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거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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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거리 4
뒷일을 정리하고 오겠다는 우진이 나가고 둘은 어둠 속에 일렁이는 촛불이 가득한 바(Bar)로 들어갔다. 골목 외곽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번화한 시내 거리에 비해 한산한 분위기였다.
바의 인테리어는 비싼 오브제와 많은악기 등, 포인트 조형물로 배치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성현과 현수는 많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둘은 똑같이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아 눈치만 보고있었다.
“은수가 보고 싶어.”
현수가 처음 입을 떼었다. 은수는 1년전 헤어진 여자 친구이다.
“나도.”
1년 전에 상현의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은 말이었다.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며, 의지할 곳이 없다는 그의 신호처럼 느껴져서 성현은 뭔가 섭섭하고 복잡한 마음이었다.
“셋이 참 재밌었는데 그렇지?”
“후회해?”
“뭘?”
“괜히 일 소개받은 거.”
“모르겠어. 그냥 좀, 멍하네.”
“있지.......”
“주문하시겠어요?”
성현이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갑자기 얇은 목소리의 여자가 검은 메뉴판을 건네며 물었다.
“아.”
둘은 자연스레 그녀를 바라봤다. 밝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입과 눈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성현은 메뉴판을 받아 물끄러미 본 후에 데킬라를 병째로 시켰다.
“모두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네.”
주문을 받은 그녀가 멀어지자 현수가 말했다.
“아, 저 사람이 그 여자 바텐더인가. 왜 관심 있어?”
“예쁘니까 당연히 눈은 가는데. 뭔가 위험한 사람 같네.”
“그러고 보면 우진 삼촌이랑 넌 좀 닮았다. 촉이라던가, 감이 좋은 것 같아.”
“아니, 그냥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야.”
“아깐 모두가 사랑할 사람이라며.”
“그러니까 위험할지도.”
그런 알듯 말 듯 한 대화의 열매를 주렁주렁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나왔다.
“데킬라. 마셔봤어?”
성현이 흥이나 잔을 채우며 물었다.
“아니.”
“학교 애들이랑 먹었는데 은근 맛있더라.”
말을 이어가며 둘은 잔을 부딪쳤다. 술은 현수가 먹기에 역했다. 술을 잘 못 먹는 그는 처음 접한 술에 인상을 찌푸렸다. 성현은 같이 나온 레몬을 빨며 현수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안주는 뭐 먹지.”
반대편에 분주한 그녀를 번갈아 보며 성현은 말했다.
한 남자가 와인색 스커트를 입은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남자는 일전의 마트에서 일하던 남자였다.
성현은 직감적으로 현수의 얼굴을 봤다. 이미 벌겋게 돼서 헤롱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더욱 안 좋은 예감만 들었다. 성현이 말릴 새로 없이 현수는 남자에게 달려갔다. 중앙에 놓인 당구 큐대를 집어 남자 앞에 번쩍 들었다.
“나가 주십시오.”
순간 우진과 험상궂은 남자들이 나타나 현수를 가로막고 남자에게 말했다.
“계산은 필요 없고, 소란을 더 일으킬 생각이 아니면 나가주세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아, 아 네.”
남자는 단숨에 술이 깬 표정으로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냐.”
우진이 위협적으로 고개를 돌려 현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남자가 성추행을.......”
“그래서.”
“그래서.......”
현수는 입술을 깨물며 집어 든 큐대를 바라봤다.
“우리 건달 양아치 아니다. 너 건달 양아치냐?”
우진의 질문과 바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현수에게 꽂혔다. 현수는 곤란한 표정의 성현을, 멋쩍은 표정의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술 때문에 어지러웠다.
“자존심이냐?”
“.......”
“보통 가오라고 하지. 남자 자존심. 이해는 간다. 친구한테 존경받고 싶고 여자 도와줘서 정의의 사도라도 되고 싶었냐.”
“그런 게 아닙니다.”
“가오 뜻이 뭔 줄 아냐? 일본어로 얼굴이야. 정확히는 체면이지. 네가 체면에 목숨 거는 나이라는 건 알겠는데. 네 체면 지키는 방법이 고작 주먹밖에 없는 거냐, 아기 손?”
“포주 새끼 주제에!”
갑자기 현수는 고함을 지르며 큐대를 번쩍 들어 휘둘렀다. 우진은 가볍게 피하며 현수의 복부를 가격했다.
현수는 눈을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시 큐대를 들었지만, 우진의 왼쪽 주먹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회식 끝.”
우진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말하고 혼자 건물 계단을 내려갔다.
우진은 골목 너머 빠르게 반짝이는 거리를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만취해서 길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와, 깊은 새벽까지 호객을 위한 사람들, 지친 듯 쓰러진 회사원을 바라봤다.
“야!”
우진의 등 뒤에서 주먹이 내질러졌다.
우진은 목소리의 주인 주먹을 잡고 들어 올려 바닥에 찍었다.
그는 입가에 고인 피와 함께 기침을 하며 아려오는 등살을 꿈틀거렸다. 우진은 그 위로 쪼그려 앉아 현수의 얼굴에 연기를 내뱉었다.
“그렇게 다 네 밑에다 둬야 직성이 풀리겠냐? 단순한 분풀이야?”
“무슨 소리예요.”
현수는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네 기준이 허락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폄하하고, 더럽다 손가락질해야 네가 좀 잘나진다고 합리화하는 게 지겹지도 않냐고. 포주라니, 상처받았다 나.”
“틀려요 그럼?........”
“너 뭣 때문에 성현이랑 왔냐. 돈 필요해서 아니야?”
“맞죠.”
“그럼 뭘로 돈 벌러 왔어, 자선사업하고 연탄 나르러 왔냐?”
“아니요.”
“그럼 손에 똥 묻은 애새끼처럼 징징대면서 그만두진 마라. 네가 선택한 일이다. 저급해서 못하겠다면서 핑계대지 말라고.”
“그렇지만 저런 새끼들 돈 받으면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현수는 누운 채로 발 밑에 쌓인 쓰레기를 발로 차며 소리쳤다.
“돈은 내가 주지 쟤네가 줘? 인마, 내가 돈이 좋아서 저런 놈들까지 받는 것 같아?”
“아니에요?”
“이 거리에는 저런 놈들만 있는 게 아니야. 네게 자존심이 중요하듯 이 거리로 돈 이상의 가치를 찾으러 오는 사람도 있어. 상사나 거래처가 접대를 원하니까 승진과 계약이 걸린 마시기 싫은 술 한 잔, 단 하룻밤의 사랑이라도 갈구하는 애처로운 사람들, 신을 내지 않으면 내일을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이 내게 돈을 건넨 이상, 책임을 지고 그들의 요구나 쾌락을 채워줘야만 하는 거라고.”
우진은 타들어가는 담배를 든 손으로 원을 그려가며 말했다.
“거리로 몰린 애들은요? 당장 내일의 생계유지가 힘들어서 그런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끌어 내리셨잖아요.”
“생계유지? 정말 혼자 소설을 쓰는구나.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 조건만남 하는 애들이 있나 봐라. 너는 궁지에 몰려야지만 자신의 소중한 걸 판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애처로운 사연을 가진 애들은 극소수야. 대부분 돈맛 들려서 멋모르고 뒹굴다가 신세 망치거나 심하면 미친 새끼들한테 걸려서 좁고 어두운 방에서 뒈지기도 해. 자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거야. 그런 일이 없도록 내가 있는 거고.”
“하아.......”
현수는 더욱 복잡해진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내가 쉬고 싶다. 내가 왜 너 같은 좆만이한테 이런 얘길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네 그 같잖은 상상력 때문에 내 거리의 격을 떨어뜨리지는 마라. 내가 일군 이곳은, 네 생각만큼 좆같은 곳이 아니니까.”
우진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 생각이 짧았네요......”
현수는 맞은 곳이 힘겨운지 기침과 함께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그게 진심인지는 상관없지만, 여긴 적어도 모두 솔직한 사람들만 있어. 조금도 더럽혀지고 싶지 않은 넌 또 네 의지나 열정, 쾌락을 무시하고 또 스스로 내일부터라고 말하겠지. 인생 선배로서 말하는데, 그것만큼 비겁하고 시간 낭비하는 게 없더라. 오늘은 이만 퇴근해라. 출근은 너 하고 싶으면 하던지. 끝.”
우진은 담배꽁초를 대충 멀리 던지며 뒤돌아섰다.
“잠깐만요.”
“뭐.”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