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의 요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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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의 요정 4
멍하니 서 있다가 터벅터벅 대형 할인 마트를 나왔다. 그렇게 터벅터벅 집까지 걸어갔다. 연립주택의 1층에 있는 월세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적막한 어둠이 나를 맞이했다. 탁. 형광등을 켜고 부엌에 있는 냉장고에 장 봐온 것들을 정리했다. 냉장고에 들어갈 것들은 넣고 아닌 것들은 서랍장 안 혹은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을 준비했다. 장을 볼 때부터 생각해둔 특제 버섯 찜을 준비했다. 통통하고 큰 느타리버섯의 기둥을 파내고 그 속에 다진 고기와 특제 버섯 찜용 비밀 양념이라고 인터넷 블로그에 소개된 레시피대로 만든 양념장과 팽이버섯을 버무린 것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는 버섯과 감자, 피망을 넣고 닭 육수로 끓이며 찜을 만든다. 30분 정도 끓여내면 그 어디에도 맛볼 수 없는 특제 버섯 찜이 완성된다고 블로그에서는 소개했다. 버섯 찜이 끓고 있는 동안 밥과 밑반찬을 준비했다. 식탁을 닦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국어 선생인 박 선생이다.
“아, 오 선생. 지금 바쁜가?”
“아, 네. 저녁 준비하고 있었어요.”
“저녁 준비? 그렇지, 모 선생은 혼자 살지. 부지런하네.”
“뭘요. 오랜만에 장도 보고 해서 제대로 먹을까 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시간 되면 술이나 같이하려 했지. 식사를 늦게 하네?”
“예. 장보고 오느라 늦어서요.”
“알겠네. 뭐, 오늘만 날인가? 나중에 마시지. 그럼 내일 학교에서 봅세.”
“예. 쉬세요.”
학교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지금 전화한 박 선생님이다. 어차피 학교 선생이라는 것도 직장생활이니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게다 잔업 양이 많은 이 나라 초, 중, 고 선생들은 뭐든지 잘해야 한다. 아직 경력이 안 돼서 많은 업무가 내게 집중되던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일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박 선생이다. 나보다 5살 위인 박 선생은 국어과 부장 선생이며 아직도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국어 선생 중 하나였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 믿고 있으며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신혼 때처럼 살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술자리에서 어김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열려있는 사람이었으며 본인이 직접 주선해서 학교에 성교육 특강도 개최하시는 분이다. 물론, 현실적인 제약에 한 학기에 한 번밖에 개최하지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역시 박 선생님을 잘 따르고 있다.
압력밥솥에서 수증기가 빠져나가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 전화를 걸었다.
“아, 박 선생님. 혹시 한 시간 반 뒤에도 시간 되십니까?”
“한 시간 반 뒤? 음.... 그래, 될 것 같아. 이거 오 선생 술 고팠구먼.”
“하하, 예. 전화 끊고 나니깐 술이 땡겨서......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혹시나 시간 되시려나 해서 다시 연락 드렸습니다.”
“알겠네. 그럼 한 시간 반 뒤에 그 집에서 보기로 하지.”
“네. 그럼 그때 봬요.”
냄비에서 감자 몇 개와 버섯 몇 개, 국물을 떠내었다. 밥을 퍼오고 밑반찬 몇 개 차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탁자라 부르기엔 높고 식탁이라 부르기엔 좀 작은 식탁 위에 차려진 밥상. 반대편엔 의자가 하나 더 있다. 어차피 혼자 사니 의자는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식탁을 살 때 의자가 하나만 있으면 허전할 것 같아 두 개를 마련했고 그래서 남아 있게 된 반대편의 빈 의자는 밥 먹을 때마다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언제나 식사는 빨리 끝났고 밖에서 사 먹거나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오랜만에 직접 요리를 한지라 느긋하게 식사를 하려 했지만 역시나 20분을 넘기지 못하였다. 혼자 밥을 먹을 땐 급하게 먹는 버릇이 고쳐지질 않는다. 밑반찬을 다시 갈무리하고 빈 그릇을 물에 담가둔 뒤 방으로 가서 외출 준비를 했다.
박 선생은 미리 와서 자리 잡고 있었다. 쟈니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직접 수제로 맥주를 빚었으며 특히 그 맛이 이 근방에서는 가장 뛰어난 곳이지만 워낙 골목 깊숙이 있는지라 언제나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였다. 내가 근처로 가자 박 선생이 날 반기며 말을 건넸다.
“어서 오게.”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야. 나도 좀 전에 와서 막 자리 잡고 앉았어.”
박 선생님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맥주 3,000cc와 오징어를 시켰다. 박 선생의 주문이 끝나자 나는 공격을 받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사모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그럼, 안녕하지. 요즘 힘이 넘쳐서 내가 죽겠어.”
“저런, 그래서 피난 나오셨군요.”
“으응. 그래 봐야 밤새지 않는 이상 집에 들어가서 새하얗게 불태워야 하니깐.”
“지각 한번도 안 하시는 것이 신통하네요.”
“일은 일이니깐. 모범이 되어야 할 선생이 지각하면 쓰나.”
“네.”
“요새는 좀 괜찮나?”
박 선생님의 질문은 한 가지만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질문에 답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생각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대답을 했다.
“이제 좀 적응된 것 같습니다.”
“그때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정말 유감이네. 내 그때 못 가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도 어차피 출근 때문에 하루 밖에 못 있었어요.”
“저런, 그럼 쓰나. 십년지기 친구였다면서.”
“네. 대학 때부터 친하던 친구였습니다.”
“마음이 많이 안 좋겠어......”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였지?”
“예...... 모레가 그 친구 기일이에요.”
“토요일이네?”
“예. 다행스럽게요.”
“그래, 가야지. 가서 잘 인사하고 와.”
“네.”
맥주와 안주가 나왔다. 서로 잔을 채우고 가볍게 건배했다. 상쾌한 온도를 지닌 황금빛 액체가 혀의 돌기들을 자극하며 내 미각을 만족시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의 부드러움과 탄산이 주는 시원함. 이 차가운 액체가 주는 뜨거운 기운은 머릿속까지 올라가 정신적 해학을 이끌었다. 박 선생이 말했다.
“요번에 새로 들어온 원어민 영어 선생 둘 있지? 그, 이름이 뭐더라?”
“테드하고 써머입니다.”
“아, 그래. 테드랑 써머. 그 두 사람이랑 호흡 잘 맞는가?”
“아직 들어온 지 2주도 채 안 돼서 잘 모르겠어요. 뭐, 제가 이것저것 도와주려 애쓰지만 일단은 문화도 다르고 교육방식도 다르니까요. 처음 일주일 동안은 많이 당황하더군요.”
“왜 고향 땅 놔두고 태평양 건너 이 멀리까지 왔다고 하나? 아 참. 그 사람들 어느 나라 사람인가?”
“테드는 미국에서 왔고 써머는 영국 출신입니다.”
“둘 다 굉장히 멀리서 왔네? 어쩌다 이 먼 동양의 변두리 나라까지 왔다고 하나?”
“그들의 나라도 사실 취업난이 상당하니깐요. 써머 선생 같은 경우는 어머님이 한국 출신의 혼혈인지라 어머니의 나라가 궁금해서 왔다고 들었고 테드 선생의 경우 우리 학교에서 낸 신문 광고를 보고 왔다고 합니다.”
그 말에 박 선생님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광고를 보고 왔다고? 거 참 웃기는구먼. 광고를 보고 와서 선생이 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광고를 내는 학교도 그렇고.”
“그러게요. 저도 처음에 듣고 실소를 했습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 얽매여 사는 거지. 오죽하면 이런 지옥 같은 조그만 반도 국가까지 찾아왔을까......”
테드과 써머는 이번에 학교에서 채용한 외국인 강사다. 한 명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출신이고 한 명은 영국 리버풀 출신이다. 테드는 우리 학교에서 낸 외국인 강사 모집 신문 광고를 보고 이쪽으로 왔고 써머는 외국인 영어 강사 자격증인 테솔을 얻은 차에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이란 곳이 궁금해서 우리 학교로 왔다고 한다. 박 선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어지간하면 자기네 나라에서 취업해서 살아가는 것이 편하지 동방의 변두리까지 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닐 테니. 맥주를 한 잔 다 비운 박 선생님이 다시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장 챙겨주게. 오 선생이라면 잘하겠지만, 혹시나 그들이 이 나라의 부조리에 젊은 힘을 뺏길까 걱정되네. 그들 아직 20대 초반이라면서?”
“네. 군대에 안 가니깐요.”
“그래,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사람들이 낯선 땅에 와서 고생하는구먼.”
박 선생은 말을 마치고 묵묵히 맥주만 마시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안주 몇 개 집어먹었다. 그 후로 나와 박 선생은 학교 문제나 학생들에 관한 얘기를 맥주가 다 덜어질 때까지 나누었다.
술이 뿜어내는 따뜻한 기운이 차가운 밤 기운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약간 풀어진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집 앞에 이르렀을 때 항상 있어야 할 푸른색 자동차가 없다. 푸른색 자동차는 빌라 옆 주차장에서 움직이면 안 된다는 법이 있다는 듯 한참을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 불편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옷을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언제나 입는 반팔 티에 츄리닝 바지. 집 환기를 시킬 겸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었다. 바깥을 보니 아까는 없었던 푸른색 차가 들어와 있다. 이유 없이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3년이 넘었지만, 아직 그 푸른색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 차가 자리에 없는 것을 본 것도 이번을 포함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것 같다. 나에겐 저 푸른색 자동차는 고정된 물체이자 움직이지 않는 소유물로 인식되고 있다. 잠깐 동안 창가에 서 있다 다시 창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불렀다. 아님, 역시나 나쁜 꿈을 꿨던가. 아무튼, 기억이 나질 않으니 무엇 때문에 자다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기상 때문에 몸이 찌뿌둥했으며 특히 머릿속에서 흐르는 뇌파의 주파수가 뒤엉켜 버렸다. 발기된 자지는 바지를 뚫을 것처럼 불편하게 솟아올라 있었고 그 불편한 압박에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나는 방을 나와 반수면 상태에서 발현되는 본능으로 냉장고를 더듬어 물병을 찾아 입에 대고 내용물을 흘려 넣었다. 말라서 붙어버린 목구멍이 뚫리니 숨 쉬는 것이 편안해지고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들려온 소음에 귀를 잡히고 말았다. 따르릉. 전화. 대체 지금이 몇 시인지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틀림없는 한밤중일 것이고 이때 걸려온 전화는 그리 범상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일까? 그러나 이런 판단에 앞서 전에 내 손은 이미 수화기를 들었다. 나는 애써 목소리에서 잠 기운을 감추려 했고 결과적으로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나왔다.
“여보세요?”
“..........”
말이 없다. 혹 내가 못 들었나?
“여보세요?”
“..........”
여전히 말이 없다. 내가 전화를 받은 것이 아닌가?
“여보세요?”
“.......”
잠이 덜 깼나? 하고 생각하려는 찰나 수화기 건너편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순간 확실히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인지되었고 그 사실과 대답 없는 수화기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수화기 건너편에선 조금씩 숨소리가 커지는 것 같더니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정적. 혼자 그렇게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수화기를 노려보았다. 전화가 그렇게 끊기니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다시 잠을 청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놓고 내 몸이 다시 있어야 할 자리에 날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