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노예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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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내 나이 스물다섯에 내 심장이 살아났거든.”
그녀의 입이 딱 벌어지는가 싶더니 얼이 빠진 듯 멍하니 바라봤다.
“거짓말.”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싶었지. 그래서 인정할 수 없었어. 근데 이제는 인정해.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고, 도망갈 마음도 없어.”
“물론 오빠는 도망 같은 건 안 가죠. 오빠처럼 자신만만한 사람이 뭐가 겁이 나서 도망가겠어요.”
그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실은 그녀만 생각하면 잔뜩 겁이 났다. 그녀를 잃을까 봐. 아니, 그보다 더 겁나는 건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겁이 없는 사람은 없어.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으니까.”
“오빠의 약점은 뭔데요?”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와서 침대 위에 눕혔다. 태욱은 옆에 누워서 오른쪽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꾹꾹 눌러 놓았던 복잡한 상념들이 다시 치밀어 올랐던 탓이었다.
“네?”
그녀가 기어이 듣고 싶은지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는 성가신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할 수 없어.”
“왜요?”
그녀가 섭섭한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약점을 드러내면 더 이상 지킬 수가 없거든.”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의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싶은 강한 욕구로 인해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열기는 몹시 뜨거웠다.
그녀는 뭔가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 잠시 입술을 꽉 깨문 채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 조심스러움이 그를 긴장시켰다.
이마저도 1년 전과는 입장이 바뀐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맹목적인 쪽은 그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타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열정이었지만 영아는 오직 불꽃만 무작정 보고 달려드는 무지한 나방 같았다.
“지키고 싶다는 건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겠죠?”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뚫어지게 살폈다.
“맞…… 아.”
“그렇다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뭐?”
“난 그렇던데. 내가 만약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라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되고 싶거든요. 약점은 언해피로 끝나지만 강점은 해피로 맺어질 거니까. 난 해피가 좋아요. 언해피는 싫어.”
그녀의 슬기로운 결론이 그를 들뜨고 든든하게 했다.
그녀가 단지 지켜야 하는 연약한 여자가 아니라 그가 의지할 수도 있는 동반자로 여겨졌다.
1년 동안 그녀를 향한 그리움으로 그는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었고, 재회한 후 그와 그녀의 관계는 또 발전했다.
그녀의 말대로 영아가 약점이 아니라 그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녀를 향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마냥 지키고 싶은 단계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라면 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한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로 인해 그가 자랄 수 있을 거라고는 몰랐는데 지금 그는 그랬다. 그만큼 그녀가 더 필요해졌다는 의미였다.
“나도 언해피는 싫어. 그러면 지금껏 버텨 온 내 삶이 너무 억울하니까. 알겠지만 난 지독히 이기적이거든.”
“그렇지 않아요. 오빠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데.”
“그건 달라.”
그가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힘겹게 뱉어냈다.
“다르긴 뭐가. 책임감 강한 사람은 절대 자기만 위할 수는 없어요. 오빠는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에요.”
“아니, 그건 보이는 표면일 뿐이야. 난 너와는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심란한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니 그의 마음도 일순 가벼워졌다. 그에게 미치는 마법 같은 그녀만의 힘이었다.
“넌 사랑을 받고 자랐잖아.”
“오빠도 생부한테 사랑받았고, 어머니도 오빠를 사랑해요. 우리 아빠도 오빠를 사랑하고요.”
넌? 왜 넌 이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사랑은 너뿐인데.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다르다는 거예요?”
“사랑은 배우는 게 쉽지 않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거니까.
이미 내가 누군지 알아 버린 나이에 아무리 주입식으로 익혀 봐야 뼛속 깊이 스며들지는 않거든.”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생부를 우상처럼 따랐던 건 사랑 받았기에 사랑했던 거 아닌가요?”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그거 아냐.”
“그럼 뭔데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톱은 매니큐어를 칠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게 다듬어진 상태였다.
꾸미지 않았지만 길고 늘씬한 손톱은 그가 봤던 어떤 손보다 아름답고 여성스러웠다.
“그저 날 끔찍한 곳에서 구해준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었어. 만약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날 찾지 않았을 거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거든. 늘 그랬어. 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고 그걸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그가 아는 거라고는 받은 것에 대한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필요한 것에 대한 욕심뿐이었다.
그건 배려심이 아니었고, 사랑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온기가 없었다. 탐욕스러운 절실함이라면 모를까.
“핑계같이 들리는데요.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서.”
뽀로통한 그녀의 말투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아리는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 답답했다.
“그런 넌 어때? 날 사랑해? 지금도?”
간절함이 강한 탓에 그의 목소리가 귀가 먹먹하도록 울렸다. 떨린 건가. 모르겠다.
어쨌든 평소 그의 목소리와 달랐다.
마치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듯 헐벗은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싫어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