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요지경. <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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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춤바람>
나른한 오후.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안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처음 들어서면 실내가 너무 어두워서 사물을 분간하기 어렵다.
중년 인생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애절한 유행가 가락만이 귀를 때린다.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오색 조명과 반짝거리는 전구들의 현란한 불빛.
그러나 상영중인 영화관에 들어갔을 때처럼 잠시 시간이 지나, 동공이 적응을 하면,
실내의 광경이 눈 안에 들어온다.
수 십 쌍의 남녀가 부둥켜안고 발바닥을 부비며 돌아가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들.
그들은 춤추는, 아니 춤 상대에만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이 들어오든 나가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30, 40대 가정 주부들이 대부분이고, 남성들은 그녀들보다 대부분 연하로 보인다.
간혹 여성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뵈는 남성들도 있기는 있지만 드문 편이다.
블루스를 추는 여성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하고 황홀한 표정들이다.
연하남의 품에 안겨, 지긋이 눈을 감고있는 그녀들.
시장통 들어오는 골목은 아직 한산하다.
주부들이 저녁장 보러 올 시간은 안됐고,
단순하게 지나가는 사람들만 띄엄띄엄 있을 뿐이다.
그래도, 과일이 가득 쌓여있는 리어카 행상 주변에는 몇 몇 손님들이 발길을 멈추고
이것저것 먹음직스런 과일을 고르고 있다.
[쯧쯧, 썩어 빠진 인간들....!]
큰 길에서 시장으로 접어드는 어귀에, 몇 가지 야채며 콩나물 통, 두부판을 쌓아두고
노점상을 하는 40 후반의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중년 여인이 좌판을 펼쳐놓고 있는 바로 근처, 상가 건물로
오후가 되면 30, 40대 주부들이 찾아 들어간다.
여자들은 마치 스파이들처럼 시장 골목을 슬쩍 둘러보고는
재빨리 건물 현관안으로 숨어 들 듯이 들어갔다.
그 여자들은 주변을 지나다니는 일반 행인들보다
얼굴 화장이나 머리모양에 신경을 쓴 듯 했고 옷차림도 눈에 띄는 편이다.
[신랑은 직장에서 뼈 빠지게 계집, 자식 먹여 살리자고 일하는 시간에....
저런 기집년들은 도대체 무얼 하러 다니는지...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기집년이고, 사내놈 할 것없이 저런 인간들 싸그리 쓸어다 청소해 버릴 방법은 어디 없나]
이마에 땀을 번들거리며 그 건물에서 나오는 30대 초반의 사내와 그보다 연상인 듯한 여인이
팔짱을 끼고 나오는 걸 보고, 야채 장수 여인이 또 혼자 궁시렁거렸다.
[아따, 아주머니 눈에는 되게 거슬리나 보다. 어째...나는 못 봤는데, 그렇게 잘 보여요?]
[최씨야 그래도 돈 버는 재미에 눈에 안 띄지만,
우리 좌판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않으니...더러운 꼴만 보이네....]
그 여인은 공연히 불만섞인 말을 해놓고는 스스로도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여관이 밀집된 상가옆쪽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들 남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같이 붙어 다니는 저런 년놈들이 제 남편, 제 여편네는 아닐 거 아냐?]
[말 하나마나지요. 지 서방, 지 마누라하고 저런 곳에 다니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 것도 벌건 대낮에.... 저런 인간들이야 뻔할 뻔자죠]
남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며 시장통 어귀 건물로 들어서는 여인들은,
간혹 혼자 들어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두세 명씩 어울려 다닌다.
상가 건물 3층으로 올라간 그녀들은 굳게 닫힌 철문을 열기 전에,
방금 올라온 계단 아래층과 위층을 얼른 살펴보고는 쫓기 듯이 손잡이를 돌린다.
철문위에는 <무도 학원>이라고 아크릴 표지판이 자그맣게 붙어있다.
간판은 분명히 무도 학원 이라고 붙었지만, 월 수강료를 내는 사람은 없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게 일반 학원과 다른 형태다.
남녀가 같이 들어오는 손님은 곧장 그들끼리 춤을 추지만,
여성들만 들어오면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들이 다가가 춤을 추자고 청한다.
걔중에는 이미 낯이 익은 듯 반갑게 인사하며 아는 체하는 여성도 있다.
사실은 대개가 그랬다.
간혹, 혼자 찾아온 여자가 입구에서 서성거리면 안에 있던 젊은 사내들이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때 30 대 중반의 두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젊은 사내가 다가갔다.
[누님, 지금 오세요. 같이 오신 분은 누구세요?]
금방 들어와서 잘 안보이는지 여자가 한참이나 사내를 쳐다보다가
몹시 반가운 기색을 나타낸다.
[응, 우리 옆집에 사는...애기 엄마야. 파트너 하나 붙여 줘]
여자의 대답에 사내는 구석 자리에 있는 또래의 다른 사내를 손짓으로 불렀다.
[여기 이 누님 좀 잡아 드려...]
그리고는 그들은 이내 여자 한 명씩을 붙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이 빠른 템포로 바뀌자, 둥근 오색등은 빛을 잃고 강렬한 사이키 조명이
아찔할 정도로 이 구석 저 구석을 때렸다.
남녀들은 음악과 조명에 도취되어 신나게 지르박을 춘다.
번갯불 같은 조명이 사람들의 얼굴과 옷자락에 순간적으로 스칠 때마다
춤추는 무리는 마치 신들린 무당 모습이다.
여자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번들거렸다.
음악과 춤과 사내에게 정신을 빼앗긴 그녀들은, 세상의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 공간을 벗어나 바깥 세상에 나가면 모두가 "요조숙녀" "현모양처" 일거다.
하지만 지금의, 순간만큼은 오로지 본능만이 그녀들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시장통 어귀, 남의 가게 앞에서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콩나물 몇 줌, 야채 한두 단, 과일 몇 개씩 파는 노점상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런 그녀들이 "미친년들, 골 빈 년들, 화냥년"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후 5시가 지나고 6시가 가까워지자, 춤추던 남녀들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함께 어울려 들어왔던 여자들끼리 나가기도 하지만,
남녀 몇 쌍씩 어울려 깔깔대며 나가는 무리들도 있다.
혹은 남녀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팔짱을 끼고 나가는 당사자나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 그 어느 쪽도.
계단을 내려온 남녀들이 건물을 나섰을 때는 시장 골목이 북적대고 있었다.
시장 보러 나온 주부들과 그와 때를 맞춘 노점상들.
그들은 더 달라, 못 준다 실랑이를 벌이느라 건물에서 나오는 남녀 군상을 볼 틈이 없다.
춤을 추고 나온 남녀들은 짝을 이루어, 상가옆쪽의 골목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뒷골목은 허드레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뒤로는 여관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음식점으로 향하기도 했지만,
슬쩍 주변 눈치를 살피며, 인공으로 만든 녹색 덩굴, 그리고 커다란 화분들로 가려져 있는
여관문 안으로 몸을 숨기기에 바쁜 남녀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