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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웃음이 있는 이야기

이십년 넘게 열심히 살아서 전재산 천만원 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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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77 회 작성일 24-02-07 21:4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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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결론: 이십년전에 생긴 빛 3억 다 갚았다.
0. 서설
안녕 게이들아? 나이 마흔 다 되어가는 고추 안 서는 아재야. 읽을거리 판에 올리려고 했는데 다 써놓고 공지보니 썰은 올리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여기다가 다시 써볼게.
사실 전재산 천만원이 된 것은 며칠 전일이야. 어디다가 자랑하고 싶은데 오프라인에서는 자랑할데가 없어서, 옛날 라면 엎을때부터 눈팅하던 개드립에다가 자랑한번 해보려고 가입했어.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가입했는데 가입하자마자 글을 못 쓰더라고 ㅎㅎㅎ. 며칠 지나서 안 쓰려다가 오늘지나면은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써보려고.
1. 풍족했던 어린시절
우리 아버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열심히 일했어. 어머니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시고, 이모를 먹여살리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중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일을 시작하셨어. 아버지는 분식집에서 일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반해서 몇달간 쫓아다닌 끝에 아버지 23, 어머니 20살에 결혼하시고 나를 낳으셨어. 우리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정말 성실히 일하시는 분이셨고,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중소기업 사장님이 되셨어.
나는 할머니랑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는데 솔직히 부족한 것 없이 자랐어.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풍요롭게 자랐던것 같아. 사고 싶은것은 다 샀고, 갖고 싶은것은 다 가졌어. 먹고 싶은게 있다고 할머니에게 말하면 그날 저녁은 그걸 먹을 수 있었어.
내 꿈은 어릴때부터 판사였어. 부모님 모두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학업을 포기하신것을 엄청 안타까워하셨고, 나 공부하는데 지원을 아끼시지 않았어. 다행히 나는 다른것은 잘하는 것이 없었지만 공부는 잘했고, 부모님은 엄청 기뻐하셨어. 그 시절에 몇개 없던 영어 학원에도 다닐 수 있었고, 남들 몰래 과외도 받았던 기억이 나. 중학교 때 항상 전교 5등 안에 들었었고, 고등학교 반배치고사때 전교 1등으로 들어갈 정도로 공부 하나만은 자신있었어.
2. 사고
imf 시대가 되었어. 우리 아버지 회사도 당연히 휘청거렸지. 빚이 쌓이고 아버지는 일하시느라 집에 잘 못 들어오셨어. 아버지는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면 극복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나봐. 집에서는 잠만 자고 거의 매일 일만하셨지. 빚이 쌓이고, 회사가 어려워서 직원을 늘릴수가 없어서 아버지도 직접 기계에 붙어서 일을 하셔야만 했어.
그리고 불이 났어.
기계가 과열되었다는지 어땠었다는지 불이 났고. 불은 아버지 공장 뿐만 아니라 옆 공장들까지 다 태웠고, 화학약품이 많던 공장들이라서 불은 걷잡을 수 없었어. 아버지를 포함해서 여덟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다치셔서 병원으로 실려가셨어. 아직도 밤에 엄마와 할머니와 울면서 택시잡으려고 도로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나. 택시가 안 잡히더라고. 셋이 도로에 주저 앉아서 울면서 택시오라고 손흔들었던 기억이 생생해.
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셨어. 우리 가족들, 직원들 가족들 모두 울면서 응급실에서 지키고 있었어. 두 분은 많이 다치셨지만, 회복될 수 있었지만. 우리아버지를 포함해서 여섯명은 혼수상태였어. 이틀째 되던 날 한 분이 돌아가셨어. 4일째 우리 아버지는 눈을 뜨셨어. 내가 펑펑 울고 있는걸 보면서 울지마라고 했던 기억이나. 아버지는 누구 다친 사람이 없는지 물으셨고. 미안하다고 하셨어. 그리고 그날 돌아가셨어. 여섯분 아무도 병상에서 일어나시지 않았어.
우리 가족은 펑펑 울면서 장례식을 치뤘어. 아버지 장례중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쓰러지셨어. 그리고 일주일뒤에 할머니도 돌아가셨어.
줄초상...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서는 너무 울어서 눈물도 안 나오드라. 어머니는 벽에 기대서 산 송장처럼 앉아만 계시고. 할머니 장례식까지 끝나고 어머님은 앓아 누우셔서 매일 울고만 계셨다. 나는 도시락 직접 도시락 싸서 학교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 아버지가 남긴 것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차근차근 회사도 정리되고, 직원들 보상도 해주고. 불이 옮겨 붙은 공장들 물어주고. 수습하는건 세상을 모르는 어머니 뿐이었어. 한달쯤 지나서 어머니는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울고 불려다니고 울고. 물어줘야 할 것이 너무 많았어. 공장도 팔아야 했고. 아파트도 팔았어. 아버지차도 당연히 팔았고. 장농, 책상, 티비, 심지어 내 방에 있던 백과사전도 팔았어.
그렇게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남은 것, 빚 3억.
나중에 다 커서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나하고 죽어버리려는 생각으로 농약을 사러 약국에 간적도 있었대. 그런데 돈이 부족해서 농약을 못사서 돌아왔을 지경이었어.
우리는 잘 곳이 없어서, 이모집 현관에서 약 한달정도 살았던 것 같아. 이모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거든. 그런데도 있는 돈 다 털어서 방이 달린 작은 떡볶이 집 여는 것을 도와줬어.
테이블 다섯개 있는 낡고 작은 떡볶이집. 거기에 딸린 방에서 우리는 살았어. 바람이 너무 많이 통했고 추웠어. 아침에 일어나면 물에 살얼음이 낄 정도라서 새벽이 되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깰 정도였어. 한달 내내 하루도 못 쉬고 장사해서 번 돈은 겨우 이자나 갚는 정도였고. 남는돈이 없어서, 매일 떡볶이랑 김밥만 먹었지만, 그래도 우리 둘이 살 수 있는 집이 생겨서 안심되었어.
4. 고등학교 생활
우리 고등학교는 강제로 야간 자율 학습을 했어. 일학기는 사 놓은 책들이 있어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학기에는 참고서고 뭐고 책이 하나도 없는거야. 그래서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교과서만 보고 있었어. 공부도 안 되었고... 매달 모의고사를 봤는데 눈에띄게 성적이 떨어지는건 당연한 일이었어.
그래도 모의고사 반 일등으로 들어온 아이가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니 걱정이 되었는지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부르셨어. 선생님께서는 줄초상이 났다는것만 알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셨나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공부도 안하고 그러면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시겠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독이셨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는거야. 한참을 창피한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어. 그리고 지금 우리집 상황이 어떤지. 지금 내가 학교에 앉아 있는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그래도 힘내라고 말 없이 다독이셨어.
다음날 선생님이 부르셨어. 그리고 책을 과목별로 하나씩 한뭉텅이 주시더라고. 선생님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선생님들한테 책 한권씩만 추천해 달라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얻고, 없는 것은 직접 사셨다면서. 대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고. 고마워서 울보처럼 펑펑 울었다. 선생님은 자식이 공부하게 책 주었는데도 울고 있다고 쥐어박으시고 공부하라고 웃으시면서 보내시더라고. 이후로 학기마다 선생님이 책을 챙겨주셨어. 이분이 삼년간 내 담임이셨어. 우리학교는 선생이랑 학생이랑 같이 학년이 올라가는데 나중에 이야기 하시기로 선생님이 부탁부탁 해서 계속 자기반에 넣어달라고 했다고 하시더라고. 내 은사님이야.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가면 장사 마감하는 것을 돕고 바로 잠들었어. 새벽 네시가 되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깨게 되더라고. 어머니는 장사준비를 하시고. 나는 떡볶이 먹는 테이블에 앉아서 공부를 했어. 책이 과목별로 한 권씩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책들만 반복해서 봤어. 밑줄 그으면은 책이 지저분해지니, 공책에다가 조그마한 글씨로 빽빽하게 옮겨적으면서 공부했어. 나중에 일년쯤 보게되는 책들은 안보고도 한챕터정도는 그대로 옮겨적을 수 있을정도로 책이 외워지더라고. 그리고 다시 전교 1등까지 올라갔어. 지역 등수도 한 손가락에 들었어. 나는 선생님께 감사했고, 선생님도 많이 기뻐하셨어.
5. 대학교 입학
그렇게 3년간 공부했고, 수능도 평소보다 잘봤어. 선생님이 추천한대로 해서 S대법대와 한군데 법대에 합격했어. 나는 고민했어. S대는 그냥 학생이었고, 다른데는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그랬거든. 우리집은 등록금은 커녕 책값도 없었거든. 나는 아쉽지만 이것도 고맙다고 생각하고 다른데 법대로 가려고 했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니, 교장선생님이 부르셔서 봉투를 주셨어. 그 봉투에는 등록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있었어. 제 사정을 선생님이 교장선생님께 말씀하셨고. 교장선생님이 등록금을, 선생님들이 돈 조금씩 걷어서 책값하라고 모아주셨대. 눈물이 나더라고. (자꾸 우는 이야기만 쓰네. 부끄럽게). 교장선생님은 대신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서 등록금은 갚으러 오고, 나머지는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라고 하시더라고.
정말 고마운 분들 덕분에 나는 S대 법대에 들어가게 되었어. 나는 합격하자 마자 과외를 다섯개씩 했어. 그러니까 숨통이 트이더라고. 어머니가 장사하는 돈은 빚 이자를 갚고. 과외한 돈은 생활비로 하고. 비록 빚을 줄이는 것은 못하지만 가끔 고기도 먹을 수 있고. 어머니 병원도 가끔 가실수 있다는게 행복하더라고. 그러면서도 공부는 정말 열심히 했다. 장학금을 받으면 등록금만큼 돈을 버는거니까 꼭 장학금을 받아야 했거든. 친구들이나 선배들하고 술 먹은적이 한번도 없었어. 수업 끝나면 바로 과외, 과외 끝나면 바로 도서관이었거든.
우리때도 그렇고 원래 법대 애들은 군대를 최대한 미뤘거든. 나는 방위가 되어서 1학기 끝나자마자 바로 방위로 갔다. 6시까지는 통지서 돌리고, 저녁에는 과외하고.
6. 전과
사실 내 꿈은 한번도 변함없이 판사였고 법대를 갔기 때문에 당연히 사법시험을 준비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대학 동기들은 이미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친구들,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과외를 하면서 사시를 하는 것은 미련한 짓거리같았고. 그러면 얼마나 돈을 모아놔야 하는지 알아야했거든. 공부하고 있는 친구과 이미 시험에 붙은 선배들,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계속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선배들.
모두가 하나같이 하는 말은 신림동에 들어와서 학원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림동에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에 있어야만 시험에 붙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정보가 예전보다 더 많이 돌겠지만. 그 때 당시에는 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공부해야하는지 무슨 책을 사야하는지. 뭐가 시험에 나오는지 다 신림동에 있었거든. 매년 출제경향이 바뀌기 때문에 책만 읽어서는 평생 공부만 한다는 소리였다. 90년대 후반이었는데 최소로 돈 쓰던 친구가 월 80만원이었다. 만나본 선배중에 가장 빨리 시험에 붙은 형이 각잡고 공부한지 4년만에 합격. 아직 못 붙은 형은 9년째.
내가 그 형보다 열심히 하고, 더 천재라서 3년만에 붙는다고 해도 대략 3천만원. 꿈과 같은 돈이었다. 지금부터 한달에 백만원을 모아도 3년은 모아야 시작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3년만에 합격못하면 아무것도 남는것 없이 3천만원을 날리고 6년의 시간을 날리는 것이었다. 이 계산대로라면 도저히 도전할 수 없었다.
내가 줄일 수 있는 것은 학원비 뿐이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원을 못다닌다는 말은 못하고, 학원다니는게 너무 싫으니 학교수업만으로 합격할 수 없냐고 선배들한테 물었더니 모두가 병 신이라고 비웃었다. 그래도 일단 도전해볼 수 밖에 없었다.
복학하자마자 과외도 줄이고 학교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다. 1학년 2학기는 교양이 많아서 법학은 3개 밖에 없었지만. 3개 다 압도적으로 A+ 받았다. 그리고 바로 사법시험 기출문제를 사다가 내가 들었던 범위만큼 풀어봤다. 20%정도 맞았던것 같다. 시험은 동쪽에서 나오고, 학교 수업은 북쪽으로 가는 느낌이랄까? 아예 반대는 아니지만 시험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쿨하게 포기했다. 경영대로 전과했다. 어머니에게는 돈이없어서 고시준비 못한다는 이야기는 못하고, 해보니 법학이 안 맞는것 같다. 경영학이 재밌는것 같아서 경영학과로 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쉬워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걱정만 하셨다. 쿨하게 포기했지만 가끔 울컥울컥 했다.
7. 취업
생각보다 경영학이 더 재밌었다. 법대교수는 다들 별로 수업에 의지가 없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사시에 도움이 안되었거든. 30분 늦게 들어와서 30분 일찍 끝내주는 교수도 있었고. 아예 책 낭송회를 하는 교수도 있었고.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 학기에 120명 듣는 수업에 출석을 안 부른다고 하니 시험보는 날 빼고 8명만 수업들었다는 이야기는 레전드였다. 경영학과는 교수도 열성적이었고, 학생도 열심히였다. 교수는 경영대에서 사시준비하는 애들도 있는데, 너는 나이도 어린데 법대에서 경영학과로 오냐고 의아해 하는 교수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경영학이 더 좋아서요라고 대답하고 공부했다. 성적도 잘 나왔다. 한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칼졸업하고 바로 대기업에 취직되었다.
8. 회사생활과 시작되는 빚 청산
본사근무였는데 전공이 회계라서 회계팀으로 지원했는데 인사팀으로 넣어줬다. 월급이 많이 좋았다. 즐거웠다. 엄마가 버는 200만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을 생활비로 쓰고, 내 돈은 모두 빚청산을 시작했다. 빚이 생긴지 거의 10년만에 원금상환이 시작되었다. 처음 빚을 갚기 시작하니 뿌듯하드라. 언제 다 갚을지는 기약도 없었지만 이대로 갚아가면 금방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도 살얼음 끼는 떡볶이 집에서 벗어나서 방이 두개 있는 월세방으로 옮겼다. 어머니가 너무 기뻐하셨다.
인사팀에서 2년정도 근무하고 있을 때 쯤? 자판기 앞에서 커피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감사팀 부장님이 오시더라. 그리고 서류를 좀 주시더니 읽어보라더니 여러가지 물어보시더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냥 웃으면서 가시더라. 나는 저 양반이 일이 많아서 미쳤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주에 감사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부장님이 나를 맘에들어서 계속 옮겨달라고 했다고. 인사팀에 비해서 일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월급이 150정도 올랐다. 일이 많은 것보다 월급 더 주는게 신나서 더 열심히 일했다. 부장님도 이뻐하시고.
9. 사랑
경영대 전과하고 알게된 여후배가 있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고, 여후배는 마음을 받아줘서 사귀게 되었다. 가난한데 사랑 하는게 겁났다. 그 후배는 마음이 넓은 친구였다. 소박하고, 돈도 아껴쓰고. 비싼거 먹는다면 손이 벌벌벌 떨린다고 하였다. 데이트 비용도 그 친구가 더 많이 낼 때도 많았다. 집에서 싸온 떡볶이와 순대만 먹어도 행복해 하는 친구였다.
나도 취업하고 그 친구도 취업하고. 나는 벌써 5년차. 그 친구는 1년차. 30대 초반. 당연히 우리는 결혼할 줄 알았다.
어느날 그 친구가 차 사는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5년차인데 차 사는게 어떠냐고. 불편하지 않냐고. 집에 빚이 많아서 안 된다고 했다. 이 문제로 살짝 말다툼을 했다. 얼마나 빚이 많기에 중고차 하나 못사냐고 했다. 그 때 남은 빚이 1억 8천 정도. 나는 빚이 2억이나 있는데 무슨 차냐고 했다.
그 친구는 충격받은 듯 했다. 우리 집에 빚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지는 처음 들었나 보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친구는 헤어지자고 했다.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살면 우리는 결혼하고 행복할줄 알았다고 했다. 돈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사랑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빚이 많은지 몰랐다. 빨리 결혼하고 싶은데 빚을 갚고 집을 사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이해했다. 그 친구는 정말 소박한 친구였다. 돈이 없다고 사랑을 못하냐고 하던 친구였다. 결혼하면 매일 붙어 있으면 좋으니 집이 좁아도 좋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도 혼자 살기 외로우니 방 두개짜리 조그만 집에 들어가서 한방은 어머니 한방은 우리가 살자고 했었다. 너무나 순진하고 소박한 친구에게 내가 얹어줄 짐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주고. 헤어졌다. 헤어짐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부터 돌아서서 멀어지는 순간까지 그 친구는 길거리에서 창피하게도 너무나 울어댔지만. 이별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가 너무나 울어대는 통에 나는 눈물도 안 나왔다. 내가 그 친구를 차버리는 나쁜놈인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내가 나쁜놈이었지.
헤어지고 매일 술을 마셨다. 일이 끝나고 집에오면 팔다남은 식은 떡볶이에 소주를 마셔댔다. 퇴근하고는 매일 떡볶이에 소주였다. 그리고 매일 울었다.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전화도 많이 했다. 그 친구는 현명하게도 받지 않았다. 거의 한달 넘게 그랬던 것 같다.
그날도 퇴근하자마자 옷 벗고 술을 꺼냈다. 어머님이 방에 들어오셔서 앉았다. 같이 마시자고 했다. 혼자 마시고 싶다고 했는데 막무가내였다. 술을 한 두잔 먹고 어머니는 펑펑 울었다. 미안하다고.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니가 돈 많아서 공부하고 판사했어도 그년이 그랬을 거냐고. 다 못난 애미애비 만나서 그렇다고. 어머니를 달래다보니 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 다시 도전
판사했어도 그 애가 그랬을까. 하는 말에 솔직히 공감했다. 그 날로 여러가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빚은 있었지만 돈도 있었다. 대학생때 3년간 벌 돈 반년이면 벌었다. 빚은 일억 8천 통장에 5백만원.
그 때는 이미 다음해에 로스쿨이 개원하는 시기였다. 사법시험은 곧 없어지기로 결정되었다. 다시 알아보았다. 아직도 사시하던 동기들은 연락이 안되었고. 몇년전에 붙었다는 친구 다짜고짜 연락해서 술 마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물가는 조금 올랐다. 한달 100만원 정도? 이제는 3년만에 붙을 자신은 없었다. 인원도 줄고 있었다. 기한은 5년으로 잡고 계산했다. 로스쿨은 아직 1기 받기 전. 등록금은 천만원정도라고 했다. 3년이면 6천만원잡고 비교했다.
어머니께 나 회사 그만두고 사시나 로스쿨 갈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러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사시 준비하려고 했다. 법대를 일찍 그만둬서 사시보려면 있어야 하는 학점이수도 안되어 있었다. 독학사를 알아보고 있었다.
부장님(이때는 이사)하고 둘이서 저녁먹으면서 술먹다가 슬쩍 이런 생각하고 있다. 일년만 더 일해서 돈 모은 다음에 독학사하려고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부장님이 의아하다는 듯이.
사시하면 5년은 잡고 하는거 아냐? 그리고 로스쿨은 육천만원 더 들여서 3년뒤에 변호사 되고? 그러면 2년 일찍 변호사 되서 돈 일찍 버는게 이득아닌가? 변호사 하면 일년에 3천 못버나? 이러는 거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사실 5년도 장담할 수 없어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사시에 결국엔 붙는다고 해도, 5년 이상 걸리면 로스쿨이 이익이었다.
바로 독학사 때려치우고 LEET(로스쿨입학시험-대학교로치면 수능같은거)를 봤다. 성적은 별로 안 좋았다. S대랑 KY대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부장님이 물어봐서 떨어졌다 그러니까 웃으시더라. 그럼 사시하러 가냐고. 혹했지만 일단 돈을 모아야 해서 회사 다니면서 다시 LEET 준비했다.
사실 준비랄것도 없는 것이 적성검사라서 기출문제 풀어보는 정도?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서성한 중에 한 군데랑 인서울 한군데에 지원해서. 서성한 중에 한 곳은 면접에서 떨어지고 인서울은 붙었다.
퇴직하는 날 부장님께 따로 인사드렸더니 나중에 자기 이혼소송할 때는 공짜로 해달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헤어졌다.
11. 로스쿨생활
로스쿨은 생긴지 일년밖에 안되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통장에는 4천만원 좀 넘게 있었다. 빚은 여전히 1억 8천. 처음에는 그냥 내돈으로 등록금 내려고 했는데, 정부보증 학자금 대출이 있어서 2%로 빌려서 냈다. 2%로면 지금 있는 빚보다 싸니까 천만원 빚갚고 학자금대출 받는게 훨씬 나으니까. 하나은행에서 로스쿨 붙은 학생들은 마이너스 통장 2천만원짜리도 만들어준다고 했다.
마이너스 통장까지 다해야 6천만원정도 였다. 3년 등록금밖에 안되었다. 들어가기 전에 학원원장하고 있는 법대친구에게 부탁해서 고등학교 논술 선생으로 계약했다. 로스쿨이 생긴지 일년밖에 안되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주변에 로스쿨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대학원이니까 일하면서 다녀도 되는건지 알았던 거지.
예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학교가 빡셌고, 학원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었다. 남들은 9시에 나와서 10시까지는 기본으로 하는 것 같은데 나는 7시에 학원에 출근하니. 수업시간에 초 집중하고. 교수님말 한마디한마디 다 받아썼다. 그리고 중간고사를 봤는데. 너무 어려웠다. 다들 어렵다고 하길레 역시 법학은 어렵구나 하고 말았는데. 기말 끝나고 성적표가 나왔는데 내 뒤에 3명밖에 없었다.
사실 엄청 충격이었다. 30대 초반까지 단 한번도 받아본적 없는 성적이었거든. 그제서야 이게 미친짓이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등록금은 또 대출하면 되니 지금 있는 돈으로는 생활비만 하면 되니 학원은 여름방학까지만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학원은 이미 특강일정이랑 나와서 학원 일하느라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ㅠ.
다행히 우리집 수익이 적으니전액 장학금이 나와서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2학기부터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였다. 한학기가 통째로 뒤쳐져있으니 남들보다 두배로 해야했다. 매일 9시부터 11시까지 공부하고 집에갔다. 나이가 드니 몸이 못버티기 직전까지 공부했다. 워낙 공부하느라 몸이 망가져서 2학년 2학기 때는 스트레스로 인한 호르몬 분비가 망가져서 병원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호르몬 주사도 맞아야 했다. 다른 사람도 열심히 하니 쉽게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더니 효과가 있어서. 1학년 2학기때는 하위 15%, 2학년 1학기는 중하위권, 2학년 2학기는 중위권, 3학년 때는 중상위권, 상위권으로 성적이 나왔다.
3학년 끝나고 변호사시험도 무난하게 통과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2. 취직
변호사가 되고 나서 취직을 해야했지. 기준은 무조건 돈이 었어. 돈 많이 주는 곳만 골라서 넣었어. 그런데 어영부영 하나 둘 씩 떨어지더니 모두 떨어졌어. 3학년때 상위권이었던것만 생각하고 1,2 학년때 성적이 낮았던 것은 간과한거지. 돈 많이주는 곳만 골라서 지원하다보니 어느새 돈 적게주는 곳까지 마감이 다 되었더라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거지.
그 때 지방에서 변호사 급구한다는 로펌이 있어서 거기에 지원했다. 주로 기업관련 사무를 하는 곳이라서 회사 다닌 경력을 높게 쳐줬고 합격하게 되었어. 돈도 지방에다가 지방치고는 일이 많아서 월급도 높은 편이었어. 나는 가까스로 구제되었지.
13. 직장내 왕따
내가 입사한 회사는 대표3(실제로 일하는것은 2)명까지 포함해서 9명정도 변호사가 있는 회사야. 공단 근처에서 세 변호사가 갈라먹다가 합친지 조금 된 로펌이었지. 본래 회사자문과 회사에서 관련된 소송들이 주요 수익이었는데, 변호사들이 합치면서 다른 사건들도 많아지다 보니 급하게 변호사를 구한 것이었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들어가고 나서 왕따를 당했다. 대표님들은 딱히 그런것들 없었지만 나머지는 나만 로스쿨 출신이라고 무시했다. 사시 출신 두명과 함께 입사했는데. 다들 처음 일하는것이니 어리버리 타면 다른 친구들은 처음 일하니 그런것이라고 하고. 나는 로스쿨 출신이라서 그렇다는 식? 밥을 시켜야 되는데 깜박했다며 내 메뉴만 빼고 시킨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면전에서 무시하는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그렇다고 일을 못한것도 아니었다. 대표님이 칭찬할 정도로 일도 열심히하고 잘했는데, 그걸로 비꼬면서 잡스런 사건만 주고, 주요한 사건은 주지도 않았다. 변호사는 도제식이라고 할 정도로 선배들에게 일을 배우는게 중요한데,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제대로 된 소송은 손도 못 대도록 하니 서럽더라. 그러면서도 회계장부도 못보니 나에게 봐달라고 하는 것은 많고, 그러면서도 무시하고. 더럽고 치사해서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싶었던 적이 몇번씩 들었다.
대표님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나를 자문업무로 돌렸다. 다른 변호사들 다 자를 수는 없으니, 차라리 나를 자르는게 나았겠지. 그때부터 제대로 된 소송은 손도 못대고 자문위주로 일했다. 자문업무는 주로 계약된 회사에서 전화오면 받아서 자문해주는 것과, 회사들 돌아다니면서 서류들 보면서 미리 법률적 문제 있을것 같은 부분들 찝어주는 걸로 나뉜다. 원래 계약은 전자이고, 후자는 서비스 같은 느낌? 대부분 귀찮고 시간이 오래걸려서 자문전화 받는 것도 싫어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싫어하는데, 돌아다니는 것을 아예 서비스에서 정식만큼 비중을 늘리고 그걸 다 나한테 몰아버린거지.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어차피 회사 들어가봤자 무시만 당하니 자문다니는게 폼도 안나고 힘들기는 해도 더 보람찼거든. 어차피 로스쿨 나오면 6개월은 법적으로 개업도 못하니, 딱 일년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14. 역전
차타고 돌아다니면서 회사 서류들 보는일이 폼은 안나지만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회사다니면서 감사팀에 있을 때 맨날 했던 일이거든.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보면서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찾아간 회사 직원이 변호사님은 서류를 엄청 빨리보시네요? 다른 변호사님은 삼십분넘게 보고도 대충 보시던데, 엄청 꼼꼼히 보시는데도 십분이면 다 보시네요. 이런 이야기 몇번 듣고서야 내가 잘하는 것을 알았지. 다른 변호사 보다 두배정도 빨리 보고도 꼼꼼하니 회사 방문하는 횟수도 다른 변호사들보다 두배는 많아져서 회사에서 많이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계약 회사 중에서는 큰 편인 회사에 방문해서 서류를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거다. 브로커가 세군데나 끼어있는 수출계약인데. 감사팀에서 근무할때 경험에 비추어볼때 이 회사가 이런 내용으로 계약을 할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거기 과장님에게 좀 이상한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과장님이 설명해준거랑 미세하게 아다리가 안 맞는거다. 정말 선해한다면은 그렇게 읽을 수도 있는데, 찝찝하다고 할까? 그렇게 안 읽을 수도 있었거든. 거기다가 내용도 좀 이상한 것 같고. 과장님한테 관련된 서류들 다 달라고 그랬는데, 거의 한 박스인데 이미 이전에 다른 변호사님이 다 확인하고 가신거라고 궁시렁 대시더라. 그냥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 본다고 그러고. 책상하나 빌려서 아예 앉았다. 그리고 첫 서류부터 일년이 넘는 서류를 다 읽어보는데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찜찜함은 가중되더라고. 과장님하고 이야기할수록 뭔가 계속 아다리가 안 맞더라고. 거의 네다섯시간을 앉아서 살피고, 여기저기 내가 아는 인맥들 전화해서 확인하고 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전화가 와서 난리가 났다. 너 뭐하냐고. 왜 이미 검토 다 한것을 다 뒤집어 엎어서 있냐고. 과장님이 너 때문에 몇시간째 일을 못한다고 항의한다고. 빨리 정리하고 사과하고 들어오라고. 내가 이상한게 있어서 그렇다, 이전에 변호사님들 검토 제대로 한거냐고 막 그랬더니. 문제 없으면 너 와서 당장 사표쓰라고. 사장님도 나와서 얘 뭐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확실히 변호사가 와서 서류 다 내놓으라고 하고 다 뒤집어보고 여기저기 전화하고 있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그 동안 일도 못하니 짜증도 나지)
결국 직원 한명 남고 다 퇴근하고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자세히 얘기하면 안되니까. 대충 이야기하자면 브로커 한군데가 사기꾼. 한군데가 계약서 조항을 꼬아서 물건 만 챙기고 돈은 지급 안해도 책임은 모두 이 회사가 뒤집어 쓸 수 있게 되어 있었고. 감사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한테 부탁해보고, 최종 계약자 회사에 통화해보고 한 결과는 실제로 그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직원하고 사장님 찾아가서 이러이러하다. 전화해서 확인해보시라. 그 업체 물건하고 돈만 챙겨서 날아가려고 하고 있다. 며칠만 늦게 발견했어도 매출 50억 원어치 물건값 못 받고, 50억 손해배상해서 총 100억 이상 날아갈 것을 막았다.
이 사실을 알고 대표님들은 노발대발, 그 동안 OK했던 다른 변호사들에게 죽이네 살리네, 망하네 어쩌네 했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다른 사장님들한테 소문을 잘 내주시고 해서 그 로펌에 누구 변호사가 일을 잘한다. 덕분에 100억이나 막았다. 돈 주고 자문하는게 아깝지 않다라는 식으로 소문이 났다. 덕분에 새로 계약하는 회사가 엄청 늘어났다. 그리고 모든 회사에서 콕 찝어서 나에게 전화를 바꿔달라고 한다던가, 내가 바빠서 못 나가면 그 변호사님이 왜 안오셨나고 하는 식으로 명성이 올라갔다.
덕분에 회사내 지위도 올라갔고, 일년 끝났을 때 나가는 대신에 연봉 천오백이나 더 올려서 재계약 했다.
15. 변호사2년차
재계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문업무가 아니라 소송업무로 재배정 되었어. 처음에는 드디어 나도 제대로 된 소송한다고 좋아했어. 그런데 가만보니 그게 아니라 일부러 자문을 못하게 하는거더라고. 일하다가도 자문전화오면 내가 받게 할수도 있는데, 바쁘지 않은데도 내가 바쁘다면서 일부러 다른 변호사에게 받게 하고, 회사 돌아다니는 것도 못 가게 하더라고.
알고보니 변호사는 보통 3~5년 정도 일하면 개업을 하는데. (우리 회사도 4년차 정도가 제일 오래 근무한 사람이야) 내가 그만두고 이 지역에서 개업하면 나를 찾던 고객들이 다 나를 찾아갈까봐 한거지. 그래서 일부러 회사들하고 접촉을 끊어서 고객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게 하려는 거였어. 근데 어쩔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내부사정은 모르고 회사들에서는 나를 찾는데 우리 회사가 연결을 안 해준다고 불만이 많이 쌓였다. 다른 회사는 나를 보내주면서 왜 우리 회사는 이상한 변호사 보내주나 하고 생각한거지.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한 사장님이 금융상품 문제로 직접 자문전화 했는데, 받은 변호사가 자꾸 이해를 못하고 딴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직접 찾아온거다. 그 때 대표님들도 외출중이시고, 나는 한가해서 방에서 논문보고 있었거든. 그걸보고 사장님이 짜증이 나셨지. 바빠서 못 받는다고 하더니 사무실에 있구만 왜 안 받아서 돈만 날리게 하는지 (자문전화는 통화시간 만큼 돈이 드니까). 서류들 다 챙겨서 와서 나한테 자문해달라고 했는데. 나는 만나지 말라고 그랬으니 만날 수 있나. 아까 통화한 변호사가 나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자기가 해결해 드리겠다고 응접실로 데려가고, 나는 일하는척 하고 있었지. 그러고 한 30분 있었나.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내다봤더니 응접실이 난리가 나 있는거다. 사장님이 바쁘다니까 참고 그 변호사랑 이야기하는데, 금융상품이 복잡하니 서류를 봐도 이해를 계속 못하고 엄한 이야기만 하니 사장님이 화가나서 응접실에 화분들을 발로 차서 다 깨버린거다. 사장님은 화가나서 내가 여기다가 일년에 얼마를 내는데 내가 물로보이냐고 지금 이게 얼마짜린데 이상한 놈이나 붙여서 시간만 떼우냐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나랑 직원들, 변호사들 다 패닉에 빠져서. 일단 내가 내방으로 모시고 좀 진정시키고, 자문해드렸다. 사실 내가 봐도 엄청 복잡해서 왜 이걸 회계사가 아니라 변호사한테 가져왔나 싶더라고 그래도 성심성의껏 자문해드리고, 확실하지 않은건 내가 회계사한테 전화해서 알아봐드리고. 사장님도 화가 좀 풀려서 미안하다고 하고 가셨다.
외출했다가 돌아오신 대표님들은 사태파악하시고 한숨쉬시더라고. 그리고 나는 다시 자문업무쪽에 집중하도록 배정 되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신거지. 그리고 고객만족도도 높아져서, 다시는 자문하지말고 소송집중하라는 이야기는 안 하시더라고.
2년차 채워갈 때, 다른 변호사가 개업하면서 나한테 같이 일하자고 하드라. 월급은 2천만원 더 올려준다. 혹했다. 솔직하게 대표님한테 말씀 드렸다. 고민하고 있다고. 우리 회사는 수익의 70%가 자문업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든(자문비, 자문 계약한 회사 소송,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 소송,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 받은 사람 소송). 대표님들은 며칠 고민하시더니 월급 3천만원 더 올려서 재계약했다.
16. 빚청산
지금 변호사생활한지 2년 반정도 되었어. 그 동안 나는 꾸준히 돈 갚아나갔어. 얼마전에 빚 갚는거 이체하면서, 거의 다 갚았는데 얼마나 남았나 봤더니 딱 4천만원 남았더라고.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현재 어머니가 사시는 집 보증금 3천, 내 보증금 2천. 합치니 내 재산이 5천만원 있더라고. 그래서 빚 다 갚아버려도 천만원 남는 다는 생각에 변호사 합격하고 만든 마이너스 통장에서 4천만원 보내버렸어. 물론 빚에서 빚으로 바뀐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20년전 -3억에서 시작해서 드디어 그동안 족쇄처럼 따라다니던 빚을 다 떨어내었다는것 때문에 후련하고, 스스로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서 자랑하려고 가입했는데 가입하고 바로 글 못쓰길래 이제서야 자랑해)

이십년 넘게 열심히 살아서 전재산 천만원 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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