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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바닷가의 상처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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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443 회 작성일 24-05-12 13: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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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상처바닷가의 상처 “저, 저런 앙큼한 여자 봤나. 아주 남자를 갖고 노네, 놀아. 그러니까 여자를 요물이라 하지.” 텔리비전에 눈을 못박고 있던 남편이 마치 제 일처럼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낸다. “도무지 여자란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니깐.” “아니 여보. 동물이라니오? 그럼 당신은 지금 동물하고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거예요 뭐예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나는 짐짓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가며 따지고 든다. “아 글쎄, 텔리비전을 보다 보니깐 열이 나서 한 마디 해본 건데 왜 당신이 그렇게 열을 내고 난리야? 이거, 당신도 혹시···” “아니, 뭐라구욧? 이이가!” 나는 남편의 어깨를 힘껏 꼬집는다. “아야야. 농담이야. 농담이라구.” 남편이 손을 번쩍 쳐들고 항복 선언을 한다. 나는 부러 눈을 흘기며 아직도 화가 덜 풀렸다는 듯 씩씩거린다. “세상 여자 다 못 믿어도 우리 각시는 내 믿지. 암.” 남편이 양팔로 감싸 안아 오며 달콤한 목소리로 달랜다. “아이, 이거 놔요. 징그러워.” 나는 남편의 팔을 젖히고 몸을 뺀다. 그리고는 할 일이 있는 것마냥 냉큼 일어나 주방으로 종종걸음 친다. 태연한 척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이면서도 가슴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두근거린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쓰잘 데 없는 텔리비전 연속극이 사람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들어? 남편이 보고 있는 연속극은 요즘 한창 매스컴을 타고 있는 미시족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늘 방영된 것은 과거가 있는 여자가 그것을 숨기고 처녀인 양 행세하며 인턴 과정을 밟고 있는 남자를 유혹해 결혼에 성공하는 장면이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프리 섹스를 주장하며 여러 남자들과의 스캔들을 일으켰던 여주인공이 첫날밤에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을 보고 남편이 자신도 남자라고 한 마디 한 것이다. 드라마를 쓴 작가가 누구인지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라. 콱 얼굴을 할퀴어 줄 테니깐. 어디 쓸 게 없어서 저런 이야기를 다 쓴담? 나는 짐짓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가장하면서도 애꿎은 드라마 작가를 탓한다. 웃음 띤 내 얼굴과는 달리 마음 한켠은 불 꺼진 방처럼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이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넘겨야 하나. 서로를 위한 아름다운 거짓이라는 명제로 언제나 위안을 삼으면서도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견딜 수 없다. 결혼한 지 일년. 꿀처럼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들. 내 뱃속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기. 이런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부수어 버릴 지도 모르는 비밀. 무덤 속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아니 무덤 속에서도 절대 밝힐 수 없고 또 드러나서는 아니 될 나의 비밀 하나. 여보, 미안해요. 속 시원히 털어 버리고 홀가분해지고 싶지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과의 행복한 이 순간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기에 말할 수 없네요. 여보, 정말 죄송해요. “얘, 수미야.” 옆구리를 쿡 찌르며 짝꿍이 귀엣말로 불렀다. “이거.” 선생님의 눈을 피해 건너편 자리에 앉은 성숙이를 가리키며 슬그머니 뭔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여러 겹 접어 땅콩알처럼 조그만해진 쪽지였다. <날짜 결정됐음. 5일. 오케이?> 책상 밑으로 슬그머니 쪽지를 펴보니 깨알같이 쓴 성숙의 글씨가 나타났다. 나는 절로 한숨이 후욱 나왔다. “수미 네가 안 가면 다들 안 가겠대. 그러니 어떡해? 이 불쌍한 중생을 위해서 네가 희생좀 해 줘라. 큰소리 빵빵 쳐 놓았는데 펑크 나면 아마 난 걔한테 두고두고 쫑코 먹을 거야. 응? 수미야아.” 점심 시간에도 졸졸 따라 다니며 채근해 대던 성숙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쪽지를 읽어 보곤 다시 꾸깃꾸깃 접어 발밑으로 버렸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얘들아. 끝내 주는 썸씽이 있는데 말야.” “뭔데?” “지난 번에 내가 얘기한 애 있잖아. 우리 사촌 말야.” “응, ㄱ고 다닌단 애?” “그래 그래. 걔가 말야. 이번 여름방학 때 바닷가로 캠핑 가쟤.” “캠핑?” “응, 비용은 자기네들이 내고 준비도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더러 몸만 따라 오라는 거야.” “야, 재밌겠다.” 성숙이의 말에 모두들 손뼉을 치며 즐거워 했다. “황금같은 여고 시절을 맨숭맨숭하게 그냥 보내나 했더니 잘하면 올 여름에는 꿈같은 추억 하나 건지겠는 걸?” “아! 바닷가. 캠프 화이어. 생각만 해도 살 떨려. 으이휴.” “어때, 미나, 희영이 니네들 모두 찬성이지? 수미야, 넌 어때? 너도 낄 거지?” “글쎄··· 난···” “왜에, 가려면 우리 다 같이 가야지. 네가 빠지면 우린 무슨 꼴이니?” “그래. 수미야. 네가 빠지면 안돼. 난 집에서 허락도 얻을 수 없단 말야. 너랑 같이 간다고 해야 울 엄마가 보내줄 거야.” “나도 그래. 수미 너만 달랑 빠지면 나도 명분이 없어진단 말야.” “수미야아. 그러지 말고 우리 이번에는 다 함께 갔다 오자아.” “그래, 너도 우리 사촌 진용이 봤잖니. 걔네 친구들 매너도 좋아. 같이 가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있잖니. 넌 내가 책임질게, 수미야, 응?” “글쎄··· 난 더 생각좀 해 보고···” 그게 지난 주의 일이었다. 성숙이가 자기 사촌인 동급생 진용이로부터 함께 캠핑을 가자는 제의를 받았노라고 말을 꺼내자 희영이와 마나 둘다 좋노라고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2학년 여름방학이 3학년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 학원 수강이나 철저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있지만, 한 동네에 살아서 친하게 어울리곤 해도 나는 성숙이나 희영이, 미나들이 평소에 하고 다니는 태도가 나완 어울리지 않아 내심 거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함께 간다는 게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다. 성숙이나 희영이, 미나들은 1학년 때부터 심심치 않게 다른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어떤 남학생하고 제과점에서 만나는 걸 보았다는 둥, 극장에서 심야에 남학생의 팔짱을 끼고 나오는 걸 목격했다는 둥 여러 가지였다. 심지어는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다가 여관에서 남자와 같이 나오는 걸 본 사람도 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어디까지 소문은 소문에 그칠 뿐이었다. 그저 뒤에서 입방아나 찧을 뿐, 실제로 성숙이들이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는 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애들은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것은 성숙이들이 일견 철저히 자신들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충 알고 있었다. 대충이 아니라 자세히 알고 있는 축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성숙이들의 교외 생활은 평범한 학생에 불과한 내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면들로 가득차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입방아를 찧어 대는 거의 대부분의 소문들이 내가 아는 바로는 충분히 근거 있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성숙이들은 남학생들과의 교제가 빈번했고 학생의 신분을 벗어난 일탈 행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곤 했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자라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닌 탓에 거리감이 없었는지 성숙이들은 곧잘 자신들의 그런 얘기들을 나에게 해 주곤 했고 또 때로는 자신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완곡히 권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숙이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편이었다. 성숙이들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자신들의 얘기를 나한테만은 털어 놓고 얘기하는 배경에는, 내가 충분히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외에도 나름대로의 다른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행위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착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 평을 주위에서 들어 왔다. 그래선지 성숙이들의 부모님도 나라면 무척 잘 믿어 주었다. ‘수미와 독서실에서 공부했어요’라든가 ‘수미랑 같이 대공원에 가기로 했어요’라는 핑계 한 마디로 성숙이들은 부모님의 의심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들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숙이들은 자신들의 스케줄을 알리바이 삼기 위해 나에게 비교적 자세히 행선지나 시간 따위를 일러 주지 않을 수 없었고 나 역시 자연스레 그들의 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간혹 성숙이들이 나에게 자신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겠느냐고,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으니 함께 참석하지 않겠느냐고 손을 잡아끌곤 하는 것은 친구로서의 순수한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보면 나를 자신들과 한 테두리에 묶어 넣어 마음껏 자유를 구가해 보고 싶다는 계산도 많이 작용했을 터였다. 내가 자신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 알리바이가 들통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도 없을 터였고 또 나에 대해 가지고 있을 일말의 자격지심 같은 따위의 감정들도 깨끗이 털어 버릴 수 있게 될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나는 성숙이들과 얘기는 친근히 나누는 사이 이상의 관계는 의식적으로 피하곤 했다. 여러 해 동안 쌓인 친구로서의 연민을 그냥 박절히 무너뜨려 버릴 수도 없었거니와 얽히고설킨 주변 여건들이 또한 그것을 용납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마음 한 구석 찝찝하면서도 성숙이들의 알리바이를 지켜 주기 위해 그네들의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 주곤 했고, 편안한 내 방을 놔둔 채 엄마에게 타박을 들어가며 부러 독서실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가 성숙이들과 마음 한켠에 선을 그어 놓게 된 것은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때의 일 때문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는 일기 예보를 입증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탐스런 함박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절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나네 집을 나서 거리로 향했다. 미나 부모님이 모처럼의 겨울 여행을 떠나고 언니마저 일본 연수를 떠나 미나네 집이 비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자고 모두들 모여 있었던 참이었다. “애들아, 우리 기왕 나왔으니까 시내 한 바퀴 돌고 가자. 이렇게 분위기도 끝내 주는데 시장만 봐 가지고 곧장 들어 가는 게 좀 억울하잖니.” 조그만 일에도 곧잘 흥분하기를 좋아하는 미나가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저녁에 먹고 마실 음식이며 음료수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몰려 나왔던 것이다. “그래 그래, 그러자.” “맞아. 이 좋은 분위를 방구석에서만 보낸다는 건 국가적인 낭비야. 전국민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활동을 해야지.” 성숙이와 희영이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좋아. 우리 눈이나 싫컷 맞으며 돌아 다녀 보자.” 나도 모처럼 이렇게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 퍼붓는 게 왠지 마음을 들뜨는 것이었다. 이것 저것 한 아름의 음식을 커다란 쇼핑백에 싸들고 우리는 집 잃은 강아지마냥 거리를 쏘다녔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차 인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연인과 다정히 팔짱을 끼고 행복감에 들뜬 얼굴로 걷는 사람들, 가족과 혹은 친구나 동료들과 삼삼오오 무리지어 어딘가로 몰려가는 사람들,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안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물결 속에 휩쓸려 또 하나의 작은 물결이 되어 거리를 헤엄쳐 다녔다. 여기저기에서 경쾌하게 퍼져 나오는 캐롤송의 음률에 맞춰. “아, 다리 아파. 우리 저곳에서 좀 쉬었다 가자.” “그래, 난 뜨거운 커피라도 한잔 마셨음 원이 없겠어.” 성숙이 앞장서서 롯데리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롯데리아 역시 우리 또래의 아이들로 만원이었다. 꽤 넓은 가게였지만 쉽게 네명이 앉을 만한 빈 자리가 눈에 띠지 않았다. “아후, 꽉 찼는 걸.” “그냥 집으로 돌아 갈까?” “가만 있어 봐. 좀더 찾아 보고.” 빈 자리를 못찾아 우리가 서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야, 미나야.” 누군가 남자의 목소리가 우리 어깨를 잡아챘다. “어머, 태양이 오빠.” 미나가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일루 와. 여기 자리 있어. 합석하자구.” 미나를 불렀던 남자가 일어나더니 손짓을 했다. 모두의 의향도 묻지 않은 채 미나가 성큼 앞장을 서는 탓에 우리는 엉거주춤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리 앉아. 좁지만 조금 밀치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거야.” 남자가 옆 테이블의 빈 의자 두개를 끌어 당겨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미선이 언니 대학 친구야.” 어눌한 자세로 망설이는 우리에게 미나가 안심시키듯 설명했다. “앉아요. 난 이태양이라고 해요. 미나 언니와 클라스메이트죠.” 남자가 상긋 웃으며 의자를 권했다. 우린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눈 오는 날 우리 귀여운 숙녀분들께서 웬일로 이처럼 나들이를 나섰을까? 설마 미팅하러 나오진 않았을 테고.” 태양이라고 이름을 밝힌 대학생이 마치 자상한 오빠나 되는 것처럼 웃으며 물었다. “어머, 오빠는. 우리라고 미팅하지 말란 법 있나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뭘. 그건 그렇고 오빠는 숙녀들을 옆에 앉혀 놓고 혼자만 얘기하실 거예요? 예의도 없이.” 미나가 살갑게 맞대꾸하며 태양의 옆에 앉은 남자들을 눈으로 일별했다. “아, 그렇군. 이거 내가 모처럼 미나같이 예쁜 숙녀분을 만나니깐 정신이 없군 그래. 이쪽은 내 친구들이야. 인사는 개인별로 하기로 하고.” “구창서예요.” “현기용이에요.” “김웅철이에요.” 모두들 한 단계 위인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의식한 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이름을 밝혔다. 우리도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나누었다. “자, 이젠 인사도 나누었고. 우선 민생고를 해결해야겠지? 우리도 방금 전에 들어 왔어. 이렇게 만난 기념으로 오빠들이 살 테니까 먹고 싶은 걸로 고르라구.” “애걔. 겨우 이런 데서 시시한 것 사주고 생색내려구요?” 미나가 애교스럽게 살짝 눈을 치뜨고 면박을 주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도, 남자의 간을 빼 먹을 만한 매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미나의 눈웃음이었다. “아아, 그런 뜻은 아니고. 우리 귀여운 숙녀분들께서 원한다면야 정말로 찐하게 한턱 써야지. 그렇잖아?” 태양이 말끝에 동의를 구하듯 자신의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당연하지. 마침 우리 시간도 비어 있으니 모실 수 있는 영광만 주신다면 백골이 분쇄되도록 시중을 들어 드리겠나이다.” [출처:yadam4.net] 구창서란 친구가 익살스럽게 어깨를 움직이며 말하는 통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우리도 오늘 저녁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던 참이었거든. 이렇게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서 마음은 허공에 있지, 그렇다고 선물을 안겨 주면 뽀뽀라도 해줄 애인이 있나, 맨숭맨숭한 머스마들끼리 나이트 클럽에 가서 남들 짝짜꿍에 들러리 서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 그런데 우연히 미나 친구들과 마주치다니 이건 틀림없이 아기 예수가 점지해 준 인연 같은데?” 현기용의 말에 또한번 웃음이 일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제법 가셨다고 생각했는지 말투가 차츰 반말로 돌아섰다. “어머, 잘 됐다 오빠. 실은 우리도 오늘, 우리끼리 집에서 올 나이트 하려던 참이거든. 엄마 아빤 온천에 가시고 언닌 일본에 가서 텅텅 비었거든. 오빠들도 약속 없으니깐 함께 올 나이트 해요, 네?” 미나가 덜컥 나서며 뜻밖의 제안을 했다. “니네 집에서···?” 태양이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어때, 성숙아, 좋은 생각이지?” 당연히 찬성하리라고 여긴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나가 물었다. 성숙이와 희영이의 눈이 은연중에 나를 향했다. 자신들은 찬성이지만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망설인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이야기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당연히 좌중의 시선이 나한테로 집중되었다. “그, 그러지 뭐···” 창밖에는 함박눈이 축복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캐롤송이 한껏 마음을 휘젓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열여섯 살의 감수성 많은 여린 소녀의 가슴은 이미 저절로 들떠 버린 마음 때문에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먼저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 좋아. 그렇다면 오늘은 싱그러운 고교 시절로 돌아가서 민아와 어울려 볼까?” “좋아요, 오빠. 그럼 우리는 대학생이 된 기분을 내야겠네요.” “하하하, 그것도 말이 되는 걸.” 우리는 커피나 우유, 햄버거와 감자 튀김 등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롯데리아를 나섰다. “나이트로 갈까, 아니면?” “글쎄, 오늘은 무척 복잡할 텐데···” “그럼 어떻게 하지? 가만 있자··· 지금이 일곱 시니까···” “그러지 말고 오빠, 그냥 집으로 가서 차분히 게임도 하고 놀아요.” 결국 미나의 의견대로 집에서 놀기로 합의가 되었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먹고 마실 것을 좀더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는 맥주 한잔 쯤 해도 괜찮겠지?” 동의를 구하듯 말하면서 태양의 손에는 이미 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주가 들려 있었다. “맥주 한잔 정도는 있어야 기분이 나지. 취하진 않을 테니까 염려 마.” 비닐 봉지에 캔맥주를 여남은 개 넣어 챙기며 태양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산을 했다. 택시에 나누어 타고 미나네 집에 도착하니 그렁저렁 여덟 시가 가까이 되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남자들과 밤에 함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니 나는 무척 긴장되었다. 이러다가 혹시 무슨 일이나 일어나지 않을까, 혹시 늦은 시간에라도 엄마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래도 명색이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인데 하는 마음과 미선이 언니와 클라스메이트라면서 설마 동생들한데 쓸데없는 모습을 보이진 않겠지 하는 마음이 저으기 위로를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기로 했다. 기왕에 주어진 기회인데 이런 때 대학생들과 대화도 나누어 보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로 마음먹자 불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내가 명랑한 모습을 보이자 미나들도 무척 기분이 흡족한 눈치였다. 이것 저것 다과상을 챙기면서 깔깔거리며 수선을 떨었다. 태양과 미나의 주도로 우리는 파트너를 결정하고 게임을 하며 어울렸다. 그러면서 자연히 오래 사귄 친구나 되는 것처럼 서로 스스럼이 없어졌다.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노는 동안 시간이 자정에 육박했다. 그동안 태양이들은 사온 맥주를 다 마시고 얼굴이 불콰해져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술이 한잔 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오빠, 포도주 한잔 줄까?” 미나가 누구인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아이였다. 벌떡 일어나더니 주방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 왔다. “그치만 이건 우리들도 한잔 씩 줘야 해.” “너희들도?” 태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오늘 같은 날 포도주 한잔 안 하면 언제 해? 그렇지 애들아.” “그래 그래. 우리도 포도주 한잔 정도는 할 수 있다구. 오빠들만 입인가 뭐?” “실은 나도 아까 오빠들 마시던 맥주를 한잔 마시고 싶었는데 차마 말을 못 꺼냈지 뭐야. 흉 잡힐까 봐.” 성숙과 희영이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좋아, 그러나 딱 한잔 씩만이야.” 태양이 선심이라도 쓰듯 말하며 포도주를 따랐다. “건배!” “위하여!” 모두들 흥에 겨워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애들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잔만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수민 포도주 안 마셔?” 내 파트너인 창서가 입을 쓱 훔치며 물었다. 창서의 얼굴도 술기운이 올라 제법 발갛게 달구어져 있었다. “얘, 수미야. 한잔 마셔 봐. 이건 울 엄마가 담근 술이라 아주 달콤하고 부드럽다구. 음료수나 똑같아.” 미나가 제 잔을 한입에 다 비우고 말했다. “그럼, 건배 잔은 다 비우는 게 예의야. 이까짓 포도주 한잔 쯤 어떻다구 그래?” 희영이 거들었다. “하긴 뭐, 요즘 여고생들은 맥주나 칵테일 한잔 쯤은 기본이지 뭘.” 창서도 부추기며 나에게 잔을 들어 건배를 권했다. “난 한번도 안 마셔 봤는데···” 내가 거듭 망설이자 태양이 주위를 만류했다. “놔 둬, 마시기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권하는 거 아냐.” 생각해 준답시고 한 말이었을 텐데 왜 나한테는 그 순간 엉뚱한 자존심이 발동했을까. “좋아, 한잔만 할께. 자, 건배.” 나는 잔을 들어 창서의 잔에 부딪쳤다. 그리고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포도 향기와 함께 혀가 아르르한 알콜 기운이 입안에 가득 찼다. 생각보다는 마시기가 수월했다. “이야, 수미 제법인데.” 희영이 박수를 쳤다. “오빠, 나 한잔 더 할래.” 미나가 자신의 빈 잔을 내밀었다. 딱 한잔 씩만 하자던 약속은 어느 샌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게임을 해서 벌주를 마시기로 하는 게 어때?” 별로 말이 없이 있던 웅철이 나섰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러다 증말 취하면 어떡하려구?” 나는 저으기 염려되었다. “걱정 마, 수미야. 우리가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애니? 취할 정도로 마시진 않아.” “그래도···”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들 쪽으로 눈길이 갔다. “괜찮아. 어차피 날 샐 건데 뭘.” 미나가 고집을 부렸다. 포도주가 잔을 채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게임이 거듭되는 동안 마시게 된 벌주로 포도주 한병이 금방 바닥이 났고 새 병이 나왔다. 미나를 비롯해서 우리들 모두도 얼굴에 발그레하니 장미꽃이 피었다. 나도 벌써 석 잔이나 마셨다. 첫잔이 두려웠지 막상 마셔 보니 별것 아닌 것같아 한 잔만 더··· 한 게 석 잔이 된 거였다. “아이, 이제 게임은 시시해. 그만하고 오빠, 우리 춤추자.” 벌주로 받은 포도주를 시원스럽게 비우고 난 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성숙아, 상좀 한쪽으로 치워 줘.” 어질러진 방이 대충 치워지자 미나가 오디오에 시디를 걸었다. 색스폰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며 실내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 놓았다. “왠 블루스?” 창서가 어깨를 옴싹이며 익살을 떨었다. 불을 끄고 붉은 색의 연한 실내등을 켜자 방안은 완전히 사설 카바레가 되고 말았다. 미나와 태양이 끌어안다시피 붙어 블루스를 추기 시작하자 성숙이와 희영이도 스스럼없이 파트너의 가슴에 안겨 들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제법 추어 본 품이었다. 창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덜컹거렸다. 아무리 부담없이 하루 쯤 같이 어울리는 대학생 오빠라고는 하지만 남자는 역시 남자였고, 아직 어리긴 해도 몸은 이미 다 자란 여자가 허물없이 젖가슴을 남자의 가슴팍에 묻는다는 게 어색하고 쑥스러운 노릇이었다. 또, 디스코조차도 출 줄 모르는 내가 블루스를 어찌 감히···. “괜찮아. 손만 잡고 가만히 있으면 돼. 암것두 아냐.” 주저하는 내손을 창서가 훔치듯 잡아끌었다. 담배 냄새가 확 코끝을 자극했다. 어느 틈엔가 창서의 손이 내 허리에 감겨 있었다. “아이, 오빠. 난 정말 못 춘단 말예요.” 순간적으로 나는 몸을 뒤로 뺐다. “괜찮다니깐. 그냥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오기만 하면 돼.” 한 쪽 손과 허리가 창서의 손에 든 채로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창서가 이끄는 대로 어설프게 방안을 끌려 다녔다. 창서의 가슴팍에 닿은 젖가슴이 모기한테 물려 가렵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허리에 걸쳐진 창서의 손은 또 왜그리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지. 창서가 손에 조금만 힘을 주거나 살짝만 움직여도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갑자기 한여름 뜨거운 백사장에 선 것처럼 몸이 더워지고 땀이 흘렀다. 아까 마신 술이 이제 올라오는 것일까.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저것 봐.” 창서가 내 귓가에 입김을 쏟아 부으며 속삭였다. 맙소사! 창서의 눈길에 따라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보여진 광경이란! 미나와 태양이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젖혀 입술을 태양에게 맡긴 미나의 허리춤에 셔츠를 파고든 태양의 손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똑똑히 눈에 들어 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당황해서 몸을 홱 잡아채 빼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딸칵, 불을 껐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실내등이 꺼지는 순간 방안은 칠흑같은 어둠이 덮쳐 버렸다. “어맛!”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은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불이 꺼짐과 동시에 어느새 창서의 입술이 내 입술을 틀어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어깨와 허리를 한꺼번에 답싸인 상태에서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보다 거의 배나 큰 몸집의 남자가, 번쩍 쳐들다시피 해서 순간적으로 찍어 누르는데 어떻게 피할 재간이 있겠는가. 한동안 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제낀 채 고스란히 창서의 입술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핑 도는 어지럼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졸지에 벌어져 버린 사태가 언뜻 납득이 가지 않으면서 도무지 현실감이 들질 않았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창서의 물컹한 혀를 나도 모르게 받아 들여 버린 것은 한순간 머리를 멍하게 해 버린 현기증 탓이었다. 그러자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오해했는지 창서의 손이 불쑥 셔츠 속으로 파고들며 몸이 바닥에 눕혀 졌다.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창서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있는 힘껏 창서의 육중한 몸을 떼밀었다. “가만 있어.” 떼미는 내 손을 가볍게 억누르며 창서가 속삭이듯, 그러나 다급하고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창서 오빠, 왜 이래. 왜 이러는 거야. 얘, 미나야! 성숙아!” 잠깐 입술이 놓여난 틈을 타 나는 제법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틀림없이 방안 어디엔가 있을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창서의 입술이 다시 거칠게 나를 틀어막았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아무리 고개를 도리짓해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창서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이것이 바로 흔히 어른들이 염려하는 그런 일이로구나. 아마 친구들도 나처럼 꼼짝없이 몸이 붙잡히고 입이 막혀 소리를 못 내는 걸 거야. 이걸 어째. 한 방에서 친구들과 동시에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다니. 나는 왈칵 솟구치는 공포감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경우에까지 이르도록 무심코 방치한 내 자신이 더이상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아···”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바로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아주 멀고 높은 벼랑 위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당황해 하는 동안 창서의 손은 이미 내 셔츠를 반쯤 벗기다시피 걷어 올려놓고 이제는 청바지의 단추에서 맴돌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발버둥을 쳐 앙탈해 보았지만 다리를 덮어 누른 창서의 단단한 허벅지 때문에 제대로 버팅길 수가 없었다. 아, 엄마. 어떡해. 나는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수습해 기어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기회를 노렸다. 그래서 일부러 몸의 힘을 빼고 포기한 척 순순히 창서의 손 가는 대로 맡겨 버렸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지였다. 내가 갑자기 양순해지자 이제 뜻대로 되겠다는 안심을 했는지 창서는 입술을 떼서 내 가슴으로 옮겼다. 한손은 벌써 청바지의 지퍼를 내린 채 팬티를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손이 아직 완강하게 내 어깨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섣불리 몸을 튕길 수 없었다. 어설프게 벗어나려 하다가 실패하면 오히려 경계심을 자극해 옴쭉달싹할 수 없이 몸이 붙잡힌 상태에서 일을 당해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팬티 속을 침범한 창서의 손을 어쩔 수없이 내버려 두어야 했다. “아··· 음···” 또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렸다. 헉헉거리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도 들렸다. 진흙탕을 걷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묘한 리듬을 싣고 귓가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 소리가 주는 의미를 깨닫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결국 일을 당한 것이리라. 나는 몹시 마음이 다급해졌다. 창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젖가슴을 빨아 댔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만지게 해준 적은 더욱이 없는 내 순결한 젖가슴에 끈끈한 타액을 흘리며 창서의 입술이 마음껏 뛰어 놀고 있었다. 그것은 아랫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내 스스로도 부끄러워 만져 보기는커녕 감히 눈길 한번 자세히 준 적이 없는 비밀스러운 내 여성을,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자신의 장난감처럼 마음껏 만지며 때를 묻히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창서가 내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나는 수치감과 두려움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잠시 후면 기회를 놓치고 영영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지를 완전히 벗기운 상태에서는 설사 몸을 빼친다 해도 뒷일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다. 아랫몸을 벌거벗은 채 눈밭을 뛰쳐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또 그렇게 해서라도 위기를 벗어난다 해도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불순한 말들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어린 마음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기회는 오직 이 순간뿐이야.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도움닫기를 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셌다. 그리고는 내 바지를 손쉽게 벗기기 위해 약간 쳐든 창서의 상체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아악!” 귀청을 찢을 듯 가까이 비명이 울렸다. 동시에 번쩍, 섬광처럼 잔별들이 눈앞에 스쳤다. “으으··· 내 귀, 내 귀···” 아스라한 허공에 떠있는 듯 정신이 먹먹한 가운데 창서의 악다문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아 손을 뻗쳐 더듬고 있는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딸칵. 구원의 소리처럼 스위치 올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밝은 빛살이 바늘 끝처럼 눈을 찔러 왔다. “어머나!” 누군가의 자지러지는 외침이 울렸다. 나는 황망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아무 곳에나 왈칵 문을 열고 들어가 손잡이 자물쇠를 눌렀다. 그러자 비로소 설움에 겨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면서 나는 팬티며 바지를 추스려 입었다. 창서한테 맞은 볼이 새삼스레 얼얼한 통증을 불러 일으켰다. 뺨의 통증이 되새겨준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 봤다. 욕실이었다. 혹시라도 문을 열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경우에 대비해 나는 벽걸이 장식장에서 손톱줄을 꺼내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은 채 문밖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적시고 흘러 내렸다. 수런거리는 말소리며 거실을 오가는 발자국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한동안 잠잠했다. 나는 아직 가시지 않은 공포감에 몸을 떨며 귀를 곤두세웠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며 다시 주고받는 말소리들이 몇 차롄가 들렸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마치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무섭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수미야, 나야. 문좀 열어 봐.” 미나였다. 그러자 문득 방에서 도망쳐 나올 때 언뜻 눈에 스쳤던 광경이 떠올랐다. 미나와 태양의 모습이었다. 반쯤, 아니 거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까, 벗은 몸으로 둘은 얽혀 있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것은 결코 억지로 당하는 여자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림처럼 선명히 되새겨지는 모습 속에서 미나는 태양의 어깨 넘어로 양팔을 껴안듯이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불이 켜지고 내가 뛰쳐나오는 그 순간에 뒤이어 놀란 그들도 불에 덴 것처럼 튕겨 일어났지만 내 머릿속에는 찰라적으로 눈에 스쳤던 모습이, 워낙 놀랐던 탓일까, 아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성숙이와 희영이도 분명히 방안에 있었던 것같았다. 창망한 가운데서도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으니까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내 판단이 섣부른 오해가 아니라면 애들은 절대 억지로 당할 뻔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 마음이 맞아 묵시적인 동의 아래 이루어진 행위였다. 나만이, 미나들의 보이지 않는 허락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희생될 뻔한 것이었다.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이번에는 배신감이 눈물을 부추겼다. “얘, 수미야. 제발 문좀 열어, 응? 태양이 오빠랑 다 보냈어. 우리끼리 얘기좀 하자, 응? 수미야.” 이번에는 성란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창서에게 당해 버리면 아뭇소리 못 하리라고 생각들 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참담한 분노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나는 더욱 섧게 흐느꼈다. 몇번이나 미나며 성숙이, 희영이가 나를 달래 보려고 했지만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나는 욕실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나에게 열쇠가 있었겠지만 차마 내 기분을 거스르기 어려웠던지 억지로 문을 열려고는 하지 않았다. 미나들은 거실에서, 나는 욕실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씁쓸한 기분을 붙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크리스마스 축복받은(?) 아침을 맞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린 거의 석달을 소 닭 보듯 외면한 채 지냈다. 나는 나대로 상처가 너무 컸고, 미나네들은 걔들대로 나 보기가 민망스러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또래의 인간 관계가 대개 그렇듯 우리는 어느 틈엔가 다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로 다가들어 있었다. 가슴 깊이 가라앉아 있는 앙금은 가끔 서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으나 워낙에 변죽이 좋은 성란이들었는지라 나도 모르는 새에 예전처럼 웃고 떠드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말은 서로 터놓고 나누는 듯해도 나는 항상 일정 거리의 경계막을 쳐 두고 있었다. 이븟날 밤에 겪었던 일이, 미나들에게는 별 대수로운 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지우기 힘든 상흔으로 남아 가끔씩 소리없는 아우성을 쳐댔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가는 건 좋긴 한데 또 지난번 같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더구나 도와줄 사람조차 없는 낯선 곳에서. 아무리 성숙이의 사촌이고 같은 학년의 동급생이라지만 남자들은 결국 다 똑같을 텐데···. 이븟날 그렇게도 순순히 남자에게, 그것도 언니의 클라스메이트인 사람에게 몸을 던지는 미나라면 그곳에서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을 텐데. 성숙이야 제 사촌이 있으니까 어떨지 몰라도 희영이 역시 그런 점에서는 미나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테고···. 나도 며칠 바닷가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븟날 한 방안에서 스스럼없이 남자들과 안고 딩굴던 미나들의 충격적인 모습이 떠올라 쉽게 마음이 내키질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학원에 등록해서 뒤진 과목 보충이나 하는 게 후회없지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운데 쪽지가 또 왔다. <귀하의 우려하는 바를 일체 없애기 위해서 00들은 텐트, 우리들은 근처의 민박집 방을 따로 얻기로 했음. 또한 귀하에게는 설거지를 포함한 모든 잡무를 전혀 맡기지 않겠으며 일정의 100%를 귀하의 의견대로 무무무조건 따르겠음. 그래도 귀하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 3인은 포기함과 동시에 오늘 방과후 학교앞 분식집 ‘짱구네’에서 순대를 각 20인분 씩 먹고 배터져 죽어 버리겠음. 꼭 참관하셔서 우리의 장렬한 전사를 지켜 보시길 바람.> 깨알같은 글씨로 길게 써 내려간 쪽지의 아래에는 미나와 성숙이, 그리고 희영이의 사인까지 그려져 있었다. 저희끼리 부지런히 쪽지를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떡한다? 가기도 그렇고 박정하게 딱 잘라 버리기도 난처하고··· 이렇게까지 나를 끼워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방과후에 짱구네 분식집에서 함께 만나 긴 얘기 끝에 나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바닷가 행을 승락하고 말았다. 내 젊은 날의 한 조각을 어두운 늪속에 떨어뜨려 버리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출발점이었다. “야! 바다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 풍경이 가슴을 확 터주는 듯했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시원한 해풍에 실려 온 비릿한 갯내음은 오히려 상큼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탈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 “어때, 역시 같이 오길 잘했지?” 성란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래, 고마워.” 나는 진심으로 나를 같이 끼워 주려고 안간힘을 쓴 친구들이 고마웠다. “자, 자, 바다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니니까 이따가 차분히 감상하기로 하고 우선은 좋은 자리에 집부터 지어야지.” 벌써부터 모래밭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수선을 떨어 대는 우리를 보고 진용이가 흐뭇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먼저 여자애들 민박집부터 정해 놓고 거기 가까운 데에다 텐트를 치는 게 어때?” 재철이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버스 안에서 우리는 서로 상당히 친근해져 있었다. 남자 쪽의 진용이와 성숙이가 사촌간이라 그 친구들에게도 은연중에 신뢰감이 들었고 같은 학년이라는 동류의식도 촉매 역할을 해 서울에서 출발하면서 이미 우리는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재철이는 키도 크고 얼굴도 제법 핸섬해 귀공자 스타일이었는데 말하는 것도 시원스럽고 리더십이 있어 남자애들 쪽의 리더 격이었다. 버스 안에서 소지품을 나누어 골라 파트너를 정했는데 성숙이가 약간의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 내 파트너로 정해 주었다. 저런 아이라면 친구로 한번 사귀어 봄직도 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터라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게 신경을 써 주는 성숙이 내심 고마웠다. “자, 수미야. 네 짐 일루 줘.” 재철이 내 배낭을 성큼 뺏어들더니 앞장을 섰다. “야, 이거 질투나서 못 봐 주겠는데. 얘, 니나야, 너도 배낭 이리 줘. 나라고 기사 노릇 못 하란 법 있냐.” 미나의 파트너인 영석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희영이 역시 파트너인 진용이에게 배낭을 맡겼고 성숙이도 별명이 ‘깡통’인 강돈이한테 배낭을 내맡겼다. 양 어깨에 두 개의 배낭을 짊어진 재철이들을 앞세우고 우리는 웃고 떠들고 깔깔거리면서 민박집을 구하러 다녔다. 서너 집을 들른 후에 우리는 꽤 마음에 드는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고 여자들만의 샤워장까지 별도로 설치된 것도 마음에 들었으나 무엇보다도 방이 넓고 깨끗해 좋았다. 남자애들이 텐트를 치러 간 틈에 우리는 대강 짐을 풀어 놓고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우선 시원한 바닷물에 풍덩 뛰어 들고픈 마음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 미나 야한데!” 성숙이 미나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리며 깔깔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잖아도 우리들 중에서 가장 성숙해 어른스러운 티가 나는 미나는 그야말로 가릴 곳만 겨우 가린 비키니 차림이어서 여자인 내가 봐도 아슬아슬할 지경이었다. “언니 걸 살짝 쌔비했지 뭐. 어때, 괜찮니?” 마치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미나가 살짝 몸을 뒤틀어 야한 포즈를 취하며 윙크를 했다. “야야, 오늘 잠 못 잘 남자들 꽤나 많겠다.” “후우, 브룩 쉴즈가 울고 가겠는 걸. 어쩌지? 우린 영 틀렸는데. 너하고 너무 비교 되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미나는 정말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크고 동그란 젖가슴 하며 탱탱하게 치올라 붙은 히프, 길고 늘씬한 허리와 다리 곡선이 우유처럼 보얀 살결에 어우러져 눈이 부실 정도였다. 누가 봐도 이제 여고 2학년의 어린 소녀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었다. 성숙이는 약간 통통하게 살이 오른 편이었다. 그래선지 큰 편인 젖가슴이 더욱 도드라지게 커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편이어서 말하자면 글래머 같은 인상을 풍겼다. 또 희영이 역시 미나만큼은 아니지만 큰 키에 어울리는 날씬한 몸매가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가 오히려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친구들의 몸을 곁눈질하면서 나는 은근히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나는 미나처럼 예쁜 얼굴에 잘 빠진 몸매도 아니었고 희영이처럼 키가 크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성숙이처럼 전체적인 균형이나마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원피스 수영복의 어깨 끈만 하릴없이 매만지면서 미나나 희영이를 향한 부러운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쩜, 수미야. 너 보기하곤 다른데?”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희영이가 갑자기 나를 들먹였다. 그러더니 와락 손을 뻗쳐 내 가슴을 모두쥐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머나!” 내가 질겁을 하자 모두들 큰소리로 깔깔거렸다. “얘는··· 무슨 짓이야.” 나는 희영이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희영이가 더욱 크게 깔깔거리며 이번에는 날 껴안는 시늉을 했다. “내가 남자라면 난 수미 너를 택할 거야.” “맞아, 수미 너한테는 알 수 없는 청순함이 있다니깐.” “얘들은, 누굴 약 올리는 거니?” “아냐, 정말이라니깐. 넌 정말, 뭐랄까··· 깨끗해 보인다고나 할까, 순수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냥 표현하기 힘든 뭐 그런 게 있어. 게다가 이 뽀얀 살결 하며 콱 깨물어 보고 싶은 이 앙증맞은 젖통···” 희영이 다시 내 가슴을 만지려 했다. 또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젖통’이라고 말할 때의 희영이의 억양이며 표정이 몹시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영복을 갖춰 입고 썬탠 크림까지 바른 후에 우리는 뒤질세라 달려 나가 바닷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텐트를 다 설치하고 온 남자 애들과 어우러져 물놀이며 수구, 비치볼 게임 등으로 모처럼 신나고 활기찬 시간을 보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짙푸른 바다, 그리고 달구어진 모래밭 만큼이나 더운 젊음의 열기, 수많은 사람들이 질러 대는 함성과 파도 소리에 시계 바늘이 정신을 잃어버린 듯 금방 시간이 흘러 버렸다. 서서히 불오기 시작하는 서늘한 바닷바람 속에서 저녁을 지어 먹은 다음 우리는 남자 애들이 쳐놓은 텐트 앞에 모여 앉았다. 저녁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것인가를 이것저것 얘기하는 동안에 벌써 다른 쪽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텐트 앞에 판을 벌리고 둘러 앉아 화투패를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우선 목부터 좀 축이면서.” 진용이 종이컵 가득 찰랑거리는 냉커피를 만들어 돌렸다. “이거 서비스 끝내 주는데.” “진용이 카페 마담해도 되겠다.” “이야, 맛 한번 끝내 주는 걸.” 모두들 한 마디 씩 공치사를 하며 반갑게 받아 들었다. “에, 오늘은 내려오느라 많이들 지치고 피곤할 테니까 우선 파트너들끼리 좀더 가까와지자는 의미에서 한 시간 쯤 바닷가를 거닐며 서로에 대해 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고, 그 담에 여기 다시 모여서 간단히 다과로 뒷정리를 한 후에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는 게 어때? 어차피 앞으로 사흘이나 남았는데 놀 시간은 충분하니까 말이야.” 재철이 먼저 입을 열어 의견을 밝혔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붉혀졌다. 말을 하면서 내내 재철의 시선이 내 얼굴에만 붙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한테 이야기 하고 나한테 의견을 묻는 것처럼. “그것도 좋겠는데. 삼박사일 동안 호흡을 맞추려면 우선 파트너끼리 좀더 친해져야 할 테니까 말야.” 진용이가 찬성표를 던졌다. 식사 당번이며 설거지 당번을 파트너끼리 한 조로 번갈아 하기로 한 것을 염두에 둔 듯했다. “찬성은 찬성인데 말야. 좀 아쉽지 않아? 약간 피곤하긴 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고, 어차피 쉽게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미나가 말꼬리에 여운을 달았다. “맞아.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영석이 미나의 말을 거들었다. 아까부터 미나를 향한 영석의 시선에 가득차 있던 선망의 빛을 눈치 채고 있던 나는 영석이 자신의 파트너인 미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 강돈이 얘기를 정리했다. “우선 한 시간의 개별 시간을 가진 다음에, 여기 다시 모여서 더 놀든지 자든지 결정을 하는 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절대 멀리 가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 되기야.” 자신의 파트너인 강돈이와 함께 일어서면서 성숙이 내 쪽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가 불안해 할까봐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우린 그냥 여기서 있을래. 어차피 누군가는 텐트를 지켜야 할 테니까.” 진용이가 말하자 희영이 주섬주섬 빈 종이컵들을 챙겼다. “우린 해변이나 좀 걷지 뭐.” 재철이 나에게 권하듯 말했다. “좋아.” 모래밭에는 아직도 여기저기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나는 서슴없이 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조금 피곤해서일 거라고 순간적으로 생각을 하며 나는 재철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파도가 이루어 놓은 나이테를 따라 오롯이 걸었다. 하얀 파도의 포말이 불빛에 반사되어 부서지는 것을 보며 걷는 기분도 꽤 괜찮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둔한 어지럼증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여러 번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잠깐만.” 나는 가만히 선 채 머리에 손을 얹고 어지럼증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왜, 어디 아파?” 재철이 다가와 내 기색을 살폈다. “아냐, 괜찮아. 좀 현기증이 나서···” 나는 얼른 손을 내리고 다시 발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큰 어지럼증이 기어코 나를 쭈그리고 앉게 만들고 말았다. “심한 거 아냐? 이런 데서 아프면 자기만 고생해. 텐트로 돌아가자. 진용이한테 상비약이 있을 거야.” 재철이 손을 뻗어 나를 부축해 주었다. “어머, 수미야. 왜 그래?” 가까스로 발걸음을 옮겨 텐트로 가자 진용이와 함께 노닥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던 희영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머리가 몹시 아픈가 봐. 진용아, 너 상비약 준비했지? 좀 찾아다 줘.” 재철이 나대신 얘기를 했다. “너무 무리했나 보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희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토닥였다. “자, 여기 있어. 두통약.” 진동이 알약 몇 개와 물컵을 건네주었다. “약을 먹고 텐트에서 좀 누워 있으면 금방 가라앉을 거야.” “그러지 말고 아예 방에 가서 좀 쉬는 게 어때? 열쇠 너한테 있지?” 재철이 희영을 돌아보았다. “열쇠는 나한테 있어. 그럴래, 수미야?” “그게 낫겠어.” 남자애들의 텐트에서 누워 쉬기도 좀 뭣한다 싶어 나는 차라리 방에서 편히 쉬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데려다 줄게.” 희영이 숄을 챙기며 나섰다. “미안해, 희영아. 괜히 아파 가지구 널 귀찮게 해서···” “아냐,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한숨 푹 자고 나면 깨끗이 나을 거야.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쉬어. 이따가 올게.” 희영이 나를 데려다 주고 나가자 나는 청바지를 벗어 버리고 짧은 반바지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방 한켠에 단정하게 개켜져 있는 군용 담요 한장을 펴고 드러누웠다. 진용이가 준 약을 먹어서인지 이제 어지럼증은 많이 걷혀 있었다. 대신 무척이나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를 오랫동안 탄데다가 낮에 너무 갑작스레 심하게 놀아 몹시 지친 까닭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서서히 깊고 무거운 잠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련히 먼 곳에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왔다. 흐읍, 흐읍. 얼마나 지났을까. 꿈결이다 싶은데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마치 커다란 바윗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두터운 밧줄에 꽁꽁 몸이 휘감긴 것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런 느낌에 나는 깊은 수면의 바닥에서 맑은 의식의 공간으로 헤엄쳐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흐릿한 의식 너머로 깜깜한 어둠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그래, 바다··· 두통··· 잠이 들었었지··· 그런데··· 친구들은··· 아직 안 온 걸까··· 왜 이렇게 꿈쩍도 할 수 없지··· 내가 정말 큰 병이 난 것일까···. 잠의 심연과 몽롱한 현실의 의식 사이를 방황하던 내 정신이 갑자기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것같은 충격에 의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나를 짓누르고 있던 가위누름의 정체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였다. “누, 누구···”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손을 뻗치려 했지만 솜처럼 늘어진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큰일났다는 생각이 핑 현기증을 동반하고 머리를 스쳤다. “어, 엄마.” 나는 안간힘을 쓰며 나를 결박하고 있는 남자의 사슬을 풀어 보려 했지만 웬일인지 제대로 몸에 힘이 돌지를 않았다. “가만 있어. 이제 다 됐어.” 낯익은 목소리. 퍼뜩 재철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재, 재철이지···” 그러다가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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