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해치우다 -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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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을 해치우다바로 철기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다섯 번 이상 지속되면 끊으려고 했는데, 두번이 되기전에 철기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경민입니다. 방금 보내주신 단편 읽었는데, 이건 왜 보내신 거에요?" "아뇨. 동생이 수행평가로 글짓기 숙제를 받아왔더라고요. 세상에서 카메라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를 쓰라고 해서요. 제가 한 편을 써봤는데, 어떨까 해서요. 경민씨는 이런 작업을 많이 해 보신 분이라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등학교 학생의 수행평가라면 넘치죠. 작가님은 글을 잘 쓰시니까요. 다만, 고등학교 학생의 수행평가라면 수행평가가 가지는 기준점을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카메라가 없어진다면 이라는 주제에서 도출할 수 있는 간결하고 의미있는 메세지를 도출해내고, 그것을 논증하는 방법으로서 소설을 선택했으면 좋았을텐데. 작가님 글의 주제는 좀 모호해서, 어떤 것을 주장하는 가가 잘 드러나질 않거든요. 개연성있고 재미는 있지만 논리적인 전개가 아니라서 만약 제가 문학담당 선생님이라면, 90점은 줘도, 100점은 못 줄 것 같은데요." "고쳐야 할까요?" "아뇨. 수행평가 글짓기에서 작가님이 쓴 글 정도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작가님, 작가님은 프로에요. 돈을 받고, 계약을 한 이상, 자기의 재능은 재능이 온전히 발휘될 수 있는 곳에서만 쓰는 게 좋아요. 결국 경험도 상상력도 쓸수록 줄어드는 게 이 바닥이니까요." "네, 그러죠. 그런데 경민씨는 언제부터 다시 출근이세요?" "다음주부터요. 왜 그러시죠?" "혼자서 작품을 거의 새로 쓰고 있어서요. 기획회의를 좀 더 했으면 해서요. 만약 수정고를 냈는데, 거기에 대해서 또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하면, 화도 나고 의욕도 없어질 것 같아서 미리미리 회의를 더 많이 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요." "저번 수정고는 좋았어요. 제가 작품을 새로 볼만큼이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대로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님 의향대로 써보는 게 좋아요. 수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작가가 쓰는 오리지날리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니까요." "네, 그래도 어차피 다음 주면, 제가 그 때까지 2차 수정고를 마칠 수 있으니까요. 회의는 한 번 해요. 전 인기가 필요하니까요." "네." 일을 하다보면 내 자신을 잃어갈 때도 있지만, 일을 하다가 내 자신을 추스르거나 찾는 경우도 있다. 역시 나는 정치가로서의 삶보다는 소설을 읽는 일이 좋다. 아침이 오면, 속초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별장은 위험했다. 아니 별장보다는 이진섭이라는 사람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는 이경민이 나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자, 그 때서야 눈이 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생각해도 이진섭이 내 환생일리는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되살아나서, 죽기 전의 삶을 살고 있는 전생의 자신에게 어떤 제안같은 것을 한다는 것은 소설속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늦게까지 작업을 했는지, 테리우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심을 했으면 미루는 것이 아니다. 난 한 때 관중의 책을 오래 읽었던 적이 있다. 관중은 늘 오래 생각해서 결정하고, 결정을 했으면 미루지 않는 것이 성공하는 지름길이라 했다. 밥을 눌러놓고, 곧바로 짐을 쌌다. 들고 온 짐 자체가 많지 않아서, 금방 짐가방을 싸놓고 혼자서 아침을 먹었다. 테리우스가 일어나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내 결심을 전하고, 만약에 테리우스가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서울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테리우스가 일어나길 기다리면서 테리우스가 쓰고 있는 무협의 방향을 새로 잡았다. 학사물은 변함없는 인기가 있으니까, 문자향을 조금 더하면서 조금 더 고급스러운 무협을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가의 대공자가 연애편지로 여러 여자들을 꼬시는 것도 재미가 있겠지만, 그 주인공을 뒤에 배치하고, 전면에는 그와 잘 어울릴만한 학사 하나를 붙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내가 자주 쓰는 기법이었는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하나, 그리고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주인공을 또 다시 만들어 놓으면, 양쪽에서 긴장감과 재미를 줄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전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벼슬길을 일찍 접은 젊은 관리였다. 천재 학사가 아니고, 유생도 아니며, 이미 벼슬길을 겪은 학사가 황실의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낙향하여 만난 무림의 인사들과 얽혀가는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매력이 있는 소재였다. 소재를 잡고 나자, 나머지 큰 줄거리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좋은 무협이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매력적인 히로인이 필요하다. 두명의 히로인의 태를 잡고 나자 테리우스가 기지개를 켜면서, 방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세수를 하고 나온 녀석의 눈은 맑고 깊었다. 역시 어린건가. 서른을 넘고 나선 회복이 쉽지 않다. 말끔하게 회복한 테리우스가 내가 한참 쓰고 있는 모니터를 보더니, 역시 이경민을 외쳤다. 난 기획안과 캐릭터 구상안을 테리우스에게 맡기고, 난 그만 서울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했다. 테리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날 보내줬다. "잘 생각했어. 형. 우리 형을 만나고 난 사람은 대개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거든. 우리 형에게 열중하던가, 아니면 우리 형을 무슨 구원의 신을 만난 것처럼 행동하거나. 둘 모두 좋은 꼴을 볼 수가 없었는데 말이야. 형은 역시 형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일 현명한 결론이랑 같아. 앞이 보이지 않을 땐 뒤돌아 가서 안개가 걷힐 때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지. 잘 생각했어. 형. 나는 여기서 형이 준 이거 마무리 하고, 다음 주쯤 내려갈게. 그 때 보자." "그래. 난 이번 주는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쉴 생각이니까, 생각 안풀리거나 하면 바로 전화하고." "알았어요. 이걸로 대박 한 번 내자. 진짜로." "그래. 그럼 형은 간다." "응. 안 나간다. 형."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난 내내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끈적한 시선이 온 종일 나를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진섭이 무슨 끄나풀을 붙이거나 할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내 속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하는 의문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였다. 운전을 하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은 위험해서, 중간 중간에 졸음쉼터가 나오거나 휴게소가 나올 때마다 쉬면서 운전을 했기 때문에,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문을 열자 정리된 거실이 안정감을 줬다. 역시 익숙한 공간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별장에서 얻어온 직접 손으로 만든 김이랑, 말린 어물같은 것을 냉장고에 넣고, 밥을 하려다가 내키지 않아서 그냥 짜장면을 하나 시키고는 컴퓨터를 켰다. 온라인 서점의 서평들과 무협매니아 블로그랑 만화방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최근 내가 기획한 책들의 스코어를 조사해 보고서, 최근의 장르 경향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최근의 장르는 현대판타지와 현대판타지가 아닌 소설로 집약될 수 있는데, 난 한때 퓨전판타지가 득세할 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퓨전이 처음 나왔을 때만해도 대단단 인기를 끌었지만, 난 그 흐름이 길게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가벼운 세계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의외로 퓨전은 한동안의 장르를 지배했었다. 난 그것이 작가들의 능력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양한 소재를 차용해서 쉽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퓨전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쉽게 쓴 만큼 쉽게 읽힐 수 있다는 것 역시 퓨전이 대세를 이룬 가장 큰 이유였다. 현대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는 현대 판타지를 딸딸이 물이라고 부르는 기획자들도 많았는데,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일단 능력을 얻은 사람들이 모조리 성공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대체 역사물이랑 비슷한 경우인데, 대체 역사물이 탄탄한 역사적 소양을 가져야 하는 것과는 달리 현대물은 그냥 쉽게 쓸 수 있기 때문에, 특이한 소재를 찾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난 이 흐름도 적어도 일년 안에 접어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똑같은 형식의 글들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피로감이 생길 때가 되었다. 난 내가 담당하는 작가들에게는 적어도 현대물을 시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쓰다가 버릴 작가가 아니면, 이런 흐름에 편승하는 것은 후회만 남길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짜장면이 와서 값을 치르고, tv를 보면서 먹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봤더니 옆집의 형수님이셨다. 형수님은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 갑자기 내게 덤벼들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 마음 편하게 문을 열었다. 형수님은 화를 억누르고 있는 얼굴이셨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형수님이 소파에 앉자마자 먹던 짜장면을 치우고 커피를 탔다. 내가 찻잔을 놓고, 소파에 앉자마자 형수님은 내게 온 용건을 말하셨다. "경민아. 아까 동네 마트에 갔다가 네 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어. 너 어디갔다 왔어?" "네, 동료작가 일 봐주러 강원도에 다녀왔는데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너 나랑 있었던 일 누구한테 말했어?" "무슨 일이요. 아! 아뇨. 제가 그럴리가 있어요." "그럼, 미연이가 어떻게 그걸 알아?" "예?" "어제 미연이가 술먹고 늦게 들어와서 한 마디를 했더니, 미연이가 내 귓가에 대고 뭐라 그랬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내 입으로 말하기도 창피해서.. 미연이가. 미연이가. 나더러 그러더라. 엄마, 난 그래도 아직 처녀야. 엄마처럼 아무에게나 주고 다니지는 않는다고. 이러더라." "네? 미연이가요?" "어떻게 밤을 보냈는지도 몰라. 잠 한숨 못자고, 아침 내내 미연이 눈치를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더라. 너 진짜 미연이에게 이상한 말 흘린 거 아니지?" "네. 제가 그럴리가 있나요.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연이에게.. 아니에요. 진짜에요." "나, 너밖에 없었단 말이야. 내가 누가 있겠어. 진짜 아니지?" "네." 몇 번이고 거듭해서 사실을 확인하던, 형수님이 돌아가자 진짜로 한기가 들었다. 혹시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난 결국 인터넷을 뒤져 보안업체에 우리 집을 검사해 달라는 의뢰를 했다.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여러가지 장비를 가지고 온 업체 담당자들이 우리 집을 훑었고, 검사결과는 우리 집에는 보안상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난 믿지 못하고, 정밀 검사를 부탁했고, 업체 담당자들은 시간약속을 잡고 돌아갔다. 의심속에 사는 것보다 최악은 없다. 난 올가미에 걸려가고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정말로 정신과라도 찾아가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청소를 하기로 했다. 업체관계자들이 땀에 젖은 발로 온바닥을 헤집고 다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팀청소기를 들고 거실바닥을 닦다가 창문을 열었는데, 창문밖으로 고가사다리차가 보였다. 창문 바로 앞에 사다리차가 있어서 누군가 이사를 가거나 오나 했는데, 창문 아래를 봤더니 멀리서도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는 사라의 소속사 사장이었다. 이사짐 차량의 인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사를 하려는 곳은 우리집 바로 위층이었다. 내려가서 아는 척을 해야 하나를 생각하고 있는데, 침대가 올라오는게 보였다. 그리고 난 이사를 하는 사람이 소속사 사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침대는 온통 핑크색 시트였다. 설마 사라가 우리 윗집으로 이사를 오려는 걸까? 사라에 대해서도, 이진섭에 대해서도 그냥 모른 척 살아가기를 원했던, 내가 바라던 전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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