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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더블 데이트 - 1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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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48 회 작성일 24-05-11 03: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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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더블 데이트 - 13부 

 

달칵- 하는 문소리에 정석은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비어있던 자신의 옆자리가 채워졌다. 

 

 

정석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어디 다녀온 거야?"

"잠깐 할 일이 있어서요."

정석은 팔을 뻗어 미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얇은 잠옷 너머 미자의 몸이 느껴졌다. 

"무슨 할 일?"

"말해줄까요?"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미자는 가끔 전혀 엉뚱한 이유로, 엉뚱한 일을 하곤 했다. 그걸 생각한 정석은 그냥 자자고 했다.

"난 또 지난번처럼 혼자 어디 가서 울고 있나 했지."

"그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아요..."

"그래, 알았어."

정석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서울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정석은 그 미묘한 움직임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여러가지 준비를 행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막대한 자금과 추진력을 지닌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던 정석이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한 요정. 밤 늦은 시각. 며칠전 비상계엄이 전국을 대상으로 확대되기 시작된 터라 서울 전체의 분위기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화려한 불빛이 아름다운 정원을 수놓고, 여인의 웃음소리와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가득한 곳이다. 일반인들은 한달 월급으로 벌 돈을 한 끼 식사값으로 지불하고도 모자를 업소인지라 아무나 출입할 수도 없고, 아무나 손님으로 받지도 않는다.

 

 

가게의 너른 정원 뒤쪽, 으슥한 곳에 자리한 별채에서, 정석은 한 명의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한 남자는 매우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정석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김 대령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을 때도 군인이고 싶어하는 그의 바람을 정석은 이해하고 있었다. 군인이 권력의 핵심인 요즘, 그 정도의 자부심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자부심을 살살 맞추어주고 돋구어주는 게 정석에게는 더 유리하다.

원래는 옆자리에 기생 한 명씩 두고 자리를 갖게 되지만, 김 대령의 말에 따라 밴드는 물론 기생도 모두 물리고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앞에 놓인 인삼주를 쭈욱 들이키고 말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운영자금은 무척 유용하게 잘 쓰였소. 우리 사령관도 좋아하셨지."

정석은 사기로 된 술주전자를 들어 그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좀 있으면 더 높은 곳으로 영전하실 분이라, 이래저래 돈 들어갈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거든."

"영전이라니.... 축하드립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더 올라갈 곳이 있나보죠?"

"왜 없겠어? 후후."

김 대령은 검지손가락 하나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1자의 표시. 정석은 그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았지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고, 그렇기에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더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그러시군요."

정석의 놀란 표정이 상대를 만족시켰다. 김 대령은 으스대며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도 박 회장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오. 군인으로만 있으려면 모르겠지만, 나라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이래저래 신경쓸 게 많아지거든."

"하하. 제 돈이 나라 일에 쓰인다니, 영광입니다."

 

 

정석은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론 비웃었다. 작년에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박통 피격사건 이후 무섭게 떠오르는 실세. 그 자의 숨은 측근이 바로 김 대령이었다. 지키라는 나라는 안 지키고, 다른 것을 지키고 탐내는 드는 그들의 행태가 아니꼽기 짝이 없었지만 돈은 있되 권력은 가지지 못한 박 회장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정석은 이런저런 말로 김 대령의 비위를 맞추고 달랬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면서 김 대령이 툭툭 던지는 작은 정보 하나에도 귀를 기울였다. 돈은 권력의 흐름을 따른다. 듣기로는 저 멀리 부산쪽의 한 재력가는 김 대령의 윗선에 밉보인 이후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혔다고 했다. 정석은 그런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젓가락으로 야채무침을 뒤적거리던 김 대령이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요새 묘한 소식이 들려오더군. 박 회장이.... 일본에서 엄한 짓을 하고 있다고."

정석은 바짝 긴장했다.

 

 

"제가, 말입니까?"

"음... 나야 뭐, 박 회장을 믿으니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애들에게 말해두기는 했는데 말야. 걔네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잖아.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친 것도 나고 말야. 그러니 설명을 좀 들어야겠어."

사람좋은 웃음만 짓고 있던 김 대령의 눈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그는 맞은 편의 정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애들"이라는게 어떤 사람들인지, 정석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제고 이런 이야기가 올 줄 알고 있었던 정석은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맞닿아뜨리고 나면 아무래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정석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습니다."

"사람?"

"네."

"그런 거라면 진작에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우리가 또 그런 게 전문이잖아. 사람 찾는 거 말야."

정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찾는 것만 전문이겠냐... 니들이..."

그러나 겉으로는 겸양을 떨었다.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만....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상대는 여자이기도 하고."

"여자?"

 

 

김 대령의 얼굴에 비웃음이 나타났다. 군대라는 마초적 집단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래도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무시하려는 성향이 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정석에게 말했다.

"뭐야, 집 나간 마누라라도 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돈 떼어먹고 달아난 옛 애인이라거나.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나 그래."

"이런저런 안 좋은 일로 잔뜩 얽힌 사이라서... 김 대령 번거롭게 해드리기도 무엇하고. 또 무엇보다 일본에 제 나름의 연락책이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연락책이라... 그런 거 돌린다고 뭐라 그럴 사람은 없는데 말야. 그래도 그쪽 애들 만나고 그러는 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

말 중에서 묘하게 강조되는 "그쪽 애들"이라는 표현이 정석을 긴장시켰다. 그는 상대처럼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민단에 요청해서 찾아보았습니다만 전혀 나오지 않더란 말이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총련계에 선을 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제가 찾으려는 년이 그쪽에 선이 닿아있다는 것도 확인이 된 상태고요. 조만간 꼬리를 잡을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그런 모양새가 중정에서 보시기에 별로 좋지 않았겠군요."

어차피 상대는 이쪽의 행동에 대해 다 파악하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그렇기에 정석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을 택했다. 다행히도 상대는 그런 정석의 대답을 수긍한 모양이다.

"뭐... 반공이야 우리의 깃발 아니겠소. 자나깨나 반공. 뒈진 빨갱이도 다시 보자."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정을 들었으니, 내 애들에게도 그리 말해두리라. 박 회장이야 우리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또 아실만한 분이니 잘 하리라 믿소. 필요하다면,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선처하리라. 다만 선을 넘지 마시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주의하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깍듯한 인사를 마친 정석은 미리 준비해놓은 보따리 하나를 상 위로 전달했다. 김 대령은 손을 뻗어 그것을 받고 풀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 옆자리에 두었다. 김 대령의 눈치를 살핀 정석은 바깥을 향해 사람을 불렀고, 이내 기생 두 명이 들어와 술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정석은 기생 한 명에게 일러 밴드까지 부르게 하고는 김 대령에게 연신 술을 건넸다. 

자정이 넘어가서야 술자리가 파했다. 자신의 시중을 들던 기생이 마음에 드는지 끝까지 붙들고 놓질 않는 김 대령이었다. 정석은 술값을 계산하면서 주인을 불러 기생에 대한 값도 마저 치뤘다. 원래 요정의 기생들을 이런 식의 2차는 나가지 않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정 주인도 김 대령이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찌감치 포기한 듯 했다.

차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정석은 김 대령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김 대령의 옆구리에는 아까 그 기생이 서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통금이 걸린 시간이었지만 김 대령이 타고온 차는 군용 지프였고, 정석의 차에도 보안사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있기에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김 대령은 기생을 차에 먼저 태우고 뒤따라 타면서 정석에게 말했다.

 

 

"암튼, 늘 조심하시오. 자나깨나 공산당 새끼들... 조심.... 응? 알았지, 박 회장."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요."

적당히 조절해가며 마신 정석과 달리 김 대령은 고주망태였다. 그는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자꾸 시간을 끌었다. 정석은 운전병에게 눈짓을 하여 함께 도와 김 대령을 차에 태웠다. 간신히 뒷좌석에 탄 김 대령은 창 밖의 정석을 보고 말했다.

"박 회장.... 혹시 광주에 친척이나 ..... 친구 있소?"

정석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뇨. 없습니다만...."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지만, 김 대령은 상대의 반응은 개의치 않았다.

"음... 다행이구만."

"광주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김 대령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요새 하도 시끄러워서 말야.... 물론 사방에서 좆도 모르는 반동새끼들이 준동하고 있는 거야...뭐... 하루 이틀이냐만은... 광주 거긴 아무래도 고정간첩 새끼들이 설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지금 확 밀어버리려고 하거든."

"밀다뇨?"

"어설프게 경찰 이딴 거 말고.... 확실한 애들로 말야."

김 대령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크윽- 이렇게 말이지."

정석은 섬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요. 자네도, 잘 모시게."

정석은 운전병과 기생에게도 따로 돈을 찔러주어 보냈다. 김 대령의 차가 멀어진 후, 정석은 자신의 차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수가 열어준 차에 올라탄 후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운전수인 최 씨가 집으로 모시냐고 묻자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늦은 밤이었다. 정석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리고 안방에 딸린 욕실에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정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욕실문을 조심스레 열며 이름을 부르자 양변기 위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미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그녀의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자의 우는 모습을 두 번째로 본 정석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떡하면 좋아요...."

"어떡하면 좋다니, 무슨 일이야."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그녀와 함께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자는 한밤중에 침대에서 서럽게 운 적이 있었다. 정석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자신의 끝을 보았노라며 끝도 없이 울었다. 정석은 그녀를 한참동안이나 달래며 품에 안아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정석은 "앞"을 보는 미자의 능력이 부럽다기 보다는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미자는 고개를 저으며 정석에게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 거듭 재촉하자 겨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람이 많이 죽어요... 죽고.. 또 죽고... 죽여요...."

"지구 상에서, 그런 어리석은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나."

"이건 달라요. 이건...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라... 계획적인..."

미자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새벽이 다가오고 해가 뜰 때까지도, 그녀는 쉬이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정석은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이상한 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석은 목적지를 묻는 최 씨에게 대답 대신 손을 뻗으며 말했다.

"카폰 좀 줘보게."

"이 시간에... 어딜 거시게요?"

"급한 일이야."

카폰을 받아든 정석은 교환수가 나오자 자기집 전화번호를 댔다. 잠시 후, 연결이 되자 차분한 목소리의 미자가 전화를 받았다.

"아저씬가요?"

"그래. 나야. 안 자고 있었군."

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석이 늦게 들어간다고 안 자고 기다리거나 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정석의 전화를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 받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정석은 가슴 속 깊이 서늘함을 느꼈다. 미자는 이런 늦은 시간에는 어쩐 일로 전화를 거냐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우리 회사에 손 변호사 알지?"

"저번에 한 번 만났었죠. 네. 기억나요."

"혹시... 그 사람을 본 적 있어?"

운전수 최 씨는 뒤에서 들려오는 정석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만난 적이 있으면 당연히 본 적도 있는 것 아닌가. 정석의 질문 의도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미자는 달랐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대충... 알고 전화하신건가요?"

"알다니? 난 전혀 몰라. 그냥 예감이 이상해서 그래."

"......"

미자는 대답이 없었다. 밤의 어둠보다도 짙고 무거운 침묵 만이 수화기에서 전해져 올 뿐이다. 참다 못한 정석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미자!"

"알았어요. 소리 지르지 마세요. 그렇지만,....."

미자는 말 끝을 흐렸다. 늘 당당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뭔가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라는 걸, 정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해졌다. 미자는 엉뚱한 대답을 꺼냈다.

"지금 아저씨가 광주로 간다고 해도 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젠장!"

 

 

정석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수화기를 들고 광주지역으로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후, 광주지역의 교환수가 나오고 가입자의 이름을 묻자 정석은 동구 금남로에 있는 손윤희의 이름을 댔다. 신호는 더디고 길었다. 정석은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의 초조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화연결은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카폰이라 그런 줄 알고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연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정석은 교환수에게 화도 내보았지만, 그녀도 사정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광주 쪽 전화 사정이 원활하지 않다고 했다. 정석은 카폰을 집어던지고 최 씨에게 외쳤다.

"최 기사! 광주로 갑시다."

"네에? 지금요?"

"손 변호사 집 주소는 알고 있죠?"

"네... 전에 한 번 태워다 준 적이 있어서..."

"거기로. 빨리 갑시다."

최 씨는 정석의 태도가 하도 완강하여 더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대형 외제세단인 정석의 차는 어지간한 검문은 그대로 통과했다. 광주까지의 도로가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차도 없고 도로가 한산하여 새벽이 밝아올 때쯤 광주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석은 군인들을 가득 실은 육공트럭이 점점 늘어나는 창 밖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 광주 근처에 군부대가 그렇게 많았던가. 개중에는 단순한 육군이 아니라 공수부대의 마크를 달고 있는 차량도 여럿 눈에 띄였다.

"정지! 라이트 꺼!"

급기야 바리케이트가 쳐진 검문소에서는 정석의 차를 정지시켰다. 최 씨가 창문을 내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지금 이 길로 광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꽤 고압적이고 완강한 어조였다.

"지금 광주 시내는 폭도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얼굴에 위장용 크림을 잔뜩 바른 군인이었다. 그는 완전무장한 채였고 손에는 탄창이 끼워진 총이 들려있었다. 최 씨가 뒷좌석의 정석을 돌아보았다. 정석은 예전에 김 대령에게 받았던 보안사의 증명서를 꺼내들었다. 창문을 통해 그걸 받아든 군인은 초소로 돌아가 어딘가로 연락하는가 싶더니 이내 돌아와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무슨 일로 들어가시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정 그러시다면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나오실 때는 지금 인원 그대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차량에 탑승한 2인, 그대로 나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광주에 남는 것도 안 되고, 거기서 누군가를 데리고 나오는 것도 안 됩니다."

시커멓게 칠해진 얼굴 너머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정석은 최 씨의 어깨를 두드려 그만하면 됐다고 이르고 검문소를 통과했다. 최 씨는 주눅 든 어조로 말했다.

"난리가... 심하게 났나 보네요. 대학생들이 시위를 심하게 하나 보죠?"

"그저 그런 거라면 다행인데...."

 

 

정석의 뇌리에는 아까 김 대령이 했던 손동작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목을 긋는다. 목을 그으면 사람이 죽는다. 그는 군인이다. 그리고 방금 그들을 막아선 것도 군인이었다. 알 수 없는 뭔가 불안한 감정이 그의 안에서 일렁였다. 윤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사실 그와 윤희는 업무적으로 관련된 거외에 사적인 관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고 일처리가 빠른 사람이라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그 자리에 앉혀놨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 있다고 들어 부양에 어려움이 없도록 가끔 지원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아까 김 대령이 광주를 언급하며 묘한 손동작을 해보일 때,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얼마 전 귀국한 윤희였다. 광주가 고향인 그녀는 평소처럼 정석에게 귀국 보고를 마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게 정석이 김 대령을 만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저기...입니다. 아마도 저기가 금남로일겁니다."

"아마도라니?"

정석을 모시고 전국을 누비는 최 씨였다. 길 찾는 거에 있어서는 가히 전문가라 할만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광주 최대의 거리인 금남로를 가리켜 "아마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정석은 고개를 빼내어 앞 좌석 사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거리에 가득한 새벽안개가 서서히 눌러나고 있었다. 금남로는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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