확인해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말씀… 해보시라구요!” 정희의 입술이 마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사람을 보면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기의 느낌이 왜 그에게선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이렇게 실체로 마주하고 있는 그가 설마 물질로 실재하지 않는 존재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정희가 알기에 그런 존재는 없었다. 그런 그는 도대체 무엇일까? 설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이기라도 한 것일까? 자꾸만 증폭되는 그에 대한 상상과 그로 인한 조바심이 점점 커져가는 초침처럼 불안을 동반하며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네가 영혼을 보게 된 것이 언제부터일까? 넌 기억할 수 있니?” 얼음이 깨지는 듯한 충격이 정수리에서 시작되어 발끝까지 내달리는 것 같았다. 그가 정말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것은 다시 그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를 요구하는 듯 했다. “너도 내게 진실을 말하면 좋겠구나.” 그의 얼굴이 다시 정희를 향해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눈과 정희의 눈이 허공 속에서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투명한 정희의 눈이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의 눈은 유리처럼 투명하게 정희의 눈빛을 통과시켜주었지만, 얼음 같은 그 눈 속의 깊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정희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경이로운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요, 당신은?” 얼굴을 내민 햇살이 그래도 따뜻하다 느껴졌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있는 그네에 앉아 하늘을 봤다.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지난 번 본 것처럼 하늘은 어느새 먹구름으로 가득한 음산함으로 바뀌었고, 여전히 회오리처럼 학교 위를 전보다 더 크게 맴돌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니?”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 연아의 얼굴이 보였다. “왔구나.” “응.” 연아가 옆 그네에 앉았다. “하늘에 뭐라도 있니? “글쎄……” “요새 좀 이상한 것 같아.” “뭐가?” “가끔씩 하늘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어. 분명히 해는 떠있는데 말야.” “그, 그래?” “응. 어쩜 그냥 내 느낌이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좀 이상한 느낌이긴 해. 그래서 나도 무심코 하늘을 보곤 하지. 너도 그런 거니?” 연아는 아직 하늘의 변화를 정확히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하늘의 변화를 조금은 감각적으로 느낀다는 것이 역시나 정희가 짐작하는 무엇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했다. “언제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니?”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2학년 되면서부터인 것 같아.” “그랬구나……” “너도 그런 거지?” “저기, 연아야…” “응?” 정희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넌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세상이 있다던가…… 그런 거 말야. 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니?” “그런 거야 많이 해봤지.” “정말?” “당연한 거 아니니? 어려선 동화 속 이야기가 그랬고, 요즘은 환타지 소설이나 SF 소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뭐 예를 들면 해리포터 같은 거 있잖아. 그거 보면 정말 마법의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이 되기도 하지. 그래서 나도 그 책에 있는 것처럼 주문을 외워보기도 하곤 했어. 후훗…… 물론 그거야 다 상상이지만 말야.” “그랬구나. 그럼 영혼… 같은 것도 생각해 봤니?” “잘은 모르지만 귀신 같은 것은 있지 않을까? 사람이 억울하게 죽으면 영혼이 세상을 떠돈다고 하잖아. 그게 귀신이고” “그래. 그런데 내 말은… 실제로 귀신이나 영혼을 본 적이 있냐는 거야.” “본 적은 없어. 아이,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건 그렇고 날 보자고 한 이유가 설마 귀신이야기 때문은 아니지?” “어? 어.” “어제 일 때문이면 걱정 안 해도 돼. 이젠 나도 조심할거니까. 너도 조심하도록 하고.” “그래야지. 그런데 내가 오늘 널 보자고 한 건 그거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뭐?” 정희가 연아의 눈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 실은… 귀신이, 아니 영혼이… 보여.” “그게 무슨 말이야?” 연아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농담 하는 거지?” “아니. 진짜.” 연아가 정희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했다. “널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넌… 다른 애들과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가끔 니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 내가 모르는 세상에 속한 것도 같았고.” 정희는 발끝에 시선을 두며 연아의 말을 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자기 스스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네가 본다면 진짜 있는 거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넌 공연한 거짓말을 할 아이는 아니니까.” 긴장했던 정희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마음이 좀 편하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진지하게 들어주면 좋겠어.” “좋아. 어떤 말인지 모르지만 네가 그렇게 신중한 걸 보니 아마 중요한 이야긴가 보네.” “너와 관련된 거야.” “나와?” “응. 어제 있었던 일. 그거… 우연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말이지……” 차분히 설명해 나가는 정희와 귀를 세우고 듣고 있는 연아의 모습이 화보 속의 사진처럼 한참을 멈추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알기론 그래.” 정희의 설명을 듣고 있는 연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하긴 자신의 말이 쉽게 믿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남의 능력을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마음이 결코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 말이 맞을 것 같아.” 침묵을 깨고 나온 연아의 말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어려서부터 무언가 내 안에 가득 고인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어. 그리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았고. 특히… 배란 때가 되면 더 강해지곤 했지. 난 그것이 그냥 성욕……과 관련된 그런 것인 줄 알았어.” 그랬을 것이다. 자신 안에 소용돌이치는 기의 흐름을 어린 나이에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힘이 어떤 것인지, 그 힘을 얻기 위해 그녀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고 그 일의 결과는 오직 그녀만이 책임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정희는 자신에게도 던져야 할 질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솟구치는 그 생각들이 정희를 자리에서 일어서게 만들었다. “생각해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줄게.” “고마워. 니가 있어서 마음이 좀 놓여.” “마음을 강하게 먹어. 운명이라면 피하기보다 도전해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면 되고, 바꿀 수 있다면 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꿔보고. 좋지?” “좋아.” 연아의 얼굴이 점차 풀어졌다. 그녀의 마음도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정희는 생각했다. “가능하면… 네가 좋아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응?” 연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잠깐 알 수 없었다. “넌 좋은 편 같거든. 힛……” “풉…… 음… 내가 나쁜 편은 아니지. 하하하……” “그러니까 말야!” 연아의 웃음에 정희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들어가. 난 또 가볼 데가 있어.” “바쁘구나. 그래. 학교에서 보자.” “응!” 손을 흔들며 가볍게 아파트 입구를 올라서는 연아를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이제 정희도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렇게 집으로 오기 위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정혜의 눈에 건너편에 서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익숙한 교복. 익숙한 눈빛.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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