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더블 데이트 - 1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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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더블 데이트 - 14부
그렇게 자주 온 것은 아니지만 몇 번 지나간 적이 있는 정석이 기억하는 금남로는, 넓고 쭉 뻗은 도로에 가득한 차들과 그 양옆에 드리워진 가로수 아래로 지나다니는 꽃다운 청춘남녀들로 가득 찬 거리였다. 웃음이 있고, 노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금남로는 차 대신 장갑차와 바리케이트가 가득했고 청춘남녀들이 거닐던 인도는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가득했다. 노래 소리는 고사하고, 새벽의 적막함을 뚫고 어딘가에서 군화발 소리가 착착착 들려온다.
정석은 최 씨에게 큰길은 피하고 되도록 뒷길로 가도록 명했다. 최 씨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 황급히 차를 돌려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빠져나갔다. 군인들이 막아선 길이 몇 군데 있었지만 그들은 이 대형 세단에 사나운 눈빛만 던질 뿐, 딱히 막아서거나 검문하지 않았다. 익숙치 않은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닌 끝에, 그들은 목적했던 윤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정석은 뛰어내리다시피 내렸다.
"손 변호사! 손윤희!! 계십니까?"
그녀의 집은 전통한옥이었다. 마당에 뛰어든 정석이 애타게 윤희를 불렀지만 누구 하나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석은 대청 마루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이, 녹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뒤따라 집으로 들어온 최 씨는 보다 적극적으로 방과 방을 뒤졌지만 아무도 찾지 못 했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최 씨는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로 정석에게 돌아와 종용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변고가 크게 난 것 같습니다. 저희라도 빨리 돌아가죠. 여기 오래 있어봐야 좋은 꼴 안 날 것 같습니다."
정석도 최 씨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무사하면, 나중에라도 회사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최 씨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정석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결심을 내리고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사정이 험한 줄 뻔히 아는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버리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석의 말에 최 씨는 고개를 저었다.
"난리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입니다. 괜한 곳에 서 있다가 눈 먼 돌덩이에 맞아 죽을 수가 있습니다."
"허어.. 이것 참..."
정석과 최 씨가 마당에 서서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누군가 대문에 들어서며 말했다.
"누구시죠?"
하이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정석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거기에는 태근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입고 있는 원피스는 원래 하얀 색인듯 했지만 먼지와 때가 잔뜩 묻어 있어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고 군데군데 피까지 묻어있었다. 정석은 소녀에게 물었다.
"그런 넌 누구니? 이 집 아이니?"
"제가 먼저 물었어요."
어린 녀석치고 담과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차림새로 보아 큰일을 당한 게 분명한데도, 말투에 힘이 있고 논리정연했다. 정석은 녀석의 태도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넌지시 짐작하며 물었다.
"넌 손 변호사 동생이구나. 그렇지? 어린 여동생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를 아세요?"
"그래. 손 변호사가 있는 회사의 회장이다. 박정석이라고 하지."
상대가 비록 어린 아이이긴 했지만 정석은 최대한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녀석은 두 손을 모아 앞에 가지런히 하고는 깍듯하게 배꼽인사를 했다.
"언니가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저는 막내동생, 하영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다들 어디 갔니?"
하영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정석이 몇 번 더 재촉하여 묻자 하영은 별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큰 언니는 다쳐서 병원에 있어요. 그리고 오빠가 시청에 있어서 거기에 갔더니 군인들이 못 들어가게 해서...."
"시청? 거긴 왜?"
"시위 하다 몰린 사람들이 시청에 갔다가 지금은 못 나오고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총이 있어서 군인들이 들어가지도 못하고요. 계속 그러고 있어요."
정석과 최 씨는 서로 마주보았다. 군인들이 총을 든 거야 이미 보았으니 새삼 놀랍지는 않았지만 시위대에게까지 총이 있다는 건 이미 걷잡을 수 없다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국에서 시위는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시위대가 총까지 들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정석은 하영에게 물었다.
"하영이라고 했지? 언니가 있는 병원이 어디니?"
하영은 그들을 안내했다. 어린아이 발걸음으로는 한참이지만 차로는 금방인 거리였다. 병원은 신음하는 부상자로 초만원이었다. 병상이 부족하여 복도까지 붕대를 칭칭 동여멘 환자가 널부러져 있었다. 정석은, 병원에 들어오며 마당에서 본 무언가가 그저 통나무에 하얀 천을 덮어놓은 것이길 빌었다. 그러나 병원 마당에서 그런 물건에 하얀 천을 덮어두진 않는다.
"언니!!"
원래 6인실 병실이었지만 열댓명은 족히 들어찬 병실 한 켠에 윤희가 있었다.
"하영아, 집에 가 있으라고 했잖아."
동생을 타이르던 윤희는 정석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여긴 어쩐 일로...."
윤희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원래 쓰고 있던 안경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마와 볼에는 시퍼런 멍과 자잘한 상처가 선명했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피가 이미 잔뜩 배어나와 다른 붕대로의 교체가 시급해보였다. 정석은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면서도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한번 동생들 보러 온다고 했잖아. 집에 갔더니 막내동생이 인사하더군."
정석의 말을 들은 윤희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회장님이 아니라 제가 그랬죠. 보여드리겠다고. 잘못 기억하고 계시네요."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모로 가든 광주로만 오면 되는 거지."
정석의 빈약한 유머에 윤희는 살짝 미소지었다. 윤희는 자신의 곁에 다가온 동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온 길이 있으시다면 나갈 길도 있겠죠. 부탁이 있어요. 회장님."
"말해봐."
정석은 어쩐지 그녀의 부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제 동생을 데리고 나가주세요. 가능한한 서울로요."
예상대로였다. 언니의 말에 화들짝 놀란 하영이 제 언니를 돌아보며 소리질렀다.
"언니!"
그러나 윤희는 하영의 손을 잡고 차분하게 말했다.
"하영아, 잘 들어. 일단은 회장님 따라서 먼저 서울에 가 있어. 너 평소에도 서울에 가고 싶어 했잖여."
"그래도...."
"언니는 석희 데리고 꼭 올라갈게. 그 녀석은 사투리가 억세서, 혼자 놔두면 서울 사람이랑 대화도 안 통할 놈인께."
"언니이..."
하영은 언니의 허리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윤희는 고개를 들어 정석을 보며 말했다.
"듣자하니 광주 외곽은 더 흉흉하다고 들었어요. 나가려는 버스에 대고 기총을 난사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그러니 분명 회장님이 나가시는 길에도 인원을 점검할 거예요."
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들어올 때 그런 소릴 하더군. 남지도 말고, 누굴 데리고 나오지도 말라고."
"그러니 저는 더욱 안 돼요. 여기서 해야할 일도 있고요. 제 동생만이라도, 얘는 이렇게 작으니까요. 어떻게든 숨겨서 데리고 가주세요."
"여기서 할 일이라니. 여긴 자네 같은 여자보다 힘 잘 쓰는 남자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윤희는 평소 버릇처럼 안경을 치켜 올리려고 했지만, 자신의 얼굴에 안경이 없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회장님은, 남녀차별 같은 거 없이 오로지 능력만 보고 사람 뽑아 쓰신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으시네요. 전 여자가 아니라 변호사예요. 여기 같은 무법천지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죠. 법을 어기고 시민을 짓밟고 있는 사람들에게 법의 엄정함을 전해줄 사람 말입니다."
단호한 윤희의 말에, 정석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석은 대답 대신 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훌쩍이는 하영을 달래어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본 하영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리가 이래서 배웅은 못하겠습니다. 부디... 제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알았어. 그렇지만 난 애보기에 영 꽝인 사람이야. 빨리 서울 와서 다시 데려가게."
"후후. 그럴게요."
언니를 보며 훌쩍거리는 하영은 정석이 들어서 품에 안았다. 그대로 병원을 벗어나자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최 씨와 차가 보였다. 최 씨는 정석이 안고 나오는 하영을 보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석은 그의 표정을 일부러 모른 체 하고 말했다.
"최 기사. 출발합시다."
"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던 최 씨는 운전석에 얼른 올라탔다. 정석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군데군데에 불타고 있는 짚차가 보였고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학생들의 무리가 보이기도 했다. 일행을 모두 태운 차가 출발했다. 금남로를 벗어나 외곽도로쪽으로 가던 중 정석은 최 씨에게 차를 세우도록 했다.
"아까 그 군인이 인원 확인한다고 했었죠?"
"네. 그랬죠. 그런데 저 아이는...."
정석은 최 씨에게 몇 마디 지시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던 최 씨도 이내 의미를 알아듣고 얼른 뒷트렁크를 열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석은 옆자리에 앉은 하영에게 말했다.
"아까 네가 그랬지? 지금 시내에서 군인들이 사람들 잡아간다고?"
"네."
"근데 여기서 나갈 때도 아마 그럴지도 모르거든? 그러니 아저씨 말대로 잠깐만 있어볼래?"
눈치빠른 하영은 순순히 정석의 지시를 따랐다. 뒷트렁크의 짐을 모두 꺼내놓고 트렁크 바닥의 스페어타이어까지 꺼내버리자 아주 작은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정석은 하영을 거기에 눕히고 몸을 반쯤 접고 있게 한 다음, 매트를 덮었다. 트렁크에 있던 짐 중에서 무겁지 않을 걸로 골라 매트 위를 살짝 덮어두었다.
"숨쉬기 어떠니?"
"괜찮아요."
실날같은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정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 씨와 함께 차에 올랐다. 들어올 때 지났던 검문소에 이르자 예상대로 차를 정지시켰다. 정석은 최 씨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군인 한 명이 다가와 그게에 물었다.
"오늘 공사시 사오분에 여길 지나셨군요. 인원은 둘. 보안사 증명서를 제출하셨고, 목적은 지인 방문. 맞습니까?"
"그렇소."
아까 통과시켜준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든 용지를 들여다보며 차와 정석을 확인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앞좌석과 뒷좌석 문을 열어 차 안을 확인했다. 별다른 점을 찾지못한 그는 최 씨에게 출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곤 바리케이트에 놓여진 바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자니 다른 군인 한 명이 더 다가온다. 그는 밥풀 두개를 달고 있었다. 중위는 정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를 치우고 있는 군인을 불렀다.
"야! 김 병장. 이 사람 누군데 고개 빳빳이 들고 이러고 있어? 몸 수색도 했어?"
김 병장은 중위 앞으로 와서 경례를 붙였다.
"병장! 김재철! 몸수색은 아직...."
그러자 중위는 다짜고짜 병장의 쪼인트를 깠다. 병장은 자세를 흐트러뜨렸지만 이내 차렷자세로 복귀했다. 중위가 병장의 얼굴에 대고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저 안에 지금 빨갱이들이 존나 득실거린다고 했어, 안 했어? 저기서 나오는 새끼는 다 빨갱이야! 너 이 새끼 영창 함 가볼텨?"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이고 나발이고 당장 이 놈이랑 운전수 구속하고 차량 압수해! 헌병에 넘기고 바리케이트 다시 쳐! 이 새끼가 존나 빠져가지고..."
정석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트렁크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 시선이 간다. 아무리 살짝 덮었다고는 하나 트렁크 자체가 밀폐된 공간이다. 거기에 아이를 너무 오래 두고 있다. 게다가 차량이 압수라도 된다면 그 아이는 당분간 갇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봐, 중위 양반."
"뭐? 양반...?"
중위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병장을 향해 쏟아지던 그의 폭언이 잠시 멈췄지만, 이제는 새로운 타겟을 설정할 판이다. 그러나 정석은 쫄지 않고 말했다.
"그래. 양반이라고 했지. 아니면 상놈이라고 해줄걸 잘못했나? 양반이 불만이야?"
"뭐? 이 새끼가..."
"새끼? 중위 나부랭이가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했어?"
"나부....랭이?"
아무래도 중위는 열받으면 얼굴이 하얗게 되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변했다. 그는 병장의 쪼인트 대신 다른 걸 까기 위해 정석을 향해 걸어왔다.
"그래. 나부랭이라고 했다. 씨발. 내가 중정에 김 대령 얼굴을 봐서라도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 하는데 니가 너무 나대잖아! 응?"
"주...중정?"
정석의 멱살을 잡으려던 중위는 멈칫했다. 상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에 놀란 것이다. "중정"이라는 단어는, 중앙대학교 정문이나 중늙은이 정신머리의 줄임말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의 멈칫거림을 눈치챈 정석은 기세를 몰아갔다.
"내가 평소에 빽 운운하는 놈들 딱 질색이라 어지간해서는 언급 안 하는데,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아까 통행증도 보여줬잖아!"
"통...통행증이라뇨?"
중위는 이미 정석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얼이 빠진 표정의 중위가 병장에게 묻자 김 병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까 보안사 통행증을 제출하고 안에 들어갔다고...."
"야이 새꺄! 그런 걸 왜 진작 말 안하고 자빠졌어!"
중위는 다시 한번 병장을 쪼인트를 갈겼다. 이번에는 좀 과했던 듯. 병장은 정강이를 끌어안고 신음했다. 중위는 정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 정자세로 경례를 올려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검문에 협조를 해주셔서 감사..."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정석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관등성명이나 들어보지. 왜 명찰을 안 차고 있나?"
병장도 그렇고 중위는 명찰을 차고 있지 않았다. 명찰이 있는 자리에는 검은 천으로 가려 있있었다.
"제7공수여단 소속, 이문수 중위입니다! "
"그래. 이문수 중위라고? 내가 특별히 김 대령 만나거든 꼭 이야기해주지. 업무에 몹시 충실한 중위가 한 명 있더라고."
"시...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무슨. 임무에 충실한 게 죄인가?"
정석은 차에 올라타 최 씨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떤 최 씨는 얼른 시동을 걸었다. 정석은 아직도 바짝 얼어있는 이 중위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출발시켰다. 언덕을 지나 검문소가 보이지 않는 위치가 되어서야 차를 세우게 했다. 차에서 내린 두 남자가 트렁크를 열고 바닥을 들추자 거기에는 온몸에서 팥죽같은 땀을 흘리고 있는 하영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정석은 자켓을 벗어 하영의 몸을 감싸 들어올렸다. 거칠기는 하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하영을 뒷좌석에 태우고 최 씨에게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도록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정석은 생각했다. 정석의 곁에는 지금 광주에서 나온 한 명의 아이가 쌕쌕거리고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받은 미자는 말했다. 정석이 가더라도 단 한 명만을 구할 뿐이라고.
"한 명... 단 한 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머지는...."
정석은 윤희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래도 방금 보고 나온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 같이 일하던 사람인데도 그렇다.
결국 정석이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 달 후 열린 합동장례식장에 놓여진 영정에서였다. 그 얼굴에는 멍자국도, 핏자국도 없었다. 그저 환하게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모두 울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사진 속에서 계속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