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의 요정 6
페이지 정보
본문
램프의 요정 6
테드의 수업에 보조적인 역할이었기에 진행이 안 될 때만 끼어들었고 그 외에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그녀가 앉아 있는 쪽에 계속 시선을 두고 있었다. 역시나 교실에서는 아침에 맡았던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설레면서도 분명 그리운 느낌이 드는 냄새였다. 분명 그리운 냄새인데......어디서 맡았던 냄새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그리운 느낌에 모르는 향들이 섞여 있어서 기억하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 혹은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하며 그리움의 근원을 기억해 내려다보니 이미 수업이 끝나있었다.
테드가 교실을 나갈 때 나 역시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나갔다. 그때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내 생각이 내 얼굴에 표정으로 드러났을지 몰라 애써 표정을 감추고 시선을 돌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교실을 재빨리 나섰다. 교실 앞문의 테드와 함께 큰 소리로 점심 메뉴 따위의 얘기를 건네며 퇴장을 하였다. 교사로서 학생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 그녀에게 다른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본인에게 들키는 것이 가장 난감했다. 도무지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명의 영어과 선생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테드를 비롯한 김 선생과 이 선생은 바로 다음 수업 준비 때문에 서둘러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비는 나는 별관 옆 공터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많이 피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개비씩 필 때는 센 것으로 피었다. 말보로 레드. 무의식적으로 입에 물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숙이 빨았다. 니코틴과 화학물질들이 가득 섞인 회색의 연기와 흘러가는 시간의 한 줄기가 폐 속 가득 차올랐다. 후우......내게 유일하게 남겨진 것 하나. 불량한 수면으로 인해 억눌린 뇌혈관이 도리어 펴지는 것 같았다.
내일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은 두물머리라고 하는 양수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주말이라 분명 많이 막힐 것이다. 차가 막힐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생각이 난다. 특유의 엔진 소리와 강한 토크 그리고 바람은 나를 언제나 들뜨게 했다.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찰나의 도피라도 할 수 있다는 것. 정말 매혹적이다. 하지만 지금 내게 남겨진 것은 한숨의 니코틴뿐이다. 다시 폐 속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신다.
담배를 비벼 끄고 수업이 시작되어서 조용한 건물 안으로 들어와 3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델리스파이스의 노래처럼 저 밖에 항상 엔진을 켜 둔 애마를 세워둔 채 그녀에게서 나는 기분 좋은 엔진 소리를 회상하며 반쯤 눈을 감고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순간 내 귀에 짧은 비명이 들어왔고 그 비명을 인지한 후에야 내 시야에 계단에서 넘어진 학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아란이었다. 나는 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괜찮니? 안 다쳤어?”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순간 위쪽에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분명 누군가 급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발소리와 기척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지라 다시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팔에 찰과상이 있었고 왼쪽 앞 팔이 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타박상과 왼쪽 광대뼈 부분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다시 괜찮냐고 물으니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힘겹게 말한다.
“팔목이 너무 아파......으으”
“일단 양호실부터 가자.”
그녀를 일으켜본다. 일어선 그녀를 부축했지만, 곧 한쪽 발을 절었다. 발목도 다친 모양이다. 자세를 낮춘 뒤 등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업히라고 말한다. 말없이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업힌다. 나는 다시 일층에 있는 양호실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이 열리고 양호 선생님이 나타난다.
“어머, 오진석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
“계단에서 떨어졌나 봐요.”
“어서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양호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양호실 안쪽의 침대에 그녀를 눕힌다. 양호 선생님은 서아란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녀가 팔목의 통증을 호소한 것을 얘기해주니 양호 선생님 역시 그녀의 팔목부터 살피기 시작한다. 부어오르는 그녀의 팔목을 잡고 서아란에게 묻는다.
“통증이 어떠니?”
“아파요......”
“계속 부어 오르는걸 봐선 정형외과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 다른 곳은 안 아프니?”
내가 끼어들어서 말한다.
“발도 절던데요?”
양호 선생님은 그 말을 듣더니 조심스레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고 양말을 벗겨낸다. 양말을 벗기니 작고 하얀 발이 나온다. 양호실 안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은 그녀의 발은 짧은 순간에 말도 안 되는 관능미를 뿜어냈다. 작고 예쁜 발은 완벽한 선을 그리며 가는 발목과 이어져 있었고 그러한 시각적 자극은 미세하게 허파의 움직임을 거칠게 만들었다. 분명 발목쯤이 다치고 부어서 붉어지는 것일 텐데 그러한 복숭아뼈의 모양이 도리어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발려져 있지 않은 발톱은 더 생기 있었고 가지런히 놓인 발끝의 모양과 발가락 길이의 균형은 이상적이었다. 그 발가락 사이의 골 하나하나를 더 깊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양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목만큼 심하지는 않네. 발목은 접질린 것 같은데 팔이 문제네....... 너 2학년이니? 몇 반이니?”
그녀가 아까보다는 진정된 목소리로 답한다.
“3반이요.”
“백상권 선생님 반이네. 잠깐만.”
양호선생님은 본인의 책상으로 향하면서 내게 말한다.
“오 선생님, 제가 저 학생 담임선생님께 연락 취하고 근처 정형외과까지 데려갈게요.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아......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아닙니다. 어서 올라가세요.”
내가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서아란이 누워있는 쪽을 보았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신음을 흘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양호 선생님이 그녀의 담임인 백상권 선생님과 통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양호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로 돌아갔다. 돌아왔을 때는 이미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나는 서둘러 다음 수업 교실의 출석부와 책을 챙겨서 다시 교무실을 나섰다. 기계적으로.
퇴근하기까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몸에 밴 대로 행동하고 움직였다.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몇 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에 오갔고 시각적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며 시멘트를 바르듯 빈 공간들을 그녀의 내음이 단단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빨리 학교를 나가야 했다. 그나마 학교를 나가면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상태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시도를 해서도 안 되었다. 물론, 그녀의 담임선생님인 백상권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지금 나의 얼굴로 그녀의 안위를 물었다간 정말 의심스러운 흔적을 남길 것 같아 차마 그러질 못했다. 심호흡하기를 여러 번, 퇴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다른 선생들이 저녁 같이 먹자는 제안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피하고 서둘러 학교 건물을 나왔다. 교문을 나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장막이 되었다. 차라리 빗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어 장막 속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단절감에 도리어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산도 없었고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그저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젖은 옷을 모두 벗고 집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을 하염없이 머리 위로 뿌리고 있었다. 욕실의 뜨거운 증기 속에 가쁘고 뜨거운 날숨이 가려졌다. 그 상태로 한참을 아무런 생각 없이 서 있었다. 필사적으로.
정신이 들자 물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옷을 입지 않은 채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지금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그 사실만으로 내가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게끔 억제제가 되어주고 있다. 체념하듯 온몸에 힘을 풀자 코끝에 그리는 향 내음이 나는 듯했다.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침 등굣길에 본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는 바람과 그녀의 걸음이 교차할 때 일렁거리며 향을 뿜어냈다.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 거리를 유지할 뿐. 그러다 그녀가 잠깐 뒤를 돌아본다. 정면에 떠 있는 해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지만 살짝 올라간 그 입꼬리와 살짝 들어간 보조개는 그 음영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따라온 앞머리가 얼굴 한쪽을 수줍게 가린다.
그 긴 생머리는 얼굴 위로 흘러내려 마치 90년대 가수처럼 한쪽 눈을 가렸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그의 얼굴은 검게만 보였다. 잔 근육이 목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쇄골을 지나 어깨로 이어졌다. 아름다웠다. 누운 자세를 고치며 턱을 괴고 옆으로 눕는다. 침대 옆에 앉은 그는 나를 내려다본다. 역광 넘어 어렵게 보이는 음영은 굳어 있었다. 공기가 달라져 있었고 나 역시 긴장을 하며 그에게 집중하였다.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자기야. 부탁이 있어.”
“뭔데?”
“나 돈 좀.”
속으로 놀랐다. 내게 부탁을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리고 곧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답을 했다.
“찾았어?”
“어. 근데 흥신소에서 돈을 더 요구하더라고. 나중에 꼭 갚을게. 나 그 새끼들 잡아야 해.”
“......알았어.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는데 밤마다 악몽을 꿔. 걱정하면 일부러 웃어. 거짓으로. 아버지가 겨우 막아서 기사가 나거나 어디에 얘기가 새지는 않았는데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경찰이든, 학교 선생 새끼들이든 누구든. 내가 잡아야 해. 그 새끼들, 내가 잡아야 해.”
조금 더 떠버린 해는 방안을 더 많이 비추고 있었고 그만큼 그의 모습이 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그의 떨림은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어둠이 방안으로 번졌다. 결국, 그를 인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시야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어두웠다. 그리고 아득하고 또 멀어졌다.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에서부터 광대뼈를 타고 말라붙은 액체에 피부가 당겨졌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가슴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였고 동시에 텅 빈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을 열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여전히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담배를 찾으려다 말았다. 빗물이 들이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로등 불빛 외에는 보이지 않는 밖을 응시했다. 시야의 왼쪽에서부터 파란색 자동차가 지나갔다. 순간 헤드라이트에 누군가가 비쳤다. 가로수 밑에 웅크린 누군가가 있었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팔에 감겨 있는 하얀 붕대가 보였다. 몸을 휙 돌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반바지와 민소매 져지만을 입고 쪼리를 꾸겨 신고 우산을 들고 급히 나갔다. 분명 보였다. 헤드라이트에 반사된 하얀 것은 분명 붕대 같은 것이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내가 봤던 방향을 기억하며 급히 뛰었다. 흐릿한 형체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의 빛과 퍼붓는 비 때문에 멀리서는 형체가 제대로 구별되지 않았다. 더 빨리 뛰었다. 숨을 참고. 그리고 바로 앞까지 가서 멈추었다. 어둠에 적응된 눈은 분명히 눈앞의 대상을 판별했다. 서아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